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64) 구원얻는 회개란 무엇인가(25) 히브리서 기자의 회개관(히6:1~8)_2020-09-21(월) https://youtu.be/AwzJhWmDcEU [혹은 https://tv.naver.com/v/15890532 ]

 

1. 히브리서는 어떤 책인가요?

  히브리서는 구원탈락 가능성을 언급하는 아주 중요한 책입니다. 신약성경 가운데서 구원탈락 가능성을 이렇게 강력하게 제시하는 책은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무려 다섯번에 걸쳐 구원탈락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1)히2:1~4  2)히3:7~4:13  3)히5:11~6:12  4)히10:26~31  5)히12:1~29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늘 회개와 관련지어서 살펴볼 말씀은 3번째와 4번째와 5번째의 말씀입니다. 

 

2. 히브리서 기자의 회개관의 첫 번째 특징은 무엇인가요?

  히브리서 기자는 세번째로 구원탈락가능성을 언급하면서(히5:11~6:12) 한 번 구원얻어 하늘의 능력까지 맛보고서도 타락한 자들은 회개가 불가능하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결국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경고합니다. 한 번 빛을 받았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고, 성령의 참여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선한 레마말씀과 장차 오려고 하는 시대의 능력들을 맛을 보았고 그리고 타락했던 자들은 다시 회개 안으로 새롭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 있으면서, 공개적으로 수치를 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의 첫 번째 회개관의 특징은 회개가 불가능한 것도 있다는 것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3. 히브리서 기자의 회개관의 두 번째 특징은 무엇인가요?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탈락에 관한 네번째 경고(히10:26~31)에서 진리의 온전한 지식을 받았지만 고의로 범죄할 경우에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구원에 관해 잘 모르는 초신자의 경우에는 혹 고의로 죄를 범한다고 할지라도 어느정도 감안이 되겠지만 이미 구원받아 진리의 온전한 지식을 안 상태에서 일부러 죄를 짓는 경우에는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남아있지 않으며, 그런 자들에게는 오직 두려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들을 태워버릴 맹렬한 불 곧 지옥불만이 남아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4. 히브리서 기자의 회개관의 세 번째 특징은 무엇인가요?

  히브리서 기자는 세번째로 회개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구원탈락의 가능성에 관한 다섯번째 경고(히12:1~29)에 나오는데, 에서의 뒤늦은 후회의 사례를 제시한 것입니다. 에서는 약 16세 때에 사냥하고 돌아오다가 너무 배가 고픈 상태에서 팥죽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장자권을 동생 야곱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75세가 되었을 때에는 장자의 축복을 받으려고 했는데, 이미 장자의 축복은 동생 야곱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아버지 이삭에게 자신에게도 축복을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예로 말했던 히브리서 기자는 한 마디로 회개는 너무 늦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지만 나중에 그것을 후회한 채 회개하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즉시 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회개할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든지 죄를 지었으면 즉시 자복하여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5. 히브리 기자의 회개관의 특징을 요약하면 어떤 것인가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미 구원받은 자라도 어떤 자들은 회개가 불가능할 수가 있음을 강력하게 경고함으로서 배도하지 말 것과 고의로 죄를 짓지 말 것 그리고 회개는 즉시 해야 한다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회개는 너무나 현저히 배도의 길을 걸어간 자들에게는 소용이 없으며,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도 일부러 죄를 범하는 자들에게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나중에 죽기 전에 해야지 하고 내버려두었다가는 것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고로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서 주님으로부터 떠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부러 죄를 지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죄를 지었다면 즉시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0년 09월 21일(월)

정병진목사

우리에게는 꼭 들어야할 복음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어린양의 사도 대표자인 베드로가 들려준 메시지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도 대표자인 바울이 전해준 메시지다. 이들은 복음을 전할 때에 과연 어떤 내용을 선포한 것일까? 과연 그들은 무엇이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했던 것인가? 그중에서도 오늘은 특별히 "베드로의 회개관"에 대해서 사도행전과 벧전후의 기록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020-09-20(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63) 구원얻는 회개란 무엇인가(24) 베드로의 회개관(벧후3:9)
https://youtu.be/mWW-KkeFl9g [혹은 https://tv.naver.com/v/15890431 ]

