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 회개(28) 회개할 자범죄는 무엇인가?(09) 시기와 질투의 죄(삼상18:5~9)_2020-12-23(수)

https://youtu.be/5AkzWPOEQbo  [혹은  https://tv.naver.com/v/17422772 ]

 

1. 시기 질투의 죄란 무엇인가요?

  시기 질투의 죄란 남이 나보다 더 사랑받는 것과 귀하게 쓰임받는 것에 대하여 갖게 되는 미워하는 감정으로 인하여 죄를 짓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시기와 질투심이 들면 상대방을 깎아내리려고 하고 애써 평가절하하려고 하며, 남이 잘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 못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왜 남이 잘 되면 내 배가 아픈 것일까요? 사실 영적으로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시기와 질투심을 유발하는 귀신이 들어있습니다. 처음부터 귀신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시기와 질투심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품게 되면 그것이 귀신을 불러들이게 되고, 그것이 배꼽주변에 자리잡게 됩니다. 그러므로 옛날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귀신이 자리잡고 있다가 움직이면 아픈 것입니다. 

 

2. 시기 질투심을 놔 두면 어떻게 되나요?

  시기와 질투심을 그냥 와두면 위와같이 귀신을 불러들이게 되며 그러면 미워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상대방을 해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시기질투심 때문에 상대방을 해친 경우가  종종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질투하다 그만 미워하는 마음이 강해져서 동생을 돌로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울왕도 다윗을 시기질투하다 추한 모습을 계속 보였는데, 그것은 다윗을 죽이려고 무려 10년을 쫓아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시기질투하더니 결국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시기 질투의 죄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3. 시기와 질투는 어떻게 다른가요?

  그런데 시기와 질투는 같은 것 같으나 약간은 다릅니다. 즉 "시기"가 나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이라면, "질투"는 삼각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나보다 못생긴 것 같은데 예쁜 옷을 입고오면 괜히 시기심이 나며, 나보다 못난 것 같은데 그에게 인기가 있고 그가 돈을 많이 벌면 괜히 시기심이 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기심"는 자신과 직접적으로 무관한 사람의 경우에서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태어나서 엄마가 동생에게 관심을 많이 기울이면 질투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엄마가 잠깐 동생을 안 보는 틈을 타서 동생을 밀쳐버리거나 눈을 손가락으로 눌러버리거나 하는 것입니다.

 

4. 성경에 시기와 질투의 사례가 있나요?

  예. 있습니다. 먼저 시기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시기한 사건이 나옵니다. 모세가 이방여인을 아내(둘째부인?)으로 취했을 때에, 그들은 모세를 비난하면서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민12:2)"고 하면서 자신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아론이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미리암이 주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왜나하면 징계는 미리암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모세는 아론과 미리암의 동생이었는데,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존경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론은 대제사장으로, 미리암은 선지자로 쓰임받고 있었는데도 그는 모세를 시기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보면, 민수기 16장에 나오면 고라당 일당의 반역사건입니다. 레위지파 고핫자손이었던 고라가 당을 지어서 족장 250명과 더불어 모세와 아론에게 대항한 것입니다. 어찌 아론만 제사장직분을 수행하느냐면서 자기들도 제사장직분을 하겠다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세와 아론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이 분수에 지나치다는 것입니다. 어찌 너희들이 여호와의 총회 위에 군림하려느냐면서 비난한 것입니다. 이것은 시기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시기심인지 질투심인지를 구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과가 말해주는데, 시기심에서 발동한 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여 징계하시기 때문입니다. 시기심은 자체가 악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리암은 그만 나병에 들게 되었고, 고라일당의 경우에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그의 가족들은 산 채 땅이 입을 벌려 삼켜버렸고, 250명의 족장들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태워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질투의 경우는 다릅니다. 질투는 모든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일종의 부러움도 거기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러움이 긍정적으로 발전하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이 생겨 선한 도전으로 바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질투의 경우가 잘못되면, 그때에는 미워하는 감정으로 화하여 결국 살인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여 살인한 경우가 그렇고, 사울왕이 다윗을 질투하여 10년간을 다윗을 죽이려 한 경우가 그러하며,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미워하여 죽인 경우도 그렇습니다. 

