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에는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이 나온다. 그런데 이들은 술람미 여인이 보이지 않는 솔로몬을 찾고자 할 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도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신랑을 찾는 술람미 여인을 공격하고 빼앗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원래 성안 사람들을 지키라고 그리고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라고 세워진 사람들일텐데, 왜 이들은 오히려 술람미 여인을 도와주지 못했는가? 대체 이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들은 천사들인가 사람들인가? 2021-10-25(월)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신부(40) 아가서강해(30)[최종회] 성안 순찰자와 성벽 파수꾼은 왜 술람미 여인을 도와주지 못했을까(아3:2~3,5:8)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v5urMsGcxaM [혹은 https://tv.naver.com/v/23166374 ]

 

1. 들어가며

  아가서의 말씀들은 사실 실제했던 사건을 기록한 것이지만 동시에 이 책에 등장인물과 배경들은 다 어떤 함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는 영적인 책이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을 사용해 좀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특히 아가서에 나오는 각종 나무와 꽃들 그리고 동물들과 숫자까지도 다 의미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등장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등장 인물들이 누군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들 중에는 "예루살렘의 딸들"로 지칭되는 '처녀들'이 있다. 그리고 솔로몬의 아내로서 왕후(왕비)와 비빈(후궁)과 시녀들도 등장한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이 예루살렘에 살 때에 만났던 사람들도 나온다. 그들은 바로 '성 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이다. 오늘은 이들이 과연 누구인지 왜 이들은 술람미 여인을 도와주지 않았거나 혹은 못했는지 그리고 나중에 이들은 왜 술람미 여인을 모욕하는 자들이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어떤 말씀을 들을 때에는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어떤 것은 우리의 과제와 기도제목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2. 술람미 여인이 청혼 후 임시로 거주했던 예루살렘 성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술람미 여인을 귀하게 본 솔로몬이 어느날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아2:10~14). 그리고 임시로 예루살렘 성 안에 머물게 한다(아3:1~3). 그런데 솔로몬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은 밤에 고민을 하다가 꿈 속에서 예비신랑인 솔로몬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그녀는 꿈 속에서도 솔로몬을 만나지 못한다. 이에 꿈에서 깨어난 술람미 여인은 그밤에 성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 솔로몬을 찾아서 거리들과 큰 광장들로 나간다. 하지만 또한 만나지 못한다. 그때 그녀는 성안에서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보았는지를 묻는다. 하지만 그들은 대답해주지 못한다. 그런데 그때 그들을 지나치자마자(사라지자마자) 솔로몬을 만나게 된다. 솔로몬이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은 솔로몬을 찾는데 도와주지 못했던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지나가자마자 왜 솔로몬이 그녀 앞에 문득 나타나게 된 것인가?

 

3. 결혼 후에 또 한 번 신랑을 잃어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가?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결혼 후에도 신랑을 한 번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아5:2~7). 그런데 이번에는 남편을 찾기가 예전의 경우보다 훨씬 힘들었다. 왜 그랬을까? 그 일은 어느날 밤에 일어났다. 그녀가 침소에 든지 오래 지난 시각이었다. 그런데 새벽녘이 되어서야 남편이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남편의 머리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핑계를 대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아마도 다른 여인의 품에 있다가 이제야 들어오느냐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핑계는 그녀가 옷을 벗은 상태였기 때문에 어찌 다시 입을 수 있겠으며, 발을 씻었는데 어찌 다시 더럽히겠느냐고 하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그의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손으로부터 몰약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아5:4~5,13). 그러나 그녀는 일어나서 자신의 남편을 위하여 문을 열어 준다. 그녀가 문빗장을 만졌을 때에 자신의 손에서도 남편에게서 나온난 몰약즙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이미 벌써 돌아가버리고 그 자리에 없는 상태였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곧장 남편을 찾아나선다. 하지만 만날 수 없었으며, 그를 불러보았지만 응답도 없었다. 그러자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밖으로 나가 찾아본다. 그리고 성안에서 또 다시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났는데, 이번에 그들은 그녀를 때려서 상하게 하고 가버렸다. 그리고 이어서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을 만났는데 그들도 역시 그녀의 겉옷을 벗겨서 가져가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남편을 찾을 수 있도록 하소연을 한다. 그러자 그들이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사랑하는 자가 다른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얼마나 희고도 붉은지 만인 중에 뛰어나다고 말했다(아5:10). 그리고 남편의 머리부터 다리까지 남편의 아름다움을 그들에게 들려주었다(아5:11~16). 그가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자요 자신의 친구라고 말이다. 그러자 예루살렘의 딸들도 그녀와 함께 그를 찾는 데에 도와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못가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그의 동산에서 만난다. 그는 이미 동산으로 돌아가 양떼를 먹이고 있었고 백합화를 줍고 있었다. 그럼, 왜 이번에 술람미 여인은 남편을 쉽게 만나지 못하고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가? 그리고 왜 성안 순찰자들과 성벽 파수꾼들에게 수모를 당해야 했는가? 

 

4. 두 번의 사건 속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2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그녀가 거주하던 '예루살렘'이 대체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녀가 나중에 신랑을 발견한 장소였던 바, 솔로몬이 양떼를 먹이고 있는 동산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둘째, 두 사건 속에 등장하는 성안의 순찰자들이 누구인지도 알아보아야 한다. 왜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은 그녀가 솔로몬을 찾는데 첫 번째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오히려 그녀를 때리고 그녀의 겉옷까지 빼앗아가는 일을 저지른 것인가? 

