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4(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왜 치유축사할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것일까?(사도행전3:16, 16:18)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EkIjkdX6jvg [또는 https://tv.naver.com/v/40877818]

1. 들어가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던 사도들의 삶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사도행전은 크게 2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1~12장까지는 사도 베드로를 통한 복음전파가 기록되어 있고, 13~28장에서는 사도바울을 중심으로 한 복음전파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두 사도들은 다 능력전도를 행했던 인물들이다. 그중에서 성경에 기록된 치유와 축사의 현장기록은 딱 한 번씩만 나온다. 그것은 베드로가 나면서 못걷는 자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다는 내용(행3:6) 사도 바울이 빌립보성의 점치는 여종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그녀에게서 나오라"고 했다는 내용 뿐이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의 공통적인 특징을 보면, 첫째, 둘 다 사도들이 일으킨 이적이며 둘째, 둘 다 명령으로 했다는 것고 셋째,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두 사도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을 한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담긴 놀라운 영적 비밀을 풀어보고자 한다. 이것을 알며녀 치유축사가 매우 쉬워질 것이다. 

 

2.  치유와 축사는 믿음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기적을 맛보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뭐니뭐니해도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상'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이 우주나 자연만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킴도 아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마귀가 지배 하에 있는 영역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이겨야 할 세상의 실체는 결국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도들은 바로 이 세상의 임금이라 칭하고 있는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놈들과 치열한 영적 전투를 치러야만 한다. 이놈들과 영적 전투를 치러서 이길 때에 나타나는 결과가 바로 치유라는 것이요 축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귀신들과 싸워서 과연 이길 수 있는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귀신들은 원래 천사들이었고 이들은 지혜가 충만한 자들이었으며, 능력이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이것들을 이기려면 우리는 반드시 주 예수님을 힘입어야 한다. 그런데 주 예수님을 힘입는 방법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3. 예수님은 왜 공생애 당시에 당신 앞에 나오는 자들의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었고, 모든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공생애 동안 당신 앞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었는가? 특히 당신 앞에 질병을 가지고 나온 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해 줄 수 있었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가지신 믿음 때문이다. 그분의 믿음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믿음과는 조금 다른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그분이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막11:22). 그것은 바로 말한 대로 된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을 하면 모든 만물이 복종했다. 바람과 파도를 꾸짖자 그것들이 잔잔해졌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자 아루 아침에 말라버렸으며, 네 병에서 놓여서 건강할지어다고 선언하면 병에서 고침받았다. 그리고 귀신더러 떠나갈 것을 명령하면 어떤 귀신이라도 예수님에게 사정사정하면서 떠나갔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말한 대로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막11:23).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님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말한 대로 모든 것이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말한 대로 되도록 절대적인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마련해주신 2가지 장치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제 당신이 갖고 있던 믿음이 그들에게도 전이가 되어서, 그들도 당신과 똑같은 일을 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일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2가지 장치를 마련해주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것은 바로 첫째, 주님께 무엇이든지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다시 말해, 주님께로부터 부탁을 받은 복음전파를 위해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달라고 해도 주시고, 명령과 선포할 때에 그대로 일어나도록 하는 요청권한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둘째, 제자들이 죽는그날까지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제자들을 거듭나게 하고, 가르치고 위로하여 격려하며, 때로는 책망하고 이끄는 선생의 역할을 하는 보혜사 성령을 주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께 기도를 잘 드리고, 장차 변화될 모든 것을 향해 명령과 선포를 잘 하며, 성령을 의지하고 산다면 우리도 여기에서 천국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보혜사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오셔서 먼저는 심령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 그리고 사람의 밖에 부어질 때에는 기름부음이 임하여, 병든 자를 치료하기도 하고, 귀신을 쫓아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성도가 되었다면 그때부터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가며 그분과 교통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5. 믿는 자의 속에도 거주하시며 성도들 바깥에서 천사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께서 가르쳐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지식은 무엇인가?

