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신부(28) [아가서강해(18] 나는 언제 주의 동산을 볼 수 있고 그 동산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아6:2~3)_2021-10-13(수)

https://youtu.be/xvujz2PaDqY [혹은  https://tv.naver.com/v/22938493  ]

 

1. 아가서가 말하는 핵심 키워드는 무엇인가?

  아가서가 말하는 핵심 키워드를 말하라고 한다면 보통은 '사랑', 혹은 '신부'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대답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가서를 좀 더 깊게 읽어보면 그것은 '동산'이라는 단어가 생각날 것이다. 왜냐하면 아가서에서 나오는 술람미 여인이 향하고 있는 것이 '동산'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솔로몬으로부터 동산을 소개받는다(아2:16).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동산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아6:2~3). 그리고 그녀는 그 동산 안에서 자기의 포도원을 만들어 여러 가지 열매를 얻게 된다(아7:10~13).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동산에 영원히 거주하는 자의 복을 받는다(아8:13). 이것이 아서의 핵심 줄거리이기 때문이다(아8:13). 그러므로 아가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산'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2. 아가서에서 '동산'은 어디에 존재하고 있을까?

  아가서에서 등장하고 있는 동산은 '솔로몬의 자기 동산'이다(아6:2). 이 동산은 호도(호두)모양으로 생겼기에 술람미 여인은 그 동산을 일컬어 '호도동산'이라고 불렀다(아6:11). 그런데 이 동산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그 장소가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다만 예루살렘에서 내려가다가 만날 수 있는 어떤 곳이라고 나온다(아6:2,11). 그런데 이 동산의 소유주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그는 바로 '솔로몬'이기 때문이다(아6:2, 4"16, 5:1). 솔로몬이 예루살렘 근처 어딘가에 자기의 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영적으로 잘 모르면, 우리는 이 동산을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동산으로 알고 찾아나설 것이다. 하지만 이 동산은 이 땅에 있는 눈에 보이는 동산이라기보다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공간을 가리키고 있다. 사실 예루살렘의 딸들은 예루살렘 성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곳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다만 소문을 듣고 양 떼를 치는 분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고만 말할 뿐이다(아1:8).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는 여인들 중에서 오직 술람미 여인만큼 그 동산을 보게 되고 그 동산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동산 안에 자기의 포도원을 만들게 된다. 대체 어떻게 되어서 오로지 술람미 여인만이 그 동산을 이렇게 보고, 체험하고 또한 소유하게 된 것인가?

 

3. 술람미 여인은 어떤 단계를 거쳐 동산에 영원히 거주하는 자가 되었는가?

  술람미 여인도 처음에는 포도원지기에 불과했었다. 그것도 솔로몬이 세를 준 좀 큰 포도원에서 의붓오빠들의 명령에 따라 포도원지기로 일하던 시골처녀였다. 하지만 어느날 그녀는 자신의 포도원을 보려고 나온, 그 포도원의 주인 곧 솔로몬 왕을 만나게 된다(아1:12). 솔로몬 왕이 가끔씩 그 포도원을 시찰하러 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둘은 서로 금방 자신의 단 하나의 유일한 짝이 서로인 것을 알아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둘만의 데이트가 시작되는데, 솔로몬은 그 여인을 잔치집('포도주의 집')으로 데려간다. 그래서 자신이 장차 그녀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할 것인지를 미리 알려준다. 그리고 나서 왕은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그때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이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런데 그녀가 보게 된 솔로몬은 늘 자기의 동산에서 양떼를 치고 있었다(아2:16). 그런데 그 시절만 해도 솔로몬은 백합화들 가운데서 양떼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솔로몬과 결혼하게 된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동산에 들어가게 된다(아4:16~5:1). 그런데 결혼 후 잠깐 신랑을 놓쳐버린 때가 있었는데, 그때에 비로소 그녀가 찾고 찾아서 찾아낸 솔로몬은 여전히 그 동산에서 양을 치고 있었다(아6:2~3). 그런데 그때 그녀가 본 솔로몬은 백합화 가운데 양떼만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에는 누군가에 의해 꺾여진 채 있는 백합화를 주워모으고 있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우리는 이 장면을 볼 때에, 솔로몬이 단순히 취미생활로 양 떼를 치는 것이 아닌가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에서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신 주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우리의 영원한 신랑되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하여 천국에서 주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살펴볼 수가 있다. 그곳에서 주님은 결코 놀거나 쉬시지 아니하신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만왕의 왕이 되시고 만주의 주가 되심은 그분의 직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지금도 온 우주 만물을 보존하고 운행하고 계신다. 그 중에서도 자기의 양 떼들을 돌보고 계신다. 여기서 "양 떼"라 함은 이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렇다. 주님은 천국에서 그냥 쉬시며 지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지금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을 사탄마귀와 귀신들로부터 지켜주시고 그들이천국에까지 안착할 수 있도록 양 떼들을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신부들을 박해하는 자들에 의해 고통받고 죽임당하고 있는 신부들의 영혼을 보시고 그들을 주워 자기의 가슴에 품으신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하늘에 준비된 특별마차를 보내 그들을 데려오게 하신다. 

