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30) 사울 왕처럼 시기질투심을 키워가면 어떻게 될까?(삼상18:6~30)_2021-12-20(월)

https://youtu.be/SjVkyL3ssP8  [ 혹은 https://tv.naver.com/v/24172517 ]

 

1. 사울왕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을 넘어서 이제 사람을 죽이려고까지 하게 된 것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가?

  사울왕이 65~70세 되던 해에 블레셋과의 전투가 있었다(삼상17:1~58). 그런데 적의 장수는 2m 80cm의 거인 골리앗이었다. 그런데 소년(15~20세 정도) 다윗이 나타나 물매로서 적을 쓰러뜨린 후 그의 목을 베어 버리자, 사울은 크게 기뻐하면서 다윗을 군대의 지휘관으로 삼는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쳐죽이고 돌아올 때에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서 환영을 하는데, 영광을 사울에게는 천천을 돌리고 다윗에게 만만을 돌리게 된다(삼상18:7). 그러자 사울은 여인들의 그 말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면서 대노를 한다. 결국 사울은 앞으로 다윗에게로 앞으로 돌아갈 것은 자신의 왕국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한다. 이때부터 그의 속에서 시기 질투심이 끌어올라오기 시작한다. 

 

2. 시기심과 질투심이란 어떤 것이며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시기 질투심이란 나보다 남이 더 잘 되는 것을 보거나 남이 다른 사람에게 더 사랑을 받고 인정받는 것을 볼 때에 자기 속에 갖게 되는 미워하는 감정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시기 질투는 과연 죄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 시기 질투심이 죄라는 것은 시기 질투할 때 악한 영이 그 사람 속에 들어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일서에 보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했으니(요일3:8), 시기 질투를 할 때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시기 질투심도 죄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시기심과 질투심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시기 질투심은 상대방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미워하는 감정을 갖는다는 것에 있어서는 동일한 뜻이다. 하지만 시기심은 전적으로 죄라고 할 수 있어도, 질투심은 전적으로 죄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질투심은 다른 말로 좋게 표현했을 때에는 상대방에 대해 느끼는 부러움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투심이라도 그것이 좋게 나타나게 되면, 상대방에 대한 부러움으로 인하여 미래에 대한 투지와 열정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찌보면 적당한 질투심(부러움)은 때로는 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질투심을 전적으로 죄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런데 만약 질투심이 나쁜 쪽으로 나타나 상대방을 미워하고 또는 해하려하고 그리고 죽이려는 쪽으로 가면 그것은 죄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시기심과 질투심을 분별해 보자면, 시기심은 내가 그냥 상대방에 대해 미워하는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에 제 삼자가 끼어 있지 않지만, 질투심은 제 삼자가 끼어 있어서 상대방 때문에 제삼자에게 자신의 인기와 명예와 칭송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오늘 사울왕의 경우는 질투심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3. 사울은 왜 다윗에게 질투심을 느끼게 되었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사울은 다윗을 시기한 것이 아니었다. 사울은 다윗을 질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자기보다 다윗을 더 높이지 않았더라면 그가 다윗을 미워하는 감정을 갖지 않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사울과 다윗 사이에 일반 백성이 없었더라면 사울은 다윗을 시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백성들이 그 가운데 끼어 있었기 때문에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게 된 것은 자신의 질투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기와 질투의 감정은 둘 다 상대방이 잘되는 것을 보고 미워하는 갖는 감정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4. 시기 질투심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시기와 질투심은 대부분은 나쁜 쪽으로 발전해 간다. 왜냐하면 거기에 미워하는 감정이 달라붙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으로 보았을 때 사람이 시기 질투심을 나타낼 때면 악한 영들(귀신들로서 시기 질투의 속성을 가진 영들)이 사람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들어오는 시기 질투의 영은 보통 배꼽 주변에 머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한편 시기심과 질투심을 좀 더 나눠서 살펴보자면, 시기심은 전적으로 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상대방이 잘 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프고 화가 치밀어 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 삼자가 끼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시기하였던 사람들은 다 징계를 받았다. 예를 들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시기했을 때 미리암이 문둥병이 걸린 예가 있다. 그리고 고라 일당이 모세와 아론을 시기하다가 고라의 가족들은 징계를 받아 땅속 음부에 빠지게 되고, 그를 따르던 250명의 족장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태워 죽는 사례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제삼자가 없이 다 자기가 상대방을 시기하다가 징계받고 멸망받은 예인 것이다. 그런데 질투심은 제삼자가 개입되어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대표적인 것이 오늘 사울왕의 경우다. 만약 여인들이 다윗을 더 높이 칭송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여인들이 자기보다 다윗을 더 칭송하니까 사울이 배가 아프고 질투심이 난 것이다. 

 

5. 시기 질투심이 계속 올라오는데도 그것을 놔두면 어떻게 되는가?