  보혜사 성령을 일찌기 받은 바 있던 베드로는 주 예수의 이름을 언급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행11:17). 또한 사도 바울도 주 예수의 이름을 언급할 때에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였다(롬1:3~4). 그러므로 성도들이 가져야할 믿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명칭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앞의 '주'라는 명칭은 '주 하나님'는 명칭의 약자인 것이며,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의 약자인 것이다. 그러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실로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가지신 두 가지 특징을 그대로 묘사해주는 말이다. 앞으로 '주 하나님'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신성을 언급한 표현이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인성을 언급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6. 예수님의 이름의 2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께서 갖고 있는 '예수'라는 이름의 2가지 특징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는 '구원'의 이름이요, 또 하나는 '승리'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첫째로,예수께서는 구원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 구약시대 그분의 이름은 '여호와'였다(욜2:32). 하지만 신약에 들어와서 그분의 이름은 이제 '예수'가 되었다(행4:12). 왜냐하면 천하 인간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이 결코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이 친히 자기의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는 뜻을 지녔다(마1:21). 그런데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해야 한다고 언급했다(롬10:9). 즉 우리 죄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원래 하나님이셨는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파송되셨으며,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당신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언급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그분은 원래 주 하나님이셨는데, 인간 구원을 위해 친히 자신을 낮추시고 사람이 되셨으며, 흠없는 제물로 자신을 드리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속죄일 제사를 당신이 직접 집례하시므로 모든 인류의 죄를 속죄하고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라는 말은 구원의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승리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에 붙어있는 '그리스도'라는 표현이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라는 표현은 그분의 이름이며, '그리스도'라는 말은 그분의 직책을 일컫는 용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이 왜 승리의 이름이 되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과 짝을 이룬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계실 때에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당신은 그리스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베드로도 했을 뿐만 이나라(마16:16), 나사로의 여동생이었던 마리아도 그렇게 고백했기 때문이다(요11:27).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할 것은 '그리스도'라는 명칭이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에 공통적인 것은 인간으로서 예수님에게 붙여진 칭호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이 땅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게 붙어진 직책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예수께서 원래는 하나님이셨지만 우리 인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친히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께서 사탄마귀와 싸워 이겼고 그 이긴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결국 승리자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7. 왜 성도들은 치유와 축사시에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인가?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이 병을 치료하거나 귀신을 축사할 때에 과연 어떤 이름을 사용하셨을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다. 먼저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면서 못걷는자를 일어나 걷게 하였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점치는 여종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그녀에게서 나와"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질병과 귀신이 그들을 떠나가면서 치유와 축사가 이루어졌다. 그 뒤로부터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이 떠나갈 것을 명령하고 있으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첫번째 이유는 예수께서 왕의 직무를 잘 수행하시어, 이제는 하늘과 땅의 모든 주권을 쥐고 계시는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이렇게 왕이 되신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마귀와 싸워서 쟁취한 것이다(마4:1~11). 사실 그때는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로서, 40일간 금식기도한 직후였다. 그런데 마귀와 한 판 붙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귀신들의 대장인 마귀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사실 귀신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세례를 받았을 때에 하늘에서부터 커다란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었다. 그러자 사탄 마귀가 이 음성을 듣고는 예수님을 시험하러 찾아온 것이다. 그러자 드디어 두 왕들이 충돌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마귀는 이 세상 임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이미 마귀의 소유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귀가 아담을 이긴 이후 줄곧 사람들을 지배하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땅에 하늘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새 왕이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러자 두 왕은 필연적으로 싸워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 전쟁이 바로 마귀의 3가지의 시험이라 할 수 있다(마4:1~11). 그런데 마귀는 이 세 차례의 시험에서 예수님을 이기지 못하고 판정패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시험이 끝났을 때 그는 잠시 뒤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와신상담을 한 후에 3년 뒤에, 마귀는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을 꼬드겨서 결국 예수님을 죽게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가 불법을 저지른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사망권세는 오로지 죄를 지은 자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데, 마귀가 죄를 짓지도 않은 예수님에게 적용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빼앗아 예수님에게 넘겨주신다(계1:17~18).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이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으로 등극하셨다(마28:18).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가장 먼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권세 중에 왕의 권세를 차지하게 되셨다. 그러므로 오늘날 귀신을 축사하는 모든 사역자는 반드시 왕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사하고 있는 것이다(막16:18). 이미 귀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 자인 마귀를 대적할 수 있고, 그를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벧후2:19). 그렇다.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셨지만 최초로 사탄마귀의 유혹을 이기신 이긴 자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귀신에게 "너의 왕은 이미 진 자요, 너희들 모두는 십자가에서 이미 예수님에 의해 무장해제 당했으니, 너희들이 나를 주장할 수 있는 어떤 권한도 없음을 선포하노라. 떠나가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댜ㅏ. 

  둘째로, 성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께서는 3년반 생애동안 '제사장'의 직무를 성실히 잘 감당하시어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고 우리에게서 죄가 없다고 선언하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믿는 죄는 칭의를 얻게 되었고 회개함으로 인하여 깨끗함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미 회개를 통해 깨끗하게 된 사람의 몸에 귀신이 붙어있을 근거가 없다는 것을 치융축사 시에 선포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예수님의 피에 깨끗해졌으니, 너희는 더이상 내 몸에 남아있을 근거가 없어. 이제는 나가!"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셋째로, 성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할 수 있는 세 번째 이유는 예수께서 '선지자'의 직무를 잘 수행하시고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어, 하나님의 뜻을 알고 마귀의 정체를 알아서 그들을 꾸짖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원래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백성에게 전달해주는 자다. 그리고 백성들이 잘못하면 백성들을 책망하고 꾸짖는 자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축사와 치유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선지자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도 역시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고, 귀신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귀신에게 떠나가라고 꾸짖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꾸짖는데도 떠나가지 않으면 그들에게 칼과 불과 같은 무기를 사용하여 그들을 강제로 추방할 수 있는 것이다. 

 

8.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러므로 성도들이 이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에게 명령하고 또한 질병에게 명령할 수가 있다. 그 이유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3가지 이름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왕의 이름이 주어져 있다. 이는 언제는 명령할 수 있는 이름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마귀와 싸워 이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는 진 자에게 명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귀신을 쫓아낼 때에는 "진 자들아, 눈깔 깔어, 어디서 눈을 함부로 뜨고 있어"라고 선포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이제 영계와 육계에서 항상 다스리는 왕이시기 때문이다.

  둘째는 제사장의 이름이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모든 죄를 용서받은 자로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지은 죄들에 대해서 회개를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귀신들에게는 "너희들은 내 몸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가 없어. 어서 떠나가!"라고 명령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는 선지자의 이름이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이자 귀신의 정체를 아는 자이므로 귀신들에게 명령할 수 있다. 그래도 명령을 듣지 않을 때에는 꾸짖을 수가 있고, 그래도 나가지 않으면 강제로 추방할 수 있는 것이다. 

 

9. 나오며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제 누구라도 예수께서 주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예수께서 그 이름을 우리에게 위임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진 뜻을 알고 귀신을 축사할 때에, 병든 자를 고칠 때에 과감히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은 왕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모든 귀신에게 예수님을 대신하여 명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은 제사장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시고 제물이 되시어 속죄제사를 완성했으니, 우리가 회개하기만 하면 우리에게는 전혀 죄가 없기에, 우리는 귀신들에게 합법적으로 우리 몸에서 떠나갈 것을 명령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은 선지자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잘 파악하고 계셨다. 그리고 귀신의 정체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지자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꾸짖어야 한다. 그들의 권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박탈당했으며, 그들은 더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선포하고 꾸짖어야 한다. 떠나갈 것을 명령해야 한다. 그래야 귀신도 말을 듣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병든 자를 치유할 때에나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축사하려 할 때에는 '주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2023년 09월 24일(주일)

정보배목사

2023-09-17(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롯의 처를 기억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눅17:26~35)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p1gjBfRXPFA [또는 https://tv.naver.com/v/40877115]

1. 들어가며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이 시대에 사탄 마귀가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것을 지켜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구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살아서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정확한 답을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징조를 통해서 그리고 하늘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상황을 점검해 보았을 때 그 시기가 매우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을 두고 두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그것은 바로 그날이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이 말씀에 이어서 한 가지 말씀을 덧붙이셨으니 그것은 그날을 준비하는 자들은 꼭 '롯의 처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 예수께서는 롯의 때를 언급하신 이후에 굳이 롯의 처를 더 기억하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여기에는 특별한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지금 우리가 재림의 어느 시점에 와 있는가를 살펴보고,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다시 한번 새기고자 한다. 

