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자가 받게 되는 축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크게 2가지다. 하나는 하늘의 영적인 축복으로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땅에서 부차적으로 받는 복이 있으니 그것은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구약의 아브라함의 경우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사실 그가 하나님을 만나기전까지 그의 집안은 저주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그의 큰형이 아버지보다 훨씬 먼저 죽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도 이유없이 임신이 불가능했다. 그들 집안의 저주가 자기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었다면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나쁜 사람이라면 자기의 아내만을 탓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커다란 영적인 비밀이 숨겨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비슷하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사건사고나 우환이나 질별이 안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면 그것은 뭔가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귀신은 저주받은 영이다. 귀신이 치고 들어오는 통로가 어딘가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은 그 영적인 문제의 해결의 열쇠를 찾아보자.

 

1. 들어가며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과연 어떤 은혜가 주어지게 되는 것일까?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는 죽을 때에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믿고 회개를 했다고 해서 모두가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죽는 날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질 자도 있기 때문이다(정확히는 아주 많다)(계3:5). 그러므로 한 번 얻은 구원이라도 그것을 지켜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럼, 얻은 구원을 지켜내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핍박을 견디는 인내가 필요하며, 미혹에 넘어졌더라도 회개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즉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는 것과 넘어지더라도 다시 회개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은 정말 온전한 믿음과 온전한 회개를 한 자가 받을 축복들가운데 덤으로 주어지는 축복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다시 말해, 오늘은 믿고 회개하는 자가 얻게 될 부차적인 축복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한편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덤으로 얻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덤으로 받는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사람이 축복받는 비결은 무엇이며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사람은 과연 어떻게 해야 복을 받고 살 수 있을까? 이것저것 이유들이 있지만, 그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구약시대에 유대인이었다면 율법말씀에 순종해야 하며, 신약시대에 태어났다면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이나 계2~3장의 말씀들을 순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어떤 자가 복을 얻지 못하고 저주를 받게 되는지 아는가? 그것은 율법말씀에 불순종하거나 산상수훈과 같은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그것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여 네게 이를 것이니(신28:15)" 그렇다.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면 그에게 저주가 임하는 것이다(신28:15).

  그렇다면 "저주"란 대체 어떤 것인가? 일반적으로 악담이나 독설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히브리어를 보면, 저주에는 2가지 본질적이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복되고 의로운 상태가 소멸되는 것 내지는 그러한 상태를 잃어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의 선택된 현재의 위치보다 더 낮은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3. 아브라함의 가문에 임한 저주과 새로운 변화는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이라는 인물도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의 가문 전체가 저주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 결과로서 첫째, 그의 큰형인 하란이  아버지 데라보다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자연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 일은 결코 복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둘째, 자기도 결혼은 했지만 자식을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해야 할 집안이 그만 저주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가문에 왜 이처럼 저주가 임했던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집안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일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상숭배다(수24:2). 율법해설서인 미쉬나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우르에서 우상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우상제조업자였다. 그러니 저주가 자기의 대에만 있지 않고 자손 3~4대에까지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출20:5).

  그런데 그러한 아브라함의 생애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던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2자기를 명령하셨다(창12:1~2).첫째는 그의 본토 친척 아버지집의 떠나라는 것이었다. 거기에 남아있으면 반드시 우상숭배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주실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나라는 것이었다.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새로운 민족을 일으켜 세우실 것이고 그와 그의 후손들이 영원히 거할 거처까지 함께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믿음의 대장정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결단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저주의 늪에서 벗어나 축복받는 인생으로 그를 바꾸어주게 된다.

 

4.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건사고와 질병와 우환이 발생하는가?

  그런데 이러한 사례는 비단 그때만 있는 일이 아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가정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성도들 중에도 식구들 중에 누군가 일찍 죽는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자식을 낳지 못하는 일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데도, 저주의 결과들이 떠나지 않고 있는가? 그것을 진단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그의 집안의 우상숭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가문이 저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우상숭배를 그치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상숭배의 거쳐였던 자신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던 것이다. 사실 우상숭배의 죄는 죄들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죄에 해당한다. 십계명의 1계명과 2계명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죄값을 3~4대까지 묻겠다고 말씀하셨다(출20:5).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를 질병의 침상에 던지거나 주변의 사람들로 하여금 환난에 처해지게 할 것이며 자신의 자녀가 죽게 되는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계2:20~23).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따라나섰지만 그 후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들을 따라갔을 때 역시 그에게 상속자는 태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범죄를 시인하고 할례를 받은 후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여기서 그가 받은 할례는 신약의 세례로서 회개를 의미한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따랐지만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신 것이다. 곧바로 아브라함의 처는 임신하였으며, 1년 뒤에 상속자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단 우상숭배의 죄를 짓지 아니했다고 해서 저주의 삶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요5장에 보면, 중풍병자에게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요5:14)" 그렇다. 사람에게 다가오는 저주의 증상들은 거의 다 범죄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이다. 사실 범죄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저주의 결과들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범죄는 우리를 저주가운데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5. 신약시대 이후 사건사고와 우환과 질병의 실체는 무엇인가?

