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강해보완(38)]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 하나님은 대체 누구신가?(계1:4~6)_2023-11-29(수)

https://youtu.be/uzk53lWEm4Q [또는 https://tv.naver.com/v/45415347]

 

1. 들어가며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은 이전에 알려진 성령과 어떤 차이를 보이고 있을까?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하여,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에 대해 알 수가 있는데, 성령의 인격과 역할에 대해서는 그분에 대한 명칭에서부터 드러난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령의 명칭을 '일곱 영들', '일곱 등불들', '일곱 눈들'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 사용하고 있는 성령의 명칭과 이전에 사용된 명칭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2. 구약시대에 사용된 성령의 명칭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사용된 성령의 명칭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구약시대에 사용된 성령의 명칭을 순서대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영'이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이름이 드디어 '여호와'라고 계시된 이후에는 '여호와의 영'이라고도 불렸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불려진 성령의 명칭 중에서 가장 특별하고도 설명이 가미된 명칭은 이사야 11:2에 나온다. 

사11: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렇다. 구약시대에 사용된 성령의 명칭은 하나님의 영이자 여호와의 영인데, 사람들 위에 내려가셔 그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주고 그리하여 어떤 직임을 수행할 수 있게 하셨다.

 

3. 신약시대에 사용된 성령의 명칭은 무엇인가?

  신약시대에 사용된 성령은 경륜적인 영으로 불렸다. 다시 말해 구약시대에 비해 신약시대에 들어서자 아들이 출현하셨기 때문이다. 구약시대까지는 아들의 출현이 공식화된 때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 거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 곧 자신을 '여호와'라고 계시하는 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품으신 만세 전 계획에 따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셨다. 그리고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다. 그러자 이제부터 성령의 명칭이 아주 다양하게 불리게 되었다.

  첫째로, 먼저는 하나님과 관련하여서는 구약시대처럼 '하나님의 영'이 있으며, 예수님의 탄생 이후에는 '아버지의 영'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여호와의 영'이라는 명칭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주의 영'이라고 나온다. 

  둘째로, 아들과 관련하여는 '아들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 등이 있다.

  셋째로, 기타 다른 명칭으로는, '생명주는 영'(고전15:45)이라는 명칭도 있다. 그리고 사도 요한만 사용하였던 '보혜사'라는 명칭도 있고(요14:16, 15:26, 16:7), '진리의 영'이라는 명칭도 있다(요14:17, 15:26, 16:13).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듭난 사람의 영과 연합된 하나님의 영은 '그 영'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러한 명칭은 로마서 8장에 잘 나타나 있다(롬8:5). 이때 '그 영'이라는 말은 사람의 영 속에 성령께서 들어와서 거하실 때에 불려지는 영을 가리킨다. 이 영은 이 세상이 끝날까지 떠나가지 않으신다. 

롬8:5~6[개역개정]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그영)을 따르는 자는 영(그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그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8:5~6[표준새번역]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6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4.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성령에 대한 명칭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요한계시록에 사용되고 있는 성령에 대한 명칭은 크게 2가지다. 하나는 '그 영'이고 또 하나는 다른 특별한 명칭들이다. '그 영'은 사람과 연합된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데, 예수께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말씀하신 후에 꼭 부가적으로 신신당부하는 말씀에 나온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계2:7,11,17,29, 3:6,13,33). 참고로 요한계시록에는 거룩한 영으로서 '성령'이라는 명칭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그 영)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그럼 요한계시록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성령의 특별한 명칭은 무엇인가? 그것은 3가지다.

  첫째는 '일곱 영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명칭에는 또 다시 2가지가 있으니, '하나님의 일곱 영들'(계3:1, 4:5, 5:6) 혹은 '그분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이 있다(계4:5, 5:6)

  둘째는 '일곱 등불'이 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일곱 등불이다(계4:5, 5:6).

  셋째, '일곱 눈들'이 있다. 이것은 어린양의 일곱 눈들을 가리킨다(계5:6).

