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주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의도는 무엇인가?(벧후3:8~13)_2019-12-30(월)

https://youtu.be/MP8EEEAvzs4

 

1. 예수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게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뜻은 재림의 은밀성("몰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재림의 돌발성("갑자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의 물건을 몰래 훔쳐가는 도적같은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도적같이 몰래 오셔서 남의 보물을 훔쳐가는 것이 아니라, 도둑이 기별없이 오는 것처럼 예수께서도 갑자기 오신다는 의미로서 "도적같이"라는 비유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께서 은밀하게 공중에 오신다고 주장하는 환난전휴거론자들 혹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들의 주장은 크게 빗나간 것입니다. 주님은 은밀하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은 누가 말씀한 것인가요?

  예수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공생애기간에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으며(마24:43), 부활승천후에 하늘에 계실 때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계16:15). 그리고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했고(살전5:2), 사도 베드로도 그렇게 말했습니다(벧후3:10). 아래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마24: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계16: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살전5: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벧후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3. 예수께서 "도둑같이"오신다는 말씀의 의도는 무엇인가요?

  예수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의도는 사실 주께서 언제 오실른지 모르니 깨어있으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도들은 깨어있어야 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주님이 오시는 날은 심판의 날이 될 것이요 결산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에 자신이 어떤 또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날에 자신의 일이 끝마쳐지게 되고, 그날에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로 그날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우리가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지 않도록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4. 도둑같이 오시는 예수님 앞에 성도들은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하나요?

  도둑같이 오시는 예수님 앞에 우리 성도들은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합니까? 위에서 말씀드린 4가지 말씀들과 그 문맥을 다 종합해서 살펴보면 그것은 2가지 모습을 갖추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으로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마24:45). 그리고 둘째는 회개하고 있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벧후3:9).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날에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아니라, 거꾸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 주님 앞에 서게 된다면 그날은 그가 지옥형벌 안으로 넣어지게 되는 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엄히 채찍질당하고 위선자들의 받는 형벌에 처하여 거기서(바깥 어두운 곳) 슬피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말씀의 뜻은 그가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는 뜻이기 때문입니다(마24:51). 또한 마찬가지로 그날까지 계속해서 회개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자는 결국에 더럽혀진 자신 때문에 지옥형벌 안으로 떨어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사실 주님의 재림이 아직까지 지연되고 있는 이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벧후3:9).

 

5. 결국 주님이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을 하신 의도는 무엇인가요?

  결국 주님이 도둑같이 오신다는 말씀의 이도는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아무도 알 수가 없으니 언제나 깨어있어서, 첫째로는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요, 둘째는 그날에 심판을 받아 지옥형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회개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주님께서 도둑같이 온다는 말씀의 의미는 어떻게 잘못 오용되고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은밀하게 오시니까, 그때 주님이 오신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그래서 휴거받지 못하고 남겨지는 일이 없도록, 날마다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 때와 징조를 살펴서 그날을 대비하라는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충성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주님의 재림은 은밀성이 아니라 돌발성인데, 그것을 잘못 적용하고 해석한 탓입니다. 그러므로 그때 가서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하고 날마다 회개하고 있어야 합니다. 안타까운 일은 오늘날 종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자는 상당수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종말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하는 자들은 베리칩(666)이 언제 사람의 몸에 이식될 것인가, 제3의 성전은 예루살렘에 언제 세워질 것인가, 세계를 통치할 세계정부는 언제 등장할 것인가, 핵전쟁은 언제 일어날 것인가 등에 관심을 가질 뿐, 자신이 지금 충성되게 살고 있는지, 자신이 지금 회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자에게는 시간은 허송세월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2019년 12월 30일(월)

정병진목사

  


이번 주일부터 대강절(대림절)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살펴보기 시작한 메시야의 족보인데, 메시야의 족보에는 놀라운 영적 비밀이 숨어 있다. 하나는 5명의 여인에 관한 이야기며, 또 하나는 다윗왕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기록되지 않은 메시야의 조상들에 관한 이야기다. 적어도 11명이나 된다. 그중에 오늘은 남유다의 제6대,8대,9대왕의 숨겨진 비화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들은 왜 메시야의 족보에 기록되지 않았던 것인가? 저자의 실수인가 아니면 의도적인 누락인가?

