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18)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17)(계1:10~18)_인자와 같은 이이신 예수님(2)_2022-05-19(목)

https://youtu.be/9etPkjjj2Cg  [혹은 https://tv.naver.com/v/26877915 ]

 

1.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있을 때에 영안에서 보았던 주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 그는 기도 중에 나팔소리 같은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다 보게 되는데 그때에 환상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치게 된다. 이때 그는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은 영락없이 구약시대에 다니엘이 보았던 하나님의 모습과 거의 똑같다(단7:9~10, 단10:5~6). 그분은 발에 끌리는 세마포 흰 옷을 입고 계셨으며,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다. 그리고 그의 머리와 털은 흰 양털과 눈처럼 희였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았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았다. 그리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았으며 그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들을 쥐고 계셨으며, 그의 입에서부터는 두 날을 가진 검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추는 것 같이 비추고 있었다(계1:13~14). 

 

2. 사도 요한에게 나타난 예수께서는 사도요한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사도 요한은 자기 앞에 나타난 예수님을 보자 그만 엎드러져 죽은 자와 같이 된다. 누구라도 죄많은 인간이 하나님을 보게 된다면 그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의 오른 손을 얹은 후에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계1:17-20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3. 사도 요한에게 보여졌던 예수님의 모습은 실제적으로 그분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사도 요한의 영의 눈에 보여진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께서 구약시대에 자신을 계시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의 모습이 구약시대에 다니엘이 보았던 모습과 거의 똑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모습이 들려주는 실제적인 속성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계1:13~14).

  첫째로, 그분은 한 때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으로서 천국에 계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자같은 이"이시기 때문이다. 둘째, 그분은 천국에서 대제사장이자 왕으로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발레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하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발에 끌리는 옷을 입으셨다는 것은 그분이 귀한 직분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말한다. 구약시대에 발에 끌리는 옷을 입은 신분의 소유자는 [대]제사장과 왕이었다(출28:8, 29:5). 그리고 그분이 정금으로 된 띠를 띠었다는 것은 그분이 대제사장이자 왕으로 일하신다는 의미다(요5:17). 셋째 그분은 영원하고 불변하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머리털이 희었는데 이는 다니엘서에 보면 "옛적부터 계신 이"의 모습으로서(단7:9), 그분이 죄가 없으며 순결하며 오랜 시간동안 그렇게 존재해왔음을 의미한다.  곧 그분의 무죄성과 영원성을 말하는 것이다. 넷째, 그분이 전지하고 전능하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눈은 불꽃같아서 모든 것을 감찰하고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단10:5~6). 다섯째 그분은 공의로운 심판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발이 빛난 주석 같기 때문이다. 이는 그분이 공의로 심판하시는 재판장이라는 뜻이다(단10:6). 여섯째, 그분은 위엄차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아서 쩌렁쩌렁하기 때문이다(겔43:2). 그리고 일곱째 그분은 교회에 세우신 당신의 종들을 끔찍히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오른손에 일곱 별들로 지칭된 일곱 교회들의 사자들(메시지 전달자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여덟째, 그분은 전쟁에 능한 용사이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이 선 검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계19:15). 아홉째, 그분은 원래 하나님이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얼굴에서는 해가 힘있게 비치듯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계시던 순간에도 한 번 그렇게 변형된 일이 있음을 통해서 확인이 된다(마17:2). 그때 예수님과 예수님의 옷은 사람이 빨래한 것보다 훨씬 더 희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속성적 측면에서도 하나님으로서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이다. 

 

4.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의 서두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셨는가?