 

5. 시기 질투의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우선 시기심으로 미워한 것이 있다면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미움을 살인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빨리 회개해야 징계를 받지 않습니다. 사실 시기심은 남이 나보다 더 좋은 것을 누리는 것 같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렇더라도 이것은 그가 그것을 누리는 것이 어느정도 합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똑같이 교회개척을 시작했는데, 어떤 목회자는 종교부지를 받아서 잘 성장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도 우리는 시기심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분 나름대로 그릇이 있고 그분 나름대 쌓은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지금 그 결과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부모의 공로이든, 자신의 과거의 공로이든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특히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분량(그릇)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조상들의 공로가 있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무엇인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기심은 사실 하나님께 원망불평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즉시 하나님의 징계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거역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25장의 달란트비유에서처럼, 작은 것을 받았어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칭찬과 상은 동일하다는 것을 믿고, 자기에게 주어진 분량만큼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런데 질투심은 좀 다릅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나의 질투심을 질투하고 있다면 그때는 속히 그 방향을 건전한 방향으로 돌이키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기질투의 영이 틈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누구에게나 질투심이 조금은 필요합니다. 그래야 더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질투심을 생길 때에는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열정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도 내 나름대로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것을 찾아서 그것에 최선을 다하시면 됩니다. 나도 내가 하는 일에 전문가가 되고, 내가 해야 할 고유한 영역이 있음을 알고 그것에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다음 세상에서는 더 많은 것을 맡겨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마25:21). 건투를 빕니다.

 

2020년 12월 23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 회개(27) 회개할 자범죄는 무엇인가?(08) 불안걱정 근심염려의 죄(마6:25~34)_2020-12-22(화)

https://youtu.be/_I5vH5murJE  [혹은 https://tv.naver.com/v/17395319  ]

 

1. 불안걱정 근심염려의 죄란 무엇인가요?

  불안걱정 근심염려의 죄는 장래의 불확실에 대한 두려움, 어떤 문제들의 해결에 대한 자신감의 부족, 지나치게 잘 해야겠다고 하는 긴장감이 과도하게 나타나,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한 채 근심걱정의 영에 눌러지내는 불신앙의 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때마다 일마다 도와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부족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데 너무 잘해보겠다는 조급함이 한데 어울려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불안걱정과 근심염려는 결국에 성급한 판단을 부추기도 하고 쉽게 자포자기하게 만들기도 하며, 자신을 학대하기도 하고 과대망상증에 빠지게도 합니다. 

 

2. 근심하는 모든 것이 나쁜 것인가요?

  아닙니다. 근심걱정하는 모든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쓰임받았던 위대한 사도 바울도 자기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고 자기가 세웠던 교회들을 위하여 큰 근심과 그치지 않은 고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롬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고후11: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더불어 사도바울은 근심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후7:10). 그러므로 반대로 근심걱정을 너무 안 해서 미래를 대비하지도 않은 채 그리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지도 아니한 채 너무 태만하게 지내는 것도 합당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근심걱정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서 결국 자신의 몸을 해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신앙을 해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3. 사람은 무엇 때문에 근심걱정하게 되나요?

  그렇다면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엇 때문에 근심걱정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보통 다음과 같은 4가지 경우입니다. 첫째, 의식주의 문제 때문입니다. 이것은 생존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만약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문제는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힐 것입니다. 둘째, 일과 사업 때문에 걱정합니다. 왜냐하면 이것도 수많은 사람들의 직장과 생업의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자식 때문에 걱정합니다. 자식은 부모의 일평생의 걱정거리요 짐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잘 되도 걱정이고 자식이 못 되고 걱정입니다. 여러 명의 자식 중에 하나만 잘 되고 걱정이고 자식사업이 잘 되고 망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리고 자식이 어렸을 때에는 내가 자식을 지켜보지 않을 때에는 과연 내 자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걱정합니다. 이처럼 걱정은 끊임 없습니다. 넷째, 마지막으로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있습니다. 여기서 걱정을 더 많이 하는 사람들은 자동자를 타고 가면서도 누가 와서 내 차를 받지 않을까 걱정하고, 혹시 전쟁이 나지 않을까 걱정하며, 나도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을까 걱정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수도 없는 걱정에 불안해하고 잠도 못자고 긴장과 불안와 초조에 시달리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걱정하다가 아예 자포자기에 빠지기도 하고, 과대망상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4. 근심걱정에 시달리는 것이 나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근심걱정에 시달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첫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걱정하다가 밤을 지새우기 때문입니다. 둘째,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는데 그때에는 보통 심장이 상하고 그리고 더 나가면 간이 상하게 됩니다. 그러면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경우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심장을 무엇인가 바늘로 찌르는듯한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셋째, 이것이 더욱 더 큰 문제인데, 계속 근심걱정에 매여있노라면 어느 순간부터는 근심걱정의 영이 자기 몸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병적인 히스테리 증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걱정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는 상태로 빠지게 되는 것이죠. 고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잠깐 근심할 수는 있겠으나 빨리 근심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5. 근심걱정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미 지나친 근심걱정에 빠져있어 괴로운 사람은 근심걱정했던 죄를 속히 회개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근심걱정의 죄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불신앙에서 비롯된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근심걱정은 어떻게 극복해 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음과 같은 4가지 처방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째, "염려하는 것을 일찍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 염려한다고 해서 당장 키를 한 자라도 늘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염려는 당장 누군가를 바꾸어준다거나 환경을 바꾸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면 할수록 더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염려하는 것을 아예 포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염려를 계속한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6:27-28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둘째, 우리의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보아주실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약속입니다. 

