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31(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옛 사람이 새 사람이 되기 위한 핵심 요체(要諦)는 무엇인가?(엡4:22~24)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fOD5wpGgxng [또는 https://tv.naver.com/v/45422941]

 

1. 들어가며

어떻게 하면 사람이 바뀔 수가 있는가? 특히 내가 예수님을 믿은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이 잘 바뀌지 않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후5:17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기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자기는 분명히 질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자기가 잘 바뀌지 않으며 또한 자기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지 의문을 갖는다. 그래서 여기 저기 방법을 찾아본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상태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우선적으로 믿기로 결정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나는 정죄함도 받지 않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을 계속해서 세뇌시킨다(롬8:1~2). 그리고 또 하나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갈2:20). 그런데 성령이 충만했을 때에는 자아를 죽음에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좋지 않는 상황에 찾아오면 어느새 옛날의 상태로 되돌아가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옛사람의 성품과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지금부터 그 답을 찾아가보자.

 

2.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실행은 결국 무엇이 문제인가?

그리스도인들 중에 많은 이들은 오늘도 여전히 더이상 죄를 짓지 않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축복된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동안 예수님을 성품을 닮아가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기 시작한다. 그래서 결국 발견하게 되는 사실은 갈2:20에 나온 말씀처럼,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십자가'란 '고난'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신의 자아를 죽음을 넘기는 십자가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기는 연습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죄 짓기를 좋아하고 세상을 즐기려 하는 옛 자아 곧 자기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훈련을 계속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 자신을 향해 "너는 십자가에서 못박혔고 이미 2천년전에 주님과 함께 죽었으니, 너는 이미 죽은 채 있는 자다. 그러므로 너는 화를 낼 수 없어, 어느 시체가 화내는 것 봤니? 그리고 과연 시체가 음란한 것 봤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야"라고 자기자신에게 적용을 한다. 하지만 어느날 참고 참다가 폭발하는 날이 오고야 만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 것인가? 그것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겼다고 할지라도 또 한 가지를 덜 실천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내 속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의 실체를 제거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죄된 본성'이란 단순히 어떤 성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된 본성을 인격화시키면 그것들은 곧 우리 몸에 거하는 사탄마귀의 부하들 곧 귀신들이기 때문이다(창3:14, 마12:43~45). 그러므로 귀신을 내 몸에서 제거하지 않는 한 귀신은 언제든지 나를 다시 죄짓는 데로 끌고 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귀신을 내 몸에서 제거하는 일 곧 축사사역을 하지 않았으면, 결국 그리스도처럼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를 아무리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할지라도 어느날 귀신들이 다시 혈기분노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때면 그것을 당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혈기분노가 치밀어 올라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갈라디아서 2:20의 말씀을 읽을 때에 간과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기 전에 이미 내 안에 살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귀신들이다. 예수께서 내 안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귀신들도 우리 몸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믿는 자들 속에 성령으로 들어오실 때에, 성령께서 우리 몸 안에 있는 귀신들을 다 쫓아내신 후에 들어오신 것이 아니다. 여전히 귀신들이 내 몸에 있는 상태에서 들어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 성령을 모셨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귀신들이 내 몸 속에 있으니, 그것들이 어느 순간에는 활동하면 우리는 이내 다시 죄를 짓고 마는 것이다.

또한 우리 몸 속에 들어있는 귀신들은 반드시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저주들이다. 왜냐하면 귀신들은 저주받은 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할지라도 귀신들이 주고 있는 저주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없으며, 질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또한 자녀에게까지 이어진 저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다.

 

3. 귀신들이 들어있는 자신의 육체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설령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긴 채 있다 할지라도 축복된 삶을 살아가려면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좀 전에 언급한 것으로 내 몸 속에 들어있는 귀신의 문제다. 왜냐하면 오늘날 내가 축복된 삶을 살지 못한 채 저주받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자아를 죽음에 넘기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내 안에 예수믿기 전에부터 거주하고 있는 귀신들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그놈들을 내 몸에서 제거하지 않는다면, 가난의 문제는 여전히 지속될 것이며, 질병의 문제 또한 해결받지 못한 채 고통을 받으며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녀의 앞길도 역시 계속해서 막힐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자신의 자아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 속에 들어와 있는 귀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이다. 고로 내 속에 들어있는 귀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진노가 내게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골3:5~10)