 

 

1. 들어가며

  베드로는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회개한 대표적인 인물이자 신약성경에서 회개의 첫번째 사례로 등장하는 인물이다(눅5:8).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의 기적을 통해 주님을 다시 만났고 자신의 죄인되심을 회개한 후에 사람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의 회개의 사건을 조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그가 복음을 전파하면서 외쳤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외쳤던 복음에서 회개의 관점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회개는 대체 어떤 의미였으며, 그는 과연 얼마나 회개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회개의 특징은 무엇이었는지를 정리해보도록 하자. 

 

2. 바울의 회개관은 어떠한가? 

  베드로의 회개관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우리는 바울의 회개관은 어떠했는지 잠깐 비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육체를 입으신 어린양의 12사도의 대표였지만,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도들의 대표자였기 때문이다. 사실 베드로와 사도바울의 부르심은 그 사역의 대상이 많이 달랐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사도바울은 무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있어서 회개관은 어떠했는가? 바울의 회개관에 대해서는 지난 두 번의 시간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것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믿음과 더불어 회개를 꼭 빼놓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나가서 전파했던 복음을 기록한 누가의 기록(사도행전)을 살펴보면, 그는 언제나 믿음과 더불어 회개를 같이 전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특별히 1차전도여행 때에 비디시아 안디옥(행13:23~39)과 루스드라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그는 믿음과 더불어 꼭 회개를 같이 외쳤으며, 2차전도여행 때에도 역시 데살로니가에서(행17:3,살전1:9) 그리고 아덴에서 믿음과 더불어 회개를 외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행17:24~31). 더욱이 3차전도여행 끝무렵에 사도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모아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는데, 그때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유익한 것은 어떤 것이든지 가르쳤으니,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언한 바 있다(행20:20~21)"고 했다. 또한 바울은 4차전도여행 직전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복음을 전파하는데, 그는 "내가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과 유다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고 전했다고 언급했다는 사실을 통해 바울의 복음전파를 보면 믿음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회개도 같이 외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행26:20).

  그리고 둘째, 바울은 회개가 사람이 구원받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고린도교회에게 써보내었던 두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요,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그렇다. 그는 사람이 구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로마에 보낸 편지에서 회개가 없이는 믿는 자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롬2:3~4).

  셋째, 바울은 이미 믿은 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성령의 인도함 안에는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서신을 읽어보면 '믿음'이라는 주제에 비해 '회개'가 상대적으로 더 적게 나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회개'라는 용어가 덜 나온다고 해서 그가 회개를 외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말씀이 증거해준다. 그런데 그의 말했던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는 사실 죄를 책망하여 회개하게 하는 회개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3. 베드로의 회개관의 특징 3가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육신을 입으셨던 예수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일평생을 복음전파에 힘썼던 사도베드로는 과연 회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으며, 복음전파에 과연 회개를 어느 정도 강조했던 것일까? 우리는 베드로가 전파했던 복음이 기록된 사도행전의 1장~12장의 기록과 아울러 그가 남긴 편지인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를 종합하여, 그의 회개관의 특징을 정리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3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베드로도 역시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믿음과 더불어 회개를 둘 다 언급했다는 것이다. 그가 최초로 메시지를 전파했던 오순절날 설교의 경우를 보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 그리고 그분이 왜 돌아가셨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것이 성령강림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전파했었다(행2:31~36). 곧 그것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가 바로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향하여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행2:38a)"이라고 권면했다. 그렇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전했던 것이다. 어디 사례가 그뿐이겠는가? 성전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자 곧 나면서 못걷게 된 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걷게 하자, 그 걸인을 알던 사람들이 솔로몬 행각에서 베드로에게 달려들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이 일은 우리 개인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된 일이 결코 아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 예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생명의 주님을 모르고 죽이고 말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이렇게 성하게 되었고 완전히 낫게 된 것이다. 고로 형제들아, 너희가 그때에는 알지 못하여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이는 사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예언한 대로 이뤄진 것이니(행3:13~18)."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아야 한다.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행3:19)" 그렇다. 베드로의 복음전파는 항상 이랬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전했으며, 또한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으려면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을 전했던 것이다. 

