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성도들은 언제 부활의 몸을 입는 것일까? 죽은 순간인가 아니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바로 그날인가? 사람의 영혼은 죽은 다음에 무덤 속에 시체와 같이 잠자는 상태로 있다는 주장이 맞는 것일까? 그리고 재림하실 그리스도는 오셔서 과연 무슨 일을 행하실 것인가? 그리고 그때 정말 문자적인 천년왕국이 이 지상에 건설되는 것일까? 오늘은 이사야에 나오는 메시야의 재림의 모습을 통해서 종말론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이사야에 나타난 메시야의 재림의 모습은 어떠할까? 우선적으로 메시야는 여호와 자신이 오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사25:9).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큰 나팔 소리와 함께(사27:13), 하늘의 천군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좇아 강림하산다고 되어 있다(사24:21, 64:1~3). 그리고 그분이 재림하실 장소는 예루살렘일 것이며(사24:23), 그때 그분의 발은 예루살렘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라고 했다(슥14:4~5참고). 이것이 이사야에서 말씀하고 있는 재림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메시야는 재림하셔서 무슨 일을 하실까? 오늘 이 시간에는 재림하셔서 행하실 메시야의 사역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오늘날 혼돈스런 종말론의 시작과 실체와 그 역사

  오늘날 교회가운데 종말론분야는 정말 춘추전국시대라고나 할까? 정말 정리가 되지 않고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럭비공과 같다. 그만큼 제 각각이라는 말씀이다. 그중에서도 한국교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종말론은 아마 세대주의 종말론일 것이다. 영국성공회의 신부였던 존 넬슨 다비(1,800~1892)에 의해 시작된 세대주의라는 사상기조는 종말론에 있어서 오늘늘 한국교회를 이리저리 휘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다비의 종말론사상의 대부분이 다 로마카톨릭의 리베라신부의 종말론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루터와 칼빈이 종교개혁을 일으켜 성공하고 있을 때, 종교개혁자들은 거의 대부분 적그리스도를 교황이라고 지목하고 있었다. 그러자 로마카톨릭에서는 교황이 적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는 혼돈을 주고자, 두 명의 신부에게 특명을 하달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리베라신부'다. 리베라신부는 그때 다니엘에 나오는 한 이레의 언약 중 절반에 해당하는 후3년반에 적그리스도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때 그 인물은 무신론적 인물로서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해준 장본인이며, 그가 후3년반이 되면 이스라엘 맺은 평화협정을 깨뜨리고 자기가 성전에 앉아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라는 이론이다. 이후에 다비는 이러한 리베라신부의 주장을 고스란히 받아서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그것을 투영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7년대환난설이요, 이때 교회는 휴거하여 공중에서 7년동안 공중혼인잔치를 하고 이 지상에는 이스라엘이 7년동안 적그리스도와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고, 3년 반 뒤에는 적그리스도가 그것을 파기하고 자기를 하나님으로 등극시킬 것이라고 주장들이다. 그후 적그리스도에게 속았다고 생각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그리스도에 대한 우상숭배를 거부하게 될텐데, 이때부터 이스라엘인들이 순교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마지막 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추수를 끝으로 인류역사가 마감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핵심사항이다.

  그렇다. 교회와 이스라엘의 역할과 운명을 철저히 분리시키고, 적그리스도를 무신론적 인물로서 둔갑시키고 있는 다비의 세대주의적 종말론 사상은 지금도 한국교회를 여러가지 혼란으로 끌어가고 있다. 그러나 아니다. 다음과 같은 용어들 곧 7년 대환난, 7년 공중혼인잔치, 무신론적 적그리스도의 출현. 세계정부 그리고 천년왕국, 다 가짜이론들이며 가짜학설들이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 홈페이에 언급하고 있는 다른 설교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성경이 지지하고 있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주장은 리베라신부가 이러한 가설을 주장하기 전까지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학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종말론 특히 예수께서 말씀하고 있는 종말론을을 믿고 따라야 할 것이다.