골3:5~10 그러므로 [너희는] 땅에 있는 지체[들]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더러움)과 사욕(욕정)과 악한 정욕과 [그리고]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통하여), [불순종의 아들들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오고 있다) 7 너희[자신들]도 [이]전에 그[것들] 가운데[서] 살(살고 있어왔던) [그]때에는 그[것들] 가운데서 행하였으나(걸어다녔다) 8 [그런데] 이제는 너희[자신들]가 [역시] <이> 모든 것[들]을 [단호하게] 벗어 버리라 곧 분함(분노)과 노여움(격분)과 악의(나쁨)와 비방(중상)과 너희[의] 입의(입에서부터 있는) 부끄러운 말(상스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고 있어]라. 옛 사람과 그[의] 행위[들](실행들=프락시스)를 벗어 버리고(버린 후에) 10 [시간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옷]입었으니(입은 후에)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하셨던) 이의 형상을 따라[서] [온전한]지식에까지(안으로)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새로워지고 있으면서)

그러므로 자신의 육체 속에 들어있는 귀신의 문제를 우리는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를 쉽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때 자신의 저주도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여전히 저주 가운데 놓여있다. 왜 그러한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성취한 일이 온전히 내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귀신을 내 몸에서 제거시키기 위하여 회개를 하는 것이다. 특히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이전에 내 몸에 들어있던 저주의 실체로서 귀신들이 내 몸에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야 저주의 문제가 비로소 끝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비로소 형통의 축복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지라도 귀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한 , 가족의 영혼을 구원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녀들은 부모의 변화된 모습,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지 않은한 하나님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신의 부모가 예수님을 믿고 있어도 여전히 지지리궁상을 떨고 살아가며, 병들어서 아파하는 삶을 살간다면, 자녀는 하나님을 신뢰하기가 매우 어렵다. 부모가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데 맨날 병원신세를 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신앙고백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4.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22~24에서 믿는 자들에게 과연 무엇을 요청하였는가?

고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모든 저주에서 우리가 벗어나기까지 우리가 실행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엡4:22~24에 나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헬라어를 가지고 직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엡4:22~24 너희는 유혹(속임)의 욕심[들](욕망들)을 따라[서] 썩어져 가는(부패되고 있는), 구습(이전의 생활방식)을 따르는(따라서 있는) 옛 사람을 [자기자신을 위하여] [단호히] 벗어 버리고(버리라) 23 이는 오직(그런데) 너희의 심령이(생각의 영에게 있어서) 새롭게 되어(되기 위함이요) 24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성스러움)으로(안에서) 지으심(창조하심)을 받은 [질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옷]입으라(입기 위함이다)

그것은 바로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옛 사람을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생각의 영에 있어서까지 새롭게 되기 위해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 안에서 창조되어 질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옛 사람의 실체를 알아야 하고 바로 그러한 옛 사람을 우리 몸에서 제거하는 일이다.

 

5. 옛 사람과 새 사람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옛 사람'이란 대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가? 그것은 '옛날의 혹은 이전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는 속임의 욕망들로 인하여 부패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분명히 새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전의 생활방식을 좇아가고 있는 자도 옛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아담의 타락이후 자기자신(혼)이 죄된 본성과 하나되어 여전히 육체를 좇아가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란 깨끗하게 창조되었으나 타락한 부패한 본성이 자기 속에 들어와서 그 타락한 본성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에 나오는 '부패한 본성'이란 그것을 인격화시키시면 곧 귀신들이다. 고로 예수님을 믿어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귀신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옛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 믿기 전의 사람을 '옛 사람'이라고 말하고, 예수믿은 이후의 삶을 '새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맞지만 틀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럼, '새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사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어서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을 가리켜 '새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새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에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 사람은 성령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결코 될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인 생명을 가진 자라야 새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성령을 모신 자 곧 성령을 모시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새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새 사람'이 된 것과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사실 별개의 문제다. 이미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옛 사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 역시 옛 사람이 주인인 삶을 살고 있는 옛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 사람이 되었으면 새 사람답게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는 성도들에게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옷입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한다.

 