  구약시대에 저주는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직접적인 결과다.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그 양상이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없던 귀신들이 나타나 활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영적으로 저주를 풀어보면, 귀신이 그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귀신들이 바로 저주받은 영이기 때문이다(막9:25). 그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타락하여 하늘에서 쫓겨날 때 그들은 저주를 받았다. 우선 그들의 모양이 흉측하게 바뀌었다.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루시퍼는 용의 모습으로 변했고, 그 밑에 있던 부하들은 뱀과 전갈의 모습으로 변했다(눅10:18~19). 그러므로 그들이 사람 속에 들어가게 되면, 저주받은 자신의 상태를 그대로 표현하였다. 눈멀고 귀먹은 사람들이 발생했고, 미친 사람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사고나, 질병이나 우환들에는 반드시 귀신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의 1/3을 귀신을 쫓아내는 데에 사용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저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려면 귀신을 제거해야 한다. 귀신이 자신의 삶에 역사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6. 저주의 실체인 귀신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러면, 귀신이 내 삶에 역사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귀신이 우리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경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귀신은 어떤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접근해오는가? 그것은 범죄의 통로를 통해서다. 우리가 범죄할 때 귀신들이 그것을 빌미로 우리의 삶에 개입해들어오는 것이다. 요일3:8에 의하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하였다. 그렇다. 범죄할 때 사탄마귀가 그의 졸개인 귀신들을 보내어 우리의 삶에 개입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저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저주가 나타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하는 일이다. 죄를 깨끗히 제거하는 일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일 회개하기만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히 씻어준다고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요일1:7,9). 반대로 만약 우리가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귀신들이 얼마든지 우리의 삶에 진치고 있을 수가 있다. 그러면 저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라고 귀신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안심하지 말라. 귀신들은 우리가 범죄하면 우리를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죄를 짓게 되면 마귀에게 속하기 때문이다(요일3:8). 그들이 부여받은 권한을 가지고 믿는 자라도 공격해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야 하고, 예수께서 왜 사람이 되어오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은 죄들을 용서받아 더 이상 귀신의 공격을 받지 않으려면, 이처럼 믿음과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죄를 짓지도 않았고 이미 다 회개했기 때문에 더 이상 회개할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귀신이 치고 들어온 흔적이 있는데, 어찌 회개할 것이 없다고 우기는다는 말인가? 혹시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잘 모르겠다면, 그는 구약의 율법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불어 마음의 죄까지도 말씀하고 있는 산상수훈의 말씀과 계2~3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기를 바란다. 그러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죄가 발견되면 즉시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저주를 물리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회개없이 우리는 죄사함을 받을 수도 없으며, 저주를 물리칠 수도 없다. 만약 우리가 죄사함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종국에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회개없이는 우리가 귀신의 공격에 대항할 수가 없을 것이이다. 고로, 회개없이는 저주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 저주를 받고 있는지도 모른채 숱한 어려움을 겪고 만신창이가 된 다음에 회개할 것인가? 그리고 저주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지도 모른 채,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 원망의 삿대질을 할 것인가? 아니다. 문제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회개가 안 된 것이다. 회개가 아직 덜 된 것이다. 온전한 회개를 하지 않았으면서도 자신은 다 회개했다고 주장하지 말라. 어떤 죄는 몰래 숨겨둔 채, 다 회개했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회개한 것이 아니다. 회개가 온전히 이루어졌으면 자동적으로 저주가 떠나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저주가 떠나가는 것이 시간적으로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라.

  혹시 자신이 온전히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주가 있다면, 그때는 즉시 다음 단계에 돌입해야 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저주의 실체인 귀신을 꾸짖어 쫓아버리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계신 이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요일4:4). 어떤 귀신도 우리의 몸을 어거할 수 없다는 것을 알라. 우리 안에 계신 주께서는 전능자요 온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데, 누가 감히 우리 몸 속에 남아있어서 주인행세를 하려 한다는 말인가? 그런 놈들은 가만 두어서는 아니 된다. 꾸짖고 내쫓아버려야 한다. 그렇다. 온전한 회개만이 바로 우리를 저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해준다.

 

7. 나오며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그때까지 지은 모든 죄를 다 회개한다. 그래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난다. 그때 그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이 주어지며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도 기록된다. 하지만 그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다. 죄된 본성이 자기 속에 있는데 어떻게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인가? 귀신들이 우리 주변에 멤돌면서 생각을 심어주어 죄를 짓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지은 죄들에 대해 쉽게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서, 한 번 믿으면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는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회개하지 않는 죄는 용서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한 것이지, 그 사건 자체가 자동적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는 못한다. 그러므로 예수믿는 자라도 자신의 죄를 자백함으로 용서받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죄사함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저주로부터 해방받는다. 그래야 저주의 영들인 귀신들이 더이상 역사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회개하면 귀신들이 침투해들어오는 통로를 없애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생각나는 모든 죄를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혹시 자신에게 죄가 생각나지 않는데도 저주가 자신에게서 머물러 있다면, 성경을 다시 읽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찾아보기 바란다. 그리고 즉시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즉시 죄는 용서될 것이고 죄없는 우리에게 귀신들은 더 이상 역사할 수가 없게 된다. 그렇다. 이러한 영적인 진리들을 믿고 행하는 자들이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1월 21일(일)
정병진목사