  둘째, 베드로도 역시 사도바울처럼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로 "회개"라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 항상 '믿음'과 더불어 '회개'를 동시에 선포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베드로는 이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을 믿는 것으로 죄사함이 일어난다고 말하지 않고, 회개해야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특히 베드로는 훗날 자신의 사역을 마치기 직전 기록한 베드로후서에서 예수님의 재림지연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그렇다.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이유는 그분이 일부러 더디 오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이 회개하여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이다.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도 역시 누구든지 회개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언급한 것이다. 

  셋째,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회개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과 은사를 받는 데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행2:38b). 베드로는 회개를 구원을 받기 위해 요소로만 언급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회개야말로 죄사함과 더불어서 죄사함을 받은 성도에게 성령의 선물을 받게 하는 통로가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산다고 해서 복이 거져 굴러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귀신들이 우리의 몸 속에 들어와 우거하고 있기에, 우리를 억압하고 우리에게 질병을 주고 우리의 앞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면 죄 때문에 우리를 얽어매고 있던 세력들이 떠나가게 된다. 그러면 저주가 떠나고 질병이나 사건사고에 휘말리지도 않을 뿐더러,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성령의 선물들을 받을 수도 있게 된다. 왜 예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영안이 열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성령의 선물들이 부어지지 아니하는지 아는가? 그것은 회개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해야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회개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한 번 한 것으로 그냥 만족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다. 그때 한 번 회개한 것이 계속해서 유효한 것이 아니다. 한 번의 회개가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를 모두 다 용서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들을 자백해야 한다(요일1:9).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할 때에라야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내게 들어온 가난과 저주와 질병을 몰아낼 수 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갖가지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가 있고 그것을 누리며 살 수가 있는 것이다. 

 

4. 나오며

  오늘날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위대한 두 사도들의 말씀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하나는 바울의 복음전파 행적이 기록된 사도행전 13~28장의 기록과 바울서신 13권의 말씀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베드로의 복음전파 행적이 기록된 사도행전 1~12장의 기록과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의 말씀들이 있다. 우리는 이와같은 성경책들로 인하여, 어린양12사도의 대표자인 베드로가 남긴 말씀과 부활하신 주님의 대표자인 바울이 남긴 말씀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과연 얼마나 회개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회개가 성령을 받고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얼마나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가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회개가 성령을 받는 것과 구원을 받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이외로 많다. 회개가 이렇게 약화된 것은 아마도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중세구원관을 뒤집고 신앙의 개혁을 부르짖느라고 오직 믿음만을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영향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라도 성경으로 돌아가야한다. 우리 신앙생활이나 구원의 표준은 성경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구원을 얻으러면 먼저는 우리의 구원의 주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중요 텍스트로 보아야 한다. 그것도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 주신 말씀과 부활하신 후의 주신 말씀, 둘 다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어서 사도들은 대체 어떻게 복음을 전파했으며, 거기에는 어떤 내용이 꼭 포함되어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가 찾아낸 바에 따르면, 회개가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구원받으러면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그리하여 가난과 질병과 저주에서도 벗어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의 선물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개함으로 우리가 지은 죄들을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목숨이 끝나는 날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회개가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이자 구원의 최종적인 관문이니 말이다.

 

2020년 09월 20일(주일)

정병진목사

바울은 회심했는가 아니면 회개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회심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는 회개하지는 않았단 말인가? 고로 우리는 "회심"과 "회개"가 무슨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가 회개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 어떻게 확인해 볼 수 있는가? 그리고 그의 회개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회개의 교훈들은 대체 어떤 것들이 있는가?