6.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새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새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3가지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첫째, 옛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엡4:22). 옛 사람을 아예 치워버리는 것이다. 옷을 벗어두듯이 아예 벗어버리는 것이다. 이때 사도 바울은 옛 사람이란 유혹(속임)의 욕망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혹의 욕망들은 무엇인가? 곧 귀신들이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엡4:22~24의 다음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으니, 그것은 거짓과 속임의 영(엡4:25), 혈기분노의 영(엡4:26), 중상모략의 영(엡4:31), 수다의 영(엡4:29), 음란의 영(골3:5~6)이라다고 했다. 그렇다. 이것들은 귀신들이다. 다시 말해 귀신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는 실행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귀신을 우리 몸에서 뽑아내야 한다. 귀신이 제거되지 않는 한 우리는 죄의 유혹을 완전 차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했다(엡4:23). 여기서 '생각의 영'이란 내 영이 성령과 하나된 영을 가리키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의 영이 생각의 영역에 있어서까지 성령을 좇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생각까지도 더러움에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오직 깨끗하고 거룩한 성령의 생각을 따라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엡4:24). 우리가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귀신들을 따라가서는 아니 된다. 우리 속에 생명주는 영으로 들어와계시는 하나님 곧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것은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요, 진리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내가 적당히 살아도 내 구원에는 영향받을 것이 없을 것이라면서 더러운 삶을 살아가는 자는 결코 새 사람의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리고 진리만을 추구하지 않은 채 거짓을 적당히 수용하면서 사는 자도 역시 새 사람의 삶을 살아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말씀 가운데 불순물이 섞여있는 비진리의 말씀을 버리고 오직 진리의 말씀만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생각까지도 주님이 나를 통해 표현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것이다.

 

7. 내 육체 속에도 성령의 집이 지어지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미 귀신들이 어머니의 태중에서도 있을 때부터 우리 몸에 침투하여 우리 몸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은 태어나기도 전에 죄악 중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면서 인간은 태중에 들어온 악한 영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것이 바로 가인의 삶이다. 가인은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고 스스로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는데, 동생을 미워하는 마음이 가득했고 동생을 살인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찼다. 왜냐하면 이미 죄를 지은 하와의 태중에 잉태될 때부터 귀신들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귀신들은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도 아니며, 작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귀신들은 각양 종류의 형태로 우리 몸에 들어있다. 그리고 큰 놈도 있고 작은 놈도 있다. 오래된 것도 있고 얼마되지 않은 것도 있다. 하지만 이 영들이 역사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먼저 한 놈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놈이 다른 비슷한 영들을 불러와서 세력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내 육체 안에 집을 짓는다. 이것이 귀신의 집이다. 귀신의 집은 여러 개의 방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각기 다른 종류의 영들이 들어간다. 그리고 각 방이 들어차면 우리 육체의 다른 부분에 집을 짓는다. 대개 가슴과 머리, 배와 자궁, 등에 집을 짓는다. 그리고 작게는 팔과 손, 다리와 발에도 집을 짓는다. 심지어 손가락에도 집을 짓는다. 그러면 귀신은 우리 몸에서 더 강력해진다. 그리고 귀신이 짓는 집의 재료에 따라서도 우리 몸의 영향력은 더 쎄진다.

그러므로 옛 사람을 죽음에 넘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 몸에 있는 귀신들을 내어쫓는 것인데, 마지막에는 귀신의 집을 파괴해버려야 한다. 그 방법은 자백하는 회개를 하는 것이다(요일1:9). 그리고 귀신을 집을 파괴하는 때는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그러면 하늘에 있는 군대천사들이 내려와서 특수기계로 귀신의 집을 파괴한다. 그리고 허물어진 귀신의 집을 청소한다. 그리고 거기에 성령의 보좌가 내려온다. 그리고 이제는 집을 짓는 천사들이 내려와 광활한 영토에 성령의 집을 짓는다. 그 집이 지어지면 그 사람은 그 방면에 하나님의 귀한 사역자로 쓰임받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귀신이 떠나버린 그 사람에게 은사와 능력을 공급해주시기 때문이다.

 

8. 나오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옛 사람에게서 벗어나 온전한 새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거듭날 때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생명주는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영 안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옛 사람 속에 성령이 들어오심으로 우리가 갑자기 새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새 사람으로 즉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먼저 우리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겨야 한다. 그리고 나를 죄짓도록 유혹해온 귀신을 점차로 제거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자백하는 회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면 최종적으로 귀신의 집이 파괴되면서 육체에 성령의 집이 지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거룩하고 의로운 새 사람의 삶이 성령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숙지하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성령을 보내주실 때, 우리 속에 들어있던 귀신들을 다 제거해신 후에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의 옛 사람에게다 그냥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신 것이다. 그렇다. 이 일은 주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자신이 이때까지 죄인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를 주님이 기뻐하시고, 일시적으로 죄를 덮어버림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난 이후 일평생을 걸쳐서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몸에서 귀신을 계속해서 제거해 나가야 한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때, 가나안 7족속들을 내쫓아버린 후에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을 때에 주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12지파는 자기의 영토로 할당받을 땅을 취하려면 반드시 가나안 땅의 일곱족속을 자기 땅에서 쫓아내야 했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일해 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12지파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 땅 거민을 쫓아내지 못했던 지파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에게 가나안 일곱족속은 가시와 올무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을 찔렀고 그들을 죄짓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가나안 일곱족속이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우상을 섬기게 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이스라엘 민족이 그 땅에서 쫓겨나도록 만든 것이다. 즉 죄를 짓는 자는 하늘의 기업을 상으로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생일대의 최대의 과제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래야 새 사람 곧 성령으로 살아가는 새 사람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2023년 12월 31일(주일)