3. 이사야서에 나오는 종말론에 대한 해석의 3가지 관점

  그렇다면, 이사야에 나온 종말에 관한 예언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우선 우리는 이사야에 나오는 메시야의 재림에 관한 예언을 살펴볼 때에 3가지 것에 주의해야 한다. 첫째는 이것이 초림의 메시야의 사역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재림의 메시야의 사역을 말하는 것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 실제적인 예언인지 아니면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예언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 이것이 개인적인 예언인지 아니면 우주적인 예언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에 안타깝게도 B.C.700년경에 쓰여진 이사야서의 예언들은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 그리고 실제와 상징이 교차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종말과 우주적인 종말이 함께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잘못 해석하면 종말론에 있어서계속해서 혼돈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왜 이러한 혼돈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B.C.700년경에 주어진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그것이 전부다 앞으로 일어날 미래적인 예언이기에, 어떤 것은 초림의 메시야와 재림의 메시야가 함께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보다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해계시는 분으로서, 그분은 시작과 끝이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기에, 이사야의 예언이 꼭 시간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데에 유념을 해야 한다.


4. 메시야의 재림에 관한 예언의 해석의 잣대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이사야에 나타난 메시야의 재림에 관한 예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이사야에 나타난 메시야의 재림의 예언해석의 기준은 무엇으로 적용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것은 그 예언의 말씀을 주셨던 여호와 하나님 곧 신약의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들을 어떻게 인용하고 해석하셨는지를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초림하신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내용이라면 그것은 초림의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며, 미래적인 일로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면 그것은 재림하실 메시야에 관한 약속의 예언으로 보면 된다.


5. 성도들의 부활의 시기에 대한 올바른 해석

   예를 들어보자. 성도들의 부활의 시기를 한 번 살펴보자. 우리는 여기서 그것이 실제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상징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개인적인 부활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주적인 부활을 말하는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사26:19의 말씀을 보자.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아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사26:19)" 이 예언은 실제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상징인가? 당연히 상징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의 몸은 우리가 이 땅에서 입고 살았던 육신의 몸 곧 시체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영의 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부활은 개인적인 부활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주적인 부활을 말하는 것인가? 많은 신학자들이 여기에서 혼돈을 겪었다. 그리하여 이 말씀이 개인적인 부활에 대한 묘사인 것을 망각한 채 우주적인 부활로만 해석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들은 죽을 때에 곧바로 부활하지 않고 무덤 속에서 잠자는 상태로 있다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결코 그것이 아니다. 우주적인 부활 때에는 그렇게 되겠지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기 전까지 성도들은 전부다 개인적인 부활을 할 것이다. 그리하여 믿고 회개한 의인의 영혼은 생명의 부활에 참여할 것이고, 믿지 않고 회개하지 못한 악인의 영혼은 심판의 부활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신약의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그와 같은 사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요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지금이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5: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5:25에 나오는 '죽은 자들'은 육체가 죽은 자들일까? 아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죽은 자들'은 영이 죽은 자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24절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고 그리고 믿고 있는 자는 영생을 가진다고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그때에 비로소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28절에 나오는 '무덤 속에 있는 자'는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은 죽어 육신이 무덤 속에 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무덤"이란 사람의 육체를 가리킨다. 사람이 죽게되면, 즉시 사람의 영이 자신의 육체를 벗고 나오는데 이때 영이 곧바로 부활의 몸을 입고 부활을 하게 된다. 이때에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부활하여 천국으로 들어가며, 어떤 이는 심판의 부활로 나와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요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부활'이란 우주적인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부활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후 모든 성도들은 죽은 즉시 그의 영의 몸이 육체에서 빠져나와서 부활의 몸으로 갈아입고 곧바로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죽은 다음에 성도들은 무덤 속에 시체와 함께 있다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사람이 죽으면 흙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영은 사람이 죽은 즉시 부활의 몸을 입고 천국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가든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이후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가장 먼저 부활하여 주님을 영접하겠다고 감람산에 무덤을 쓴 자들은 아무 쓸데 없는 잣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자마다 이미 다 부활하여 영의 몸을 입고 천국에 들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묫자리에에 헛된 돈을 쓰지 말라. 아무 쓸모 없는 짓이다. 사람의 영은 무덤과 같은 육신 속에 갇혀있다가 죽을 때에 그 육신 속에서부터 밖으로 빠져나와 부활의 몸을 입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주적인 종말 곧 그리스도의 재림 전까지 있어질 개인적인 종말이자 개인적인 부활의 모습이다.