 

5. 요한계시록이 들려주는 성령의 명칭에 대한 전반적인 개념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이 들려주는 성령의 명칭에 대한 전반적인 개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구약시대부터 물려받은 '하나님의 영'이라는 관점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일곱 영일지라도 그 영이 '하나님의 일곱 영들'이기 때문이다. 둘째, 계속해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개념이 도입되는 영 곧 경륜적인 영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과 거듭난 사람의 영이 하나로 결합된 영인 '그 영'이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최소 10번 이상 사용되었다. 고로 이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등장하는 표현을 사도 요한도 그대로 사용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요한계시록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특별한 표현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하나님의 일곱 영들'과 '일곱 등들'과 '어린양의 일곱 눈들'이 있다. 이 부분에서 대해서는 그 내용들이 아주 중요한 것이니만큼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2023년 11월 29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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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계시록강해보완(37)] 요한계시록의 성부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가?(계1:4~6)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a5OmhPyn41w [또는 https://tv.naver.com/v/45415334]

 

1. 들어가며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예언서이자 계시서이다. 그러므로 서두에는 인사말이 나온다. 그리고 그 인사말 안에는 어떤 기원이 나오는데, 그것은 보통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것이다(롬1:7, 고전1:3, 고후1:2, 갈1:3, 엡1:2, 빌1:2). 그런데 사도 요한도 이 편지를 통해서 일곱 교회에게 역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데, 다른 서신서와는 달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형식을 가지고 기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묘사된 성부에 대한 호칭이 특별하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칭호인가?

 

2. 요한계시록에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몇 번 나오는가?

  요한계시록에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가 딱 세 번 나온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계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계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4: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에 대한 첫 번째 사용 용례는 이 편지의 인사말에서 성부 하나님에 대한 묘사로 쓰였다(계1:4). 그리고 두 번째는 '주 하나님이자 전능하신 이'에 대한 묘사로 쓰인 것이다(계1:8). 그리고 세 번째는 '보좌 위에 앉으신 이'에 대한 묘사이자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에 대한 묘사로 쓰였다(계4:8).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이 성부 하나님에 대한 묘사라고 생각하게 된다. 

 

3.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호칭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그것은 이것이 성부 하나님에 대한 묘사만으로 사용되는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와 비슷한 표현 속에도 드러나게 된다. 

  첫째, 요한계시록에서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에서 '장차 오실 이'가 빠져 있는 표현이 두 번 더 나오는데, 이때는 예수께서 재림하신 이후에 하나님에 대한 표현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즉 성부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신 이'라고 나올 때에는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첫째는 하나님께서 왕 노릇하신다는 표현과 함께 등장하고 있고(계11:17), 둘째는 일곱 대접심판 때에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심판하신다는 표현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천국에서 왕 노릇하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 아니라 주 예수님이시며(계17:14, 계19:16), 심판하시는 분도 성부 하나님이 아니라 주 예수님이시기 때문에(계20:11), 이 표현을 성부 하나님에 대한 단독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과 함께 등장하는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계:1:8, 4:8, 11:17, 15:3, 16:7, 19:6, 21:22)'라는 표현도 역시 성부 하나님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국의 왕으로서(계15:3), 왕 노릇하시고(계11:17), 심판하시고(계16:7), 통치하신다(계19:6)는 것과 함께 나오기 때문에, 실제로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전능하신 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계16:14, 19:15).

  셋째,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과 함께 등장하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표현도 성부 하나님만을 지칭하는 호칭이 아니라(계1:8, 21:6, 22:13),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직접적인 표현과 함께 등장한다는 것이다(계22:13).

 

4.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결국 누구를 지칭하는 표현인가?

  결국에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묘사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표현해 주는 호칭이라는 것이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쓸 때에도 있었고, 그 전에도 있어 왔으며, 그때도 오고 계시는 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공중에 구름 속으로 오시니까,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장차 오실 이(지금도 오고 계시는 이)'가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성부와 성자를 따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즉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일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아들로 일하셨고,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 하나님으로 일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세 전부터 세 분으로 계셨다는 삼신론적 하나님의 정의에서 벗어나 홀로 한 분으로 존재하신 분이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 분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세 분은 과정을 거쳐서 존재하게 되신 것이 아니라 각각 동시에 존재하셨다는 점에서 양태론적 하나님의 정의도 틀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5. 영생이란 무엇인가?