정보배목사

2023-12-25(월) 성탄축하연합예배

제목: [성탄절]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천사가 알려준 소식은 과연 무엇이었나?(눅2:8~1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ZONAse9vIdk [또는 https://tv.naver.com/v/45421454]

 

1. 들어가며

예수께서 탄생했다는 소식은 과연 누가 누구에게 알려 준 것일까?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중요한 소식을 전달할 때에는 대체 어떤 방법을 사용하신 것일까? 이 땅에 구세주가 탄생했다는 소식은 사실 보통 소식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소식은 과연 누가 전해 준 것이며, 또한 처음으로 그 소식을 전달받은 자들은 대체 누구였는가? 그리고 그 소식을 전달받았던 사람들은 또 어떻게 했을까? 그리고 천사가 전해 주었다고 하는 그 놀라운 소식은 그 내용이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래서 오늘은 성탄절을 맞이하여 예수 탄생의 소식을 누가 누구에게 알려 주었으며 천사가 전해 준 소식은 그 내용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좀더 체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성탄의 기쁜 소식은 과연 누가 알려 주었는가?

누가복음 2:8~12에 보면, 성탄의 기쁜 소식은 한 천사가 알려 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성탄의 기쁜 소식은 사실 보통 소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목자들에게 필요한 기쁜 소식이 아니라, 온 백성(인류)을 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기 때문이다(눅2:10). 그런데 그 소식을 어떤 천사가 전달하고 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니라 천사를 통해 그 소식을 전달하게 하셨는가? 그리고 그 천사는 대체 누구였는가?

첫째, 왜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그 소식을 전달하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식을 전달하려 할 때에 구약시대에는 어떻게 했는가? 그것은 시대마다 약간씩 달랐다. 그러나 대체로 3가지였다. 하나는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꿈과 환상이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지자였다. 처음 족장들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으로 나타나서(물론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음성으로 알려 주었다. 예를 들어 노아에게, 아브라함에게, 이삭과 야곱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에게는 꿈과 환상으로 알려 주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들어갔을 때에는 약430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또다시 모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시고,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그리고 사사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사들의 시대가 끝나자, 선지자 사무엘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때부터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이렇게 정리해 주었다(히1:1~2).

히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런데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B.C.400년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더이상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더이상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더이상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그것은 더이상 당신의 말씀을 대언하게 할 선지자들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더이상 말씀하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가? 말씀을 전달해 줄 모든 사람들이 다 타락했기 때문이다. 선지자들도 타락했고 제사장들도 타락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타락했는지 그 상황은 말라기서를 읽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더이상 선지자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천사를 시켜서 그 소식을 전달하게 하신 것이다.

둘째, 예수 탄생 소식을 전달해 준 천사는 대체 누구였는가? 그것은 '주님의 천사'였다(눅2:9). 그런데 이 주님의 천사는 목자들에게 처음으로 나타났던 것이 아니었다. 이것보다 약 10달 전에 먼저는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될 사가랴에게 나타났었고(눅1:19) 또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에게도 나타났었다(눅1:26). 그때 그 천사는 그들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느니라"(눅1:19).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눅1:26)". 그랬다. 그날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소식을 전달해 주는 천사들 중의 최고인 가브리엘 천사장이었던 것이다. 그가 나타나서 전해 준 소식은 인류 최대의 소식이었고 그 소식은 바로 예수 탄생 소식이었던 것이다.

 

3. 성탄의 기쁜 소식은 최초로 누구에게 전달되었는가?

그렇다면 성탄의 기쁜 소식은 최초로 누구에게 전달되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그 소식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에게 전달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그 소식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유대 왕이었을까? 아니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사두개인들과 대제사장들이었을까? 그런데 아니었다. 당시 어떤 지도자들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름이 아니라 들에서 양떼를 치고 있던 목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목자들이 선택된 것일까? 그것은 누가복음 2:8에 그 해답이 나온다. 그들은 3가지 방면에서 합당했기 때문이다. 눅2:8의 말씀을 헬라어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눅2:8[직역] 그리고 같은 지방 안에 목자들이 들에서 살고 있으면서 있어 왔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의 양떼 앞에서 밤의 파수꾼으로 있을 때에

그렇다. 하늘의 최고의 천사인 가브리엘로부터 최초로 성탄의 기쁜 소식을 들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그 밤에 양떼를 치고 있던 목자들이었다. 그들이 선택된 이유는 첫째로, 그들이 베들레헴 들에서 계속 살아왔고 계속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가지 일에 계속적으로 충실하게 일해 온 자들이 하나님께서 찾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둘째로, 그들이 자기들의 양떼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자를 쓰시는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밤의 파수꾼으로 있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 칠흑 같은 어둠 가운데서도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 잠자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자를 주님께서 쓰시는 것이다.

