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들어야 할 복음은 과연 무엇인가? 바울의 복음인가? 아니면 이신칭의의 복음인가? 그래도 아니면 성령세례의 복음인가? 진정 예수께서 전해주셨던 복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놀랍게도 천국복음이다. 그렇다면 누가 실제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믿는 자인가? 아니면 예정된 자인가? 오늘 이 시간에는 천국복음이 대체 무엇이며, 누가 실제로 천국에 들어가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왜 그리스도인들은 회개와 천국복음을 알아야 하는가? 먼저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회개는 믿음과 더불어 구원의 필수요소요로서 구원의 관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믿음이 필요없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믿음은 기본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는 절대 구원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필수적인 믿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과연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믿는 믿음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불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천국에 들어갈 줄로 굳게 믿고 있다. 아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다. 그분이야말로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아니다. 이것들 중에 빠진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 없이는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런 믿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더욱이 어떤 사람은 자신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자신은 분명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아니다. 믿음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회개가 빠져있기 때문이다(마4:17, 막1:15). 그렇다.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다가 회개를 해야 한다. 그렇다. 자신이 지은 낱낱의 죄들을 날마다 회개해야 하고, 자신이야말로 가진 죄된 본성으로 가득찬 존재임을 시인해야 한다. 그리고 오직 성령을 힘입어 죄된 본성과 매일 싸워야 한다. 그래도 안 되면 회개하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특히 죽기 전에는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순간에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질 수가 있다. 


2. 천국복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둘째,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천국복음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성도들이 알고 있는 복음은 과연 천국복음일까 아니면 다른 복음일까? 놀랍게도 천국복음에 대해 잘 모르고 신앙생활하는 이들이 주변에 많다는 것이다. 아니다. 우리는 천국복음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복음이 과연 자신을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는 복음인지 살펴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 오늘날 모든 성도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복음이 과연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복음인지 한 번 쯤은 점검해봐야 한다. 천국복음 말고도 오늘날 교회 안에는 다른 복음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바울의 복음이 천국복음인 줄 알고 있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이신칭의의 복음이 천국복음인 줄 알고 있다. 아니다. 아울러 어떤 교단에서는 성령세례의 복음이 천국복음인 줄로 알기도 한다. 그러나 아니다. 이러한 유사복음으로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헌 복음에는 회개의 중요성이 거의 빠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구원의 개념이 죄사함이나 하나님의 생명을 얻음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핵심내용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들어야 하고 우리가 알아야 하고 우리가 믿어야 할 복음은 천국복음이어야 한다.


3. 천국복음이 왜 중요한가?

  천국복음의 중요성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과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파하려고 하신 복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천국복음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천국복음의 전파에 있다고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9:35).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기간동안 온전히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일을 계속 수행하셨다(눅4:43). 그리고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후에 천국에 올라가신 예수께서는 그때부터 계속해서 회개하고 믿는 자들은 천국 안으로 맞아들이시고 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언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더 이상 구원하지 않으실 것인가? 그것은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는 날이다(마24:14). 예수님께서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눅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지만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과연 천국복음이 전파되고 있는가? 그리고 과연 천국복음을 온 민족에게 전파하는 선교사들이 얼마나 되는가? 안타깝게도 이신칭의 복음이 전파될 뿐 천국복음이 전파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신칭의의 복음은 좀 더 나은 편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칼빈의 예정론 곧 칼빈복음이 전파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지금 두 귀를 기울이고 오늘날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고 있는 메시지를 분석해보라. 과연 천국과 지옥에 관한 복음말씀이 선포되고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얼마나 설교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예수 믿으면 병고침을 받고 부자되고 형통해진다는 복음은 많이 전파되고 있을 것이다. 이름하여 형통복음이요 번영복음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어도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외치는 회개와 천국복음은 과연 얼마나 전파되고 있는가?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이자 신앙생활의 성공이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 있다고 가르치는 교회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4. 누가 실제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는가?

