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19) 사명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그의 사명을 깨우쳐 주신다(삼상9:25~10:16)_ 2021-12-08(수)

https://youtu.be/4yeocdpsdcw  [혹은 https://tv.naver.com/v/23983667 ]

 

 

1. 모든 믿는 이들은 다 사명자인가?

  그렇다. 모든 믿는 이들은 다 사명자다. 최소한 3가지 측면에서 사명자다. 첫째는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할 사명자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은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막16:15). 특히 자기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행16:31). 둘째는 기도에 있어서 사명자다. 기도 없이는 영적인 측면에 있어서 어떤 일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셋째는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또한 제자로 삼는 일에 있어서 사명자다. 이것은 자기의 가족 구성원을 비롯하여 영적으로 가족이 된 자들에게 해야 하는 일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사명이기 때문에 '일반적 사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각자에게는 개인적으로 다른 사명을 지니고 있다. 어떤 이는 가정을 세우도록 보냄을 받은 사명이 있고, 어떤 이는 주의 종을 도우라는 사명이 주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교회를 세우라고 보내어진 사명자도 있고, 물질로 봉사하라고 그리고 자신의 달란트로 봉사하라고 사명을 받은 자도 있다. 

 

2.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선택받은 사울은 특별한 사명자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당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 사명자를 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워 쓰시는 사명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하늘에서부터 정해져 이 땅에 보내어진 사명자가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땅에서 하나님에 의해 사명자로 선택되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사무엘과 다윗과 같은 경우이고, 후자의 경우는 엘리제사장과 사울왕의 경우다. 그러나 이들의 수고한 것에 대한 결과는 모두가 다 자기의 복이 된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사울은 이 땅에서 세워진 사명자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에서 왕으로 선택되어 이 땅에 보내어진 사명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플랜B가 작동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끝으로 사사시대를 끝내고 다윗을 세워 왕정시대로 건너가기를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자유 의지를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에게도 왕을 세워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윗을 왕으로 세우려는 플랜A가 아니라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플랜B가 작동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초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왕의 기초를 세워줄 자를 찾았다. 그리하여 선택된 자가 바로 기스의 아들 사울이었던 것이다. 그가 특별한 사명자로 선택된 이유는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의 가문이 좋았고 그의 성품이 훌륭했으며 탁월한 전쟁 수행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5대째 신앙 좋은 가문의 사람으로 태어났으며(삼상9:1), 부모에게 순종하고, 아랫사람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았고, 어른을 공경할 줄도 알았고, 하나님의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도 소유했기 때문이다. 

 

3. 자신이 사명자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행하시는가?

  하늘에서부터 보냄을 받아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기 시작한다. 이런 자들에게서는 벌써 어릴 적부터 남다른 데가 보이기 시작한다. 다윗의 경우를 보자. 그는 15세 때에 사무엘로부터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그 이전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했으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소년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사울왕은 이 땅에서 선택받은 특별한 사명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 땅에 태어나서 자신이 왕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런데 하늘에서 보내어진 사명자는 꿈과 환상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사명자인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사울왕은 이 땅에서 선택된 사명자였기에 이러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스라엘의 왕의 기초를 놓을 초대 왕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사무엘을 시켜서 그가 특별한 사명자인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4. 사명자인 것을 깨닫도록 사무엘이 사울에게 행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자신이 사명자인 것을 전혀 예상하지 않고 있는 사울에게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시작한다. 그를 만나자마자 "당신은 잃은 암나귀들 때문에 염려하지 마시오, 이미 찾았소. 그런데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인 줄 아시오. 바로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온 집이라오(삼상9:20)"이라고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를 찾아온 사울을 화목제사의 식사 자리에 초대했는데, 그때 사무엘은 초대된 30명 중에 사울을 맨 상석에 앉혔고 그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음식을 먹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특별한 사람으로 선택받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무엘은 사울과 헤어지기 전에 사울만을 따로 불러서 그를 앉힌 다음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면서 말한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어 그분의 기업(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게 하셨소(삼상10:1)".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것임을 사울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3가지 일들이 앞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 7일 후에 길갈에서 자기와 보자고 했다. 이는 그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번제제사를 드리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5. 사울이 집으로 가면서 경험하게 된 신비한 일 3가지는 무엇인가? 