  우리는 사도 요한이 보았고 또한 들었던 바 그 내용을 소아시아에 위치한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라고 했다는 주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계1:11). 그런데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의 서두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사도 요한이 보았던 모습으로 자신을 소개하시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어느 한 각각의 교회를 책망하고 심판하고 칭찬하고 있는 주님의 모습과 영락없이 일치하고 있다. 그래서 천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교회에게 보낸 편지의 서두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이들을 서로 비교해보면, 예수님의 모습과 교회가 당시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먼저 그분이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있는 분'이라는 말은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그리고 둘째로, '그의 불꽃 같은 눈과 그의 주석같은 발'이라는 표현은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인삿말 속에 나온다. 그리고 셋째로,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들을 쥐고 계시는 이'라는 표현은 에베소 교회와 사데 교회에게 주신 말씀 속에 들어있다. 그리고 넷째로, '그분의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는' 모습은 버가모 교회에게 주신 책망에 나온다. 그 표현들은 다 그 교회의 정황과 거의 맞아 떨어지고 있다. 

 

5. 소아시아에 일곱 교회들 중에서 칭찬만 들었던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소개된 예수님은 왜 인자같은 이의 모습 속에는 나오지 아니한가?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써 보내라고 했던 일곱 교회들을 돌아보지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의 모든 모습들이 7개 교회들의 서두 인삿말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외모에 대한 10가지 모습 이외에도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들려준 어떠한 말씀도 같이 기록해놓았다. 그것은  크게 2가지 문구인데, 이로헌 문구는 인자같은 이의 모습 속에는 나오지 않고, 그분의 말씀 속에 들어 있다. 그것은 이름하여, 예수님에 관한 자기소개의 문구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때 예수께서는 첫째로, 서머나 교회에게 자신은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이로서 전에 죽었었지만 현재는 살아있는 이라고 말씀하셨다(계1:18~19). 이 문구는 예수님의 외모에 대한 표현 속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 속에 나온다. 그리고 둘째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예수께서 주신 말씀은 예수께서 열쇠를 쥐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2가지 문구들은 칭찬과 더불어 책망도 같이 들었던 소아시아 다섯 교회(에베소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에는 안 나온다. 오직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들었던 2개 교회(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에 나온다. 그렇다. 외모가 사람에게는 정말 필요하고 중요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외모만을 추구하다 보면 인간은 어느새 타락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들려주신 본질적인 말씀에들에 100% 순종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그래야 칭찬만 들었던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05월 19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17)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16)(계1:10~18)_인자같은 이이신 예수님(1)_2022-05-18(수)

https://youtu.be/qo8ZXbMhiAY  [혹은 https://tv.naver.com/v/26877378 ]

 

1.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사도 요한이 주의 날에 영 안에 있게 되었을 때에 보았던 것은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시는 인자(사람의 아들)같은 분이었다(계1:12~13). 그런데 그분은 다름 아닌 주 예수님이셨다. 왜냐하면 그분의 모습은 영락없이 구약 성경에 나오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곧 여호와 하나님이셨으나(단7:9, 10:5~6, 12:6~7) 그분이 "나는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계1:18)"고 말씀하심으로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사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보았던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은 구약 시대에 나타난 여호와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날 사도 요한이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은 구약 시대에 여러 선지자들이 보았던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다 하겠다. 특히 다니엘이 첫 번째로 보았던 '네 짐승의 환상'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습과 그리고 네 번째로 보았던 '힛데겔 강가의 환상'에 나오는 사람 같은 신(하나님)의 모습과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사도 요한이 그날 무엇을 보았는지를 헬라어 원문으로 살펴보자. 

계1:13~16[헬라어 직역] 촛대들 한 가운데 안에, 발까지 이르는 옷을 이미 스스로 입은 채 있는, 가슴들 가까이에 금띠를 둘러서 맨 채 있는 인자(사람의 아들)(정관사 없음)와 닮은(유사한, 비슷한) 분을 [보았다]. 14 그런데 그의 머리와 털들은 양털(정관사없음)처럼 희였고, 눈처럼 희였다. 그리고 그의 눈들은 불의 불꽃과 같았다. 15 그리고 그의 발들은 풀무 안에서 빨갛게 달아오른 것 같은 놋쇠와 닮았다(비슷했다). 그리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았다. 16 그의 오른손 안에는 일곱 별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입으로부터 [밖으로] 두 날을 가진 날선 칼(검)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그의 능력 안에서 빛나고 있다.

 

2. 다니엘이 보았던 첫 번째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모습은 어떠한가?