6. 메시야가 재림 후에 행하실 3가지 사역

  이제는 마지막으로, 재림하실 메시야의 목적에 대해 이사야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으며, 앞으로 그것은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샤야선지자는 메시야의 재림의 목적을 3가지로 말한다. 하나는 심판이며, 또 하나는 구원이며, 마지막 하나는 새하늘과 새땅으로으로 옮김이다재림하시는 메시야는 첫째,, 악의 무리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 악한 무리들로는 첫째로는 악한 자 사탄을 따르는 악한 사람들이 될 것이며(사26:21~22,24:21), 둘째로는 사탄과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이 될 것이며(사27:1, 24:21), 마지막으로는 사망의 세력이 될 것이다(사25:8). 이러한 예언의 성취는 요한계시록 19장-20장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으니, 첫째로는 짐승과 거짓선지자와 땅의 임금들과 군대들이 불못에 던져질 것이며(계29:19~21), 둘째로는 사탄마귀와 그의 귀신들이 불못에 던져질 것이며(계20:10), 마지막으로 사망과 음부가 불못에 던져질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이 악의 무리들에 대한 메시야의 최종적인 심판의 모습이다.

  이어서 둘째, 재림하시는 메시야는 성도들을 구원하시어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기고 수치를 제거하실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했다( 사25:8~9). 이때는 그때까지 참고 인내한 성도들에 대한 구원이 일어날 것이다. 이미 천국에 들어가있던 성도들은 그때 예수께서 데리고 오실 것이므로, 그날은 온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부활사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이제는 이미 천국에서 데리고온 성도들과 그날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동하는 일이다(사65:17~19). 그리고 거기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 장차 오실 메시야는 이 땅에 결코 천국을 건설하지 않으신다. 또한 이 땅에 그 어떤 문자적인 천년왕국도 세우시지 않는다(천년왕국은 상징적인 표현일 뿐이다. 여기 홈페이지에 있는 다른 설교 참고)(벧후3:12~13). 그때에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다 불에 타서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때 예수께서는 구원얻은 성도들만 데리고 새하늘과 새땅으로 옮기셔서 영원히 거기에서 영광을 누리며 살게 하실 것이다(계21:1).




왜 회개와 천국복음을 들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회개없이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회개에는 어떤 방면이 있는가? 회개의 2가지 방면 중에 아브라함이 24년만에 깨달은 회개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오늘날 믿음만으로 천국갈 수 있다고 잘못 믿게 된 3가지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은 그것을 알아보자.


1. 들어가며 - 천국가는 2가지 길잡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2가지를 천국길의 안내잡이로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한 보혜사 성령이시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시119:105)"이기 때문이며, 보혜사성령은성경의 저자이시며 기록된 성경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요14:26). 그렇다고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이 마구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약4:6).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교만해서는 아니 된다. 주님께서 깨우쳐 주시면 그날부로 고치겠다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 눈에 들어오게 해주시고 구원으로 바르게 인도해주시는 것이다.