  먼저, 그녀가 처음에 남편을 찾았던 장소와 그리고 순찰자들을 만났던 장소가 어디였는지부터 정리해보자. 그곳은 "성안"이었다. 여기서 성이란 '예루살렘' 성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에서 왕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이란 왕이 거주하고 다스리는 도성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녀가 첫번 째의 경우에는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예비신랑을 만났지만, 나중에는 성안에서 그를 만나지 못했고 그의 동산에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 대한 영적인 해석을 할 때에 우리는 예루살렘 성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해석해야 한다. 어떤 이는 예루살렘 성은 '천국'을 의미한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은 남편의 임재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공간이었고, 신부가 성안의 순찰자들에게 모욕을 당할 수도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루살렘 성은 오늘날로 치자면 양과 염소가 혼재되어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지상에 있는 교회 안에도 계시지만 진정 주님이 계시는 공간은 주님이 일하는 일터 곧 자기 동산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은 교회 안에 계신다. 하지만 교회 전체가 다 거룩한 공간은 아니며,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신부를 위하는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녀가 두 번 다 솔로몬을 찾아나선 시간이 어느 때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둘 다 밤 시간이었다고 나온다. 그런데 아가서에서 밤 시간이란 두려움이 임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솔로몬도 결혼을 위하여 술람미 여인을 모셔오도록 자신의 가마를 보낼 때에 이스라엘의 용사 60명을 딸려보냈었다. 그 용사들은 다 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아3:7~8). 왜냐하면 그들도 밤의 두려움(위험)으로 인하여 각기 자기의 허리에 칼을 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 솔로몬이 가마를 지키라고 보낸 용사들은 누구인가? 우선은 솔로몬이 보낸 왕의 군사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좀 더 영적으로 들어간다면, 귀신들의 공격으로부터 신부인 술람미 여인을 보호하도록 주님이 보낸 천사들 곧 칼을 찬 수호천사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5. 두 번의 사건 속에 등장하는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제 우리는 오늘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본 시간이 되었다. 그럼 이들은 천사들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사람들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둘 다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먼저, 이들을 사탄마귀와 귀신들로 해석한다고 할지라도 무방한 해석이 된다. 왜냐하면 아가서에서는 기본적으로 짐승들 곧 포도밭을 허는 여우(아2:16)와 사자와 표범(아4:8)은 사탄마귀와 귀신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여우'는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왕'을 지칭할 때 사용한 표현이요(눅13:32), '사자'와 '표범'은 다니엘서 7장과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세상제국의 왕들을 가리키며, 그들의 실제는 그들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악한 영들(귀신들)을 가리키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무래도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고로 예루살렘의 딸들, 술람미 여인의 의붓오빠들, 그리고 성 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은 일차적으로는 그때 술람미 여인의 주변에 있던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술람미 여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나중에는 술람미 여인을 모욕하고 상처를 주고 겉옷까지 빼앗아갔던 성안의 순찰자들과 성벽의 파수꾼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2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사탄의 무리들"로 보는 견해다. 이렇게 해석하는 분은 히브리어 원어를 성경을 해석하는 체데크 성경원어 신학대학원장 송광현박사의 경우다("원어로 풀어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야기 아가서/체테크"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p.202.). 그리고 둘째는 교회를 지키도록 감독의 직분을 맡아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로 보는 견해다. 이러한 견해는 총신대를 졸업하시고 칼빈대와 총신대의 교수를 역임하신 하문호 박사가 주장했다("아가서"/도서출판 그리심. p.413). 하문호박사는 그 직분자를 오늘날 교회의 목사와 장로, 더 나아가서는 권사나 구역장이나 교사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상당히 새겨들어야 할 해석이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가장 방해하는 존재들이 바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호되게 지적하셨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마23:33~34).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두 천국에 들여보내야 할 자들이 오히려 천국문을 가로막고 있다고 책망하셨다(마23:13).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이 신랑을 만나는데 방해하고 해코지하고 모욕을 준 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일 수도 있다. 특히 여기서 '성안을 순찰하는 자들'은 성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자들로서 교회의 목회자와 지도자들 가리킬 수 있다. 그리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은 외부의 세력의 침입을 경고하는 자들로서, 신학자들이나 이단감별사들을 가리킬 수 있다. 사실 이들은 성도들을 지켜주어야 하고, 이들이 신랑되신 예수님을 찾아가는데 도움을 주어야 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방해꾼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혹시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이러한 지도자들이 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는 그분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모든 삶이 다 그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어느 목회자치고 자신의 양무리를 때리고 힘들게 하고 양떼들의 것을 갈취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십만분의 일이라도 그러한 일이 있다면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나를 인도하는 목회자가 예수님과 같은 선한 목자로서 양무리를 천국으로 잘 인도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이다. 

 

6. 나오며

  오늘 말씀은 정말 주의해서 들어야 할 말씀 중의 하나다. 잘못 설교했다가는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들을 비난하는 말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회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말씀만큼 새겨들어야 할 중요한 말씀은 또 없을 것이다. 예수님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하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자가 오히려 주님과의 만남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거나 오히려 주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정말 자신이 섬기고 있는 목회자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아무리 부족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영적인 부모님을 함부로 대해서는 아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말씀의 핵심사항이기 때문이다(계2:2~5). 그렇다. 목회자는 교회 안에서 성도를 지키고 보호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외부의 이단세력이나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방어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더욱이 목회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주 예수님을 만나게 도와주고 성도들로 하여금 천국에 잘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상적으로 집행되지 못했을 때에, 아가서의 말씀은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성도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목양하는 목자를 위해 기도해야 할 기도제목을 발견하는 순간이 된다. 그러면 술람미 여인으로 하여금 솔로몬을 만나는데 실제적으로 방해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사탄마귀와 귀신들이다. 이들이 배후에서 다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미워하려고 하지 말고 귀신들을 미워하라. 그리고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라. 이것이 성도들의 바른 삶인 것이다. 