한편, 이들이 다름 아닌 '베들레헴의 목자들'이었다는 것은 장차 베들레헴에서 한 다스리는 목자가 나올 것이라는 미가서 5장 2절의 말씀에 따라,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베들레헴의 목자의 선배는 목동이었던 다윗이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다윗을 참 마음에 들어했다. 왜냐하면 그는 비천한 신분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주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다른 형제들과는 어머니가 달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제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받았고 아버지도 그를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맡겨 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주어진 일에 불평하지 않았다. 그리고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진정한 목자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었다. 그러므로 그때 그가 만들어 부른 찬양이 바로 시편23편의 말씀이다.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던 목동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셨다. 그래서 나라도 맡겨 주셨다. 그리하여 다윗은 그 나라의 왕이 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다윗의 동네에서 태어나신 이유다.

 

4. 주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달해 준 기쁜 소식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때 주의 천사는 목자들에게 어떤 소식을 전달해 주었는가? 그것은 눅2:11에 나온다. 헬라어로 직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눅2:11 오늘 다윗의 동네(성읍) [안]에 ‘너희를 위하여’(너희에게) 구주(구원자)가 나셨으니(탄생되었기 때문이니) 곧 그리스도[이시요] 주[님]시니라

그렇다. 예수께서 다윗의 동네에서 탄생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3가지 직무를 수행할 신분을 가진 자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것은 바로 그가 수행할 직무가 '구원자'의 직무요 '그리스도'의 직무이며 '주님'의 직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오늘날까지도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3가지 기독론적인 칭호인 것이다. 그때 주의 천사가 전달해 준 기쁜 소식이란 바로 이 3가지다.

첫째, 베들레헴에서 드디어 '구주' 곧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는 소식이다. '구주'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야솨'이며, 헬라어로는 '소테르'다. 이 단어는 '구원자, 구주, 구세주'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칭호를 구약성경에서 살펴 보면, 결국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칭호였다(사43:11, 49:26). 그래서인지 신약시대에 유대인이었던 사도 바울도 '구주'라는 칭호를 '하나님'에게 사용하였다(딤전1:1, 2:3).

사43: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사49:26 내가 너를 억압하는 자들에게 자기의 살을 먹게 하며 새 술에 취함 같이 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요 네 구속자요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딤전1:1 우리[의]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딤전2:3 이것이 우리[의]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그렇다면 태어날 아기 예수님은 과연 무엇에서부터 구원하는 자인가? 그것을 주의 천사는 이미 요셉에게 알려 주었다. 그것은 그분이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들로부터 구원할 자라는 것이다(마1:21). 그렇다. 이 땅에 태어나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구원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분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셨다는 측면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어진 것이다.

둘째, 베들레헴에서 드디어 '그리스도'가 태어나셨다는 소식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메시아흐(메시야)'이며, 헬라어로는 '크리스토스(그리스도)'다. 이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시2:2). 이 말은 다윗시대까지 올라가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로 왕이 태어나게 하실 때에 알려진 것이다(시2:7). 그래서 그분은 기름부음을 받게 될 것이며(시2:2), 철장 권세를 사용해 만국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시2:8~9).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들로 태어나신 것이며, 왕으로 태어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천사 가브리엘도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녀가 출산하게 될 아기를 가리켜,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영원히 야곱의 집을 통치할 것이며, 그의 왕국은 끝이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눅1:31~33). 그리고 동방박사들의 방문으로 인해 헤롯대왕이 제사장들과 서기관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날 것인가를 물었을 때, 그들은 베들레헴을 지목해서 말해 주었다. 그때 왜 그곳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목자가 그곳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마2:4~6). 그렇다. 이로써 천사가 전해 준 기쁜 소식은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했다는 소식이었던 것이며, 그분이 오셔서 그리스도라는 직무 곧 왕직을 수행하실 것이라는 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베들레헴에서 드디어 '주님'이 태어나셨다는 소식이다. '주님'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아도나이'며, 헬라어로는 '퀴리오스'이다. 주님이라는 단어는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그러므로 주님이라는 단어가 하나님과 같이 등장할 때가 많았다. 왜냐하면 '주님'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용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시대 다니엘 선지자는 알려 주었다. 주님은 하나님이신데,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라고 말이다(단9:3~4). 그러므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분은 원래는 주 하나님으로서,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이신 분인데 그분이 육신을 입고 아들로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난 아기는 하나님이신 '구원자'요,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시며, 다시 하나님이신 '주님'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 대해 잘 몰랐던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나서 그분을 가리켜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곧 '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요20:28).

