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왜 죽으실 때 유대인 법이 아닌 로마의 법대로 십자가 형틀에서 죽으셨을까?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장사지냄은 왜 그리 빨리 진행되어야 했을까?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공개적으로 드러냈을까?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까지 십자가는 저주의 형틀이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곳에서 죽으신 이후 십자가는 고귀한 희생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법에 의해서 참람죄로 고소되었지만 죽을 때에는 로마의 반역죄인처럼 취급받고 사형에 처해지셨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주장했던 참람죄(신성모독죄)라는 죄목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죽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거짓 고소했다.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이시니 반역죄인이라고. 사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다윗왕의 혈통에서 나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의 왕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세우시고자 했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요18:36-37, 요1:11). 그러므로 반역죄는 성립될 수 없었다. 몇 번의 심문을 통해 이것을 알아차린 로마총독은 예수님을 석방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민란을 걱정한 나머지 결국 그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내 주고 말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에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온 12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처형되셨다. 죄없으신 분이 죄인처럼 취급받으신 것이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형의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셨나?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시켜 그들을 쓸어버릴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것이 당신이 이 세상에 인간이 되어 오신 목적이었기 때문이다(막10:45, 요10:11, 요12:24). 그 방법이 인간이 가진 저주를 끝내는 방법이요 율법이었기 때문이다(신21:22-23, 민21:8-9, 갈3:13)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당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통해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찾고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종교법으로 예수님을 정죄했고, 로마법까지 동원하여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하지만 거대한 안목으로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으니, 오직 흠없는 어린양되신 예수님만이 속죄제물이 되실 수 있었기에,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속죄양이 되시어 골고다 제단에서 죽으신 것이다(갈1:4).
  예수께서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속했으며, 더불어 가난과 목마름의 저주를 속량했다(신28:48). 그리고 질병까지도 대신 담당하셨다(사53:5, 벧전2:24). 이것이 사53장과 시22편에서 말하는 고난받는 종의 길이었다. 오직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일을 이루고 가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마지막 외마디 외침은 "다 이루었다"이다. 다 지불하신 것이다. 다 성취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유대인의 유월절의 예비일인 13일 금요일이었다. 예수께서는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며, 12시가 될 때 아버지부터도 버림을 받으셨다. 그리고 오후3시에 운명하셨다. 곧 3시간 후면 유대인의 큰 안식일이 시작된다. 니산월 14일은 안식일이자 유월절의 첫날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부정을 염려하여 유대인들은 시체를 빨리 치우길 원했다. 그래서 단 3시간만에 장례가 치러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주님께서는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산헤드린공회원 두 사람을 준비해두셨다. 아리마대요셉과 니고데모였다. 아리마데 요셉은 자신을 드러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자신의 부요함을 언제 써야 하는 지도 알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시대마다 숨겨둔 당신의 사람들이 있다. 아리마대 요셉은 시신을 옮겨 장사지내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고 가까운 곳에 무덤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그리 옮길 수 있었고 장례법대로 니고데모와 함께 씻고 몰약과 향품과 침향을 바른 다음, 세마포에 싸서 그곳에 뉘여 놓았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은 그 몸을 가지고 그대로 부활해야 했기 때문에, 뼈가 하나도 상해서는 아니 되었으며, 장례 때에도 화형이나 매장을 해서는 아니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로마군병은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았다. 그리고 B.C.20년에서 A.D.70년까지만 있었던 장례풍습대로 예수님은 빈 무덤 안에 그냥 뉘어있었던 것이다. 사암을 파고 그 안에 시체를 넣어두는 장례풍습은 그 시대 전후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3일 뒤에 그 몸을 가지고 그대로 부활하신다. 
 
  성도가 실제로 교회생활을 하게 될 때 그는 교회에서 어떤 것을 요구받게 되는가? 예를 들어, 어떤 교회에서는 제자훈련이나 양육코스를 밟아야 된다고 가르칠 것이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칠 것이며 또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가르칠 것이다. 또 어떤 교회는 말세에 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하는데 베리칩이 666이니 절대 받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교회생활을 시작하게 될 때 정말 무엇이 제일 중요하며 비중있게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모여서 결정한 첫번째 공의회 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후에라도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하며 율법을 준수해야하는지에 대한 긴급회의가 기록되어 있다. 회의장소는 예루살렘교회였고, 참가자는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 그리고 최초의 이방인교회인 안디옥에서 파송된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몇 사람이었다.
  많은 토론이 있은 후 사도들의 대표자 베드로가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니만큼 주께 돌아온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준수와 같은 멍에를 매게 해서는 아니된다고 했다. 그러자 장로들의 대표자인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이렇게 결론지었다. 사람은 믿음과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동일하다. 단, 이방인 중에서 주께 돌아온 자들에게는 몇가지 사항을 주의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이방인이 비록 믿음으로 구원받긴 했으나 그것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조항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크게 4가지였다. 우상의 제물과 음행 그리고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필수적인 지켜야 할 금지조항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를 보라. 이 4가지 사항을 주의하라고 가르치는가? 그리고 이 4가지 금지조항이 무엇때문에 그리도 중요한 것인지를 가르쳐주는가?