 

2021년 10월 24일(주일)

정병진목사

 

 

오늘은 우리 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이다.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아가서의 말씀을 본다. 그렇다면 아가서에는 어떤 은혜와 감사가 들어있는 것일까? 우리는 술람미 여인을 통하여 '은혜'라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감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가 있다. 우리는 아가서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와 '감사'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정확히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감사가 나로만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도 이 말씀은 우리를 바른 길로 안내해준다. 2021-10-24(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신부(39) 아가서강해(29) 술람미 여인과 나 너 그리고 우리들(아1;2,4;6,7;10~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BSaSWgrk8eQ [혹은 https://tv.naver.com/v/23166811 ]

 

1. 들어가며

  추수감사절은 기독교의 명절이다. 명절은 아무래도 풍성한 음식이 있어야 하고 축하 순서가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명절 음식에는 빵과 포도주가 꼭 들어가며, 축하 순서에는 노래와 춤이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서 춤은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추수감사예배 때에는 떡과 음식이 준비되는 것이고 특별 순서가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명절의 핵심 요소는 사실 '감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 경우에 감사를 하게 되는가? 특별히 아가서에 기록된 말씀 중에서 우리는 술람미 여인을 통하여 어떤 감사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녀의 초기에 그녀에게서 '감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솔로몬을 만나게 되면서 그녀에게도 드디어 감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감사가 그녀의 생활이 되었다. 그렇다면 대체 그녀는 솔로몬을 만나 무슨 변화를 겪은 것인가? 오늘날 우리가 은혜를 받고 감사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를 겪어야 하는 것인가? 감사에 대한 놀라운 비밀이 오늘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다.

 

2. 아가서에서 술람미 여인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되었는가?

  아가서에 나오는 술람미 여인의 처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가서의 첫 시작은 그녀의 요청으로 시작되는데, 그것은 솔로몬이 그녀에게 입맞춰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가서 강해를 통해서 살펴보았지만 그녀의 요청은 실제 입맞춤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아가서 8:1에 보니, 그녀는 결혼한 후에도 쉽게 그와 입맞춤을 할 수 없다고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이 자기를 사랑해 주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솔로몬과 연애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녀가 점차 달라지기 시작한다. 결혼 전에 그녀는 오직 자기중심적으로 솔로몬이 다가오기를 원했다. 하지만 결혼한 후에 그녀의 관심은 이제 솔로몬의 것으로 향한다. 그래서 그가 일하고 있는 동산 곧 몰약 산과 유향의 산으로 그녀는 가겠노라고 결단을 한다(아4:6). 나 중심에서 너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한 번 솔로몬과의 갈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한 다음부터 그녀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것은 솔로몬이 하는 일을 계승하는 자 곧 그의 동역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자기중심적이었던 술람미 여인은 어떻게 되어서 솔로몬을 기쁘게 하는 삶 곧 이타적인 삶을 살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솔로몬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인가?

 