  바벨론의 벨사살왕 원년(B.C.577년경)에 다니엘이 보았던 첫 번째 네 짐승의 환상 가운데 있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

단7:9~10 내가 보니 왕좌[들]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그렇다. 다니엘이 첫 번째의 네 짐승의 환상 가운데 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습이 영락없이 사도 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과 흡사하다(계20:4,11~15). 왜냐하면 첫째로, 이때 심판하는 좌석들이 하나님의 보좌 한 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보좌들이 곁에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의 보좌 옆에 있던 보좌들은 24보좌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계20:4). 고로 이것은 그때 다니엘이 하늘에서 펼쳐지고 있는 실제의 광경을 본 것이 아니라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심판하시는 장면을 미리 내다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보좌 위에 좌정해 계시는 분 곧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의 모습이 예수님과 똑같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았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세 시대에 그려 놓은 삼위일체의 그림을 보면, 보통 성부는 흰 머리카락을 하고 있고 성자는 검은 머리카락을 하고 있는데, 이는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다. 이는 구약의 여호와로 계시된 분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3. 다니엘에 보았던 네 번째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어 다니엘이 바사 왕 고레스 제3년(B.C.549년경)에 세이레(21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한 후에 보았던 하나님의 모습은 이렇다. 그때 다니엘은 강 이쪽 편에 가브리엘 천사장이 서 있고 강 저쪽 편에 미가엘 천사장이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강물 위쪽에 있는 세마포 옷을 입은 이에게 질문을 하고 답변을 듣는다(단12:5~7). 그런데 그 사람 같으신 신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그것은 다니엘 10:5~6에 이렇게 나온다. 

단10:5~6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 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그렇다. 다니엘이 본 사람 같이 생기신 분은 흰 세마포 옷을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순금 띠를 띠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번개빛처럼 비추고 있었고, 그의 눈은 횃불 같았으며,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았다. 그리고 그의 말소리는 많은 무리의 소리와도 같았다. 이는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인자같은 이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다니엘이 구약 시대에 지켜본 하나님의 모습이 곧 A.D.96년경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분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 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이 곧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가 죽고 부활하신 뒤 하늘에 오르시어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시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 왜 사도 요한은 자기가 보았던 분을 인자 같은 이라고 말했는가?

  사도 요한이 그날 밧모섬에서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은 '인자 같은 이'라고 하였다. 그럼, 왜 사도 요한은 그분을 '인자 같은 이'라고 표현한 것인가?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는 그것이 구약 성경에 이미 나온 표현이기 때문이다. 즉 다니엘이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앞에 인자 같은 이가 인도되는 모습을 보았으며, 또한 그에게 왕국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지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단7:13~14). 이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속죄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에 올라가 만왕의 왕으로 등극하는 것을 미리 내다 보았기 때문이다. 

단7:13~14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두 번째는 그날 사도 요한이 본 분은 과거 육체를 입으셨던 예수님과는 많이 다른 모습의 그분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사도 요한이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에 보았던 것은 그의 옷이 희어져서 그 옷으로부터 광채가 나되 세상에서 빨래하는 사람이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진 것을 본 적이 있다(막9:3). 하지만 예수님의 얼굴이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은 것을 보지는 못했는데, 그날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은 차마 얼굴을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 위엄에 눌려 엎드러져 벌벌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분은 사람인 듯 하나 사람이 아닌 상태의 그분을 가리켜 '인자 같은 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5. 인자 같은 이의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무엇인가?