  영생이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며 그리고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고로 아버지와 아들의 사역은 두 분의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동시에 행하시는 사역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아들을 낳으셨지만 그분도 역시 구약시대에는 영으로 존재하셨기에 아직 사람에게 보여지지는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2천 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시므로 하나님께서 드디어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고로 예수님은 아들의 표현이기는 하지만,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신론적인 다신론이 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소개하고 있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사9:6). 그리고 사도 바울이 바라본 성육신의 의미(딤전3:16)와 피흘리심에 대한 묘사(행20:28)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아들이 육신을 입지 않았다는 표현이 아니며, 아들이 피흘리시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고 한 분 하나님께서 피를 흘리셨다는 것으로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딤전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행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023년 11월 28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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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강해보완(36)]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인가?(계1:4~6)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clzFlLRagNU [또는 https://tv.naver.com/v/45415324]

 

1. 들어가며

  요한계시록은 계시의 책이자(계1:1), 예언의 책이며(계1:3), 편지의 책이다(계1:4).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장르는 적어도 3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편지의 책인 만큼 요한계시록은 서신서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발신자와 수신자를 언급하고,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인사말이 나오고 그리고 편지의 내용이 기록되며 마지막에 끝맺는 말로 마친다. 그런데 보통 서신서라면 들어 있는 서두의 인사말에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문구에 성부와 성자에 관한 언급이 들어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문구는 조금 독특하다. 왜냐하면 인사말 문구에 성령에 대한 언급이 나올 뿐만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 누군지에 관하여 나오는데, 그것이 조금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요한계시록의 인사말에 나오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좀더 알아보도록 하자.

 

2. 요한계시록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요한계시록은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책)를 중심으로 나눈다면, 두루마리를 떼기 전의 기사 부분인 1~5장 부분과 두루마리의 내용이 적힌 부분으로서 6~22장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6~22장의 뒷부분이 이 우주와 지구와 인간이 어떻게 끝을 맺게 되는지를 언급하고 있다면, 앞부분은 그것들을 만드신 하나님이 누군지를 중심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지, 구원받은 후 천국은 어떻게 들어가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요한계시록의 뒷부분을 공부해야 한다. 물론 중심 내용이 그렇다는 것이지 무를 자르듯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고로 이 우주와 지구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려면 우리는 이 책의 전반부인 1~6장을 공부해야 한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을 과연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3. 요한계시록이 제시하고 있는 아주 특별한 사실들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은 다른 성경책에 비해 우리를 아주 충격에 빠뜨릴만한 여러가지 사실들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우리가 기존에 교리적으로 알고 있었던 내용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다음의 3가지는 매우 충격적이다.

  첫째, 한 번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는 것이다(계3:5). 그것은 천국의 시민이 되었어도 결국 죽을 때에 새 예루살렘 성에 못 들어가게 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보좌가 단 한 개 뿐이라고 소개해 준다는 것이다(계22:1~3). 여기서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 및 어린양의 보좌'라고 나온다. 하나님의 보좌가 아버지의 보좌가 한 가운데 있으니 좌우에는 아들 및 성령의 보좌가 있을 것처럼 상상이 되겠지만, 하늘의 실제 상황은 이와 다르다. 아버지의 보좌에 아들이신 예수께서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상징적인 묘사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셋째,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아주 특별하다는 것이다. 보통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하나님 아버지'인데, 여기서는 그렇게 표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4. 인삿말에 등장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이 편지의 인삿말에 등장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 

계1:4~6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 아버지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이시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들 중에서 눈여겨 볼 것은 성부 하나님에 대한 묘사다. 왜냐하면 성부에 대한 묘사가 '하나님 아버지'로 나오지 않고,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묘사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묘사라기 보다는 한 분 하나님이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묘사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제도 계시는 이'는 성령 하나님에 해당하며, '아직도 계시는 이'는 성부 하나님에 해당하며, '지금도 오고 계시는 이'는 성자 예수님에게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가 성부 하나님에 대한 묘사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 표현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한 분 하나님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인가?