마6:30-32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셋째, 걱정거리나 문젯거리가 있다면 그것으로 근심걱정할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빌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넷째, 마지막으로 그 문제에 대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눅10:41-42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육신을 가진 사람치고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살 사람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걱정하지 않는 것은 오늘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면 생존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더해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잘 대접해보려고 하다가 그만 분주하다보니 자기동생이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것을 보고 짜증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주님을 잘 대접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염려하고 근심걱정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 것은 주님께서는 만족할 만한 완성품을 당신 앞에 내놓지 않았다고 우리를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과 지혜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하고 우리는 오늘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리고 모든 짐들은 내가 지려고 하지 말고,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이후에는 우리에게 넘치도록 채워주실 전능자에게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있으면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고, 지금 죽게 된다면 바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니까 감사하며 기뻐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2020년 12월 22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 회개(26) 회개할 자범죄는 무엇인가?(07) 원망과 불평불만의 죄(민14:26~38)_2020-12-21(월) 

https://youtu.be/u7Rc-mYd2UQ  [혹은 https://tv.naver.com/v/17371310  ]

 

1. 원망과 불평불만의 죄란 어떤 것인가요?

  원망이나 불평불만의 죄란 무엇인가를 두고서 못마땅하게 여김으로 탓을 하거나 불평을 품고 미워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2. 원망과 불평불만의 죄의 특징은 어떠한가요?

  원망의 죄는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불평불만은 하면 할수록 더 눈덩이처럼 더 불어나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쉽게 말해, 원망도 하다보면 더 많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마음 속에 원망과 불평불만의 생각이 든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더욱더 원망과 불평불만은 꼬리에 꼬리를 달고서 더 튀어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원망의 죄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나와서 지었던 4가지 죄들 가운데 하나로서, 그들 자신으로 하여금 광야에서 죽게 만들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든 무서운 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때 그들이 지은 죄는 우상숭배의 죄, 간음의 죄, 시험하는 죄, 원망의 죄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은 했다고 할지라도 원망불평하는 바람에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평불만의 죄라 할지라도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불편한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원망과 불평불만의 죄는 무엇에서 기인하는 것인가요?

  원망이나 불평불만은 사실 자신이 의지하는 대상이 자기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지 않았다고 판단할 때에 드러내는 악한 마음의 표출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를 짓는 대상은 대부분 부모나, 윗사람이나 하나님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때로는 그것이 자식이 될 수도 있고, 이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죄는 결국 사람보다는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놓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현재 자신을 이러한 괴로운 처지에 빠뜨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오히려 현재의 어려움보다는 하나님께서 장차 복주실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채, 당장 내 앞에 주어진 어려움만을 보고서 불평불만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원망과 불평불만의 죄는 그 기저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에 대한 불신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4.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원망의 죄는 언제 어떻게 일어났나요?