2.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2가지 요소

  사람은 과연 어떻게 해서 구원받을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것은 '믿음'과 '회개'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잘못 보게 되면 구원은 믿음만 있으면 받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물론 믿음으로 구원을 얻다는 말씀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이 믿음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이 아니며, 성경원문으로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뜻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여기서 구원받는 믿음이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닌 것만큼은 확실하다. 한편 구원을 받는 것과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좀 다른 표현인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있기는 하지만,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성경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내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기를 더 선호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까지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가르쳐준 견해가 아니다. 구원은 항상 현재 진행형이지 결코 완료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다고 주장하는 자는 자기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들어왔고 자기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배웠던 것일 뿐이지 그것이 성경의 전반적인 견해가 아니라는 것을 잘 모른다. 쉽게 구원받고 쉽게 죄사함을 받고 쉽게 구원받으려는 얄팍한 생각에서 나온 것들이다. 아니다. 구원, 그렇게 쉽게 호락호락하게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3. 예수님을 믿는 것과 죄사함을 받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에 있어서 무엇부터 교정해야 되는 것인가? 우선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는다는 주장부터 곰곰히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님을 믿기만하면 정말 자동적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일까?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한 것이지 예수님을 믿는다고해서 회개하지도 않은 죄가 사함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분명하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말이다(행4:12).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죄사함이 자동적으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회개하지도 않은 죄를 사함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를 자백할 때에 비로소 예수의 피가 자신이 지은 죄를 씻어낸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그가...우리의 죄를 사하시며(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게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그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운전의 예를 들어보자. 내가 운전하려면 우선 운전면허증을 따야 한다. 운전면허증이 없이 운전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운전면허증을 취득했다 것은 이제 운전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운전면허증을 땄다는 그 사실 자체가 내가 어딘가로 차를 운전해 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직접 차를 운전할 때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기본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내 죄를 사해줄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함받으려면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해야 한다(요일1:9). 그때에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히 씻어주는 것이다.


4. 구원의 첫번째 요소

  그렇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2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또 하나는 죄사함을 얻기 위해 회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구원에는 믿음이 필요하고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믿음도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그냥 내밷는 믿음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성경에서 350가지 이상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믿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메시야가 누구에게 잉태될 것이고 어디에서 태어나시며, 어떤 공생애를 살다가 어떻게 죽고 어떻게 부활할 것이며, 그가 어떻게 승천하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가, 어떻게 재림하시고 어떻게 심판하실 것인가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러한 삶을 사셨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구세주로 믿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무조건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성경에 기록된 바로 그 메시야의 길을 가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이때 메시야의 핵심은 그분의 속죄의 죽음과 생명의 부활이다. 그중에서도 속죄는 오직 흠없는 어린양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 중에는 흠없는 곧 죄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류는 다 죄가운데에 태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없으신 사람이 오셔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이고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다는 측면에서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만이 죄없이 태어나신 둘째아담(둘째사람)이신 것을 믿는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면 피흘릴 수 없으며,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이시다. 또한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기도 하시다. 이것을 믿는 것을 일컬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비로소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에 들어오시고,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5. 구원의 두번째 요소와 두 가지 방면의 회개

  혹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위와같은 믿음이 있다고 치자. 그래도 구원받을 수는 없다.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한 가지가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좀전에도 말했듯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마4:17). 그런데 회개에도 2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하나는 지은 자범죄를 회개하는 기초적인 회개가 있고, 또 하나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본질적인 회개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처음에 믿을 때에는 자신이 지은 낱낱의 죄를 회개하는 기초적인 회개를 하곤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사람이 구원받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자신이 죄인인 것을 회개하는 회개가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6. 아브라함의 회개의 예

  이러한 회개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브라함의 삶에 들어 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의 85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창15:6). 하지만 그것으로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기에 합당치 못했다. 왜냐하면 그 뒤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을 사용하여 후사를 얻으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건이 바로 첩 하갈을 통해 후사를 이으려고 한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내 아브라함을 떠나버리셨다. 그것도 무려 13년동안이나 말이다. 그 기간은 아브라함에게는 정말 칠흑같이 어두운 터널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는 자신의 뒤를 돌아보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갈대아우르를 나올 때부터 조카 롯을 데리고 나온 것에 대해 회개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카 롯을 떠나보낸 후에는 자신의 종 다메섹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로 했던 것도 회개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육체의 정욕에 따라 첩하갈을 통해서 자식을 얻으려했던 것도 회개했을 것이다. 그 기간이 무려 13년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이제 그의 나이는 99세였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타나시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네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셨다(창17:1). 이 말씀은 그동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전능자로 믿지 못하고 있었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며, 그의 믿음은 온전하지 못했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은 그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결국 아브라함더러 자신의 육체의 본성을 따라 행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겠다고 결단하라는 요구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두번째 회개 곧 본질적인 회개다. 아브라함은 이때 자신의 지난 날의 삶을 돌아보면서 두 번 다시 죄된 본성을 따라 행하지 않을 것을 굳게 결심하면서 자신의 포피를 베어내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할례다. 하나님 없이 행하는 자신의 생각과 지혜는 아무리 옳은 것 이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겸손히 시인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인 것을 믿고 따라가겠다는 선포한 것이다.


