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도 3월 특별새벽집회("천국, 소망에서 이제는 실제로") 넷째날입니다.

제목: 천국복음(11) 천국입성의 세번째 조건, 충성이란 어떤 의미인가?(마25:14~30)_2022-03-03(목)

https://youtu.be/7EAknutRHW0  [혹은 https://tv.naver.com/v/25469989 ]

 

1. 천국입성의 실제적인 조건은 무엇인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은 최소조건은 2가지다. 하나는 '거듭남'이다(요3:5). 회심으로서의 회개와 믿음을 통해 모든 사람은 거듭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계속적인 '회개'다. 이것은 자백하는 회개를 가리킨다(요일1:9). 처음 예수 믿을 때에 이미 목욕을 했으니 그 이후부터는 발을 씻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충분조건으로 한 가지가 더 있다. 이것이 없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 있겠지만, 주님의 바라심은 충분조건을 채우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바로 '순종'과 '충성'이다. 둘을 하나로 합쳐서 '충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또한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이야말로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신분과 상급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천국의 입성조건은 충분조건으로 많이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을 상징하는 등 외에도 자신이 댓가를 지불하여 기름을 준비함이 필요하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에 혼인잔치의 예복이 될 것이며, 그곳에서의 신분과 상급이 될 것이다. 

 

2. 달란트의 비유는 왜 말씀하신 것인가?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달란트의 비유를 들려주신 것인가? 그것은 주님께서 언제 오실른지 모르니 깨어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날이 언제 올른지 아무도 모르니, 자칫 잘못하면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실 수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썩힐 수도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마24장에 나오는 "충성되고 악한 종"의 비유와 마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를 주신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하여, 주님 오시는 날 그분 앞에 어떤 사람으로 서야할른지를 늘 생각하고 그날을 준비하라고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이다. 

 

3. 주님으로부터 사역을 맡은 주의 종들에게 필요한 '순종'과 '충성'은 무엇 같으며 또한 어떻게 다른 것인가?

  주님으로부터 사역을 맡은 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하늘에서부터 이미 사명을 부여받고 이 땅에 파송받아 온 종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땅에서 자신의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달란트를 통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받은 종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둘 다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성실해야 하고 열심을 내야 한다. 하지만 둘은 소명을 맡은 것에 약간 차이가 있다. 이 둘의 차이를 비교한다면, '순종'과 '충성'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마24장의 종은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아예 사명을 부여받고 이 땅에 온 주의 종들이다. 이 종들은 자신이 받아서 이 땅에 온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야 천국에도 들어가게 될 것이고 이미 천국에 이미 준비된 채 있는 신분과 상도 받을 수가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종들이 100%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인지라 그에게도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달란트를 받은 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에 충성해야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으며, 새롭게 그에게 부여될 신분과 상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먼저 2가지를 살펴보면 이렇다. 첫째는, 소명을 하늘에서 받았느냐 아니면 이 땅에서 달란트로 받았느냐의 차이가 그것이다. 마24장의 종은 하늘에서 소명을 받고 이 땅에 온 자이다. 하지만 마25장의 종은 이 땅에서 달란트로 소명을 받은 자인 것이다. 둘째는, 마24장의 종은 하늘에서부터 복이 결정되어 있지만, 순종하지 않았을 때에는 벌이 중하다는 것이다. 이 종은 하늘에서부터 이미 보좌자리가 준비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성실하게 순종했을 때에는 주인이 그에게 주인의 모든 소유를 맡긴다고 하였으니(마24:47)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자가 된다. 그렇지만 인간인지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날 뿐만 아니라 심한 형벌까지 받게 된다. 채찍으로 맞게 될 것이고, 외식하는 자들이 받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마24:51). 그런데 마25장의 종은 충성하면 그에게 많은 상이 주어질 것이다(마25:21,23). 그러나 만약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묵혀두고 사용하지 않았을 때에는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게 될 것이다(마25:30). 

