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천국복음(15) 누가 과연 천국에서 큰 자가 될까?(마18:1~6)_2022-03-08(화)

https://youtu.be/B6klwIHhuME  [혹은 https://tv.naver.com/v/25537125 ]

 

1. 예수께서는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인지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지에 관하여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2가지를 말씀해 주셨다. 그때 예수께서는 일부러 한 어린아이(파이디온)을 불너내신 후에 그 아이를 그들 한 가운데 세워놓으시고는 2가기를 말씀하셨다. 첫째는 먼저 돌이키야 하고 그리고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한다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마18:3). 그리고 둘째, 누구든지 거기에 있는 어린아이처럼 자기자신을 낮추는 이 바로 그이가 천국(하늘들의 왕국)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마18:4).

 

2. 예수께서는 시청각 실물교육을 통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를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 한 가운데에 세우신 후에, 천국에서 과연 누가 큰 자인지를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주님은 이 말씀을 하기 전에 먼저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지부터 말씀해 주셨다. 첫째는 기존 생각으로부터 돌이켜야 한다고 하셨다(마18:3). 여기서 '돌이키다'는 헬라어 단어는 '스트레포'라는 단어로서, '돌아서다. 변하다. 바꾸다.'는 뜻을 가졌다. 이는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에서 돌아서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기존관념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이방인의 집권자들처럼 약한 자들 위에 군림하거나 권세를 부리는 것에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마20:25~27). 둘째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마18:3). 여기서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그 의미를 또렷이 알 수 있다. 그때는 어떤 사람들(부모들)이 자기의 어린아기(블레포, 갓난아기)을 안수해 주심을 바라고 데리고 왔을 때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린 아이들(파이디아)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내버려두고) 금하지(막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파이디온)와 같이 받아들이지(영접하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눅18:16-17)" 그렇다.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말의 뜻은 어린아이처럼 말씀을 순수하게 믿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특성을 가리킨 것이다. 천국이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을 그대로 믿고, 천국이 이렇다고 하면 그런 줄로 그저 믿고서 자기도 그곳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소망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왕국 곧 천국에 대해 들려주면, 그 말씀을 아무런 의심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환영해야 한다는 뜻이다. 고로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거나 그것을 바라거나 소망하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3. 예수께서는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는 어린아이(파이디온) 하나를 세워놓고 그러한 어린아이처럼 자기자신을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셨다(마18:4). 이 말씀은 결국 천국에서 위상의 문제는 곧 태도의 문제라는 것이며, 겸손의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천국에서 큰 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최소조건('거듭남'과 자백하는 '회개')과 충분조건(최소조건에다가 '충성')을 채운 자여아 한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도 겸손한 자,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군림하려는 자, 주인행세만 하려는 자는 천국에 가면 가장 작은 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고로 이 말씀은 천국에서 낮은 신분을 가질 자가 누가 될른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 항상 겸손히 낮은 자세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4. 천국에 들어가거나 천국에 큰 자가 되려면 그냥 어린아이 곧 이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면 되는 것인가?

  우리는 천국에 입성하거나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에 있어서 주의할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게 되면 무조건 천국에 들어가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는 생각이다. 이것을 잘못 알고 있으면서, 오늘도 사회적인 약자들을 돌보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고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앗따고 해서 그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아니며, 또한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믿지 않는 자들 중에도 얼마든지 긍휼을 베풀며 실천하고 살아가는 자들이 있는데, 이런 이들 중에는 단 한 명도 천국에 들어간 자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것 자체가 천국입성의 조건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물론 이 땅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를 섬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당연히 실천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도 아예 율법말씀에 객과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신24:19~21). 그렇게 하면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그의 선행을 반드시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잠19:17). 하지만 이것이 천국입성의 직접적인 조건이 결코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 곧 거듭나지 않는 자는 천국에 아예 못 들어가기 때문이다(요3:5). 고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일에 충성할 때에 그가 군림하는 자세로 행할 것이 아니라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 섬기라는 것이다. 무조건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체가 천국입성의 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반드시 자기와 자기의 후손이 복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맞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바는 그것이 아닌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내 형제들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자가 양의 자리에 들어가고 결국 창세로부터 준비된 왕국을 상속받는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 내 형제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죄를 지어서 못 먹고 못 입고 나그네 된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지극히 작은 자가 된 자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를 돕는다면 그는 천국에도 들어가고 하늘나라도 역시 상속받게 될 것이다. 