2019-12-01(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메시야의 족보에 담겨있는 놀라운 비밀(마1:6~11)
https://youtu.be/aEFZNIz9Vco


1. 들어가며

  성탄절을 앞둔 4주간의 절기를 교회는 "대강절(대림절)"이라고 부른다. 대강절을 맞아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의 역사를 살피는 것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메시야의 족보를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메시야의 족보에 놀라운 영적인 비밀이 숨겨 있었다. 그것은 그냥 마태복음 1장의 족보책만을 쭉 읽어내려가면 파악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데 만약 구약의 열왕들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분이 이 족보책을 읽는다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야의 족보에 여러 사람의 이름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3명, 3명, 5명이 순차적으로 그 이름이 빠져 있다. 무엇 때문에 11명의 이름이 빠진 채 기록된 것인가? 이것은 기록자의 실수인가 아니면 의도적인 생략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메시야의 족보에 빠진 채 있는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 3명을 중심으로 그들이 메시야의 족보에서 빠지게 된 이유를 통해서 메시야의 비밀을 풀어보고자 한다.

 

2. 메시야의 족보에는 어떤 특별한 점이 들어 있는가?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를 쭉 읽어내려가다보면 "아, 이것은 메시야의 윗대 조상들의 이름인가보다"하고 그냥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구약의 열왕들의 기록을 잘 알고 있는 분이 이것을 읽으면 읽다가 잠깐 멈추게 될 것이다. 그것은 3가지 면에서 좀 특이한 점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 메시야의 족보책에 여러 여인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가 그들이다. 원래 족보책에는 여자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 것인데 메시야의 족보에는 여인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메시야의 조상들 42명 가운데 특이한 한 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다윗이다. 다름 모든 사람은 다 이름만 나오는데, 다윗은 그의 직분까지 나오기 때문이다. 즉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셋째, 메시야의 조상들 가운데 여러 사람의 이름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남유다의 제5대왕이었던 요람 다음에 무려 3명의 왕들(아달랴를 포함하면 4명의 왕)이 이름이 빠져있다. 그리고 5대 고손자인 제10대 웃시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요시야왕 다음에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 왕이 빠져 있고, 여고냐 다음에 시드기야 왕도 빠져 있다. 이것이 두번째 생략부분이다. 그리고 세번째로 스룹바벨 이후에 아비훗 사이에 약 5대가 빠져 있다. 이처럼 적어도 11대 명단이 빠져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3. 메시야의 족보책에 여러 조상의 이름이 빠져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메시야의 족보책에 적어도 11명의 이름이 빠져있는 이유를 여러 학자들이 연구해서 써놓은 것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약 4가지가 있다. 첫째, 마태라는 기자가 인용한 족보책이 이미 처음부터 그들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도 빼고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 히브리원문을 잘못 읽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원래 마태복음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인데, 이것을 베끼는 과정에서 한 줄을 넘어가버렸다는 것이다. 셋째, 히브리적 문학적 기교에 따라 14대의 숫자를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는 17절에,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요(제1기족보), 다윗부터 바벨론의 이거하기 전까지 14대요(제2기족보), 그 뒤로 예수님까지를 14대라고 하는데(제3기족보), 제1기 족보였던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14대가 맞다. 하지만 다윗부터 요시야왕까지는 18대다. 그러므로 14대를 맞추기 위해, 4명의 왕들(남유다 제6대 아하시야, 제7대 아달라, 제8대 요아스, 제9대 아마샤)을 생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일부러 뺐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도 같다. 왜냐하면 다윗의 이름을 숫자값으로 환산해보면(게마트리아), 14(달렛=4, 요드=6, 달렛=4)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래 마태복음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는 기록이 진짜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넷째, 특히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가 빠진 것은 이들이 바알신을 가져와 이스라엘을 타락시킨 아합과 이세벨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메튜헨리). 그렇다면, 남유다 왕들 중에서 6대 아히사야, 8대 요아스, 9대 아마샤왕이 빠진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4. 제2기 족보 가운데 남유다의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왕이 메시야의 족보에서 빠진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요람왕의 아들이었던 아하시야, 아하시야왕의 아들이었던 요아스, 요아스왕의 아들이었던 아마샤왕은 왜 족보에서 빠진 것일까? 그것은 서두에서 보았던 4번째 견해와 일치하는 면이 많이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이세벨의 우상숭배와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이 메시야의 족보에서 빠진 이유를 우리는 신약과 구약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것은 요한계시록 2:22~23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보응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모두 우상을 숭배하다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질병과 환난과 사망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둘째, 출20:5이나 34:7에 따라, 우상숭배를 하게 되면 자신의 후손 3~4대까지 저주를 받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먼저, 요한계시록 2:22~23의 말씀을 보자.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두아디라교회에서 주신 말씀이다. 그것은 거짓선지자 이세벨에게 하신 말씀으로서, 우상을 숭배하게 되면 본인이 침상에 던져질 것이고, 우상숭배의 의견에 동조하는 자는 큰 환난에 던져질 것이며, 그의 자녀는 살해당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것을 맨 처음 시작한 자는 두아디라교회의 거짓선지자 "이세벨"이었다. 그런데 메시야의 족보에서 빠진 위의 3명의 왕은 바로 이세벨의 행위와 관련이 깊다. 왜냐하면 제5대왕이었던 요람왕의 장모가 "이세벨"이었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의 7대왕이었던 아합은 당시 바알과 아세라를 신으로 섬기던 두로와 시돈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과 결혼하였다. 그러자 이세벨은 바알과 아세라선지자 수백 명을 데리고 북이스라엘로 들어왔다. 그러자 아합은 그녀를 위해 수도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세워주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종교는 여호와 하나님에서 바알신으로 급속히 바뀌기시작하였다. 그런데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었던 아달랴가 남유다의 제5대왕이었던 요람(여호람)에게 시집을 간 것이다. 그러자 요람왕은 그녀(아달랴)를 위해 예루살렘에 바알의 신전을 건축해 주었고, 바알의 제사장도 두었다. 그리고 아내의 말을 듣고 우상숭배정책을 비판하던 자신의 동생들 6명을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하셨는지 아는가? 계2:22~23의 말씀에 따라, 그를 침상에 던졌다. 그는 38세에 병이 들었는데, 창자가 썩어가는 질병에 걸렸다. 그는 2년간 침상에 있다가 결국 창자가 튀어나와 사망했다(대하21:18~20). 그의 나이 39세였고 왕이 된지 8년만이었다. 우상숭배하면 당사자가 질병의 침상에 던져질 것이라는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둘째, 우상숭배를 하게 되면 아버지의 죄가 후손 3~4대까지 이어진다는 말씀을 보자. 남유다 5대 요람(여호람)이 죽자 그의 장자였던 아하시야가 왕통을 이어받았다. 남유다 제6대왕으로 등극했던 아하시야는 22세에 왕위에 올랐는데 1년도 채 못되어 살해당했다. 자신의 외할머니(이세벨)에게 문안인사갔다가 북이스라엘의 구테타 주동자였던 예후에게 붙잡혀 도망가다가 죽었기 때문이다(왕하8:27~29). 그리고 아하시아의 아들 요아스도 그리고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도 우상숭배하다가 신하들과 무리들의 반란의 살해당하게 된다. 성경말씀 그대로 성취가 된 것이다.