 

4. 순종과 충성의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주님의 종들이 사실 '순종'하는 것과 그리고 '충성'하는 것은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은 강조점에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순종하는 것이 대부분 오늘날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주의 종들이 해야 할 일이라면, 충성하는 것은 오늘날 평신도들이 자신의 달란트와 은사에 따라 교회와 복음전파를 위해 헌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24장의 '순종의 종'과 마25장의 '충성의 종'은 또 어떤 다른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셋째로, 그것은 다른 사람의 유익이 우선인가 아니면 자신의 유익이 우선이냐 하는 것에 있다. 즉 순종의 종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오직 다른 사람(특히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자다(마24:45). 그러나 충성의 종은 모든 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며 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성하는 자는 자신이 받은 달란트가 왜 자신에게 주어졌는지를 늘 묻는다. 그리고 스스로 그 책임을 깨닫고 그것에 충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결과는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된다. 즉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가 가서 열심히 일하여 남겼던 다섯 달란트는 모두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충성하면 그 남은 결과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넷째로, 그것이 의무적인가 아니면 자율적인가 하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아무래도 하늘에서부터 구체적인 사명을 지시받고 온 자는 자율적이지 못하다. 자신이 받아가지고 온 그것에 충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재량권이 그에게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이 받은 구체적인 그 사명에만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달란트를 받은 자는 다르다. 그에게 주인은 달란트만을 맡겼을 뿐이다.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지시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본인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재량권이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든지 그것은 종의 선택사항이다. 중요한 것은 왜 지금 내가 내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이 능력과 재주를 물려받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달란트라 할지라도, 실은 자신을 어머니의 태중에 보내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렇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부터 받은 달란트를 보다 더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마25장의 종으로 부름받은 자인 것이다. 

 

5. 충성이란 어떤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충성'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에 대한 성실함과 열심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특별히 마25장의 종의 비유를 통해서 정의해보면, 스스로 주인의 기대와 바람을 알고서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재능, 재주, 능력)을 열심히 사용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성하는 자는 자신이 부여받은 능력을 아주 무거운 책임감으로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묵혀두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남김으로써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성하는 자는 항상 자신의 달란트를 가지고 오늘도 최선을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기회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를 늘 살핀다. 그리고 그것을 언제 그리고 어떻게 써야 할른지 잘 가늠하여 적재적소에 그것을 배치한다. 그러나 악하고 게으른 종은 이와는 정반대로 살아간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를 묵혀두고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주인의 기대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를 쓰되 자신의 육체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그것에 사용하지않고 그러한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자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전혀 일하지는 않는 게으른 자가 바로 게으른 종인 것이다. 그럼 지금 나는 어떠한가? 과연 나는 하나님에게 충성된 종으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게으른 종으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2022년 03월 03일(목)

정병진목사

 

2022년도 3월 특별새벽집회("천국, 소망에서 이제는 실제로") 셋째날입니다.

제목: 천국복음(10) 달란트의 비유, 순종의 비유인가 충성의 비유인가?(마25:14~30)_2022-03-02(수)

https://youtu.be/5Zv9DkRJoag  [혹은 https://tv.naver.com/v/25469494 ]

 

1. 달란트의 비유는 왜 열 처녀의 비유 다음에 주어진 것인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마25:14~30)는 '열 처녀의 비유'(마25:1~13) 다음에 나온다.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또"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왜냐하면~"이라는 말이다. 이는 앞 문장의 결론 부분인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 '달란트의 비유'를 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것이 곧 기름을 준비하는 것인데, 만약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지를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알려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마태복음 24장에서 이미 주께서 하신 말씀을 더 구체화시킨 것이다. 즉 주님이 언제 오실른지 모르니 깨어서 준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충성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마24:44~45). 그래서 먼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열 처녀의 비유'(마25:1~13)를 말씀해주신 것이고, 이어서 '충성하는 것'에 대해서 알려주시기 위해 '달란트의 비유'(마25:14~30)를 말씀해주신 것이다. 

 

2. 천국은 사모하면 차지할 수 있는 것인가?

  천국은 사모하지 않는 자가 차지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사모한다고 해서 다 얻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 천국에서 우리가 누릴 면류관에 대해 사모하고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은 내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전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것이다. 게을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기름이 어찌 그냥 기름병에서 채워지겠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날 회개하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에 "아, 믿는 것으로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구나." 그러면서 "이제는 회개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회개하는 것이 없이는 결코 그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이다. 머리로는 회개해야지 하지만, 회개를 위해 댓가를 지불하지 않으면서 어찌 회개했다고 할 수가 있겠으며, 면류관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 면류관을 얻기 위해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는데 어찌 면류관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면 기름을 얻게 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달란트 비유'를 이어서 말씀해주신 것이다. 그것은 충성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 달란트의 비유는 충성하라는 비유인가 순종하라는 비유인가?