 

5. 사회적인 약자를 돌보면서도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또한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적인 약자가 불신자이든지 신자이든지 상관없이 주님께서 인정해주는 삶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2가지를 주의하면 된다. 첫째, 사회적인 약자를 섬기는 일을 할 때에 반드시 '주의 이름으로" 행하라는 것이다(마18:5). 그렇게 했을 때에만이 약한 자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던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눅9:28). 그리고 둘째, 돕더라도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도로 찾아내어 그들을 회개하도록 도와줌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마18:12~14, 눅15:3~7).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준다고 할 때에 동성애자를 도와준다고 치자, 이때에 그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계속해서 동성애를 즐기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여 동성애를 벗어나도록 도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 돌아와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로 촛점이 맞추어져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결국에 천국에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2022년 03월 08일(화)

정병진목사

 

마태복음에 보면 "거기서 슬피우며 이를 갈리라"는 말이 딱 6번 나온다. 그런데 다 똑같은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지옥이라도 다 똑같은 지옥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떤 곳은 그냥 '바깥'이고 또 다른 곳은 더 바깥쪽의 어두운 곳이지만 형벌 받는 곳도 있다. 그리고 불과 유황이 타고 장소도 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곳에 들어가는가? 우리는 절대 이러한 곳에 가지 말아야 한다. 2022-03-06(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천국복음(14) 슬피 울며 이를 갈 자들은 누구며 그들은 어디로 가는가?(마24:45~5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_Wsbzi6Hrw4 [혹은 https://tv.naver.com/v/25536855 ]

 

1. 들어가며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모두가 다 왕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인가? 과거에는 다들 그렇게 알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성경의 기록과 그곳에 갔다가 오신 분들의 간증을 살펴보면, 천국에도 신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이것은 나중에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옥도 마찬가지다. 지옥에 떨어지는 자가 다같이 똑같은 지옥으로 떨어져 고통받는 것이 아닌 것이다. 죄에 따라서 그들이 들어가는 지옥도 각각 다르다. '지옥'이라는 개념을 단순히 그냥 유황 불못이라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지옥의 정확한 개념은 어둠이 가득한 장소로서, 빛되신 주님의 임재가 더 이상 없는 곳이 곧 지옥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에도 차등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곳에 들어가는 지옥의 장소가 각각 다른 것이다. 최소한 성경이 말해 주고 있는 지옥은 세 등급이 있다. 그리고 세부 항목으로 들어가면, 더 많은 종류의 지옥이 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적인 사실은 그곳이 어떤 등급의 지옥이든지 상관없이 그곳에 들어가는 자는 반드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지옥으로 쫒겨났다든지 아니면 그곳에 떨어지게 되었다든지, 그러한 사람이 그곳에서 받게 될 고통은 대체 어떤 것이며, 그들이 들어가게 되는 지옥의 장소가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우리 믿는 이들은 죄들을 회개하고 주님께 충성하여서 꼭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2. 지옥에는 어떤 등급이 있는가?

  하나님이 임재가 없는 곳, 그곳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옥에는 어떤 등급이 있는가? 성경에 보니, 지옥에 떨어지는 자가 느끼는 공통적인 체험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이 표현은 총 6번 나온다(마8:1~12, 마25:28~30, 마22:11~13, 마24:48~51, 마13:41~43, 47~50).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1번 더 나온다(눅13:28). 그런데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갈게 되리라)'는 표현만 나오지 않을 뿐 그와 똑같은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부분은 더 있다. 그렇지만 오늘은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지옥의 등급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이 표현이 쓰인 성경 말씀을 나눠 보면 크게 세 장소가 있다. 첫째는 그냥 '바깥'이라는 장소다. 여기서 '바깥'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엨소'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바깥' 혹은 '외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바깥 어두운 데'라고 번역된 장소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보면, '더 바깥쪽의 어두움 속'이라고 해야 옳다. 셋째는 바깥 어두운 장소의 맨 바깥 아래쪽에 위치한 곳으로써 유황불이 타고 있는 장소가 있다. 이곳은 유황 냄새가 가득하고 항상 불이 타고 있다. 그렇지만 매우 어둡다. 그래서 성경은 이곳을 '영영한(영원한) 불'이 타는 장소라고 하든지, 아니면 '풀무불(불의 구덩이)'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불과 유황이 타는 못'(불못) 혹은 '게헨나(불타고 있는 쓰레기 소각장=지옥)'라고 표현하고 있다. 

 

3. 성밖에는 누가 남겨지거나 쫓겨나게 되는가?

  지옥 중에서도 그래도 고통이 가장 덜한 곳은 '밖(바깥)'이라는 장소다. 여기서 '바깥'이라 함은 새 예루살렘성의 바로 바깥쪽을 가리킨다. 이곳에는 새 예루살렘성 안으로 들어갈 자격을 갖추었으나,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해서 천국에서 밀려난 자들이 간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거듭나지 아니한 불신자들을 찾아볼 수는 없다. 이곳에 있는 사람은 과거에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기는 했지만 그의 이름이 지워진 사람이다. 

