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신부(36) 아가서강해(26) 동산에도 세 장소가 있다(아8:11~13)_2021-10-21(목) 

https://youtu.be/DmyXvgPZbB4  [혹은 https://tv.naver.com/v/23095941  ]

 

1. 아가서에서 동산은 어디에 있는가?

  아가서에서 동산은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다가 있는 어떤 장소라고 나온다(아6:2,11). 그렇지만 그 장소가 정확히 어디라고는 나오지 않는다. 그럼 이 동산은 천국에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지상의 예루살렘 성밖에 있는 어떤 장소인가? 아마도 천국에 있는 동산 같은데 이 지상에도 있는 공간같이 보인다. 그런데 이 동산 안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오직 나 자신과 주님만이 거주하는 숨겨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동산은 일종의 비원(비밀의 동산)인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주님과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곳에는 주님 이외에 결코 뱀이 들어오게 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동산을 우리의 하나님과 내가 같이 있는 공간으로서 우리의 '마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주님께서 영으로서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실 수 있기 때문이다. 

 

2. 우리는 동산에서 주님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그 동산에서 주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솔로몬이 그 동산에서 거두고 먹고 마셨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첫째, 몰약과 향재료를 거두는 곳이란 의미에서 '기도할 때에'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계8:3~5). 둘째, 꿀송이와 꿀을 먹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시119:103). 셋째, 포도주와 젖을 마실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성령을 마실 때에'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사55:1~2, 요7:37~39). 그러므로 우리가 이 영적인 공간인 동산 안으로 들어가서 주님만을 만나기 위해서는 첫째,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셋째, 성령의 음성에 귀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것이 동시에 실현되는 공간은 역시 '예배 시간'이다. 우리는 예배 시간에 이 세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하기 대문이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비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위의 3가지를 잘 해야 한다. 

 

3. 솔로몬은 동산에도 3가지가 있다고 소개하는데 거기에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솔로몬은 아가서 4:12의 말씀을 통하여, 동산의 공간을 3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잠근 동산이 그곳이다. 이곳은 울타리가 쳐져 있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문이 있으나 그 문은 두루 도는 화염검에 의해 감시되고 있다. 그래서 아무나 이곳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주님에 의해 허락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잠근 동산의 한 중앙에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은 덮여 있다. 이 우물에는 물로 가득하다. 그리고 셋째, 덮은 우물 안에는 봉한 샘이 있다. 여기 이 샘에서 물이 솟아올라온다. 

 

4. 동산의 세 장소는 누가 들어갈 수 있는가?

  솔로몬은 아가서를 통하여 누가 이 세 장소에 들어갈 수 있는 신부인지를 표현하고 있는데, 첫째, 잠근 동산에는 백합화 같고 비둘기 같은 신부가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아2:2, 14, 5:2). 왜냐하면 잠근 동산에는 오직 예수님만을 열렬히 사랑하는 백합화 같은 신부가 들어가며, 순결하고 일부종사하여 정절을 지키는 비둘기 같은 신부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이미 귀신과 세상에서 점령당한 채 있었고, 세상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백합화 같은 신부가 되고 비둘기 같은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수적이다. 회개없이는 내 안에 이미 주인 행세를 해 온 존재들을 밖으로 내보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 신부에게 비로소 흰옷이 입혀지기 시작한다. 

  둘째, 덮은 우물에는 원수의 영토에 깃발을 꽂을 수 있는 신부가 들어갈 수 있다(아6:4,10).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자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덮은 우물'인 것이다. 천국을 가지고 비유한다면, 새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는 것은 잠근 동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생명수가 고여 있는 하나님의 보좌가 바로 덮은 우물인 셈이다. 사실 백합화 같고 비둘기 같은 신부였으나 술람미 여인이 잠시 부주의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신랑의 임재를 잃어버렸다. 그녀는 그때부터 신랑을 찾기 시작했으나 쉽게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밤에 성을 지키는 순찰자들이나 성벽을 수호하는 파숫군에게 농락만 당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기도하고 회개하고 주님을 자랑했을 때에 그녀는 드디어 동산에서 자기의 양 떼를 먹이고 있었고, 꺾어진 백합화를 모으고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믿음과 회개가 잠근 동산으로 진입하게 해주는 키워드라고 한다면, 덮은 우물로 가서 덮개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결국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되며, 그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때에 불로 단련된 금이 그에게 주어지게 된다.