  사무엘은 사울더러 그가 왕으로 선택받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을 확실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때 이후로 그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경험하게 될 세 가지 일을 미리 알려 준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일은 실은 사울을 하나님께서 왜 부르셨고, 그를 어떤 상태에서 부르셨는지 그리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사울을 어떻게 쓰실 것인지를 알려 주고 그가 하나님께 쓰임받을 때에는 어떤 것에 주의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이었다. 

  첫째 표징은 길을 가다가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하였다(삼상9:2). 그때 그들이 사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했다. "당신이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은 이미 발견되었소. 보시오. 당신의 아버지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지만 당신들(사울과 그의 사환) 때문에 걱정하고 있소.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소. '내 아들이 나귀를 찾으로 나간지 삼일이 넘었는데 어찌하면 좋겠소?" 이 징조는 그가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서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서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사실 이스라엘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실은 사울왕이 더 걱정된다는 예언적인 말이었다. 왜냐하면 라헬은 야곱의 부인으로서 베냐민을 낳다가 죽어 가면서 아이를 살려 낸 여인이기에,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귀중하게 보신다는 뜻이다. 

  둘째 표징은 거기서 더 가다가 다볼 상수리나무 아래를 지날 때에, 벧엘에 제사드리러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그때 첫 번째 사람은 염소 새끼 세 마리를 이끌고 있을 것이고, 두 번째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지고 있고, 세 번째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사울에게 평안을 빈 다음에 떡 두 덩이를 줄 것이라고 했다. 이는 전쟁 중에 시행할 세 번의 제사가 중요한데, 두 번째까지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겠지만 세 번째는 잘못된다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였다. 왜냐하면 사울은 염소 새끼 셋과 포도주는 받지 못한 채, 떡만 두 덩이를 받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셋째 표징은 시간 관계상 내일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위하여 사명자를 세워서 일하시는데, 사명자가 그것을 못 깨달을 수도 있으니, 사명자 본인이 사명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를 인도해 주신다고 말씀을 배울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명자가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사역을 하다가는 장차 있을 사울왕의 경우처럼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그만 낙마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2021년 12월 08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17)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것은 진정 잘못이었는가?(삼상8:1~22)_2021-11-10(월)

https://youtu.be/wQ9V3Ty-SC0  [ 혹은 https://tv.naver.com/v/23931590 ]

 

1. 사무엘이 늙었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사무엘이 늙었을 때에(탈무드에서는 52세였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온 장로들이 와서는 더이상 사무엘의 다스림을 받지 않겠노라고 하면서 자기들에게 왕을 세워줄 것을 요청을 한다. 그런데 핑계는 사무엘의 아들들(약 32세 정도)을 둘러댔다. 즉 사무엘의 아들들이었던 요엘과 아비야가 아버지 사무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으 받고 판결을 굽게 한다는 것이었다(삼상8:1~2). 그러나 그 정도로 인하여 그들이 왕을 구할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직도 사무엘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해당되는 것이었고(엘리 제사장은 58세에 사사로 부름받아 98세까지 통치했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 곧 가나안 땅의 중북부지방을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가나안의 남부지역이었던 브엘세바쪽을 사무엘의 아들들이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2. 왕을 요청하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에 대한 사무엘의 반응과 하나님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제는 자기들에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했던 온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처신은 과연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우선 사무엘의 생각을 들어보자. 사무엘은 그들이 요구를 기뻐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삼상8:6). 왜 그랬을까? 아마도 하나님과 일대일로 교통하고 있었던 사무엘인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는 아직 이른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자 사무엘은 그 문제를 하나님께 아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해주신다. 사무엘상을 보면, 그때 하나님의 마음이 조금 표현되어 있다. 즉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렇게 지시했기 때문이다.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왕상8:7)". 그렇다. 이는 이스라엘이 사무엘의 통치를 거부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호세아 13장에 보면, 그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분노하셨는지가 나온다.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지도자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곧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호13:10-11)" 그랬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들이 왕이 구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을 버리고 왕을 구하는 죄를 범한 것이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사실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하셨는가?