  그럼, 성 바깥에는 대체로 누가 가는가? 성경의 말씀에 따르면, 여기에는 열 처녀 중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가 가는 장소요 그들이 남겨지는 장소다(마25:10). 여기서 미련한 다섯 처녀란, 그가 믿는 자로서 신랑되신 예수님을 마중 나가기는 하였지만,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서 결국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여,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기름'의 용도는 신랑을 마중 나가기 위한 것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신랑과의 만남을 위해 자신의 결혼 준비물로서 들고 가야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성도는 죽기 전까지 이것을 준비해야 한다. 만약 이것을 준비하지 못한 자는 그가 성도라 할지라도 그날 성밖으로 밀려나고 말 것이다. 

 

4. '바깥 어두운 데'는 어떤 장소이며 누가 들어가게 되는가?

  좀 전에도 살펴보았지만 성경에서 '바깥 어두운 곳'이란 '더 바깥쪽의 어두움 안'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곳은 그냥 단순히 성 바깥이라는 표현보다 더 고통받는 곳이다. 이곳은 그냥 바깥보다 더 어둠이 있는 곳이며,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곳이다. 마찬가지로 '바깥'이라는 장소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역시 과거에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었으나, 그 이름이 지워진 자들이 가는 장소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과거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니까 제대로 신앙생활을 했다면 새 예루살렘성 안으로 들어갈 뻔했던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못했기에 새 예루살렘성으로부터 쫓겨난 자들 아니면 밀려난 자들이 가는 장소인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말은 자신이 살아 생전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던 것을 한탄하는 것을 표현한다.

  그럼, 누가 이 장소에 들어가게 되는가? 성경에 따르면, 첫째는 이미 언약(약속)을 받았지만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기를 거부했던 유대인들이 가는 장소다(마8:11~12). 그때가 되면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많은 이방인들이 새 예루살렘성의 문을 통과하여 그 성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영광의 광장 안으로 들어가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본래 왕국의 아들들은 오히려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 먼저 주어진 기회를 헌신짝처럼 발로 차버렸기 때문이다. 둘째는 앞의 표현과 조금은 비슷하지만, 비유로서 먼저 초청을 받았으나 실제 혼인 잔치의 초청을 거부한 자들이 가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마22:1~10).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 22장의 왕의 혼인 잔치의 비유들 중에 첫 번째 비유에 해당한다. 그럼 이 비유에서는 누가 바깥 어두운 데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으로부터 혼인 잔치의 초청을 받고도 거절한 채 세상 일에만 몰두한 자들이다. 그들은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는데도, 밭을 사러 가고, 사업하러 가고, 장가가는 일만을 계속해서 몰두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가는 장소다(마25:26~30). 왜냐하면 그도 역시 주님의 종이긴 하였지만 그는 악하였고 게을렀으며, 주인에게 쓸모없는 종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한다. 그분은 선한 분이요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에게 달란트를 맡겨 주신 그분의 기대에 부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죽어서 더 바깥쪽의 어두움 안으로 쫓겨나고 말 것이다. 

 

5. 바깥 어두운 데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그렇다면, '더 바깥쪽의 어두움 안'에는 어떤 장소들이 있는가? 성경에 나오는 표현만 빌리자면, 그곳은 세 군데 정도로 확인이 된다.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장소들이 있을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성경에는 세 장소가 나온다. 첫째, 그냥 '더 바깥쪽의 어두움 안'이 있다(마8:11~12, 22:1~10, 25:26~30). 이것은 방금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유대인들이나 먼저 초청을 받았으나 거부한 자들이나 한 달란트 받았던 악하고 게으르고 쓸모없는 종이 들어가게 된다. 둘째, 제한받는 '더 바깥쪽의 어두움 안'이 있다(마22:11~13). 이곳에는 누가 들어가는가? 그것은 예복을 입지도 않았는데 새 예루살렘성 안에서 진행되는 혼인 잔치에 들어간 사람이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을 보니 손발이 묶여 있다. 왜 그런가? 이들은 죽은 후에 이미 심판을 받아 성 바깥으로 쫓겨난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성 안의 혼인 잔치에 나아간 것이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성의 문들은 항상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열려 있는 문을 통과하여 성 안의 영광의 광장까지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법이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겁없이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자 왕되신 주님께서 그의 손과 발을 묶어서 더 바깥쪽의 어둠 안의 제한받는 장소에 던져버린 것이다. 셋째, 형벌을 받는 '더 바깥쪽의 어두움 안'이 있다(마24:50~51). 이곳에는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악한 종이 들어간다. 그는 하늘에서부터 이미 자신의 사명을 받고 이 땅에 온 자다. 그런데도 그는 사명을 멀리한 채 세상 술친구들과 짝하여 먹고 마시는 일을 했다. 더욱이 믿음으로 살려는 동료 종들을 때렸던 자다. 그러자 주님께서도 이러한 자들은 엄히 때리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외식하는 자(위선자)가 받는 벌을 받게 하신다고 하셨다. 그는 더 바깥쪽의 어두움 안에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는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도 주의 일을 미룬 채 세상을 즐기는 일에 취하였기 때문이다. 