 

5. 남유다에 우상을 들여왔고 형제를 살해했던 제5대 요람왕은 어떻게 되어 메시야의 족보책에 기록될 수 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유다의 요람왕은 메시야의 족보에 들어있다. 대체 어떻게 되었길래 요람왕은 메시야의 족보에 든 것인가? 우리가 앞에서 들었던 말씀에 의하면, 요람왕도 멸망을 받았어야 옳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아들과 손자와 증손자와는 달리 그의 이름이 메시야의 족보에 올라왔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구약의 열왕들의 기록에는 그가 내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의 이름이 메시야의 족보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과 다른 왕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추측해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결국에 회개하고 죽었으리라는 가정이다. 왜냐하면 우상숭배를 한 자치고 회개하지 않고 구원받아 메시야의 족보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계22:14~15). 그렇다면 그가 죽기 전에 회개하였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도 정확히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얼마든지 추론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가 죽기전에 질병의 침상에 던져져 2년여동안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두아디라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상숭배를 들여온 이세벨에게 이렇게 경고하셨다. "또 내가 그녀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녀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계2:21~22). 그렇다. 누군가 죽기전에 침상에 던져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여자 이세벨선지자가 우상숭배를 방조하였거나 허락함으로서 잘못된 행동을 했지만 그녀를 사랑했기에 주님께서도 그녀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그녀에게 허락한 것이 바로 "질병"이다. 그녀를 질병의 침상에 던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비록 요람왕이 남유다 예루살렘에 바알의 신전을 세우고 제사장을 세우기긴 했지만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그를 질병의 침상에 던진 것이다. 그래서 요람왕은 죽기전에 2년동안 창자가 썩어가는 질병을 앓으면서 회개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회개를 기회를 주지 않고 징계할 때에는 곧바로 죽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악한 요람왕에게 왜 회개할 기회를 준 것인가? 그것은 그의 부모의 기도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사례에게 그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남유다의 제14대왕은 므낫세왕이다. 그는 12살에 왕위에 올라 무려 55년간 남유다를 통치하였다. 그런데 남유다에서 그처럼 악한 왕은 없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는 바알과 아세라신을 섬겼고, 일월성신을 섬겼다. 그리고 몰렉신에게 자신의 자식을 불에 태워 바쳤다. 그리고 신접한 자와 박수를 가까이에 두었다. 이렇게 총체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숭배를 일삼았던 왕이 바로 므낫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년에 회개를 한다.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에 포로 끌려가서 거기서 회개를 한 것이다. 그것이 역대하의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대하33:12~13). 그렇다. 그는 환난을 당하여 자신의 조상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회개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므낫세가 말년에 환난을 당하여 회개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그의 아버지의 기도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남유다의 3대 선한 왕에 속하는 왕으로, 히스기야왕이었기 때문이다. 히스기야야말로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한 왕이었던가? 그러니 므낫세는 자신의 아버지의 기도 덕분에 환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회개할 기회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한 예는 솔로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솔로몬이 말년에 타락하여 멸망으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결국 회개하여 메시야의 족보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인 다윗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대하28:9~10). 그러니 요람의 아버지였던 여호사밧왕도 그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가 한 때 약간 빗나간 것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는 남유다의 3대 선한 왕이자 하나님을 잘 섬겼던 왕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아들 요람을 위해 기도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결국 요람왕이 병들어 침상에 누워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의 기도로 인하여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의 아버지의 기도가 있었기에 그를 단번에 치지 아니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6. 믿는 자라도 우상을 숭배하면 구원의 족보에서 빠지게 되는가?