  사울은 다윗에 대한 시기 질투심이 올라왔을 때 그것을 통제했어야 했다. 그때는 다윗이 여인들로부터 칭송받을 만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사울은 자기을 향한 인기가 다윗에게로 옮겨가자 다윗에게 시기 질투를 한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그러한 감정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그대로 갖고 있었다. 그러자 그것이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첫째, 악한 영이 사울을 잡아 쓰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삼상18:10~16). 악한 영이 다윗을 죽이도록 사울을 부추겼고 그러자 사울은 자기 곁에 놓여 있는 창을 던져 다윗을 두 번이나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삼상18:10~11). 둘째, 사울은 이제 더 사악한 일을 도모하게 된다. 즉 다윗에게로 인기가 돌아가자, 사울은 시기 질투심을 느끼게 된다. 그러자 악한 영이 사울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는 교묘한 술책을 써서 다윗을 제거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므로 시기 질투심은 처음 나로부터 올라올 때에 그 시초부터 싹을 잘라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그냥 놔두면 시기질투심은 미움으로, 다시 미움은 살인으로 계속해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울은 이제 자신의 두 딸을 이용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한다. 그것도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을 통해서 다윗을 제거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혹시 자기에게 시기 질투심이 올라온다면 즉시 회개기도문을 가지고 회개를 시작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서는 시기 질투의 영을 연거푸 꾸짖으라. 그리고 잘되는 사람을 볼 때에는 "정말 저 복을 받기에 합당한 일이 과거에 있었겠군"이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그가 복받는 것을 인정해 주라(실은 그것은 맞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히려 진정 그를 축하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면 혹시 그것이 그 복이 사람에게 들어가지 않는다면 내가 그를 축복해 주었으니 그 복이 나에게 온다는 것을 잊지 말라. 

 

2021년 12월 20일(월)

정병진목사

 

 

다윗과 골리앗과의 싸움은 무모한 싸움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다윗이 승리한다. 그런데 다윗의 손에는 무기가 들려있지 않았다. 골리앗은 블레셋나라의 싸움돋우는 자로서 거인이자 용사로서 정복불능의 전사였다. 그런데 다윗은 소년으로서 전쟁에 나가서 그를 물리치고 만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싸움이 말해주는 3가지 잊지 말아야 할 3가지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2021-12-19(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무엘상강해(29) 다윗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킨 거인 골리앗(삼상17:38~5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_hJ8Vl_cVPY [ 혹은 https://tv.naver.com/v/24171270 ]

 

  다윗과 골리앗과 싸움, 사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이야기다. 보통 사람들은 중과부적의 적을 상대할 때에 적을 골리앗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믿는 이들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단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의 한 장면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한 의도와 목적이 분명 있을 것이니 말이다. 대체 사무엘서의 기자는 무엇 때문에 이 이야기를 이처럼 자세하게 기록해 둔 것인가? 그리고 더불어 이 이야기를 통해서 누구든지 공부할 수 있는 영적인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골리앗에서 비해서 턱없이 연약하고 부족했던 다윗이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들도 더러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2.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 참여하게 된 배경은 어떠했는가?

  지금까지 사울은 몇 번에 걸쳐 블레셋과 싸움을 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에는 블레셋에 싸움 돋구는 자가 등장하여 이스라엘의 사기를 완전히 쏙 빼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울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다. 계산해보면,  사울의 나이는 적어도 65세는 되었을 것이며 많게는 70살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윗이 이 전쟁에 전사로 참여할 수 없는 나이라는 것에서 가늠해볼 수 있다. 사실 다윗은 15세 정도였을 때에 사무엘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리고 사울에게서 하나님이 떠나가고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역사하고 있었을 때에, 수금연주하는 자가 되어 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궁궐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다윗의 악기를 연주할 때에 사울의 병은 그때마다 잦아들었고 왕은 기뻐하여 그를 자신의 무기드는 자로 삼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다윗은 아버지의 명을 받아 형들의 안부를 묻고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세 형들의 병참식량을 전달하기 위해 전쟁터에 갔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마도 다윗이 수금탔던 일들은 사울이 이상 증세가 나왔을 때에만 적용되었던 것 같으며, 사울왕의 무기드는 자도 여러 명이 있었다든지 아니면 아니면 이번 시기에는 그러한 역할을 다른 사람이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민수기 1:3에 의하면, 다윗은 아직 어렸다. 왜냐하면 남자가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나이는 20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전쟁에 나가지 못했으나,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인하여 전쟁터에 나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때 적들에게서 싸움돋우는 자가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된다. 

 

3. 왜 이제까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거인족이 이 전쟁에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인가?

