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가 처음으로 직면해야 했던 핍박과 위협의 어려운 상황에서, 대체 예루살렘 교회는 그것을 어떻게 대처했을까? 베드로와 요한을 우선 피신시켰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은 상황이 안 좋으니 나중을 기약하자고 결의를 했을까? 그런데 그들이 선택했던 선택지는 다름 아닌 '합심기도'였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를 보니, 우리가 보통 드리는 기도와는 달랐다. 그러면 그때 그들의 중보기도의 내용은 어떠했을까? 우리도 천국복음을 전파할 때에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대처와 중보기도는 우리의 갈 길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오늘은 그 기도를 분석해보자.

 

2022-06-26(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도행전 강해(19) 예루살렘 교회가 모여서 드린 첫 번째 기도는 어떤 기도였나?(행4:23~31)_2022-06-26(주일)

https://youtu.be/438S6AMWq6c  [혹은 https://tv.naver.com/v/27620853 ]

 

1. 들어가며

  세상에 이제 갓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가 처음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치유와 복음전파가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의한 것이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나면서 못걷게 된 자를 고쳐 준 일이 있게 된다. 그리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의아하게 여기는 군중들을 향해 그 이유를 전하게 되었는데,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친 것과 예수님이 누군지를 전하는 것을 두고 불법이라면서 그들을 감옥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어 그들을 심문해 보았지만 잘못한 일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보면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더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말하고 위협하면서 내보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이 보고 들었던 바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면서 공회를 빠져 나온다. 그리고 곧장 성도들이 모여있는 장소(마가다락방으로 추정됨)로 이동하여 그동안에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상세하게 이야기한다. 그랬을 때에 과연 예루살렘 교회는 어떻게 반응을 했을까? 대책회의를 세웠던 것일까? 아니면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자들이 최고로 긴장을 하고 있으니 지금은 자제하고 다음을 기약하자고 결의했을까? 아니면 죄없는 베드로와 요한을 불법으로 감금하고 또한 취조했으니 산헤드린 공회를 심판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했을까? 우리는 오늘 예루살렘의 교회가 최초로 직면한 위험 앞에서 과연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도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루살렘 교회는 당면한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 앞에서 어떻게 대처했는가?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이 하는 보고를 듣고 결정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베드로와 요한을 어디로 피신시키는 일을 논의했을까? 아니면 지금은 어려운 시기이니 만큼 복음전파를 자제하자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예루살렘은 복음전파를 하기에 합당한 곳이 아니니, 복음전파의 기수를 사마리아나 이방인에게 돌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자고 했을까? 그런데 그때 예루살렘 교회가 보여준 것은 놀라운 결정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합심으로 부르짖어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결의했기 때문이다. 그때 예루살렘 교회는 대책회의를 강구하지도 않았으며, 차기를 기약하자는 결정을 내린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가 하나님께서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을 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그들은 과연 어떤 기도를 주님께 드렸을까? 

 

3. 예루살렘 교회가 기도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었고 또한 찬양했는가?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가 함께 모여 한 마음으로 주께 기도할 때에 그들은 과연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기도했을까?

  첫째로, 그들이 기도하면서 불렀던 하나님의 명칭부터 살펴보자. 그들은 기도의 대상을 향하여 "대주재여!"라고 기도하였다(행4:24). 헬라어로 보면, '데스포테스'라는 단어인데, 이는 그 뜻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섭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호칭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신앙이란 모든 일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대주재'라는 명칭은 하나님을 모든 만물의 창조자로서 인정한다는 신앙고백이며, 그분의 뜻과 섭리를 그대로 따르겠다는 뜻이다. 참고로, 신약성경에서 '대주재'라는 표현은 사도 베드로가 한 번(벧후2:1), 사도 바울도 한 번(딤후2:21), 사도 요한이 한 번(계6:10), 누가가 누가복음에서 한 번(눅2:29), 사도행전에서 한 번(행4:24), 그리고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가 한 번(유1:4) 사용한 적이 있는 흔히 않는 호칭이다. 