2020-09-20(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62) 바울의 회개가 주는 교훈(행14:19~23)
https://youtu.be/xfBww296ALU  [혹은 https://tv.naver.com/v/15890265 ]


 

1. 들어가며

  우리는 지난 주말 금요기도회 시간에 "바울의 회개관(https://dongtanms.kr/64193)"에 대해 살펴보았다. 오늘은 바울이 가르친 회개관이 아닌, 바울이 직접 경험했던 회개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바울은 정말 회개했던 자일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회개에 대해서는 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의 회심"에 대해서는 매우 자주 언급한다. 그것은 그가 다메섹도상에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회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바울은 회심만 했는가 아니면 그때 회개도 한 것인가? 만약 바울이 회개했다면 그는 대체 무슨 죄를 회개한 것일까? 그리고 그가 진실로 회개한 자였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으며, 우리가 그의 회개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2. 바울은 회심했는가 아니면 회개했는가?

  좀 전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바울이 회심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동의하고 인정한다. 하지만 바울이 회개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회심과 회개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사실 한글로 살펴 보면 이 두 단어는 그리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사용된 용례를 보면, 다음과 같은 4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첫째, '회심'이 일종의 개종을 의미한다면, '회개'는 어떤 삶과 상태로부터의 돌이킴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종교에서 기독교로 귀의하면 그를 회심했다고 말하지만, 그가 회개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회심'이 주로 단회적인 것을 가리킨다면, '회개'는 반복적인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사실 회심을 여러 번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의 다 한 번 경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종을 여러 번 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는 자신이 지은 죄들로부터 돌이키는 것이기에 자주 행하는 편에 속한다. 셋째, '회심'이 회개에다가 믿음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라면,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이키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누군가가 회심했다고 했을 때에는 그가 믿는 대상을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다가 참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을 때에 그는 회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낱낱의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때에는 회개했다고 말하는 것이지 회심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심'이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전환을 의미한다면, '회개'는 다시 반복해서 행하는 행위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돌이키게 된 것은 회심한 것인가 아니면 회개한 것인가? 그것은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 그는 그날 회심한 것이며 또한 회개를 시작한 것이다. 왜냐하면 회심은 믿는 대상까지 바꾸는 단회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그는 그날 분명히 회심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바울은 그날 회심했을 뿐만 아니라 일평생을 두고 회개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날 회개한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3. 바울이 회개한 사람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바울이 회개한 사람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그가 회개를 했다는 정황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는 죄사함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며, 구원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죄사함을 받았으며 또한 구원도 받았다. 그는 회개한 것이다. 회개의 결과가 곧 죄사함이며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사실 바울의 회개론을 살펴보면, 그는 회개가 사람이 구원받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증언했기 때문이다(고후7:10). 그래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던 자기가 구원받은 것에 너무나 감사하였기에, 바울은 자신을 죄인들 중에 괴수(첫째가는 이)라고 말했던 것이다(딤전1:15).

 

4. 바울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가?

  그렇다면 바울은 대체 무슨 죄를 지은 것인가? 그가 훗날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가 써보낸 옥중편지 중 하나인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자기를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빌3:5~6)". 그렇다. 그가 회심하기 전에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을 말할 때에, 그는 결코 율법의 의의 측면에서 볼 때 흠이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왜 그랬을까? 사실 그는 예루살렘교회의 일곱집사의 하나였던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율법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는 흠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에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는 반드시 돌로 쳐 죽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돌로 칠 때에는 성밖에서 치라고 되어 있다(레24:13~16).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규정대로 실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현장에서 그 일에 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때 스데반이 신성모독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스데반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스데반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믿고 따르는 예수는 선동가요, 미친 사상가요 거짓 선지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나사렛의 미치광이를 따라다니는 자는 돌로 쳐죽임을 받는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바울은 "스데반이 맞았고 자신은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가 신성모독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성모독죄를 지었으며, 그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핍박자와 폭행자로서 악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맨 나중에 막삭되지 못한 자처럼 아주 늦게 사도가 된 자신을 가리켜 바울은 "나는 사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라고 했다(고전14:9).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야말로 신성모독자요 핍박자와 폭행자였다고 고백하였던 것이다(딤전1:12~13). 