  그러자 술람미 여인도 그것을 보면서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기 시작한다. 자기가 솔로몬왕의 신부가 된 것은 단지 고생 그만하고 놀며 살라고 예루살렘 성 안에 데려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자 술람미 여인도 신랑의 마음이 항상 머물러 있는 그 일을 시작한다. 결국 그녀도 여러 많은 열매들을 맺기 시작하게 되는데, 그 결과들을 보여주기 위해 신랑을 자기의 포도원으로 데려간다. 이것이 바로 아가서 7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그리고 아가서 8장에 가면, 그렇게 귀한 일을 행하고 있는 여인에게 큰 상을 내리신다. 그것은 바로 그녀에게 "너 동산에 거주하는 여인아"라고 불러주시고, 그녀로 하여금 하늘에 있는 주의 동산에서 영원히 거주하게 해 주신다(아8:13).

 

4. 술람미 여인은 어떻게 되어서 솔로몬의 동산을 보게 되었고 그곳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술람미 여인은 어떻게 되어서 그 동산을 보게 되었으며 또한 그곳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그들이 서로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표현이 아가서에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일종의 친밀감에 대한 표현이다. 이것은 솔로몬과 술람이 여인이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둘이 이제는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주님의 동산은 주님과 멀찍이 따라가는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결단코 아니다. 주님과 가까이 있는 자에게, 그분과 내가 한 마음이 된 자에게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 안으로 진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아가서는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라는 말로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다(아2:16, 6:3, 7:10). 이것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연애할 때부터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자 솔로몬은 그때에 그 동산을 그녀에게 보여주었고, 그리고 결혼 후에는 그곳에 데려간다. 그녀는 그때 그곳에서 그 동산에 무엇이 있는지까지도 다 파악하게 된다(아5:1).  

 

5. 신약성경 가운데 아가서의 말씀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책은 무엇인가?

  그런데 사실 주님과 나와의 친밀함을 강조하는 아가서의 말씀은 구약성경에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도 아가서와 거의 비슷한 책이 있기 때문이다. 그 책은 사복음서 가운데 있는데, 바로 '요한복음'이라는 책이다. 왜냐하면 아가서는 '요한복음'과 그 내용상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첫째, 요한복음은 아가서와 마찬가지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목자'로 소개하고 있다(요10:14). 그리고 성도들을 '양떼'로 소개하고 있으며, 그중에서 백합화 같은 신부들은 그분의 '친구'이자(요15:13~14)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다(요13:35, 15:8). 둘째, 솔로몬이 연애할 때 그녀를 데려갔던 '잔치집'('포도주의 집')은 이제 포도주의 의미를 알려준 가나 지방의 혼인잔치집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요2:1~11). 더불어 주의 동산에 있는 '꿀송이와 꿀'(먹는 '말씀'을 의미)과 '포도주와 젖'(마시는 '성령'을 의미)으로 가득차 있던 동산은 성만찬을 집행하셨던 '마가다락방'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나고, 몰약과 각종 향료로 인하여 향기가 가득했던 동산은 순전한 나드 옥합을 깨뜨렸던 '마리아의 집'(요12:3)과 몰약과 향품을 사두었던 여인들과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져온 니고데모의 모습(요19:39~40, 20:1)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후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 '동산지기'라고 불렀는데, 이는 예수께서 그 동산의 '동산지기'이신 것을 분명하게 알려준다(요20:15). 그리고 주님의 마음과 하나됨을 이루었던 술람미 여인이 결혼 이후 솔로몬의 동산에 자기의 포도원을 만들고 여러 가지 열매를 맺었던 것처럼, 주님께서도 부활 후 베드로를 따로 불러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신부들이 관심 가져야 할 것은 '양떼'라는 것을 말해준다(요21:15~17).

 

2021년 10월 13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신부(27) [아가서강해(17)] 만인 중 으뜸인 솔로몬이 자기 동산에서 하는 일과 그가 준비해 놓은 복(아6:1~13)_2021-10-12(화)

https://youtu.be/jZRbt9M3vxI  [혹은 https://tv.naver.com/v/22938294  ]

 

1. 술람미 여인은 예루살렘 딸들에게 자기의 남편 솔로몬을 어떻게 소개했는가?