  사실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을 정복하러 들어갔을 때에 가나안 땅에는 거인족에 해당하는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영토 내에 있는 아낙자손은 전멸을 당했다. 그렇지만 블레셋 땅에 속한 가사와 가드 그리고 아스돗에는 그때까지 아낙자손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수11:22). 본문에 보니 골리앗은 가드사람이라고 나와 있다(삼상18:4). 그러니까 골리앗은 블레셋 나라 가드 땅에 살아남은 거인족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번 전쟁에서는 대적의 왕들이 등장하지 않고 싸움돋우는 골리앗이 등장하여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는가? 그것은 이외로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세우신 목적이 있었는데 그가 자신이 받은 사명대로 살지 않으니 적이 득세하게 하신 것이요. 그렇게 설처대는 블레셋의 강한 장수라 할지라도 다윗이 나와서 물리치게 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왕으로 다윗을 선택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다윗이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이골이 나 있는 용사를 물리친다면 전쟁의 승리는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4.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었던 3가지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다윗이 골리앗과 싸웠던 이 싸움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이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앙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다. 그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분이라고 믿었다. 그것을 그는 몇 번씩이나 말했다(삼상17:26,36,46~47). 하나님은 전능자이기 때문에 그분을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다윗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도 하나님은 자신을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자나 곰이 와서 양의 새끼를 물어갈 때에도 따라가서 그 짐승들의 입에서 양을 꺼낼 수 있었으며, 또한 그 짐승들이 자기를 해하려 할 때에는 그것들의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일 수가 있었다. 특히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모욕하는 자는 가만 두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은 하나님께서 처리해주실 것을 알고 있었다(삼상17:36,45). 그러므로 다윗은 골리앗에게 나아가면서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라고 했던 것이다(삼상17:45). 

  둘째, 다윗의 준비됨이 있었다. 다윗은 사실 전투경험은 없다. 하지만 그는 전투능력을 갖춘 자였다. 그에게는 2가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첫째는 그의 담대함이었다. 그는 양떼를 해치는 사자과 곰을 만나서 그것과 대치할 때에도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둘째는 양떼를 이끄는데 필요한 물매를 던지는 능력이 탁월했다. 사실 목동에게 있어서 양떼를 제 길로 인도하려면 물매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멀리서도 양떼를 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양떼를 이끄는 대장 숫염소가 있는데, 그 놈만 잘 관리하면 양떼를 관리하는 것이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물매로 돌을 날려서 대장 숫염소의 배를 맞추는 훈련을 많이 했을 것이요. 문제가 생기면 정확히 물매로 돌을 날려서 그 숫염소의 배를 맞추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울왕은 골리앗을 상대할 이스라엘 병사로서 다윗을 보내야 했다. 그러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선 자신의 군복과 무기를 들게 했으나 맞지가 않았다. 다윗은 아직 어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몇 걸음 걸어본 다윗은 사울의 군복과 장비를 벗어놓고 그냥 양치는 목동으로 모습으로 골리앗 앞으로 나아갔다. 양칠 때 사용하는 막대기와 물매만을 들고 나간 것이다(삼상17:40). 

  셋째, 적의 방심과 헛점이 있었다. 골리앗은 용사 중의 용사였다. 특히 어려서부터 그는 싸움꾼이었다(삼상17:33). 그리고 전쟁터에 나온 그의 모습은 철저히 전투장비로 무장한 것이었다. 먼저 그는 기골이 장대했다. 그의 키가 여섯 규빗 한 뼘(약 2m80cm)이나 되었으며, 그의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 갑옷을 입었으며(갑옷 무게만 오천 세겔 곧 57.5kg), 두 다리에는 놋으로 만든 각반을 찼으며, 어깨 사이에는 놋창을 그리고 손에는 창자루를 들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그의 칼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병기든 소년은 그의 방패를 들고 있었다. 그러니 과연 누가 이 장수를 무찌를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강한 자라도 헛점은 있게 마련이다. 그때였다. 소년 다윗이 그를 상대하겠다고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니 골리앗의 눈에 소년 다윗이 얼마나 가소롭게 보였겠는가? 그는 말했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오느냐(삼상17:43)." 그러자 골리앗은 자신의 놋투구를 벗어서 땅에 내팽개치고는 다윗에게도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자 다윗은 물매에 엘라 골짜기에서 주운 돌멩이를 넣고는 빙긍빙글 돌리다가 골리앗의 이마를 향해 던졌다. 골리앗의 다른 신체 부위에는 돌멩이가 치고 박힐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날 따라 놋투구를 쓰지 않았던 골리앗의 이마에 정면으로 돌멩이가 박혀버린 것이다. 그는 앞으로 쓰러졌고 이어 먼지가 날렸다. 그러자 다윗은 달려가서 그의 허리에서 칼을 빼서 그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보고는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는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스라엘과 유대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들을 쳐부수었으니 가드와 에그론에 이르까지 그들을 칠 수가 있었다. 

 

5. 이 싸움이 말해주는 3가지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상의 이야기를 통하여 다윗이 골리앗과 치른 전투는 단순히 두 나라간의 전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가진 신체적 조건과 전투장비로써 골리앗을 죽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싸우러 나갈 때에 그의 손에는 사실 칼도 없었다. 오직 다윗은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처리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영적 교훈이 있다면 우리도 그것을 가슴에 담아두어야 한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자를 도와주시고 그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다윗이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은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믿음과 그분은 자기를 찾는 자들을 도와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자는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신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다윗이 평소 때 양떼를 짐승들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싸운 경험이 없었거나 물매로 이끄는 숫염소의 배를 맞추는 실력이 없었더라면 이 전쟁에서 다윗이 승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평소때 사람은 아니었지만 양떼를 해치는 짐승들과 싸우면서 담대함을 갖게 되었고, 차근차근 실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도 그를 도와주시는 것이다. 