  그렇다면 이제는 과연 누가 실제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이미 누가 먼저 천국에 초대된 자였는지 그리고 실제는 누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비유로 말씀해주셨다. 이러한 비유말씀에 의하면, 원래 초대된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손가락질당하던 사람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할례 혹은 율법과는 전혀 무관한 이방인들이 천국에 먼저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 비유가 바로 한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이다(마22:1~10, 눅14:15~24).

  한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에 의하면, 거기에는 딱 3종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첫번째 부류는 이미 그 잔치에 참석하기로 초청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한 마디로 유대종교지도자들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당시 사두개인과 대제사장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들은 막상 당일에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밭을 샀으니 검사해 보아야 한다고 참석하지 않았으며, 어떤 이는 소를 샀으니 검사해보아야 한다고 가지 않았다. 또한 어떤 이는 장가들었으니 안 된다고 기별했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은 다 핑계거리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잔치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한 것일까? 그것은 이렇다. 그들은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것보다 세상이 주는 돈과 쾌락과 명예와 인기를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주님이 하늘에 준비한 천국보다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더 사랑하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설령 이들이 제사장의 직책을 가지고 있고, 율법사의 직책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안 된다. 그런 자들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두번째 부류로서, 당시 자기 동족에게는 죄인들이라고 낙인찍혀서 절대 그 잔치에는 참석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된 이들이 등장한다이들은 유대인이기는 하지만 유대인들이 소외시키는 바로 그런 자들이다. 이들은 당시 세리와 창녀들이며,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이다. 이들은 한 마디로 말하면 "죄인들"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두번째 부류인 사람들이 제일 먼저 혼인잔치로 예표하고 있는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오 놀랍지 아니한가?

  그리고 나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이 비유에 나오는데, 이들은 세번째 부류로서 성밖에 지나가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혼인잔치하고는 아무러 연관성이 없던 자들로서 이방인들을 지칭한다. 이때 첫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자들이그 잔치에 전혀 참석하지 않게 되자, 임금은 두번째 부류를 데려오라고 한다. 그래서 두번째 부류가 혼인잔치에 어부지리로 참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래서 그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임금은 자기의 종들을 성밖의 사거리로 보냈다. 그리고 거기에 지나가는 자들을 자들을 강권하여 데려오라고 했다. 그래서 마침내 성밖에서 길을 지나가던 이방인들이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5. 당신은 혼인예복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가?

  그런데 마22장에 나오는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를 보면, 이 비유와 이어서 나오는 또 하나의 비유가 있다(마22:11~14). 거기에는 혼인잔치의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친구가 나온다. 그는 그 잔치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혼인예복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던 자였다. 혼인잔치에 참여는 했으나 옷을 입고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친구는 결박당해 쫓겨나게 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혼인잔치의 예복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것이다. 혼인잔치의 예복의 중요성을 모른채, 그것에 주의하지 않는 자는 결코 혼인잔치를 즐길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혼인잔치의 예복은 주인이 준비해서 입혀준다. 이것을 오늘날로 말하면 거기 참석한 자들의 모든 신분과 더러움을 덮어주는 의의 예복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예복은 그 잔치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의 신분을 하나로 통일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혼인잔치에 초대된 똑같은 손님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날 참석자들의 옷을 벗겨본다면 많은신분의 사람들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고귀층의 신분을 가진 자일 것이다. 어떤 이는 병든 자였지만 거기에 초대된 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이방인으로서 천한 신분의 소유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혼인예복의 옷 때문에 그들은 모든 신분은 덮어지고 오직 하나로 통일된다. 잔치손님으로 말이다. 그런데 어떤 이가 자기에게 주어진 혼인잔치의 예복에 주의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그 잔치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6.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2가지 필수요소