  믿는 자라도 우상을 숭배했을 경우 어떻게 되는가? 만약 그가 우상을 숭배한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여지없이 불못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해결받지 못한 자를 결코 천국에 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말씀을 보라.

계22:14-15 자기 두루마기(스톨레=겉옷)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자기의 겉옷을 예수의 피로 빨지 않는 자는 결국 천국의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생명나무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며, 문들을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국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뜻이다. 특히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는 밖에(바깥 어두운 곳=불못)에 있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7. 나오며

  사실 예수께서는 메시야의 족보상으로 아브라함의 42대손이요, 요셉의 아들인 것이지만 실제로 메시야의 조상으로부터 피한 방울 섞이지 않은 분이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기 때문이다(눅1:34~35, 마1:20~21). 만약 조금이라도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다면 그분은 인류의 죄를 대속할 흠없는 어린양이 되실 수가 없으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마태 기자를 통해서 메시야의 족보를 쓰게 하실 때에 우상을 숭배하고 멸망받은 자의 이름을 기록하지 못하게 하셨다. 분명 육적으로는 존재했고 활동했던 왕이었다 할지라도 자신이 우상숭배한 죄를 회개하지 않은 자를 메시야의 족보에 올릴 수가 없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생명책에 관한 예표로서 오늘날 우리 믿는 이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믿는 이들 중에서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계3:5).

 

2019년 12월 01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기독교인의 인구감소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소외된 자,난민, 동성애자 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눅7:29~35)_2019-11-27(수)
https://youtu.be/bnahJJ7A42c


1.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의 인구감소는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 첫째는 전체 인구숫자의 감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0.98명)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혼인건수도 7년연속감소하고 있고, 일반적으로 탈종교화도 가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가나안성도가 발생함에 따라 이들이 결국 신앙을 포기하게 되거나 이단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기독교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분은 기독교인들이 소외된 자, 난민, 동성애자 등을 기독교가 끌어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2. 기독교인들은 소외된 자, 난민, 동성애자를 무엇보다도 끌어안아야 하는 것인가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든지 사랑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힘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 중에는 하나님의 관심은 낯선 자, 타자, 가난한 자, 소외된 이들에게 있는데, 기독교인들이 이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어서 기독교인이 "꼰대"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마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심판의 비유"를 보더라도,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불못에 보내는 이유가 주린 자들과 목마른 자들, 나그네와 헐벗은 자, 병든 자와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그 요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과연 옳은 것인가요?


3. 예수께서는 왜 소외된 자, 병든 자, 세리, 창녀들과 함께 한 것인가요?
  예수께서 세리와 창녀, 병든 자와 소외된 자와 함께 하신 이유는 그들이 사회적으로 약자들이어서가 아닙니다. 물론 그들은 사회적으로 약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들이 사회적으로 약자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들과 함께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 이유는 오직 한 가지,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구원받기 위해 주님 앞으로 나아왔기 때문입니다.