  셋째, 아무리 강한 적이라 할지라도 약점은 있다는 것이다. 골리앗이 강했고 단단한 무장을 했지만 그날 놋투구를 쓰지 않음으로 그날 골리앗은 죽고 말았다. 그렇다. 사탄마귀가 우리 인간보다 강할지라도 그들에게도 역시 약점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십자가에서 패배하여 무장해제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십자가에서 패배한 적이라는 것을 붙들어야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다윗은 이제 사울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될만한 재목감이라는 것이 이 전쟁을 통하여 입증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적의 장수를 칼이 없는 채 물리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대의 지휘관이 된 다윗은 가는 곳마다 적들을 제압함으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그 사명을 바톤터치하신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울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으로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내는 일이었다(삼상9:16). 하지만 사울왕은 이제 그 일을 해낼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의 반볼적인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떠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로 결정하셨으니 그가 바로 다윗이었던 것이다. 

 

6. 나오며

  우리는 과연 다윗이 이렇게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특히 다윗이 골리앗과 치르게 된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투가 아니었다면 과연 다윗이 역사의 전면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과연 다윗이 모든 이스라엘백성들로부터 칭송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같이 해 본다. 그렇다. 이 모든 배후에 하나님께서 섭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적절한 시기에 당신의 사람을 세워 나가신다. 이제 사울은 더이상 하나님이 쓰시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지속적으로 당신의 말에 불순종하는 자를 들어쓰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다윗이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고 그가 자라서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재목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다윗을 일약 이스라엘의 왕까지 생각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으니, 그것이 바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다윗은 사울왕의 시기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미움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다윗이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온전히 세워지기까지는 숱한 난관들을 통과해야 했다. 하지만 다윗은 그것을 잘 극복해나가게 된다. 이 뒷 이야기는 이 다음 시간에 기약해보자. 

 

 

2021년 12월 19일(주일)

정병진목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사울을 기름부어 세우셨다. 그런데 그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던 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다. 그런데 그만 22년만에 성령께서 그를 떠나가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악한 영이 그를 두렵게 하였다. 대체 사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리고 그가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는가? 고로 오늘은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서 떠나가는 것과 악한 영이 그에게 역사하는 일들을 구약적인 입장에서 면밀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우리에게도 인식의 놀라운 전환이 있을 것이다.

2021-12-17(금) 금요기도회
제목: 사무엘상강해(28) 사울에게서 떠나가는 하나님의 영과 역사하는 악령(삼상16:14~2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ZzHjXiQOWaQ [ 혹은 https://tv.naver.com/v/24170826 ]

 

1. 들어가며

  사무엘상의 이야기는 엘리 제사장과 사무엘 그리고 사울과 다윗왕의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중심이자 결론은 다윗왕에게 있다. 다윗왕 때문에 앞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이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소개하고자 사무엘상이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 다 범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은 왜 몰락하게 되었고 다윗왕은 흥왕하게 되었는지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져야 한다. 그리고 둘 다 범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울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되었고 다윗왕은 굳건히 서 가게 되었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중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고 있을 때에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울은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는 것도 안타까운 일인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한 영들이 와서 그를 두렵게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울은 어떻게 되어서 이런 상황으로 계속해서 몰리는 형국이 되고 말았는가?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받게 되는가? 그래서 오늘은 이 두 사람의 상태 변화를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악령의 관계를 통하여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사울왕은 대체 어떤 죄를 지은 것인가?

  사울왕의 범죄는 그가 왕이 된 후 2년이 되었을 때에 일어났다(당시 42세). 그 일은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시대였다. 그러므로 이전까지는 사사 혼자서 모든 일을 주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선지자(제사장 포함)의 직무와 왕의 직무가 각기 구분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왕은 이제 왕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해야 했고, 사무엘은 선지자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런데 다급한 사울왕이 그만 월권행위를 하고 말았다. 아무리 자신이 왕일지라도 사무엘이 오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전쟁을 시작해야 했는데, 사무엘이 조금 늦게 오게 되었을 때에 다급한 사울왕이 그만 제사를 직접 드렸기 때문이다. 이 첫 번째 임무는 이제 왕정시대를 시작해야 할 사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만 왕이 된 나머지 제사장의 직무까지 자신이 감당하려 하였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사울왕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세워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삼상13:13~14). 그러므로 사울의 왕국은 길게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사울왕의 범죄는 그가 왕이 된 후 22년이 지난 후였다(당시 62세). 이때는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특명을 하달하였다. 그것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것이었다(삼상15:3). 그러나 사울은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려 주었고, 하나님께 제사 드린다는 핑계로 양떼와 소떼 중에서 기름진 것을 살려 두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모든 것을 멸하라는 헤렘 전쟁이었기에 만약 그대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그 벌을 대신 받는 전쟁이었다. 그러니 결국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준 죄로 인하여 결국 사울왕이 죽게 된다.

