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15)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장애인은 어떻게 고침받았는가?(행3:1~10)_2022-06-21(화)

https://youtu.be/uwUOGYxf3Xo  [혹은 https://tv.naver.com/v/27592997 ]

 

1.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베드로와 요한에게 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오순절 성령강림과 성령세례 사건이 있은 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3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놀라운 사건이 예루살렘에서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한 번 예루살렘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장애인으로 있다가 태어나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40여세나 된 남자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서 그만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술로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는 이것을 지켜 본 사람들의 반응으로 알 수 있는데, 그때 그 광경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경악하였고 무아지경에 빠져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행3:10).

 

2. 나면서 못 걷는 자가 고침받은 일은 언제 어디에서 일었던 사건인가?

  그렇다면 나면서 못걷는 사람이 고침받은 일은 언제 어디에서 일어났을까? 때는 오순절 성령강림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그리고 장소는 성전의 미문(美門, Beautiful Gate)에서였다. 그렇다면 성전의 미문은 어디에 있는 문일까? 성전의 미문은 성전의 동편에 있는 정문 쪽의 문이다. 아래의 사진으로 보면 그 문의 위치를 금방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크게 4개의 뜰이 있다. 제일 처음으로 '이방인의 뜰'이 있는데, 이것은 성전의 제일 바깥쪽에 있는 ㄷ자 형태의 뜰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전의 동쪽에 있는 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처음 만나는 것이 바로 '여인의 뜰'이다. 그리고 여인의 뜰에서 '니카노르의 문'을 통과하면 나오는 것이 '이스라엘의 뜰'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뜰 앞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성소와 지성소의 바깥쪽의 양쪽 공간을 가리켜 '제사장의 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드론 골짜기에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을 '수산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면서 못걷는 자가 구걸하다가 고침받은 장소인 '미문'은 어떤 문을 가리키는가? '수산문'인가,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들어가는 문인가? 아니면 여인의 뜰에서 이스라엘의 뜰로 들어가는 '니카노르의 문'인가?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가장 신뢰할만한 것으로는 유대 역사가 유세푸스의 기록인데, 그는 자신의 책 "유대전쟁사" 제3권 제17장 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서 해 뜨는 쪽을 향하여 있는 내부 성전(제사장의 뜰)의 문인 동문(銅門):bronze gate)[㈜ 고린도의 청동문(전쟁.5권. 5:3(201))은 아마도 여인들의 뜰의 동쪽에 있었을 것이며, 행 3:2의 미문(美門)과 미쉬나(Mishna)의 나카노르(Nicanor)문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로 우리는 여인의 뜰에서 이스라엘의 뜰로 들어가는 문인 니카노르의 문이 성전 미문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전에 들어갔던 자는 여인의 뜰의 맨 앞쪽 니카노르의 문 앞에서 구걸하고 있는 이 남자를 다 지켜보았을 것이다. 

 

3.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장애인인 채 태어났던 청년은 어떻게 고침을 받게 되었는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났던 어떤 남자가 고침받았던 사건은 왜 그리 충격적인 사건이었을까? 그것은 이 남자의 신체의 어떤 부분이 다쳤거나 고장났던 것이 치료된 것이 아니라, 아예 다리를 쓸 수 없게끔 태어난 사람이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하반신 장애인으로 태어난 자가 고침을 받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옷으로 빗대어 말하자면, 사용하던 옷의 찢어진 것을 수선한 것이 아니라, 없던 옷의 일부를 새로 만들어 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일은 병고침의 사건이라기보다는 창조의 기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니 온 예루살렘이 소동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이 남자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전의 미문(아름다운 문) 앞에서 항상 구걸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려 수십 년을 그렇게 해 온 것이다. 그의 나이가 당시 40여세나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오랫동안 성전 앞에서 구걸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날도 그는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베드로와 요한이 그 친구를 눈여겨본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를 향해 일어나서 걸어갈 것을 명령했을 때, 그 친구가 정말 일어서더니 걷고 뛰어버린 것이다. 

 

4.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걷게 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가?

