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주일이다. 스승의 주일처럼 설교하기 어려운 주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승의 주일에는 스승에게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설교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영적으로 앙떼를 지도해야 할 위치를 가지고 있는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항상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뿐인데, 성도들에게 또한 주의 종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설교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도 그러한 목회자가 되길 희망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성도들에게는 목회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교육한다는 입장에서 설교를 진행할 뿐이다.
  북이스라엘의 가장 유명한 선지들을 들라하면 엘리야와 엘리사가 아니겠는가 싶다. 특히 엘리사에서 엘리야는 영적 스승이었다. 엘리사는 수많은 선지생도들을 둔 엘리야의 수제자격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스승이 떠날 때가 가까이옴을 모든 선지생도들도 알고 있었고 수제자인 엘리사도 알고 있었다. 과연 제자로서 스승을 어떻게 따라가야 하며 스승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익히며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스승의 합당한 계승자가 되는 것이리라. 그래서 엘리사는 엘리야의 합당한 계승자가 되기 위해서 3가지를 붙든다. 오늘은 그것을 나눠보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제자의 3대요건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제자의 첫번째 요건은 스승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불평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왕하2:2). 스승의 떠날 기약이 가깝자, 제자들은 모두 스승에 온통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스승 곁을 바짝 붙고있는 엘리사에게 엘리야는 말한다. "이제 그만 됐으니 이제는 좀 쉬거라." 하지만 그것은 과연 엘리사가 엘리사의 사역을 계승할만한 자인가에 대해 시험이었다. 왜냐하면 그후로 엘리야가 계속해서 찾아간 곳은 선지학교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에 할 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듣지 못한 상태에서 사역을 이어받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래서 엘리사는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갔던 것이다. 그렇다. 제자는 어떤 어려움이나 역경이 기다리고 있다해도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자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죽는 데까지 따라가는 자라야 한다. 힘들다고 중간에 포기해서는 아니 된다. 끝까지 따라가서 결국 스승처럼 죽는 것이 제자인 것이다(마16:24). 당신도 주님을  따라가다가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가?
  둘째, 제자의 두번째 요건은 스승의 영성을 계승하되 한 층 더 발전시키는 자라야 한다(왕하2:9). 엘리사가 엘리사에게 마지막으로 요청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자신의 스승에게 임한 성령의 능력이 자신에게 갑절이 임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것 없이는 사역할 수가 없기에, 그것 없이는 북이스라엘을 바알종교로부터 건질 수 없기에 말이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영적 스승이 가진 영력보다 더 큰 것을 기대하며 기도하라. 다른 것에 있어서 우리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해도 영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우리는 최고가 되기를 희망해야 한다. 그래야 영성을 키워나갈 수 있으며 전심사역자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도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제자의 세번째 요건은 스승을 자신의 영적 아비와 영적인 지도자로 알고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왕하2:12). 그러므로 제자라면 스승을 자신의 영적인 아비로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승의 말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하며, 스승이 혹 책망을 한다 할지라도 달게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스승이 혹 실수하거나 허물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들추어 누설하므로 스승의 명예를 추락시켜서는 아니 된다. 스승의 인격과 명예를 존중해드릴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제자는 스승을 영적인 지도자로 알되, 세상의 그 어떤 권력이나 힘보다도 스승의 영적인 능력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엘리사에게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과 같은 것이었다. 수치상으로는 비교할 수 없지만 지도자의 영성과 권세가 그만큼 중요함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에게 스승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당신은 제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이제는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이것을 정립하게 되기를 바란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3년반의 공생애를 마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른다. 예수께서 이날 나귀의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데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예수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속셈은 달랐다. 그들이 원하는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출한 다음 이 지상에 태평성대를 이루어주실 분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출하여 저 세상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행차는 정치적인 행보가 아니었다. 나귀새끼를 타고 오셨으니 초라하기 그지없는 행차이시다. 하지만 그분의 행차는 정말 영의 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가져오며, 새로운 세계를 가져온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여러분의 기억을 더듬어보자. 예수께서 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지 기억하고 있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의 대속물로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일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혹시 아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죽으시는 것이 어찌 영광스럽다 하겠는가?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아니 이 우주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 바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죽는 것이라 하신다. 이 얼마나 고귀한 희생인가? 그리고 더욱이 얼마나 송그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우리들은 무엇을 영광이라 생각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러 나온다. 어떤 이는 유대인처럼 표적을 보기 원한다. 또 어떤 이는 헬라인처럼 지혜를 원한다. 어떤 이는 병에서 낫기를 원한다. 또 어떤 이는 인생의 성공을 원한다.