7. 자범죄에 대한 회개와 본질적인 죄성에 대한 회개

  그렇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러한 본질적인 회개가 필요하다. 낱낱의 지은 죄를 자백하는 회개도 해야 하지만 이것 말고, 하나님 없는 자신은 오직 죄된 본성으로 가득찬 존재임을 시인하면서 앞으로는 그 본성을 따라 행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회개가 더 필요한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죄인됨을 시인하는 회개 곧 본질적인 회개를 하기까지는 그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얻은 후 무려 1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야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만큼 본질적인 회개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아브라함의 할례에 대해 사도바울은 어떻게 말했는가? 그는 아브라함의 할례란 아브라함이 자신이 가진 믿음의 의를 인치는 행위였다고 했다(롬4:11상). 그렇다. 회개에도 2가지가 있는 것이다. 낱낱의 자범죄를 회개하는 기초적인 회개가 있고, 자신이 죄인됨을 인정하고 이제는 그것을 따라가는 자체가 죄인 것을 깨닫고 오직 주님의 말씀만을 따라가겠다는 회개가 있는 것이다. 이 두번째의 회개를 일컬어 본질적인 회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구원받기 위해 본질적인 회개를 한 적이 있는가? 만약 이러한 회개가 없었다면 당신은 온전한 믿음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천국가기에 힘들다. 만약 이러한 상태에 있는 믿음이라면 언제라도 자기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날 그는 주님을 부인하고 말 것이다. 자신이 정말 죄인이어서 예수님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믿는 자만이 본질적인 회개를 하게 된다. 그러니 본질적인 회개를 한 적이 없는가? 눈물로 하나님 앞에 무릎꿇기를 바란다.


8.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잘못 알게 되는 3가지 이유

  이제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왜 믿음만 가지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거기에는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메카니즘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 말고도 회개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잘 몰랐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위에서 말했던 것을 다시 살펴보라.