 

 

 

칭의는 과연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얻게 되는 것인가? 여러분은 바울이 말했던 칭의와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칭의가 상당히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현재 붙들고 있는 칭의론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칭의관과 다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칭의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칭의를 비교해 가면서,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진정한 칭의를 얻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들어가며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개인적으로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선입관이나 선입견이 무서운 것은 한 번 형성된 선입관은 좀처럼 바뀌지가 않는다는 점이다. 이처럼 어떤 대상이나 진리에 대해 한 번 갖게 된 고정적인 관념이나 견해 등의 폐해는 이 세상의 정치에서만 나타나는 증상이 아니다. 성경의 중교한 교리들 속에서도 속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칭의와 구원과 천국의 개념에서도 선입관은 매우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는 칭의를 얻은 것을 구원을 받는 것과 동일시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구원을 받는 것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동일한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실 칭의나 구원이나 천국은 전부다 "믿음"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하지만 이것들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구성해보면 확실히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칭의는 구원여정에 있어서 첫 출발에 해당하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구원여정의 종착지점에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칭의는 이 세상에서부터 받는 것이고 육신도 받는 것이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 받는 것이고 자신의 영혼이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를 받는 것과 자신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특히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칭의를 얻는 되는 과정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방법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이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신 칭의란 무엇이며, 어떤 자가 그러한 칭의를 얻게되는지에 살펴보도록 하자.


2.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의 칭의에 대한 생각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칭의가 어떤 것인지부터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칭의란 어떤 사람이 실제로는 의롭지 않지만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이때 칭의를 받는 존재는 죄인이며, 칭의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롬8:33). 그러므로 칭의란 일종의 법정적인 용어인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칭의란 죄인인데도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으로서, 구원을 받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사람들이 칭의를 받는 것일까? 그냥 예수님을 믿는 자가 받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행함있는 신앙을 보여주어야 받는 것인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라. 이 비유에는 누가 과연 칭의를 받으며 누가 과연 칭의를 받지 못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칭의를 선언하시는 분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시다. 자기의 확신에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평가해주셨다는 점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칭의의 근거는 이상하게도 주님의 말씀에서 상당히 빗나가 있다. 모두들 사도바울이 말하는 칭의를 가지고 자기를 평가하고 있을 뿐이다.


3. 오늘날 칭의론의 근간은 바울의 칭의론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사람이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고 말했을까? 사실 오늘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칭의의 관념이 사도바울의 관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칭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된 성경구절이 대부분 다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성경구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칭의의 관한 개념을 정리해보자. 대략 2가지 정도다. 하나는 비록 우리가 죄인이며 지금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자기가 의롭다고 칭함받는다는 생각이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롬3장에서 증언하고 있다(롬3:23~26). 그리고 이러한 칭의는 내가 믿어서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나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뜻에 따라 되어진 것이니, 내가 받은 칭의가 다 주님의 예정이므로, 내가 받은 칭의는 절대 잃어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다. 사도바울의 증거를 우선 들어보자.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예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하고 하시고 의롭다고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롬8:30). 또한 사도바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실 것이며, 주님께서 한 번 의롭다고 선언한 자를 누가 감히 정죄할 수 있겠느냐"(롬8:32~35)고 증언했다. 그러므로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칭의론의 말씀을 들은 자는 대부분 이런 칭의론으로 고착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내가 비록 죄인이며 지금도 죄를 짓고 있는 더러운 죄인이라 할지라도,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한 나는 의롭다고 칭함받는 의인이며, 이러한 칭의를 받은 나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구원해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진짜일까?


4. 바울의 칭의론은 당시 특별한 상황에서 나온 칭의론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바울의 말한 칭의론의 중간에 무엇인가가 생략되어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그리고 그의 칭의론은 당시의 시대적인 특별한 상황하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시대에는 옳은 주장이었지만 모든 시대에 누구를 막론하고 통용되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예를 들어보자. 여자성도에게 과연 안수하여 장로직이나 목사직을 맡길 수가 있을까? 감리교나 통합측에서는 이것이 현재로서는 합법적이다. 하지만 장로교 합동측에서는 이것이 불법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했던 성경구절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특히 고전14:34~35에 나오는 말씀과 딤전2:11~12의 말씀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들에 의하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 그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으며 그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된다(고전14:34~35). 더욱이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기만 해야 한다. 여자임에도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나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딤전2:11~12).