  그러므로 누구든지 혼인잔치로 예표되는 천국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는 주인이 마련한 천국잔치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주인이 준비해준 혼인예복을 차려입고 그 예복을 벗지 않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잔치초대에 응하는 일와 예복을 입은 일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해주는 2가지 요소 곧 믿음과 회개인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나같은 자를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천국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기쁨으로 그 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천국에 참여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인이 마련해준 혼인예복 곧 예수님의 피로 만든 의의 옷을 입은 자로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음 받은 자가 곧 천국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누가 과연 천국에 들어갈 자라고 가르치는가? 그것은 대체로 2가지다. 하나는 믿는 자라고 말하고 또 하나는 예정된 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니다. 누군가로부터 복음의 소식을 듣고 그 사실을 믿고 회개하는 자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믿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며,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틀히 만세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해놓은 자만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칼빈의 예정론이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이다. 오해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더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선 정리할 할 것은 누가 과연 천국에 들어가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응당 자신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으시대는 자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막상 그들에게 천국잔치에 오라고 하면, 그들은 세상이 더 좋기에 그 잔치에 참석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오히려 천국에는 못 들어갈 것이라고 낙인찍인 자들 곧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자들이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는 천국에 들어갈 아무런 자격이 없는데도, 누군가의 초청을 받고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갈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천국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7. 나오며

  결국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가? 천국에 들어갈 자라고 예정된 자가 들어가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해 놓은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오늘도 누군가로부터 천국복음을 듣고 기뻐하면서 그 소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정 개인을 예정해놓고 그를 불러들이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누군가로부터 복음을 들었을 때에 그것을 믿고 회개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오도록 예정해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고 율법말씀을 알고 있는 특권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초청을 거부하고 영접하지 않는 자는 결코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도 마찬가지로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누군가가 전해준 천국복음을 듣고도 그것을 거절하는 자도 결코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천국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자는 오직 감사와 찬양만 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이라도 얼마든지 믿고 회개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예정해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회개하는 자,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을 구원해 주실 자인 것을 믿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자들을 천국백성으로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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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잡이의 기적이 있던 날, 베드로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주님 앞에 엎드려 자신은 주님 곁에 있을 수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했다. 비록 그날 베드로가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주님께 떠나달라고 했지만, 오히려 주님은 그를 영원히 곁에 두시기로 결정하셨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 들어가며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누구일까?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부자도 아니며, 높은 관직에 올라 명예를 떨치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또한 TV나 영화에 나오는 유명한 스타들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죽어서 그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게 될 사람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받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이 세상에 살면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눅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오늘 이 시간에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발견한 한 사람을 만나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대체 어떻게 되어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2. 베드로는 그는 누구인가?

  베드로, 그는 사실 예수께 부름을 받은 첫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첫 제자들로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등 4명의 어부들을 불러내셨다. 그런데 베드로는 12명 제자들의 대표제자가 되고 예수부활후에는 대표사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대체 무슨 이유로 갈릴리의 촌사람을 당신의 수석제자로 삼은 것인지 당신은 아는가?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예수께서는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 동시에 나온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셨는지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준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전문어부다. 그러던 어느날 밤이 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때가 있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오자 그는 그물을 씻고 있었다. 그때 예수께서 그에게 오셨고 자기 배를 청하여 좀 육지에서 떼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배 위에서 무리를 가르치셨고 후에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보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다. 그런데 그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혀 두 배에 가득 채우게 되었다. 


2. 고기잡이의 기적 후에 보인 베드로 반응의 미스테리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 반응이 좀 의외라는 사실을 생각해보았는가? 왜냐하면 베드로는 그날 예수님에게 무슨 죄를 지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만큼 고기를 많이 잡게 해 준 분에게 베드로는 고맙다는 인사는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죄인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보다 고기를 더 잘 잡는 고수가 나타났으니 그를 붙들어야  할 판국에, 왜 자기를 떠나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인가? 대체 그때 베드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 내면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인가? 왜 그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 채, 자신을 떠나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한 것일까? 이것을 파악하려면 우리는 그날 베드로에게 일어난 3가지 일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베드로는 진정 어떻게 되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일까?


3. 베드로는 왜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했던 것일까?