  사실 사무엘의 통치까지 이스라엘의 통치는 신정정치였다. 왜냐하면 그동안 이스라엘의 통치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지도자들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졌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국가의 태동은 야곱의 70명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출애굽할 무렵에 이스라엘은 이제 드디어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라는 지도자를 세워서 출애굽을 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세 다음에는 여호수아를 세우셨으며, 여호수아의 사후에는 여러 사사들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셨다. 그러므로 이때까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사사들은 정치적인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종교적인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이 비록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였지만 스스로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대로 순종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가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 이스라엘이 완전히 다른 통치방식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왕이 통치를 한다는 것은 왕은 정치적인 영역만을 담당할 것이요, 이제 종교적인 영역은 선지자들이 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준비되지 아니한 왕의 등장은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가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왕이 될 자를 계획하고 차근차근 준비하고 계셨는데, 아직 그 시기가 되지도 않았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4.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것은 진정 잘못된 것이었는가?

  그렇다. 그 이유는 다음 몇 가지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할 시기가 아직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진정 왕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면, 그들은 그때부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을 맞을 준비를 하고, 또한 그러한 왕을 하나님이 보내주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준비와 기도는 하지 않았고, 당장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왕을 준비하고 계셨다. 이 사건 이후에 사울왕이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세워지지만, 이러한 사울이 왕으로 등극한지 약 10년 뒤에 다윗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준비하고 있던 사람은 사울이 아니라 바로 이 사람, 다윗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왕을 요구한 것은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요구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그 요청을 들어주시기는 하시지만 그렇게 해서 세워진 자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도의 종이었던 사무엘은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삼상8:18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사무엘은 그들이 원해서 앞으로 세워지게 될 왕이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에게 고통이 될 것을 아셨던 것이다. 그리고 왕이 세워질 시기는 아직 아니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안 사무엘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허락하심에 따라 기스의 아들 사울을 왕으로 세우게 된다. 

 

5. 왕의 제도는 갑자기 생겨난 제도인가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이미 들어 있었던 것인가?

  우리는 성경말씀을 너무나 치우쳐 한 쪽 방향으로만 보아서는 절대 아니 된다. 다른 쪽의 말씀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정치지도자들의 영역과 종교지도자들의 영역을 구별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장차 왕정제도가 나타날 것을 이미 말씀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모세에게 장차 도래할 왕의 규례를 미리 말씀해주신 대목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이 규례에 따르면 장차 이스라엘이 왕을 세울 때에는 다음과 같은 것을 주의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신17:14~20). 첫째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이스라엘의 민족 위에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둘째, 이방인은 절대 왕으로 세우지 말 것이며, 자기들의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골라내야 한다고 했다. 셋째, 그가 왕이 된 후에는 병마와 아내와 은금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하였다. 그것은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군사력을 의지하기 때문이요, 왕비를 많아 두게 되면 왕비들이 시집 올 때 가져온 이방우상을 섬길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은금을 많이 두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만약 그렇게 되면 약한 자를 돕지 않게 되고 부자들끼리 사는 나라를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지시사항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율법서를 등사하여 그것을 곁에 뒤고 항상 읽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며, 율법의 모든 말씀과 규례를 지키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그러한 규정이 있는데 이것을 다 지킬 수 있느냐고 백성에게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왕을 세워달라고 계속해서 요청을 하였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싸움을 잘하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도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사람이 바로 기스의 아들 '사울'인 것이다. 그러니 사울이 처음 왕이 되었을 때에는 그렇게 겸손하였지만 결국 욕심을 못 버리고 자기 체면과 욕심 부리다가 멸망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2021년 12월 06일(화)

정병진

 

왜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구국집회를 열 때면 그 집회를 "OO구국성회"라고 이름을 내거는 것일까? 그런데 바로 그 이유가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온다는 사실이다. 대체 미스바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때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대체 누구였으며, 이 집회는 어떤 종류의 집회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집회 후에 이스라엘이 받은 축복은 대체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중심으로 오늘 말씀을 점 더 깊이 넓게 들여다보자.