 

5. 바울은 어떻게 해서 회개하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회개하게 되었는가? 그가 다메섹에서 경험했던 것은 사실 회심이면서도 동시에 회개였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첫째,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신이라고 믿어왔던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사렛 예수가 거짓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낸 자를 몰라본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즉 바울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딤전3:16)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스데반이 신성모독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성모독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고 그것을 회개했다. 둘째, 그는 죄없는 의인이었던 스데반을 돌에 맞아 죽게 했다. 이는 그가 살인죄 내지는 살인교사죄를 지은 것을 의미한다. 그가 옳았고 자신이 틀렸던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날 다메섹도상에서 만난 그분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길을 가던 사울은 다메섹도상에서 홀연히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을 보게 된다. 그러자 그만 땅에 떨어지고 만다. 그때 그는 그 빛에서부터 나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것은 "사울아 사울와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하는 것이었다. 뜻밖의 음성을 들은 사울은 그분에게 물어보았다. "주여,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 한 마디의 말에 사울은 완전히 거꾸러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믿는 따르는 자들은 다 미친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기의 스승을 따르고 좋아하다보니, 이제는 환영을 보고서 미쳐서 돌아다니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했던 그분이 자기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메섹에 들어가서는 식음을 전폐하고 그 사건의 핵심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는 예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셨던 참 메시야였다는 것과,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믿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절대 다시 살아나거나 나타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로 그분은 그에게 더이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몰라보고 그를 능멸한 신성모독자가 다름이 아니라 자기자신이이라는 사실과 그것을 믿고 따랐던 스데반을 죽인 것이 곧 살인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6. 바울의 회개가 가르쳐주는 4가지 회개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바울의 다메섹 체험과 오늘 읽었던 루스드라에서 발생한 사건을 통하여 바울이 깨달았고 실천했던 회개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회개는 꼭 감정적인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울이 예수님이 누군지를 몰라보고 있다가 예수님을 직접 본 후에 커다란 충격를 받았다. 그러니 회개는 엄청났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가 자신의 죄를 통곡했다는 말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변화된 삶으로서 자신이 회개했다는 것을 말해주었으니, 그는 회개한 자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둘째, 회개는 주님께서 부탁하신 사명에 충성하는 것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행9:15). 그때 바울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 앞에서 거꾸러졌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그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것은 곧 주님을 증언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자신에게 부탁한 일에 충성하였다. 그것은 그가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일평생 그 일에 헌신했다. 셋째, 회개는 고난을 기쁨으로 맞이하면서 감사로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루스드라의 돌팔매질 사건이다. 바울은 성령의 지시를 받은후 바나바와 더불어 갈라디아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하러 떠난다. 그때 처음으로 도착했던 도시들이 바로 "비시디아의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더베"였다. 그런데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부터 유대인들은 바울을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그리고 바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고니온에서는 하마터면 그들이 던진 돌에 맞을 뻔하였다. 그런데 루스드라에 오니 그들이 그 성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그들에 의해 바울은 돌에 맞고 쓰러졌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날 돌에 찢어진 바울을 고쳐주시고 또 살려주시지 않으셨다면 바울은 그날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에게 돌에 던졌던 자들을 고소하지도 않았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저 살려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는 루스드라 성 안에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였고 그 다음날에는 일정을 따라 더베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제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고로 바울은 자신이 고난받는 것을 결코 불행한 일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는 것과 그러한 일을 당한 것에 대해 결코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동족으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죽음의 위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앙심을 품지 않았으며,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나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회개는 한 순간에만 행하는 일이 아니라 일평생을 두고 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회개가 어떤 사람에게는 한 순간 통회자복함으로 끝맺게 되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일평생에 회개를 실천하였으니, 그가 맡겨진 복음전파사역에에 충성한 것부터 시작하여, 핍박을 받아 죽는 현장에까지 가는 것도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회개를 한 순간의 감정적인 것으로만 취급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그에게는 과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빌립보에서는 복음을 전하다가 실컷 두들려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어도 그는 감옥 안에서 찬송을 부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7. 바울이 회개한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바울은 일평생 주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것과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받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고난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는 것을 "회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그러한 길을 걸어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일평생 복음을 전파하고 루스드라에서는 죽임까지 당하는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회개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결과는 무엇으로 나타났을까?