 

5. 태어날 아기에 대한 신분과 이름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태어날 아기에 대한 신분은 구원자요,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라는 직무 뿐인가? 아니었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잉태되기 직전에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 장차 잉태될 아기에 대해 알려 준 것은 그분의 신분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눅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네 위에) [장차] 임하시고(오실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장차]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태어나게 된 채 있는)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장차] 일컬어지리라

그렇다. 그때 천사는 마리아가 장차 임신할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될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임신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아기는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워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천사는 태어날 아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려 주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질 것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가브리엘 천사도 아직까지 하나님의 아들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대해서 그는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전달받은 것을 그대로 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장차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질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원래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시는 것이기 때문에(사9:6)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태어날 아기의 이름도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 주었으니,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이었다. 이러한 이름은 주의 천사가 먼저는 예수님의 모친이 될 마리아에게도 알려 준 것이요(눅1:31~32), 또한 예수님의 법적인 부친이 될 요셉에게도 알려 준 이름이었다(마1:20~21). 그렇다면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구원은 여호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혹은 '여호와는 구원자이시다'라는 뜻이 바로 '예수'인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헬라어로는 '예수'이지만 히브리어로는 '예슈아' 혹은 '예호수아'이다. 이는 예수님이 여호와이신데 구원자로 오신다는 뜻이다.

 

6. 천사가 목자들에게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에게 알려 준 기쁜 소식을 종합하면 어떻게 정리할 수 있는가?

주의 천사 가브리엘이 목자들과 요셉과 마리아에게 알려 준 기쁜 소식은 아기 예수의 탄생에 관한 소식이다. 그런데 이 소식은 그분이 이 땅에서 어떤 직무를 수행할 것이며, 어떤 신분을 가진 자인지를 알려 준 복된 소식이었다. 그분은 신분으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그분의 직무는 '구주(구원자)'요, 왕직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원자와 주님이라는 직무는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이므로,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주 하나님의 직무를 수행하실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초대 교회 성도들은 로마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 자신이 믿는 믿음을 어떤 그림으로 그려 표현했었다. 그것은 바로 '익듀스'라는 물고기 그림이다. 왜냐하면 '물고기'가 헬라어로 '익듀스'였기 때문이다. 그럼 왜 물고기인가? 그것은 그들이 암호처럼 그렸던 물고기가 사실은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한 신앙고백의 첫 글자를 모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글자의 약자였다. 곧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에게 신앙고백할 때에 우리 역시도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자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주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아들로 오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임마누엘 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이기 때문이다(마1:23).

 

7. 이제는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누가 누구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인류 역사에 획을 그을 만한 놀라운 사건을 우리는 우리만 알고 있어야 하는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할 당시에는 그 소식을 받을 만한 종교 지도자들이 없었다. 그러므로 비천한 목자들에게 그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목자 다윗의 뒤를 이어 자기 지역에서 계속해서 그 일을 해 온 사람들로서 자기들의 양떼를 위해서 밤의 파수꾼으로 일하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렇다. 오늘도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바로 목자와 같은 사람들이다. 자기의 신분에 관계없이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끝까지 완수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양떼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이 복음 전파에 최선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자들은 천사의 고지를 받자마자 아기 예수께서 탄생한 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그리고 그 아기를 찾아내어 천사가 전해 준 그 소식을 아기 예수의 부모와 거기에 모인 자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렇다. 온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우리만 들어서는 아니 된다. 모든 사람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그러라고 먼저 나에게 그 소식을 전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제 그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줄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악한 자 안에 속하여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두면 어느 누구도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서 그들을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어 빛되신 예수님에게 인도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도 빛을 믿고 빛을 받아들여 어둠을 이기고 빛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8. 나오며