4. 예수께서 소외된 자, 병든 자, 세리, 창녀들과 함께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그들이 사회적인 약자에서라기보다는 구원받기 위해 보다 더 주님 앞으로 나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했던 보다 다 근본적인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이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자신이 그러한 존재라고 시인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시인하는 자입니다. 둘째로, 이들은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랬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도움을 구하고자 갈급한 심령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이들은 마음이 가난했기에 하나님을 붙들려고 한 것입니다.


5. 오늘날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없나요?
  그러므로 오늘날 자신이 사회적인 약자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가난하지 않는 자는 구원받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을 찾으려고 시도하지 않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세리들과 자주 식사한 이유는 그들이 사회적인 소외계층이어서라기보다는 이들의 마음이 매우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도 더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자를 돕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5:32). 그러므로 우리들도 주변에 마음에 가난한 자를 찾아 전도한다면 많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가난하지 않는 자를 도외시하거나 멀리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들도 구원받아야 할 한 명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꾸준히 갖고 대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는 그들의 마음이 가난한 마음이 되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자에게는 사회복지나 그 어떤 섬김이라도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9년 11월 27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하여 넘어야할 두번째 관문은 무엇인가?(눅5:1~11)_2019-11-15(금)

https://youtu.be/Nk9dh8f-MxM

 

1. 눅13:24에서 예수께서는 구원의 문을 어떻게 소개하셨나요?

  예수께서는 구원의 문은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적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자가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그날에 자신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속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고 말씀하셨습니다.

 

2. 좁은 구원의 문을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요?(눅13:28~29)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딱 2가지입니다. 하나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또 하나는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믿음의 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며(눅13:28), 마태복음의 평행본문에서는 이방인이지만 가버나움에 있는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라면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8:10~12). 그리고 구원받기에는 또 하나의 관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그러한 예는 "모든 선지자들"이라고 예수께서 일러주셨습니다(눅13:28). 왜냐하면 선지자들은 2가지 사역을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하나는 오실 메시야가 누군지를 예언하는 것이고, 또하는 회개를 외치는 것입니다.

 

3. 누가복음에서 세례요한은 어떻게 소개되고 있나요?(눅3:3)

  누가복음에서 세례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선지자로 언급됩니다(눅7:26). 그런데 선지자의 마지막 주자로서 세례요한이 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2가지입니다. 하나는 요한복음에서 소개되고 있는데, 그것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와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는 일이었습니다(요1:33~34). 또 하나는 누가복음에서 소개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회개"할 것을 외쳤다는 것입니다(눅3:3). 그런데 그가 외쳤던 회개사역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로 모아졌다는 사실입니다(눅3:3).

 

4. 세례요한에게 "세례"란 어떤 것이었나요?(눅3:7~14)

  세례요한에게 있어서 세례는 다름 아닌 "회개의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무리 중에는 세례만 받으러 왔을 뿐 정작 회개하는 마음이 없이 찾아온 자들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은 그들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레 던져지리라:(눅3:7~9).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형식적으로만 세례받으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으면서 형식적으로만 세례받는 것은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요, 그런 자는 정작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불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였습니다.

 

5.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게 된 베드로의 반응은 어떠했나요?(눅5:1~11)

  요한복음에 의하면,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가 자신의 형을 예수님께 소개합니다요1:41~42). 하지만 베드로는 다시 돌아가 자신의 생업에 열심히 종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셨고(아마 안드레와 함께),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으려했지만 한 마리도 얻은 것이 없어 피곤한 상태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음에도 예수님의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배에 앉아 해변가에 있는 무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윽고 말씀을 마치셨을 때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시오" 그 말에 베드로는 망설였습니다. 낮에 고기가 잡힐 리가 없으며 또한 깊은 데에 그물을 내리면 더더욱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두 배에 잠길 만큼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그가 그만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그는 고기잡이의 기적 앞에서 사업의 성공을 위해 어떤 생각을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주관하시는 그분 앞에 그는 납짝 엎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자신이 누군지를 금방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처럼 말이죠. 고로 만약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또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알지 못한다면 그는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 예수님을 만난 자는 다릅니다. 그렇다고 믿음생활을 시작한 첫날부터 그렇게 느끼시거나 깨달을 분은 그리 많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점차적으로 예를 들어, 한1년 쯤부터는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그렇게 알기까지 20년이 걸렸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찌되었든지 회개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고백하는 것인데, 베드로는 그때 회개를 했다는 것입니다(이것이 구원의 첫번째 방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부터 이것을 알지 못하는 분이 있었다면, 그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나도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도와 해주소서". 그러면 어느날에는 자기의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주님앞에 겸손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는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려민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자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은 그때부터 실제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저녁(금요심야기도회)에는 이어서 회개의 두번째 방면을 살펴보겠습니다.

 

2019년 11월 15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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