2021-12-05(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무엘상강해(16) 사무엘이 개최한 미스바 성회, 무엇이 그 중심에 있었나?(삼상7:2~1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IZGr4X08fBE [ 혹은 https://tv.naver.com/v/23931217 ]

 

1. 들어가며

  교회가 다니다 보면 가끔씩 기도회에 관한 광고를 들을 때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다. "미스바 구국성회에 나오십시오" 대체 미스바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할 때면 그 집회를 일컬어 '미스바 구국성회'라고 부르는가? 그런데 바로 "미스바 구국성회"라는 명칭의 유래가 오늘 본문 말씀이다. 미스바 구국성회는 사실 사무엘이 기도하자고 하면서 개최한 집회다. 그리고 이 기도 성회는 알려진 바와 같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기 위한 구국집회였다. 그렇다면, 사무엘이 이 집회를 개최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이 구국성회는 대체 어떤 방식으로 개최된 것인가? 그리고 그 결과는 대체 어떠했는가? 오늘은 미스바 집회의 내용과 그 의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사무엘이 이스라엘 앞에 공식적으로 첫번째 등장한 때는 언제였는가?

  사무엘이 드디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쓰임받을 때는 언제였는가? 그때는 사무엘의 나이가 약 32세가 가량 되던 때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법궤를 빼앗기고 7달 만에 다시 되찾았을 때의 사무엘의 나이가 약 12살 정도였는데기 이제는 그때로부터 약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기 때문이다(삼상7:2). 그러므로 이제 사무엘도 이미 어른이었고, 아마도 결혼을 한 후였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런데 이때만해도 블레셋에 의해 실로에 있는 성소가 파괴되었기에 따로 하나님의 성소가 마련되지 아니한 시기였다. 성소가 파괴되자 사무엘은 자기의 고향 라마에 있는 자기의 부모의 집으로 피신하여 갔던 것 같다. 이때 부모가 살아계셨는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때는 법궤가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미나답의 집에 머물러 있는 때였다. 그리고 이제 사무엘이 처음 공식적으로 사역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는 법궤가 이스라엘에 돌아온지 약 20년이 지나가고 있던 때였다(삼상7:1~2). 

 

3.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대체 무엇에 달려있는가?

  어느 날이었다. 예수님 정도의 나이가 된 사무엘이 일어나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했다. "만일 여러분이 전심으로 여호와께로 돌아오려거든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항하고 그분만을 섬기십시오.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주실 것입니다(삼상7:3)"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묶여 수십년간 고통받고 있는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회개하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속국 신세가 되어서 고통받고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국방력이 약해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께로 되돌아 갈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애써 지어놓은 농작물을 더이상 뺏기지도 않을 뿐더러, 자기의 딸들을 노예로 잡혀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바알과 아스다롯을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벌써 수십년째 블레셋에 고통받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즉시 사무엘의 말에 반응하기 시작하였다. 즉 사무엘의 말을 듣고 자기들에게서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한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만 섬기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참고로, 이때 이스라엘이 섬기던 바알신은 가나안 땅의 남신에 해당하고, 아스다롯은 가나안의 땅의 여신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에 의해 압제받는 것에서 벗어나서 행복하게 살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에서 4계명을 지키지 못한 죄를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한 나라가 잘 살고 못 살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나라에서 우상을 제거하느냐 그리고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정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사실 이 일만큼 귀하고 중요한 것은 없는 것이다. 

 

4. 사무엘이 이스라엘 민족을 미스바의 기도집회에 초대했을 때에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이때 사무엘은 이스라엘 온 민족을 '미스바'로 모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이 동서남북에서 미스바로 몰려왔다. 참고로 여기서 '미스바'라는 말은 '파수대, 망대'라는 뜻이다. 그럼 왜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모이라고 한 것인가? 그것은 미스바가 이스라엘 땅 가운데 한 가운데 있기에 모든 지파가 함께 모이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고, 뿐만 아니라 이곳의 높이가 해발 784m에 있어서 하나님께 함께 모여 기도드리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고로 이 지역은 베냐민 지파의 땅에 속해 있었으며, 예루살렘 성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13km 떨어진 장소에 있었다. 