우리나라에도 복음 전파의 시초에 사도 도마가 복음을 들고 다녀갔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때가 A.D.41~49년경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도 바울이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때(그가 바나바와 더불어 1차 전도여행을 시작한 때)가 A.D.47~49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도마는 바울이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해 주었던 때보다 적어도 6년을 앞서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을 전해 준 지역에 교회를 세웠지만 도마는 이 나라를 기독교 국가로 세워 놓았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잊혀진 나라 '가야(가락국)'라는 나라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 그리고 문화학자들이 연구해 놓았으니, 이제야 그 빛을 발하게 되었다. 도마가 이 땅에 전해 주었던 복음, 이제는 우리도 다시 누군가에게 전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 도마가 전해 준 신앙은 김수로 왕릉의 출입문의 양쪽에 그림으로 전해져 오고 있으니, 쌍어문의 예수님의 얼굴 그림은 2,000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잘 견디어 냈던 것이다. 그 그림의 내용은 예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피 흘리셨으며, 또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에는 천사가 목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고, A.D.41~49년에는 도마가 이 나라에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제 마지막 시대에는 우리가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할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도 더 확실한 기쁜 소식을 전해 줄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회개없이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 더 선명해졌고,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 없이는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 더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제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더 많이 전해 주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회개의 능력을 내가 먼저 더 많이 체험하고, 내가 체험한 것을 믿지 않는 가족에서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 주기를 바란다.

 

 

2023년 12월 25일(월)

정보배목사

2023-12-24(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대강절] 이 성탄절에 베들레헴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놀라운 이야기(눅2:1~5)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kcbIHh3iPTw [또는 https://tv.naver.com/v/45421431]

 

1. 들어가며

예수께서는 왜 이 땅에 오셨으며 또한 어떻게 오셨는가? 그것은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꼭 알고있어야 할 주제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강절을 맞이하여 지난 4주 동안 4가지 사실을 살펴보았다. 예수께서는 왜 '여자의 씨'와 '아브라함의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는가? 그리고 자신의 씨가 들어가지 않았지만 요셉의 법적인 부친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을 그는 어떻게 담당했는가? 족보상에 나타난 마리아의 가문에 따른 메시야의 비밀까지 살펴보았다. 오늘은 이제 대강절 마지막 시간으로서 예수께서 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야 했으며,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이 나라 대한민국 고대국가였던 가야(가락국)에 전해진 예수님이 어떻게 한 장의 그림으로 남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왜 예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해야 했는가?

왜 예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가 살고 있던 갈릴리 나사렛에서 탄생하지 않고 또한 당시 유대 나라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에서도 탄생하지 아니하고 유대 땅 작은 고을이었던 베들레헴에서 탄생해야 했을까? 그 이유는 크게 3가지다.

첫째,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요셉 때문이었다. 요셉이 이미 임신한 채 있는 마리아와 장차 태어날 아기를 보호할 목적으로 호적을 하기 위하여 베들레헴까지 데려갔기 때문이다(눅2:3~5). 이는 만약에 이미 임신한 채 있는 마리아를 나사렛에 두고 호적하러 갈 경우 그녀에게 불어닥칠 시련과 위험을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요, 주의 천사가 밤에 꿈속에서 가르쳐 준 바대로 그녀에게서 태어날 아기는 장차 인류를 죄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야이기 때문에 그 아기를 보호해야 할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둘째, 보다 더 앞선 이유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칙령 때문이었다(눅2:1~3). 당시 로마의 1대 황제였던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재위 B.C.27~14)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존귀한 자)가 자신의 속국에 대한 효율적인 통치와 세금 징수를 위해 호적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이었고 또한 그의 아버지의 고향이 베들레헴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신고를 해야 했다. 그래서 베들레헴까지 가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 통치자를 쓰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세상을 통치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셋째, 이것보다 더 앞선 이유는 하나님의 예언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장차 태어날 아기는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하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가 선지자는 B.C.700년경의 사람으로서, 유대 땅 베들레헴이 비록 작은 고을이지만 여기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태어나서 이스라엘을 장차 목양할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미5:2). 그러므로 제일 처음 원인은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3.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해야 했던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예수께서 꼭 베들레헴에서 탄생해야 했던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다. 그것은 그곳의 지명 이름에 숨겨진 비밀로서, 베들레헴이라는 곳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에 담겨 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그 지명의 의미가 심상치 않다. 왜냐하면 그 지명의 이름이 '벧(집)+을레헴(떡)'으로서, '떡집'이기 때문이다. 고기를 먹으려면 고깃집에 가야 하듯이, 떡을 먹으려면 떡집에 가야 한다.