5. 시대와 장소와 대상을 초월하는 칭의는 오직 예수님의 말씀이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들은 바울이 당시의 시대적상황에서 나온 시대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사실 바울이 말한 것은 상황신학에 속한다. 상황이 달라지면 다르게 적용해야 할 말씀들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다르다. 예수님의 말씀이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면 누가 그분의 말씀이 진리라고 믿고 따르겠는가? 그렇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이 시대와 장소와 대상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절대적인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말한 것은 시대적인 상황과 배경을 이해하고 들어야 맞는 말씀이 있다. 이러한 적용은 칭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도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칭의를 말할 때에는 유대교에서 말하는 칭의관 내지는 유대교의 구원관이 잘못 되어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칭의론은 유대교의 칭의관 내지는 구원관을 바로잡기 위해 반작용으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교적인 상황이 아닌 다른 상황에 놓여있는 우리에게까지 그 말씀만이 진리라고 주장해서는 아니 된다. 다시 말해, 자기는 의롭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어느정도 맞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영원불변의 유일한 진리의 말씀이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말했던 이 말씀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진리일 뿐만 아니라 시대와 장소와 대상을 초월하여 항상 적용되는 진리라고 정의내려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칭의에 관해 말씀하신 것이 그것과 다른 개념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염두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에 비춰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 그분의 말씀만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각도에서 볼 때 사도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기록하고 있는 칭의는 칭의에 대한 예수님의 본질적인 내용이 생략되어 있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사도바울은 여기에서 오직 '믿음'만을 칭의의 요소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없이 칭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칭의를 얻는다는 주장은 예수님의 말씀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6.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칭의의 중요한 요소는 대체 무엇일까?

  그렇다면 바울의 칭의론에 생략되어 있는 칭의의 아주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사람이 칭의를 얻기 위해서는 믿음 외에도 또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복음서로 가야 한다. 거기에서 절대주권자인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눅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언급하실 때에, 칭의에 관한 아주 중요한 요소를 말씀하셨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칭의론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 것들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고 있는 칭의에 대해서는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바울의 칭의론만을 들이대면서 자신은 의롭다함을 받은 자라고 자랑한다. 아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가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선언해주시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단 한 사람을 향해, 그가 칭의를 받았다고 완료형으로 말씀하셨다(눅18:14). 그는 바로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칭의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말씀하신 칭의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셨을까? 예수께서는 사람이 칭의를 얻는 데에 중요한 요소를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놀랍게도 회개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중요했고 이어서 주님의 속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칭의는 철저히 자기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자신이 짓고 있는 죄 때문에 정말 마음 아파하며, 그러한 죄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죄의 은총을 바라는 마음이 수반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7.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차이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를 살펴보자. 바리새인들은 그날 하나님께 기도하러 나오지 않았다. 그는 "따로" 서서 기도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따로"라는 말은 "자기를 향하여"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향하여 기도했다. 그는 자기의 의가 이 정도라고 자랑하기 위해 그날 기도의 장소에 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율법규정에 하라고 한 규정과 하지 말라고 한 규정을 잘 실천하고 있을 뿐더러, 오히려 자기는 그것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실천하고 있다고 떠벌렸다. 그는 토색하지 않았고, 불의하지 않았으며, 간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소득의 십일조를 어김없이 내고 있었을 것이다. 마23:23에 보면, 그는 율법 외에도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내고 있었으며,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에 대한 율법의 규정이 없다. 그리고 이레에 두번씩 금식해야 한다는 규정도 율법에는 없다. 다만 성경에는 대속죄일에만 금식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을 뿐이다. 더군다가 그는 자기를 자랑하고 그리고 자기처럼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멸시하기 위해 거기에 왔던 것이다. 특히 세리에 대해서 그는 증오심마저 감추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하나이다." 그는 실상으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율법의 규정들을 준수하고 있었으며, 자기자신이 이 정도는 실천하고 있습네하고 자랑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그것을 이용하여 그렇게 행하지 못하는 자들을 멸시하려고 그렇게 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리는 달랐다. 그는 성전 안으로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 있었다. 그리고 감히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다만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 용서를 빌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당신은 죄인인 저에게 속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짓고 있는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기의 신분과 직업이 자기를 죄짓게 하고 있었기에 그가 하나님께 바랄 수 있는 것은 오직 속죄 뿐임도 잘 알고 있었다. 세상 그 어디를 간다해도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피멍이 들도록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이 못난 죄인은 하나님이 아니면 용서받을 수 없으니 오직 하나님의 선처를 바란다면서 울부짖으며 기도했던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어떤 판단을 내려주셨는가?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고 말씀해주셨다. "의롭다하심을 받고"는 표현을 보면, 완료 수동태구문이다. 즉 그는 그렇게 기도하면서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죄용서를 받았으며, 비록 죄성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던 것이다.


8. 나오며 - 진정한 칭의란 무엇인가?