  그런데 이때 사무엘이 행한 일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무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2가지 일을 해야 한다고 외쳤기 때문이다. 첫째는 하나님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자백하라고 명령하였다(삼상7:6). 그런데 이것은 정말 자신의 죄를 회개하되 자신의 죄를 먼저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우리도 회개기도할 때에 "우리가 범죄했으니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하기보다는 "우리가 하나님께 이러이러한 죄를 범하였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우선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는 이러한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민족처럼 "내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도 우리가 범죄하게 되면 우리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다고 말하라고 하였기 때문이다(요일1:9). 둘째는 그날 하루를 온종일 금식하라고 하였다(삼상7:6). 사실 사무엘은 회개가 무엇이며, 악한 영들을 제압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가장 시급한 일이라면 자기들이 지은 죄를 자백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제일 먼저 그들에게 요청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와서도 악한 영들은 제압하는데 가장 효력이 있는 것이 '금식'인데 금식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느날 왜 자기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느냐고 예수님께 물을 때가 있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신 것은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다. 그렇다. 악한 영들을 제압하는데 가장 중요한 무기는 역시 회개 기도하는 일이며, 또한 금식하는 일이다. 회개를 안 하면 아무리 능력있는 사역자가 와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할지라도 잘 나가지도 아니할 뿐더러 또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할지라도 다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가 가장 중요하다. 악한 영들이 역사하지 못하게 하려면 역시 회개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무엘은 전쟁하러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금식할 것을 명령했다. 아니, 나가서 힘차게 겨루어 전쟁하려면 고기를 먹어도 부족할 것인데, 사무엘은 하루 종일 금식을 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적으로 볼 때 사무엘의 명령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온 이스라엘을 철저히 사무엘의 말에 순종했다. 모두가 하루 종일 금식을 한 것이다. 셋째는 물을 길어 미스바에 여호와 앞에 부었다는 것이다(삼상7:6). 이것은 아마도 제사드리려는 제단에 도랑을 파고 거기에 물을 부었다는 의미가 아니었겠는가 싶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 모두가 다 정결함을 입기를 원한다는 표시였다고 할 수 있다. 사무엘은 그것이야말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5.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러 산 위로 올라오려고 하자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때였다. 블레셋이 자기의 속국 이스라엘이 자기들과 전쟁하기 위해 미스바에서 모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자 블레셋 방백들은 즉시 군사를 소집하여 이스라엘을 치려고 올라왔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사무엘이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사무엘에게 하나님께 기도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무엘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행실을 했기에 기꺼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어린양을 잡아 번제를 드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이 백성을 지켜주시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러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가?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시기 시작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날에 블레셋 사람들에게 큰 우레를 발하게 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번개를 맞고 어디로 가야할 지 갈팡질팡 하면서 도망치는 것을 지켜보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도우신다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자 용기백배하여 적군을 물리치러 내려갔는데, 도망치는 그들을 미스바에서 벧갈 아래에까지 쳐서 죽일 수가 있었다. 결국 전쟁은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리하여 이때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아간 이스라엘 영토인 에그론과 가드까지 다시 되찾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은 두 번 다시 이스라엘 쳐들어 올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6. 미스바 집회, 대체 어떤 집회였다고 정의할 수 있는가?