  그런데 그날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보았던 예수님의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분이 과연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분은 한 마디로 '교회'에 관심이 깊으셨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분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기 전에 사도 요한에게 음성부터 들려주셨는데, 그것은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써 보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계1:11). 둘째로, 그날 예수께서는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닐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일곱 금촛대는 일곱 교회를 뜻한다(계1:20). 셋째로, 그분의 오른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었는데 그것은 일곱 별들이었기 때문이다(계1:16). 그런데 그 일곱 별들은 바로 일곱 교회의 사자(메세지 전달자)였다(계1:20). 그렇다. 천상에 계신 예수께서는 지금도 오로지 교회와 교회의 메시지 전달자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이기 때문이요, 그러한 교회의 메시지 전달자를 통하여 지금도 천국에 입성하는 성도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2022년 05월 18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16)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15)(계2:18)_전지하신 심판주의 관점에서_2022-05-17(화)

https://youtu.be/aMILxNMAcBY  [혹은 https://tv.naver.com/v/26876690 ]

 

1. 요한계시록에서 예수께서 전지하시다는 것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요한계시록에서 예수께서는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계시되고 있지만(계5:6) 그것과 동시에 그분은 보좌에 앉아 계신 이이기도 하신다(계20:11). 곧 그분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신 것이다(계1:8).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로서 스스로 계시며, 시간과 공간 밖에서 온 우주 만물을 주관하고 계신다. 요한계시록에서 한 분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로 계시되고 있는데, 이러한 주 하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에는 아들의 위치로서 재림하실 것이다(계1:7, 4:8, 19:11~16). 그런데 바로 이러한 예수께서 전지하신 심판주로서 소개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두아디라 교회에게 편지를 써 보내라고 하시는 분이시다(계2:18).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계2:18)". 그분의 눈이 불꽃같으며, 그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그분이 전지하신 분으로서 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2. "그의 눈이 불꽃같고 그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는 것은 어디에서 온 표현인가?

 A.D.95년경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어느 날 주님이 찾아오셨다. 그분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나타나신 분을 "인자같은 이"라고 표현했다(계1:13). 그분은 일곱 금촛대 사이 거닐고 계셨다. 사도 요한은 자기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듣고 몸을 돌이켰는데, 그분이 보였다. 그러자 사도 요한은 서 있는 그분의 10가지 모습을 기록하였는데, 그중에서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빛난 주석같다고 하였다(계1:14~15).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사도 요한이 처음 사용한 것이 아니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도 요한이 처음 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미 구약 시대 다니엘이 보았기 때문이다(B.C.536~530년경에). 그때 다니엘이 본 것은 장차 아들로 이 땅에 오시게 될 한 분 하나님을 본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니, 영락없이 사도 요한이 본 모습과 흡사다(단10:5~6).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단10:5~6)" 특히 다니엘이 본 그분의 눈은 횃불 같았고, 그의 발 빛난 놋과 같았다. 이는 사도 요한이 본 모습과 유사하다. 

 

3. "그의 눈이 불꽃같다"는 표현은 예수께서 어떤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의 눈이 불꽃같다"는 표현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두아디라 교회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드러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모든 상황을 다 감찰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께서는 이때 자신을 "나는 사람의 뜻(콩팥들=의지와 감정)과 마음(심장)을 [자세히] 살피고 있는 자들인 줄을 모든 교회들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 각자에게 너희의 행위들을 따라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계2:23). 결국 그의 눈이 불꽃같다는 말은 그분이 모든 것을 다 살피고 있다는 뜻이요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고 그 행위를 따라 심판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때 어떤 이들은 그분의 빛난 주석 같은 발에 의해 으깨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상을 받는 자는 주님 앞에서 감격하며 춤을 출 것이다. 

 

4. 예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우주 만물을 다 감찰하실 수가 있는가?