  성경에서 최초로 불평불만하는 사건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리고 시작은 출애굽한 직후 홍해 앞에서였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라 애굽에서 부리나케 탈출해왔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 자기들을 다시 홍해쪽으로 되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키지 않지만 되돌아갔는데, 가보니 홍해바다의 막다른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쫓아온 애굽군대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이스라엘민족이 최초로 하나님께 한 일은 원망의 말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출14:11-12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대를 하고 애굽을 탈출해 나왔는데, 정작 와서 보았더니 자기들 생각에는 애굽만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곳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광야같은 곳이었고, 그래도 믿고 따라가보았는데 막다른 골목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에게 불신의 마음을 품고 원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애굽군대를 홍해에 수장시켜버리심으로, 이스라엘민족을 도망자의 신분에서 자유민이 되게 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민족은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당장 죽게 생긴 현상만을 보고서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가 되었는지 불평불만을 쏟아놓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일을 필두로, 광야에서 최소 10번이상을 원망의 말을 쏟아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실 물이 없다는 것(출15:24)과 먹을 음식이 없다(출16:3)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반석을 쪼개어 물도 주시기도 하셨고, 날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셔서 먹을 것이 걱정없게 해주셨씁니다. 그래도 그들은 애굽음식이 더 낫다고 하면서 만나를 박한 식물을 싫어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민족이 출애굽한 뒤 약 2년이 지난 시점에서 가나안을 정탐했던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받은 뒤로부터는 그분의 원망의 분량을 더욱 더 커지고 말았습니다. 

 

5. 원망과 불평을 하면 어떤 결과가 주어지나요?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민족이 불평불만을 표출했어도 그대로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기적의 방법으로 문제들을 해결해주셨고, 또한 그들의 필요 곧 그들이 마실 물과 먹을 양식까지도 다 채워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는 가나안땅에 대해서 서슴없이 악평을 하자, 하나님께서도 더이상 그들을 지켜보지 않으셨습니다. 이전까지는 애굽에서 종노릇하다가 나왔으니 그러려니 하고 받아주셨지만, 시간이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원망과 불평불만의 마음을 더 드러내자 주님은 결단을 하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또 다시 가나안땅에 자기들을 데려다가 칼에 죽게하려고 하느냐면서 하나님께 항변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입에서 말한대로 주께서 시행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민14:28-30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발설하는 모든 말을 다 듣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투정을 어린아이처럼 들어주시고 받아주십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났는데도 더욱더 불평불만에 더 집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을 했던 바대로 그대로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민14:28). 그러므로 정말 그들의 소원처럼 출애굽1세대들은 다 광야에서 죽게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이 광야에서 다 엎드려져 죽기까지 38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전보다 훨씬 더 많이 감사의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면, 자족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때까지 하나님의 베풀어준 은총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까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보은하리라는 마음의 자세는 원망과 불평을 잠재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하는데에 큰 힘이 되기 때문니다. 

 

2020년 12월 21일(월)

정병진목사

 

누가 과연 자신이 미워하는 원수같은 사람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누가 과연 미움의 죄를 이겨내어서 사탄에게 자기자신을 내어주지 않게 되는 것일까? 사람이 살다보면 자기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 보통 자기를 그렇게 만들었던 당사자를 용서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를 미워하는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는 없지 아니한가? 그래서 오늘은 미움의 죄를 다스리는 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020-12-18(금) 금요기도회
제목: 바른 회개(25) 회개할 자범죄는 무엇인가?(06) 미움(증오)의 죄(창4:1~8)_2020-12-18(금)
https://youtu.be/jqPuXala_8U [혹은 https://dongtanms.kr/67118  ]

 

 

1. 들어가며

  사람이 짓는 죄들 중에는 자범죄들이 있다. 자기 스스로 불러들인 죄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자범죄들에는 혈기 분노의 죄, 우울의 죄, 거짓의 죄, 교만의 죄가 있고, 음란의 죄가 있고 미움의 죄가 있다. 그 외에는 수많은 자범죄들이 있다. 그중에서 오늘은 미움과 증오의 죄를 다루려고 한다. 미움의 죄는 가슴아픈 죄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아무 이유도 없는데 누군가를 미워한다든지 하나님을 미워한다든지는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해로 빚어진 일이든지, 진짜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차별대우를 받았다든지 하여 미움이 싹이 트고 그래서 결국 미움의 영에 사로잡혀 죄를 짓는 것이 바로 미움의 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미움의 죄가 왜 가슴 아픈 죄라고 말하는지 그리고 미움의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움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미움의 죄란 어떤 죄를 가리키는가?

