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유다, 그는 가장 불쌍한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 했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긴 배신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왜 그는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기려 한 것일까? 그리고 난 후에 그는 분명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쳤는데, 왜 궁극적으로 자살을 선택한 것인가? 그리고 그는 죽어서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지옥인가? 아니면 다른 곳인가? 성경이 들려주는 그의 최후의 운명은 과연 어디인가? 그리고 오늘날 자살하는 모든 사람은 다 지옥으로 가는 것인가? 여기 그 대답이 들어있다.

 

2022-06-12(주일) 주일찬양예배

제목: 사도행전 강해(07) 가룟유다, 그는 지옥에 떨어졌을까?(가룟유다의 최후와 맛디아 선출)(행1:15~2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WSg0zLks3gk  [혹은 https://tv.naver.com/v/27323630 ]

 

1. 들어가며

  가룟유다는 죽어서 과연 어디로 갔을까?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선택받은 12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팔아넘기고 말았다. 나중에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책하던 가룟 유다는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다. 그럼, 그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곧바로 지옥으로 갔던 것일까? 성경에서는 "제 곳으로 갔다"고 되어 있는데(행1:25), 제 곳으로 갔다는 말의 뜻은 대체 무엇인가? 이와 더불어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성도가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떨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던 어떤 노인이 인공호흡기를 제거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것도 자살이라고 봐야 하는가? 오늘은 가룟 유다의 자살을 좀 더 들여다보고자 한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죄가 잘못 되었음을 본인이 직접 시인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 심히 아파했다. 뉘우쳤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죄를 왜 용서받지 못한 것일까? 한편 가룟유다 대신에 보선하여 들어온 '맛디아'라는 인물은 대체 누구이며, 베드로는 왜 궐이 난 가룟 유다의 자리 대신에 굳이 새로운 사람을 보선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떨어지는가?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인가? 원칙은 맞다. 왜냐하면 자살도 일종의 살인죄에 해당하는데, 자살하게 되면 자신이 자신을 살인한 죄를 용서받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죄들은 회개함으로 용서받을 수 있어도, 자살한 죄에 대해서만큼은 용서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자살한 자는 결단코 새 예루살렘 성 곧 천국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계21:8). 고로 자살에 대한 결과로서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분류한다면 가룟유다는 분명 지옥에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음의 경우는 어떠한가? 서두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던 어떤 노인이 잠깐 깨어나서 자기의 인공호흡기를 스스로 떼어버렸다고 치자. 그리고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고 치자. 이 노인은 자살한 것인가? 물리적으로는 그랬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 노인은 자기가 자기를 죽인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가? 이럴 때에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성경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사람의 운명이 마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보니 새로운 장소가 있는 것이다. 그곳은 바로 '성밖(바깥 어두운데)'이라는 장소다(마25:10, 계22:15). 성도가 죽었을 때에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성밖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럼, 새 예루살렘 성밖은 지옥인가 천국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한 때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래서 결론이 난 것은 성밖을 결코 '천국'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곳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마25:30). 실제로 주님께서도 결코 그곳에는 심방을 가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는 형벌을 받기도 한다(마24:51). 그러므로 그곳을 '천국'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을 두고 무조건 그를 가리켜 "지옥에 떨어졌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지옥'이라는 말은 불과 유황이 타는 못 곧 불못을 가리키는데, 믿는 이들 중에 죄를 해결하지 못해 성밖으로 가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막9:43). 그리고 마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보면, '불못'(계21:8)과 '성밖'(계22:15)은 분명 다른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살한 이들에 대해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사람은 결단코 새 예루살렘 성 안 곧 천국에는 못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자신을 죽인 죄에 대해서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회개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시켜 버림으로 자신이 지은 살인죄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살한 자는 최소한 천국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3. 가룟유다는 죽어서 어디로 갔는가?

  그렇다면 가룟유다는 죽어서 어디로 갔을까? 성경은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2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그가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마27:3~5, 행1:18~19). 그는 예수께서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안 후에 스스로 뉘우쳐 자기가 예수님을 넘겨준 값으로 받은 은 30냥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갔다 주었다(마27:3). 그리고 말했다. "내가 무죄한 자의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4)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에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면서 그가 당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다는 은 30을 성소 안으로 던져버린 후에 스스로 물러가서 목을 매어 죽음을 선택한다(마27:5). 그런데, 사도행전 1장에서는 베드로가 이후에 되어진 일들에 대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알려준다. 그것은 그가 목을 매단 이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와서 죽었다는 것이다(행1:18). 아마도 그가 목을 매단 나무가 부러졌든지 아니면 끈이 떨어졌든지 그가 나무에서 떨어졌고 그때 받은 충격이나 어떤 요인으로 인해 배가 터졌으며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장기들이 쏟어져 나왔다는 것이다. 비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고도 했다(행1:19). 그러자 대제사장들이 성소에 던져버린 그 돈으로 밭을 샀는데, 그 밭의 이름을 "아켈다마(피밭)"라고 부르며,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는 것이다(행1:19). 