  술람미 여인은 자기의 남편인 솔로몬을 10가지 항목을 가지고 소개한다(아5:11~16). 그런데 그이를 한 마디로 "희고도 붉어 만인 중에 으뜸이다(아5:10)"라고 말한다. 이는 그분은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므로 그분은 점이 없고 흠없는 분이지만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실 분인 것을 정확히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비록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이지만 그분은 만물 중에 가장 뛰어나신 분임을 분명히 말했다. 

 

2. 술람미 여인이 소개한 자기의 남편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어 술람미 여인은 자기의 남편을 머리에서 발까지 10가지 항목을 들어서 높인다(아5:11~16). 그런데 그녀가 한 말을 유심히 살펴보면, 신랑에게서 몇 가지 놀라운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그분은 영과 육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흠없이 완벽한 자라는 것이다. 둘째, 그분은 매우 위엄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분을 소개할 때에 황옥의 손, 청옥의 몸(배)이자 백향목 다리 그리고 대리석 기둥의 자기 남편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이다. 셋째, 그분은 금과 보석으로 단장하고 있는 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머리는 정금이며, 그분의 손은 황옥이며 황금 금반지를 차고 있었으며, 그분의 배는 청옥을 입혀 놓았고, 그분의 다리는 순금 받침에 화반석을 올려 놓은 듯 하였기 때문이다. 넷째, 특별하게 그분에게서 향기가 난다는 것이다. 그분의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풀언덕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입술은 빨간 백합화(아네모네)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생김새도 레바논의 향기 나는 백향목같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은 자기의 동산에서 일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그 동산에는 몰약과 향료들를 생산하는 나무와 꽃들이 즐비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분이 잡은 문고리마저도 묻어 나온 몰약이 떨어질 정도였다. 

 

3. 술람미 여인은 갑자기 사라진 솔로몬을 어디에서 발견했는가? 

  결혼 후 어느 날 술람미 여인은 밤늦게 들어오는 신랑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옷을 벗은 상태에 있었고 발도 씻은 깨끗한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늦은 밤에 신랑이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밤에 어찌 나가서 문을 열어 주겠느냐면서 신랑을 박대해 버린다. 그러자 신랑이 문틈으로 자기의 손을 내밀어보지만 문을 열지는 못한다. 그러자 그 장면을 본 신부가 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가서 문을 열어 보는데, 벌써 신랑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 그러자 신부가 신랑을 찾아나서기 시작했고, 결국에 그분을 찾게 된 장소는 솔로몬의 자기 동산이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갈 때에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장소, 그곳에 솔로몬의 자기 동산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술람미 여인도 솔로몬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분인지를 정확히 잘 알지 못했다. 단지 소문으로 들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술람미 여인이 그분에게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아1:7)" 그렇다. 그녀는 그분을 자기의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가 머무르고 있는 데를 잘 몰랐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양떼를 치는 곳을 좀 알려주세요. 그리고 날이 뜨거운 정오 때에는 어디에서 쉬고 있는지도 알려주세요." 나도 그곳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요 라고 말이다. 그렇다. 그녀도 예루살렘의 딸들처럼 초기에는 솔로몬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도 소문만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은 그분이 어딘가에서 양떼를 친다는 것이었다. 

 

4. 솔로몬이 자기 동산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었는가?

  술람미 여인이 어디론가 사라진 자신의 남편을 만난 곳은 어디였을까? 그것은 솔로몬의 자기 동산이었다(아6:2). 그런데 그 시각에도 솔로몬은 자기의 동산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것은 딱 2가지다. 하나는 그가 자신의 동산에서 양떼를 치고 있었다(아6:2~3). 그렇다. 솔로몬은 양떼에 아주 관심이 많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예루살렘 딸들도 실은 솔로몬이 어디에서 자신의 양떼를 치고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딸들 중에서 유일하게 오직 그녀만큼은 그 장소를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전에 그녀가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고 청혼을 받은 상태에 있을 때에 솔로몬이 그 장소에 대해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아2:16). 그리하여 그녀가 그곳에 가 보니 솔로몬은 이미 그곳에서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고 있었다. 이것을 영적으로 보면, 솔로몬은 하늘에 계신 우리 성도들의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므로, 그분이 비록 지금도 하늘에 계시지만 그분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자신의 양떼 곧 구원받을 성도들에게 관심을 많으신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양떼들을 거기서 치고 계셨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그곳에서 백합화를 거두어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아6:2).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그가 백합화를 '꺾고' 있었다고 번역해 놓았지만 이것은 잘 모르고 번역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 그분은 그 시각에 백합화를 거두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영적으로 볼 때 백합화는 주님의 사랑을 받고 더불어 주님을 사랑하는 술람미 여인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고로 '백합화'란 한 마디로 주님의 사랑받는 신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신부가 이 땅에서 핍박자들에 의해 죽임 당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꺾여진 백합화를 예수님은 자기의 가슴에 거두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동산에서 오늘도 눈물짓고 있는 우리 주님의 마음을 볼 수 있어야 진정한 신부가 되고 신부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이다. 