 

2.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주님의 재림의 어느 시점에 와 있을까?

  사실 최근 요즘 들어와서 부쩍 자연 재앙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사실 2년 6개월 전만 해도 온 세상은 전 세계적인 '전염병'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은 '코로나'라는 전염병으로 온 세상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 뿐만이 아니다. 최근 들어서 중국과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이탈리아에 '지진'과 '홍수'가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특히 지난 9월 9일(토)에는 아프리카의 북부에 위치한 '모로코'에서 강도 6.8의 지진이 일어났다. 이 나라의 인구는 약 3,700만 정도 되는데, 인구의 99%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나라다. 그런데 이 지진으로 인하여 하루아침에 2,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건물 더미에 묻혀 죽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9월 10일(일)에는 바로 그 옆의 옆의 나라인 리비아(인구 700만 명)에 강력한 열대성 폭풍이 몰아친 후 곧바로 대홍수가 일어났다. 그래서 '데르나'라는 도시 위쪽에 위치한 2개의 댐이 갑자기 무너지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2년치의 폭우가 한꺼번에 내렸던 것이다. 그러자 멀리 있던 상류댐이 수압을 견디지 못해 터져 버렸고, 이어서 연쇄적으로 아래의 하류 댐도 터졌는데, 어찌나 물살이 셌든지 7m 높이의 물살이 도시를 휩쓸고 지나가고 말았다. 그러자 실종자 1만 명을 포함하여 2만 3천 명이 한꺼번에 죽는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지금도 바닷가에 시체가 둥둥 떠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 이 나라도 역시 이슬람을 믿는 인구가 97%나 된다. 그렇다면 이때 죽은 영혼은 다 어디로 간 것인가? 

  그런데 이것 뿐만 아니다. 지금도 전쟁 중인 나라가 있다. 작년 2월 24일에 발발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벌써 570일을 넘어 장기전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이 전쟁은 두 나라만의 전쟁이 아니라 이제는 국제전으로 확대될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전쟁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나라도 있으니, 중국이 대만을 2027년에 침공한다고 이미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안전한가? 100년마다 백두산의 화산이 폭발해 왔다고 하는데, 2025년이 100년이 되는 해라는 것이다. 그런데 벌써 마그마의 활동으로 인해 백두산 천지의 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형편이다. 이 화산이 폭발하면 폼페이 화산의 50배의 폭발력으로 인해, 화산재가 하늘을 뒤덮으면, 항공대란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지구의 온도까지 내려갈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요한계시록 6장에서 말씀하고 있고, 마태복음 24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자연의 대재앙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마24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재앙에는 이렇듯 '자연 재앙'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 재앙'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짐승인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에 의하여 성도들이 핍박당하고 죽는 일이다(마24:9~13).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때에 사탄 마귀는 무저갱에 갇혀 있는 상태다. 하지만 마지막 환난이 시작되면 사탄 마귀가 무저갱에서 올라온다. 그러면 순교자의 숫자가 채워질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것이다. 누구는 마지막 대환난이 7년 정도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고, 3년 반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지만, 실제는 그것보다는 짧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재앙은 견딜 수 없는 재앙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을 감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24:22). 고로 자연 재앙이 끝나면 아주 짧은 사람 재앙이 일어나면서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다. 

  특히 지금 천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날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직감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이제는 마지막 때가 되다 보니, 영안이 활짝 열려 천국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안이 활짝 열린 분들의 간증을 들어 보면, 지금 천국의 상황은 매우 긴박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갈 성도의 숫자가 얼마나 될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이기는 자들의 숫자는 정해져 있는데, 채워져야 할 144,000명의 좌석이 거의 다 찼기 때문이다. 이 좌석이 차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주의 재림의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우리 주님께서는 마지막 종말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마지막 종말의 상황을 어떻게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은 제자들이 인자의 날 하루 곧 주님의 재림의 날을 묻는 질문에 대답하셨는데, 그날은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다고 하셨다(눅17:26~27,28~30). 그럼 이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인가? 이 말씀은 정리해 보면, 노아의 때와 롯의 때는 다음과 같은 3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그날은 모든 것이 끝나는 심판의 날이라는 것이다. 노아의 때는 물로 심판하여 주님께서 세상을 끝냈으며, 롯의 때는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비롯한 4개의 성들을 다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사람들이 다 죽는 날이 그날들이었던 것이다. 고로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되면 모든 인류는 다 죽게 될 것이다. 살아서 부활체를 입고 지구를 떠나 주님께 불려 올라가지 않는 한 모든 인류는 다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날에 사람들이 두 개의 갈림길로 갈라지게 되는데, 그날에 갑자기 멸망당할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날에 구원받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날 갑자기 멸망에 처할 사람은 주님의 심판의 날을 전혀 예상치 않았고 그날을 대비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날이 올 줄을 알고 잘 대비하는 사람들은 그날이 구원의 날이 되는 것이다. 전자는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고, 후자는 노아와 롯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날이 될 때까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 것인지를 말씀해 주셨으니, 노아의 때처럼 그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갈 것이라고 하셨고, 롯의 때처럼 그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지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날이 올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다가 그날을 맞이한다는 말씀이다.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그때가 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날이 될수록 구원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노아의 시대에 과연 새로 구원받은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는가? 없었다. 노아의 시대에 노아의 가족 외에 구원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노아는 전도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아니다. 베드로후서 2:5의 말씀에 따르면 그때 노아는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회개하라고 외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벧후2:5). 하지만 노아는 당시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노아는 얼마 동안 회개를 외쳤던 것인가? 그것은 적어도 70~80년 정도는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짓고 숨쉬는 동물들을 그곳에 불러들이고, 노아의 식구들 모두로 하여금 그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노아에게는 아내와 더불어 아들 셋과 자부들 셋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아가 500세 된 이후에 아들들을 낳았다고 했으니, 아들들이 장성하여 장가갔을 것을 계산하면, 노아의 방주는 70~80년 정도 지은 것이다. 그런데도 단 한 명의 열매도 맺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마지막 때에는 전도가 안 되는 시기인 것이다.