  사실 미스바 집회는 가나안 땅을 분배했던 여호수아의 사후 가장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회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이 집회는 기도하자고 모인 집회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온 이스라엘을 모이게 한 집회가 그 얼마나 있었는가? 거의 없었다. 이 집회는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모인 집회였다는 것이다. 둘째, 이 집회는 회개하는 집회였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어쩌면 뚫을 수 없는 벽에 소리치는 것밖에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께서 드리는 것인데, 어찌하든지 기도가 하나님께 상당되어야 하나님께서도 응답하시는데, 악한 영들이 그 길목에 진을 치고 있으면 아무리 기도해도 그 기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하나님께 상달되어지는 기도를 드리고자 먼저 회개하는 일부터 시작하자고 했던 것이다. 셋째, 이 집회는 금식하는 집회였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도는 금식기도다. 왜냐하면 금식하며 기도하면 풀리지 않는 결박도 풀리기 때문이다. 금식기도하면 우리 몸에 들어와 있는 귀신이 떠날 차비를 하는데 언제라도 떠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상태가 된다. 이빨로 표현하자면 곧 뽑히기 위해 이빨이 잇몸에서 흔들흔들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만큼 금식기도는 강력한 것이다. 넷째, 기도후 초자연적인 기적이 나타났던 집회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회개하고 금식하며 기도한 후에 사무엘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그러자 미스바의 높은 산에 올라오는 블레셋 병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우레로서 그들을 공격하셨다. 번개에 한 방씩 맞은 블레셋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가 타 버리는 병사가 있었는가 하면, 전기에 감전되듯 번개에 감전하여 그 자리에서 손을 떨고 있는 병사들도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앞에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앞이 캄캄해져서 어디로 도망가야 할른지도 모르는 상태도 있었을 것이다. 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 자연의 법칙을 뛰어넘는 영계의 법칙이 쇄도하여 이 땅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것을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기적이라고 부른다. 사무엘 선지자가 기도하자 바로 그러한 일이 눈 앞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자 사기가 충천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가서 싸웠고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아주 먼 곳까지 쫓아가 무찌를 수가 있었다. 

 

7. 나오며

  그렇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인간이 노력하고 수고하는 것보다 100배 1,000배가 더 나은 것이다. 인간은 여러 번 감당해야 할 일이라도 하나님은 한 방에 해결하실 수가 있다. 아무리 많은 적이 공격해 온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한방에 죽이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 사무엘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이 수많은 세상의 권력자나 최첨단의 무기의 도움을 받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개의 강한 능력을 그는 익히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와주실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곧 회개하는 기도요 금식하는 기도라는 것을 잘 알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이 끝난 다음에 사무엘은 전쟁에서 이겼던 장소에 돌을 세워놓았는데, 그 돌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지어 불렀다. 그 뜻은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이다. 이는 사무엘이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의 민족을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면 모든 일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사무엘은 이 사건을 통해서 확실히 체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 우리도 먼저 회개하여 이방 신상들을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겠노라고 결단해보자. 그리고 지은 죄들에 관하여는 무조건, "주님, 내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자백하는 기도부터 해보자. 그리고 우리의 헌신으로서 한 끼 금식 내지는 하루의 금식으로 표현하여 하나님이 악한 영들을 확실히 제압하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보자. 그러면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우리도 역시 계속해서 크게 도와주실 것이다. 

  

2021년 12월 05일(주일)

정병진목사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고, 교회 안에 출석하고 있다면 다 구원받은 것인가? 여기 사사시대의 말기에 이스라엘의 법궤와 관련된 사건들이 들려주는 놀라운 교훈이 있다.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관하는 나무그릇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 법궤는 결국 심판의 잣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어떻게 되는가? 왜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법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5만 70명이나 죽임당하고 말았던 것인가? 여기, 우리가 미래에 받을 구원의 당락을 말해주는 놀라운 말씀이 있다.

2021-12-03(금) 금요기도회
제목: 사무엘상강해(15) 그날 법궤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놀라운 교훈(삼상6:19~7:2)_2021-12-3(금)
https://youtu.be/jh0hSWV7sCA [혹은 https://tv.naver.com/v/23928984 ]

 

1. 들어가며

  이스라엘의 신의 궤였던 법궤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 것까지는 잘 몰랐다. 그들은 법궤를 빼앗았고 그것을 그대로 보관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재앙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돌려주었다. 그리하여 빼앗겼던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큰 슬픔이 일어나고 말았다. 일곱 달 전에 블레셋과의 전쟁 가운데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던 것이다. 대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법궤는 진정 축복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재앙의 도구라고 불러야 하는가? 법궤는 구원의 도구라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심판의 도구라고 말해야 하는가? 오늘 이 시간에는 법궤의 이동 경로에 따라 나타났던 사건들을 종합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가 무엇인지를 주목하고자 한다. 이것에는 우리의 구원의 당락을 좌지우지하는 놀라운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블레셋에 들어간 법궤는 어떻게 되어 블레셋을 초토화시켰는가?