  둘째로, 그들은 대주재에게 어떤 찬양을 먼저 드렸는가?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는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먼저 어떤 찬양을 드렸는가?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다. "당신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지으셨던(만드셨던) 분이십니다. 또 당신의 종(파이스) 우리 조상 다윗의 입으로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렇다. 그들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섭리대로 이끄시는 분이라는 것을 찬양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자기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일어나고 있음을 고백했다. 그래서 그것은 시편2:1~2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행4:25~26). 왜냐하면 시편의 예언을 따라 예루살렘의 도시 안에 헤롯 안디바(B.C.4~A.D.39 재위)와 본디오 빌라도(A.D.26~36 재위)가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4.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드린 중보기도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가 함께 모여 합심으로 기도할 때에 그들은 무슨 기도로 중보기도를 드렸을까? 그들은 3가지 기도를 드렸다.

  첫째, 그들은 지금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적대세력을 지켜보아달라(주목해달라)고 기도했다(행4:29a). 그들은 "이제도 그들의 위협들 위로 그것들을 주목해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좀 감해달라고 기도하였을 것이고, 고난을 아예 없애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적대세력을 없애달라고도 기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자기들을 위협하고 대적하고 있다고 할지라라도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진행되는 것이니만큼 주님께서 뜻하시는 바 대로 행해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적대세력에 대한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겠다는 기도였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핍박 중에서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행4:29b).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다."당신의 종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계속 말할 수 있도록 담대함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옵소서" 그랬다. 그들은 대적들이 함께 모여 복음전파를 대대적으로 방해하고 있고, 또한 복음을 전파한다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움츠러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적들의 위협에 겁먹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셋째, 치유와 표적과 기사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계속 일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행4:30). 그들은 "당신의 손 안에서 고침을 위하여 당신에게 사람들이 손을 내밀게 하옵시고, 표적들과 기사들이 당신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을 통하여 계속 일어나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왜냐하면 천국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세상에서는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것들 곧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러한 기적들이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렇다. 교회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하는 곳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교회는 세상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이 일어나고 그것이 제공되어야 한다. 사실 예수께서도 공생애 시절에 제자들을 파송하여 천국복음을 전하게 할 때에 어떻게 하셨는가?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세와 능력을 주셔서 파송하셨다(마10:1, 눅9:1~2). 12사도들와 예루살렘 교회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함께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랬다. 그들은 박해로 인해 좌절하거나 결코 낙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자신들과 동행하여 일하시는 교회가 되어, 천국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5. 그들이 기도를 마쳤을 때에 주님으로부터 어떤 응답이 내려졌는가?

  그렇다면 그들이 기도를 마쳤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땅을 진동시켰다(행4:31). 그들이 기도하고 있던 장소가 흔들렸던 것이다. 그러자 그들 모두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전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얼마나 기쁘게 받으셨는지를 잘 대변해주는 것이며, 앞으로도 그들과 계속해서 동행하시겠다고 하는 싸인을 그들에게 주신 것과 같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기들이 비는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현장에서 확인하면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6. 나오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에는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며 생활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핍박과 고난이 찾아오게 되면 많은 이들이 그만 핍박에 주눅이 들어버린다.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과연 어떠했을까? 고난을 피해 도망을 쳤는가?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맞딱뜨리게 된 핍박과 위협 속에서 차후 대책회의를 강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놓고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합심하여 부르짖어 기도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도는 자신의 뜻대로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대주재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섭리대로 이루어주실 것을 간구한 것이다. 그리고 다만 그들에게 누르고 있는 핍박에 대한 두려움을 잘 이겨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또한 그들에게 맡겨주신 사명 곧 천국복음을 계속해서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특히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표적들과 기사들이 일어나기를 간구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고 있음과 더불어, 자기들이 지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옳게 행동하고 있음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도응답을 받았고, 더욱 더 힘있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2022년 06월 26일(주일)

정병진목사

20220628_010241.jpg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18)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무엇인가?(02)(행4:1~22)_2022-06-24(금)

https://youtu.be/IYxGw6t_Ol8  [혹은 https://tv.naver.com/v/27594165 ]

 

1.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나면서부터 못 게 된 이를 고쳐준 일로 인하여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가?