  그것은 롯의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롯도 그 성을 멸망시키러 온 천사들로부터 그 성을 불과 유황으로 멸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서둘러 그 성을 빠져나와야 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집에 살고 있는 자신의 처와 미혼의 두 딸들을 데리고 나와야 하는데, 이미 시집보낸 두 명의 딸들과 사위들이 걸렸다. 남아 있으면 그 성과 함께 멸망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롯은 그 밤에 당장 딸네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사위들에게 말했다. 곧 있으면 이 성이 멸망당할 것이니, 지금 당장 함께 성밖으로 피신하자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두 사위들은 장인의 말을 들었을 때 그말을 농담으로 여겼다(창19:14). 이는 마지막날이 되면 그날이 왔다는 말을 사람들이 곧이듣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밤새도록 이야기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러자 이제 동이 터오려는 시각이 되자 천사들은 롯을 재촉하였고, 그는 아내와 두 딸들의 손을 붙잡아 성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러자 불과 유황이 하늘로부터 비 오듯 쏟아져 온 성이 불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럼 왜 롯은 그 성의 멸망 중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롯을 위해 기도했던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때문이었다(창19:29). 그렇다. 누군가를 위한 중보기도는 언젠가는 열매를 맺는 날이 온다. 그것은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기 전에 역사하는 것이다. 

 

4. 왜 주님께서는 종말의 때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롯의 처를 계속 기억하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한 가지 더 중요한 당부를 하셨다. 그것은 '롯의 처를 기억하고 있어라'로 하신 것이다(눅17:32). 이 명령은 현재 명령법으로서 한 번만 기억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것을 기억해서, 그것을 상고해 보고 회상해 보고 깊이 묵상하라는 뜻이다. 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은 이 말씀이 마지막 때에 구원에 관한 매우 중대한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는 이렇다. 롯의 처는 그날 분명히 천사의 손에 이끌려 멸망성으로부터 빠져나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날 멸망성은 불과 유황이 비 오듯 내려와서 불태워 없어졌다. 그러니까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그때 노아의 처는 비록 불과 유황이 타는 심판은 면했지만, 주님의 심판을 완전히 면한 것이 아니라 맨 마지막에 가서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랬다. 그녀는 천사가 그녀에게 자비를 베풀었을 때에 그녀에게 들려준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그곳에 왔던 천사들은 대체 누구였는가? 그들은 여호와의 천사들로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보냄을 받은 천사들이었다(창19:13). 그러므로 천사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때 천사들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들에게 과연 무엇에 주의하라고 했는가? 그것은 도망하면서 성밖의 광야를 지나갈 때,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그 광야에 머물러 있지도 말라고 했다.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도피성 곧 안전한 피난처인 소알성까지 곧장 가라고 했다(창19:17). 그래야만이 그들의 생명이 보존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롯의 처는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는가? 그녀에게서 즉시 생명이 취해지고 말았다. 그대로 소금기둥으로 변하면서 그녀가 멸망당했기 때문이다(창19:26). 왜냐하면 그녀는 그 순간까지도 소돔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멸망을 당한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날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것을 롯의 처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천국을 향해 가는 성도들이라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 마지막 심판의 날에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눅17:31).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있는 세간의 물건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의 처는 남겨두고 떠난 자기의 집에 대한 미련을 마저 접지를 못했다. 그것이 어찌되고 있는지를 눈으로 확인하려고 했다. 그래서 뒤를 돌아다보았는데, 그러자 그녀의 생명이 그녀에게서 떠나고 만 것이다. 그녀가 비록 멸망성인 소돔성에서는 빠져나왔지만, 성밖의 광야에서 그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하신 말씀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첫째,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메시지를 듣고 구원받을 사람은 매우 적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소돔성에 살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날 불에 타 죽었으며, 롯의 8명의 가족들 중에서 두 명의 딸들과 두 명의 사위들이 다 불에 타 죽었기 때문이다. 그날 구원받은 자는 오직 롯의 집 안에 살고 있던 그의 가족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전적으로 주님의 자비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구원받지 못한 채 구원에서 탈락되는 자가 중도에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롯의 처'인 것이다. 롯의 아내는 그날 분명 멸망성에서 빠져나왔었다. 하지만 영원한 피난처를 향해 가다가 그만 중도에 죽고 말았다. 왜냐하면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그만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신이 사 둔 여러 채의 집들이 아까웠을 것이다. 그리고 은금보석과 재물들과 온갖 옷들과 가재도구들도 아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대한 욕심과 미련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것들을 마음에서 온전히 내려놓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녀가 비록 일차적으로 구원을 받았을지 몰라도, 결국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5. 오늘날 롯의 처가 가르쳐 주는 구원에 관한 중대한 교훈은 무엇인가?