  그렇다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어떻게 해서 걷게 되었는가? 그의 믿음이 좋아서였는가? 아니면 베드로의 능력 때문이었는가? 그것은 그 장애인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한 것이다. 만약 그것이 맞는 이야기라면 베드로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결론이 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날 베드로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 장애인의 믿음으로 나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것은 베드로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낫게(창조의 기적이 일어나게) 할 수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첫째, 베드로의 믿음 때문이다(행3:16).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하여 확실히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분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베드로의 기도 때문이다(행3:1). 왜냐하면 그날도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시간의 하나인 오후 3시의 기도 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행3:1). 1절을 헬라어로 읽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제 9시(오후 3시) 기도 시각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안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렇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가는 것은 그때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하고 있던 습관처럼 그날도 오후 3시가 되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베드로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에 몰두하는 일을 계속해 온 것이다. 사실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의 은사를 받으려면 하루에 6~7시간씩 6개월을 기도하면 능력을 받는다는 말이 있다. 고로 병든 자의 치유의 관건은 기도의 유무와 그 분량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 나면서 못 걷던 이가 낫게 된 사건은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가?

  나면서 못걷던 이가 낫게 된 사건은 사실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도 남았다. 첫째는 그 사람을 늘 지켜보았던 이들 때문이다. 그 반응은 한 마디로 경악했다는 것이고 자신이 현재 꿈꾸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까지였다는 것이다. 둘째는 다시 베드로에게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성령세례가 부어질 때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 가운데 일어나며 그와 같은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해명을 한 끝에 성도의 수가 3,000명이 늘었듯이 이번에도 베드로가 또 일어나 설교했을 때 그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 중에 믿는 이가 무려 5,000명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는 산헤드린 공회가 베드로를 비롯하여 12사도들을 감옥에 가둬 버린 일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보초가 눈을 뜨고 있는 상황에서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린 뒤에 해방시켜 주신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분이시다. 

 

2022년 06월 21일(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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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14) 최초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과 부흥의 비결(행2:42~47)_2022-06-20(월)

https://youtu.be/HWAv6VM12bI  [혹은 https://tv.naver.com/v/27452170 ]

 

1. 최초로 이 땅에 세워진 교회는 누구인가?

  오순절 성령강림과 더불어 부어진 성령세례를 통해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게 된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태어난 곳의 지방말로 들리자, 그 음성을 듣고 매우 놀란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들으며 놀라워하고 있었을 때,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에게 설교를 행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오순절 성령세례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그들이 못박아 죽인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이 되셨다고 증언한다. 그러자 그 설교를 들었던 헬라파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은 "그러면 우리가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묻게 된다. 그러자 베드로는 일어나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 자신들이 저질렀던 죄악(그리스도를 죽인 죄)을 회개하고 그리고 세례를 받을 것을 주문한다. 그러자 그들이 그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약 3천명 가량이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는다. 그리하여 최초로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를 구성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끝까지 따랐던 120명의 갈릴리 사람들과 더불어 헬라파 유대인과 예루살렘 거주민들이다. 이들 중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자들이 예루살렘 교회 구성원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들의 공통분모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 모두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었다는 점이다. 

 

2. 예루살렘 교회와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똑같이 닮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기본적으로는 옳은 말이다. 최초의 교회의 모습은 일종의 교회원형과도 같기 때문에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우리는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떤 미흡한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전에 우리가 더욱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이룬 사람들과 오늘날 한국교회를 이룬 사람들에게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예루살렘 교회를 이룬 사람들 중에는 단 한 명의 이방인도 없었다. 그들이 본토박이로 살아왔든지 아니면 외국에서 살아왔든지 간에 그들은 모두 유일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며 살아온 유대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한 마디로 '미신성향'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어떠한가? 반 만 년의 세월동안 우리는 미신과 잡신을 섬겨왔다. 우리는 무당에게 물어보고 살았고 부처를 섬기며 살았으며 조상제사를 빼먹지도 않고 지내왔다. 이 모든 것의 실체는 다 귀신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사람의 미신성향은 얼마나 될까? 적어도 60~80퍼센트 정도 된다. 그러니 한국 사람 속에는 악한 영들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교회의 모델로 생각하고 그대로 따라가면 아니 된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먼저 우상숭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귀신들의 미혹과 공격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도 있기는 하지만 과연 그 성령운동에 귀신이 개입되어 있는지 우리는 늘 분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역시 '회개'라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회개할 뿐만 아니라 조상들이 지은 죄까지 회개해서 우리 국민들에게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을 내보내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행되지 아니하면 교회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든지, 겉으로 성령을 따라간다고 하지만 귀신을 따라가는 집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초기의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모습을 가졌는가?