  둘째, 그가 자살한 후 자기의 직무로부터 [떠나] 자기 자신의 자리(장소) 안으로 가기 위하여 옆으로 걸어갔다는 것이다(행1:25).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자신이 이땅에 보내어질 때 그에게도 어떤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봉사의 직무와 사도의 직무였을 것이다(행1:25). 그리고 그가 그것을 성실히 감당했다면 그는 하늘에 이미 준비된 그의 보좌 자리를 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직무를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기자신이 선택한 자리(장소) 안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것은 최소한 '성밖'이요 더 나아가서는 '불못'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가룟유다는 후회만했는가 회개도 했는가?

  그렇다면 가룟유다는 자기의 스승을 판 죄에 대해서 어떻게 여겼는가? 제일 처음 그는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자기의 스승을 그들에게 넘겨줄 테니까 얼마나 주겠는지 흥정을 하였다(마26:14~16). 그리하여 그들로부터 은 30을 받고 주님을 넘겨주게 된다. 그러나 '은 30'이라는 돈은 노예 1명 값어치 수준 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가 돈이 탐이 나서 스승을 팔아넘긴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도 다른 뜻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의 한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가룟유다는 자신이 스승의 능력과 권세와 지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제자였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 정도 되면 로마에 대항하여 싸워서 얼마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자극시키고자 일부러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분연히 일어나 대제사장들과 또한 이들과 결탁한 로마에 대항하여 싸울 것이로 그리하여 새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고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순순히 붙잡혀 죽으러 가시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긴 죄에 대해 자책하게 되었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서 자기가 그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대해 다른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유는 그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배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고 말이다. 누군가는 예수님을 팔아넘겨야 하는데, 가룟유다가 그 일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예수님을 넘겨서 죽게 한 것은 잘 한 일이요 상 받을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는 그는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긴 죄책에 시달리게 되었고 자신의 양심의 참소를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지옥에 갔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메시야에 대한 구약 예언을 이룬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어떠한가? 그럴듯 해 보이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것은 거의 궤변수준이 아닌가 판단된다. 가룟유다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허물어져지자 예수님을 자극해서라도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는 스승이 되도록 조종하려 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스승을 팔아 넘긴 죄를 가룟유다가 회개를 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그가 자살하여 죽은 시점은 아직 예수님께서 죽지 않은 시점이었다. 예수께서 잡혀서 시위대 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라도 가룟유다는 회개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도 늦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라도 예수님께 나아가서 자신의 잘못을 고하고 용서해주시기를 청했으면 그는 아마 용서를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팔아넘긴 죄를 후회까지는 했지만, 회개는 안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라는 것은 첫째,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둘째, 그것에 대해 스스로 뉘우쳐 그 죄에 대해 아파하는 것이며, 셋째, 그 죄값에 대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처우를 하나님께서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둘째 단계까지 행했지만 셋째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고로 그는 후회는 했지만 회개는 안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살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의미없게 만들어버린 격이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죄값을 담당하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그 죄값을 예수님께 돌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받으려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가룟유다는 자신이 처리하려고 했을 뿐 그 문제를 주님께 가져간 후 주님의 처분을 기다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죄인 것이다. 고로 그는 후회는 했지만 회개는 안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돌아온 탕자가 어떻게 되어서 자신이지은 죄를 용서받았는지를 살펴보자. 그는 첫째, 그는 자신의 죄를 지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그리고 둘째,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잘못된 것을 뉘우쳤다. 그리고 셋째, 그리고 나서는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의 처분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생각과 감정와 의지를 동원한 회개의 3요소가 다 들어있는 회개인 것이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처음 2가지 것들은 행했지만 마지막 세 번째 것은 행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성밖이나 혹은 불못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5. 왜 베드로는 죽은 가룟유다 대신에 다른 사도를 보선해야 했는가?

  왜 베드로는 그 중요한 기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새 사도를 보선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으로부터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지시를 전달받은 것이 있지 않았었나 추측이 된다. 왜냐하면 가룟유다가 궐이 나자 그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른 사도를 보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이후에는 어떤 사도들이 죽더라도 사도회에서는 다른 이를 보선하지 않았다. 그런데 베드로는 가룟유다 대신에 다른 사도들을 보선하려고 하였다. 다른 사도들을 보선하라는 지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천국의 12기초석 위에 새겨질 이름이 가룟유다 대신에 다른 사도의 이름이 필요해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천국은 새 예루살렘 성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 성의 기초석은 12개로서 이 기초석 위에 어린양의 12사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야 기 때문이다(계21:14). 그런데 한 사람의 이름이 지워진 상태가 되었으므로 그 이름 대신에 들어갈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왼다. 

 

6. 새 사도인 '맛디아'는 어떤 인물인가?