  그렇다. 한 번 주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세상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자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하고 마는 것이다(고전9:27, 빌2:12, 계3:5).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미 구원받은 자라 할지라도 그날에 버림받을 자가 있다는 것을 롯의 처의 예표를 통해 미리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날에 있을 상황에 대해 두 가지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눅17:34~35). 그것은 두 명의 남자들과 두 명의 여자들에 관한 비유다. 두 명의 남자들이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밤에 한 침대에 있었다. 그런데 그날 한 남자는 데려감을 받지만, 딴('헤테로스') 남자는 버려둠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에 두 명의 여자들이 낮에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둘이 같이 하나의 맷돌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아니겠는가 싶다. 그런데 한 여자는 데려감을 받지만, 딴('헤테라'='헤테로스'의 여성형) 여자는 버려둠을 당하게 된다. 이 두 가지 비유는 밤과 낮의 상황을 언급하는 것이자, 그날까지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쉬는 모습을 말해 주고 있다. 하지만 그날 어떤 이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로 휴거되겠지만 그날에 그만 버림을 받는 자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는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 사람 안에 딴 생각으로 가득 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천국, 영혼 구원, 회개, 말씀에 순종이 들어 있지 않고, 오직 세상 것을 즐기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마음만 들어 있었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마치 롯의 아내처럼 말이다. 몸은 지금 성밖으로 나와서 소알성으로 피신하고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성 안의 자기의 재산과 재물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의 3가지 비유(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열 처녀 뿐만 아니라 달란트 받은 종들도 다 믿는 이들로서 그들은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들이었고, 또한 주님의 것을 맡은 주님의 종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의 시간에 둘은 크게 서로 갈라지고 만다. 열 처녀 중에서, 이미 등은 가지고 있었으나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던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오는 바로 그날에 버림을 받았고, 깨어서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만이 성안으로 신랑과 함께 들어갔기 때문이다(마25:1~13). 그리고 달란트를 받은 주의 종들 가운데서도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악하고 게을렀기에, 주인이 되돌아와 결산하던 바로 그날에 쓸모없는 종이 되어 바깥 어둔 데로 던져져서 거기서 슬피 우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마25:14~30). 고로 미련한 다섯 처녀와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다 이미 주님의 은혜로 일차적인 구원은 받았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는 바로 그날에 구원에서 탈락되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더불어 '양과 염소의 비유'(마25:31~46)에 나오는 '염소'는 주님을 믿는 자들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들의 외식 때문에 결국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멸망의 사람을 예표한다. 이는 마치 롯의 말을 듣고도 농담으로 여겼던 롯의 두 사위들과 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가 있다.

 

6. 나오며

  지금은 대체 어느 시대인가? 우리는 대체 어느 경점에 와 있는가?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은 재림의 날이 가까울수록 전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그때가 되면 가족을 구원하기도 매우 어려울 것이다. 롯의 경우를 보라. 그의 8명의 식구들 가운데 단 4명 만이 멸망을 피했다. 그렇다. 그때가 되면 전도가 안 되어 구원받을 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해야 한다면 바로 지금해야 한다. 대환난의 날이 닥치기 전에 말이다. 그때가 되면 사탄이 직접 무저갱에서 올라와서 활동하기 때문에 걷잡을 수 없는 핍박과 환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자기의 믿음 지키기도 어려운 시기가 바로 그때가 된다. 그러므로 전도해야 한다면 지금 전도해야 한다. 가족을 구원해야 한다면 지금 귀신으로부터 가족을 건져내야 한다. 가족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 지금 조상 죄를 회개하고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때 가서 아무리 외치고 설득하고 하소연한다고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울려면 지금 울어야 한다(눅23:28). 지금 우는 자는 그때에 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시기야말로 폭풍전야와 같은 시기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내 이웃과 친척과 내 가족을 구원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인 것이다. 전도가 가능한 날이 많이 남아 있다고 판단하지 말라.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위해 중보기도 해 줘야 한다면 지금 중보하라. 그리고 누군가를 전도해야 한다면 지금 전도하라. 그리고 가족의 영혼을 위해 울어야 한다면 지금 울라. 

 

 

2023년 09월 17일(주일)

정보배목사

2023-09-10(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영의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롬10:11~13)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SlBBDKDOplA [또는 https://tv.naver.com/v/40839928]

1. 들어가며

  사람들이 주 예수의 이름이 어떤 이름인지를 체험하는 방법에는 대체 어떤 것들이 있는가? 기본적으로 성도들은 기도할 때에 주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다. 왜냐하면 기도의 맨 마지막 순서에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고 마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거나 치유할 때도 역시 우리는 주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다. 이때에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과 질병을 향해 단호하게 명령하고 선포해야 한다. 그러면 이것으로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방법이 더 이상 없는 것인가? 아니다. 주 예수의 이름은 또 다른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능력을 맛보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에 가져다 주는 축복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과연 주 예수의 이름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또한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으로 옮기는 자는 오늘 이후로 놀라운 기적적인 일들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2. 신앙의 실체를 체험하는 3가지 실행들은 무엇인가?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신앙의 힘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실체적인 실행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오늘날 성도들은 관념적인 신앙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자기가 예수님을 믿어 거듭나게 되면 자기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일이며, 자신이 회개하면 하늘의 행위책에서 자기의 죄가 지워진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실제 자신의 영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 다만 그렇게 될 것으로 믿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믿는 가운데, 신앙의 실제를 지금도 현장에서 체험하는 실행들이 몇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에는 '예수님의 피'가 있고, '성령의 불'이 있으며, '예수의 이름'이 있다. 

  첫째, 예수님의 피는 사실 2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피'는 우리가 고백한 죄들을 용서해 주는 역할을 한다(엡1:7, 요일1:7).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우리가 직접 눈으로 지켜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의 효능에 더 실제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의 피의 보호의 기능이 있다. 우리가 그분의 피를 믿음으로 뿌리고 덮고 바르게 될 때, 그 피가 우리를 보호해 주고 지켜 준다는 사실이다(출12:23). 이것의 시작은 B.C.1445년경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던 때에 있었다. 그날은 애굽에 속한 모든 장자와 첫것을 다 죽이는 재앙의 날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재앙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셨으니, 그것은 흠없는 유월절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자기들이 거주하는 집의 좌우 설주와 문인방에 바르는 것이었다. 그러면 장자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신약의 사도 바울은 그날 잡은 유월절 양이 곧 그리스도라고 해석했다(고전5:7). 그러므로 당시에 유월절 양의 피가 장자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해 주었듯이,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피가 온갖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둘째, 성령의 불도 2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먼저는 심판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심판의 날에 그 불이 모든 사람의 공력을 다 시험해 볼 것인데 이때 공력이 불에 타지 않으면 그것이 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이 마지막 심판의 때에 불신자들을 태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불타는 지옥 안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성령의 불은 이것 외에 또 하나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지금 성령의 불이 직접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면 내 몸이 실제적으로 뜨겁게 될 뿐만 아니라, 귀신도 태울 수가 있는 것이다(계20:10). 이때 우리 몸 안에 들어온 성령의 불은 사악한 귀신들도 함께 태워버린다. 그러므로 귀신들도 이 불을 받게 되면 견디다 못해 우리 몸으로부터 떠나버린다. 또한 이 불은 내 몸의 체온도 올려준다. 그러면 몸이 뜨거워진다. 이때 사람의 온도가 약 0.5도 내지는 1도 정도가 상승하게 된다. 그러면 암병에서 낫게 되고 암병에 걸리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암병은 모두 다 몸이 차가워서 생기는 질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성령의 불은 심판하는 용도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불은 지금도 귀신을 쫓아내며 우리 몸의 체온을 상승시켜 몸의 면역력을 높여 주고, 또한 병든 자도 치료할 수가 있다. 