  우리는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의 초기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특히 사도행전 2장 42절에 나와 있다. 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그리고 교제에 그리고 떡을 떼어냄과 그리고 기도들에, 몰두하고 있으면서 있어왔다(행2:42)." 그렇다.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는 4가지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첫째는 교육이다(디다케).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배우기를 힘썼다. 그때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사도들이 직접 들었고 배웠던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리고 말씀 그리고 그분의 일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모든 행적들 역시 구약의 예언을 이루는 것이었다고 가르쳤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교제다(코이노니아). 그들은 집에서 모이거나 성전에 모일 때에 그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들을 간증했을 것이다. 누구에게서 귀신이 쫓겨났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병들었는데 치유받았다는 이야기, 성령세례 후에 어떻게 기도해서 은사를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떡을 떼었다는 것이다. 그럼 떡을 떼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 성찬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애찬을 가리키는 것이일까? 고전11장을 읽어보면, 아마도 그것은 애찬 후에 성찬이 있었음을 짐작케 해 준다. 46절에도 역시 그들이 집을 따라서 떡을 떼었다고 알려주고 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성도들이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면서 모였던 것이고, 그 집에서 모일 때에는 떡을 떼는 일을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저녁에 모일 때 먼저 식사를 했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성찬식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넷째는 기도들에 전념했다는 것이다. 그랬다. 초기 교회는 기도 공동체였던 것이다. 전에 그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도 기도에 몰두한 적이 있는데, 역시 성령을 받아 교회를 이루고 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기도에 힘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에 의하여 기적들과 표적들이 계속해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4.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 나타난 아주 특별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사도행전 2:44~45의 말씀을 통하여 초기 교회가 공산주의적인 공동체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토지와 소유물을 내놓아, 공동체 구성원의 필요를 따라서 전체의 것들을 공동의 것으로 나누어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가 공산주의적인 공동체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오늘날 공산주의 체제와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좀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의 핵심은 자발적인 참여냐 아니면 강제참여냐 하는 것이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토지와 소유물을 하나님께 내놓았던 공동체였다. 그렇다. 초기 교회는 개인의 자유가 존중된 공동체였다. 어떤 것도 강제성이 없었다. 모두가 성령의 감동을 따라 자발적으로 섬김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공산주의는 이와 다르다. 공산주의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는 얼마든지 제한되고 침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에서 결정한 어떤 지시사항이 내려오면 개인의 자유의사와 상관없이 그 지시사항을 따라야 한다. 그것을 거부할 수가 없다. 그것을 거부하면 불법이 된다. 그러므로 초기 교회가 공산주의 공동체였다는 말은 잘못 알려진 말이며, 잘못 파악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자발적인 기부문화와 더불어 개인의 의사가 존중되는 공동체였던 것이다. 

 

5.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사실 우리가 초기 예루살렘 교회를 살펴볼 때에 가장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초기 예루살렘 교회도 역시 사람들의 공동체였는데 왜 그들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자기 자랑을 하게 되고 생색을 내기도 하며, 자기자랑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그러한 부정적인 일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거룩함이 그들 공동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과연 무엇이 그들을 변질되지 않게금 막아준 것인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으로 인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었을 것이다(행2:43). 사실 예루살렘 교회는 남자만 3천명 이상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인구대비 교인수는 상당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렇지만 그들이 서로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고, 서로 죄악된 삶을 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 위에 성령이 임재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령의 임재를 통한 하나님의 나타남은 교회가 올바른 길을 가는 데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에 교회에서 이 기능은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고 없어져버렸다. 하나님의 임재를 모르고 경험도 해 보지 않은 자가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도 하고, 성도가 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은 염소짓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도 교회에서 어른 노릇을 하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2022년 06월 20일(월)

정병진목사

 

 

 

사도행전 2장에는 베드로가 행한 첫 번째 설교가 수록되어 있다. 그는 처음에 어떤 설교를 했을까? 그가 했던 설교가 대체 어떠했길래 그날 그의 설교를 들은 3천명이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는 위대한 일이 발생한 것인가? 우리는 그의 첫 번째 설교를 통해 오늘날 설교자가 천국복음을 전파할 때에 반드시 해야 할 설교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이 빠지면 복음전파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설교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3대지 설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설교의 내용은 무엇이었으며, 그 핵심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2022-09-19(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도행전 강해(13)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무엇이 핵심이었나?(행2:14~4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kRxnSp7Ga18  [혹은 https://tv.naver.com/v/27452063 ]