  첫째, 그는 자신의 머리가 깨져서 거의 죽는 일이 발생하였으며 성밖에 쓰레기처럼 버려졌지만 얼마 후 곧 깨어나 다시 살아났는데,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몸이 놀랍게 회복되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아마도 다른 사람 같았으면 적어도 한 달동안은 머리에서부터 온 몸이 퉁퉁 부어올라서 아마 움직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바로 당일에 혼자 일어날 수 있었고, 성 안으로 들어갔으며 그 다음날부터는 더베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그가 고난을 달게 받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선물을 안겨주었으니, 하나님께서 '디모데'를 제자로 주셨던 것이다. 디모데는 사실 루스드라 사람으로서 2차전도여행 때부터는 바울전도팀에 합류하여 바울을 일평생을 도운 목회자로서 세움받았다. 또한 선한 일꾼으로 쓰임받은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마지막으로 그의 충성과 고난의 회개는 결국 유럽 뿐만 아니라 미국와 한국에 이르까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주는 초석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 한 사람의 회개는 온 세상을 이렇게 바꿀 수가 있었던 것이다. 

 

8. 나오며

  우리는 바울의 회개를 통하여서, 사람이 회개하는 데에는 꼭 감정적인 것만을 회개라고 하지 아니하고, 행동으로 나타나는 회개도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진정한 회개는 한 순간으로 끝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평생을 걸쳐 시행된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회개라는 것이 통회자복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충성하면서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살펴보았다. 그렇다. 바울에게 있어서 고난은 하나의 회개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고난 중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었고, 감사할 수 있었으며 찬송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회개가 결국 기적을 낳게 되었고 사람을 바꾸게 되었으며,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떻게 회개하고 있는가? 한 번 한 순간에 회개했다고 회개는 다 했다고 하면서, 더이상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오지는 아니했던가? 아니다. 회개는 일평생에 걸쳐서 해야 할 성질의 것이지 한 순간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주여, 우리의 어리석음과 강퍅한 마음과 게을음을 용서하소서!

 

2020년 09월 20일(주일)

정병진목사

 

바울은 과연 회개를 외쳤을까?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서 회개에 대해 바울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가 현장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그는 어떤 말을 전했던 것일까? 우리에게 남겨진 그의 복음전파의 상황은 사도행전에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여러교회들과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13권) 속에도 남아있다. 그래서 오늘은 이런 자료들에 근거하여 바울의 회개관은 어떠했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020-09-18(금) 금요기도회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61) 구원얻는 회개란 무엇인가(22) 바울의 회개관은 어떠했나?(2)(행20:17~21)
https://youtu.be/cdcq76AI5v4  [혹은 https://tv.naver.com/v/15857874  ]

 

 

1. 들어가며

  바울의 회개관은 어떠했는가? 우리는 바울의 이신칭의론에 대해서는 들어봤어도 바울의 회개관에 대해서 잘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의 행위"와 대응되는 "믿음"이 강조되다보니, 정작 복음의 핵심내용인 믿음과 회개의 2가지 요소 가운데, 회개가 그만큼 소홀히 취급받고 있었기 때문다. 하지만 바울이 실제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 때에는 "오직 믿음"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회개"도 동시에 강조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에 과연 구원을 말할 때 오직 믿음만을 말했는지 아니면 동시에 회개의 중요성도 같이 언급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회개생활과 더불어 꼭 알아 두어야 할 "성령의 인도함받는 것"이 무엇인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중에서 오늘은 사도바울의 회개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그의 회개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으며, 사도들이 언급했던 회개관은 어떤 것인지를 종합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2. 바울은 회개관은 어떻게 요약될 수 있는가?