  둘째로는 사도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이신칭의를 구원으로 알아듣는 과도한 해석 때문이다. 이신칭의는 사람을 의롭다고 칭해주는 것뿐인데 그것을 천국가는 것하고 동일시한 것이다. 사실 그것이 진리라고 하면 쉽고 편하게 천국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칭의는 구원의 여정에 첫발을 내딛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칭의를 거쳐 성화를 거쳐 영화의 단계에 들어가야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화나 영화의 과정을 생략한 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말만을 믿은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우리 성도들이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구원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를 배우기 전에 먼저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했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의 막대한 영향하에 있는 우리 개신교인들은 구원받는 것을 행위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해석해버렸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고 증거하는 야고보서를 성경에서 빼버리려고까지 시도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을 결정짓는 양과 염소의 심판을 아는가?(마25:31~46) 그때 예수께서 어떻게 천국과 지옥에 들어갈 자를 심판하셨는가? 믿음에 따른 판결이었는가 아니면 행함에 따른 판결이었는가? 다 행함이었다. 행함이 뒤따른 적이 없는 믿음은 거짓된 믿음이라고 판단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 불못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만으로 구원얻는다는 주장에 휘둘림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 구원받으려면 물론 믿음도 필요하다. 하지만 믿음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다면 이제는 회개함으로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죄를 가지고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요일3:8). 천국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지 않고는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요14:6). 다만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내가 지금 천국을 향해 바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보는 것이다. 이런 예가 바로 내가 십계명을 준수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우리가 십계명을 준수한다고해서 그것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십계명을 준수하는 것을 통해서 내가 천국을 향해 바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 볼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함이 따르지 아니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결국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셋째로는, 자신이 속한 교단의 신학과 교리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개신교인인 만큼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그늘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중세 로마카톨릭의 반작용으로 나온 당시 개신교는 중세로마카톨릭에서 주장하는 것에 무조건 반대하는 쪽에 서야 했다. 중세 로마카톨릭에서는 믿음만 있어서는 안 되고, 거기에다가 선행이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했다. 혹 누군가에서 구원얻기에 합당한 선행이 부족하게 되면 그들은 연옥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러니 구원받을만한 선행을 갖추는 것은 매우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러다보니 선행이 부족한 사람은 남의 잉여공로를 사서라도 그것을 채워야 했다. 게중에는 자신을 구원하고도 남을 잉여공로를 가진 자들도 있었다. 일명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종교개혁자들은 한사코 우리가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 나가버렸다. 자신이 구원을 향해 정상적으로 가고 있다면 응당 나타나야 할 믿음의 행위, 회개의 열매까지도 제거해버렸기 때문이다. 믿음만 있으면 행함이 없어도 구원받는다고 해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구원도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얻게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니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을 완전히 곡해한 것이다. 이 문제 대해서는 다음주에 자세히 더 설명하겠다. 그런데 이것이 곧 개신교 교리가 되어버렸고 각 교단의 교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중간에 오순절측에서는 믿음만 있어서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가 잘못된 구원론으로 빠지게 되어버린 것은 각 교회가 믿고 따라가는 교리와 교단의 신학 때문인 것이다.


9. 나오며

   이제 총정리해보자. 왜 사람들이 믿음생활을 하는데도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일까? 믿음은 있지만 회개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회개를 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게 회개하지 한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고 그렇게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왜 그런 가르침을 못 들은 것일까? 그것은 바울이 말한 이신칭의에 너무 집착했고 그것을 침소봉대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를 제쳐놓고 사도바울이 말한 것을 먼저 들이댔던 것이다. 그러면 왜 이신칭의의 사도바울의 신학을 강조했을까? 그것은 개신교의 교리와 교단의 신학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교리나 교단의 신학을 성경보다 우선해서 따라가서는 아니 된다. 그것으로 도움은 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함정이 많이 들어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바울신학을 배우기 전에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말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확증하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원에 대한 메카니즘을 제대로 파악하여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라가야 한다. 우리 주 예수님은 구원과 천국을 믿음과 회개로 얻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그 구원을 향해 바르게 가고 있는지는, 자신이 과연 십계명의 말씀을 지키고 있는지를 보라고 하셨다(마5~7장). 만약 내가 지금 십계명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지 않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는 믿음이 있다고 하는 자는 지금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면 지금 당신은 십계명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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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와 회개는 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아브라함이 복을 받는 데에는 왜 칭의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에게 할례의 인침은 왜 필요했던 것일까? 아브라함에게는 13년간의 자범죄에 대한 회개가 있었고, 할례를 통한 본질적인 회개가 있어야 했다. 이것은 오늘날 구원을 향해 가는 우리 성도들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1. 들어가며

  사람이 자신이 구원받기에 합당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기는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무조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고 확신하고 있으면 되는가? 아니면 다른 것으로 확인해 보아야 하는가? 오늘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사건을 통해서 그가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왜 그에게 할례가 필요했는지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기에 합당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확인하는지를 알아보자.


2.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아야 했던 이유

  사도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그가 무할례시에 받았던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고 말했다(롬4:111상).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진 믿음에 대해 인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던 시기는 언제였으며, 그가 할례를 통해 믿음의 의를 인쳐야 했던 시기는 언제였는지를 말이다.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을 때는 그의 나이 약 85세정도 때였다. 그리고 그가 할례를 받았던 시기는 그로부터 약 13년이 더 지난  후 약 99세 때였다. 한편,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자신의 고향친척아버지집을 떠날 때부터 계산해보면, 약 24년이 경과된 시기였다.