 

5. 솔로몬이 꺾여진 백합화를 위해 준비해 둔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어느 날 술람미 여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솔로몬의 동산으로 들어가게 된다(아6:11~12). 그런데 그녀가 들어갔던 그 동산의 모양은 호두 모양처럼 생겼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 동산의 이름을 '호두동산'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녀는 그 동산 안에 귀한 백성들을 위한 마차들(수레들)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귀한 백성'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보면, '암미나답'이다. 즉 '암미나답의 마차들'이 거기에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 마차들이 왜 그 동산에 준비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너무 일찍 꺾여진 백합화를 보시고는 주님께서 그들을 정중하게 모셔 오도록 준비해 놓은 하늘의 불수레들이라고 판단된다(엘리야도 이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런데 보통 천국의 백성이 죽으면 그 사람은 자신의 두 명의 수호천사들로부터 부축을 받고 천국에 입성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한 백성일 경우에는 주님께서 직접 명령을 내리신다. 그래서 그 사람을 영광스러운 황금 마차를 타고 천국에 들어오도록 배려하시는 것이다. 그러자 이 광경을 지켜보게 된 술람미 여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금방 깨닫는다. 그리고 그 일을 하나씩 하나씩 점차로 추진해 나간다. 그리하여 신랑에게 그 일의 결과를 보여 준다(아7:10~13). 이것은 다음 시간에 살펴볼 아가서 7장 이야기다. 

 

2021년 10월 12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신부(26) [아가서강해(16)]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해 잃어버린 주님,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아5:2~16)_2021-10-11(월)

https://youtu.be/8bdlLCTossw  [혹은 https://tv.naver.com/v/22937975 ]

 

1. 솔로몬과 결혼했던 술람미 여인은 어떻게 되어서 신랑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아가서 3:6~11의 말씀이 결혼식의 풍경을 묘사해 주고 있다면, 4:1~5:1의 말씀은 피로연 때 신랑이 자기 아내를 자랑하는 말이자(4:1~7), 결혼 당일 날 신부의 사랑스러움에 대한 감탄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아4:8~5:1). 왜냐하면 이 시기만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나의 신부'라고 칭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가서 5:2의 말씀은 결혼식 때가 조금 지난 싯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부터는 '신부'라는 호칭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신랑은 그녀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라고 했다(아5:2). 그런데 그때에 신랑은 밤 늦게가 되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러므로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자 신랑은 문을 열어 달라고 노크한다. 하지만 신부는 신랑을 외면한다. 핑계는 이러했다.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힐 수 있을까?(아5:3)" 그런데 이러한 신부의 반응은 신랑이 집에 늦게 들어온 것에 대한 섭섭함이었을까? 그런데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신랑이 밤늦게까지 이슬을 맞으며 늦게 집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건 신부가 싫어서 늦게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신부는 그때 즉각적으로 신랑에게 문을 열어 주어야 했다. 그런데 신부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문틈으로 손을 내밀었던 신랑은 그만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왜 신랑은 그 자리에서 급히 떠나야 했는가? 신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신랑의 부르심에 신부는 즉각 응답해야 함을 말해준다. 그렇지 않으면 이처럼 신랑의 임재를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신랑은 왜 또 갑자기 신부 곁을 떠나야 했는가?

  밤늦게 이슬과 함께 돌아온 신랑은 그만 또다시 신부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성경 주석가들은 그 이유를 두고, 신랑이 삐져서 떠나 버렸다고 주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말 신랑이 삐져서 신부 곁을 떠나 버린 것일까?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에 그저 생각나는 대로 해석해서는 아니 된다.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원문 성경대로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전후 문맥 상황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당시 사회 문화적인 관습까지도 살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성경에 나오는 비슷한 사례도 찾아보아야 한다. 때로는 어떤 것은 성령의 강권적인 조명하심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런데 신랑이 왜 새벽녘에 다시 그녀의 곁을 떠나야 했는지 제대로 알려주는 주석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이후 되어진 일들을 보면, 그때 신랑은 그녀가 미워서 떠나 버린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녀가 남편을 찾아내었을 때에 솔로몬은 자기의 동산에 있었고 그곳에서 양떼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꺾여진 백합화를 주워 모으고 있었다. 그렇다. 신랑이 밤늦도록 늦게 들어온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치는 양떼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선 그 문제를 처리하다가 오다보니 그만 집에 늦게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여 문을 열어 달라고 말하고 있을 때에, 또 양떼 혹은 백합화에 급박한 상황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다시 급히 그 자리를 떠나야 했던 것이다. 아마도 백합화로 묘사되고 있는 신부들에게 중차대한 일이 발생한 듯 보인다. 왜냐하면 아침에 신부가 신랑을 보았을 때에는 그가 자기 동산에서 이미 꺾여진 채 있는 백합화(신부)를 주워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지상에 있는 신부 중에 누가 그만 순교하는 상황이 아니었겠나 생각이 든다. 