  셋째, 봉한 샘에는 새로운 포도원을 개척하여 열매를 맺는 신부가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신부를 산출하고 그 신부를 양육하는 신부가 되었을 때에 덮은 우물의 안쪽 안에 있는 봉한 샘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 누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를 산출하는 포도원을 개척할 수 있는가? 그것은 역시 좁은 길을 걸어가기를 결단하는 사명자들이다. 이들은 누가 뭐래도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봉한 샘에 들어가게 될 자들은 거의 대부분 댓가를 지불한 자들이다.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미래를 다 주님께 드린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들 중에서 봉한 샘이 그에게 기업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5. 동산의 세 장소는 대제사장의 옷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사실 동산의 세 장소는 잠근 동산과 덮은 우물과 봉한 샘이다. 하지만 이것은 순서대로 첫째는 레위인들이 들어가는 바깥뜰을 가리키며, 둘째는 제사장들만이 들어가는 성소를 가리키는 것이고, 셋째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지성소를 가리킨다. 고로 잠근 동산이란 '바깥뜰'과 같다고 말할 수 있고, 덮은 우물은 '성소'라고 말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봉한 샘은 '지성소'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이 세 장소를 이사야 61:10의 말씀에 따르면, 잠근 동산이 맨 처음으로 구원의 옷을 입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덮은 우물은 의의 겉옷(에봇 받침 겉옷)을 입혀 주는 것이며, 봉한 샘은 사모와 보석들로 수놓은 티아라관을 씌우는 곳이다. 

 

2021년 10월 21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신부(35) 아가서강해(25) 나는 동산 어디에 거주하는 자인가?(아8:11~13)_2021-10-20(수) 

https://youtu.be/MDdgW5g_4Do  [혹은 https://tv.naver.com/v/23076016  ]

 

1. 아가서에서는 술람미 여인의 최종적인 상태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아가서에서는 술람미 여인의 최종적인 상태를 '동산에 거주하는 자'라고 묘사하고 있다(아8:13). 그러나 아가서에 술람미 여인이 처음으로 언급될 때에는 동산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포도원지기로 나온다. 즉 그녀는 의붓오빠들에 의해 바알하몬에 있는 커다란 포도원에서 포도원지기로 일하고 있던 시골 농부였다. 그런데 이 여자가 일하는 곳에 솔로몬왕이 시찰을 나오게 된다. 그리고 왕이 그녀를 보았을 때 왕은 그녀가 자신의 잃어버린 짝이라는 것을 즉시 알게 되고, 그리하여 그때부터 왕은 그녀와 연애를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혼례를 치르고 그녀는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왕궁에 거하는 자가 된다. 하지만 이 여인의 최종적인 거처는 '동산'이라고 나온다. 그럼, 왜 이 여인은 예루살렘 성의 왕궁이 그녀의 거처가 아니라 동산이 그의 거처라고 나오는가?

 