 

1. 들어가며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시고 성령세례가 부어졌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들이 전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더니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때 120명이 성도들의 말했던 방언('글로싸')은 외국어가 아니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였다. 하지만 당시 예루살렘에 절기를 지키러 왔던 15개국의 헬라파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는 방언을 들을 때에는 자기들이 태어난 곳의 지방말로 듣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동안 행하신 엄청난 일이 무엇인지를 자기들의 언어로 듣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마가 다락방에 일어난 놀라운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자들 중에 맨 나중에 온 자들은 그들의 방언이 통역이 되어 들리지 않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들렸다. 그러자 그들은 120명의 성도들이 아침부터 술에 취한 것이 아니냐고 조롱하였다. 그때였다.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들을 향해 말씀을 선포한다. 그 설교가 오늘 본문의 말씀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때 베드로가 일어서서 선포했던 말씀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베드로의 첫 설교는 대체 어떤 말씀이었으며, 그것은 거기에 모인 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던 것인가? 그리고 이때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2. 베드로의 설교는 크게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오순절날 방언소리를 듣고 몰려온 예루살렘 거민들과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베드로가 했던 설교는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그 내용을 정리해보면, 딱 3가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에게 나타난 성령세례와 방언은 구약예언의 성취라는 것이다. 둘째, 예루살렘 거민들과 헬라파 유대인들이 죽였던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였는데, 그들이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죽였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지적한 것이다. 셋째, 그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그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했다는 말씀이다. 그랬더니 베드로의 말을 받은 자들이 그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는데, 그들의 숫자 무려 3,000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도 역시 예루살렘 교회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기에 이른다. 

 

3. 베드로는 거기 모인 유대인들에게 오순절 성령세례에 대해 어떻게 설명했는가?

  그날 베드로는 무엇을 설교했는가? 그때 베드로는 성령세례와 더불어 120명의 성도들이 말하는 방언을 듣고 놀라서 찾아온 헬라파 유대인들 및 예루살렘 거민들을 향하여 설교를 한다. 그 내용은 오순절날 자신들에게 방언의 은사가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말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모든 사람 위에 부어주실 것이라는 요엘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하였다. 더욱이 자신들은 절대 술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때가 오전 9시인데 어찌 이 시각에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하겠느냐면서, 그것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기 영이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한다. 

  그렇다면, 그때 베드로가 인용했던 요엘 선지자의 예언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요엘2:28~32의 말씀이었다. 그때 베드로는 이 말씀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의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당신의 성령을 부어주시되 나이에 제한없이 부어주시고, 성별에 상관없이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바로 그날이 오늘이라는 것이다(행2:17). 그렇게 되면 자녀들(아들들과 딸들)은 예언을 할 것이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며, 연장자들은 꿈을 꿀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이제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더욱이 그때가 되면 남종들과 여종들까지도 성별에 상관없이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셋째, 때가 되면 이 세상에 종말이 올 것이지만 그때가 오기 전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행2:19~21).

 

4.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죄악을 어떻게 책망했는가?

  이어서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이 저질렀던 죄악에 대해 지적한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큰 능력들과 기사들과 표적들을 베풀어 그가 누군지를 증언하여 주셨건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러 그분을 못박아 죽였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바 대로 섭리를 따라 죽임을 당한 것으로서,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내어 살려주셨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다윗이 썼던 시편 16:8~11의 말씀을 인용한다. 이는 다윗이 항상 자기 앞에 계신 주를 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할 것이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고 했는데, 다윗은 죽어 오늘날에 그 묘가 있기에 이것은 다윗 자신에게 관한 예언이 아니라는 것이며, 그는 왕이었지만 또한 선지자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예언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으켜 세워주셨으며, 하나님께서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시자 그가 승천하여 하늘로 올라가서는 그분이 약속했던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부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죽은 후에 부활하지도 않았고 승천하지도 못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여 승천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편110:1에서 있음을 인용한다. 이는 다윗이 지은 시편으로서, 여호와께서 그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고 예언한 바 있는데, 이것이 그대로 오늘 이루어져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게 되었다고 했다. 결국 이스라엘 온 집이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의 십자가에 못박은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주님과 그리스도게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자 반응은 놀라웠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의 상당수가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는 베드로에게 "우리가 이 큰 죄악을 저질렀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묻게 된다. 