  첫째,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고기 한 마리 못잡았지만 다시 해변가로 돌아와 그물을 씻고 있는 장면을 살펴보자. 베드로는 전날밤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만 더 이번만 더"하면서 그물을 던지다가 그만 밤이 꼬박 새웠을 것이다. 날이 밝아오자 하는 수없이 베드로는 동료와 함께 해변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그가 왜 자신이 죄인인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 그 첫번째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그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거기에는 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다는 것을 믿고 전날밤 고기를 못잡은 것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짜증내지 않고 오히려 묵묵히 그날밤 다시 고기를 잡을 준비를 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날 자신의 성질대로 행동했다면 그물을 찢어버렸거나 발을 차버리고 집에 들어가버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자존심 때문에 그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 이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 위에 모셔놓고 그분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있는 장면을 살펴보자. 이때 군중들은 해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베드로의 상태를 한 번 생각해보자. 얼마나 피곤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 왜냐하면 설교 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이렇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원문을 직역해본다. "주관자시여(에피스타타), 저희가 온 밤을 통하여 수고한 후에 아무것도 취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입말씀(지금 하시는 그 말씀)에 따라 제가 그물을 내려볼 것입니다(눅5:5)" 그랬다. 그는 몹시 피곤한 몸의 상태였지만 설교를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단순한 율법교사가 아니며 오히려 그분은 온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주인되심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노하우를 내려놓은 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렇다. 베드로가 자신이 죄인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두번째 이유는 그가 가진 환경은 결코 좋지 않은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마지막으로 이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두 배에 가득 채우도록 고기를 잡은 후 예수님 앞에 엎드리고 있는 장면을 보자. 이때 주님 앞에 엎드린 베드로는 주님께 무엇이라고 말했던 것일까? 원문을 직역해보자. "당신은 저로부터 떠나주십시오. 왜냐하면 저는 죄인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먼저는 주님을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다. "에피스타타(주관자)"에서 "퀴리에(주님)"로 바뀌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퀴리에(아도나이)'라는 말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고백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을 "죄인 남자"라고 고백했다. 당시에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딱 두 종류였다. 남자는 세리요, 여자는 창녀였다(마21:31~32).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이 매국노로서 자기민족의 피를 빨아먹는 파렴치한 인간인 세리와 같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왜 이러한 고백을 하였던 것일까? 그것은 그가 그날 놀라운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일뿐 자신이 잘나고 똑똑해서 그런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를 것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는 정말 보잘 것 없고 무능한 존재인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4. 베드로의 고백 이후 베드로에게 일어난 축복

  그후에 주님은 베드로의 요청대로 그를 떠나셨던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하셨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 매우 기뻐하시고 그를 붙들어두셨다. 왜냐하면 당신이 찾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기 때문이다. 그후 예수께서는 그를 영원히 곁에 두고 싶어서 첫제자로 삼아주었고, 수석사도로 세우셨으며,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그를 들어쓰시어 하루에 3천명, 5천명을 회개시키는 위대한 사도로 쓰셨다. 


5. 나오며

  당신은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인가? 아니면 당신은 주님께서 곁에 두고 싶어하는 사람인가? 그리고 당신은 과연 주님께서 쓰고 싶어하시는 사람인가? 만약 이런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베드로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음을 알고 묵묵히 내일을 준비해 나가는 사람, 어떤 열악한 환경을 만나더라도 말씀을 들어야 하는 시간에는 두 눈을 부릎뜨고 경청하는 사람, 말씀에 순종하여 큰 축복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은혜로 된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자가 바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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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란 무엇인가? 이신칭의일까? 아니면 죄사함을 받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영생을 얻는 것일까? 우리는 구원이 아닌 것인데도 구원이라고 생각함으로 실제로 구원으로부터 멀어진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다. 오늘은 정말 우리가 받아야 할 구원이란 대체 어떤 것이며, 구원이 아닌 것인데도 구원으로 알고 있는 것들을 찾아보고, 대체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들어가며

  구원이란 무엇이며 구원인 것 같은데 구원이 아닌 것들은 또 무엇일까? 그리스도인들은 흔히들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원받았다고 말을 할 때에 그 기준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저마다 각각 다르다. 예를 들어보자. 보통 장로교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믿음이 자신을 구원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순절 계통에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그리고 성령세례까지 받아야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과연 사실일까?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말하는 구원이라는 개념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궁극적인 구원의 개념은 또 무엇이며, 구원이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정확히는 구원이 아닌 것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2. 일반적인 구원의 개념