  그렇다면, 왜 야고보 장로는 이러한 4가지 금지조항에 대해서 제안했을까? 이 조항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 조항들이 크게 2가지 항목으로 대별해 볼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우상의 제물과 음행에 관한 것들로서 이것들은 다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것으로 통일된다. 다시 말해 이방인들은 예로부터 우상앞에 절해왔고 그 제단에 바쳐진 제물들을 먹고 또한 종교의식 가운데 하나로서 성전창기들과 음행을 저질러왔다. 하지만 주께 돌아온 이방인들은 최소한 이러한 일들을 하지 말라고 금지한 것이다.
  두번째 그룹은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조항들이다. 예로부터 유대인은 이미 율법을 가지고 있었기에, 식용할 목적으로 짐승을 잡든 아니면 제물로 바치기 위해 짐승을 잡든지 한곁같이 피를 쏟아서 땅에 묻거나 제사장이 제사의 용도로만 사용한 후 나머지는 다 땅에 쏟았다(레17:13, 19:26). 하지만 이방인들은 이런 규례가 없었기 때문에, 목매어 짐승을 죽임으로 피가 고스란히 고기 속에 베이게 했다. 뿐만 아니라 이 피를 마시기도 하고, 이 피를 자기의 몸에 바르기도 했다. 하지만 예루살렘교회 장로 야고보는 이것은 어린양과 어린양의 피를 경홀히 여기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하지 말라고 명한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이방신 제사 풍습과도 관련은 있지만 보다 더 중요한 핵심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피를 소중히 여기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요이1:7, 히9:29).
  그렇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주께 돌아왔어도 율법이 필요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명령한다면 유대인들처럼 지키기 어려운 무거운 멍에만 될 뿐이었기에 예루살렘공회에서는 두 가지 사항만을 주의하라고 당부한 것이다. 그것은 우상숭배와 그리스도의 피에 관한 것이었다. 과연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 것이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피를 무효화시키거나 조롱하는 것이 않나를 늘 살펴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이 두가지 금지조항은 교회 가운데 많이 시행되고 있다. 특히 로마가톨릭은 우상숭배의 집단이 되었고, 베리칩종말론자들은 예수님의 피를 조롱한다. 왜냐하면, 베리칩을 받으면 예수님을 믿어도 용서가 안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니다. 아니다. 이 세상에 회개하면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 그러므로 베리칩종말론자들의 주장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셔서 피흘려 죽으셨음을 부정하는 신종이단인 것이다.
  주의하자.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 것이 구원을 무효화키시는 우상숭배의 행위인가(고전6:9-10, 계21:8) 아니면 그리스도의 피를 조롱하는 것인가(히10:29)를 말이다. 만약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이 두가지 사항에 주의하여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는 반드시 형통함을 입게 될 것이고 평안함을 얻게 될 것이다(행15:29).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자신의 믿음과 화개생활로 인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정치와 종교 지도자의 탈선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과연 유대인의 왕이시며 그분이 세우시고자하는 왕국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함께 살펴보자.
  예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실 때 이 세상 및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했을까? 이사야 선지자는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큰 빛이 비출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역을 감당할 때야말로 전 우주의 시간 가운데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하늘의 왕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몰라보았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미워했고 배척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오지 않고 예수께로 가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몰아내신 것도 포함된다. 그것은 대제사장들의 상권이 걸려있는 문제에 예수께서 손을 댔기 때문이다. 결국 종교지도자들은 자기 땅에 자기 백성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만다. 그것도 새벽 3시에서 6시 밤 사이에 불법적으로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여, 사형을 결정한 다음 날이 새자마자 바로 그 형을 집행하려 시도한다.
  걸림돌은 로마총독이었다.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의 속국이었기에 로마총독의 감독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로마총독의 승인없이 사람을 죽였다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이른 아침에 예수님을 끌고 로마총독의 관저로 간다. 그리고 예수께서 행악자로서 마땅히 죽임당해야 하는 데 자기들로서는 사형권이 없기 때문에 사형을 집행해 달라고 그에게 청원한다. 예수께서 악을 행하지도 아니했고, 무슨 죽일 죄를 범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에 예수님을 불러다가 심문해 본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죄가 없을 뿐더러 그 문제는 종교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놓으려고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 본다. 첫째는 유대인들의 전례를 이용한 것이었는데, 이는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면 죄인 한 명을 놓아주던대로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하나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둘째는 예수님을 실컷 채찍질하여 만신창이를 만든 다음에 석방해주려고 한다. 이는 성난 군중을 달래고 민심까지 얻으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실패한다.
  오히려 성난 군중으로부터 자칭 왕이라 하는 자를 놓아주었다가는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선동과 협박에 그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도록 내어주고 만다. 예수님이 로마에 대해 반역죄를 지은 죄인 것을 인정해버린 셈이다.