3. 할례와 인침의 속뜻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 시기에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주문했던 것일까? 이것에 대해 사도바울의 해석은 간단하다.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던 믿음으로 난 의가 인침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롬4:11상). 그렇다면, 할례란 무엇이며, 인침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할례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남자의 고추 끝에 있는 포피를 잘라내는 의식을 가리킨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인침이라는 것은 도장을 찍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무엇 때문에 도장을 찍는가? 3가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소유와 권위 그리고 안전 및 보호를 상징한다. 가령 어떤 물건을 놓고 도장을 찍는다고 치자. 이때 사람은 자신의 (인감)도장을 찍음으로 그 물건이 자신의 소유임을 확증해 놓는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물건은 그 소유권자의 허락없이는 손댈 수 없게 된다. 이때부터 도장받은 물건은 보호를 받게 되어 안전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침의 이유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할례가 그의 믿음을 인친 것이었다고 한다면, 인침은 그동안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에 대한 보증이요 보호이며 보증이 되는 셈이다. 이것을 거꾸로 말한다면, 그동안 그가 가진 믿음은 불완전했다는 뜻이며, 보호받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랬을까? 정말 그의 믿음은 불완전한 것이었고 성숙하지 못했던 것이었을까?


4. 아브라함의 신앙의 단계

   이제 아브라함의 신앙이 어떠했는지를 한 번 돌아보자.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75세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그때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갈대아우르를 떠나 가나안땅에까지 도착했지만, 그에게는 정작 후손이 없었다. 그래서 1차로 그는 그의 조카롯을 자신의 후사로 삼겠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그를 떠나보내야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2차로 자기 집에서 길리고 자란 다메섹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들이겠다고 했다. 그러자 또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 "네 자손이 이와같으리라"고 했다. 그때 아브라함은 처음처럼 그것을 그대로 믿었다(창15:6).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이때가 바로 아브라함이 자신의 고향을 떠나온지 약 10년이 지난 시점 곧 그의 나이 85세정도가 되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채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아브라함은 믿음이 부족한 행동을 하게 된다. 조카도 안 되고, 양자도 안 된다고 하니 이번에는 3차로 첩을 통해 자식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그의 아내가 먼저 제안한 것이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못 이긴 척 하면서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리하여 첩 하갈을 통해 자식을 낳게 되니 그가 바로 이스마엘이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아브라함에게 변고가 생기게 된다. 아브라함에게 늘 나타나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1달이 지나고,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가고 10년이 지나갔다. 그리고 또다시 3년이 흘러갔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아브라함은 어떻게 지냈을까? 그냥 흥청망청 술타령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일까? 아니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13년간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했을 것이다. 우선은 조카롯을 의지했던 것을 회개했을 것이다. 그리고 양자삼을 계획을 세웠던 것을 회개했을 것이다. 그리고 첩을 통해 자식을 낳아 후사를 잇게하겠다는 것을 회개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홀연히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에게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창17:1)." 이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그동안 하나님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믿지 못했음을 가리키며,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했음을 가리킨다. 그렇다. 아브라함이 13년간 회개하기까지 아브라함의 믿음(칭의의 믿음)은 온전하지 못한 믿음이었고, 그것으로는 그의 의를 보장받을 수 없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새 출발을 하도록 했다. 그때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할 것을 명하신 것이다. 그것도 자기와 자기아들(13세된 이스마엘)과 그의 집에 있는 모든 남자 종들을 다 말이다.