  미움의 죄는 어떤 대상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는 죄를 가리킨다. 내 상처와 아픔만을 생각한 채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미움은 곧이어 증오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 죄가 혈기 분노의 죄와 만나게 되면 살인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미움의 죄를 찬찬히 살펴보면, 자기가 아닌 다른 원인들에 의해서 미움이 시작된 것들이다. 사실 모든 미움은 죄가 아니다. 죄와 마귀는 우리가 미워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원인에 의해 생겨난 미워하는 마음이 미움의 영의 지배를 받고 그래서 미움과 증오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가슴아픈 죄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미움에 대하여 사도요한은 마음으로 살인하는 죄라고 명명하고 있다(요일3:15). 미움에 사로잡혀 있으면 반드시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가 하늘에서 쫓겨내려올 때 미움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요일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3. 사람이 미워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지가가 미워하는 대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보통 4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 가장 많은 퍼센트를 차지하는 것으로서 "가족"이 있다. 부모와 형제 자매 그리고 배우자에 대해서 미워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37장에 보면,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했던 최초의 이유는 요셉에게 있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에게 있었다. 아버지가 요셉을 특히 아끼고 편애했기 때문이다. 자식들을 감히 아버지를 미워할 수는 없다보니, 동생 요셉을 미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회좋은 날이 왔을 때 그들을 요셉을 죽여 없애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장자 르우벤과 네째형이었던 유다의 기지로 인해 죽음은 면할 수가 있었다. 이처럼 가족간의 차별대우 때문에 미움이 생기고 여기에 혈기과 분노, 시기와 질투의 죄가 달라붙게 되면 살인으로까지 발전하는 것이다. 둘째, 나 자신을 싫어하는 자와 나에게 무정하게 대하는 자들을 미워한다.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그를 미워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미움을 받을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나도 그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이것은 요즘 들어와서 많아진 것으로서, 나와 생각과 이념과 사상이 다른 자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이때에는 보통 팩크체그(사실확인)을 해야 함으로 불구하고, 소문만으로 남을 정죄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정치적인 편향성이 많이 작용한다. 넷째,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미워하고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거의 오해다. 하나님께서는 나만 싫어하고 내 인생을 힘들게 했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사실 내 조상들이 지은 죄들과 내가 불러들인 죄들을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귀신들이 우리 인생을 붙잡고 있어서 꼼짝 못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했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4. 사람이 미워하는 마음을 해결받지 못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사람은 육체만을 가진 동물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동물과는 달리 영이 있고 또한 혼이 있기 때문이다. 영과 혼이 만날 때 마음이라는 것이 생긴다. 그런데 이 마음이 남을 사랑하도록 존재하는 기관인데, 남을 사랑하지 못하고 반대로 미워하는 것이 문제다. 자신이 어렸을 적에 받은 학대와 상처로 인하여 미워할 수도 있고, 나와 생각과 사고가 달라서 미워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찌되었든 자기 마음에 남은 미워하는 마음을 처리하지 못한 채 그것을 내버려 둘 경우,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때에는 보통 3가지 증상이 나타난다.

  첫째, 몸이 자주 아픈데 잘 낫지를 않는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은 우리의 육체를 힘들게 한다. 그래서 내 몸의 면역기능을 잘 작동하지 않게 만든다. 그러므로 아픈 자가 미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잘 낫지를 않는 것이다. 둘째, 미워하는 마음을 빌미로 귀신이 내 속에 치고 들어오는데, 한 번 들어온 악한 영들은 좀처럼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용서하지 않는 한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들어온 귀신은 잘 떠나지 않는다. 셋째, 삶에 풀리지 않는 어려운 일들이 자주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심장에 미움의 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우리가 미워할 때 들어온 귀신들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넷째, 결국 이 문제를 해결받지 못한 사람은 남을 미워했던 죄를 용서받지 못할 뿐더러, 죽은 후에도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계21:8). 그러므로 남을 미워하는 마음도 결국 우리를 지옥으로 끌어가는 무서운 죄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5. 미워하는 죄를 짓지 않고 미워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알 것은 처음에 미워하는 것은 비록 나 자신에 의해 시작될 수 있지만, 그것을 계속해서 풀지 아니하고 갖고 있으면 그것을 빌미로 귀신이 치고 들어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미워했던 마음을 회개하고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 

  하지만 미워하는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 몇 가지 도움 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총 5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고로 우리에게 혹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거들랑 이 다섯 가지 방법도 사용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을 것이다. 첫째,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마5:7). 아니면 그러한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때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가짐은 "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마5:7)"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둘째, 상대방을 용서해버리는 것이다(마6:14~15). 내가 상처받지 아니하고 장차 내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가 우선 상대방을 용서해주는 것이다. 용서할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해보는 것이다. 만약 우리도 우리 자신이 미워하고 있는 사람을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그것 때문에 심판 때에 심판받게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어떤 죄든지 상대방을 용서해주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마지막 심판에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줄 것을 말씀하셨다(마6:14~15). 