2. 아가서에서 동산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사실 아가서를 푸는 핵심적인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동산'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왜냐하면 마침내 그녀가 솔로몬에게 있어서 동산이 되었기 때문이다(아4:12), 그런데 동산은 원래 솔로몬이 양 떼를 먹이는 장소이자 백합화를 주워 모으는 장소로 나온다. 그런데 아가서의 마지막에 가서는 그녀의 마지막 거처를 '동산'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동산'은 대체 어디에 있는 장소인가? 분명한 사실은 아가서에 나오는 '동산'은 첫째, 솔로몬의 소유라는 것이다(아5:1, 4:16). 여기서 솔로몬은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므로, 동산은 하늘 안에 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둘째, 그 동산은 '호도 동산'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아6:11). 그렇지만 이 명칭은 솔로몬이 그렇게 지어 부른 것은 아니었다. 술람미 여인이 그렇게 지어 부른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동산의 생김새가 호두 모양이어서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닐까 생각되며, 호두 모양은 두뇌처럼 생겼으니, 천국에서 본다면 우주를 주관하는 헤드쿼터 영역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셋째, 그 동산은 예루살렘에서 내려가는 어느 길목에 있었다는 것이다(아6:2,11). 이것은 그곳이 분주히 움직이는 공간이 아니라 주님의 은밀한 공간이라는 뜻 같아 보인다. 마지막으로 넷째, 그곳은 천국이나 지상에 실재하는 장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거주하는 공간이자 주님의 마음이 있는 곳으로서 인간의 마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아4:12, 6:2~3). 고로 이 장소는 꼭 실재하는 물질 세계의 어느 공간만으로 한정할 수는 없어 보인다. 동산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도 같이 나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솔로몬 역시 그녀를 "나의 동산"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아4:12). 그러므로 사람 가운데 주님이 거주하는 공간인 사람의 마음 내지는 영이 바로 주님의 동산인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지금도 하늘에 계시지만 동시에 사람의 마음 안에도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3. 솔로몬이 동산에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솔로몬은 동산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하는가? 그것은 2가지 일을 한다. 첫째, 솔로몬은 그곳에서 양 떼를 돌보는 일을 한다(아6:2~3, 1:7, 2:16).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데도 솔로몬이 밤늦도록 일하다가 새벽 이슬을 맞고 집에 귀가할 수밖에 없던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즉 그곳에서 솔로몬이 양 떼를 돌보는 일을 하다가 그만 늦게 귀가하였으리라 추측이 된다(아5:2). 여기서 '양 떼'라 함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가리킨다(시100:3). 둘째, 솔로몬은 그곳에서 백합화를 주워 모으는 일을 하고 있었다(아6:2~3). 여기서 '백합화'라 함은 이 땅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당신의 신부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술람미 여인도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하나의 백합화였으며(아2:2), 솔로몬은 동산에 있는 많은 백합화 가운데 늘 있었다(아6:2~3). 그런데 이 땅에 있는 신부들 가운데 원수에 의해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받다가 죽는 신부가 생기면, 아마도 하늘에 있는 동산에서 그 백합화 꽃이 꺾어지는 것 같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동산에서 주님은 그 꺾어진 백합화를 주워 모아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순교한 영혼들을 위해 하늘의 왕은 귀한 수레를 내려보내 그 백합화 같은 신부를 천국으로 데려오도록 시키는 것 같다(아6:12). 

 

4. 내 마음이 주의 동산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은 내 마음이 주의 동산이 되게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자만이 장차 천국 동산에 들어가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마음을 주의 동산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주님께서 그 동산에서 무엇을 얻으셨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그 동산에서 3가지 것을 거두셨고 먹고 마셨다(아5:1). 첫째는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몰약과 향재료를 거두셨다(아5;1). 이것들은 향기가 나게 하는 것들이다. 구약에서 이러한 몰약과 향재료들은 향기름을 만드는 재료들을 가리키며(출30:22~25),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계8:3~5). 고로, 내 마음이 주의 동산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 성도들은 늘 기도에 힘써야 함을 알 수가 있다. 내 마음이 주의 동산이 되도록 기도를 하되 때로는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고,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다. 둘째는 주님께서 그곳에서 꿀송이와 꿀을 드셨다는 것이다(아5;1). 여기서 먹는 것은 양식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주님도 말씀으로 사시는 것이다. 한편 시편 기자도 이렇게 말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3)." 고로 내 마음이 주의 동산이 되게 하려면 우리도 역시 신구약의 66권의 성경 말씀을 늘 섭취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는 주님께서 그곳에서 포도주와 우유(젖)를 마셨다는 것이다(아5:1). 여기서 포도주와 젖은 마시는 것으로서, 예수께서도 지상에 계실 때에 누구든지 목마른 자가 있거든 그분에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는 것을 통하여, 그것은 성령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요7:37~39). 고로 내 마음이 주의 동산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마셔야 한다.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그분으로 호흡해야 하며 그분의 음성에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래야 성령의 흐름이 내 마음속에서 계속 흘러넘칠 수가 있는 것이다. 

 

5. 동산에도 세 장소가 있다는 데 그곳은 어디인가?