  먼저,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어디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구원한다는 말은 '건져낸다' 혹은 '구조한다'는 뜻을 가진다. 그대로 놔두면 문제가 발생하고 죽을 것이니까 그러한 곳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구원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포괄적인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5:34)" 그렀다. 여기에서 구원이라 질병에서 낫게 된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제자들이 풍랑 때문에 죽게 되었을 때에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8:28)"이라고 말했을 때에, 구원이란 풍랑에서 건짐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소경이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10:52)" 그렇다. 여기에서 구원은 소경이 자신의 눈을 뜨게 된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방금 언급한 구절에서 구원이란 어떤 공통분모가 몇 가지 있다. 그것은 첫째, 육신으로부터 구출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 보다 더 좋은 상태로의 전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포괄적으로 보았을 때 구원이란 육체의 질병에서, 육체의 죽음의 위험에서, 육체의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구출받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3.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일반적인 구원 개념

  하지만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개념은 이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예수라는 이름의 뜻을 보면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고 천사가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구원은 우리가 죄들로부터 사함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귀신들렸던 자가 귀신이 쫓겨나가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된 것도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다(눅8:36). 그리고 육체는 죽었지만 자신의 영혼이 음부에서 나오게 되는 것도 구원이라고 말한다(히5:7). 결국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여 볼 때,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상황에 따라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어떤 좋지 않은 상황으로부터 구출받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만약 그대로 놔둔다면 불행해질 테니까 그것으로부터 구출해 내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4. 교회에서 말하는 정확한 구원 개념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서 말해지고 있는 구원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사람들은 보통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라고 말을 한다. 이때 말해지는 구원이란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 기본적으로는 죄와 죽음과 사탄마귀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이다. 하지만 좀 더 깊게 들어가보면, 이것은 육체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가리키는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위치적으로 볼 때에 이 세상에서 얻을 수 구원이 아니라 천국에서 받게 되는 구원으로서, 이 땅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것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죽은 다음에야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질병에 걸렸는데 예수님을 믿고난 후 열심히 기도해서 나았다고 쳐보자, 이 사람은 구원받은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질병에서의 치료받은 것을 구원이라고 친다면 이 사람은 구원받은 것이다. 하지만 영혼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사람은 아직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이 죄와 죽음과 사탄마귀로부터 벗어나 천국에 들어가야 비로소 구원받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이 말하는 구원은 사실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우리는 지금 일차적으로 구원받고 있는 상태에 있기는 하지만 아직 완전한 구원은 받지 못했다고 말을 해야 한다.

  이렇듯,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 개념은 사도바울이 쓴 신약성경에서도 그대로 살펴볼 수 있다. 사도바울은 처음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을 했다(롬1:16). 하지만 그는 또한 구원을 이뤄가고 있다고도 말했다(빌2:12). 그러다가 그가 죽음을 앞 둔 마지막 시점에 가서는 그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받을 것이라고 했다(딤후4:18). 그는 구원을 3단계로 말한 것이다.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상태에 있기는 하지만 지금도 구원받고 있으며 앞으로 구원을 받을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직은 구원을 못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장막을 벗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있는 육신 안에 있는 한 함부로 구원받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라야 비로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오늘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고 있습니다."


5. 구원이라고 표현하지만 구원이 아닌 것들

  이제 크게 두번째로, 우리가 흔히들 구원이라고 표현하는 것들이지만 사실은 구원이 아닌 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흔히들 구원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구원이 아닌 것들이 있다. 그것은 구원의 일부분만을 가리키는 개념들이다. 이러한 것에는 '이신칭의'와 '죄사함을 받은 것'과 '영생을 얻은 것'이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완전한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일부만을 칭하는 것들이기에, 이것을 일컬어 구원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이신칭의를 받았다 하더라도 아직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의 상태라면 그는 아직 구원받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사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또한 혹 자신이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아직까지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신은 구원받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오히려 자신은 앞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6. 이신칭의가 구원인가?