5. 아브라함에게 할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할례란 대체 어떤 것인가? 아브라함에게 할례는 그냥 자신의 육신의 포피를 베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가 할례를 받게 되면 일주일간은 움직이기가 곤란하다는 것을 남자들은 다 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식구들을 그때 누가 보호해 준다는 말인가? 잘못되면 몰살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겠다는 표시로 그날 그 집안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시행해 버렸다. 왜냐하면 자신의 지혜로운 생각과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지혜롭고 옳다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신의 생각 그리고 자신의 육체의 본성에 따라 해 왔는데, 결국 얻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가 그토록 바라던 후사를 얻었던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제 아브라함은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믿고 살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믿고 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내 생각과 판단이 옳은 듯 보였지만, 나중에 보니 육체의 죄된 본성에 따라 행한 임을 아브라함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서는 결코 하나님 앞에 완전히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날 즉각적으로 할례를 실행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제는 자신의 생각 곧 육체의 본성을 따라 행하는 자신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며 살겠다고 하는 표였던 것이다.


6. 할례와 회개의 상관관계

  그렇다. 아브라함에게는 2가지의 회개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지은 낱낱의 죄를 회개하는 회개 곧 자범죄에 대한 회개로서 기본적인 회개가 있었고,  또 하나는 자신은 죄인이며 죄인이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시인하는 본질적인 회개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86세에서 99세까지 13년동안은 기초적인 회개를 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의 나이 99세 때에는 본질적인 회개를 했던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자신이야말로 죄된 본성으로 조성되어있는 죄인인 것을 시인하면서, 그후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겠다고 결단한 것이다. 그렇다. 할례란 자신이 행한 것을 되돌아보니, 자신은 그렇게 행한 것이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다 죄된 본성에 대한 표출에 불과한 것임을 시인한 다음, 두번 다시 자신의 육체의 본성에 따라 행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겠다는 표시인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은 그날 자신의 육체에 할례를 행함으로써 마음의 할례도 동시에 시행했던 것이다. 사실 사람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란 비록 자신의 범죄가 지금은 할지라도 자신의 내면은 이미 죄된 본성으로 가득찬 사람인 것을 시인한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처음에는 낱낱이 지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간단한 회개를 했지만, 나중에는 자신 자체가 죄된 본성이 가득찬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회개를 하는 것이다.


7. 본질적인 회개가 아브라함에게 가져다 준 유익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아브라함이 비로소 본질적인 회개를 하자마자 그의 아내 사래가 임신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아브라함 자신이 그토록 수십년간 바래왔던 후사를 당장 얻게 되었다(창21:1~2).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는 "나의 벗"이라고 하는 칭함까지 받았다(약2:23). 그렇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처음 예수믿을 때에는 낱낱의 죄를 회개한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비록 자신이 죄를 짓지는 않았어도 자신도 죄된 본성으로 가득한 사람인 것을 시인하는 회개를 한다. 이때 이 두번째로 행하는 회개를 본질적인 회개라고 말하며, 그것이 곧 아브라함에게는 "마음의 할례"였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우리가 그분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골2:11)"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성도들이여, 자신이 지은 낱낱의 죄를 하나하나 회개했으니 회개는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라. 회개는 그때부터 진짜 시작된다. 본질적인 회개가 말이다. 마음의 할례와 같은 회개 없이는 결코 자신이 가진 믿음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보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즉 본질적인 회개없이는 결코 자신의 가진 믿음으로 천국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8. 나오며

  여러분이여,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나는 진정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인지를 말이다. 진짜 자신이야말로 죄된 본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시인하고, 다시는 죄된 본성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고 있다면, 당신은 아직 믿음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많은 수가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그 믿음으로 구원도 받고 천국에도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아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불안전한 믿음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구원받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믿음을 갖도록 할례를 주문하신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할례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또한 본질적인 회개를 하고 있지 않는 성도라면, 당신은 믿음의 인침이 없는 사람인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이때 죽는다면 그 믿음으로 천국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전능자로 믿지 않고 자신의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믿는 자는 결코 구원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도들이여, 하나님 없이는 자신이 결코 죄된 본성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는 무력한 사람인 것을 시인하라.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자신이 살 길인 것을 믿으라. 당신은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는가? 자신에게 본질적인 회개가 없었다면, 오늘부터 그러한 회개가 일어나도록 간절히 기도하라. 그리고 본질적인 회개를 통해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인침을 받으라.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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