 

3. 신랑의 임재를 잃어버린 신부가 자신의 신랑을 찾기 위해 첫 번째로 한 일은 무엇인가?

  갑자기 떠나가야 했던 신랑, 그러자 신부는 대충 숄을 걸쳐 입고 문밖을 나선다. 신랑을 찾기 위해서다. 그리고 큰 소리로 신랑을 부른다. 그런데 불러도 응답이 없다(아5:6). 자신의 부주의로 인하여 신랑을 놓쳐 버렸다고 생각한 신부는 더욱 애절하게 신랑을 부른다. 용서를 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신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혼자서 그것도 아무런 무장도 없이 그 늦은 밤에 성안을 두루 돌아다닌다. 신랑을 찾기 위해서다. 그러다가 그녀는 성안에서 순찰하는 자들에게 얻어맞기도 했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숄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그래도 그녀는 신랑을 찾겠다는 오직 일념으로 성안을 헤매고 다닌다. 그러다가 그녀가 생각한 것은 예루살렘 성안에 살고 있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부탁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탁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그녀가 끈질기게 기도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그녀의 기도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결혼식을 올리기 전 예비 신혼집에 있었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도 예비신랑을 보지 못했던 술람미 여인은 신랑을 만나기 위해 성안을 찾아헤맨다. 그때 그녀가 성안의 순찰자들을 만나지만 그들은 그녀에게 해코지를 하지 못한다. 자기가 찾는 대상이 누군기를 그들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신랑이 그녀에게 불쑥 나타난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볼 때 그녀는 초신자의 상황이었기에, 주님도 금방 응답하신 것이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솔로몬은 이미 법적으로 그녀의 남편의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는 교양생활 하듯이 기도해서는 아니 된다. 간절히 찾고 부르짖어야 한다(렘29:12~13). 그것이 이미 신자가 된 자들의 기도의 형태인 것이다. 

 

4. 내게 문제가 생겼을 때 다른 이들에게 중보 기도를 요청하는 것은 나에게 도움이 될까?

  오늘날 우리들도 역시 중요한 문제가 생기면 남에게 중보 기도를 부탁할 때가 종종 있다. 물론 누군가가 나의 문제를 놓고 중보기도해 준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자 유익한 일이다. 하지만 중보 기도의 효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중보기도는 아무나 해서 응답이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때 남편을 찾지 못했던 술람미 여인은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기도부탁을 한다. 그런데 그들은 어떠한 자들인가? 그들도 예수님의 신부가 되기 위해 예루살렘 성안으로 온 자들이다. 하지만 실제 신방 한 번 꾸려본 적이 없는 신부들이 그들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딸들은 솔로몬이 자기의 동산에 가 있을지라도 그 장소를 절대 찾아낼 수가 없다. 그들은 그렇나 장소가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할 때에는 나 자신보다 더 영성이 약한 자들에게 부탁하는 일은 삼가할 일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세계에서는 보다 더 높은 계급의 신부가 보다 더 낮은 신부에게 기도를 부탁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람미 여인이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중보 기도를 부탁했을 때, 그녀는 다음과 같은 2가지 측면에서 신랑을 찾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5. 잃어버린 신랑을 찾기 위해 신부에게 필요한 2가지 사항은 무엇인가?