  바울이 외쳤던 회개에 관하여 우리는 성경의 모든 기록을 오늘 전부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은 그가 남긴 13권의 서신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복음을 전파한 장소에 함께 있었던 의사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도 살펴볼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현장에서 무엇을 전파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는 왜 서신서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강조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회개는 덜 강조했는지에 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바울의 13개의 서신들과 사도행전의 기록은 바울의 회개관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결론적으로 바울의 회개은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바울은 복음을 전파할 때 꼭 믿음과 더불어 동시에 회개를 같이 강조했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회개를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로 여겼으며, 회개없는 구원은 없으며, 믿는 자라도 회개없이는 심판날에 진노를 받게 될 것임을 경고했다는 것이다. 셋째, 그가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삶으로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을 강조했지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 속에는 성령의 책망에 따른 회개가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3. 바울의 회개관의 첫번째 특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바울의 첫번째 회개관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복음을 전파할 때마다, 그가 "무엇을 믿을 것인지"에 대해 전파했으며, 더불어 "모든 사람은 다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동시에 전파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복음전파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바울이 1차전도여행과 2차와 3차 그리고 로마전도여행 전에 있었던 복음전파 과정에서 무엇을 외쳤는지를 살펴보자. 

  첫째, 1차전도여행 중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있을 때에 바울은 믿음과 더불어 회개 2가지를 모두 함께 전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행13:23~39). 먼저 바울은 안디옥 사람들에게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던 구주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했다. 왜냐하면 비시디아 안디옥에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아주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야로 오신 분이었으며 그분은 결코 죽을 죄를 찾을 수 없었지만 유대인들에게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로 그를 살리시어 육체가 썩음을 당치 않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힘입어 믿는 모든 자는 다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라고 전파했다. 그리고 둘째는 그분이 오기 전에 세례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으며 예수께서 오신 이후에는 회개하는 자마다 예수님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음을 전파했던 것이다(행13:24,38)

  둘째, 1차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을 것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회개를 전파했던 것을 알 수 있다(행14:8~18). 왜냐하면 그곳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나면서 걷지 못하던 자를 걷게 한 일이 있었는데 그러자 제사장들이 나와서 바나바와 바울을 신으로 숭배하려고 했기에, 바울은 그들에게 자기들은 그들과 똑같이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진짜 섬겨야 할 분은 오직 천지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이며, 그분 이외에 다른 것을 섬기는 것으로부터 돌이켜야 한다는 것을 전파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루스드라에서는 창조주 하나님 자체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2차전도여행 때에도 바울은 믿음과 회개를 동시에 전파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2개의 교회를 살펴볼 것인데, 먼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한 바 있었는데, 그때 그가 전파하는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인 것을 전파했다. 그리고 바울은 그곳에서도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전파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 교회에 써 보낸 편지인 데살로니가전를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된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 지를 말하니"라고 언급하였기 때문다. 그리고 거의 불신자들로 가득찼던 아덴에 갔을 때에는 아덴 사람들을 향하여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바로 천지만물의 주재이시며, 그분은 결코 손으로 만든 집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행17:24~25a). 그리고 그분이야말로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친히 주시는 이시라고 했다(행17:25b). 그런데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것을 관대하게 보아주셨지만, 이제는 누구든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라"고 명하셨다는 것을 말했다. 또한 천하인간을 심판하실 분으로 정하신 약속된 사람이 있으니 그분이 곧 예수라고 증거하였다(행17:30~31). 여기서도 역시 믿음과 회개를 같이 전파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넷째, 바울은 3차전도여행 때에는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회개와 믿음을 가르쳤음을 말했던 것을 알 수 있다(행20:17~21). 바울은 그때에 3년동안이나 눈물로 자신이 에베소 성도들을 훈계했던 사실을 언급하면서 두란노서원에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했었노라고 말했다(행20:21). 그렇다. 이것들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사실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도 여전히 믿음과 회개를 동시에 가르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바울이 3차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는 왕 앞에서 믿음과 회개를 다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행26:19~23). 바울이 3차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때 그는 성난 유대인들에게 그만 붙들리고 말았다. 하지만 소요를 알아차린 천부장에 의해서 바울은 구출을 받는다. 그리고나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는데, 바울은 그때 자신이 다메섹에 만났던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소상하게 증거함과 동시에, 다메섹을 시작으로 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과 유대 온 땅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이방인에게 이르기까지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과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맺으라고 했다고 증언했다고 말했다(행26:20). 그리고 그가 사람들에게 "구약의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분이 그리스도이시며, 그가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전파했음을 증언하였다(행26:22b~23). 이렇듯 바울은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파할 때마다 꼭 믿음과 회개, 둘 다를 다 강조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던 것을 알 수 있다. 