마6:14-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지옥갈 큰 죄를 용서받은 자로서 우리는 응당 용서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지은 죄를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결국 심판의 때에 우리가 행한 대로 그날 우리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날 우리가 받을 심판의 기준은 우리가 행한 대로라는 것이다. 그날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한대로 우리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에 대해 관대해질 필요가 있으며, 어떤 죄라도 용서해줄 필요가 있다. 그것이 또한 나의 심판기준이 될 것이니 말이다. 

  셋째, 사람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미워하는 마음을 부추기고 있는 악한 영들을 미워하는 것이다(롬12:9). 우리가 미워할 대상은 사실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 사람도 사탄마귀에게 당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워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미워하도록 꼬드긴 악한 영들이어야 한다. 여기서 "악한 자들"은 곧 귀신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있을 때에 그것은 그가 악한 영에 잡혀있는 것임을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고로 우리가 미워해야 할 대상은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역사하고 있는 영들을 미워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는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잘 모르나이다"고 하셨다. 또한 사도바울로 로마서에서 말씀하시기를 악(악한 자)를 미워하라고 하였다. 우리가 미워할 대상은 악한 영들인 것이지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롬12:9~10). 

롬12:9-10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넷째, 오히려 나를 악하게 대하는 자 곧 나를 미워하고 있는 자를 끝까지 선대(축복하고 기도하고 사랑)해주는 것이다(눅6:27~28).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원수를 대하는 방법을 말씀하실 때에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자신의 원수를 사랑하며,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해주고, 자기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해주며, 자기를 모욕하는 자가 있다고 할지라고 그를 축복해주라고 말씀하셨다(눅6:27~28, 마5:44).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라도 벗어주라고 하셨다(마5:40~41). 

눅6:27-28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다섯째, 그래도 안 되면 원수를 내가 처리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것이다(롬12:19~21). 내가 원수갚기 위해 애쓰지 말고, 원수를 하나님께서 맡겨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원수를 처리하려고 하면 우리 또한 또 원수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수는 하나님께서 처리하도록 그분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다윗의 경우다. 사울왕이 다윗을 미워하여 다윗을 죽이려했을 때에,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찬스들이 찾아왔어도 끝내 그를 해치지 아니하였다. "내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내 주인을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다(삼상24:6)"고 말하면서 끝내 사울을 보호해주었던 것이다. 남을 해하려 하는 것은 자기에게 부메랑이 되어 자기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 때를 인내하고 참으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처리해주신다는 믿어야 한다. 우리는 심판자가 될 수 없고 우리는 다만 끝까지 상대방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롬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6. 나오며

  미움은 사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버려야할 것이다. 오히려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사람을 용서해 줌으로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계속 가지고 있게 되면, 귀신들에 의해 내가 공격당하기 때문이요, 그들의 의해 공격당하면 당할수록 나 자신만 더 치명적인 해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아서 끝내 미워하는 마음을 청산하지 못했다고 하면, 우리가 주님께 심판을 받을 때에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을 항상 가슴에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미워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오히려 내가 미워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고 용서해주고 선대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미움의 포로가 되어, 불못에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야 아주 작은 미움의 죄라도 자기의 마음에 품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 작은 것이 걸림돌이 되어 마지막 심판의 때에 나 자신을 정죄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서라도 상대를 용서해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나를 위해서라도 그에게 긍휼을 베풀어주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나를 위해서라도 악한 자를 선대해주며, 그래도 정 안 되면 그를 하나님의 손에 내맡겨 드려야 한다. 그래야 나도 장차 천국갈 수 있고, 상대방도 나중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한다면 그도 천국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더 날마다 회개하여 이미 내가 미움 때문에 들어온 악한 세력들을 내보내도록 하자. 귀신을 처리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회개하고 내가 남을 용서해주는 것이다. 나도 남에게 그렇게 될 수도 있으니까.

 

2020년 12월 18일(금)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