 

6. 영영한 불이나 불못, 불구덩이에는 누가 들어가는가?

  이제는 마지막으로 지옥의 맨 바깥 부분으로서, 사람이 죽으면 밑으로 뚝 떨어지면서 들어가는 불타는 장소가 있다. 이곳에 타오르는 불을 마태복음에서는 '풀무불(불의 구덩이)'이라고도 하고(마13:42,50), '영영한 불'이라고 한다(마25:41).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곳을 '유황이 타는 불타는 연못(계21:8)' 곧 '유황 불못'이라고 한다. 이곳에 들어간 자는 거기에서 아주 끔찍한 형벌을 받는다. 그리하여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럼 대체 누가 이러한 끔찍한 장소에 들어가게 되는가? 첫째, 다른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자나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들어간다(마13:41~43). 이들은 아마도 교회 안에 속해 있기는 하였지만 가라지였을 것이다. 그렇다. 남을 실족하게 하거나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고 멸시하는 자는 반드시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둘째, 의인들 중에서 악인들이 간다(마13:47~50). 주님은 마지막 날이 되면 의인들이라 지칭되는 성도들 중에서 악인을 갈라낼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무가치한 사람들이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골라 먼저 불못에 보내는 것이다. 셋째,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 등장하는 '염소들'이 이곳에 들어갈 것이다(마25:40~46). 이는 불타는 이곳에 떨어져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넷째, 주님을 믿었지만 비겁하게 주님을 부인한 자와 믿지 않는 자와 가증한 자들 그리고 십계명을 어겨서 살인하고, 간음하고, 점치고, 우상 숭배하고, 거짓말하는 자들이 이곳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계21:8).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째, 짐승(적그리스도)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들의 이마 혹은 손에 표를 받게 되는 자들이 이곳에 들어갈 것이다(계14:9~11). 그곳은 불과 유황으로 인한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장소다. 

 

7. 나오며

  누가 과연 그날 심판을 받은 후에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인가? 그들은 상당수가 불신자이겠지만 그들 중에는 신자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왜냐하면 믿는 자라 할지라도 그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생명책에서 지워지게 되면 그냥 성 밖으로 내쫓겨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가 되었으면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혹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해가 지기 전에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하늘에 있는 행위책에 자신의 죄목이 기록되지 아니 한다.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도 행하지 않고 게을러서 일하지 아니하는 자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믿고도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반드시 더 바깥쪽 어두움 안으로 쫓겨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는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아무 이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믿는 자라도 우상을 숭배하면 그도 불못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자를 비롯하여 음행하는 자, 살인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도 역시 불타는 지옥이 그의 최종 운명의 장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가 주어져 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기업을 준비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신분과 상을 준비하게끔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도 들어가는 자의 신분과 상이 각각 다르듯이, 지옥에서도 죄의 경중의 차이에 따라 지옥이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불타는 지옥에 결단코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천국에 들어가서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물려받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회개하라. 그리고 주님께서 자기에게 맡겨 주신 일에 순종하고 충성해야 한다. 

 

 

2022년 03월 06일(주일)

정병진목사

 

이 시대에 과연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인가? 이 표현은 사회적인 약자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다른 이를 지칭하는 것인가? 많은 이들은 혼란스러워한다. 왜냐하면 마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따르면, 지극히 작은 자를 돕지 않는 자들이 그만 심판 후 염소가 되어 영영한 불에 던져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말씀은 믿음으로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행함이 없다면 죽은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인가? 대체 누구를 돌아보아야 우리도 양이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곳에서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인가?

 

2022-03-06(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천국복음(13) 회개와 천국복음 관점에서 보는 양과 염소의 비유(마25:31~46)_2022-03-06(주일)

https://youtu.be/tg4-DdYGl1A [혹은 https://tv.naver.com/v/25536608 ]

 

1. 들어가며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천국에 관한 3가지 비유가 나온다.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가 그것이다. 이것들 중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는 어떤 비유인가? 이 비유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있게 될 그리스도인들의 심판에 관한 비유이다. 그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휴거되어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좌우로 갈리어 오른편 양의 자리에 있는 자는 영생의 세계에 들어가고, 왼편 염소의 자리에 있는 자는 영벌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이 둘을 서로 다른 곳으로 가게 만들었다는 말인가? 왜 그리스도인들은 양과 염소로 나뉘게 되는가?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양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마지막 시대, 교회에게 주신 사명은 대체 무엇인가? 오늘은 이러한 것들을 회개와 천국복음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2. 구원 및 천국에 관한 일반적인 궁금증은 무엇인가?