  아가서 4:12의 말씀을 보면, 동산에도 세 장소가 있다. 첫째는 잠근 동산이요, 둘째는 덮은 우물이며, 셋째는 봉한 샘이다. '잠근 동산'은 울타리가 쳐져 있기 때문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마치 에덴동산이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잠근 동산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그 신부는 엄청난 은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적으로 볼 때 잠근 동산은 새 예루살렘 성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리고 잠근 동산의 안에는 '덮은 우물'이 있다. 이는 마치 에덴동산의 한 중앙에 물이 있어서 그 물이 사방으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 또한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생명수가 솟아 나와 새 예루살렘 성안으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 이곳은 잠근 동산 안에 들어온 자만이 또다시 나아갈 수 있는 특별한 장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봉한 샘'이 있다. 사실 덮은 우물에 있는 물은 이 봉한 샘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물의 시원이 바로 이 봉한 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가 봉한 샘까지 들어갔다고 말한다면, 그의 신분이 실로 대단히 높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들에 관하여는 다음 시간에 더 살펴보기로 하자. 

 

2021년 10월 20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신부(34) 아가서강해(24) 아가서에 나오는 솔로몬의 신분과 그분의 놀라운 사랑(아8:6~7)_2021-10-19(화)

https://youtu.be/bn5-P6fjzUQ  [ 혹은 https://tv.naver.com/v/23047159 ]

 

1. 아가서는 주님을 얼마만큼 사랑하라고 요청하고 있는가?

  아가서는 주님을 사랑하되, 우리가 그분을 도장같이 우리의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우리의 팔에 새길 것을 권면한다. 이는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르친 '쉐마'와 비슷하다(신6:4~9). '쉐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가르치며 강론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자기 집의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까지 말한다. 그만큼 주님을 가까이 하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라는 것이다. 

 

2. 솔로몬은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솔로몬은 사랑을 아가서 8:6b~7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스올같이 잔인하다. 질투는 불길같이 타오르나니, 그것의 기세가 가장 강력한 불길같다. 많은 물일지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할 것이며,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랑은 자기의 모든 재물을 다 주고 사랑을 얻으려고 할지라도 그는 정녕 멸시를 받고 말 것이다(아8:6b~7)." 이것은 결국 사랑의 힘과 위대함과 값어치를 제대로 표현해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을 질투라고 표현하는 말이 중간에 나온다.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질투'는 시기심이 아니라, 일종의 열정이요, 열성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질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킨나흐'라는 단어로서, 그 뜻이 원래는 '열성, 열심, 특심'에서 비롯되어서 '부러움'으로, 다시 '시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기도 하며(출20:5), 하나님께서 열심을 내어 당신이 이미 하신 말씀을 성취할 것임을 약속하기도 한다(겔39:25, 왕상19:14, 사9:6~7). 한 마디로 사랑은 불타오르는 열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도 '열정'을 건드릴 수 없고 그러면서도 누구도 소멸시킬 수 없는 위대한 '열정'인 것이다. 

 

3. 아가서에는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는 솔로몬을 어떤 신분으로 소개하고 있는가?

 아가서에는 솔로몬의 신분을 4가지로 소개한다. 그는 첫째, 예루살렘의 '왕'이면서(아1:4,12, 3:9,11, 7:5) 동시에 둘째, '포도원의 주인'이다(아8:11). 그리고 그는 셋째, 동산에서 양을 치는(먹이는) '목자'이면서(1:6, 2:16, 6:2~3), 넷째, 동산에서 백합화를 돌보는 '동산지기'다(아5:1, 6:2~3). 특히 아가서는 솔로몬이 왕이라는 것을 많이 강조한다. 그래서 그가 술람미 여인과 결혼하기 전에 연애할 때에도 '왕'이었고(아1:4,12), 결혼식을 거행할 때에도 '왕'이었으며(아3:9,11), 결혼한 후에도 '왕'이었음을 계속해서 말한다. 이는 그의 신분은 고귀한 왕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도원까지 심방하여 포도원을 관리하는 자에게도 관심을 가졌음을 말해 준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분이시지만 기꺼이 그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포도원지기로 고생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낮고 천한 몸을 입으신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말해 준다. 그렇다. 아가서를 읽어 보면 왕은 신하들이나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오로지 포도원과 동산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 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는 포도원의 농부와 동산의 양 떼 그리고 동산의 백합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아가서에 등장하는 '포도원 농부'는 죄에 매여 일평생 종노릇하는 인간을 상징하며, '양 떼'는 장차 천국 백성이 될 인간들을 가리키고, '백합화'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성도들을 가리킨다. 