  예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어떻게 다 감찰하시고 계시는가?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이시니까 다 아시겠지 하면서 그냥 단순히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과 실제를 살펴보면, 예수께서 어떤 방식으로 온 우주 만물을 다 지켜보고 계시는지를 알 수가 있다. 즉 예수께서 온 우주를 감찰하시는 방식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에는 최소 3가지 방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낱낱의 천사들을 통해 감찰하시는 방식이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는 기록 천사가 달라붙기 때문이다(마18:10). 고로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80억 명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기록 천사가 다 달라붙어 있다. 그런데 이 천사들은 해가 질 무렵이 되면 하루의 일을 기록하여 천국에 보고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에 있는 기록 천사들이 그것을 받아서 행위책에 기록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네 생물에 의한 감시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네 생물은 온 몸에 앞뒤로 눈들이 가득한 존재로 나온다(계4:6,8). 피조물을 대표하는 이 네 생물은 자기의 안과 주위에 눈들을 가득히 가지고 있는데, 이 눈들은 일종의 CCD카메라와 같아서 80억 명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녹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도 이 네 생물의 감시 카를 비켜 갈 사람은 없다. 세 번째는 예수께서 당신의 영 성령을 보내어 이 땅의 모든 것을 감찰하는 방식이 있다. 왜냐하면 성령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일곱 영들'이 곧 어린양의 일곱 눈들이기 때문이다(계5:6). 사실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은 예수님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양에게 뿔들이 일곱이 있고, 눈들도 일곱이 있다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실제의 모습이 그러하다면 어린양은 괴물의 모습을 갖춘 양이 되고 말 것이다. 고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뿔들과 일곱 눈들을 가진 어린양을 해석할 때에, 이는 예수님에 대한 일종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여기에 나오는 '뿔'은 '권세'를 상징하고, '눈'은 '전지하심'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숫자 '일곱'은 이 땅의 완전수로서 어린양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완전하게 지켜보고 있음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5. 전지하신 그분을 왜 우리는 주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전지하신 자신을 가리켜 "불꽃같은 눈을 가진 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런데 그분은 3종류의 방식으로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 즉 예수께서는 이땅에 보냄을 받은 천사들 그리고 하늘에 있는 네 생물을 통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들인 성령을 통하여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못 아실 것이 없는 분이신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요한계시록 5:6에 나와 있는 어린양의 일곱 눈들이라는 것은 곧 스가랴 선지자가 말한 여호의 일곱 눈들과 동일하다는 것이다(계14:10). 스가랴 선지자가 환상 중에 보았던 것은 일곱 금등대(촛대)위에 있는 일곱 등잔불이었는데, 그것은 이 땅에서 두루 다니고 있는 여호와의 일곱 영들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성령이 어린양의 일곱 눈들을 가리킨다는 것과 이것이 구약 시대에는 여호와의 일곱 눈들로 표현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슥14:10).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구약의 여호와가 한 분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것과, 신약의 예수님이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구약의 여호와가 신약의 예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의 예수님을 가리켜 전지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고로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으로 주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가 있다. 

 

2022년 05월 17일(화)

정병진목사

 

성도들이 엎드려 경배할 유일한 대상은 누구인가?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찬송과 영광을 가로채려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사탄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로서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는 자들을 가만 두지 않는다. 핍박하여 때로는 죽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시기가 곧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때에 우리 성도들은 어떤 자세로 그들의 핍박에 대비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자들을 이기는 자들이 받게 될 보상은 대체 무엇인가? 오늘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배 관련 말씀을 통해 왜 우리가 예수님만을 찬송하고 그분만을 경배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022-05-15(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요한계시록의 기독론(15)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계5:6~14)_성도가 예배를 바칠 유일한 대상은 누군가?_2022-05-15(주일)

https://youtu.be/78PrmrpXy04 [혹은 https://tv.naver.com/v/26829855 ]

1. 들어가며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이유들을 계속해서 살펴보았다. 그것의 핵심은 어린양이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양에게도 주 하나님에 대한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상에서 예배하고 있는 존재들 곧 네 생물과 25장로들 그리고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천상의 피조물들은 현재 천국에서 어떻게 예배하고 있을까? 이들이 어린양에게 올려드리고 있는 찬송과 경배는 과연 어떤 것이며 또한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가? 그리고 현재 이 지상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은 과연 누구에게 이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찬송과 경배를 가로채려고 하는 새력들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은 대체 누구이며, 무슨 이유 때문에 한 분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그 찬송과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는가? 그리고 마지막 때가 되면 우리 성도들도 누구를 경배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환난의 때가 올 것인데 그때에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며, 그러한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한 분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경배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하나님을 사칭하는 세력이 누군지를 살펴보고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성도들은 과연 누구에게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하는가?