 

5. 베드로의 설교 내용 중에서 세 번째 부분은 무엇인가?

  그러자 베드로가 그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회개하라. 그리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단호히 세례를 받으라. 죄들을 용서를 위하여. 그러면 너희는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행2:38)"라고 하면서 회개를 촉구한다. 그리고 회개를 통한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에 대한 약속은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 해당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말로 밝히 증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당시 삐뚫어진 세대로부터 구원받으라고 촉구한다. 그러자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자들이 전부다 세례를 받았는데, 그날에 삼천 명의 영혼들이 더해져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 설교의 마지작 부분의 내용이다. 

 

6.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의 핵심은 무엇인가?

  고로 우리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의 핵심은 최종적으로는 회개의 촉구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예수님의 공생애 그리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오른편에 앉으심에 관한 내용도 설교에 같이 들어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 사람이 오늘날에도 설교를 한다면 베드로처럼 하면 가장 좋은 설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먼저는 청중들의 당면한 문제에 대해 성경적인 견해를 밝힌 다음,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소개하는 것이다. 특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과 그 의미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이 패역한 세대에서 믿고 회개함으로 구원을 받을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결국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그것이 예수님의 초기의 사역의 요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막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그렇다. 모든 설교에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가 나와야 한다. 그리고 회개를 촉구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설교가 아닌 것이다. 설교란 예수님에 대한 무지한 자가 예수님을 알 수 있게 도와주고,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을지를 모르는 자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 후에 회개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받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회개가 빠지면 그것은 더이상 설교가 아닌 것이다. 더이상 천국복음을 전하는 설교가 아닌 것이다. 

 

7.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에서 맨 마지막에 외친 회개와 그것의 유익은 무엇인가?

  베드로의 설교는 자신이 죄를 지었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선물을 그에게 주실 것이라고 했다(행2:38). 그렇다. 이것이 천국복음전파의 핵심이다. 믿음과 회개를 전하여 구원받게 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이 천국복음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돌아보면, 우리는 그동안 회개에 대해서 너무 소홀히 해왔다. 특히 오직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종교개혁의 사상에 물들여지고 그 뒤에 나타난 만세전의 예정론에 심취한 나머지 그만 회개를 소홀히 취급했던 것이다. 아니다. 회개 없이는 믿음만으로 구원얻을 수가 없다. 그런데 쉽게 구원받기 위해 회개를 빼버린 것이다. 그결과는 어떠해오고 있는가? 참담하기만 하다. 지금 개신교는 거의 구원파 수준의 잘못된 믿음으로 전락해 있다. 믿음만 가지면 구원도 받고 천국도 가게 되고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제사장이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과면 믿음만 가지고 있는 천국갈 수 있을까? 아니다. 많이 어렵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믿음을 갖는 날, 그날에 죽을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믿음을 소유한 이래로 더 많은 시간을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에는 과연 마귀의 우리의 구원을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했는가? 그놈들이 우리들을 천국가도록 가만 놔두겠는가?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여 넘어뜨리려는 판국에, 우리의 구원을 그들이 보장해줄 리가 없는 것이다. 그 녀석들은 택하신 우리들도 할 수만 있으면 유혹하여 죄짓게 하고 죄를 지었어도 이미 예수믿을 때에 해결되었다고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속이고 있다. 그런데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한 번 믿은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줄로 알고 있다. 하지만 아니다. 지은 죄 중에 하나라도 용서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는 용서받지 못한 그 죄 때문에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수적이기 때문이다. 

 

8. 오늘날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회개는 구원받는 회개뿐인가?