  그렇다. 진정한 회개하는 마음이 없는 칭의는 더 이상 칭의가 아닌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찟는 회개하는 마음이 없이 주님만을 믿는다는 그 믿음 때문에 칭의가 그에게 주어지는 일은 없다. 자신이 죄인인 철저히 깨닫고 자신이 지은 죄는 오직 주님의 속죄없이는 절대 용서될 수 없다는 것을 간절히 고백하는 자가 칭의를 받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죄성도 인정하지 않는데 어찌 그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칭의가 주어지겠는가?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해하지 않는데, 어찌 그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칭의가 주어진다는 말인가? 바울이 말한 칭의론의 일부를 가지고 자신은 의롭다함을 입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우리의 판단의 기준은 예수님의 말씀이라야 한다. 칭의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칭의는 통회하는 마음이 동반된 것이다. 이것이 없는 믿음은 절대 의롭게 될 수가 없다. 성도들이여, 회개없는 믿음으로 칭의를 얻으려고 시도하지 말라. 철저히 회개가 동반된 믿음이라야 주님으로부터 칭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칭의도 회개가 핵심이었던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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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와 회개는 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아브라함이 복을 받는 데에는 왜 칭의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에게 할례의 인침은 왜 필요했던 것일까? 아브라함에게는 13년간의 자범죄에 대한 회개가 있었고, 할례를 통한 본질적인 회개가 있어야 했다. 이것은 오늘날 구원을 향해 가는 우리 성도들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1. 들어가며

  사람이 자신이 구원받기에 합당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기는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무조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고 확신하고 있으면 되는가? 아니면 다른 것으로 확인해 보아야 하는가? 오늘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사건을 통해서 그가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왜 그에게 할례가 필요했는지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기에 합당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확인하는지를 알아보자.


2.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아야 했던 이유

  사도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그가 무할례시에 받았던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고 말했다(롬4:111상).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진 믿음에 대해 인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던 시기는 언제였으며, 그가 할례를 통해 믿음의 의를 인쳐야 했던 시기는 언제였는지를 말이다.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을 때는 그의 나이 약 85세정도 때였다. 그리고 그가 할례를 받았던 시기는 그로부터 약 13년이 더 지난  후 약 99세 때였다. 한편,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자신의 고향친척아버지집을 떠날 때부터 계산해보면, 약 24년이 경과된 시기였다.


3. 할례와 인침의 속뜻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 시기에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주문했던 것일까? 이것에 대해 사도바울의 해석은 간단하다.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던 믿음으로 난 의가 인침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롬4:11상). 그렇다면, 할례란 무엇이며, 인침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할례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남자의 고추 끝에 있는 포피를 잘라내는 의식을 가리킨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인침이라는 것은 도장을 찍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무엇 때문에 도장을 찍는가? 3가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소유와 권위 그리고 안전 및 보호를 상징한다. 가령 어떤 물건을 놓고 도장을 찍는다고 치자. 이때 사람은 자신의 (인감)도장을 찍음으로 그 물건이 자신의 소유임을 확증해 놓는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물건은 그 소유권자의 허락없이는 손댈 수 없게 된다. 이때부터 도장받은 물건은 보호를 받게 되어 안전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침의 이유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할례가 그의 믿음을 인친 것이었다고 한다면, 인침은 그동안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에 대한 보증이요 보호이며 보증이 되는 셈이다. 이것을 거꾸로 말한다면, 그동안 그가 가진 믿음은 불완전했다는 뜻이며, 보호받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랬을까? 정말 그의 믿음은 불완전한 것이었고 성숙하지 못했던 것이었을까?


4. 아브라함의 신앙의 단계

   이제 아브라함의 신앙이 어떠했는지를 한 번 돌아보자.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75세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그때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갈대아우르를 떠나 가나안땅에까지 도착했지만, 그에게는 정작 후손이 없었다. 그래서 1차로 그는 그의 조카롯을 자신의 후사로 삼겠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그를 떠나보내야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2차로 자기 집에서 길리고 자란 다메섹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들이겠다고 했다. 그러자 또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 "네 자손이 이와같으리라"고 했다. 그때 아브라함은 처음처럼 그것을 그대로 믿었다(창15:6).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이때가 바로 아브라함이 자신의 고향을 떠나온지 약 10년이 지난 시점 곧 그의 나이 85세정도가 되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채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아브라함은 믿음이 부족한 행동을 하게 된다. 조카도 안 되고, 양자도 안 된다고 하니 이번에는 3차로 첩을 통해 자식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그의 아내가 먼저 제안한 것이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못 이긴 척 하면서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리하여 첩 하갈을 통해 자식을 낳게 되니 그가 바로 이스마엘이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아브라함에게 변고가 생기게 된다. 아브라함에게 늘 나타나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1달이 지나고,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가고 10년이 지나갔다. 그리고 또다시 3년이 흘러갔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아브라함은 어떻게 지냈을까? 그냥 흥청망청 술타령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일까? 아니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13년간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했을 것이다. 우선은 조카롯을 의지했던 것을 회개했을 것이다. 그리고 양자삼을 계획을 세웠던 것을 회개했을 것이다. 그리고 첩을 통해 자식을 낳아 후사를 잇게하겠다는 것을 회개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홀연히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에게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창17:1)." 이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그동안 하나님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믿지 못했음을 가리키며,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했음을 가리킨다. 그렇다. 아브라함이 13년간 회개하기까지 아브라함의 믿음(칭의의 믿음)은 온전하지 못한 믿음이었고, 그것으로는 그의 의를 보장받을 수 없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새 출발을 하도록 했다. 그때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할 것을 명하신 것이다. 그것도 자기와 자기아들(13세된 이스마엘)과 그의 집에 있는 모든 남자 종들을 다 말이다.