  셋째, 마지막으로 예수의 이름도 여러 가지 방면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는 기도할 때에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 그리고 축사할 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다. 그리고 병을 치유할 때에도 역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선포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주님께 나에게 일하시도록 요청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에 그동안은 아마도 한 번 내지는 세 번 정도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 이름의 능력은 그 이름을 계속해서 부를 때에 놀라운 기적을 가져온다. 

 

3. 주님의 이름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11~13의 말씀에서 주의 이름이 지닌 3가지 효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수치)을 당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롬10:11). 둘째, 그분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게 되면 부요함(풍성함)을 얻게 된다고 했다(롬10:12). 셋째, 그분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게 되면 결국 구원을 받게 된다고 했다(롬10:13).

  그렇다면 주님의 이름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데에는 사실 다음과 같은 3가지 방면이 있다. 첫째, 주님의 이름을 믿는 데에 사용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롬10:9). 둘째, 주님의 이름을 명령하고 선포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다. 그러면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칠 수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될 것이며 또한 주님의 부요함이 내게 들어오는 경험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4. 예수의 이름은 어떤 이름인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주님의 이름은 대체 누구의 이름인가?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주의 이름이란 대체 어떤 이름을 일컫는 것인가? 사실 성경에서 진정 '주님'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는 총 세 분이다. 그분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여호와'께서 주님(아도나이)이라고 불리어졌다(창15:8).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예수'께서 주님(퀴리오스)이라고 불리어졌다(마8:2).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성령'이 주님(퀴리오스)이라고 불리어졌다(고후3:17).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10:11~13에서 언급하고 있는 주의 이름은 누구의 이름인가? 그것은 롬10:12의 말씀 안에 힌트가 들어 있다. 먼저 롬10:12의 말씀을 살펴보자. "[왜냐하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둘 다] 차별이 없음(없기 때문)이라. 한 분이신(같은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주이시기 때문에), 그를 [간절히] 부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10:12)" 그렇다. 이 말씀에 따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나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한편 구약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할례받은 언약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다. 그러므로 그때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시다. 하지만 예수께서도 공생애 때에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오히려 그를 배척하였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보다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붙들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죽고 부활하신 이후에 모든 혈통적이고 민족적인 특권을 폐지시켜 버리셨다. 이제는 모든 민족(이방인들)이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마28:19~20).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구약시대의 하나님과 예수님은 똑같은 한 분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제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륜상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오신 이후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모든 차별을 폐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있는 시대가 활짝 열렸다.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원래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분은 한 분 하나님의 새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계3:21).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을 구약시대의 방식으로 일컫는다면, 여호와의 이름인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시대 여호와의 이름이란 대체 어떤 이름이었는가? 구약시대 그분의 이름은 스스로 계신 이의 이름이요(출3:14), 창조주의 이름이자 전능자의 이름이었다. 고로 오늘날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스스로 계신 이의 이름을 부른다는 뜻이요 창조주와 전능자의 이름을 부른다는 뜻이다. 

 

5. 주 예수의 이름이 지닌 4가지 효능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경 전체가 들려주는 예수의 이름의 효능은 어떤 것인가? 성경 전체를 동틀어서 그분의 이름이 가진 효능을 살펴보면 예수의 이름은 다음과 같은 4가지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그분의 이름은 '구원과 용서'를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그분의 이름을 믿고 부를 때에 죄사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행2:38, 12:43, 22:16).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믿고 부를 때에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이다(요3:16, 20:31).

  둘째, 그분의 이름은 '치유와 회복'을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할 때에 병든 자가 낫게 되기 때문이다(행3:6, 4:10, 약5:14). 그리고 잃었던 것들도 그분의 이름으로 다시 되찾게 되고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그분의 이름은 '능력과 권세'를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그분의 이름 앞에 모든 만물이 다 복종하며 천사도 순종하기 때문이며, 귀신들도 다 굴복하기 때문이다(행16:18). 그렇다. 그분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다 그분 앞에 복종한다(빌2:9~10). 그러므로 그분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지금도 역시 귀신들이 떠나간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위임되어진 예수의 이름은 하늘과 땅의 왕이신 예수님을 대신하는 암행어사의 마패와 같기 때문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그분의 이름은 '응답'을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시행하시기 때문이다(요14:13, 16:23~24). 고로 예수의 이름으로 요청할 때 초자연적인 일도 일어나게 되며 우리의 문제들도 해결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구원과 용서를 경험할 수 있으며, 치유와 회복, 능력과 권세를 경험하게 되고,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받는 놀라운 응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6. 주 예수의 이름은 실제적으로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을 실제적으로 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에는 3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기도할 때에 그분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때는 '주여'라고 부르거나 '주여, 주여, 주여'라고 외치면 된다. 둘째는 명령과 선포할 때에 그분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귀신에게 명령하고 질병을 향해 선포할 때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그분의 이름을 불러서 그분의 권세와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사용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서, '주여'라는 말을 계속해서 사용함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사실 초기 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주 예수여!'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좀 더 살을 붙여서, '주 예수 그리스도여!'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문구 기니까 짧게 줄여서 '주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여'라는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불렀다. 그러면 예수께서 성령으로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어떤 일을 행하시게 된다. 그러면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도 낫게 되는 것이다. 

 

7. 호흡기도를 통한 자가 축사 방법은 어떻게 실행할 수 있는가?