  성도들은 천국에서 과연 누구에게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하는가? 즉 천상의 예배에서 우리가 예배드릴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천상에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시다(계7:11). 우리는 천상에 계신 하나님과 엎드려 경배를 드려야 한다. 이것은 비단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곧 피조물의 대표인 네 생물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로서 24장로들 그리고 144,000명 되는 보좌에 앉은 이들과 구원받은 허다한 무리들이 찬송과 경배를 드리며,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피조물까지 다 경배를 드린다. 이중에서 네 생물을 제외하고는 전부다 엎드려 경배를 드린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찬송과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에 대해 어떤 표현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총 4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첫째는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찬송과 경배를 드린다(계4:10). 이 보좌는 하나님 한 분의 보좌로서 통치의 보좌와 심판의 보좌이다. 둘째는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에게 찬송과 경배를 드린다(계4:10). 하나님만이 항상 살아계시며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셋째는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이'에게 찬송과 경배를 드린다(계14:7). 그분만이 창조주이시며 창조된 피조물을 다스리고 섭리하시고 인도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어린양'에게 찬송과 경배를 드린다(계5:8,14). 어린양께서는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 

 

3. 예배와 관련하여 어린양께서 주 하나님이신 증거는 대체 무엇인가?

  예배와 관련하여 어린양께서 주 하나님이신 증거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분은 한 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찬송과 경배를 동일하게 받고 계시기 때문이다. 만약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오직 주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찬송과 경배를 받으실 리가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7장 11~12을 보면, 모든 천사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천사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7가지의 흠숭을 드린다. 그것은 찬송과 영광, 지혜와 감사, 존귀와 권능(능력) 그리고 힘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천만만의 동일한 천사들이 어린양에게도 7가지 흠숭을 드리는 있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5:12). 그렇다. 순서만 바뀌었을뿐 하나님께 드리는 7가지 흠숭을 동일하게 어린양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린양이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신성모독을 하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상에서 예배드리는 존재들이 예수님께 드리는 7가지 흠숭을 통하여 어린양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가 있다. 

 

4. 하나님께 바쳐야할 찬송과 경배를 가로채려는 세력은 대체 누구인가?

  그런데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바쳐야할 흠숭 곧 찬송과 경배를 가로채려는 세력들이 있음을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 세력은 바로 용이다. 이 '용'은 타락한 천사장이었던 루시퍼로서, 옛 뱀이요 마귀와 사탄이요 온 천하를 꾀는 자다. 그런데 이 놈이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찬송과 경배를 자신도 받으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그 놈은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예수님에게 내어드리고 예수님을 가둬놓으려했던 무저갱에 지금 자신이 갇혀 있다. 그는 [천국에서의] 천년왕국이 끝나는 어느 시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잠깐 내어보내는 시기가 올 때까지 무저갱에 갇혀 지낼 것이다(계20:2). 그렇지만 그놈은 자신이 찬송과 경배를 받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대신하여 2인자를 내보내서 그의 일을 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첫째 짐승'이다(계13:1~10). 이 짐승은 이 세상 제국의 왕들 속에 들어가서 역사하는 영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제국의 왕들이 이 짐승을 대신하여 경배를 받으려하고 또한 경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 세력을 사도요한은 여러 짐승을 가지고 알려주었는데, 그 짐승은 사자와 곰이요, 표범과 열뿔 가진 무서운 짐승이다(계13:1~3). 이러한 짐승은 사실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짐승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다니엘 7장에서 짐승은 각각 '사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요, '곰'은 메대와 파사의 다리오와 고레스 왕이요, '표범'은 그리이스(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을 가리킨다. 그리고 무서운 열뿔 가진 짐승은 앞에서 출현했던 짐승들의 특징과 더불어 무서운 이빨을 지녔는데, 이는 로마제국의 왕들로서 당시에는 네로 황제나 도미시안 황제를 가리킨다. 