5. 아브라함에게 할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할례란 대체 어떤 것인가? 아브라함에게 할례는 그냥 자신의 육신의 포피를 베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가 할례를 받게 되면 일주일간은 움직이기가 곤란하다는 것을 남자들은 다 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식구들을 그때 누가 보호해 준다는 말인가? 잘못되면 몰살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겠다는 표시로 그날 그 집안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시행해 버렸다. 왜냐하면 자신의 지혜로운 생각과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지혜롭고 옳다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신의 생각 그리고 자신의 육체의 본성에 따라 해 왔는데, 결국 얻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가 그토록 바라던 후사를 얻었던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제 아브라함은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믿고 살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믿고 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내 생각과 판단이 옳은 듯 보였지만, 나중에 보니 육체의 죄된 본성에 따라 행한 임을 아브라함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서는 결코 하나님 앞에 완전히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날 즉각적으로 할례를 실행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제는 자신의 생각 곧 육체의 본성을 따라 행하는 자신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며 살겠다고 하는 표였던 것이다.


6. 할례와 회개의 상관관계

  그렇다. 아브라함에게는 2가지의 회개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지은 낱낱의 죄를 회개하는 회개 곧 자범죄에 대한 회개로서 기본적인 회개가 있었고,  또 하나는 자신은 죄인이며 죄인이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시인하는 본질적인 회개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86세에서 99세까지 13년동안은 기초적인 회개를 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의 나이 99세 때에는 본질적인 회개를 했던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자신이야말로 죄된 본성으로 조성되어있는 죄인인 것을 시인하면서, 그후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겠다고 결단한 것이다. 그렇다. 할례란 자신이 행한 것을 되돌아보니, 자신은 그렇게 행한 것이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다 죄된 본성에 대한 표출에 불과한 것임을 시인한 다음, 두번 다시 자신의 육체의 본성에 따라 행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겠다는 표시인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은 그날 자신의 육체에 할례를 행함으로써 마음의 할례도 동시에 시행했던 것이다. 사실 사람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란 비록 자신의 범죄가 지금은 할지라도 자신의 내면은 이미 죄된 본성으로 가득찬 사람인 것을 시인한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처음에는 낱낱이 지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간단한 회개를 했지만, 나중에는 자신 자체가 죄된 본성이 가득찬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회개를 하는 것이다.


7. 본질적인 회개가 아브라함에게 가져다 준 유익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아브라함이 비로소 본질적인 회개를 하자마자 그의 아내 사래가 임신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아브라함 자신이 그토록 수십년간 바래왔던 후사를 당장 얻게 되었다(창21:1~2).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는 "나의 벗"이라고 하는 칭함까지 받았다(약2:23). 그렇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처음 예수믿을 때에는 낱낱의 죄를 회개한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비록 자신이 죄를 짓지는 않았어도 자신도 죄된 본성으로 가득한 사람인 것을 시인하는 회개를 한다. 이때 이 두번째로 행하는 회개를 본질적인 회개라고 말하며, 그것이 곧 아브라함에게는 "마음의 할례"였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우리가 그분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골2:11)"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성도들이여, 자신이 지은 낱낱의 죄를 하나하나 회개했으니 회개는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라. 회개는 그때부터 진짜 시작된다. 본질적인 회개가 말이다. 마음의 할례와 같은 회개 없이는 결코 자신이 가진 믿음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보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즉 본질적인 회개없이는 결코 자신의 가진 믿음으로 천국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8. 나오며

  여러분이여,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나는 진정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인지를 말이다. 진짜 자신이야말로 죄된 본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시인하고, 다시는 죄된 본성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고 있다면, 당신은 아직 믿음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많은 수가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그 믿음으로 구원도 받고 천국에도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아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불안전한 믿음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구원받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믿음을 갖도록 할례를 주문하신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할례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또한 본질적인 회개를 하고 있지 않는 성도라면, 당신은 믿음의 인침이 없는 사람인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이때 죽는다면 그 믿음으로 천국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전능자로 믿지 않고 자신의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믿는 자는 결코 구원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도들이여, 하나님 없이는 자신이 결코 죄된 본성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는 무력한 사람인 것을 시인하라.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자신이 살 길인 것을 믿으라. 당신은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는가? 자신에게 본질적인 회개가 없었다면, 오늘부터 그러한 회개가 일어나도록 간절히 기도하라. 그리고 본질적인 회개를 통해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인침을 받으라.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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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에 진정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제 얼마남지 않은 우리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인가? 아니면 주님 일에 오늘도 계속해서 충성하는 것인가? 둘 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주의 재림을 기다려야 하며, 주님께서 나 자신과 교회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주의 재림을 기다려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서 주의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 또한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하는지 알고서 충성해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와 어떻게 사명에 충실해야 하는지도 알고서 기다리며 충성해야 한다. 이것을 모른 채 마냥 주님의 재림만을 기다리면 주님께 책망만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조건 충성한다고 하면서 남을 해치면서까지 충성해서 아니 될 것이다.