  그리하여 베드로가 일어나 새로운 사도 한 명을 제비뽑아서 보선할 것을 제안한다(행1:21~22). 그리고 그 조건으로서 2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그분이 승천하신 날까지 12사도들과 함께 해온 자들 가운데서 한 명을 선택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하의 증인이 될 자를 선택하자고 제안했으니, 이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직접 목격한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예수님 곁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자들 중에 다른 새 사도를 선출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두 명이 천거되었는데, 한 사람은 '요셉'이었고 또 한 사람은 '맛디아'였다. 그런데 요셉은 그 이름이 여러 개였다. 하나는 '바사바(바르사밧)'였다. 이는 '바르'라는 단어 '아들'과 '샤밧'이라는 단어 '안식일'이 서로 합쳐진 말로서, 히브리어로는 그 뜻이 '안식일의 아들'이다. 그리고 '유스도'도 그의 이름이었는데 이는 로마식(라틴어) 이름으로서 '의로운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히브리식의 이름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천거되었으니 그는 바로 '맛디아'였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맛디아에 대해서는 더 다른 자료들이 없다. 다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에디오피아로 가서 선교하였고 거기에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는 현재 천국에서 높은 지위의 보좌에 앉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천국복음 전파에 늦게 합류했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합류했든지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나면 주님 앞에 섰을 때에 나도 칭찬을 들을 수있는 성도가 되어있을 것이다. 

 

7. 나오며

  가룟유다의 죽음처럼 안타까운 죽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가룟유다가 자기 스승을 자기 나름대로 일깨우기 위해 어떤 작전을 벌인 것 같은데, 그만 그 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자, 그는 자책감에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그에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아직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에 그분 앞에 나아가 자신의 잘못을 고하고 그분의 처분을 기다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아마도 사탄이 들어가서 그런 것 같다). 오히려 자신의 죄만을 자책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비참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죄를 짓고도 그냥 뻔뻔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모습보다는 더 양심적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잘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 곧 그분이 자신의 목숨을 우리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고 한 것이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되기 따문에. 우리는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그분의 처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래야 주님의 죽음이 의미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피의 가치를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가룟유다는 죽었다. 그런데 그가 어디로 갔는지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다. 다만 그는 자기 자신의 자리 안으로 가기 위하여 옆으로 걸어갔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의 운명은 최소한 '성밖'으로 보이며, 더 크게 보면 '불못'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주장이 맞는 주장인지는 나중 새 예루살렘 성안(천국)과 성밖(지옥의 일부분) 그리고 지옥(완전지옥)으로 가서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06월 12일(주일)

정병진목사

 

 

오늘 메시지는 지난 메시지에 이어지는 두 번째 메시지다. 그것은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성령받기를 기도해야 한다 할지라도 우선순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지키지 않는 한 우리도 역시 악한 영들에게 속아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복음 전파자로서, 성령세례를 받아 능력을 받고 사역해야 하는 것이지만 오늘 이 영적인 비밀을 잘 알지 못한 채 사역하다가는, 죽는 날 심판대 앞에 가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낙인찍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우는 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 우선순위란 대체 무엇인가?

 

2022-06-12(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사도행전 강해(06) 성령세례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2)(행1:12~1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tG3WeggvqPI [혹은 https://tv.naver.com/v/27323402 ]

 

1. 들어가며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은 '천국복음'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복음을 전하신 것이다(마9:35). 이 천국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면 그때 끝이 오게 될 것이다(마24:14). 그리고 이 천국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천국복음을 알고, 이 천국복음을 전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나 이 천국복음을 듣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아무나 이 천국복음을 전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천국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행1:4~5). 그런데 예수께서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하신 근본 이유는 성령세례를 통하여 능력으로 옷입혀지기 위함이라고 하셨다(눅24:49). 그렇다면 성령세례를 받는 직접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기도에 전무하는 것이다(행1:14). 성령받기를 합심하여 기도할 때 성령께서 사람들 위에 내려오시기 때문이다(행2:1~4). 그렇다면 누구든지 성령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자는 무조건 전심으로 기도하면 되는 것인가? 그래서 능력의 성령으로 옷을 입을 수 있는가? 오늘은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메시지가 성령세례와 성령의 은사를 간구하는 자들에게 놀라운 길잡이가 되기를 소망한다. 

 

2. '성령세례'란 무엇이며, 성령세례의 핵심 요소는 무엇인가?

 '성령세례'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사도행전에서 성령세례는 성령께서 사람들 위에 부어지는 것을 가리킨다(행2:17). 성령께서 믿는 이들에게 쇄도해 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믿는 이들로 하여금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도구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세례를 받아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신이 승천하시기 직전 12사도들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셨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행1:4). 그리고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하셨다(행1:5). 이는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통하여 능력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눅24:49).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은 능력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세례를 통하여 능력을 받아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믿고 천국가는 것을 악한 영들이 환영하고 박수쳐 주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사탄 마귀에게 붙들려 있는 자들을 전도하는데 그놈들이 가만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사탄 마귀와의 영적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능력과 권세로 무장해야 한다. 그래야 나도 악한 영들로부터 탈출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남들도 악한 영들에게서 탈출시켜 천국에 들어가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3. 오순절날 성령세례를 받은 베드로는 어떻게 전도했는가?