  베드로와 요한은 평소에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기적의 사람이었다. 이처럼 하늘에 있는 권세와 능력 그리고 지혜를 얻을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역시 기도다. 그런데 기도하러 가다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불구자로 태어난 어떤 병자를 만나게 되고, 그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여 일어나 걷게 한다. 그러자 그 병자는 걷고 뛰면서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한다. 그러자 온 성전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몰려든다. 그리고 나은 자는 자신을 고친 이가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말한다. 그자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관심을 집중한다. 이때 베드의 2차 설교가 시작되었고 이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죽인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받아들게 된다. 그리하여 무려 남자만 5천 명이 새로 예루살렘 교회에 합류하게 된다. 그런데 이 일을 보고 시기 질투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곧바로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였다.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바리새인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로 이루어진 단체인데, 이 사람들은 바로 약 20여 일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던 장본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자기들의 입지 좁아질 것을 예상하였고 마침내는 예수 죽인 죄값을 자신들이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가둔 후 다음 날 재판을 진행한다. 

 

2.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이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사도들을 자기들의 가운데에 세워 놓고 그들에게 질문한다. "너희는 무슨 능력으로 그리고 무슨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다음을 보자. 

행4:7~12[직역] 이 질문은 왜 허락없이 병자를 고치고 성전 경내에서 사람들을 모아서 집회를 했느냐고 물은 것이다. 그것은 성전 경내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할 때에 그들이 사두개인들에게 정말 허락 받고 행한 것이냐를 질문한 것이요, 바리새인들은 왜 육체의 부활을 전하느냐고 따지고 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들에게 대답하자 그들은 본래 배우지 아니한 무식한 사람으로 알았다고 깜짝 놀라게 된다. 여기, 그때 있었던 베드로의 답변을 보라. 8 그때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해진 후에 그들을 향하여 말하였다. 백성의 통치자들과 그리고 장로들아! 9 만일 병든 사람의 선한 일에 대하여 이이가 무엇 안에서 구원을 받은 채 있느냐고 우리 자신들이 심문받는다면, 10 그것은 너희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는 것으로 있어라. 너희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던 분이자 하나님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셨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이이가 이분 안에서 당신들 앞에서 건강한 이로 선 채 있다는 것을. 11 이이는 건축하는 자들인 너희에 의하여, 업신여김을 받았던 이이자, 모퉁이의 머릿돌 안으로 있게 되었던 그 돌이니라. 12 그리하여 아무런 [같은 종류의] 다른 이(사람) 안에 구원이 있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역시 하늘 아래에서는 사람들 안에 반드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있는 그것(이름) 안에 주어진 채 있는 [종류가 다른] 딴 이름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3. 공회의 재판은 어떻게 결론이 내려졌는가?

  그러자 공회는 이들을 저지시키려고 해 보지만 딱히 그들의 복음 전도 활동을 저지시킬 어떤 합당한 방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면서 40년이나 걷지 못한 사람을 고쳐 놓았고 또한 병 나은 자가 베드로와 요한 곁에서 증인으로 서 있으니, 어찌할 바를 찾지 못한 것이다. 또한 백성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으니 이들을 어떻게 정죄하여 감옥에 처넣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내린 재판의 결과는 그들을 경고한 뒤 훈방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결정문은 2가지였다. 첫째, 이후부터는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라. 그리고 둘째, 앞으로는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4. 그때 베드로와 요한은 어떻게 말하고 공회에서 나왔는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공갈 협박하였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더욱더 담대해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말을 남기 공회에서 나온다. 

행4:19~20[직역]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한 후에 그들을 향하여 말하였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너희[의 말]을 [계속]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오히려 의로운 것인지 너희는 판단해 보라. 20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은 우리가 보았던 그리고 들었던 것들을 발언하지 않는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5. 예수님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주님은 그들을 어떻게 돌보시는가?