  '양과 염소의 비유(마25:31~46)'는 일반적으로 어떻게 알려져 있는가? 그것은 '양'은 믿는 신자들을 가리키고, '염소'는 불신자들을 가리키며, '지극히 작은 자'는 사회적 약자들을 가리킨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과연 예수만 믿으면 어떠한 선한 행위를 하지 않아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러나 이것이 백 퍼센트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구원의 최소 조건은 '믿음'과 '회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충분조건은 '믿음'과 '회개' 그리고 '충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그가 선행을 하고 구제하면서 약자를 돕고 있으면 그는 천국에 들어가며 천국을 기업으로 차지할 수 있는가? 그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지 못해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있지 않은 자, 그리고 회개하여 자신의 죄를 씻어 내지 못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인 구원관을 가져야 한다. 그 말씀을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있다. 그러하면 바른 구원론, 바른 천국관이란 어떤 것인가?

 

3.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과 '염소'는 누구를 지칭하는가?

  양과 염소의 비유는 심판에 관한 말씀으로서, 장차 천국에 누가 들어갈지를 가르쳐 주는 비유 말씀이다. 이 비유는 천국에 들어가면 누가 하늘의 왕국을 기업으로 상속받을 것이며 누가 영영한 불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인지를 알려 준다. 그렇다면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과 '염소'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먼저, 단어의 개념 정의부터 살펴보자. 이 비유에 등장하는 '양'은 '어린양(헬라어 '아르니온')'이 아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양은 다 자란 양을 가리키는 '프로바톤'이다. 다시 말해 이 양은 성숙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염소'는 어떠한가? 여기에 나오는 '염소'는 헬라어로 '에리포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염소들 중에서 '염소 새끼'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양과 염소는 다 자란 양과 어린 염소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비슷하여 알아보기 어렵다는 것을 함유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지 말라.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는 그날에 이 둘은 서로 쫙 갈라지게 될 것이다. 

  그럼, 예수께서는 어떤 사람을 '양'이라고 표현하셨는가? 먼저 양은 심판 때에 예수님의 보좌 오른편에 서게 될 자로서, 창세로부터 준비된 채 있는 왕국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주님은 그들을 '의인들'이라고 칭하셨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행함으로써 그들이 가진 믿음이 증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심판 후에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염소'는 어떤 사람인가? 염소는 예수님의 보좌 왼편에 서게 될 자들로서, 영원한 불에 들어갈 저주를 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이 증명되지 못한 자들로서, 끝까지 자신의 운명이 지옥이 될 것인지를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결국은 영원한 불 속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4. 양과 염소는 어디에서 차이가 나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양과 염소의 차이를 낳게 했는가? 그것은 이들이 '지극히 작은 자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있다. 지극히 작은 자들로 언급하고 있는 6가지 종류의 사람들 곧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를 그들이 어떻게 대했는가에 따라서, 양과 염소로 갈리게 된 것이다. 양의 자리에 있게 된 사람들은 이들을 돌보아준 자들이며, 염소에 속한 자들은 이들을 돌아보지 않았던 자들이다. 양의 자리에 있던 자들은 그것이 자신이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염소의 자리에 있던 자들은 그들을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 줄 알았으면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겼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가 섬길 대상을 가리어서 섬겼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생색내고 자기 이름이 높여지고 명망을 얻게 되는 일에는 자신의 물질을 썼지만 지극히 작은 자들이라고 일컫는 자들에게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던 자들이다.

 