  한 분 하나님은 신구약성경이 공히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하나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셨으며(신6:9, 사453:10~11, 45:21~22),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막2:7, 10:18). 그렇다면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인가 아니면 삼위일체 하나님인가?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교회가 모여서 회의 끝에 교리적으로 만든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은 확실히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한 분이지만 삼위일체의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경륜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이미 삼위일체 방식으로 나타나신 이후에 태어나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방식으로 일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때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일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 상식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것과 충돌된다. 그중에 대표적인 살례가 바로 천지만물을 누가 창조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천지창조 사역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회의하여 하셨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그와 같이 말씀하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홀로(혼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할 뿐이다(사44:24). 다시 마랳,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적으로 일하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일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아들로 오셨고, 그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이 땅에 보내주셨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아서 살고 있다. 고로 지금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2023년 11월 27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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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요한계시록강해보완(35)] 주께서 바라시는 올바른 종말신앙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계22:20)_2023-11-24(금)

https://youtu.be/70S58NywJyU [또는 https://tv.naver.com/v/45413293]

 

 

1. 들어가며

  주님께서 바라시는 올바른 종말신앙은 과연 어떤 것일까? 어떤 사람은 종말론 이야기를 꺼내면 처음부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종말론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이단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요한계시록을 이용한 이단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다루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 가운데에 기록한 대로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1:3). 그렇다면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과연 어떤 종말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인가?

 

2. 올바르지 못한 종말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가 올바른 종말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맨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미리 알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허송세월하지 않고 그 날을 잘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바르지 못한 종말신앙은 그 사람을 잘못된 구원론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래서 결국에는 신앙도 망가지고 가정도 파괴시키며 사회의 질서까지 어지럽히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관 중에서도 바른 종말론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신앙이 바르지 못한 종말 신앙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다음의 3가지를 더욱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언제 주님이 오실 것인지만을 연구하다가 아까운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실 날은 우리가 알 수 없다. 때(크로노스: 흘러가는 시간)와 시기(카이로스: 의미있는 시간)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기 때문이다(행1:7). 그리고 그 날(day)과 그 때(hour)는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른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마24:36). 예수께서는 아무도 모르게 분명히 도둑같이 오실 것이다(마24:42~44). 그러므로 맨날 그 날짜와 그 시간을 연구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둘째, 너무나 살기가 힘들고 한 많은 이 세상, 빨리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종말신앙을 찾는 것이다. 세상 살기가 너무 힘들다. 녹록지 않다. 더욱이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악한 귀신들 때문에 삶이 팍팍하고 막힌다. 그리고 이러한 악한 영들이 많으면 이 세상을 헤쳐 나갈 용기마저 없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회개로 얼마든지 뚫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영적인 비밀을 모를 때에는 이 세상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종말신앙에 관한 것만 찾다가 그만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이 살기 힘들어하는 이세상을 빨리 없애 주기 위해 오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영광스러운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고, 주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셋째, 종말이 가까이 왔는데 일하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으냐고 하면서 기도만 하자고 생각하는 것이다. 종말이 다 되었다고 하는 생각이 너무나 지나쳐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끝났으니, 이제는 신부단장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오직 기도만 하는 분들이 더러 있다. 그리고 집안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오직 신부단장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가족을 부양할 것인가?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다고 하면서 일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에게, 조용히 일하여 자기의 양식을 먹으라고 말이다(살후3:10~12).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핑계로, 세상이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3. 주님께서는 언제 오신다고 말씀하셨는가?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꽃이자 핵심은 주님의 재림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오셔서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모든 것들에 대하여 보상을 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 진정한 하늘의 영웅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언제 오신다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갑자기 오신다고 하시면서 항상 그날을 대비하라고 하셨다. 즉 밤에 도둑같이 오신다는 것이다(살전5:2).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주님께서 언제 오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그때는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려퍼진 이후이겠지만 정확히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알 수가 없다. 사실 예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장차 오실 이'이시다. 그런데, 일곱 번째 나팔 소리와 함께 구름 속으로 오신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비밀에 감춰져 있다. 그동안 주님의 재림이 일곱 번째 나팔 불 때 일어날 것에 대해 깊이 상고해 보았다(계11:15). 즉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면, 그분의 종들인 선지자들에게 전했던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모든 비밀이 성취될 것이다(계10:7).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이 세상 나라가 주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며, 그분이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되실 것이다(계11:15). 그런데 놀랍게도 일곱째 나팔이 불려진 이후를 보니, 한 분이신 하나님의 칭호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계1:8, 4:8)"에서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는 이"로 바뀌어졌다는 사실이다(계11:7, 16:5). 일곱 번째 나팔 불 때에 주님께서 오신 것이다. 그러나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진 후, 어느 시점에 오실른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이는 요한계시록도 역시 함구하고 있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가 되면 주께서 먼저 구름 위에 앉으셔서 알곡을 추수하실 것이다(계14:14~16)(이것을 '공중강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조금 뒤에는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 및 휴거받은 성도들과 함께 악한 무리들을 처단하시기 위해 오실 것이다(계19:11~21)(이것을 '지상재림'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오실 주님을 기대하고 고대하고 준비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급하지 말아야할 것은 환난 후에 주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공중강림은 환난이 끝나는 그 날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전에 있는 어느날에 갑자기 도둑처럼 주님께서 공중에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4. 우리 성도들의 천국 입성은 언제 있는가? 미래에 어느 시점에 있을 일인가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바로 경험하게 될 일인가?