 

4. 왕은 어떻게 시골 처녀를 사랑했으며, 결혼한 시골 처녀는 자신의 신랑을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했는가?

  왕은 처음부터 술람미 여인이 자신의 잃어버린 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잃어버린 단 하나의 자신의 짝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다. 왕이니까 그냥 사람시켜서 데려오라고 했어도 되었지만 그는 결코 그냥 왕의 권한을 이용하여 술람미 여인을 데려간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녀를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보여 주었고 청혼을 하였다. 그때 연애 시절에 솔로몬은 한 번 그녀를 잔치집(포도주의 집)으로 데려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솔로몬은 그녀의 머리 위에 깃발을 하나 세워 주었는데 그 깃발에는 '사랑'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고 말씀하고 있다(아2:4). 그가 포도주의 집에서 자신의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증명할 것이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부는 결혼 후에 그녀가 얼마나 신랑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가 남편에게 드린 사랑은 3가지였다. 첫째는 그 때의 시간으로 포도원에서 꽃이 피어 자라고 있는 포도나무와 석류나무였다. 둘째는 이미 거둬 놓은 열매들이었다. 셋째는 지금 거둔 새로운 열매들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성장하여 이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그 일을 자기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 그리고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약2:26).

 

5. 주님의 사랑받는 신부가 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주님의 사랑받는 신부가 되려면 말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신부가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첫째로, 백합화 같고 비둘기 같은 정결하고 정절을 가진 신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둘째는 원수의 영토에 깃발을 꽂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영적 싸움에서도 승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밤의 두려움을 이기려면 영적 전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이 땅에 포도원을 개척하여 다른 신부들을 산출하고 양육하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실은 이 일은 다 원래 주님이 하시던 일이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주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성장한 후에 그녀가 보여 준 것은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으며, 과거에도 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했다(아7:12). 그래서 우리도 술람미 여인처럼, 과거나 지금이나 미래나 변함없는 신부, 그리고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신부이자 오직 주님만을 사모하는 신부, 그리고 오직 주님이 하고 있는 일에 자신도 기꺼이 뛰어들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신부, 그리고 그러한 일을 행할 때에 어떤 어려움과 환난이 불어닥쳐도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는 신부, 그리고 세상 풍조가 아무리 치고 들어와도 그것에 물들지 않고 오직 백합화처럼 일편단심으로 주님께 바치는 순결한 신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2021년 10월 19일(화)

정병진목사

 

 

아가서는 사랑노래다.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 책은 솔로몬 개인이 시골처녀를 사랑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 책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며, 또한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희생을 치르셨는지를 말하고 있는바 구원론의 책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중에서 오늘은 그분이 얼마나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셨고 우리를 죄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이 메시지에 주목해보라.

2021-10-17(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신부(33) 아가서강해(23) 죽음같이 강한 사랑에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아8:6~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3gVEZtzjmZs [ 혹은 https://tv.naver.com/v/23034403 ]

 

1. 들어가며

  아가서의 주제는 무엇인가? 아가서의 주제는 한 마디로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 진정 내면에 실제하는 주제는 사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성도들 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말씀은 아가서 8:6~7에 나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맨 앞에 누군가의 당부 혹은 명령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서 조금 긴 형태로서 '사랑'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당부이나 명령은 대체 누가 누구에서 하는 말인가? 그리고 '사랑'에 대한 정의는 누가 내리고 있는가? 특별히 이 책의 저자가 들려주는 사랑의 핵심 개념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하는 사랑의 힘(위력)과 사랑의 위대함과 사랑의 값은 대체 어떤 것인가? 그리고 아가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아가서에서는 신앙과 관련된 용어가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왜 오늘 본문에는 '여호와의 불'이라는 문구가 등장하고 있으며, 이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오늘 이 시간은 이러한 의문점들과 궁금증들을 풀어주는 복된 시간이 될 것이다. 

 

2. 아가 8:6상반절은 신부의 요청인가 신랑의 당부 내지는 신랑의 명령인가?