  먼저, 이신칭의가 구원인지 아닌지를 좀 더 살펴보자.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구원의 출발일 뿐 구원의 종착지는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이신칭의를 얻었다고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여기서 믿음이란 율법에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칭의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과 같음을 알라. 이처럼 칭의란 외적인 신분의 변화만을 가리키는 것이지 속사람까지 변화된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다. 자기의 속사람은 전혀 의롭게 되지는 않았어도 나의 밖은 덧입혀진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상태에 있음을 말해줄 뿐이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한 순례자들의 여정에서 시작단계에 해당한다. 우리는 칭의를 얻음으로 비로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첫걸음을 뗀 것 뿐이다.


7. 로마서가 말하는 구원의 3단계 과정

  그러므로 로마서를 집중해서 살펴보면, 로마서에서의 구원은 칭의에서 시작하나 칭의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례 곧 할례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참여하는 과정이 있다. 즉 자신의 죄된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단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세번째로 자신 안에 보내어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하는 단계가 있다. 다시 말해 로마서에서 칭의를 통한 구원은 3단계다. 칭의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와 연합에 의한 옛사람을 죽음에 넘기는 것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에서는 아무리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개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회개'라는 단어다. 로마서에서는 회개하라는 말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죄된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것이 곧 로마서에서 말하는 회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 중에서 회개인 본질적인 회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이 본질적인 회개를 하기 전까지, 자신의 믿음은 인침을 받은 상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의 믿음은 아직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혹 죽음이라도 맞이하게 된다면 그 사람의 구원은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다.


8. 아브라함의 이신칭의의 3단계 과정

  이러한 사례는 아브라함의 실례를 통해서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약85세 때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창15:6). 하지만 그의 믿음이 인침을 받아야 했다. 그것이 곧 할례다(창17:10).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였으니 아브라함은 약 12~14년정도를 회개하는 삶을 살고 나서야 비로소 할례를 받은 것이다. 할례는 영적으로 볼 때, 사실 육적인 자신의 몸을 벗는 것으로서 자신이 모든 생각과 계획들을 죽음에 넘기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이후부터는 육신의 본성을 따라 살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곧 할례다. 그러므로 할례는 죄된 본성으로부터 회개 곧 본질적인 회개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온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믿음이 온전히 인정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테스트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어도 아브라함이 125세였을 때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125살 무렵 아브라함의 믿음은 상당히 성장해 있었다. 이미 칭의를 받았고 할례(본질적인 회개로서 칭의의 인침)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다. 그제서야 하나님께는 그의 믿음을 온전한 것이라고 인정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이제야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창22:12)"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온전해졌다. 완성의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도 구원의 완성의 단계에 도달하려면, 칭의 후에 회개생활을 잘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에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이다. 당신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있게 되기를 축복한다.


9. 죄사함이 구원인가?

  두번째로, 죄사함이나 영생을 얻음이 구원인지 아닌지를 살펴보자. 믿는 자가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은 것을 가지고 구원이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죄사함을 받았어도 우리의 육신 때문에 우리는 또 다시 죄를 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또 다시 회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은 죄를 회개하거나 죄된 본성을 회개했다고 해서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다하는 그날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죄에게 졌다고 한다면 우리는 즉시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10. 영생얻음이 구원인가?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혹시 영생을 소유하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믿음을 가져 영생을 소유한 자라 하더라도 계속 범죄하거나 범죄하였으나 회개하라는 성령의 책망을 거부한 채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얼마든지 기록된 하늘의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셨고, 부활후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요한에게 들려주신 말씀이다.

출32: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계3:5 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장담할 수 없다. 첫째로, 언제라도 우리는 핍박과 죽음의 현장을 만날 때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둘째로, 죄를 짓고도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하늘에 기록된 생명책에서 우리의 이름이 지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는 오늘도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고 있습니다(빌2:12)" "주여, 아직도 내게 믿음이 부족하오니 내게 믿음을 더하여주시고, 생각날 때마다 내 죄를 회개하여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11. 나오며

  그렇다. 구원은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신칭의는 내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믿음의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이때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어느순간에 하나님의 생명에 내게 더해지는데,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 회개함으로 우리가 지은 죄를 사함받게 된다. 고로 구원이란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이신칭의와 더불어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날마다 회개하여 죄사함을 얻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이 천국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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