  신부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잃어버린 신랑을 찾을 수 있는 2가지 방법을 비로소 터득하게 된다. 첫째, 그것은 잃어버린 신랑을 찾으려면 신부는 최소한 자신의 죄를 깨닫고 깊이 뉘우치는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아5:8).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녀는 자기의 신랑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매우 마음 아파했었다. 이는 그녀가 깊이 뉘우치고 반성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신랑을 찾지 못한 것 때문에 병이 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것은 그녀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정 회개의 눈물을 흘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녀가 회개하기 전에 그녀는 성안에서 어떤 일을 당해야 했는가? 그녀는 성안에서 순찰하는 자들과 성벽을 지키는 파숫꾼들에게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이들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활동하여 괴롭히는 악한 영들과 같다. 회개가 관건이다. 회개하고 신랑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원수의 영토에도 자신의 깃발을 꽂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잃어버린 신랑을 찾으려면 신랑이 누군지를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술람미 여인은 어떻게 했는가? 그녀는 무려 10가지나 되는 것으로 자기의 신랑을 자랑을 하고 선포를 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자랑했던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명의 사람들들 중에 뛰어나답니다(으뜸이랍니다)(아4:10)". 이것은 그녀가 맨 처음에 솔로몬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에 그를 고벨화 송이로 비유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적갈색의 고벨화는 흰색 바탕에 곧 자신은 죄가 없어 순결한 분이시지만, 바깥 쪽에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세마포를 입으신 분을 지칭하는 것처럼, 신랑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신랑이 어떤 존재인지 그때까지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 난관 가운데서도 신랑의 모습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자랑하되, 10가지로 나눠서 자랑한다. 그런데 그녀의 이러한 간증은 수많은 악한 영들을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2021년 10월 11일(월)

정병진목사

 

아가서는 참으로 심오한 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이 책 속에 들어가 보면 들어갈수록 주님의 마음이 만져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도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을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을 때부터 불려졌던 그녀의 호칭은 그녀가 솔로몬과 결혼한 후에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녀에게 최종적으로 붙여진 칭호가 한 가지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아가서에는 솔로몬이 그녀를 불렀던 총 7가지 호칭들이 나온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지금 나에게 어떤 호칭을 불러 사용하신다면 나는 어떤 칭호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2021-10-10(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신부(25) [아가서강해(15)] 아가서에 나오는 신부의 7가지 명칭(아2:10과 5:2과 8: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c9FwNA6r6Xo  [혹은 https://tv.naver.com/v/22937612  ]

 

1. 들어가며

  아가서는 참으로 심오한 책이다. 특히 이 책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가 누리게 될 영적 신분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놀라운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장차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으며, 천국에 들어가는 신부라 할지라도 그 신분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함께 살펴볼 수가 있다. 그런데 아가서에서는 장차 그리스도의 신부를 지칭하는 호칭이 무려 7가지가 발견된다. 그것도 신부가 성장하면서 그 호칭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아가서 전체에 나타난 신부의 호칭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신부의 호칭은 오직 신랑이 신부를 부르는 명칭만을 대상으로 하며, 신부에 대한 호칭이 달라짐에 따라 그녀가 어떤 성장과 변화를 겪고 있는지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다.

 

2. 아가서에 등장하는 신부의 호칭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아가서에서는 장차 솔로몬의 아내가 될 술람미 여인을 부르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호칭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이 여인을 다른 것과 비교하는 표현들도 간혹 있기도 한데 그것은 오늘 전하는 말씀에서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신부에 대해서 신랑이 하는 말들 가운데, 그녀를 일컬어 '바로의 병거의 준마'와 같다고 표현한 것이나(아1:9),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아2:2)'라고 표현한 것들은 제외할 것이다. 그리고 술람미 여인이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 말했던 것들도 제외할 것이다. 이를테면 '샤론의 수선화(장미)(=무궁화)', '골짜기의 백합화(=은방울꽃)' 등의 표현도 오늘 말씀에서는 제외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술람미 여인을 부르는 호칭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연기 기둥처럼 거친 들에서 오는 자(아3:6)',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아6:10)', '귀한 자의 딸(아7:1)' 등은 오늘 나누는 말씀에서 제외할 것이다. 다만 오늘 우리가 다룰 것은 오직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호칭하는 그 표현만을 다루려고 한다. 

  그렇다면,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어떻게 불렀을까? 아가서 1장부터 8장까지를 살펴보면, 솔로몬이 그녀에게 사용한 호칭들은 총 7가지였음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호칭이라 할지라도 그녀가 결혼하기 전에 솔로몬이 불렀던 호칭이 있는가 하면(물론 이러한 호칭은 결혼 후에도 계속 사용된다), 결혼 후에야 비로소 불려진 호칭도 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최종적인 호칭이 한 가지 더 있다. 그래서 구조상 셋, 셋,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결혼 전에 솔로몬이 그녀를 불렀던 호칭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첫째는 '나의 사랑', 둘째는 '나의 어여쁜 자', 셋째는 '나의 비둘기'가 있다. 그리고 솔로몬이 결혼 후에 그녀를 부른 호칭에도 3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나의 신부', 둘째는 '내 누이', 셋째는 '나의 완전한 자'가 있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호칭은 '동산에 거주하는 자'이다. 이제, 이러한 칭호들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이러한 호칭들을 통하여 나는 과연 어느 정도 성장하고 있는 신부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3. 결혼 전에 그녀에게 붙여진 3가지 호칭은 무엇인가?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과 결혼하기 전에 그녀를 3가지로 불렀다. 첫째, '나의 사랑'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이 칭호는 총 8차례 나온다(아1:9, 15, 2:10, 13, 4:1, 7, 5:2, 6:4). 그런데 이 표현이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라야'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친구', '동무', '동료'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표현을 영어 성경에서는 대부분 '나의 달링(my darling)'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가끔 '나의 친애하는 자(my dear one)'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친구나 동료이기는 한데, 사랑하는 친구를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결혼 전에 가장 많이 불렀던 호칭이다. 