  자, 일례를 들어보자. 주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마땅이 주의 자녀가 해야 할 일은 행하지 않은 채 날마다 그날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린다면 그게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되는가? 누가 어느 때쯤 휴거가 일어난다고 하면 거기에 쏠렸다가 아니면,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또 언제쯤이라고 말하면 또 거기에 쏠려 그날만을 기다리는 자는 정상적인 성도가 아니다. 그런데 요즘에 그런 자들이 한국교회 안에 있다. 시한부종말론자들이 그들이다. 특히 올 9월 장막절에 성도들의 휴거가 있을 것이라면서 사람을 꼬드기는 이들이 올 해도 이미 활동하고 있다. 그들의 대표자는 부천에 있는 어느 교회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날을 기다리고 있고, 제주도의 한 팬션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9월 28일에 1차 휴거가 일어나지 않게 되자, 오늘 10월 4일 12시에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또 어명을 받았다고 계시의 미명하에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들을 이끌고 있는 김여명목사라는 분은 정말 목사인지 묻고 싶다. 이번에 또 불발이 되면 무슨 말로 사람들을 또 속이려고 들지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그렇다. 주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나 그것은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닌 것이다. 마24장을 읽어보라. 성도들의 휴거가 있는 날까지도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말이다. 그들은 그날도 일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밭에 나가서 일하다가 들림을 받았고 여자들은 집안에서 멧돌을 돌리다가 들림을 받았다(마24:40~41). 그리고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받고 한 사람은 남겨둠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눅17:34). 그렇다. 성도도 인간이니만큼 휴거되는 그 날까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면서 그 날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낮시간에는 일해야 하고 밤시간에는 잠을 자야 한다. 그러나 밤이나 낮이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날만 오기만을 기다린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성도라도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인간이기에 열심히 일하면서 그날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오로지 주의 재림만을 기다리는 잘못된 성도들에게 이렇게 엄하게 말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 그렇다. 기다림의 목적이 잘못 되었고 기다림의 방법도 잘못된 그들을 결코 따르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성도들이 주의 날을 잊고 살아서도 아니 될 것이다. 천기를 분별할 줄 알면서 영적인 상태를 분별하지 못한 채 세상 일에만 취해 있어도 아니되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열심이 일을 하면서도 저 천국으로 이사갈 준비도 꾸준히 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아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저 천국은 어떻게 들어가는지 그리고 거기에 들어간 자는 어떤 축복을 누리게 되는지를 준비하면서 세상 일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메시야의 왕국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러한 생각은 그들에게 팽대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메시야의 왕국은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었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곧 그 왕국이 지상에 세워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래서 혹시나 예수께서 메시야의 왕국을 세우지 않을까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다고 하니까, 모두가 다 열렬히 예수님을 환영했다. 구약성경에 그토록 예언되어 있는 메시야의 왕국이 곧 세워질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메시야의 왕국에 관한 시편118편에 말씀에 따라 목청껏 찬송을 불러댔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 뒤 채 5일이 다 지나기도 전에 붙잡혀 십자가에서 죽고 말았다. 왜나하면 예수께서 왕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저 이 세상 임금인 마귀를 제압한 뒤에, 십자가에서 인류의 대속의 죽음을 죽어야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고난과 죽음을 택하신 것이다. 그러나 고난당하고 죽으시는 메시야에 대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은 닫혀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치적인 메시야의 등극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만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들의 기대는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예수님을 3년 반씩이나 따라다녔던 제자들의 생각은 조금은 달랐다. 그들도 처음에는 실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죽으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시어 그들을 찾아오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의 눈들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아, 드디어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 시대에 메시야의 왕국을 세우시려나보다" 하고서 말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즉시 부활하신 주님께 언제 메시야의 왕국을 이루실 것인지를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질문에 대해 답해주시었는데 놀라지 말라. 주님의 대답은 아주 분명했다. 때와 기한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제자들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곧 제자들 위에 부어질턴데 그러면 능력을 받아서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을 증언하는 것이 그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하셨다(행1:7~8). 그렇다. 이 땅 위에 세워지는 메시야의 왕국의 때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지 말아야 하듯, 우리들도 주님의 재림의 시기가 믿는 이들의 제일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서 아니되어야 한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유대인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들은 지금까지 메시야의 왕국이 이 땅 위에 세워질 것을 고대하고 있다. 그래서 하루 빨리 예루살렘 성전 산에 유대인들의 성전을 세워지기를 고대하고 있다. 곧 제3의 물질적인 성전을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다. 왜냐하면 살후2장에 나오는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해야 그 뒤에 주님이 재림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성전'의 물질적인 성전을 의미하는 '히에론'이 아니라, 영적인 성전을 의미하는 '나오스'라 단어가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림의 예수께서 하늘의 왕이자 메시야로서 이스라엘백성에게 왔었지만 그들이 끝끝내 그분을 왕으로 영접하지 않은 채 배척하고 죽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장차 예루살렘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탄식하셨다.