  아마도 종말신앙의 핵심은 천국 입성이 언제 있는가를 아는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그 시간이 먼 미래에 있을 일로 생각하는 자는 아직도 자신에게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는 세상 것을 좀더 즐기려고 하고 죄지은 것을 회개하는 일도 좀더 뒤로 미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국 입성은 내가 죽는 순간 그때 일어난다. 즉 내가 지금이라도 죽게 된다면 우리는 지금 심판받고 지금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들을 아는 자는 좀더 진지하게 천국을 준비하는 신앙인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가르쳐 주고 있는 성도들의 천국 입성 시간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의 우주적인 재림은 초대 교회 이후 계속해서 연기되어 왔고 개인적인 종말은 계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온다. 즉 성도들의 첫째 부활(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성도 개인이 죽어서 부활체를 입은 것)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주님의 재림의 시간은 내가 죽은 바로 그 시간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로 우리는 지금 죽으면 지금 심판받고 지금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인 종말 시간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은 개인적인 종말이 아니라 우주적인 종말의 때에만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니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님을 믿는 순간 그때부터 종말은 시작된 것이다. 그때에 자신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고, 그후부터는 천국에서 받을 상이 지금도 계산되어져서 주님께로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재료가 나의 천국집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우리의 아름다운 삶은 면류관으로 준비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심판은 장차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기보다는 지금 성취되고 있는 일이라고 보아야 한다. 

 

5. 주님께서 바라시는 올바른 종말신앙이란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진정 주님께서 바라시는 올바른 종말신앙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적어도 다음의 3가지 것에 주의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잘 실천하면 될 것으로 본다.

  첫째, 주님의 오실 날이 언제인지 날마다 계산하고만 있거나, 그날을 준비한다고 하면서 일도 하지 않고 경제활동을 중단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주님의 때에 오실 것이고, 그날까지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최선을 다해 감당하면서 그날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내가 예수님을 믿어 이미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라면 이제 이미 나에 대한 심판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심판은 먼 미래에 있을 일이 아니다. 지금 계산되어서 천국집의 재료가 올라가고 있고, 지금 천국에서 받을 면류관을 지금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천국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지위와 신분도 지금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죽으면 곧바로 천국으로 가서 지금까지의 행적을 확인받고 곧바로 천국집으로 들어가서 살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거둬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날마다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 얻을 지위와 신분 그리고 거기에서 받을 상급을 준비하며 사는 것이고, 내 신앙을 지켜야 하는 것 때문에 지금이라도 죽을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다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주님께 바치는 삶을 살아드리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한 가지 길은 주님과 천국복음 전파를 위해서 충성하는 일이요, 또 한 가지 길은 주님을 위해 내 목숨이라도 바치는 일이다. 우리 인생에 주님께 목숨을 바쳐야 할 순간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주님께 우리의 목숨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먼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시간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망설임 없이 주님께 내 목숨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어차피 한 번은 죽는 인간인데 주님을 위해 내 목숨을 드리는 것만큼 값지고 고귀한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허락해 주신다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열심히 해야 한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내가 살 집과 내가 쓸 면류관 그리고 천국에서 내가 가질 지위와 신분을 준비하라고 나에게 시간을 주셨기 때문이다. 

 

 

2023년 11월 24일(금)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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