  우리는 달란트의 비유를 왜 주셨는지를 들었다. 그것은 충성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베푸신 비유인 것이었다. 그렇다. 천국에서 넉넉히 들어갈 뿐만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서도 높은 신분과 여러가지 면류관, 보다 더 앞쪽에 있는 보좌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열 처녀의 비유'로 말하면,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로 말하면 예복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충성해야 하는가? 둘 다 해야 한다. 둘 다 필요하다. 하지만 이 둘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충성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순종하는 것과 충성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순종하는 것이나 충성하는 것은 둘 다 게을러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요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해야 비로소 이것들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순종하는 것과 충성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과 악한 종의 비유"(마24:45~51)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에 나오는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마25:14~30)의 차이를 알 수 있다면 확실히 더 잘 알 수 있다. 주님은 똑같은 비유를 연거푸 하시지는 않으신다. 그러므로 둘 다 "충성된 종과 악한 종"에 관한 비유이지만 둘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차이가 바로 '순종하는 것'과 '충성하는 것'의 차이다. 결론적으로 먼저 말씀드리면,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비유는 '순종의 비유'라고 한다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비유는 '충성의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인가? 첫째, 어디에서부터 책임과 사명이 주어진 것이냐의 차이가 있다. 마24장의 비유는 이미 하늘에서부터 그에게 어떻게 하라고 지시가 내린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자를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라 부른다. 그러나 마25장의 비유는 이 땅에서 주님께서 그 사람의 능력을 따라 달란트를 맡겨주시고 천국에 돌아가셨는데 다시 오실 때까지 자신이 받은 달란트로 열심이 일하였던 자를 가리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24장의 종은 정확하게 자신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것은 "주인의 집 사람들을 맡아서 때를 따라서 양식을 나눠주는 것"이다(마24:45). 그것은 이미 하늘에서 이 땅에 영혼을 내려보내실 때 이미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부여안고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자는 많지는 않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위해 그 일을 행하신다. 그런데 마25장의 종은 이 땅에서 받은 능력으로 일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자신의 조상들이 물려준 것에는 좋은 것도 있겠지만 나쁜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왜 나에게 이러한 능력들이 왔는지를 스스로 깨닫고 이것을 어디에 써야 할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 달란트 받은 이들의 모습이다. 사실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지시받은 것은 없다. 단지, 능력만을 물려받는 것이다(물론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그러므로 '순종'이 좀 의무성이 강한 것이라면, '충성'은 좀 자발성이 강한 것이다. 

 

5. 순종과 충성의 두 번째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순종'과 '충성'의 두 번째 차이는 '복과 형벌'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먼저 첫째로, 순종을 잘 한 이는 충성하는 이에 비해 상이 더 크다. 왜냐하면 사명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주인의 모든 것(소유)을 다 그에게 맡긴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마24:47). 그러나 달란트로 자기 재량껏 일하여 주인의 소유를 더 남긴 자는 "주인이 은 것으로 그에게 맡긴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마25:21,23). 사실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하늘에서 사명을 받고 온 자는 이미 하늘에서 그가 받을 예비되어 있다(물론 그렇다고 모두가 다 그 상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둘째로, 불순종한 이는 불충성하는 이에 비해 형벌이 세다. 사명을 받았으나 불순종하여 악하게 행동한 종이 받을 형벌은 참으로 가혹하다.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이라고 했다(마24:51).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자들이 휴황불못에 던져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불충성하는 종에 비해서는 더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불충성한 자 곧 한 달란트를 받았으나 그대로 가져왔던, 악하고 게으른 종은 예루살렘 성 바깥의 어두운 곳으로 내어쫓겨날 것이라고 했지만, 불순종헸던 자는 본인이 성 바깥쪽으로 쫓겨날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맞을 뿐만 아니라 외식하는 자가 받을 형벌까지 받을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마25:30). 그렇다. 하늘에서 사명을 받아서 이 땅에 온 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더 큰 상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불순종하면 더 강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자기의 부모로부터 능력을 물려받은 자는 충성하면 그에게 많은 상이 주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가 불충성했을 때에는 천국으로 지칭되는 새 예루살렘 성 안에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며, 성 바깥에 있는 더 어두운 곳으로 버려지게 될 것이다. 