  그렇다면, 오순절날 약속의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어떤 능력을 받았으며 또 어떻게 복음을 전파했을까? 사도 베드로는 당시 열한 사도들의 대표였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또한 여러 여인들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의 동생들, 그리고 다른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성령받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한 마디로 이들은 성령받기 위해 기도에 전무한 것이다(행1:14). 그러자 마가 다락방에 성령님께서 내려 오셨다(행2:1~4).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것과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능력으로 무장되었다. 그러자 학문 없는 범인인 줄로만 알았던 베드로는 말씀으로 무장이 되었다. 군중 가운데 일어서더니 모인 무리들에게 담대히 설교하여 하루에 3천 명을 회개시킬 수가 있었다. 그리고 사도행전 3장에 보면, 그가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고 있던 '나면서 못 걷는 자'를 만나서 고쳐 주게 된다. 그러자 고침받은 이가 성 안을 뛰어다니면서 자신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았다는 것을 만방에 알려 주었다. 이 소문은 금방 예루살렘 안에 퍼졌고 사람들은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이려고 침대와 이불 채를 가지고 길거리로 나왔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들로부터 귀신을 쫓아 주었고 각종 병자들을 치료해 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다. 정말 능력으로 무장하여, 악한 영들을 쫓아내며, 병든 자를 고침으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한 것이다. 

 

4. 누구든지 간절히 기도하면 성령세례도 받고 능력도 받게 되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누구든지 성령받기를 사모하여 열심히 기도하면 다 성령세례를 받게 되는가? 그리하면 성령세례를 받아서 능력으로 옷입혀지게 되는가? 이것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문자 그대로 지금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늘날 무조건 기도에 전무한다고 해서 참된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약간의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려면, 당시 그들의 영적 상태와 우리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한 후 성령 받기를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마가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했던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가, 지금 우리의 영적 상태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의 영적 상태와 우리가 똑같은 조건이라면 우리도 역시 전심으로 기도하면 참된 성령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 120명의 성도들의 신앙 상태와 지금 우리의 신앙 상태가 똑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상황은 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세례나 능력을 간구하기 전에 우리의 영적 상태부터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120명의 성도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했는가? 첫째, 그들은 죽음을 각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날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대체 누구였는가? 그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직접 목격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했던 자들은 120명 뿐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500명 이상이었기 때문이다(고전15:4~6). 형제들만 500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380명은 다 어디로 간 것인가? 그들도 역시 예수님을 부활과 승천을 목격했지만 그들 중에 2/3가 떠나가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120명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로 살고자 작정하고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자들이었던 것이다. 즉 그들은 주 예수님에 대한 부활을 죽기를 각오하고 전하기로 마음 먹은 자들이었던 것이다. 둘째, 그들은 대대 자자손손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지키어 오던 경건한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 대부분은 갈릴리 사람들이었지만 그들도 역시 안식일이 되면 철저히 안식일을 지키던 자들이었고(행1:12), 정결법과 음식법을 철저히 지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었던 것이다(행10:12~15). 그러므로 그들은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국 사람과는 전혀 다른 신앙의 바탕이 되어 있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기도했다고 우리가 기도를 따라한다고 해서 그들이 받았던 성령세례를 우리도 받을 수 있다는 우를 범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들의 영적 상태처럼 우리도 과연 준비되어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처럼 우리도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5.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날 120명의 영적 상태와 우리가 역시 동일한 상태라면 우리도 얼마든지 기도에 전념하는 것으로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상황이 다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반만년의 역사를 미신과 잡신을 섬겨 왔고, 무당과 점쟁이를 섬기고 살아온 민족이다. 아니 우리 조상들 중에는 신내림을 받아 무당과 점쟁이의 삶을 살았던 자들도 있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부터 약 1,600년 동안 우리는 부처를 섬겨 왔다. 나무나 돌로 만든 부처상에 절을 하고 탑돌이를 하면서 우상을 숭배해 온 것이다. 그리고 조선 시대부터 약 500년간 우리 민족은 조상 대대로 자기의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 몸속에는 우상 숭배의 영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이러한 영들을 제거하는 일들은 하지 않은 채, 삼각산에 올라가 기도한다고 해서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우리 속에 있는 악한 영들이 우리를 속여 성령을 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나 귀신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귀신들도 얼마든지 우리에게 환상을 보여 주고 음성을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세례를 받기를 간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회개를 통해 내 속에 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하지도 않은 채, 자신도 산에 올라가 기도하다가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고, 무엇인가를 보았다고 하면서 자신도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받아서 예언한다는 사람이나, 성령받아서 병든 자를 치유한다고 하는 사람을 우리는 점검해야 한다.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그 영이 성령인지 악령인지를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일이다. 아직까지 우리가 120명의 성도들처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면 우선 말씀을 공부하여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 우리도 그들처럼 순교를 각오하는 믿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개하여 자기 속에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악한 영들을 제거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다. 