 

3. 사울이 지었던 죄목은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위의 2가지 사례를 통하여 사울왕의 죄목을 열거한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불순종의 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고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의 죄를 '불순종'의 죄라고 평가하지 않았고,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시켜 사울왕의 범죄에 대해 이렇게 책망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불순종한) 것은 '사신 우상(드라빔)에게 절하는 죄'와 같기 때문이라(삼상15:23)" 그렇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사울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는 제1계명 곧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그 위에 두는 죄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며, 사울왕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은 제2계명 곧 우상을 숭배하는 죄와 같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사울왕은 용서받기가 어려운 죄를 범한 것이다. 그것도 사울왕은 직접적인 명령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것이었기에 그 죄가 무거운 것이었다. 결국 2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어기게 된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불운을 맞이하게 된다. 

 

4. 사울왕으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구약시대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오시면 어디에 머물러 계셨는가? 종합해 보면, 구약시대 성령은 사람 속에 내주하시지 않고, 사람의 머리 위에 머무르셨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사람 위에 내려온 영은 신약시대와는 달리 사람 위에 머무시다가도 떠나가실 수도 있었다. 사람 위에 임하였던 성령이 떠나가는 사례가 나오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사울왕의 경우다. 그럼, 언제 사울왕에게 성령이 내려오셨는가? 그것은 그가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던 날이었다(삼상10:10). 그때 사울왕도 여호와의 영이 자기 위에 내려오심으로 자기도 예언을 하게 된다. 그런데 사울왕은 연거푸 2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성령께서 그를 떠나가신다. 그렇다면 죄를 범한 자가 생기면 성령께서는 항상 떠나가시는가? 그건 아니다. 예를 들어 다윗이 범죄했어도 성령께서 그를 떠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울왕의 경우는 성령이 그의 위에 내려오신 후 22년 차에 그를 떠나가시고 만다. 대체 사울왕의 머리 위에 내려오셨던 성령께서는 왜 사울왕을 떠나가게 되었는가?

  사울왕으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시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사울이 범죄하기는 했지만 그에게서 성령이 떠나가게 하였던 직접적인 요인은 그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다. 그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자신이 분명 죄를 지었지만 변명만 늘어 놓을 뿐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말렉과의 전투에서는 입술로 범죄했다고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사람들의 인기와 눈치를 살필 뿐 하나님에 대한 눈치는 전혀 없었다. 둘째,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에게 왕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을 거두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사람들의 인기와 그리고 자신의 명예만을 추구하는 사울왕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왕직을 거두어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하셨다. 그에게서 성령이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울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는 순간 그에게서 초자연적으로 주어졌던 왕의 직무의 은사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그로부터 왕의 직무를 반납받으시려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을 거둬가신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영에게 감동된 자를 찾아내어 그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맡기시려고 그에게서 성령을 거둬가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다시 하나님의 영에게 감동된 자는 대체 누구였는가? 그는 바로 이새의 8번째 아들 '다윗'이었다. 다윗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준비한 탁월한 왕으로서 왕의 직무를 감당할 합당한 조건들을 갖춘 자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울왕은 자신에게서는 성령이 떠나가고, 이제 다윗에게 성령이 함께 한다는 것을 알고는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애를 쓴다. 무려 3,000명의 군사를 대동한 채 그를 죽이려고 10년간 다윗을 쫓아다녔기 때문이다.

 

5. 사울을 찾아온 악령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

 그렇다면 성령이 떠나간 자리에 누가 대신 그 자리를 채우게 되었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를 그곳에 하나님께서 부리신 악령이 채웠다고 말한다. 악한 영이 그에게 역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을 수 있다. 악령이 스스로 사울왕에게 내려온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울왕에게 내려간 것인가? 그런데 정답은 후자다. 악령이 스스로 사울왕에게 온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보다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사무엘상 16:14,15,16에는 각각 세 번에 걸쳐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이것은 의역이고 히브리어를 보면 '여호와 앞에 있는 악령' 혹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악령'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이 악한 영인 것은 맞지만 그 영은 하나님의 명령하에 그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악한 영은 '사탄 마귀'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훗날 북이스라엘의 아합왕 때에도 천상회의 중에 이러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한 영이 자신이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아합을 속여 길르앗 라못에서 죽게 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왕상22:21~22). 즉 구약시대만 해도 사탄 마귀는 아직 하늘에서 쫓겨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는 욥기서 1장과 2장에서도 나온다. 그러니까 이때 악령은 하나님의 명령과 허락하심 하에 움직이고 있는 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영이 와서 하는 일은 그를 두렵게 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이 떠나간 자리에 악한 영이 와서 공포심을 일으키게 한 것이었다. 이는 사울로 하여금 빨리 회개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붙잡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사울은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가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물어 보고는 사람들의 꾀를 의지하게 된다. 그것은 자기의 머리를 괴롭히는 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때에도 다윗이 왕궁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통로로 그것을 사용하신다. 즉 젊은 신하의 건의를 통해 수금 잘 타는 자로서 천거를 받아 왕 앞에 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목동으로 양떼를 치면서 수금을 타던 무명의 다윗이 드디어 왕궁에 들어오게 되고, 왕은 그를 치료 악사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그를 자신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게 된다. 이때 다윗의 나이는 20세 가량 되었던 것 같다. 