5. 여섯 가지 종류의 가장 작은 자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여섯 가지 종류의 지극히 작은 자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성경에 따르면, 이들에 대하여 구약적인 견해가 있으며, 신약적인 견해가 있다. 구약적인 관점에서 이들을 보면 '지극히 작은 자들'은 사회적인 약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에 대한 구약적인 견해는 이렇다. 구약시대 여호와께서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바로 이러한 자들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이들을 불쌍히 여겨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곡식을 벨 때에는 이삭을 조금 떨어뜨려 놓으라고 하셨고, 감람나무의 열매를 딴 후에는 다시 가서 살피지 말라고 하셨으며,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도 다시 가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조금 남겨두라고 하셨다(신24:19~21). 이것이 율법이다. 또한 시편에서도 여호와께서는 당신 자신을 나그네들(객들)을 보호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붙들어 주시는 분이라고 하셨다(시149:9).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객과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그들의 송사를 굽게 하지 말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당신의 백성 곧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 있을 때에 나그네(객)로 있었기 때문이다(신10:19).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주인이 아니라 종으로 살고 있었고, 자국민이 아니라 나그네(객)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심으로 그들을 이끌어 내어 주셨던 것처럼, 사회적인 약자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인 약자들을 회개와 천국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사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가 생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이다. 그럼 왜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하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고로 사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받게 된 것을 고치려면 단지 식량과 의복을 공급해 주는 것으로 부족하다. 그들로 하여금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케 하여 질병과 가난과 자녀의 앞길을 막는 악한 영들을 떠나가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 그들의 삶은 버겁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선적으로 그들을 물질적으로 도우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에게 우선적으로는 의식주를 공급해 주는 일을 해야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저주로부터 해방을 받는 회개를 하도록 가르쳐 주어야 한다. 

 

6. 신약적인 관점에서 즉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지극히 작은 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둘째, 신약적인 관점에서 이들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즉 예수께서는 이들이 누구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우리는 성경 말씀의 워딩 자체를 잘 살펴야 한다. 한 글자도 빼거나 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 예수께서는 이들을 누구라고 말씀하셨는가? 그건 40절에 나온다. 마태복음 25:40절에 보면, 이들은 '이 내 형제들(these my brethren) 중의 가장 작은 자들(the least)'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그냥 '지극히 작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 앞에 '이 내 형제들'중에 가장 작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럼 이들은 누구인가? 먼저 첫째로, 주님께서는 이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하셨다. 그럼, 주님의 형제들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그냥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인가? 아니다. 예수께서 '내 형제들'이라고 하실 때에, 자신의 육신의 형제들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다. 언젠가 주님께서는 "누가 내 형제들이요 모친이냐?"고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형제들이요 자매들이요 모친"이라고 하셨다(마12:48~50).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요20:17)" 그렇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지 않는 자를 '내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만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비록 혈육으로 형제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예수님에게 그는 '내 형제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주님은 이들을 '이(these)' 내 형제들이라고 하셨다. 이는 지금 주님 가까이에 있는 자들이 그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지금 예수님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영의 눈으로 영적 세계에 들어가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천국에 들어갈 때에 충분조건으로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결코 주님 가까이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고로 '이 내 형제들'은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주님 가까이에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믿고 회개하였으며 그리고 충성한 자였다. 이러한 성도들이 아니라면 그들은 결코 주님 가까이에 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이들은 거기에 있는 양들이라면 그들 중에서도 주님 보좌 가까이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들은 주님 재림시에 이미 천국에 들어가서 왕 노릇하고 있던 자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천사들만 대동하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살전3:13).

 

7. 회개와 천국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이 내 형제들'을 회개와 천국복음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기는 들어가되, 충분조건으로 들어간 자들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럼, 왜 천국에 충분조건으로 들어간 사람들인데도, 주님은 그들을 '가장 작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죄를 지어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다가 더 좁은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좀 더 나아가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스스로 복음 전파의 길에 나선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 때문에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복음 때문에 이방 땅으로 가서 나그네로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복음 때문에 낙후된 곳에서 가서 복음을 전하다 보니 아프게 되어도 병원이 없어 고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복음 때문에 문화와 종교가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만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특히 주님께서 믿는 자들을 불러 올려 심판하시는 그 순간에도 남겨진 사명자가 이 세상에 있어, 낯선 나그네로 그대로 있을 것이고, 감옥에 갇힌 자도 있을 것이다. 왜냐햐면 주님께서 이들을 소개하실 때에는 미완료 문장으로 소개하셨기 때문이다. 

 

8. 양과 염소가 신자와 불신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고로 우리는 양과 염소가 신자와 불신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좁은 길을 선택한 자를 도와줄 리가 없을 터이고, 불신자가 기독교의 복음 전파를 위해 수고하는 이들을 도와줄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과 염소는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둘 다 주님의 형제들로서 지극히 작은 자들을 마땅히 도와야 할 위치에 있었던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수고와 노력과 어려움을 염소들은 그만 본체만체 한 것이다. 이들을 위해 자신의 돈과 물질을 써 봤자 자기에게 별로 돌아오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다. 그들을 돕는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명예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닌 것이니, 그들은 이들을 도와주지 않았던 것이다. 주님이 직접 오셔서 도와 달라고 했다고 하면 모를까하고 그들이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 사수와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희생하고 있는 이들을 도와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17~18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의 집 곧 교회에서 심판을 먼저 시작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과 죄인들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말씀한다. 그러면 불신자들과 죄인들은 훗날 천년 왕국 후에 백보좌 심판에서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먼저 그리스도인들만 하늘에 불려 올라가(휴거되어) 심판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두고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아가 각자가 선악간에 행한 대로 받는 일이라고 말했다(고후5:10).