 

2022년 03월 02일(수)

정병진목사

 

2022년도 3월 특별새벽집회("천국, 소망에서 이제는 실제로") 둘째날입니다.

제목: 천국복음(09) 천국 혼인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 참여할 수 있는가?(마22:1~14)_2022-03-01(화)

https://youtu.be/sggHXmA0LsI

 

1. 천국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마태복음에 나와있는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온다. 하나는 주님께서 천국 혼인잔치에 초청을 했어도 그것을 끝내 거절하는 자이다(마22:1~10). 이들은 천국 혼인잔치가 그렇게 중요한 잔치라는 것을 인지하고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기 밭으로 가보는 거이 더 중했고, 사업을 하여 돈을 버는 것이 더 중했다. 그리고 자기에게 초청장을 보낸 왕은 싫어했으며, 오히려 왕이 보낸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 비유는 마태복음 21장부터 시작된 것으로, 자신을 언약백성으로 여기고 있는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을 리킨다. 둘째는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이다(마22:11~14). 혼인 잔치의 피로연에 참석은 했으나 예복을 입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혼인잔치의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에서는 등은 가졌으나 기름을 준비하는 않은 자라고 말하고 있다(마25:1~13). 결국 구원으로 초청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끝내 거절하는 자는 결국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며,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준비를 하지 못한 자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2. 천국의 혼인잔치에는 누가 들어갈 수 있는가?

  그렇다면, 천국에 혼인잔치는 누가 참여할 수 있는가?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마22:1~14)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마25:1~13)에 따르면, 첫째는 비록 처음에 약속을 받은 것은 아닐지라도 주님의 초청에 누구든지 응하는 자가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의 2가지 비유 중에서 앞에 나오는 비유에 해당한다(마22;1~10). 여기에 보면, 처음부터 이 잔치에 참석하기로 약속을 받았던 자들이 나온다. 이들은 언약의 자손들인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실제 때가 이르러 혼인잔치에 초청을 했을 때 그들은 왕의 초청을 거절하고 만다. 그러자 왕은 이미 준비된 잔치인만큼 다른 사람을 그 잔치에 초청한다. 이들은 초대된 예정된 자들은 아니었지만, 길을 가다가 소식을 듣고서 기쁨으로 참여하게 된 자들이다. 그래서 약속이 없었던 이방인들도, 이때부터 천국의 혼인잔치에 공식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천국은 예수님 당시에 이미 다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마22:4). 천국에 들어갈 숫자가 이미 결정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자리를 거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혼인잔치 자리는 이제 이방인들에게로 향하여지게 된다. 그렇지만 누가 그 자리에 앉게 되든지 그 자리가 차게 되는 날,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다. 둘째는 누구나 그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지만 반드시 혼인잔치의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마22:11~14). 왜냐하면 어느 누구든지 혼인잔치의 예복을 입지 않은 채로 그 잔치 자리에 참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결혼잔치의 예복은 당사자가 준비하는 것은 맞지만 이 땅에서 신부될 자들이 준비한 기름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에서 주님께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예복을 입혀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혼인잔치의 예복이 입혀지는 것이다. 그녀가 어떤 기름을 준비했느냐에 따라 각가 다른 예복이 아주 멋스럽고 예쁘게 입혀지는 것이다(계19:7~8). 

 