 

6. 내 속에 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도에 수련하는 자가 되었을 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우리 한국 사람들은 대대로 귀신들을 섬겨 온 이방인들 중의 이방인들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 전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기 전까지 우리 민족은 각종 귀신들을 섬겨 온 우상 숭배자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하지도 아니한 채 성령받기를 사모하고, 또한 산에 올라가 기도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여기 좋은 예화가 있다. 그것은 사도행전 8장의 이야기다. 빌립 집사가 이방인의 땅인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할 때의 일이다. 그곳에는 마술사 시몬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빌립 집사가 와서 복음을 전파하는데, 빌립 집사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아 무장된 상태로 그곳에 온 자였다. 그러니 복음을 전파할 때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든 자들도 치유함을 받아 그곳에도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다. 그러자 사마리아 동네에서 귀신을 받아서 마술사로 일하고 있던 시몬이 빌립을 열심히 따라다닌다. 그리고 자기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면서 빌립에게 세례까지 받는다. 그런데 그가 세례를 받았던 것은 진정 복음의 증인이 되고자 함이 아니었다. 자기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빌립 집사의 모습을 보고서 그것을 자기도 가져 보려는 욕심에서였다. 그런데 그때, 사마리아도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예루살렘에 전해지자,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그곳에 파송한다. 자초지종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거기에 있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받기를 기도해 준다. 그리고 안수하였을 때 그들도 역시 자기들처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이 나타났다. 그러자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에게 돈을 주면서, 자기도 안수하면 누구든지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면서 부탁을 한다. 그러자 베드로는 황당한 그의 부탁을 받고 그를 엄히 꾸짖게 되는데,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살 줄로 알았으니 네 돈과 함께 망할지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네가 받을 어떠한 분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속히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라. 그리고 주님께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행8:20~22)"고 말한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보니 그에게는 악함이 가득한 상태였고, 그가 악한 영에 매여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그가 회개했는지 안했는지가 성경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최초의 교회 역사 학자였던 유세비우스(A.D.260~340)가 그후의 일을 기록해 두었다. 그의 책 "교회사 제2권 14장"에 보면 이러한 기사가 나온다. 
  "이 마술사는 과거에 유대에서 사도 베드로로부터 사악함을 정죄받았을 때에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빛 때문에 영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서쪽으로 도피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고는 바다를 건넜다. 그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에 당시 그곳에는 악한 정신이 사로잡고 있었으므로 그의 계획은 곧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그 도시의 시민으로부터 신으로 숭배받으며 그의 신앙까지 세워졌다." 

  그렇다. 그는 회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을 지배해 왔던 그 악한 영을 그대로 가진 채 로마로 건너가서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속였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신처럼 행세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렇다. 자기 속에 악한 영을 제거하지 않는 한 그 영을 성령의 역사로 얼마든지 가장하며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어디에서든지 기적이 나타나고 병든 자가 낫게 되고 희한한 일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무조건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여기기도 한다. 이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7. 성령세례 받기를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고로 우리도 성령을 받기를 원한다면 성령받기를 기도하기 전에 2가지를 점검해야 한다. 첫째로, 그것은 내가 과연 주님에 대한 순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체크해 보는 것이다. 주님이 누군지도 모른 채 성령세례를 간구했다가는 귀신이 주는 것도 성령이 주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은 참신앙인 것이지 미신이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미신은 신앙의 대상이 누가 되었든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그냥 자기에게 복만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참 신앙은 다르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로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고 성령세례도 받아야지 성령세례만 받으면 좋다고 성령세례를 받았다가는 귀신의 장난에 그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둘째로, 그것은 회개하여 내 안에 들어 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하여 깨끗한 상태가 되었는지를 체크해 보는 것이다. 회개 없이는 악한 영들은 내게서 절대 제거되지 아니한다. 우리 조상들이 지었던 우상 숭배의 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악한 영들이 우리 몸속에 들어와 있는지 우리들은 사실 잘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영들을 제거하지 않는 한, 우리도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처럼 악령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을 성령의 사람이라고 속이는 자가 될 수 있다. 고로 먼저 내 조상들이 지었던 우상 숭배의 죄들부터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지은 자범죄들까지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능력받아서 오히려 자신의 영혼이 더 망가지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8. 나오며