  그렇다면 오늘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당시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유대인들처럼 자신이 지은 죄만을 회개하면 되는 것인가? 물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어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이 더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방민족으로서 온갖 우상숭배를 행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상숭배죄로 인하여 수많은 악한 영들이 대물림되어 지금 우리 몸 속에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악한 영들을 제거하기 위한 '회개'가 더욱 더 요구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가난과 질병과 저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악한 영들은 내가 지은 죄로 내 몸 속에 들어와 있기보다는 이미 조상들의 지은 죄로 인하여 조상들의 몸 속에 있던 영들이 대물림 되어 우리에게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갖는 아주 특별한 상황이다. 이것을 미국 그리스도인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우리는 적어도 반 만 년 이상 무당신을 섬겨왔고, 1,600년 이상을 부처와 불교를 섬겼으며, 500년 이상을 조상제사를 드려 귀신을 섬겨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 사람의 몸 속에는 수많은 악한 영들이 있어서, 예수님을 믿어도 회개가 없이는 이러한 영들이 우리 몸에서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새부턴가 우리나라에서는 회개없는 구원론이 가득 퍼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회개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줄로 알고 있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아니다. 회개없이는 구원도 못받고 가난과 질병과 저주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우리 자신이 지은 죄도 물론 회개해야 하겠지만 조상들이 지은 죄들까지도 회개하여 악한 영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악한 영들의 대물림을 끊어놓아야 한다. 

 

9. 나오며

  돌아보니,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께서 늘 하시던 복음전파의 말씀과 똑같은 것이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하고 죄지은 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다만 이때 베드로는 복음전파의 서두에서 오순절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나타난 현상을 그들에게 설명해 준 것만 다르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행한 설교는 청중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들도 또한 베드로의 의 설교를 받아들이며 그날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된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의 인구의 약 1/10에 해당하는 약 3천명이 제자들의 수에 가입하는 놀라운 결과를 맺게 된다.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광경인가? 갈릴리 벳세다에 살던 어부 한 사람이 성령을 받고 은사를 받으니, 이렇게 변화되어, 새로운 영적인 리더로 우뚝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성령이 오시면 사람도 변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령받은 자를 복음전파에 합당한 자로 바꾸어주시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런 자에게 능력도 입혀주시고 은사를 주시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 차례가 되었다. 만약 우리들이 지금 주의 종이라면 그는 설교할 때 반드시 예수님이 누군지를 설교해야 한다. 그리고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로 마무리를 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일반 평신도라면 우리는 자신의 삶의 모든 문제를 회개를 통해 해결받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이때 예수님이 누군지를 분명히 알고서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자신이 지은 죄와 자기 조상들이 지은 죄들까지 같이 회개해야 한다. 그렇다고 회개가 한 두 번 만으로 끝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평생을 두고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더욱더 힘써 예수님이 누군지를 배워야 하고, 또한 그분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주실 때에는 즉시 회개하여 그 죄가 우리의 인생의 걸림돌이 되지 않게금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영적인 앞 날을 밝히 빛나게 해 줄 것이며, 우리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영육간에 잘 살게 해주는 비법이 되게 해 줄 것이다. 

 

2022년 06월 19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12) 오순절날 방언이 복음전파에 활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02)(행2:5~13)_2022-06-17(금)

https://youtu.be/Fj2qfKVFPHs  [혹은 https://tv.naver.com/v/27450516 ]

 

1. 방언 통역의 은사란 어떤 것인가?

  방언 통역의 은사란 남이 하는 방언을 들었을 때 그것을 알아듣는 은사를 가리킨다. 보통은 자기가 알아들을 수 있는 자국의 언어로 들린다. 하지만 그 내용의 전반적인 것이 깨달아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상대방이 방언으로 말하는 소리를 듣지만 자기의 언어로 들리므로 그것을 알아듣게 되는 것이다. 

 

2. 오순절날, 예루살렘 마가 다락방에 나타난 방언 통역의 은사는 어떤 것이었는가?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순수한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오로지 기도에 전무하였다. 그들을 회개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로서 걸러지고 또 걸러져서 남은 자들이었다. 사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였고, 또한 주님의 승천까지 보았던 자들이 적어도 성인 남자만 500여명이 넘었지만 그중에 380명은 떨어져 나갔고, 오직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120명의 성도들만 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간절히 기도했을 때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 말하기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그들의 방언 소리를 듣고 몰려든 군중들의 놀라운 반응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침 9시경에 마가 다락방에서 새어 나오는 음성을 들었다. 그런데 그들이 들었던 말은 자기가 태어난 곳 곧 헬라 지역의 지방말이었다. 소문을 듣기로는 그들은 갈릴리 사람들이었고, 또한 그들은 배우지 않았는데도 헬라 지역의 지방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20명의 성도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글로싸')을 말하고 있었지만 듣는 15개국의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기 고국의 지방말('디아레크토스')로 듣고 있었던 것이다. 