  그런데 이처럼 저마다 목적은 다르게 주님을 찾아오지만 진짜 주님을 만나게 되면 그들은 주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로 오셨는지를 알기 시작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고 이 세상을 탈출하여 저 우주밖 셋째하늘에 준비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전까지 마귀가 이 세상 임금으로 있었기에, 세상 사람들이 이 우주 안에서 저 우주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왜냐하면 마귀가 사망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휘어잡고 있어서 이 세상에서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마귀의 권세에 굴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귀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는 한 분이 이 세상에 들어오셨으니 그분이 바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자신이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에서 '예수'라고 하였다. 여호와 즉 자존자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창조주께서 인간을 구원하기위해 예수 즉 구원자가 되어 오신 것이다.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직 한 가지 일을 하셨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일이었다. 사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그분 안에는 한 가지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생명이다(요5:26). 그 생명이 어떤 생명이었는지 당신은 아닌가? 그 생명은 아버지의 생명으로서 사망이 건드릴 수 없는 생명이었다. 이 생명으 하나님께서 에수님에게만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 아버지의 생명은 예수님만이 갖고 있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한 일은 단 두 가지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는 일과 자신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해방하여 믿는 모든 자들에게 나눠주는 일이었다. 한 일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겠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그 생명을 해방하여 성령으로 모든 믿는 이들에게 지금도 나누어주고 계신다. 예수님의 희생과 생명나눠주님을 찬양하자.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죄가운데서 죽어 마귀와 함께 불못에서 영원히 살 뻔 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사망을 이길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으로 이 2가지를 한꺼번에 소유하게 되었다. 그분의 희생과 생명분배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주님을 찬양하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어떻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주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다음,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물려주고자 계획했었다. 하지만 인간은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사탄의 화신인 뱀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이 받아야 할 모든 형벌과 죄값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로 가셨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에게 죄용서와 더불어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다. 결국 인간은 믿음을 통해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래서 탄생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어라 부르는지 아는가? 그것은 피조물들 가운데 하나님의 장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자인 믿는 자는 장자로서 주어지는 권한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권한을 가진 자로서,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과 타락한 천사들을 향해 명령하고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장자로서 갖는 명령권과 선포권은 무엇을 위해 어디에 사용해야 한는 것인가? 그것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고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장자로서 명령권과 선포권을 발동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자들을 위해 하늘에 큰 보상을 준비해 놓고 계신다. 그것은 장차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이요 하늘에 있는 보석으로 지어진 집을 얻는 것이요, 영광의 면류관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마귀가 하는 일을 대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을 우리 인간이 협력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동역자(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당신이 이제까지 당신 자신의 명예와 성공만을 위해 살아왔다면 당신은 하나님하고는 상관없는 자임에 틀림없다. 또한 하나님의 동역자(파트너)가 될 수도 없다. 주님의 일에 참여함으로써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파트너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알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명령권과 선포권을 부여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사용해서 개인의 안위를 챙기고 자신의 명예와 영광만을 위해 산다면 우리에게 하늘의 상급은 없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위해 장자권을 사용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사용하고 있는가? 또한 당신은 지금 무엇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명령권과 선포권을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다만 밭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자라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은 다 하나님이 하신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그분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행한 공력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 되어 불로 그 공력을 시험한다해도, 그 공력이 타지 아니하고 남아있어 하늘에서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노아는 참으로 특별한 사람이다. 그는 500세가 되도록 자녀를 낳지 않고 지냈다. 그리고 500세 이후에 세 명의 아들들만을 낳았는데, 그 후로 또한 자식을 낳지 않았다. 이런 일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일이었다.