  성령세례나 은사를 받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지만 우리는 순서를 지켜야 한다. 우리와 같은 우상 숭배에 찌들어 있던 이방인들은 기도보다도 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믿음을 점검하는 일이요, 또한 회개하는 일이다. 이것이 뒷받침 되지 않는 한 어느 날 우리도 주님을 배반하고 떠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귀신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귀신이 보여 주고 들려주고 능력주는 것을 성령께서 주시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또한 기도를 많이 하여 성령세례를 받아 은사 사역을 잘해 오던 자라 할지라도 자기 안에 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 사역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교만의 영이 올라가 자기를 무엇이나 되는 것인 양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고 나중에는 예수님은 죽었으니 그는 실패자였다고 하면서 자신만이 인류의 구원자요 하나님이라고 떠들어대기도 한다. 이것이 모두 회개를 하지 않아서 나오는 병폐들인 것이다. 특히 우리 민족이 섬겨 온 악한 영들은 실로 종류도 많고 또한 큰 놈들도 많이 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영들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로 기도에 전념하다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철저한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한 철저한 공부가 더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은사를 구해도 늦지 않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받아 천국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회개하여 내 속에 있는 영들을 먼저 내보낸 뒤에 또한 악한 영들에 붙잡혀 있는 다른 이들을 건져내야 하는 것이다. 

 

 

2022년 06월 12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05) 성령세례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행1:12~14)_2022-06-10(금)

https://youtu.be/mNHtNldt3ic  [혹은 https://tv.naver.com/v/27276963 ]

 

1. A.D.30년 5월 18일경 120명의 성도들은 왜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는가?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약 40일이 되던 날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셨다. 그리고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로 알려진 다락방으로 모였다. 그럼, 그들은 왜 모였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성령을 받기 위해 모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너희가 들었던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 왜냐하면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행1:4~5)"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제 성령받기 위해서 마가의 다락방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곳은 감람산으로부터 약 1Km 떨어진 곳으로서 안식일에 걸어가기에 알맞은 거리였다. 

 

2. 그곳에는 누구누구가 모여 있었는가?

  그렇다면 그날 마가의 다락방에는 누구누구가 모였는가? 그들은 '열한 사도들'과 '여자들'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의 동생들'이었다.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나다나엘),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다대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1:13-14)" 

  그렇다. 이때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갈릴리 출신의 사람들이었다(행1:11). 그중의 핵심은 열 한 사도들이다. 그런데 이 사도들의 이름들 가운데 베드로의 이름이 첫번째로 기록된 것은 당시 베드로가 사도들의 대표자였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거기에는 '여자들'도 있었다. 눅8:3에 의하면,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부터 예수님을 도운 여인들이 나온다. 그러므로 일곱 귀신 들려 나았던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수사의 아내였던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가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세베대의 아내였던 살로메(요한과 야고보의 모친)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막15:40).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름은 분명하게 수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동생들도 있었다고 했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의 동생들의 이름이 나온다. 그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시몬, 유다 등이다. 그리고 예수님에게는 여동생들도 있었으므로, 아무도 여자들 중에 예수님의 여동생들도 들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마13:55). 누가는 그때 모인 무리들의 숫자를 기록해 놓았으니, 그들은 약 120명 정도되었다고 했다(행1:15).
 

3. 이들이 모여서 성령받기 위해 한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던 120명의 성도들이 과연 예수님의 유언에 따라 성령받기 위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합심기도였고 그들은 그것에 몰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행1;14). 왜냐하면 성경에 보니, "마음을 같이 하여(한 마음으로, 일심으로)" 그리고 "기도에 오로지 힘썼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행1:14).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보니, 그때 상황이 보다 더 정확히 나온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에 따르면, "이들 모두는... 마음을 같이하여(한 마음으로) 기도에 물두하고 있으면서 있어 왔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있어왔다"는 말은 직설법 미완료구문으로서 그들이 모여서 10일 동안 계속해서 기도해왔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특히 '오로지 힘썼다'라고 번역되고 있는 동사는 '프로스카테레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어떠한 상태로 계속해서 머물러 있다. 굳게 충성하다. 끈질기게 성실하게 임하다. 몰두하다. 전념하다.'의 뜻을 가진 단어로서, 120명의 성도들이, 그때에 오직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합심하여 집중적으로 기도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도 우리도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기도에 몰두하여 성령을 간구하면 모두다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

 

4. 사도행전에는 어떻게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보도하고 있는가?