3. 술람미 여인을 달라지게 했던 세 가지 사건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처음에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던 술람미 여인은 대체 어떤 일을 겪으면서 이타적인 삶으로 바뀌게 된 것인가? 그것은 그녀에게 일어난 3가지 사건이 그 핵심에 있다. 첫째는 솔로몬이 그녀에게 다가온 사건 때문이었다. 사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이 가지고 있는 여러 포도밭 중 하나를 세로 받아서 그것을 경작하고 있는 시골 처녀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느 날 왕궁에 있어야 할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있는 그 포도원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비로소 솔로몬을 만나게 된다. 나중에는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아내가 되는데, 그녀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술람미 여인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왕이 자신의 보좌에서 내려왔고 또한 포도원을 방문한 사건으로 인하여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연애 시절에 솔로몬이 그녀를 데리고 간 잔치집 때문이었다. 보좌에서 내려와 시골에 도착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연애를 시작한다. 그런데 연애 시절에 솔로몬은 딱 한 번 그녀를 어떤 장소에 데리고 간다. 그런데 그곳은 잔치집이었다(아2:4). 하지만 잔치집에서 그가 그녀에게 보여준 것은 그의 사랑의 깃발이었다. 그것은 그가 장차 어떻게 그녀를 사랑할 것인지를 예시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실제는 '잔치집'이 이나라 정확히는 '포도주의 집'이었다. 그렇다면 왜 솔로몬은 그녀를 포도주의 집으로 데려간 것일까? 그것은 아가서의 해설서인 요한복음을 알면 금방 이해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장에 보니, 잔치집이 등장하고 거기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사건이 나오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포도주는 장차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고귀한 피를 의미한다(요2:3~4). 그렇다. 솔로몬이 그날 그녀를 데려간 장소와 그가 그녀에게 보여 준 사랑의 증표는 그녀를 위해 그가 피흘려 죽을 것이라는 증표였던 것이다. 그렇다. 주님께서도 무명의 별 볼일 없는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신 후, 우리를 당신의 아내가 되게 하시려고 기꺼이 대속의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셋째는 결혼 후 솔로몬을 다시 찾은 장소 때문이었다. 결혼 후 어느 날 솔로몬이 밤늦게 집에 들어온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가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술람미 여인은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아마도 솔로몬이 다른 여자의 품에 있다가 새벽녘에 온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그녀는 여러 핑계를 대면서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문틈으로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문틈으로 들어온 신랑의 손에서 그만 몰약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솔로몬의 손에서 몰약이 떨어지고 있었는가? 그것은 작가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거기에 집어넣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몰약'이란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바르는 향품을 가리킨다. 요한복음을 읽어 보라. 거기에 보면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온다. 그것은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전에는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진 여인이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몸에 부은 사건이 있었다. 주님은 그때 그 옥합을 허비했다고 책망하는 제자들을 향하여서, 그녀가 행한 일은 누구도 준비해 주지 않은 자신의 장례를 위하여 그녀가 행한 고귀한 일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그때 솔로몬의 손에서 몰약이 떨어진 것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보여 준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손은 못 박힌 손을 예표한 것이다. 그런데 그날 그녀는 자신을 고된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하여 죽었던 그분을 모른 체 했던 것이다. 그러자 회개하고 곧장 일어나 문을 열어 주지만 남편은 이미 가고 없었다. 그러자 이제 비로소 정신을 차린 술람미 여인은 자신의 남편을 찾아 그 밤에 홀로 길을 떠난다. 심지어 성안에 있는 순찰자들에게 모욕을 당하지만 찾지 못한다. 그러자 그녀는 성밖과 연결되는 성벽에까지 가 보았지만 찾지 못한다. 그리고 파수꾼들에게 자신의 겉옷마저 빼앗기고 만다. 그래도 남편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술람미 여인은 드디어 아침이 되어서야 남편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성바깥에 있는 동산에서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거기에서 솔로몬은 백합화 가운데 양 떼를 치고 있었으며, 꺾어진 백합화를 줍고 있었다. 이것도 사실은 매우 상징적인 묘사다. 양 떼는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장차 하나님의 자녀가 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고, 백합화는 정결하고 거룩하고 정절로 단장한 신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렇다. 술람미 여인은 오해했던 것이다. 남편이 그날 밤 늦게 집에 들어온 이유를 오해한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된다. 그것은 그분은 장차 천국에 들어올 양 떼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불철주야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은 마치 양 일 백마리 중에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횃불을 들고 산과 들을 헤매는 목자의 모습과 같다(눅15:4). 주님은 이미 자신의 아내가 되어 하늘의 성 새 예루살렘 안에 들어와 있는 성도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양 떼들과 백합화들에게 관심이 많으셨던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그때부터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남편의 일을 돕게 된다. 그래서 자기도 이제 포도원을 가꾸어 과실나무를 심고 가꾸며 양 떼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4. 술람미 여인의 감사는 비로소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가?

  술람미 여인도 처음에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고 있었다. 자기만 잘 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그녀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탈피하게 되고, 그분을 위한 삶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다가 한 번 남편과의 갈등 이후에 신랑을 되찾은 다음부터는 오직 신랑의 동역자가 된다. 그때부터 그녀도 역시 평안한 궁중의 삶을 버리고 스스로 포도원을 가꾸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된 데에는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 감사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렇게 변하기까지는 자신의 노력이나 수고만이 아닌 다른 것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그녀가 솔로몬의 선택을 받아 왕후가 된 것은 그녀가 잘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왕의 보좌에서 내려와 직접 시골 촌구석까지 방문했던 그분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첫 번째 감사는 시골까지 내려와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을 아내로 선택해 준 솔로몬에 대한 감사였던 것이다. 

  둘째, 솔로몬이 자신을 아내로 취하기까지는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자기가 솔로몬의 눈에 그냥 들어서 선택된 줄 알았다. 하지만 솔로몬이 그녀를 데려간 장소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피흘려 죽을 골고다 언덕이었고, 그가 밤늦게 집에 들어오게 된 것은 다른 여자들과 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양 떼들을 인도하고 먹이기 위함이었으며, 주님께 순결을 바친 사람들을 천국으로 데려오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한 그분에게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셋째, 자기가 과거에 청혼한 솔로몬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열심히 노력한 댓가만이 아니라 실은 그녀의 어머니의 기도와 땀방울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결혼 후에 신랑을 놓쳐버린 후에 다시 찾기까지의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기도는 일종의 저축과 같은 것이다. 필요할 때에 인출해서 쓸 수 있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초기에 솔로몬의 청혼을 받아들여 잠시 예루살렘에 있는 임시 거처에 있을 때에 일어났다. 며칠을 기다려도 솔로몬을 만날 수 없자, 그녀는 밤에 혼자 솔로몬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는 쉽게 솔로몬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간절한 염원이나 그녀의 수고 때문만이 아니었음을 나중에 깨닫는다. 그녀를 위해 누군가가 기도하고 땀방울을 흘렸기 때문에 쉽게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결혼한 후 두 번째로 남편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이전에 쌓여 있던 기도를 다 써 버린 후였기 때문에 이제는 그녀는 기도가 필요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때 비로소 철야기도와 회개의 제단을 쌓아야 했던 것이다. 그 기도를 통해 결국 그녀도 남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5. '은혜'와 '감사'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은혜'와 '감사'란 대체 무엇인가? 먼저, '은혜'가 무엇인지부터 오늘 말씀을 통해 정리해 보자. 사실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내가 수고하고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나에게 값없이 좋은 것들이 주어짐을 가리킨다. 그런데 아가서의 말씀을 통하여 보면,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왕후가 되었고 그녀가 달라지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 순전히 은혜 때문이었는데, 그 은혜는 결단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솔로몬의 낮아짐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의 기도와 땀방울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혜택이 그녀에게 주어진 것을 두고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사'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자신이 지금 은혜를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이 자신만의 노력과 수고로 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도와 땀방울과 희생 때문에 나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비로소 자연스럽게 나오는 탄성이 '감사'인 것이다.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말이다. 