  그렇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복음을 전파하다가 언제라도 붙들려 감옥에도 들어가게 되고 재판장에 붙들려 나가 재판 받아 유죄 판결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심지어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려는 자는 자신의 목숨을 주님께 드릴 각오를 가지고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 그것을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방해할 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들이 있어 그들 공격하기 때문이다. 즉 사탄의 왕국에 속한 귀신들이 혈안이 되어 날뛰면서 복음 전파자를 없이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는 단순히 좋은 소식을 전해 주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거는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로 복음 전파자는 어떠한 고난과 핍박과 죽음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주눅들지 말고 더 담대해져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그러면, 이러한 복음 전파자들을 과연 주님은 어떻게 돌보시는가? 첫째, 복음 전파자들에게 성령충만을 주시어 어떤 사람 앞에서든지 그 시에 필요한 말을 주신다. 그리고 둘째, 악한 영들의 공격이 무효화되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 전파가 제자들이 존재하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때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복음 전파자를 도와주신다. 이때는 2가지 방법이 동원된다. 하나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구출해 주신다. 또 하나는 돕는 사람을 시켜 위기의 상황을 벗어나게 해 주신다. 사실 이후에 12사도들이 붙잡혀 감옥에 들어가는데, 주님은 주의 천사를 보내 그들을 구출해 주신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에 베드로가 또 옥에 갇혔지만 주의 천사가 나타나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그를 구출해 준다. 그리고 12사도들이 붙들려 심문을 받을 때에는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새인의 거장으로 하여금 그들을 돕도록 만드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2022년 06월 24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17) 예수의 증인으로 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01)(행4;1~22)_2022-06-23(목)

https://youtu.be/tLMAFltWAfg  [혹은 https://tv.naver.com/v/27593830 ]

 

1. 베드로의 2차 설교 후에 그에게 찾아온 것은 무엇이었는가?

  나면서 못 걷는 자 된 이를 치료하고 이를 보고 몰려든 군중들에게 두 번째로 설교를 했던 베드로는 그 일로 인하여 남자만 5천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을 가르치고 전파함을 보고는 사두개인들이 먼저 나섰다. 그들은 성전 경내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면서 성전 경비대장과 제사장들 그리고 사두개인을 보내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 복음 전파 사역에도 처음에는 사탄도 영문도 모른 채 얻어 터지지만 두 번째부터는 정신을 차리고 조직적으로 대항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자들은 이것을 대비해야 한다. 

 

2. 다음 날 베드로와 요한은 어디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는가?

  다음 날 아침 이스라엘에 공회가 소집되었다. 공회는 '산헤드린'이라고 하는데 이는 유대의 입법 사법 의결기구로서 최고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들을 끌어 가자 위협을 느끼고 모인 것이다. '산헤드린'은 공회원 70명과 의장인 대제사장 1명, 도합 71명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 의결기구로서 모든 안건은 만장일치로 의결되었으며, 그 구성성분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서 '사두개인'이라 함은 제사장 '사독'을 잇는 엘르아살 후손의 제사장들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유대 종파 중에서 바리새인과 더불어 양대 분파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산헤드린 회의에 참석한 사두개인들을 보니, 전 대제사장 안나스(재위 A.D.7~15년) 그리고 현 대제사장 가야바(재위 A.D.18~36)가 있었는데, 가야바는 전 대제사장 안나스의 사위이자 양자이다. 그리고 요한도 있었는데 이는 안나스의 아들이다. 이 사람은 장차 가야바를 대신하여 1년간(A.D.38) 대제사장이 될 자다. 그리고 알렉산더가 나오는데, 이는 당시 유대 철학의 거두였던 필로의 형제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바리새인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도 있었다. 특히 '바리새인'은 솔로몬의 성전 파괴 이후 자신을 구별시켜 율법을 그대로 지키려고 시도했던 경건한 유대 종파였는데, 샴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가 유명하다.

 

3. 무슨 명목으로 산헤드린 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했는가?

  그렇다면 이때 산헤드린 공회는 무엇으로 이들을 기소하고 심문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무슨 능력과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4:7)"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백성을 가르치고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한 일은 성전 미문 앞에 있었던 병자를 고친 일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것을 시기하여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산헤드린 공회를 열어 지금 베드로와 요한을 취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두 개의 종파는 대체 무엇을 싫어했을까? 먼저, 사두개인들은 자기의 경내인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허락도 없이 예수님을 전했다는 것 때문이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율법을 공부한 랍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허락없이 백성들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백성들을 가르치려면 정식으로 랍비학교에 들어와서 공부하고 졸업을 한 자라야 했기 때문이다. 