3. 마22장에 나오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가 2개의 비유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는 한 개의 비유인가? 아니면 두 개의 비유인가? 헬라어 원문을 보면, 이 비유는 두 개의 비유가 합쳐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예수께서도 비유들(복수)를 말씀하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마22:1). 그러므로 마22:1~14의 비유 중에 앞의 비유는 "누가 초청받아 혼인잔치에 들어가는지에 관한 비유"이며(마22:1~10), 그리고 뒤의 비유는 피로연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 "혼인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다가 쫓겨난 사람의 비유"이다(마22:11~14). 그렇다면, 이것이 두 개의 비유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두 개의 비유들은 해당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와 시기가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마22장에 나오는 '앞의 비유'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왕이 신부들을 초청하고 있을 때의 사건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마22장의에 나오는'뒤의 비유'는 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잔치의 후반부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음식을 먹고 마실 때의 사건을 말하고 있다. 이때는 이미 초청하는 시간이 지난 후다. 즉 이때는 혼인잔치 중 축하순서가 끝나고 음식을 먹는 시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중간에 천국 문 앞에서 이뤄지는 선발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25:1~13에 있는 "열 처녀의 비유"인 것이다. 둘째, 두 개의 비유들은 왕이 부리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앞의 비유에서는 왕이 자신의 종들과 자신의 군대들을 보내고 있다. 여기서 왕이 보내는 종들과 군대는 다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왕이 두 번째로 자신의 종들을 보내는데, 먼저 앞서 보낸 종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세례요한을 가리키고, 나중에 또 다시 보낸 종들은 예수님의 12제자나 70명의 제자들 그리고 오순절 이후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역시 사람이기에 능욕을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죽임당하기까지 한(마22:6). 그리고 이들은 밭을 사고 사업하는 일에 바쁜데 그 일들은 다 이 땅에서 벌어지게 될 일이다. 하지만 뒤의 비유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 이미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이 혼인잔치의 후반부에서 음식을 먹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하인들에 의해 혼인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수족을 결박된 채 바깥 어두운데에 내던진다. 이때 등장하는 '하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섬기는 자들'이다. 이들은 헬라어로 '디아코노스'라는 말인데, 번역하면 '시중드는 자', '섬기는 자'로서 천사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이들은 앞의 비유와는 달리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두운데에 던지는 자들 곧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자들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람이 아니기에 앞의 비유처럼 능욕을 당하거나 죽임당하지 않는다. 

 

4. 천국의 혼인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인데도, 들어갈 수 있는가?

  천국의 혼인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입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름이 호명되지도 아니한 자가 예복을 입고 혼인잔치에 입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혼인잔치가 시작되는 싯점에서 혼인예복을 입지 않는 자들이 그곳에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은 마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속에 다 나온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신부는 결코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마25장에서는 '기름'을 '예복'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고로 마22장의 '예복'은 사실 마25장의 '기름'과 같아서, 예복을 가지지 않은 신부는 아예 처음부터 혼인식장에 입장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혼인예복을 입지도 않은 채 혼인잔치의 피로연에 참석한 이가 한 사람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러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일인가?

 

5. 천국에 혼인잔치에 옷도 혼인예복을 입지도 않은 채 들어갔던 사람의 정체는 무엇인가?

  마태복음에서는 '혼인잔치'의 비유가 딱 두 군대에서만 나온다. 하나는 '열 처녀의 비유'이며, 또 하나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혼인잔치의 전체적인 그림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마22장의 '앞에 나오는 비유'는 계속해서 신부를 천국으로 초청하는 시간에 일어난 사건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마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는 신부를 선발하는 시간에 일어난 사건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마22장의 '뒤에 나오는 비유'는 이제 혼인잔치의 순서 중에서 맨 마지막에 위치하는 피로연 때에 일어날 사건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아직도 피로연의 시간에, 어떻게 예복을 입지도 않은 사람이 거기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천국의 실제를 보고 오면 금방 알 수 있는 문제다. 왜냐하면 천국은 새 예루살렘 성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이 성의 문들은 낮이든지 밤이든지 항상 열려져 있는 문이기 때문이다(계21:25). 그러므로 추정컨데 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피로연에 참여했던 이는 성 바깥에 바로 뽀작 옆에 거주하고 있었던 사람인듯 싶다. 그런데 그에게 성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혼인예식은 매우 궁금한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잔치 시작 무렵에 사람들의 이름들이 호명될 때에는 들어가지 않고, 잔치가 끝나는 무렵인 피로연의 시간에 그곳에 살짝 들어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불법적인 것이고 합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이 땅에 살면서 등을 가지고 신랑을 마중나간 자에 속했지만 기름병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채 죽어서 그만 성밖에 남겨진 자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성의 문이 닫혀져 있지 않아서혼인잔치의 맨 마지막에 그리로 들어가본 것이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그를 일부러 그렇게 놔 두었지 않았나 싶다. 왜냐하면 그 친구를 통하여 천국에서는 기름준비하지 못한 자 곧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자는 절대 못 들어간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격도 못 갖춘 주제인데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함히 들어왔으니 그는 수족이 결박된 채로 더 바깥의 어두운 곳으로 던져져야 할 대상인 것이다. 어찌 주님을 위해 땀도 눈물도, 금식도, 헌신도, 수고와 충성도 하지 않았던 자가 감히 어떻게 성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그의 무모한 행동은 자신이 이전에 있던 위치보다 더 멀리 더 나쁜 곳으로 떨어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실 천국에 거주하는 시민들까지도 실은 자기 맘대로 다니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감히 예복도 입지 않은 채 혼인잔치의 피로연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샘플적으로 바깥 어두운데로 떨어지는 불쌍한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2022년 03월 01일(화)