  둘째, '나의 어여쁜 자'라고 불렀다(아2:10,13). 그런데 서술적인 의미로 그녀를 '어여쁘다'라고 한 것은 상당히 있다(아1:15, 4;1, 6:4). 여기서 '어여쁜'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야페'라는 단어인데, 이는 '맑다. 깨끗하다. 아름답다'라는 뜻을 가졌다. 영어로는 '나의 아름다운 자(my beatiful one)'라고 번역하고 있다. 아마도 그녀의 외모에서 풍기는 아름다움의 표현인 호칭인 것 같다. 

  셋째, 솔로몬은 그녀를 '나의 비둘기(my dove)'라고 칭했는데, 이는 그녀의 '순결'과 '정절'을 강조하는 호칭으로서, 아가서에서는 세 번 나온다(아2:4, 5:2, 6:9). 참고로 히브리어로 '비둘기'라는 단어는 '요나'이다. 특히 그녀의 순결은 비둘기의 눈으로 많이 표현되었다(1:15, 4:1, 5:12). 그만큼 그녀의 눈은 깨끗했고 한번 보면 빠지게 만드는 그러한 눈이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칭호를 통하여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결혼 전에 연애할 때에는 아주 사랑스러운 친구처럼 여겼고, 아름답게 생각했으며, 그리고 순결과 정절을 가진 여인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성도들 역시 주님 앞에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야 하며, 주님의 눈에 아름답게 보여야 함을 말해 준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은 주님께서 보실 때에 순결하며 정절을 지키는 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4. 결혼 후에 그녀에게 붙여졌던 3가지 호칭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결혼 후에 솔로몬은 그녀를 어떻게 불렀을까? 결혼 전과 마찬가지로 솔로몬은 그녀를 3가지로 칭했다. 그것은 '나의 신부', '나의 누이', '나의 완전한 자'이다. 먼저, 첫째로 솔로몬은 그녀와 결혼한 뒤에 가장 먼저 그녀를 '나의 신부(my  bride)'라고 불렀다. 이제 그녀와 갓 결혼한 신혼이기 때문에 솔로몬은 그녀를 '신부'라고 칭한 것이다. 이러한 칭호는 결혼 직후에만 불려진 칭호로서 아가서에는 여섯 번 나온다(4:8, 9, 10, 11, 12, 5:1). 그런데 우리가 결혼 후에 불려진 그녀의 칭호가 상당히 변화되어 있음을 여기서부터 감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결혼 전에는 그녀와 법적인 어떤 책임이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러니 지켜야 할 의무라는 것도 느슨할 수밖에 없지만, 결혼 후에는 어떤 법적인 효력이 시작되었기에, 그 용어도 무게가 있어 보인다. 사실 '신부(칼라흐)'라는 말은 동사 '칼랄'에서 왔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완성하다. 완전하게 하다.'이다. 그러므로 결혼이라는 관계는 사람이 어느 정도 성숙해지는 단계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니까 책임감도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솔로몬은 그녀를 '나의 누이[동생](my sister)'라고 다섯 번씩이나 불렀다(아4:9, 10, 12, 5:1, 2). 히브리어로는 '아호트(누이동생 혹은 자매)'라는 뜻이다. 이 명칭은 사실 '나의 신부'라는 칭호보다 훨씬 더 친밀하고 가까운 명칭이다. 왜냐하면 결혼 관계로 맺어진 부부라도 상당한 책임과 의무가 주어지는데, 이 호칭은 책임과 의무는 필수적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부부가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이지만 이 관계는 언제든지 서로 헤어질 수 있는 관계다. 하지만 가족 관계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서로를 떼어놓으려 한다고 해서 분리될 수 있는 그러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는 '독생자(외아들)'라고 불리셨다(요3:16). 그러나 그분이 죽고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 주신 뒤부터는 그분의 신분은 '맏아들'로 승격되셨다. 그러자 그때부터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의 동생들이라고 불리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를 공유하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결혼을 했다는 것은 상당히 친밀한 관계에 접어들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의 아내를 '나의 누이동생'이라고 불렀다. 이는 둘의 관계가 이제는 가족 관계처럼 돈독한 관계가 되었고 헤어질래야 헤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음을 말해 준다.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이고 그의 슬픔이 곧 나의 슬픔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과 결혼 후에 그녀를 가리켜 '나의 완전한 자(my flawless one)'라고 불렀다(아5:2, 6:9). 히브리어로는 '탐'이라는 단어가 쓰였다. 이것은 우리 말로 '흠없는, 완벽한, 결점이 없는, 얼룩이 없는'이라는 뜻을 가졌다. 그렇다. 결혼 후에 어느새 그녀는 신랑 솔로몬에게 '흠없이 완전한 자'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대체 어떻게 변하였길래 그녀는 솔로몬에게 '완전한 자'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녀가 결혼 후에 솔로몬의 동산에 들어가는 몇 안 되는 여자가 되었고, 솔로몬에게 그녀 자신이 잠근 동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결혼 전에 불렸던 술람미 여인의 호칭에서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결혼후에 불려졌던 그녀의 호칭이 나의 호칭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그것은 그냥 주어지지 아니하며, 댓가의 지불없이 불려지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단계에까지 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이 동산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깨닫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에 나도 동참하는 신부가 될 때라야 비로소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5. 그녀에게 붙여진 최종적인 호칭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솔로몬 그가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던 그녀에게 사용한 마지막 호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녀의 7번째 칭호로서, '동산에 거주하는 자'이다(아8:13). 이것은 단 한 번 사용된 용어이기는 하나 사실 가장 강력한 호칭이다. 왜냐하면 구원받는 사람의 최종적인 목표는 저 하늘에 있는 동산 곧 새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는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의 칭찬을 듣는 자가 되었고 또한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결국에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 실패한 자가 된다면 우리의 신앙은 실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의 최종적인 목표이자, 신부로서 가장 바라고 바라는 것에 우리가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분이 하늘에 마련해 놓으신 그분의 동산 안에 영원히 거주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나중에 또 살펴보겠지만,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다 새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채 있던 자라 할지라도 죽을 때에 그의 이름이 지워지는 자도 있다. 그는 그때 성밖으로 내어 쫓겨나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계21:27, 22:15).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불려져야 할 마지막 칭호는 역시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신부들에게 불려지는 마지막 칭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백합화 같고 비둘기 같은 신부에서 성장한 자에게 붙여지는 호칭이요, 원수의 영토에 깃발을 꽂을 수 있는 과정을 지나온 자에게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이다. 그래서 그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그분의 목표가 내 목표가 된 자에게 붙여질 수 있는 호칭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는 또 다른 신부를 낳고 양육하는 신부가 될 때 붙여질 수 있는 칭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주님은 우리가 자기만 구원하는 신부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도 구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신부들을 낳고 그들을 길러 내어서 그들을 장성한 분량으로 양육하는 신부가 되기를 바라신다. 