 

6.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영의 활동과 사탄 혹은 귀신의 활동은 어떻게 다르며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우리가 오늘 사울에게서 떠나가는 하나님의 영과 사울에게 역사하는 악한 영의 활동을 통하여 성령과 악령의 역사에 대해 몇 가지 정리할 것이 있다. 그것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영의 활동이 다르다는 것과 악한 영의 활동도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다. 먼저, 하나님의 영의 활동에 대해 정리해 보자. 좀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이 세상에 보내신 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성령은 사람 속에는 들어오지 않으셨다. 오직 밖에서 역사하실 뿐이었다. 그리고 밖에서 역사하실 때에는 사람들에게 어떤 직임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능력들을 공급하시는 역할을 수행하셨다. 대표적인 것은 약 6가지다. 그것은 첫째로, 지도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사사 옷니엘의 경우(삿3:10)와 사사 기드온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삿6:34). 그리고 둘째로, 초자연적인 능력(힘)을 발휘하게 하는 경우인데 이 대표적인 사례는 사사 삼손의 경우다(삿14:6,19). 그리고 셋째로, 예언을 하게 하는 경우인데 대표적인 사례는 사울왕의 경우(삼상10:10)이며, 이후에는 거의 모든 선지자들로 확대가 되었다. 넷째로, 지혜와 지식과 기술을 나타나는 경우인데, 이 대표적인 사례는 성막을 지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경우다(출35:30~35, 사11:1~2). 마지막으로 다섯째로, 환상과 꿈을 꾸게 하는 경우다. 이러한 대표적인 사례는 다니엘(단2:19, 4:9)과 에스겔이다(겔1:3~4). 그런데 이러한 성령의 역할은 성령께서 그 사람을 떠나게 되면 사라지곤 하였다. 그런데 신약시대 들어와서는 양상이 좀 달라진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위에만 부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사람 속에 내주하시게 되었기 때문이다(요14:16~17). 그러므로 위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 들어와서 내주하시는 성령을 일컬어 우리 주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셨다(요14:16,26,15:26,16:7). 보혜사 성령은 사람 속에 내주하시어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인치시며,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게 해 주며,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하시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람 위에 머무셔서 구약시대보다 더 다양한 종류의 은사들도 주신다. 

  뿐만 아니라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악한 영의 활동도 달라진다. 구약시대에는 사탄의 왕국이 없었다. 사탄은 아직 하늘에 있었다. 즉 하늘에서 아직 쫓겨나기 전의 상황이었다. 그때 사탄 마귀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이 지상에 내려와 악한 쪽의 일을 감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 직전에 하늘에서 쫓겨나는 일이 일어났다. 그때 사탄은 자신을 따르는 천사들의 무리 1/3이 하나님을 대항하게 되는데 그때 사탄과 그를 따르는 타락한 천사들은 하늘의 군대 장관인 미가엘과 그리고 그의 천사들에 의해 쇠사슬로 묶임을 받아 하늘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음부에 자기의 자리를 만들어 어둠의 제국의 왕과 그의 부하들이 되어 일하고 있으니, 그들이 바로 사탄과 그를 따르는 귀신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이후 사탄과 귀신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에 따라 인간을 공격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달랐다. 아직 사탄 마귀가 하늘에서 쫓겨난 상황이 아니었다. 다만 몇몇 천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복종하여 하늘에서 쫓겨난 상태에 있었다. 그들이 이 세상에 내려와서 마술사나 점쟁이, 박수 무당 등의 몇몇 사람들 속에 들어가 역사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도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고로 사울에게 내려온 악한 영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악한 영이었다. 그러므로 그 일은 하나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을 붙잡고 의지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한 것인데 사울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였다. 