  사도행전에는 성령세례를 받은 사건이 총 다섯 번에 걸쳐 나온다. 네 번은 단체적으로 성령이 임한 사건이요, 한 번은 개인적으로 성령이 임한 사건이다. 그것도 한 번은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사마리아에서, 고넬료가정에서, 마지막으로 에베소에서 일어났다. 이것들 중에서 단체적으로 성령세례가 부어진 사건으로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 부어진 것으로 시작된다. 120명의 성도들이 에루살렘의 마가다락방에서 모여 한 마음으로 오로지 기도에 전념할 때에 성령이 부어졌다(행2:1~4). 이것이 예루살렘 성령세례 사건이다. 그리고 사마리아에서는 빌립 집사가 복음을 전파했을 때에 사마리아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자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안수함으로 그들에게 성령세례가 부어졌다고 언급되어 있다(행8:14~17). 그리고 고넬료 가정은 개종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와 그 가정에 베드로가 가서 직접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이 부어진 사건이었다(행10:44~46). 그리고 마지막은 에베소 성령강림 사건인데, 이때는 사도 바울이 내려가서 안수할 때에 일어난 것이다(행19:1~6). 그런데 여기까지는 다 단체적으로 성령이 부어진 사건들이다. 이것 말고도 개인적으로 성령이 부어진 사건도 나오는데, 이는 다메섹에서 금식하고 있던 사울(나중에 바울)에게 아나니아가 안수함으로 성령세례가 부어진 것이다(행9:17~19).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세례 사건은 총 다섯 번에 걸쳐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각자의 사건마다 성령세례를 받았던 조건은 동일했을까? 아니다. 성령세례가 임한 조건이 다 똑같지는 않았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령세례가 다 예수님께서 누군지를 알고 믿었던 자들에게 부어졌다는 것이며, 성령세례가 부어지게 되면 밖으로 나타난 성령의 선물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섯 번의 경우는 대체 성령세례의 조건이 어떠했던 것일까?

  첫째는 예루살렘 성령강림사건처럼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에 일어났다(행1:14). 둘째는 사도들이 안수할 때에 성령이 임하였는데, 그러한 경우에는 사마리아의 경우가 있고(행8:14~17) 에베소의 경우가 있다(행19:1~6). 그리고 사울에게는 다메섹의 경건한 기독교 자도자로 추정되는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할 때 일어났다(행9:17~19). 그리고 셋째로, 고넬료 가정의 경우는 베드로가 가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에 성령세례가 부어진 경우이다(행10:44~46). 고로 종합해보면, 성령강림이나 성령세례 사건들은 성도들이 모여 간절히 기도할 때, 그리고 믿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에, 그리고 이미 구원받은 자들에게 권위있는 사도들이 가서 안수할 때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무리들이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표현에는 무슨 뜻이 들어있는가?

  오늘 우리는 성령세례 사건 중에서 처음으로 성령세례가 부어진 것으로서 예루살렘의 마가 다락방에 모인 무리 120명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을 살펴보고 있다. 이때 성령세례는 오로지 모인 무리가 예외없이 성령받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기도에 전념할 때에 일어났다. 그럼, 우리도 성령을 달라고 기도에 전념하면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 물론 이 말은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아니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고로 정확히 이 사건을 살펴보면, 성령세례의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바로 '기도', 특히 '합심기도'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고 하겠다. 그것은 오로지 성령받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성령 받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오로지 기도에 전념할 때에 성령세례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세례에 대한 기대를 갖고 열심히 기도만 하면 모든 사람이 다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도할 때 그들이 어떤 기도를 했는지를 정확히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예루살렘의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와 우상숭배에 찌들어 살아온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부어지는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토박이 유대인들이 받는 성령세례와 오늘날 대학민국 사람같은 이방인들이 받는 성령세례는 그 상황과 조건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천편일률적으로 기도만 하면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잠시 내려놓고 그때 당시로 돌아가봐야 한다. 그리고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의 기록을 통해 사람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회개"라는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눅24:47~49, 행2:38, 8:17~24). 이 부분을 간과하면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악한 영들에게 속아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간관계상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2022년 06월 10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03)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은 무엇인가?(행1:1~11)_2022-06-08(수)

https://youtu.be/ce9WRLk_Ags  [혹은 https://tv.naver.com/v/27276286 ]

 

1.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구인지 사도행전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가?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군지는 분명하다. 그는 누가복음의 저자인 의사 누가다. 이것은 성경 외의 증거들이 정확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부정할 수가 없다. 즉 교회의 역사가들의 증언과 초기 교부들의 기록들 그리고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 기록만으로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렇다. 그런데 쉽지는 않다. 우선 사도행전 내에서 우리는 그가 바울 선교팀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것도 2차 선교 여행 때에 바울팀에 합류한 사람으로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2차 전도 여행 때에 처음으로 자신을 '우리'라는 말로 표현했기 때문이다(행16:10). 그럼, 2차 전도 여행 때에 바울과 함께 했던 자들은 누구인가? 출발은 바울과 실라가 함께 하였다(행15:40). 그리고 루스드라에서 디모데가 합류하였다(행16:1~5). 그리고 저자는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고 말한다(행16:10). 그럼,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구인가? 바울? 실라? 디모데? 그런데 이들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라고 말하던 이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를 '우리'에서 제외시킬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행16:17, 17:14, 17:16). 그렇다면 2차 전도 여행 때에 합류하여 계속해서 3차와 로마 여행까지 함께 했던 바울의 선교 동역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울 서신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는데, 그는 한 사람으로 귀결된다. 그는 바울이 A.D.67~68년경 순교할 때까지 함께 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사랑받는 의사이자, 바울의 동역자였던 '누가'이다(골4:14, 몬1:24, 딤후4:11). 