노아는 약 7-80년동안 방주를 지었고 홍수 이후에 땅으로 내려올 때까지 그는 세상에 아주 없는 의인으로 살았으며 당대에 완전한 자로 살았다. 하지만 방주에서 땅으로 내려와 땅을 개간하고 살던 어느 시기에 그는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을 자식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포도주를 먹고 그만 하체를 다 드러낸 채 잠을 자다가 둘째아들 함에게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함은 그때 어떻게 했을까? 그가 본 것을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도록 막고 다른 조치를 취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는 아버지의 행위를 유심히 지켜보고는 그의 형제들에게 고발하고 말았다.
하지만 셈과 야벳은 어떻게 했는가? 그들은 그 소식을 듣고는 뒷걸음쳐서 들어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드리고 나온다.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가리어주었던 것이다.
잠에게 깨어난 노아는 자식들이 한 일을 듣고는 함에게 다른 두 형제의 종이 될 것을 선포했고, 셈에게는 영적인 축복을, 야벳에는 땅에서 지경이 넓혀지고 잘 되는 땅의 축복을 선포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라. 함이 그렇게 말한 것은 거짓말이었는가? 아니면 모함이었다고 보는가? 아니다. 함은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함은 자신의 아들 가나안과 더불어 저주를 받았다. 당시 함의 넷째아들 가나안도 직간접으로 그 일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노아가 술에 취하여 벗거벗은 행동은 잘 한 행동이라고 보는가? 이제 자신의 사명이 끝났으니 맘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 이제는 절대로 물로 심판받을 일이 없어졌으니 적당히 세상 것을 즐기며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인가? 육체의 쾌락을 위해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 포도주를 마시되 대낮부터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셔도 된다는 말인가? 자식들 앞에 수치를 다 드러내어도 된다는 말인가? 결코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서 노아의 입술을 통해 예언적으로 말씀을 선포케 하셨다. 그런데 그 선포된 말씀은 지금까지 그대로 응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자녀가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버이 공경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자녀는 과연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옳은가? 사실 부모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요, 나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존중해드려야 할 대상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어떤 조건도 없이 오직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고 있다(신5:16).
문제는 부모가 자녀의 보기에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때에 어떻게 하느냐이다. 자신의 부모가 공경받을만한 분이라면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노아처럼 자식앞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때에 자식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부모가 자식 앞에 보이지 말아야 할 추태를 보일 때에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부모의 수치를 가리워주고 덮어주는 데까지 해야 한다(잠17:9). 둘째아들 함처럼 부모의 부끄러운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떠벌리는 것은 결코 부모를 공경하는 모습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하면 부모의 인격과 권위는 엄청나게 손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함의 실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함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2가지 잘못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는 먼저 아비의 권위를 존중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를 늘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실수하자마자 그것을 빌미로 형제들에게 아비의 행위를 고발함으로써 아버지는 더 이상 아버지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발설했다. 이제는 자신의 아비가 그 집안의 주도권을 쥐어서는 아니되며 이제는 아들들이 그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비의 실수가 나오자마자 그것을 고자질하여 부모를 떠밀어내고자 했다. 둘째, 함은 자신은 아비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나같으면 저런 볼썽 사나운 짓을 하지는 않았을텐데..."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떼어내어라고 한다. 누구든지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한다.
공경이란 아비의 허물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덮어주는 것이다. 그것을 누설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 일을 자기를 돌아보아 자신의 더 큰 잘못을 행하고 있음을 회개하고, 아버지의 권위를 끝까지 인정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공경이요 믿음의 태도이다.http://youtu.be/o2fUcWfELU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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