 

6. 나오며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희생 그리고 누군가의 기도가 아니었다면 우리 중 누구도 죄와 죽음과 사탄 마귀의 포로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며, 여전히 고된 인생의 노동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시었고, 우리 인생들의 현장들을 직접 심방하시더니 결국 우리를 건져내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중에 너와 나는 주님의 거룩한 신부 곧 백합화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날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을 위한 기도만해도 빠듯한 시간이었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셨다. 그렇다. 주님의 그러한 기도 때문에 위대한 베드로 사도가 나온 것이다. 그 기도로 인해 베드로가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 은혜는 베드로에게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댓가를 지불하심으로 인하여 그에게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늘날 내가 순탄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섬김과 기도가 있어서였다. 특히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내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의 기도와 헌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받은 은혜에 나도 보답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행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의 후손들 중에 은혜를 받는 자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가 거져 주어진 것이 아님을 그도 알게 될 때에 비로소 그의 입술에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2021년 10월 24일(주일)

정병진목사

 

 

아가서는 어떤 여인이 자기가 좋아하는 연인에게 입맞춤을 해 달라는 요청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 중에 1~7장에는 침상이나 혹은 침실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고로 과연 이 책이 성경책이 맞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아가서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생각이 완전히 달라진다. 왜냐하면 이 아가서는 복음서 중에 복음서요, 계시록의 책 중의 계시록과 같은 귀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가서의 마지막 구절에는 '마라나타'로 끝을 맺고 있다. 과연 신랑에 대한 신부의 최종적인 바램,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들려주는 놀라운 영적 비밀은 무엇일까?  2021-10-22(금) 금요기도회 제목: 신부(38) 아가서강해(28) 신부 술람미 여인의 최종적인 요청은 무엇인가(아8:1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k7it7c3UlJA [혹은 https://tv.naver.com/v/23166753 ]

 

1. 들어가며

  아가서는 선남선녀의 연애 이야기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를 쓰려고 쓴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천국 성도를 얻으시는지 그리고 천국에 들어갈 성도들은 과연 어떤 신분으로 들어가는지를 알려 주는 신부의 천국 입성 지침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제 있었던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배울 수 있으며, 동시에 장차 천국에 들어갈 성도들의 모습도 미리 엿볼 수가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아가서를 영서(영적인 책)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아가서의 끝은 어떻게 마무리되었을까? 신부의 최종적인 바램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지난 27번의 시간을 통하여 아가서 전체를 살펴보았다. 그중에 오늘은 아가서의 맨 마지막 장의 마지막 절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아가서가 궁극적으로 어떤 책인지를 살펴보고, 신부된 성도들의 마지막 소망은 무엇이며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준비해야 하는지까지 살펴보도록 하자. 

 

2.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이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열왕기상 11:3의 말씀에 따르면 솔로몬에게는 왕비(왕후)가 700명이나 있었고, 후궁(비빈)도 300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왕비 700명 가운데에는 분명 술람미 여인도 들어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런데 열왕기상의 기록 가운데 술람미 여인의 흔적을 찾기가 심히 어렵다. 아니 나오지 않는다. 있기는 있었으나 기록되지 아니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이 실재하는 여인이었는지를 연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성경책이 우리에게 정경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에는 분명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이 정경의 한 권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빨리 이 책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인공들 곧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실재하는 인물을 벗어나 그리스도와 천국의 신부를 예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솔로몬에 대한 아가서의 진술과 술람미 여인에 대한 성경의 진술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먼저, 솔로몬이 진짜 누군지를 알려 주는 말씀이 아가서 8:1~2에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을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가 아닌 분으로, 자기와 자기의 어머니가 그분에게서 무엇인가를 교훈받아야 할 분이라고 말한다. 얼핏 보기에 이 말은 솔로몬이 자신의 친오빠가 아닌 아쉬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찬찬히 읽어 보면, 술람미 여인의 어머니는 단순히 그녀의 모친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하와 내지는 인류를 대표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이 말하고 있는 솔로몬은 인류의 젖을 먹지 않는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분은 원래 하나님이셨는데 사람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요1:18). 그리고 술람미 여인이 누군지도 소개되어 있는데, 그녀는 솔로몬에게 하나 밖에 없는 짝이라고 나온다(아6:9). 솔로몬에게 그녀는 자신의 비둘기이자 완전한 자라고 했다(아6:9). 그런데 솔로몬에게는 당시 왕비가 60명이나 있었고, 후궁도 80명이나 있었으며, 시녀가 무수히 많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 솔로몬은 굳이 숫자를 여기에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솔로몬이 언급한 여인들의 숫자는 실재 숫자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이 숫자들까지도 어떤 영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숫자는 역시 영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솔로몬에게 있는 여인의 종류는 아가서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가서보다 먼저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시편에도 동일하게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시45:9). 시편 45편을 읽어 보라. 시편 45편의 저자인 고라자손은 역시 백합화 같은 신부들을 네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그들은 왕권신부 즉 왕의 딸들과 아들들, 왕후(왕비)신부, 비빈(후궁)신부인 두로의 딸, 시녀(처녀)신부가 동일하게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시45:9~17). 고로 이러한 신분들은 당시 실재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장차 하늘의 신부가 누군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것을 후대 사람이었던 솔로몬도 같이 보았던 것이다. 특별히 왕권신부, 왕후신부, 비빈신부, 시녀신부란 천국에서 일반 백성(평민)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전부 다 '이긴 자'들로서 영원한 천국에서 왕 노릇할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들의 숫자는 요한계시록에 144,000명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놀랍게도 왕권신부 30명, 왕후신부 60명, 비빈신부 80명을 곱하면, 144,000명이 나온다는 사실도 특이하다. 고로 아가서에 나오는 숫자도 그냥 기록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천국에서 왕 노릇할 144,000명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보필을 받게 되는지도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3. 신랑이 신부에게 최종적으로 바라는 사항은 무엇인가?