 

2. 사도행전은 누구를 위하여 쓴 것인가?

   사도행전은 누구를 위해 썼는지를 처음부터 밝힌다. 그는 '데오빌로'이다. '데오빌로'가 누군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에게 누가가 복음서를 써서 드렸고, 이어서 사도행전을 써서 드린 것이다(눅1:1~4, 행1:1~2). 그에게 누가가 '각하'라는 존칭어를 사용했을 뿐더러 그가 이미 알고 있는 바가 있는데, 그로 하여금 더 확실하게 알게 하기 위하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것이다(눅1:4). 아마도 데오빌로는 로마의 고위직이었지만 초신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데오빌로'라는 말은 '데오스'(하나님)와 '필레오'(사랑하다)가 합쳐진 단어이며, 그 뜻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기에, 그가 비록 로마의 관리였지만 개종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 애칭으로 그렇게 불렸을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전승에 의하면, 그의 이름이 '클레멘스'였다는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의사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예수님의 행적을 정확하게 알려 주기 위하여 또 하나의 복음서를 썼으며, 사도행전을 써서 사도들의 행적으로 정확하게 알려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의 행적을 정확하게 알려면 '누가복음'을 읽어 보는 것이 좋으며, 사도들의 행적을 정확하게 알려면 '사도행전'을 읽어 보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고 아니 말할 수 없다. 

 

3.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행하신 마지막 유언이자 명령은 대체 무엇인가?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유언은 무엇인가? 그것은 2가지다. 첫째, 예루살렘에서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는 것으로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것이었다(행1:4~5). 그리고 둘째는 성령을 받은 후에는 능력을 받으라는 것이었다(행1:8). 왜냐하면 그래야 사도들도 복음의 전파자요 주님의 증언자들이 되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예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약속'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아버지의 약속'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오늘 본문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으니,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행1:5). 그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구약 시대에 여호와께서 성령에 관하여 약속하신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세례인 것을 뜻한다. 그럼, 구약 시대에 여호와께서는 성령 세례에 관하여 어떤 약속을 하셨는가? 그것은 총 2가지였다. 

  첫째, 주님께서 포로 생활에서 귀환하여 자신을 정결하게 되면, 같은 종류의 질적으로 새로운 여호와의 영을 그들의 영 속에 집어넣어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겔36:26~27). 그리하여 그후부터는 누구든지 성령받은 자는 곧바로 하나님의 율례를 따라서 걸어가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B.C.586년경의 약속으로서, 성령의 내주에 관한 약속의 말씀이다. 그리하여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오시는 성령은 예수님을 증언하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하고 회개케 하는 일을 하신다. 

  둘째, 주님께서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는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그들의 육신 위에 여호와의 영을 쏟아 부어주실 것인데, 그 대상을 제한하지 않고 부어주실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들이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게 될 것이라고 했다(욜2:28~32). 그러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B.C.800년경의 약속으로서, 성령의 외적인 부어주심에 관한 약속의 말씀이다. 그리하여 믿는 이들 머리 위에 쏟아부어지는 성령께서는 다양한 은사들을 주신다는 것이다. 

 

5. 오늘날 성도들은 과연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을 지키고 있는가?

  문제는 지금 우리들에게 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먼저 믿고 회개하여서 성령 세례를 받았고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구하여서 능력을 받았는데, 지금 우리들은 과연 이와 같이 성령을 받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능력'을 받는다는 것은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가리킨다(눅9:1~2). 고로 우리가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을 받고 이어서 임하는 성령을 받아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복음의 증인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성적인 머리(혼적인 생각)만으로 복음을 전해 왔고,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사람들을 속여온 것이다. 성령을 받고 능력을 받아서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때에 비로소 우리도 구원을 얻게 되고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는데도, 성령, 능력, 귀신, 영적인 세력 등은 뒷전에 두고 오직 예수만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죽어서는 천국가며 천국에 들어가서도 왕같은 제사장으로 참여한다고 가르쳐 왔던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가?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어도 자기가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죽은 후에 성령은 떠나가고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기 때문이며, 그런 자는 결코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못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간 자라도 계급이 똑같지 않아서, 그중에 어떤 이는 왕 노릇하는 자가 있지만, 반대로 천국에서 섬기며 사는 성도도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과연 사실인지 알려면 영안이 열려서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오직 혼적인 가르침으로 복음을 전했으니 이것들을 아는 이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달라져야 한다. 나도 성령의 세례를 받고 그러고 나서는 기도하여 능력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하며, 악한 영들을 제압하는 가운데 복음을 증거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2022년 06월 08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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