 

3. 15개국의 헬라파 유대인들은 대체 어떤 것을 들은 것인가?

  오순절을 지키러 왔던 15개국의 사람들은 그날 갈릴리 사람들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귀에는 그들이 하는 말인 자기들의 고국 언어였다. 자기들이 태어난 곳의 지방말이었던 것이다. 배우지 않은 갈릴리 사람들이 외국어로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입에서부터 나왔던 그들의 감탄사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행2:11[직역] 그레데인들과 아라비아인들이다. 우리가 우리의 각 방언('글로써')로 하나님의 위대한(엄청난, 장엄한) 일들을 발설하고 있는 것을 듣는도다

  그럼, 그들이 그때 들었던 방언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한 계획과 섭리 그리고 그동안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과 그 의미였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얼음이 되어 있었다. 

 

4. 방언 통역을 해 보면 주로 어떤 내용인가?

  방언 통역을 해 보면 방언하는 자가 무슨 내용으로 기도하고 있는지가 나온다. 그런데 오늘날 방언 통역하는 분들의 수준이 너무나 낮은 탓에, 정말 영이 말하는 비밀과 영의 기도를 정확히 통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은사들에 대한 신뢰도가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다. 하지만 정말 순수하고 깨끗하고 불순물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방언 통역의 은사를 경험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 앞에 모두가 감탄한 채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방언의 내용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주님의 신령한 말씀이요 자신의 영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언의 내용은 주로 어떤 것인가? 방언의 주된 내용은 평신도와 목회자에게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평신도는 기도하는 것이 많다면, 주의 종은 주님이 주시는 말씀(예언)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신도의 경우에는 이렇다. 아내에게는 남편을 머리로 알고 복종하라는 통역이 많이 나온다. 자식들에게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나온다. 교회의 장로들에게는 목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비판하지 말라고 한다. 권사들에게는 그들이 시험에 흔들리지 않고 기도해 준 것에 대해 고맙다는 주님의 말씀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를 들었고 보았기에 반드시 그날에 심은대로 갚아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럼 목회자에게는 어떤 내용이 나오는가? 주로, 그가 복음 전파의 길을 가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지가 나온다. 그리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는데 지금 어떤 단계에 있는지를 알려 준다. 그러므로 방언 통역이 제대로 될 수만 있으면 너무나 유익하고 유익한 것이 방언 통역인 것이다. 

 

5. 방언이 어떻게 복음 전파에 활용될 수 있는가?

  방언 자체는 복음 전파에 활용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면 자신의 영을 건축할 수 있기에 유익하지만 그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또한 답답하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음에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방언하는 자는 방언 통역을 해서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타락하고 기도에 집중하는 사람이 적은 시대가 된 까닭에 온전한 방언통역을 하는 사람을 만나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온전한 방언 통역을 들을 수 있다면 모두들 하나님의 놀라운 일에 감탄하고 순복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방언은 통역만 제대로 되면 거의 예언과도 같은 기능을 수행하여 그 사람에게 권면하고 책망하고 폭로하고 가르치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보지 않는 듯 하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다는 것이 방언 통역 가운데 다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불순종한 것을 책망하고 죄를 폭로하여서 방언을 하는 자로 하여금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개인을 세우기 위해서, 가정을 세우기 위해,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이 온전한 방언 통역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방언은 매우 유익한 성령의 은사임에 틀림없다. 특히 개인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는 통로가 바로 방언 통역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방언 통역을 받아 본 자들은 스스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명자의 길과 평신도의 길이 어떻게 얼마나 다른지도 알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주의 종들을 사랑하는지도 알게 된다. 이처럼 방언 통역이 무엇보다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전달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되기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데에는 방언 통역만큼 좋은 것이 없을 정도다.

  방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무시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방언은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임과 동시에 하나님과 비밀을 말하는 영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과연 방언 통역자가 깨끗한 상태에서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말로 방언 통역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그렇게 되면 반드시 기도에 집중하되, 회개 기도를 많이 하여 방언 통로의 길을 깨끗하게 해 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가 충분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차라리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지 않는 것이 낫다. 방언이나 방언 통역의 은사는 말의 은사이자 기도하라고 주신 은사이기 때문에,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까지 건축하는 데 유익한 은사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더욱더 회개에 집중하여 자신을 깨끗이 하는 데에 더욱더 노력하자.  

 

2022년 06월 17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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