  그런데 문제는 사탄을 대신하여 바다에서 올라운 첫째 짐승(=적그리스도)이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난 때에 발생한다. 그때가 되면 땅에서 올라오는 두 뿔 가진 어린양같은 [둘째]짐승(=거짓선지자)이 용처럼 말을 하고 첫째 짐승의 권세를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미혹하여 첫째 짐승에게 경배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첫째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하게 한 후 그 우상에게 경배하게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첫째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는 몇 이든지 다 죽이는데, 이때 짐승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에게 표(짐승의 표=666)를 준다. 그러므로 이 표를 받지 못한 자는 매매를 못해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은 로마황제 시대에도 있었고 장차 앞의 어느 날에도 있을 것이다. 

 

5. 왜 성도들은 짐승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왜 [첫째]짐승과 그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를 범하는 죄가 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십계명의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1~2계명을 어기는 자를 죄가 없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이 죄를 범하는 자에게는 자손 3~4대가 그 죄값을 물리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정도는 우상숭배의 죄는 큰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에게 어떤 벌을 내리신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그것은 크게 3가지다. 첫째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는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져 세세토록 고난을 받게 되고 밤낮으로 쉼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계14:9~11). 그렇다.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는 자는 영원한 고통이라는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존재에게 경배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는 일곱대접심판이 내려지는 마지막 환난의 시기에 이 땅에 남겨지기 때문이다(계16장). 요한계시록에서는 말세(예수님의 승천이후 재림때까지)에 되어서 일어날 일을 일곱 가지 인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마지막 일곱번째 인은 또다시 일곱 나팔 재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곱 나팔 재앙은 그가 그리스도인이든지 비그리스도이든지 상관없이 다 받는 것이지만, 일곱 나팔 재앙들 중에서 마지막 일곱번째 나팔 재앙인 일곱 개의 대접 재앙들을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휴거되기 때문에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 중에 누가 이 땅에 남겨지는가? 그것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이 남겨진다. 물론 이때 남겨지는 기간은 아주 짧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단코 그때 남겨져서는 아니 된다. 그렇게 하려면 목숨 걸고 짐승과 그의 표를 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만약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고 표를 받는 자는 일곱번째 나팔 재앙 곧 일곱가지 대접 재앙들을 고스란히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첫째 대접 재앙 때에 싸인으로서 짐승의 표를 받고 그것의 우상을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재앙들은 일곱 대접 재앙이 끝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고 짐승을 경배하지 말아야 하고,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6. 우리 성도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이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키면서 오직 하나님께만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하는 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3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그러한 자들만이 천국의 유리바닷가에 서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계15:2~4). 다시 말해, 짐승과 짐승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나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러한 자들만이 일곱 대접 심판들을 받기 직전에 하늘에 휴거되어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계15:1~8). 셋째, 이러한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면 왕노릇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계20:4). 이러한 자들이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먼저 천국에 들어가서 거기서 천년동안(주님의 승천후 재림전까지 하늘에서의 시간) 왕노릇할 것이요, 만약 주님의 재림시에 부활체가 되어 주님을 맞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왕노릇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찬송과 경배를 올리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7. 나오며

  사실 천국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에 천국에 들어간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육신의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는 말이다. 그렇다고 악한 사탄 마귀가 우리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은 자기들은 영원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지만, 그러한 영광스러운 저 천국을 자기보다 능력이 적은 인간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냥 놔 둘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시기질투의 화신들이다. 자기가 못 들어간다면 들어가는 이들이라도 잘 다독거려야 배려해 주는 작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정반대다. 자기가 못 들어가는 그곳을 다른 이가 들어가려는 것을 배 아파한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이 이 세상에 살아갈 때에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악한 영들과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들에 의해 핍박을 우리 성도들은 인내로서 잘 이겨내야 한다(계13:7~10). 이들은 한사코 자기들의 경배를 받기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예배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이들을 싫어한다. 그러나 공생애 기간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까지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다. 그들의 핍박을 너무 염려할 필요가 있다. 핍박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이신 주 예수님만 경배하고 그분에게만 찬송을 올려드리자. 이것이 천국백성이 이 땅에서 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이니까. 

 

2022년 05월 15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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