 

9. 나오며 - 이 시대에 남겨진 마지막 사명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시대에 남겨진 마지막 사명은 대체 무엇인가? 지금 이 시대는 사실 마지막 추수의 시기다. 이제 천국문을 닫을 시간이 곧 올 것이다. 지금은 주님께서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시기다. 그러므로 자신을 천국에 들어갈 줄로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미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깨워야 할 때다. 그러므로 지금 전파해야 할 복음은 역시 천국복음이다.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고 어떻게 거기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되는지를 알려 주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해 주어야 한다. 이 천국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 주님께서 오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24:14). 그러므로 이 시대에 우리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우리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법이 되는 세상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갇히는 주의 종들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적그리스도가 표를 주어 그것이 없이는 매매를 하지 못하게 하는 시대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파도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때도 대비해야 한다. 고로 앞으로 세워질 '회개와 천국복음 연구소'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파할 자를 양성하는 일을 할 것이며, 이들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못 먹고 못 자고 못 입을 때에 그들을 돕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들을 치료해 주고, 이들이 감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는 사역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 마지막 시대를 향한 주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2022년 03월 06일(주일)

정병진목사

 

2022년도 3월 특별새벽집회("천국, 소망에서 이제는 실제로") 다섯째날(마지막날)입니다.

제목: 천국복음(12) 한 달란트 받았던 종, 그의 잘못은 정말 지옥 갈 죄였는가?(마25:23~30)_2022-03-04(금)

https://youtu.be/1mGBSD8oGrQ  [혹은 https://tv.naver.com/v/25470513 ]

 

1.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심판 후에 그가 간 최종적인 장소는 어디였는가?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심판 후에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영원히 거기에서 울부짖고 이빨을 갈게 될 것이다(마25:30). 그렇다면 그가 쫓겨난 '바깥 어두운 데'라는 장소는 대체 어떤 장소인가? 그가 쫓겨난 장소는 먼저는 '바깥쪽'이다. 그리고 또한 '어두운 곳'이다. 여기서 '바깥'이라는 말은 '외부'라는 뜻이다. 그곳은 마태복음 25:1~13에 나오는 열처녀의 비유 중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가 남겨진 바로 그곳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곳은 '문 밖'이라고 나온다(마25:10). 여기서 '문'은 신랑 집의 문이을 가리키며, 신랑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가리킨다. 고로 그의 집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혼인잔치가 벌어질 장소이므로, 그 곳은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바깥'이라는 말을 '새 예루살렘 성'의 바깥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해 준 바 있다(계22:15). 그리고 '어두운 장소'라는 말은 빛이 없는 장소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을 가리킨다. 결국 이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없어 어두운 곳이기에, 지옥의 한 켠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2. 심판 후 '바깥 어두운 데'는 누가 가는가?

  심판 후에 '바깥 어두운 데'에 들어가는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씀으로만 본다면, '바깥 어두운 데'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본다. 첫째, 그곳은 예복을 입지도 않은 채 새 예루살렘 성 안에 갔다가 쫓겨났던 자가 들어가는 장소다(마22:13). 이 사람은 원래 성 바깥에 있었다. 그런데 혼인잔치 중에 그곳에 들어간 자다. 사실 새 예루살렘 성은 12개의 진주문으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문은 전혀 닫혀 있지 않다. 그러니 그리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곳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자 나중에 그는 수족이 결박된 채 쫓겨났다. 그러나 그때부터는 더이상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손과 발이 묶인 채 내 던져지는 것이다. 둘째, 그곳은 신랑을 마중 나간 열 처녀 중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로서, 등은 준비했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이 들어가는 장소다(마25:10~11). 이 여인들은 주님과의 대면하여 만나는 그 날을 미리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과 대면하여 만나는 그날을 대비하여, 비싸더라도 댓가를 지불하면서 기름을 준비했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밖에 남겨진 것이다. 셋째,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쫓겨난 장소다(마25:3). 왜냐하면 이 종은 주님의 종인 종이었지만, 악하고 게으른 종이었고, 무익한(쓸모없는) 종이었기 때문이다. 

 

3. 바깥 어두운 데도 차이가 있는가?