 

4. 바울의 회개관의 두번째 특징은 무엇인가?

  바울의 회개관은 그가 썼던 서신서들에게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바울이 고린도교회와 로마교회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사람이 구원을 얻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가 회개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후7:10). 그리고 만약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라고 할지라도, 고집을 피우며 회개하는 않는 자에게는 심판의 그날에 하나님으로부터 진노가 쏟아질 것이라고 경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롬2:5).

고후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롬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5. 바울의 회개관의 세번째 특징은 무엇인가?

  그리고 바울이 기록으로 남겨놓은 그의 서신서들을 살펴보면, 회개보다는 훨씬 더 많이 "믿음"에 관해 많이 글을 남겼지만, 궁극적으로는 믿는 이들은 반드시 성령이 인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롬8장, 갈5장). 그러므로 바울의 서신서만을 가지고 연구하는 자들은 바울이 믿음에 비하여서 회개는 상대적으로 덜 강조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 편으로 옳은 지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 것은 바울이 비록 회개에 관한 글을 많이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가 말했던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 안에는 반드시 회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그가 이미 일차적으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할 것을 강조했지만 더불어, 믿는 자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곧 이미 구원받은 자들로 하여금 죄에 대해 회개할 것을 책망하시는 분이이시 때문에, 그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은 곧 그 안에 회개의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을 한 쪽으로 치우친 분으로만 이해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6. 나오며

  우리는 "바울"하면 곧바로 "오직 믿음" 내지는 "믿음"에 의한 "이신칭의"를 떠올릴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예수님 한 분만으로는 부족하고 율법의 행위들도 있어야 칭의도 얻고 구원도 얻는다는 유대율법주의적인 성도들을 향하여, 크게 책망하면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부터라는 을 강조했었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개혁자들의 모토가 되어버린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는 더욱더 믿는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지상주의를 낳는데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하지만 바울이 전파했던 복음전파의 실제현장을 살펴보면, 바울은 결코 "오직 믿음" 혹은 "이신칭의"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더불어 "회개"를 동시에 강조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참으로 놀랍기만하다. 이러한 놀라운 사실은 사도행전 13장부터 28장에 전반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특히 바울의 전도했던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 객관적으로 기록해보려고 했던 의사 누가의 사도행전의 기록은 더욱 더 놀랍기만하다. 그렇다. 바울은 결코 "오직 믿음"만 외친 사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믿음과 동시에 회개를 강조해서 전파했던 사도였던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회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전파했다 복음전파현장에서는 항상 "회개하라"는 외침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가 보낸 편지들 13권을 살펴보면, 바울은 사람이 구원을 얻는 데에 필수적으로 "회개"가 들어간다는 것을 말했다는 사실은 알 수가 있다. 이는 그가 얼마나 회개를 중요시했는지를 가늠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성령의 인도하심"도 실은 성도들 속에 내주하시어서 사람을 회개케하고 책망케하는 성령의 역사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고로 바울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강조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역시 동시에 회개도 강조했다는 의미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렇다. 바울의 오로지 믿음과 회개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성령의 사람이엇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회개"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것 없이는 사람이 결국 구원받을 수도 없으며, 이미 구원받은 자라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어서, 구원자의 영역에서 탈락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는 자라 할지라도 과연 자기가 회개생활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실로 오늘날에 들어와서 회개가 필요없는 것이며, 회개를 강조하지 않는 곳은 대부분 다 이단쪽에 가깝다. 이단치고 회개를 강조하시는 이단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따른 구원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회개가 없는 구원은 구원이 성립될 수도 없고, 이미 얻은 구원이라도 죽을 때에는 그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을 더욱 더 마음 속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회개복음을 전파하는데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20년 08월 19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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