  우리 성도들은 초기 교회 성도들이 실행했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호흡기도'에 대해 다시 배워야 한다. 초기 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는 기도의 실행을 많이 실천하였다. 그리고 그때에 마음 속에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불렀는데, 그것은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한 것이다. 즉 코로 숨을 들이마실 때에는 성령을 마신다는 마음으로 하고, 숨을 내쉴 때에는 '주여'라고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숨을 내쉬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숨을 내쉴 때에는 귀신들이 내 몸속에서 떠나간다는 마음으로 숨을 내쉬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케 될 뿐만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귀신이 빠져나가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기도 방법은 과연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안식 후 첫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20:21~22). 그렇다. 모든 사람은 숨처럼 바람처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성령을 마실 수가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했다. 오순절 이후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성도들 속에 들어오는 것이기에, 이제 주는 성령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주의 영이 있는 곳에서 자유가 있다고 언급했다(고후3:17). 그렇다. 이제 성령은 주님으로서 호흡처럼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악한 영들을 내보내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숨을 내쉴 때에 그러한 영들이 나가라고 명령하면, 그들이 우리 몸밖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이것을 실행하는 이는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또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있을 때에 가능하다. 그러면 숨을 내쉬면서 "주여!'라고 외쳐보라. 그러면 우리 속에 있는 귀신들도 내 속에서부터 밖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8. 호흡기도를 통한 자가 축사는 어떤 유익이 있는가?

  만약 호흡기도를 통해서 성령은 받아들이고, 내 안에 받아들인 성령과 이미 우리 속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이 하나되어 우리 속에 있는 귀신들을 내보낸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그때에는 우선 첫째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점차로 우리가 성령에 장악되는 상태가 된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더 성령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는 최적의 상태가 된다. 그런 상태에서 숨을 내쉬면서 "주여!"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둘째로, 내 속에 있는 더러운 영들이 우리 속에서 떠나가게 된다. 그러면 귀신이 붙잡고 있었던 저주들이 하나씩 둘씩 떠나게 된다. 그러면 우선적으로 질병이 낫게 된다. 귀신이 떠나가면서 질병을 놓고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질도 풍성해진다. 물질을 가로막고 있던 귀신들이 떠나버리고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부요하게 된다고 한 말씀이 그대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적인 모든 눌림들이 사라짐으로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러면 참다운 기쁨과 행복이 내게도 찾아온다. 마음에서부터 평안을 느끼게 되고 우리가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살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더 거룩해지고 더욱더 주님과 친밀해진다. 

 

9. 나오며

  이제까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면서 과연 주님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을까? 아마도 '주여!'라고 한 번만 불렀던지, 아니면 '주여! 주여! 주여!'라고 세 번 정도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 강력한 기도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숨을 들이마실 때에는 성령을 숨처럼 마시고, 숨을 내쉴 때에 '주여!'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귀신을 내보내는 것이다. 이때 계속 호흡을 하면서 '주여!'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된다. 그리고 이것을 반복해서 계속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기도해 보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루 종일 그렇게 기도해 보라. 놀라운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주의 영이 우리 속에 계속해서 공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 속에 있는 악한 영들이 호흡을 통해 밖으로 배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귀신이 가져다 주었던 온갖 저주들도 같이 떠나게 된다. 그러면 저주들이 점차 내게서 사라지면서 우리에게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강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귀신이 떠나갈 때에, 그냥 쉽게 떠나가지 않고 발버둥치는 귀신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말고 무조건 '주여!'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라. 그러면 주님께서 그 악한 영들을 처리해 주실 것이다. 때로는 귀신들이 하품하면서 떠날 수도 있고, 기침과 가래를 내뱉으면서도 떠나갈 수 있다. 때로는 손과 몸에 진동이 오거나 땀이 나거나 몸이 뜨거워지면서 귀신이 떠나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서 병이 낫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느 시간이 되면 불안과 근심 걱정도 사라지게 된다. 주님의 평강이 나를 사로잡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생활이 주님의 임재가 상시 임하는 상태가 된다. 그러면 영안이 열리는 자도 있고, 기도와 동시에 환상이 보이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병든 자에게 손을 얹으면 그냥 낫게 되는 일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호흡기도의 놀라운 위력이다.

 

2023년 09월 10일(주일)

정보배목사

2023-09-03(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하나님의 은혜(1)] 바울, 그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였다(고전15:9~1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Kf77dmXvjzU [또는 https://tv.naver.com/v/40839726]

1. 들어가며

  '은혜',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의 하나다. 왜냐하면 설교를 듣고 나서도, 간증을 듣고 나서도 하는 말이 "오늘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초대교회 당시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의 반응이었다(행4:33). 그리고 '은혜'는 성도들 중에 자매님의 이름으로도 자주 쓰이곤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에 대한 본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 주시는 것으로 알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르치고 있는 이들이 있기도 하다. 과연 그럴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은혜가 가지고 있는 참뜻이 무엇인지를 한번 살펴보고, 왜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은혜를 받은 자'요, 자신이 어떤 사도들보다 수고했으나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고 고백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더불어 오늘날 회개와 천국복음을 듣고 있는 나 자신은 과연 은혜를 받은 자에 해당하는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의 참뜻을 알기 위해서는 은혜의 본질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사실 '은혜'라는 말은 구약성경에도 나오고 신약성경에도 나온다. 그런데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은혜는 히브리어의 단어가 있고 헬라어의 단어가 있다. 히브리어로 '은혜'는 '헨'(창6:8)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쓰였고, 이어서 '하난'(창33:11) 혹은 '헤쎄드'(욘2:8)라는 단어도 많이 쓰였다. 그리고 헬라어는 오직 한 가지 단어가 사용되었으니, 그것은 '카리스'(눅1:28)라는 단어다. '카리스'는 '카라'(기쁨)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그 뜻은 '은혜, 친절, 자비, 호의'를 뜻한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가리킨다. 그리고 '카리스'라는 단어는 받는 입장에서 볼 때에는 '감사'라는 뜻으로도 쓰인다(딤전1:12). 그리고 이 단어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푸시는 호의라는 뜻으로 쓰일 때에 가장 적합한 단어는 아마도 우리말로 '은총'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그 뜻은 주로 어떤 뜻으로 쓰이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어떤 호의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데, 그중에서도 자신은 결코 호의를 받을 만한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없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셨다는 뜻으로 이 단어가 사용된다. 