  아가서는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 1:1~3:5의 말씀은 결혼 전의 이야기이고, 3:6~5:1의 말씀은 결혼식 때의 이야기다. 그리고 5:2~8:14의 말씀은 결혼 후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신랑은 신부에게 최종적으로 어떤 바램을 마지막으로 노래했을까? 그 말씀이 바로 아가서 8:13에 나온다. "너, 동산에 거주하는 자야! 친구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내가 듣게 하려무나(아8:13)" 그렇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이 동산에 거주하는 자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의 친구들도 그녀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 그녀처럼 동산에 거주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가서에 나오는 '동산'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녀의 최종적인 처소가 '동산'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아가서에 나오는 '동산'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아가서를 사실상 풀 수 없거나 잘못 풀게 된다. 그것은 앞의 몇 번의 설교를 통해서 이미 전달했으니 그것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다만 간단히 정리하면 그것은 결국 감추어진 잠근 동산으로서 영적인 공간에 실재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이것은 이 땅에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자 동시에 하늘에서도 존재하는 것인데, 그 공간은 천국에서 주님이 일하시는 공간인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이 지상에 있는 양 떼들을 돌보고 계시며, 당신의 백합화 같은 신부에게 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계신다(아6:2~3). 그리고 백합화가 꺾어진다면, 주님은 그녀를 태우러 보내기 위해 수레를 준비하고 계신다(아6:12). 그리고 그녀를 천국의 동산 곧 새 예루살레 성안으로 데려가신다. 그런데 신부의 성숙도에 따라 그녀도 천국에 있는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으로 더 깊숙이 이끌어 가신다(아4:12).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어찌하든지 이 땅에 살 때에 자신의 영의 공간에 '동산'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동산을 만드는 법은 아가서 5:1에 나와 있다. 그것은 첫째, 기도하고 둘째, 말씀을 먹고 셋째, 성령을 마시는 것이다. 그런 자만이 동산을 만들 수 있으며, 결국에는 셋째 하늘에 있는 동산에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의 최종적인 거처를 마지막으로 언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그 장소를 발견하지 못한 자들이 있다면 술람미 여인에게서 그것을 듣고 그 동산을 만들기를 바라고 계신다. 이것이 바로 아가서 8:13의 말씀이다.

 

4. 신랑에 대한 신부의 최종적인 요청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신부인 술람미 여인은 최종적으로 신랑인 솔로몬에게 어떤 부탁을 하였을까? 그것이 바로 아가서의 마지막 장의 마지막 구절이다. "내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 위에 있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아8:14)" 그렇다. 여기에 나오는 '내 사랑하는 자'는 솔로몬을 가리킨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하던 바로 그분이었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요청을 한다. "당신은 빨리 달리세요" 그런데 한글성경은 이 말의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히브리어로 보면 어떤 뜻일까? '빨리 달리라'는 말은 '바라흐'라는 동사로서, 크게 2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도망하다. 피하다'는 뜻이 있고, 또 하나는 '서두르다. 재촉하다. 어서 오다(가다)'는 뜻이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킹제임스 흠정역에서는 '서두르세요'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표준새번역에서는 '빨리 오세요'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니까 신부가 신랑에게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구약 성경의 결론의 책인 요한계시록을 보면, 신부가 역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하늘의 동산인 새 예루살렘 성으로 초청하고 있는데, 그녀가 맨 마지막으로 하는 말도 역시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마라나타)"이다(계22:20). 그렇다. 신랑에 대한 신부의 최종적인 요청은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간구였던 것이다. 이 말을 아람어로는 '마라나타'라고 한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쓰고 있을 당시로 가서 본다면(B.C.960-~950년) '빨리 달리라'는 말은 초림의 예수가 어서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경우라면, 재림의 예수께서 어서 오실 것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아가서의 최종적인 말씀을 재림하실 예수님을 고대하는 신부의 최종적인 요청으로 해석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오늘날의 관점으로 볼 때, 아가서의 최종적인 말씀(아8:14)은 장차 재림하실 예수님을 학수고대하는 신부의 바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랑에 대한 신부의 요청이 '속히 오시옵소서'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을 바라는 신약 성도의 간절한 요청과 똑같다. 둘째, 장차 신부를 데리러 올 신랑이 현재 있는 장소를 천국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8:14에 의하면, 신랑의 위치는 '향기로운 산들'이라고 나와 있다. 이것을 아가서의 기록으로 보면, 솔로몬의 동산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아4:6, 13~15, 5;1). 왜냐하면 이 동산 안에서 3가지 것이 나오는데(아5:1), 하나는 몰약과 향재료이고(향은 '기도'를 상징함), 둘째는 꿀송이와 꿀이며(이것은 먹는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함), 셋째는 포도주와 젖이기 때문이다(이것은 마시는 '성령을 상징함). 그러므로 결혼 후 그녀가 가고 싶다고 말했던 그 장소 곧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들과 동일한 장소다(아4:6). 왜냐하면 천국의 동산은 사실 몰약산이며 유향의 산들로서 아름다운 향기가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다. 셋째, 신부가 속히 오기를 바라는 신랑의 모습이 노루와 어린 사슴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아가서에 나오는 '노루'와 '사슴'은 팔짝팔짝 뛰어서 속히 신부에게로 달려올 수 있는 동물들의 대표이다(아2:8~9, 2:17). 그런데 히브리어로 이 단어를 살펴보면, 더욱더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노루(체비)'의 히브리어가 '영광, 빛남, 광채'가 일차적인 뜻이며, 비로소 이차적인 뜻이 '노루'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체비'는 다시 동사 '차바'에서 온 말인데, 그 동사의 뜻은 '싸우다. 정렬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이 노루와도 같이 속히 오신다는 말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는 영광 가운데 천사들과 함께 오실 분으로서, 마지막 때에 아마겟돈 전쟁을 일으킨 악의 무리들을 쳐부수고 오실 주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9장의 이야기를 요약한 말이라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어린 사슴'이라는 말도 히브리어로 보면 재림하실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들어 있는 말이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슴'은 히브리어로 '아이얄'이라는 단어이고, 이 단어는 '울'에서 왔는데, 히브리어로 '울'은 '힘, 권세'를 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재림하실 그리스도는 하늘의 강력한 권세와 능력을 가진 채 영광 중에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며, 그때에 악인은 심판하여 불못에 멸하시고, 의인에게는 하늘에 속한 큰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6. 나오며