 

7. 나오며

  하나님께서 사울왕에게서 성령을 거둬가신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에게 악한 영을 붙여 두신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두 번씩이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을 거역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그 일은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어긴 것이었기에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징계를 내리지 아니할 수가 없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선 그에게서 성령을 거두셨다. 이는 그를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경고 조치였다. 그리고 그 왕위를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으로 이양하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내려놓지 못한 채 차기 왕으로 예정된 다윗을 죽이려고만 했다. 그때 사탄은 사울왕의 마음 속에 있는 시기 질투심을 이용하여 사울로 하여금 혈기와 분노에 휩싸이게 만들었고 다윗에 대한 미움을 더 확대시켜 그를 죽이려고 하는 충동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마치 가인을 통해서 아벨을 죽이게 한 것처럼 말이다(요일3:12).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울로 하여금 회개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받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였다. 그래서 사울이 그때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돌이켜 하나님을 붙잡게 되면, 그의 죄를 용서하여 지옥에 떨어지는 일만큼은 그에게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사울은 그렇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끝내 붙잡지 못했다. 그로 하여금 회개하여 돌이켜 용서받고 지옥만큼은 면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 차리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어찌 당시의 사울왕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우리 자신들의 경우는 정녕 한 번도 없는 일이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나에게 무슨 죄를 회개하라고 하시는지를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2021년 12월 17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27) 하나님은 왜 다윗을 이새의 가문에 보내셨는가?(삼상16:6~13)_2021-12-17(금)

https://youtu.be/UBV3Z_x82kk  [혹은 https://tv.naver.com/v/24131831 ]

 

1. 다윗은 어떻게 되어 이 땅에 보내어지게 되었는가?

  사람은 영과 육이 만나 생명 활동을 한다. 육체는 양쪽의 부모의 유전자를 통하여 물려받은 것이지만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고로 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특별한 안배가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어떤 계획을 이루기 위해 특별히 준비된 영을 보내시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보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보내어지기도 한다. 그중에 '다윗'왕이 들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태어나기 8년 전에 이미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시겠다고 결정하셨기 때문이요(삼상13:14), 사울왕을 폐위하기로 결정하셨을 때에는 이스라엘 나라를 사울보다 더 나은 왕의 가까운 친구에게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삼상15:28). 그렇게 이 세상에 보내어진 자가 바로 이새의 8번째 아들인 다윗인 것이다(기록은 7번째 아들로 기록됨). 

 

2. 다윗이 특별히 다른 집안이 아니라 이새의 집안에 보내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다윗은 이새의 집안이 아닌 다른 집안이나 가문으로 보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의 집안이자 가문에 보내어진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첫째는 B.C.1858년 야곱의 유언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다. 왜냐하면 147세의 일기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던 야곱이 침상에서 자신의 12명의 아들들을 불러 놓고 유언할 때에, 성령의 감동으로 12아들들의 미래를 예언한 바 있었는데, 그중에 넷째 아들인 유다에게는 동물의 왕인 사자(lion)의 새끼와 같다고 하면서, 장차 왕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창49:9~10). 그래서 이제 이 예언의 말씀이 성취할 때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유다 지파의 사람으로서 태어나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새의 가문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또한 요한계시록에서도 예수께서 직접 당신을 소개하실 때에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자손이자 뿌리(계4:5, 22:16)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룻기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당시 유다 지파의 사람들이 베들레헴에서도 많이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중에 왜 이새의 가문에서 다윗이 태어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아 있다. 

 

3. 사람이 땅에서 살면서 받게 되는 저주는 어떻게 해서 받게 되는가?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제1계명(하나님 외에 다른 신 숭배)과 제2계명(우상 숭배)을 어긴 자에게 죄를 갚으시되 자손 3~4대까지 갚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출20:5).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의 죄값을 어떻게 그의 자손 3~4대까지 물으시는가? 그런데 영안을 열어서 살펴보니, 적어도 신약시대부터는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든지 하면 악한 영들(모양은 뱀들)이 사람 속에 들어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일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그 증상이 급격히 늘어나게 된다. 그런데 한 번 사람 속에 들어온 악한 영은 그 사람에게서 없어지거나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손 3~4대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사람이 죽을 때에 사람 속에 빠져나와 그 사람의 후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은 죄를 지은 즉시 회개하여서 이러한 악한 영을 받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자기의 조상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들가 있다면 이미 자기 안에 엄청난 숫자의 악한 영들을 몸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 악한 영들에 따라 갖가지 종류의 저주의 증상들이 나타나는데, 어떤 정류의 우상을 숭배했느냐에 따라 다양하다. 예를 들어 조상 제사를 열심히 드린 자는 뇌 속에 악한 영이 자리 잡게 되며 그러면 사람의 뇌가 썩기 때문이 후손들 가운데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한다. 특히 종손 집안에 그러한 사람이 많이 있다. 이는 우상 숭배의 저주가 후손들에게 나타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4.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받게 되는 축복은 어떻게 해서 받게 되는가?