  아벡전투에서 승리한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서 법궤를 빼앗아 전리품으로 소유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매우 기뻐했다. 왜냐하면 애굽신들을 쳤던 이스라엘의 신과의 전쟁에서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쁜 마음에 들떠 법궤를 자기들의 신이었던 다곤신에게 바치게 된다. 그런데 다음 날 일어나 보니 다곤신이 그만 넘어져 코가 땅에 닿은 채 법궤에 절하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미심쩍었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그것을 일으켜 세워 놓는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다곤신은 또 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상의 목이 부러져 있었고 손목이 부러져 있었다. 더욱이 부러진 것들이 저만치 날아가서 문지방에 있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악한 종기가 발생하더니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블레셋의 군주들 5명에게도 종기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블레셋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자기들이 법궤를 빼앗아옴으로 여호와의 손이 자기들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회의를 거듭한 끝에 법궤를 다시 이스라엘에 돌려주기로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일이 혹시나 우연이 아닐까 싶어서, 한 번만 더 시험을 해 보기로 한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들이다. 아직 멍에를 멘 일이 없는 젖나는 암소 두 마리에 수레를 달고 그 위에 법궤와 속건제물을 실어 이스라엘로 보내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자기 새끼의 울음 소리를 듣고도 암소 두 마리는 이스라엘 벧세메스로 곧장 가고 만다. 

 

3. 벧세메스로 돌아온 법궤 때문에 감사하는 제사를 드렸지만 오히려 슬픈 사건이 되어 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 날 벧세메스 사람들이 밀 추수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법궤는 다시 이스라엘의 품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감격하였다. 그래서 수레는 번제물을 태우는 장작으로, 두 마리의 암소는 번제와 다른 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제사장들이었기 때문이다(수21:13~16). 그런데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실로까지 가서 성소를 황폐화시켜 놓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는 이제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는 집이 없었다. 그러자 성소를 섬기던 제사장들은 자기가 분배받은 땅에서 살게 되었다. 그 성읍 중의 하나가 바로 벧세메스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엄청난 큰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본 것이다. 그들이 법궤를 덮은 보자기를 열어 젖혔는지 아니면 법궤의 뚜껑을 열어 보았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하여 무려 5만 70명이 죽게 된다. 그런데 얼마 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3만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그 숫자는 이스라엘의 한 개 지파의 숫자였다. 당시 대도시 예루살렘의 인구가 7만 명이었다고 하니, 5만 70명이 죽었다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 죽은 자들은 벧세메스의 제사장들만 죽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경하러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죽었던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큰 살륙이 일어난 것이다. 

 

4. 법궤는 구원의 도구인가 심판의 도구인가?