정병진목사

 

 

2022년도 3월 특별새벽집회("천국, 소망에서 이제는 실제로") 첫째 날입니다.

제목: 천국복음(08)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두 종류의 사람들(마22:1~14)_2022-02-28(월)

https://youtu.be/gtGct9IbIKk  [혹은 https://tv.naver.com/v/25405830 ]

 

1. 천국에서 행해지는 '혼인잔치'란 어떤 행사를 가리키는가?

  사람이 개인적으로 죽거나 아니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천국에서는 천국에 입성하는 자들을 위한 축하행사가 열린다. 이것을 '혼인잔치('가모스')'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대부분 주님의 재림의 날에 있게 될 우주적인 '혼인잔치'로 소개되고 있다. 이 때 천국에 입성하는 신부들은 예수님께서 준비해 준 드레스(결혼예복)으로 입혀진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는 주님 앞에 나아가 각종 보석이 박힌 정장 옷을 입고 면류관을 받는다(물론 못받는 사람이 훨씬 더 많고 더 허다하다). 그리고 천국에 있는 자기의 천국집으로 안내된다. 그리고 참고로, 천국에서 성도들이 모여 예배할 때에는 각자가 자기의 보좌에 앉아서 예배드린다(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보좌 없이 서서 예배드린다). 예배 좌석은 144,000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인데, 총 70줄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에서 첫 번째에서 여섯 번째 줄까지는 왕노릇하는 자가 앉는다. 그런데 처음으로 돌아가서, 천국에 처음 들어갔을 때에 그가 축하받는 것이 곧 '혼인잔치'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곧 천국입성 환영식이 혼인잔치인 셈이다. 그때는 사람마다 입혀지는 옷이 다르며, 수놓아진 장식도 다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앞쪽으로 인도될수록 더 크게 환영을 받는다. 천사들의 빵파레와 아름다운 꽃가루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그때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혼인잔치의 실제 모습이다. 

 

2. 천국의 혼인잔치에는 과연 누가 들어가게 되는가?

  마태복음만의 기록을 보면, 혼인잔치는 딱 두 번 언급되고 있다. 한 번은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마25:1~13)에서 언급되고 있고, 또 한 번은 오늘 본문 말씀 곧 마태복음 22장의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언급된다(마22:1~14).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는 과연 누가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지 그리고 반대로 누가 참석할 수 없는지를 가르쳐준다. 그리고 마태복음 22장의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는 누가 먼저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되는지와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고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자가 누군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가? 먼저, 마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를 살펴보면, 등을 들고 기름병에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이 참여하게 된다(마25:10). 이들을 마태복음의 저자는 혼인잔치를 '준비한 자들'로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라고 언급한다. 그렇다. 이들은 처음부터 신랑과의 만남을 준비하였던 자들이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마중('휘판데시스') 나가는 것만 생각했지 그때 신랑과 어떤 만남을 가질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련한 다섯 처녀는 그날의 만남('아판데시스')을 위해 준비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혼인잔치하는 신랑의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문 밖에 버려진 처녀들이 된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성밖에 남겨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 22장의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는 누가 먼저 혼인잔치에 들어가는지를 말해주며(마22:1~10), 누가 혼인잔치에서 쫓겨나게 되는지도 함께 말해준다(마22:11~14). 