  왜 아가서는 주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는 여인의 요청으로 끝마치고 있는가? 그것은 아가서에 언급되고 있는 주님의 신부들이 이 세상에 살 때에 가장 바라고 가장 고대해야 할 일이 바로 '주님의 재림'에 있어야 함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라는 요청은 사실은 주님의 재림시에 부끄럽지 않을 사람으로 있어야 함을 암시한다. 만약 내가 여전히 죄짓고 있는 삶의 싯점에 주께서 오신다면 그분 앞에서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사모하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언제 오시더라도 그때에 나 자신이 주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기를 소망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을까? 그러기에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재림에 대한 온전한 소망이 있다면, 첫째, 그는 항상 회개하는 삶을 살아서 깨끗하고 흠없는 그리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는 백합화와 같은 신부, 비둘기와 같은 신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주인을 사탄 마귀에서 주님으로 바꾼 이상 원수의 영토에서 벗어나 주님의 영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일이 나의 일이 되고 주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 되고 주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어야 한다. 또한 그러한 일을 실천함으로 거기에 합당한 열매들이 맺혀져야 한다. 그러한 자들에게 비로소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부족하다. 하지만 주님의 뜻을 알게 되었고, 나에게 기도의 무기가 들려져 있고, 하나님의 말씀도 있으며, 나와 영원히 동행하도록 이 땅에 보내어진 성령님이 내 안에 있다. 힘을 내자. 나는 할 수 없지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멘. 할렐루야!

 

2021년 10월 22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신부(37) 아가서강해(27) 천국에서 왕권신부, 왕후신부, 비빈신부, 시녀신부는 어떤 서열을 가리키는가?(아가6:8~9)_2021-10-22(금)

https://youtu.be/UP82SaCHbMU   [혹은  https://tv.naver.com/v/23116047  ]

 

1. 솔로몬의 곁에 있었던 네 종류의 여인들은 누구 누구인가?

  솔로몬의 곁에 있었던 네 종류의 여인들은 첫째, 오직 하나밖에 없는 왕의 비둘기이자 완전한 자로서 술람미 여인이 있었다(아6:9). 이는 왕의 딸로서 천국에서 제일 높은 계급에 속하는 왕권신부를 가리킨다. 둘째, 왕의 곁에는 왕비(왕후)가 60명이 있었다. 이는 천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왕후신부를 가리킨다. 셋째, 왕의 곁에는 후궁(비빈)이 80명이 있었다. 이는 천국에서 세 번째로 높은 비빈신부를 가리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 무수히 많은 시녀(처녀)신부가 있었다. 이는 천국에서 제일 낮은 신부 계급에 속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네 종류의 신부들은 전부 이긴 자들의 표상으로서, 천국에서는 다 왕 노릇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아무런 계급을 갖지 않은 평민이 아무리 많아도 그들은 시녀신부보다는 높지 못하다. 