마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잘 곱씹어 생각해보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기대를 하나님께서 사실상 접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가?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민족 가운데 제사장나라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출19:5~6). 하지만 그들은 주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이 먼저 선택받은 만큼 하나님을 잘 섬겨 복을 받은 다음 타 민족에게도 그러한 복을 나눠주는민족이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주님의 뜻을 저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왕으로 재림하시는 날까지 이스라엘은 버림받은 상태로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그들은 먼저 선택받은 민족으로 사명을 저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버림받았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백성에 대한 기대는 그대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 아니다. 비록 이스라엘백성에 대한 기대는 끝났지만 그들이 감당해야 할 제사장의 사명은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간 것이 차이가 난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주님께서 핏값을 주고 산 교회에게 제사장권이 넘어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계1:5~6, 5:9~10). 어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시게 되면 유대인들이 회개하여 천년왕국 안으로 제사장이 되어 참여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천년왕국이 실제 도래하게 되고 그들이 거기에 참여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그곳에서 제사장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거기에는 주님께서 핏값을 주고 사신 교회가 제사장직무를 감당할 것이고 왕노릇도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먼저 부름받은 사명을 사실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그 특권은 주님을 위해 헌신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교회에게 돌아갔다. 그래서 오늘도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며 수고하고 충성하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서 제사장으로서의 특권을 누리며 살 것이다. 복음전파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며 그것을 주님께 드린 자가 왕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세상의 모든 교회들은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할 것이다. 먼저 회개와 천국복음을 들어 깨달게 되었다면 그것을 실천하고 그것을 온 세계에 전파해야 한다. 그리고 천국백성에 걸맞는 본보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 먼저 참된 복음을 접한 자로서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치 않는면 촛대는 또 다른 곳으로 옮겨질 것이 뻔하다. 그렇다. 이 시대에 우리 성도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먼저 부름받아 먼저 주의 자녀가 된 자로서, 가장 기본적인 사명이자 과제인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잘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하면서 주의 재림도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그날만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종말론자가 되지 말라.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지도 않으면서 주의 재림만을 기다린다면 그날 주님으로부터 엄한 책망만 들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 시대 가운데 오로지 주의 복음을 전파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고 있으면 되는 것인가? 아니다. 죄인인 우리에게는 이것 말고도 또 한 가지도 더 우선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회개"하는 일이다. 세상에 어느 누가 날마다 시간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만 매달릴 수 있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거의 없다. 혹 그런 자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런 자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어떤 시기에는 그 일을 잘 감당했던 자라도 어느 순간엔가 쉬고 있는 자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하다가도 시험을 받아 주의 일을 쉬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항상 우리는 주님 일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충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충성해야 하지만 잘 충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혹 육신이 아프거나 나이가 들게 되면 충성하고 싶어도 잘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식구들을 먹여살려야 하는 가장이라면 주님 일에 충성하고 싶어도 잘 안 되는 것이다. 더욱이 세상에 살다보면 성령충만이 떨어지기 때문에라도 못하게 된다. 더욱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된 본성이 우리로 하여금 주 앞에 항상 충성하도록 그냥 내버려두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우선적으로 이 시대 가운데 해야 할 것은 주님 앞에 날마다 매 시간마다 충성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회개를 하는 일이다. 사실 천국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 일에 충성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지은 죄를 회개하지 못해서다. 왜 오늘날까지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지 아는가? 여러 가지 요인들을 말할 수 있겠지만 베드로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당시에 고난받고 핍박받는 상황에서 성도들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기다린다 해도 주님이 오실 수는 없다. 왜냐하면 회개하지 않는 성도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은 상황에서 주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그들은 회개치 못하고 주의 재림을 맞이하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이 지금까지 지연되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이는 오직 우리가 회개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기회를 주신 까닭이다. 오, 주님께 감사하라.

  사실 회개의 중요성은 누누이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는 주제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아시아의 7교회를 보라.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60년이 지난 시점에서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들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충성하라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회개하라는 것이다.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한 번 믿었다고 해서 미래의 죄까지 다 사함받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백한 죄에 대해서만 용서받기 때문이다(요일1:9). 그러므로 이 시대에 성도들이 해야 할 또 하나의 일은 날마다 시간마다 회개하는 일이다.  

  성도들이여, 주님의 재림이 아주 가까운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제 명확해졌다. 하나는 주의 일에 충성하여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의 육신을 벗는 그날까지 날마다 매 시간마다 회개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충성한 만큼 그날에 보상을 받게 될 것이며, 회개하는 만큼 용서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5-10-04 이 시대에 우리가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행1;6~11_벧후3;9).ts_00114037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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