  그러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묻지 아니할 수 없다. 대체 법궤는 구원의 도구인가 아니면 심판의 도구인가 하는 것이다. 원래 법궤는 하나님 자신이 그 공간에 있겠다고 만들라고 한 것이요, 그곳에 십계명의 두 돌판을 넣어 두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법궤의 뚜껑 곧 속죄소의 두 그룹 사이에 계셨다. 그러므로 법궤는 확실히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의 전쟁에서 법궤는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었다. 과거 요단강 강물이 마르게 하고, 여리고성을 한꺼번에 무너지게 했던 능력이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다. 오히려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기고 만다. 왜 그랬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법궤에 관하여 주님이 주신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거나 멸시하는 자들에게 법궤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쟁터에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가지고 갔어도 그들은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셨어도 역사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법궤와 함께 아니 계시지는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법궤는 신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기뻐했던 블레셋 사람들을 쳤고, 그들의 다곤신을 쳐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블레셋 전역에 악한 종기가 나게 했기 때문이다. 전염병을 창궐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궤가 아무리 신령한 성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법궤는 심판의 도구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요3:16~18). 그러나 법궤는 원래 천국의 모습 그대로를 이 땅에 재현한 것이므로, 법궤 자체는 하나님의 임재의 도구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통로인 것에는 분명하다. 나중에 그것은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법궤는 구원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5.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본 사건으로 인해 알 수 있는 법궤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런데 법궤가 스스로(인간이 보기에) 다시 이스라엘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그것도 제사장의 성읍으로 되돌아왔다. 이는 제사장들이 다시 법궤를 모시고 성막을 짓고 하나님을 잘 섬기라는 표시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벧세메스의 제사장들은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큰 살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일찌기 그들에게 법궤를 모시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법궤가 이스라엘 땅에 들어왔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악한 종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벧세메스에 몰려온 사람들에 의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 법궤 안을 들여다보는 과오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에 의하면, 법궤는 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만지지도 말아야 하며, 지성소에 보관하여 아무나 볼 수 있도록 해서도 아니된다고 하였고, 뿐만 아니라 그 속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민4:15, 20). 그런데 벧세메스의 제사장들은 이러한 규정에 주의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그러한 규정을 배우지 못해서였는지 아니면 그것을 알고도 방치했는지 잘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으면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겠는가!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업신여긴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자신들이 이겼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신성 모독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을 치셨던 것이다. 그리고 홉니와 비느하스도 치셨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이들이라도 결국에는 죽임당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었던 벧세메스의 사람들이었지만 이들도 죽어 나가는 일은 블레셋과 똑같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이 예법을 무시하면 결과는 역시 불신자나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는 자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교회 안에 들어온 성도들이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을 잘 모르면 예수님을 믿고 있어도 죽임당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고 있어도 사망에 이르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6.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결국에 사망에 이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 믿는 이들이 법궤의 사건을 통해서 주목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임당하는 일이 발생하는가 하는 것이다. 벧세메스의 5만 70명이 죽게 된 것은 분명 심판의 사건인 것이지 구원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자와 똑같이 죽어 나가는 것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이미 하나님께서 가르쳐 준 말씀에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배우지 못했든지 아니면 그것에 주의하지 않았든지 결과는 똑같이 나타난다. 다 똑같이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이라도 자기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해서 자신의 구원은 안전하다고 판단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이미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도 죽을 때에 성 바깥으로 쫓겨난다든지 아니면 불타는 영영한 불못에 들어갈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멸망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해서 나의 구원은 안전하다고 판단해서는 아니 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경우에 예수님을 믿어도 구원에서 탈락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리의 구원자되신 예수께서 직접 들려준 말씀을 종합해 보면(공관복음서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의 말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죄를 짓는 자는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이다(계21:8).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우상을 숭배하면 결국 불타는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죄된 본성이 우리 안에 있고 귀신이 우리 육체속에 들어 있으며, 악한 영들은 자꾸 우리를 미혹하고 유혹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안 넘어갈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두 번째의 이 말씀이 더 중요하다. 둘째, 자기의 더럽혀진 두루마기를 빨지 아니하는 자는 새 예루살렘 성 밖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계22:14~15).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진정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더렵혀진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해야 한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그의 이름이 지워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계3:5). 오직 회개하는 자가 새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상태를 보라. 예수님을 믿었다면 자신의 구원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가 많다. 자신의 구원은 영원불변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구원받은 자라도 얼마든지 미끄러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중요한 관건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지은 죄들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었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은 줄 알고서 회개하고 있지 않는 자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성 밖이나 불못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가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요일1:9).

 

7. 나오며

  그렇다. 예수님을 믿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받은 구원의 완전한 담보가 될 수는 없다. 믿는 자들에게는 지금 자신이 지은 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채 있다.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법궤가 자기 마을에 들어온 것에 대해 기뻐하였다. 잘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관리하는 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아 결국 블레셋 사람들처럼 죽어 나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미 하나님 안에 들어왔으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살라고 하셨는지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말씀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얻은 구원을 잃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이미 얻은 구원이라도 무효가 되는 규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보니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믿는 자라도 사망에 이르는 규정이 성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영적인 지도자들이 그것을 말해 주지 않는 것도 한몫을 한다고 본다. 벧세메스의 제사장들은 그곳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말해 주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을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하루아침에 죽어 나가는 이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다시 성경을 보아야 한다. 구원받은 자라도 구원이 무효화되는 규정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애써 얻은 구원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하는 일이다. 믿는 자에게 구원의 최종 관건은 회개를 하고 있느냐 안 하고 있느냐의 차이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2021년 12월 03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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