 

2. 아가서에 나오는 신부의 네 계급은 솔로몬만 본 것일까?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천국에 무슨 계급이 있겠느냐면서, 천국에서는 다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와 신부이면서 왕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사실 천국에서는 일평생 죄짓다가 회개하여 간신히 턱걸이로 들어온 자들과 일평생 나실인처럼 헌신하며 살다가 들어온 자들이 똑같은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천국에서 성도들이 누릴 영광에 대해 해의 영광과 달의 영광과 별의 영광이 각각 따로 있다고 하면서, 별의 영광들도 서로 다른 종류의 영광이 있다고 하였다(고전15:40~41). 고로 솔로몬이 본 네 종류의 신부의 계급은 실재하는 계급인 것이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솔로몬 말고도 다른 성도가 그것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시편 42편에서 49편까지를 썼던 고라 자손의 시에 나온다. 일찍이 고라는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주동자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산 채로 음부에 빠져 죽은 비참한 자였다. 하지만 그의 후손들이 살아남아서 다윗시대에 성전에서 문을 지키고 노래하는 자들이 되었는데, 그중의 한 명이 시편 42~49편을 쓴 것이다. 그중에 시편 45편은 소산님(백합화들)의 국조에 맞추어 부른 노래로서, 왕실의 혼인 잔치를 묘사하고 있는 시다. 이 시에 따르면, 아름다운 외모와 은혜로운 말을 하고, 그 옷에서 몰약과 침향과 계피의 향기가 우러나오는 왕이 먼저 등장한다. 그리고 왕이 존귀하게 여기는 4종류의 여자들이 등장하는데 아마도 왕의 혼인식 같아 보인다. 그중에 첫째 여인은 왕의 딸들인데, 이들은 친 딸들이 아니라, 거듭나서 왕의 딸들이 된 자로서 왕권신부를 가리킨다. 둘째는 왕비(왕후)가 있는데, 이는 수놓은 옷을 입고 오빌의 금으로 꾸민 채 왕의 오른쪽에 있는 자이다. 셋째는 두로의 딸이 나오는데 이는 비빈신부를 지칭하는 다른 표현이다. 넷째는 왕후를 따르는 처녀들로서 시녀신부들이 있다. 그렇다. 고라 자손도 장차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자들이 누군지를 보았던 것이다. 

 

3. 왕권신부, 왕후신부, 비빈신부, 시녀신부는 무엇을 기준으로 나눈 신부들인가?

  아가서 6:8~9에 나오는 네 종류의 신부는 어떤 기준으로 나눈 신부인가? 사실 아가서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의 신부들이 나온다. 하나는 얼마나 신랑을 사모하느냐 그리고 얼마나 주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느냐에 따라 세 종류들의 신부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백합화와 비둘기 같은 신부요, 원수의 영토에 깃발을 꽂는 신부요, 또 다른 신부를 산출하고 양육하는 신부다. 그런데 또 다른 유형의 신부들이 나온다. 그것은 그들이 영적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그리고 그들이 가진 영성에 따라 네 종류들의 신부들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왕권신부, 왕후신부, 비빈신부, 시녀신부인 것이다. 

 

4. 왕권신부, 왕후신부, 비빈신부, 시녀신부와 같은 네 종류의 신부들은 과연 어떠한 신부들이며 그들 서로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사실 네 종류의 신부들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들의 영적 전쟁 수행 능력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공통적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이기에 영적 전쟁을 수행할 수 있지만 그 능력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첫째로 왕권신부는 가장 높은 계급의 신부로서 영적 전투에 능한 자들을 가리킨다. 그가 누가 되었든지 원수의 영에 사로잡힌 포로들을 구출하여 하나님의 영토에 데려올 수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영권으로 본다면, 성령의 계시를 직접적으로 받을 수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둘째, 왕후신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우두머리의 권세를 가진 자로서, 영적 전쟁에 강한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양쪽에 날이 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아는 신부들이다. 그러므로 영권으로 본다면, 영이 항상 깨어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셋째로 비빈신부가 있으니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머리가 될 권세를 가진 자들로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지만 그것을 자유자재로 쓰지 못해 전쟁 수행 능력이 조금 떨어진 자들로서, 적을 읽어내는 능력도 떨어진 자들을 가리키다. 영권으로 본다면 이들은 영이 깨어 있기는 하지만 영이 졸 수 있는 신부들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신부는 시녀(처녀)신부가 있다. 이들도 역시 하나님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자들인데, 성령의 검을 들기는 했으나 그것을 공격용으로 사용하지는 못하고 자기 방어용 정도로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영권으로 본다면 이들은 영이 때로는 졸고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5. 말씀을 기준으로 네 종류의 신부들을 나눈다면 어떻게 나눌 수가 있는가?

  말씀에는 사실 3가지의 말씀이 있다. 첫째, '기록된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성경 66권의 모든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흔히들 '로고스'라고 부른다. 둘째, '선포된 말씀'이 있다. 이는 설교자가 몇몇의 성경 구절을 가지고 그날의 설교 주제를 만들어서 설교할 때 선포되는 말씀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는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성경의 말씀을 설교할 때에 나오는 말씀이기 때문에 다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시에 주어지는 말씀'이 있다. 이는 지금도 일상생활 가운데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들려주시는 말씀으로서, 이 말씀은 '레마 말씀'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말씀은 이미 성경 66권을 거의 암송된 상태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들이 받는 말씀을 가리킨다. 이것을 네 종류의 신부들에게 적용한다면, 먼저 네 종류의 신부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로서 일반 백성들(평민)은 평소 성경을 읽지 않는 자들이나 그나마 주일에 선포된 말씀이라도 듣고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시녀신부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읽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면, 자기도 그 말씀대로 실천하려 노력하는 신부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왕권신부와 왕후신부와 비빈신부는 선포된 말씀을 듣고 기록된 말씀을 읽으면서 동시에 그 시에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는 자들을 가리킨다. 혹 어떤 사람의 말씀이 곧 그 시에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과 동일하다면 그 사람의 신분은 왕권신부라고 할 수 있다. 거의 일치한다면 왕후신부라고 할 수 있고, 조금이나마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비빈신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속해 있으며, 그 다음 단계로 진급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21년 10월 22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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