  아가서 8:6의 말씀의 상반절은 이렇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아8:6a)" 이 말은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여러 학자들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이 말은 '술람미 여자'가 한 말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고, '신랑'인 솔로몬이 한 말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다. 둘 다 어느 것을 취해서 해석해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문맥을 좀 더 살펴보면, 이 본문은 아마도 솔로몬이 말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왜냐하면 바로 앞 구절의 말씀에, '나'와 '너'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나'와 '너'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앞구절인 아8:5b의 말을 누가 했느냐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앞구절인 아8:5b의 말씀을 대부분은 다 신랑이 신부에게 말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아8:6a의 말씀도 솔로몬이 말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고 하겠다.

 

3. 솔로몬은 왜 그의 아내에게 이후부터는 자기를 도장같이 새길 뿐만 아니라 자기를 꼭 몸에 붙이고 다니라고 당부하는가?

  그렇다면, 왜 솔로몬은 그의 아내에게 자기를 도장같이 새기고, 또한 자기를 몸에 붙이라고 말했던 것일까? 그것은 이 말을 받는 대상이 이 말을 하는 사람을 잊어버린 일이 있었고 또한 그것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로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 성도의 영원한 신랑되신 예수께서 당신의 신부가 될 자들인 우리 성도들을 위한 당부의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이 말씀은 신6:4~9에 나오는 '쉐마'의 말씀과 많이 닮아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역시 신명기의 말씀에 나오는 그 말씀도 역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는 말씀으로 나오기 때문에, 이 본문 역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하는 말로 보는 것이 훨씬 더 합당하게 보인다. 특별히 '새기라'는 말은 의미심장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새기지 않으면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 술람미 여인도 결혼 후에 한 때 신랑을 놓쳐버린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렵게 다시 되찾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잃어버리기는 쉽지만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당부하고 당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랑은 앞으로 절대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그때 당시 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도장을 빌려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주님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더 주의하도록 하자. 

 

4. 사랑의 힘(위력)은 대체 어느 정도인가?

  그리고 이어서 '사랑'이 무엇인에 대한 정의가 이어진다. 우선 아가8:6b~7의 말씀을 직역해 보도록 하자.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스올같이 잔인하다. 질투는 불길같이 타오르나니, 그것의 기세가 가장 강력한 불길과 같다. 많은 물일지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할 것이며,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랑은 자기의 모든 재물을 다 주고 사랑을 얻으려고 할지라도 그는 정녕 멸시를 받을 것이다(아8:6b~7)." 그렇다. 본문은 그간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어떻게 사랑해왔는지를 알려주면서 술람미 여인에게 이것을 마음에 새기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사랑의 힘(위력)이 나오고, 둘째는 사랑의 위대함이 나오며, 마지막으로 셋째, 사랑의 값(값어치)가 나온다.

  먼저, 사랑의 힘 곧 사랑의 위력에 대해 살펴보자. 솔로몬은 사랑의 힘을 2가지로 말한다. 첫째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음부같이 잔인하다(잔혹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죽음과 음부는 모든 것을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사람치고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또한 사람이 죽게 되면 음부(스올)가 즉시 와서 그를 삼켜버린다. 그런데 이것을 이겨낼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역시 죽음과 음부(스올)이었다. 사실 요한계시록에서 보더라도, 음부가 사망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사람을 집어삼키는 것을 알 수 있다(계6:7~8). 그런데 참 솔로몬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그렇다. 이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음부의 문들이(gates) 우세하지 못할 것이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 구약시대에는 사망과 음부가 최고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께서 오셔서 최초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인하여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깨뜨리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도 역시 사망과 음부를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사랑이었다고 한다면,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5. 사랑의 위대함은 또 얼마나 되는가?