 

3. 은혜가 베풀어지는 3가지 방면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에 그 은혜는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인가? 그것은 약 3가지 방면에서 나타난다. 첫 번째는 구원의 방면에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나타나고, 두 번째는 선택하심의 방면에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나타난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은사의 방면에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인간은 오직 은혜로 선택하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꾼이 되어 하늘에서 받을 상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오직 은혜로 은사를 받습니다". 그렇다. 사실 우리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모두가 사망 선고를 이미 받은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형을 집행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로 결정하셨다. 그러므로 오늘까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하늘의 사역자로 쓰임받을 수가 있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로 일할 때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사들과 능력을 받아서 사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4. 바울은 왜 자신을 은혜받은 자라고 고백하였는가?

 그런데 바울은 왜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자라고 말하고 있을까? 그것은 위에서 말했던 3가지 방면에서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서 그를 찾아와 만나 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았을텐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때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서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사도'라고 하는 하늘의 직분을 받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받았던 '사도(아포스톨로스)'라는 직책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직책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 직접 주께로부터 선택하심을 받은 자라야 하며, 또한 천국복음 전파를 위해 직접 주께로부터 이 세상으로 파송을 받은 자라야 사용할 수 있는 직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도들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는 그의 고백은 맞는 고백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의 12사도들처럼 주님이 살아계셨을 때에 그분으로부터 직접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부활 승천 이후 주님께서는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찾아오셨고 또한 그에게 사명을 주어 그를 세상으로 파송해 주심으로 그는 사도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한 상태에서 난 자 같은 자로서 주님의 사도가 된 것이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오직 은혜로 남들이 절대 깨달을 수 없는 영적인 진리들을 깨달을 수 있었고, 또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많은 영적 은사들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그는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약 5년이 지난 시점(A.D.34년경)에 비로소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가 주님으로부터 직접 배웠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사도들보다도 더 선명하게 주님의 사역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성찬식의 장면과 그 말씀은 지금까지도 마태나 마가 혹은 누가의 기록보다 더 확실한 말씀이라고 인정을 받고 있다(고전11:23~25). 그리고 그는 오직 '은혜로', 구약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놀라운 해석 방법을 창안해 냈으니 그것이 바로 '모형론적 성경 해석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는 구약에 나오는 모든 사건이나 등장인물을 곧 그리스도를 설명해 주는 모형이라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에 자기들을 죽음의 천사로부터 보호해 준 것은 어린양의 피였는데, 그때 어린양과 그 피가 곧 예수님이고 그분의 피라고 해석하는 것이다(고전5:7). 그리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무려 40년 동안이나 물 없는 광야에서 물을 마시고 살았는데, 이때 쪼개진 반석이 곧 그리스도라고 해석하는 것이다(고전10:4). 또한 바울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깨닫고 그것을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 3장에 나온다. 그것은 비록 이방인들이라도 할례받은 언약 백성인 유대인들과 똑같이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며,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었다(엡3:2~6). 그러므로 이방인 중에서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구약의 어떤 성도들도 누리지 못했던 모든 종류의 성령의 은사들과 능력을 거의 다 받아서 복음 전파에 사용할 수 있었으니, 그는 지혜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 병 고침의 은사, 방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 예언의 은사, 환상의 은사, 영안 열림의 은사, 귀신쫓는 은사, 성경을 깨닫는 은사, 성경을 꿰뚫는 은사, 설교의 은사 등을 받아서 복음 전파에 사용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영이 입신하여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삼층천'에도 갔다 왔고, 이 세상에 보내어질 영혼들이 창조되어 성장하고 있는 곳인 '낙원'에도 갔다 온 바 있다(고후12:2,4). 그는 사실 오직 주의 은혜로서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던 것이다. 

 

5. 하나님께서는 왜 바울에게 이러한 은혜를 베푸셨는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이러한 은혜들을 베풀어 주셨는가? 그것은 그것을 설명할 다른 방법이 있다. 오직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로 그에게 은총을 베푸신 것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은혜 중에서 구원의 은총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주시려고 하시는 은총에 속한다. 그러나 아무나 다 그 은총을 받지는 아니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라. 사실 1885년에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구원의 은총을 직접적으로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왜 나에게 예수님을 알려주지 않아서 나로 하여금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지 않았습니까?"라고 하나님께 항변할 수는 없다. 복음의 초기 단계에서는 아무래도 유대인으로 태어나야 구원받을 확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구원받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태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 당시에 유대인들이 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는가? 그것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거의 대부분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지옥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가 당시에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또한 그가 사도라는 직분을 맡게 된 것 역시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나님께서 그를 주권적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선택하신 것이지,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자원한 것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지막으로 그가 성령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은사들을 받게 된 것도 역시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러한 은사를 주신 것은 바울이 무엇인가를 잘해서 주신 것이 아니었고 다만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그의 사역을 완성하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사도 바울만큼 많은 은사와 능력을 받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는 사실 예수님의 12제자들보다도 더 뛰어난 지혜와 은사를 받았으며, 계시를 받았다. 그리고 하늘의 능력을 받아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이를 깨닫게 된 사도 바울은 오직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나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이렇듯 엄청난 것들을 받을 자격이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러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6. 나오며

  하나님께서는 왜 바울에게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주셨는가? 그것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어떤 다른 방법이 없다. 그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말은 그 일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속한 뜻과 영원 전에 그를 그렇게 쓰시고자 하는 목적을 따라 실행된 것이었다는 것이다(딤후1: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망의 골짜기로부터 불러내셨고, 그를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로 쓰신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세운 인류 구원의 경륜을 이루고자 하심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이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피력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3:8)" 그렇다. 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그렇게 선택하시고 쓰셨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사랑을 모든 이들에게 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서 다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그를 불러 쓰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통하여 이러한 많은 진리들이 선포되고 있기 때문에, 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것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대에 베푸시는 은혜에 나도 동참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따라 그대로 그의 인생을 연출할 것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별개의 문제이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루겠다.

 

2023년 09월 03일(주일)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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