 

3.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준비했던 '기름'이란 대체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지난 '천국복음(06미련한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구분하는 2가지 기준은?(마25:1~13)'이라는 메시지를 통하여,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슬기로운 처녀가 들고 나갔던 '기름병'의 '기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배웠다. 이 기름의 용도는 꺼져가는 등불을 밝히는 용도만이 아니었음도 함께 배웠다. 만약 그 기름의 용도가 꺼져가는 등불을 밝히는 것이었다면 나중에 기름을 사와서 뒤늦게 도착한 미련한 다섯 처녀도 역시 혼인잔치에 들어갔어야 옳다. 하지만 신랑은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고로 우리는 기름이 등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용도로만 쓰인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때 기름은 꺼져가는 등불을 타오르게 하는 용도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기준이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자신이 죽기 전에 이 세상에 살았을 때에 준비한 기름만이 합당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댓가를 지불해서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죽은 후에 마련한 기름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기로운 처녀들이 처음부터 기름을 준비했던 이유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단지 신랑을 마중('휘판데시스') 나가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만났을 때에 주님과의 만남('아판데시스')을 위해 준비한 것임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랑과의 맞선에 신랑의 눈에 들게 하기 위한 용도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특히 그들이 기름병에 채운 기름의 종류와 양과 그리고 기름병의 숫자에 따라 천국에서 받을 상(면류관, 보좌자리, 천국집, 신분)이 달라진다는 것까지 배웠다. 그렇다. 기름은 신랑되신 주님을 만났을 때에 지참해야 할 혼인 예물과도 같은 것이었고, 신랑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사랑의 증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일생이 담긴 땀과 노력과 헌신과 수고의 결과들이었던 것이다. 

 

4. 마태복음 22:1~14에 나오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는 무엇 때문에 말씀하게 되었는가?

  마태복음 22:1~14에 나오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는 당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을 책망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들려주신 비유말씀이다. 이들은 세례요한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인 줄을 알았다. 하지만 회개를 외치는 그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2가지 비유를 통하여 그들이 현재 어떠한 종류의 사람들인지를 알려주셨다. 하나의 비유는 "두 아들의 비유(마21:28~31)"이며, 또 하나의 비유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21:33~46)"이다. 이 두 가지 비유는 마땅히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게 되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들 곧 이방인들이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경고의 비유들이다. 그래도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주님께서는 또 다시 '혼인잔치'에 관한 2가지 비유(마22:1~10과 11~14)의 말씀을 들어서 그들을 책망하셨다. 그것이 '바로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이다. 

 

5. 청한 사람들(초대받은 채 있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큰 길에서 발견되어 혼인잔치에 들어간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먼저 예수께서는 누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인지를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의 첫번째 비유(마22:1~10)를 통하여 말씀해 주셨다.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배설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왕'은 하나님을, '왕의 아들'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러자 왕은 일주일 정도 진행되는 혼인잔치에 미리 초대받은 채 있는 자들을 오라고 자신의 종들을 보낸다. 여기서 '종들'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세례요한을 가리키고, '초대받은 채 있는 자들'은 언약백성인 유대인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초대받은 채 있는 이들이 계속해서 오기를 원하지 않자, 왕은 또다시 다른 종들을 더 보낸다. 여기 또 다른 종들은 '예수님의 사도들과 제자들'일 것이다. 그때 왕은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황소들과 살진 짐승들을 도축하였고, 모든 것을 준비하였으니 혼인잔치에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들은 왕의 부름을 소홀히 여긴 채, 어떤 사람은 밭에 일하러 갔고, 어떤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갔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보낸 종들을 잡아서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왕이 노하여, 자신의 군대를 보내 그 살인한 자를 진멸하고 그들의 동네까지 불살라버리게 된다.  그리고는 그의 종들에게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초청받은 채 있는 사람들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시면서, 큰 길 출입구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대로 초청하여 데리고 오라고 한다. 그러자 혼인잔치에 손님들로 가득찼다는 이야기다. 결국 이 비유는 이미 초대받은 채 있는 유대인들과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혼인잔치에 상관이 없는 이방인들이 먼저 그 잔치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교훈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고 하겠다. 이는 아무리 먼저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본인이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 잔치자리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이 누가 되었든지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들이 받게 될 것임을 확실히 증거해준다. 그리고 이 예언의 말씀을 따라, 지금 시대는 촛대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에게 이미 옮겨진 상태에 있다. 왕이 노하여 살인자를 죽였던 때가 A.D.70년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마지막 시기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의 일부가 그리스도에게 돌아와 구원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아주 짧은 기간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이런 일로 인하여 돌감람나무인 우리 이방인들에게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아무나 다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내일 이 시간에 계속 말씀을 나누기 원한다. 

 

 

2022년 02월 28일(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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