 

4.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보기에 베드로와 요한은 어떤 사람들에 불과했는가?

  그렇다면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보기에 베드로와 요한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그것은 베드로가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듣더니 놀라워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얼마 전 십자가에 죽였던 예수님과 함께 있어 온 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학문없는 범인이라는 말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2가지 단어가 함께 쓰인 것으로서, 앞의 것으로 '학문없는'이라는 단어는 '아그람마토스'라는 말로서, 이는 '문서가 없는'이라는 원 뜻에서 '글을 모르는, 배우지 아니한'이라는 뜻으로 발전한 단어다. 그리고 뒤의 것 '범인'이라는 단어는 '이디오테스'라는 말은 '평범한, 일상의'라는 원 뜻에서, '무식한, 문외한'이라는 뜻으로 발전한 단어다. 그러니까, 공회원들이 볼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공부도 하지 않은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대답하는 것은 그들을 당황하게 하고 있었다. 

 

5.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에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대답했는가?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에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병자에게 일어난 일에서부터 산헤드린 공회가 죽였던 예수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말하게 된다. 그리고 병자가 고침받게 된 것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강하게 되었고 여기에 서 있다고 말한다. 건축자들이었던 그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면서, 예수 이외에 다른 구원을 받을 만한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담대하게 말한다. 특히 4장 12절의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다른 사람"의 '다른'은 '알로스(같은 종류의 다른)'이므로, 유대인들 중에서 구원자가 나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으며, 뒤에 나오는 '다른 이름'의 '다른'은 '헤테로스(다른 종류의 다른)'이므로, 히브리어로서 '예수(호세아, 여호수아, 예호수아)외에는 다른 이방인의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2022년 06월 23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16) 병자치유 후에 행한 베드로의 두번째 설교의 특징은?(행3:11~26)_2022-06-22(수)

https://youtu.be/z35UKqOxteU  [혹은 https://tv.naver.com/v/27593308 ]

 

1.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자의 치유 사건으로 인해 놀란 백성들이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모인 장소는 어디였는가?

  성전 미문(아름다운 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자가 그만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을 때에,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어서 그런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고 놀라워한다. 그러자 모든 백성이 '솔로몬의 행각'이라고 하는 곳에 모여들게 된다. 여기서 잠깐 '솔로몬의 행각'에 대해서 살펴보면, 이곳은 성전 바깥뜰 곧 이방인들의 뜰 동편 끝에 위치한 기다란 주랑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는 총 길이 185m에, 높이가 15m인 기둥이 4줄로 162개가 있던 회랑을 가리킨다. 이곳을 특별히 '행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건물이 기둥과 지붕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벽면은 없기 때문이다. 성전에 온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는데, 그날따라 성전에서 경악할 만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기에 솔로몬의 행각은 이 사람으로 인해 떠들썩하게 된 것이다. 

 

2. 모여든 군중을 향해 베드로가 행한 일은 무엇인가?

  그러자 모여든 군중들을 향하여 베드로가 설교를 한다. 이름하여 '베드로의 2차 설교'인 셈이다. 이때 베드로는 1차 설교의 경우와 같이, 3가지 패턴으로 말씀을 증거한다. 첫째는 그때 일어난 사건(현상)이 어떻게 되어서 발생했는지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둘째는 그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발생한 기적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이때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거하면서, 그분의 죽음에 그들이 참여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아울러 증거한다. 셋째는 이제는 회개하라는 명령을 통해 결단을 촉구한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을 믿게 될 경우 어떤 복(혜택)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이야기해 준다. 이것이 바로 2차 설교의 핵심적인 부분인데, 이것은 1차 설교 때와 거의 똑같은 패턴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 베드로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자가 어떻게 되어서 나았다고 증거했는가?