  그런데 저주가 후손에게 내려가듯이 마찬가지로 축복도 후손에게 내려가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원리는 저주와 비슷하여 축복도 마찬가지다. 즉 선조들이 얼마나 자비를 베풀고 선을 행하고 구제하며 이웃을 불쌍히 여겼느냐에 따라 후손들이 복을 받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적인 복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선조들이 베풀며 살고 남들을 도와주는등 남을 배려하는 등의 선한 일을 하고 살았을 때에는 후손들이 어떤 복을 받게 되는가? 그것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10가지 종류의 복을 받게 된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선조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살았을 때에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복에는 1)사랑받는 복, 2)인정받는 복, 3)물질의 복, 4)세움을 받는 복, 5)채워지는 복, 6)성공의 복, 7)명예를 얻는 복, 8)교육받는(배움의) 복, 9)형통함의 복, 10)나눔의 복 등이 있다. 그러나 후손들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크게 쓰임받는 영적인 사람이 나오려면 적어도 조상 1~4대가 신앙의 위대한 결단을 하거나 순교자가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내 집안에 복받는 사람,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이 나오지 않는 것은 조상들 중에 그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이 메시지를 듣는 이부터 새로운 가문의 포문을 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말씀에 등장하는 이새의 아들 '다윗'은 조상들 때문에 영적인 축복을 받은 사람의 대표적인 예이다.  

 

5. 이새의 아들 다윗은 그의 조상들이 어떤 씨앗을 뿌려서 거두게 된 열매인가?

  다윗은 이새의 가문에서 태어난 것은 그냥 어쩌다가 그 가문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 집안의 선조들이 뿌린 씨앗이 있었기에 그러한 열매로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 가문에 보내신 것이다. 한 가문의 신앙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이 나오려면 사실 선조들이 신앙의 씨앗을 뿌려 놓았을 때에 가능한 일이다. 결코 훌륭한 후손은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무엘의 출생의 비밀을 1~2장에서 살펴보았다. 거기에서 살펴보았지만 사무엘은 한나의 눈물의 금식과 작정 기도의 결과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신앙의 위대한 인물 같은 경우는 기도의 응답이든지, 선조들의 선행이든지, 믿음의 결단 같은 것이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예인 것이다. 먼저 그의 할아버지(2대 조상)부터 달랐다. 다윗의 할아버지는 '오벳'라는 사람인데 그는 자기 할머니였던 나오미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한 사람이었다(룻4:15). 그리고 '오벳'의 이름의 뜻도 '섬기는 자, 봉양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럼 이제는 오벳보다 더 윗대의 조상들에 관하여 살펴보자. 사실 다윗의 영성은 이미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먼저 증조할아버지(3대 조상)와 할머니의 신앙의 모습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다윗의 증조할아버지는 '보아스'라는 사람이다. 룻기서에 나오는 바로 '보아스'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친족이었던 엘리멜렉의 기업을 물어주어 나오미를 가난에서 건져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과부가 된 엘리멜렉의 자부 룻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해 주었던 인물이다. 그는 베들레헴의 유력한 자였고 돈도 있었지만 그는 돈을 언제 써야 하는지는 알았던 자였다. 그리하여 나오미의 기업을 물어줄 수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이처럼 객과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매우 깊은 신앙심도 있었다. 그래서 고엘(기업무를 자) 제도를 더 광범위하게 자기에게 적용하여 엘리멜렉의 죽은 아들이었던 말론의 아내를 자기의 아내로 맞아주었다. 무엇보다도 보아스는 과부이면서 이방여인이었던 룻을 자기의 아내로 맞이한 이유는 그녀가 하나님을 믿겠다고 자기 고향 친척 부모를 떠나왔기 때문이다. 그렇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헤아릴 줄 알았던 자가 바로 보아스였던 것이며, 그래서 기꺼이 자신의 것을 가지고 쓸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윗의 증조할머니 '룻'은 또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방금 전에도 언급했지만 자기가 믿었던 여호와 한 분만을 섬기기 위해 그녀도 역시 기꺼이 자신의 본토와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여인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다윗의 고조할아버지(4대 조상) 대의 신앙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자. 다윗의 4대 조상은 '살몬'이라는 인물이다. 아마도 추측컨대 살몬은 여리고성을 정탐하러 들어갔던 두 명의 정탐꾼 가운데 한 명이었던 것 같다. 그는 자기 민족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한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해낸 인물로서 주의 종의 말에 순복했던 사람이었다. 더욱이 다윗에게는 살몬의 아내가 되었던, 4대 고조할머니가 매우 중요한데, 그녀 또한 다윗의 신앙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다름 아닌 가나안의 첫 성인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여호수아를 읽어 보면 잘 알 수 있겠지만, 그녀는 여관집을 운영하던 사람이었는데, 자기 집에 정탐꾼을 맞아들이면서 그들을 숨겨주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걸었던 여인이었다. 왜냐하면 여관집을 운영하면서 참 신이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주변 민족에게 행하신 일들을 들었고, 그리하여 그녀도 룻처럼 오직 하나님만이 상천하지에 유일신 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으니, 그녀를 살펴보면 그녀에게도 순교자의 영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이새의 아들로서 다윗이 그러한 훌륭한 믿음의 가문에서 태어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상들 중에 헌신하고 충성된 사람들이 많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앙을 지켜 내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까지 내어놓았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후손으로서 다윗이 나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참된 왕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막내아들에게 이렇게 좋은 믿음을 가진 영을 집어넣어주었기 때문이다. 

 

 

2021년 12월 17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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