 

6. 나오며

  그렇다면 지금 나의 영적인 단계는 어디 만큼 와 있다고 보는가?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얼마든지 헤어질 수 있는 관계 정도인가 아니면 그분과 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서 엄청난 친밀도를 가지고 있는 상태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이미 주님과 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니다. 만약 자기가 그러한 관계에 들어간 자라고 말하려면, 그는 그분으로부터 이미 '완전한 자'라는 호칭으로 불려지고 있어야 한다. 특히 우리는 주님께서 영의 공간에 만들어 놓은 주님의 동산에 들어간 성도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척도는 역시 내가 과연 주님의 동산 안에 들어가고 있는 사람이 되었는가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주님의 동산에 들어간 자가 되지 못했다면 주님의 경륜을 만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주님의 동산 안에 들어간 상태라면, 우리는 그분이 지금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알게 될 것이며, 그분이 그 안에서 왜 가끔씩 우시고 있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서는 그분이 지금도 하늘에서 행하고 있는 그 일을 나 자신도 행하는 자가 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자가 될 때 우리도 하늘에 준비된 동산에서 영원히 거주하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아가서를 좀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 특히 솔로몬은 왜 그가 왕의 신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심사가 늘 자기의 동산에 가 있었으며 그곳에서 양떼를 돌보는 일이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이 자신의 동산에서 꺾여진 채 있는 백합화를 가슴에 부여안고 왜 눈물짓고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내 마음이 그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 나는 지금 그분에게 친구 같은 자인가? 아니면 가족 같은 자인가? 아니면 더 나아가 그분의 마음을 만진 바 되어 그분과 하나가 되어 있는 자인가? 자, 우리를 돌아보자. 그래서 이제는 하늘의 준비된 그분의 동산에서 영원히 거주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2021년 10월 10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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