  이때 베드로는 설교의 서두에서 병자가 고침받게 된 것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설명해 주는데, 그것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 곧 하나님의 종이요 거룩하고 의로운 이가 그렇게 행하신 것이라고 증거한다. 그분은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이 보낸 하나님의 종이었는데, 그들이 알지 못하고 그분을 넘겨주었으며 죽게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병자가 건강하게 되었고, 모든 사람 앞에서 완전히 낫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날 병자가 낫게 된 것은 베드로 자신의 개인 능력과 경건함 때문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 치유의 은사를 많이 받은 베드로가 아니었다면 그날 그러한 일도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결코 용한 의사도 아니며, 창조의 기적을 일으킬 만한 위대한 선지자도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이같은 일을 행하시고 있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그는 진정 그 말을 잘한 것이다. 베드로의 개인의 능력과 경건함만으로는 결코 창조의 기적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불구자로 태어난 40세나 되는 남자를 온전하게 고쳐 놓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주님으로부터 성령세례를 받아 능력을 받고, 병고침의 은사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도 주님께서 일하심으로 병든 자가 낫게 되는 기적이 나타난 것이다. 

 

4.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의 특징 중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의 특징으로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설교가 이번부터는 상대방을 배려하면서도 동시에 강력하게 회개와 결단을 촉구하는 강온 양면 작전으로 조금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의 잘못은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회개를 촉구하고, 이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을 것을 설교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강온 양면 작전은 한 번만 언급한 것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먼저 베드로가 그들을 존중해서 증거했던 발언부터 살펴보자.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하나님을 믿고 있다"(13절),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한 것이다"(17절),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언한 것에 대한 성취다"(18절),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다?(25절). 하지만 이어 베드로는 군중들을 책망하는데 그때에도 역시 서슴없이 책망을 한다. "너희가 그분을 넘겨주고 빌라도도 놓아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분 앞에서 거절한 것이다"(13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는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자는 놓아주기를 요청한 것이다"(14절), "너희가 생명의 주(창시자)를 죽인 것이다"(15절),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너희가 만약 이번에도 이 선지자가 한 말을 귀담아 듣지 아니한다면 결국 백성 중에서 멸망받을 것이다"(23절). 또한 이러한 설교 가운데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하여 분명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 설교에서는 예수님을 5가지로 소개하였는데, 첫째로 그는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종'이라고 했다(13절). 둘째, '거룩한 의로운 이'라고 했다(14절). 셋째, 그는 그분을 '생명의 주(창시자)'라고 했다(15절). 넷째, 그분을 장차 보내 주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하였다(22절).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약속의 씨'라고 하였다(25절).

 

5. 베드로는 그들에게 어떻게 회개와 결단을 촉구했는가?

  이어 베드로는 모인 군중들을 향하여, 병자가 어떻게 되어서 낫게 되었는지를 설명한 다음,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알려 주어 그들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준다. 그리고는 회개를 강력히 촉구한다. 그렇다. 베드로는 설교의 끝 무렵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의 죄없이함을 받으라"(19절)고 강력하게 결단을 촉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군중들로 하여금 결단을 촉구할 때에 반드시 복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결단을 하여 회개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위해 주실 복이 있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한 것으로는 첫째, "병자가 기적적으로 나은 것처럼 너희도 그와 똑같이 병에서 낫게 될 것이다"(16절)고 했다. 그리고 둘째,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죄씻음을 받게 될 것이다"(19a절)고 했으며, 셋째, "이같이 하면 유쾌함의 시간들이 주님의 얼굴로부터 올 것이다"(19b절), 그리고 넷째,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그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먼저 너희에게 주어진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말라"(25~26절)고 했던 것이다. 이처럼 베드로의 설교는 오늘날 설교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잘 짜여진 설교요 지루하지 않게 배울 수 있는 풍성한 설교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도입 부분에서 군중들의 관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말을 하였고, 본론을 분명히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론의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로 채웠으며, 끝으로 회개와 결단을 촉구하되 복을 제시하면서 회개와 결단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베드로의 설교는 1차 설교와 더불어서 오늘날 목회자가 설교할 때에 과연 어떤 형식으로 설교를 해야 하며 무엇을 설교해야 하는지를 들려주는 설교의 놀라운 모범(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2022년 06월 22일(수)

정병진목사

 

20220622_013518.jpg20220622_012855.jpg20220622_012653.jpg20220622_012452.jpg20220622_012432.jpg20220622_012414.jpg20220622_012035.jpg20220622_011931.jp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