  바깥 어두운 데도 차이가 있다. 그건 3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그냥 바깥 어두운 곳이라는 장소가 있다. 둘째, 바깥쪽 어두운 곳으로서 형벌을 받는 장소가 있다. 셋째, 맨 바깥쪽 아래에 유황 불못이라는 장소가 있다. 예를 들어, 미련한 다섯 처녀와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그냥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마22장에 나오는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잔치에 들어갔던 자는 수족이 결박된 채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던져졌다(마22:ㅣ11~14). 그리고 마24장에 나오는 악한 종은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이 처해지는" 그러한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났다(마24:51). 셋째, 가장 바깥 어두운 곳으로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이 따로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4. 왜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야 했는가?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난 이유는 무엇인가? 한 달란트 받았던 자가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난 이유는 3가지다. 첫째, 그가 악한 자였기 때문이다(마25:26). 그는 자신의 주인을 엄한(가혹한) 자로 거짓 증거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 게을러서 일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된 원인을 나쁜 주인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주인은 심지 않는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가혹한 주인이라고 증거했다. 그는 주인을 인색한 자로서 남의 노동력이나 재산을 착취하려고 하는 파렴치한 자로 매도하였다. 그는 주인을 악덕고대금업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주인은 그러한 주인이 아니었다. 그 주인은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떠나가면서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재산을 자신의 종들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다(마25:14,20,22). 그는 자비로운 분이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인을 아주 인색한 자로 치부했다. 거짓 말을 한 것이다. 둘째, 그는 게으른 자였기 때문이다(마25:26). 그는 자신이 게으르고 태만해서 일하기를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주인의 돈(달란트)를 받은 즉시 땅에 파묻었다. 그리고 주인이 올 때 고스란히 원금이라고 하면서 돌려주었다. 그러나 주인은 그 돈을 완전히 종들에게 넘겨준 것이었으므로, 도로 그것을 거두어서 주인에게 바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주인으로 돈으로 일하는 것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 돈으로 일하는데 열심을 내지 않았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셋째, 그는 쓸모없는 자였기 때문이다(마25:30). 그는 무익한 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나, 그 사람 자신을 위해서나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무데도 쓸모가 없는 자였다. 자기에게 맞는 분량의 달란트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일하지 않았으며 노력를 안 했으며, 아예 일을 시도하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주인의 기대를 부응하려고 하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는 주인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다. 그를 위해서 달란트를 준 것인데 그는 자신을 위해서 그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받은 돈은 상당한 금액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한 달란트를 받았다. 이는 노동자의 6,000일을 일해서 벌 수 있는 돈이었다(1달란트=6,000데나리온). 그러니 굳이 값으로 매기자면 그가 받은 돈은 노동자의 16년치의 품삯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돈을 묵혀두었다. 한 마디로 그는 주인이 기대하고 준 것을 아무데도 쓰지 않고 묵혀둠으로 그것을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게금 해 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다. 

 

5.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무슨 죄를 지었을길래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게 되었는가?

  그냥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의 행위만을 보면, 그는 죄를 안 지은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주인에게 한 달란트를 받아서 다시 주인에게 고스란히 한 달란트를 돌려주었기 때문이다. 고로 그가 주인에게 아무런 손해를  끼치지 않았으니 죄지은 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면에서 죄를 지은 자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십계명 중에서 제9계명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증거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거짓말을 지어서 말한 것이다. 그는 주인을 가혹한 분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마25:24). 사도 요한은 이런 자는 반드시 성 바깥에 남겨질 것이라고 했다(계22:15). 둘째, 그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죄를 지었다. 그것은 그가 속된 것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가증한 일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계21:27).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 21:27에서 누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지를 말씀해 주셨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죄를 지은 자라고 하셨다. 그것은 속된 것을 행하는 자요, 가증한 일을 행하는 자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라고 하셨다. 먼저, 그가 '속된 자'인 것은 그는 이 세상에 속한 가치만을 소중하게 여긴 채 하늘나라를 위해 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의 세상적인 일에만 몰두했을 뿐 영원한 천국과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노아의 홍수 때를 보라. 그때도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 마시고, 팔고 사고, 시집자고 장가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다 멸망을 받았다. 마찬가지다. 속된 일만을 행하는 자는 성 밖에 내버려진다. 둘째로, 그는 가증한 일을 행하고 있던 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정상적이지 않은 것을 정상적인 것일하고 속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일을 안 한 것이 정당하다고 말했다. 그는 주인이 가혹한 자이기 때문에 일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실은 그가 게을러서 일하지 않은 것을 주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다는 아니더라도 성소수자들의 사랑은 '인권'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은 '음란'의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기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경건생활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자기자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서, 가증한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주인이 인색한 사람이기에 일을 안했다고 말했지만, 실은 그가 게을려서 일을 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앞뒤를 뒤틀어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속된 것을 따라갔던 자라고 할 수 있으며, 가증한 일을 행한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거짓말을 만들어내서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성밖으로 내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2022년 03월 04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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