  그렇다. 정치나 종교는 민심을 제일 무서워한다. 설령 민심이 하나님의 말씀과 달라도 정치지도자나 종교지도자는 늘 사람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쁘다.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양대 권력체계인 종교와 정치는 죄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죽이는 일에 합작하게 된다. 
  그렇다. 성도들이여, 정치지도자나 종교지도자들의 말과 판단을 함부로 믿거나 따르지 말라. 이 두 지도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민심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요할 때에는 성경말씀도 이용하여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예수께서 왕이시지 않는가? 하지만 예수님은 과연 어디에 당신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는가? 이곳이 아니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내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약 내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인 천사들을 시켜 나로 하여금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왕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내 백성을 구출해서 천국에 데려가기 위해 왔다." 그렇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지상왕국을 건설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장차 불못으로 변할 것이기에 주님께서는 이 세상이 불타서 불못이 되기 전에 당신의 백성을 얻어 데려가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천년만년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 하지 말라. 그것을 얻기 위해 허비하지 말라. 이 세상은 잠깐 필요한 모짜리판에 불과한 곳임을 알라. 언제라도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혹 당신이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 즉 권력이나 지위나 물질이나 은사달란트가 있는가? 혹 있다면 그것으로 천국복음을 증거하는데 사용하라. 왜냐하면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로부터 40년 뒤에 갈기갈기 찢겨 죽거나 불에 타서 죽었고, 본디오 빌라도 유대총독은 얼마후 지위를 잃어버리고 자살해서 인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벌써 배도의 시대에 접어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벌써부터 드러내놓고 루시퍼를 섬기며, 성경말씀을 조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난 4월 18일 천주교 바티칸의 한 추기경은 "재림에 대한 말씀은 예수께서 취중에서 한 실언이었다'고 말했으며, 4월 19일에는 교황이 루시퍼를 칭송하는 미사를 집전하고 있는 것을 방송으로 내보냈기 때문이다. 큰 일이다. 믿음있는 자라면 성경말씀을 가감하지 않으며 재림에 대한 약속을 끝까지 믿고 그 날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 본문 말씀은 A.D.95년경 복음을 증거했다는 이유로 고령의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붙들려 있을 때에 주 예수님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 하신 말씀을 소아시아의 일곱교회에게 보내라고 했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사도요한이 본 환상 가운데 예수님은 그가 60년전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으며, 그분의 말씀은 자비롭거나 어떤 실수라로 용납하시겠다는 그러한 종류의 말씀이 아니었다.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구약의 여호와의 모습과 같았던 것이다. 그분의 목소리는 많은 물소리와 같았고(겔43:2) 그분의 자태에서는 영광의 빛이 둘러 비치었고(단7:9), 그분의 눈빛에서는 불꽃이 이글거렸으며 그의 발에서는 금방이라도 밟아버릴 것만 같아 심판의 긴박성을 느낄 수 있다. 그러자 사도요한은 엎드려서 벌벌벌 떨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용모는 구약의 여호와의 용모와 동일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사9:6, 요1:14,18). 이제 천상의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며 공의로 심판하시는 절대자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써보내라고 들려주신 말씀은 엄중하고는 준엄한 경고의 말씀이었다. 용서와 용납의 말씀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교회를 없애버리시겠다는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축복의 말씀, 용서의 말씀만을 전해도 사람들이 받을까 말까 한데, 경고의 말씀, 심판의 말씀, 공의의 말씀을 전한다면 과연 성도들이 들을 것인가? 하지만 사도요한은 믿음으로 경고와 심판의 말씀을 일곱교회에게 써보내기로 한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왜 사도요한에게 예수께서 그렇게 엄중한 심판주로서 나타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첫째,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제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지상에 보던 예수님은 형님같았고 때로는 장난도 칠 수 있었으나 환상중에 만난 천상의 예수님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둘째, 우리의 신앙고백을 재정립하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제자들의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마16:16)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지상사역을 마치고 천상에 가셔서 교회들을 돌보시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분을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정도로만 신앙고백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온 우주만물을 통치하시고 행위대로 모든 것을 심판하실 공의로운 하나님으로 신앙고백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믿는 사람들은 태만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루시퍼의 밥이 되고 말 것이다.비록 지상의 예수님을 믿어 천국열쇠를 받았다 하더라도 천국에 못 들어 가거나 들어갔어도 내어쫓김을 받는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일곱교회에게 써 보내라는 말씀을 살펴보면 그것은 거짓 선지자(사도, 교사)와 거짓된 가르침을 따르지 말라는 것인데, 이는 그것을 주의하지 못하면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것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우상숭배로 꾀는 발람이나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지 말고, 거짓된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 성도들이여, 믿음 안으로 들어는가? 그렇다면 이제는 거기에 합당한 삶 즉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는 것이지만 거기에 따른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 져야 할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말라. 인간이 감당해야 할 부분은 인간이 감당해야 한다. 믿고 난 후에 우상숭배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생활을 한다고 해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나가야 한다. 한 번 믿었으면 구원은 보장된 것이니 좀 죄짓고 살아도 괜찮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회개하라.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라. 그래야 죽을 때에 천국에 들어가는 이기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