  그렇다면, 사랑의 위대함은 어느 정도인가? 솔로몬은 사랑의 위대함을 질투로 표현한다. 사랑은 불길같이 일어나기에 그것의 기세가 맹렬하여 어느  누구도 그것을 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랑은 타오르는 불과 같다. 한 번 타오르면 그것을 꺾을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죽음이 강하고 음부가 잔혹다하고 말하지만, 그것들이 사랑을 꺾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을 위한 솔로몬의 사랑을 아무도 꺾을 수가 없었기에 둘은 결혼에 이를 수가 있었다. 그러면 솔로몬은 대체 얼마나 술람미 여인을 사랑했던 것일까? 한 마디로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 있어서 하나 뿐인 사랑이었다(아6:9). 솔로몬에게는 수많은 왕비들과 비빈들(후궁들)과 시녀들이 있었지만 솔로몬에게 유일한 사랑의 대상은 오직 술람미 여인, 그녀 뿐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바로 자신의 잃어버린 바, 하나 밖에 없는 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그녀가 의붓오빠들(귀신들을 지칭함)에 의해 포도밭에서 고된 노역에 시달리는 것을 구출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그리고 어떠한 댓가를 지불해서라도 그녀를 거기에서 건져낼 것이라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녀를 연애시절에 '잔치집'으로 데려간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그가 그녀에게 보여줄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오직 그녀만을 사랑하여 반드시 밤의 권세로부터 그녀를 탈출시켜 승리하는 자로 만들어주겠다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오는 '잔치집'은 '연회장'이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포도주의 집'이기 때문이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피흘려 죽음으로서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청사진을 그녀에게 보여주신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하는데 누가 그것을 제지할 수 있겠는가?

  더불어 솔로몬은 이 문장에 나오는 사랑의 기세를 "여호와의 불길"로서 비유하고 있는데, 사실 아가서에서는 이 구절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곳에서도 신앙과 관련된 용어가 하나도 없다는 측면에서 이 구절을 "여호와의 불길"로 번역하기보다는, "가장 맹렬한 불길"로 번역했어야 더 옳아 보인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불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솰르헤베트야[흐]'는 두 가지로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마지막에 나오는 단어 '야[흐]'를 '여호와'의 축약형으로 보느냐 아니면 그 단어의 최상급의 표현으로 보느냐 하는 것인데, 아무래도 아가서의 말씀을 일관성있게 풀어가려면 '야[흐']는 최상급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옳은 번역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6. 사랑의 값은 얼마나 매길 수 있으며 얼마나 큰 것인가?

  그렇다면,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사랑했던 사랑은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가? 다시 말해 솔로몬이 치른 희생이 대체 얼마나 큰 희생이었던 것일까? 솔로몬은 말한다. "사랑은 자기의 모든 재물을 다 주고 사랑을 얻으려고 할지라도 그는 정녕 멸시를 받을 것이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이 술람미 여인을 위하여 곧 인류를 위하여 그분이 치르실 희생의 값은 인간의 재물같은 것으로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재물같은 것으로 비교한다면 수치를 당할 만큼 커다랗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3:1a)" 또한 요한 사도는 이렇게 계속해서 말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그렇다. 그분의 불길같은 사랑의 기세를 꺾을 자가 없다. 더욱이 엄청난 값을 치르고서라도 우리 죄인들을 사시어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그분의 사랑은 값으로 매길 수가 없는 것이다. 

 

7. 나오며

  우리는 그동안 아가서를 남녀간의 연애담 정도로 생각했다. 물론 그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고 들어오기는 했었다. 하지만 남녀간의 사랑의 표현이 지나친 것들이 많이 있어서, 읽는 독자로 하여금 당혹하게 한 것이 한 둘이 아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도라도 아가서를 선뜻 읽기란 쉽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22번의 강해를 통하여 서서히 그 실상을 살펴 보니, 아가서야말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 집약된 책 중의 책이며, 누가 과연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보석 중의 보석과도 같은 말씀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천국에 들어갈 신부들의 등급까지도 표현해 놓은 아가서는 실로 놀라운 구약의 복음서 중의 복음서요 구약의 요한계시록이었던 것이다. 특히 아가서 8장 1~2절에 나오는 표현을 통해, 우리는 아가서가 연애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소개하는 책이라는 사실과 아울러, 솔로몬이 자기자신의 사랑을 말하려고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라 장차 오실 그리스도가 어떤 사랑으로 인류를 사랑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책이라는 것도 살펴보았다. 놀랍고도 놀랍기만 하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 말이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같이 강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준 것에 대해 무어라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 지 모를 지경이다. 오직 주 예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뿐이다. 

 

 

2021년 10월 17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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