그러하면 예수님의 조상들은 언제부터 '베들레헴'에서 살고 있었는가? 누가복음 기자는 베들레헴은 '다윗의 동네(성읍)'라고 분명히 알려 준다(눅2:4,11). 그곳은 다윗이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이 태어났을 때에 이미 그곳에는 그의 아버지 이새가 살고 있었고, 그 윗대로서 오벳이 살고 있었으며 그리고 더 윗대로서 보아스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룻기서를 읽어 보면 보아스는 유대 땅 베들레헴의 유력한 자였다. 그러니까 보아스 이전부터 그 땅에 예수님의 조상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베들레헴은 '다윗의 동네'라고 불려졌던 것인가? 그것은 베들레헴이 아주 작은 고을이었고 별 볼일이 없는 동네였지만 그곳에서 위대한 성군 다윗이 태어났으며, 다윗이 그곳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결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여 왕도를 세웠으며 그곳에서 죽는 날까지 왕으로 다스렸듯이, 믿는 우리들도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다 보면, 하늘의 새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곳에서 왕 노릇할 수 있다는 것을 임기응변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류를 구원할 예수께서 장차 떡집에서 탄생하실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4. 왜 떡집으로서 베들레헴은 중요해졌는가?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은 원래부터 있던 지명은 아니었다. 그곳은 야곱 당시에는 에브랏이었기 때문이다(창35:19, 48:6). 야곱의 둘째 부인이었던 라헬이 그만 베냐민을 낳다가 그곳 에브랏 길가에서 죽었었다. 그러므로 '에브랏(에브라다)'이라는 지명의 이름은 '가볍다, 덧없다'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장차 메시야가 탄생해야 할 것이고, 그분이 인류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생명의 떡으로 자신을 내어 줄 일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곳 이름이 어느새부턴가 '떡집'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베들레헴이라는 지명 이름이 '떡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탄생하실 장소로서,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이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면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6:33,35,48~51). 이는 그분이야말로 모든 인류에게 아버지의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무리들을 먹이신 후에 당신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떡은 예수께서 주시는 것이며, 그것은 영생이라고 하셨다. 비록 떡의 예표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은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육체의 양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는 자신이 생명의 떡을 주실 것인데,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믿고 취하여 먹는 자는 영원히 굶주리지도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장차 죽으신 후에 성령을 통해서 생명을 공급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고전15:45).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인류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분으로 그분은 떡집에서 탄생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 황제도 이 뜻에 따라 칙령을 내렸으며, 요셉도 아기 예수의 탄생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는 그녀를 데리고 굳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간 것이다.

 

5. 오늘날에 생명의 떡을 먹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렇다면 오늘날에 생명의 떡을 먹으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도 떡집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떡은 예수님을 가리킴으로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가야 한다. 지금 예수님이 계신 집은 바로 '교회'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기 때문이다. 사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떡을 주셨다. 그런데 그 떡을 보관하는 장소를 마련하라고 했으니, 만나를 담은 항아리를 성막에 두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성막 안에 있는 떡상 위에 매주일 밀떡을 올리라고 했다. 그러므로 매안식일에 떡이 새로 올라갔고 물려낸 떡은 제사장의 식구들이 양식으로 취했다. 그런데 그 성막이 성전으로 바뀌었고, 예수님 시대에는 예수님의 몸이 성막이 되었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이후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에 계시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생명의 떡을 얻으려면 우리는 교회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의 말씀이 생명의 떡으로 선포되는 곳에서 우리는 생명의 떡을 취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나 건강한 떡을 먹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그 교회에서 말씀을 먹여 주는 지도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6. 예수께서는 왜 이 땅에 오셨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설교를 통해서 그분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 오셨다는 것이다. 사실 그분은 첫 사람 아담과는 달리 자기 안에 아버지의 생명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이다(요5:2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생명을 가진 채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성육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생명을 이땅에 가져오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은 자기 안에만 있는 생명을 해방하는 것이었으며, 그분의 부활은 그 생명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한 것이었다. 즉 생명의 확장이 곧 그분의 부활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분의 공생애 기간에 자주 생명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셨다. 그분은 늘 자신을 '생명' 그 자체라고 말씀해 주셨다(요14:6, 11:25~26). 그래서인지 사마리아 여인과 말씀을 나눌 때에 그분은 자신이 주는 물을 곧 '생명의 물', '생수'라고 하셨다(요4:13~14). 그리고 그분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다음에, 자신이야말로 사람들이 먹기 좋게 준비된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다(요6:35). 그리고 초막절 때에 그분은 자신은 어두운 밤을 빛춰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빛'이라고 하셨다(요8:12). 그렇다. 그분은 생명의 모든 것이 되신다. 그분은 생명 그 자체요, 생명수이며, 생명의 떡이자, 생명의 빛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분이 이 땅에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는 것을 다양한 형태로 말씀하신 것을 알려 준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는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다(요10:10). 한편 공관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피를 흘릴 수가 없으니 장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실 속제제물로 오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막10:45).

 

7. 이 땅 대한민국에도 과연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전해졌을까?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께서 예수님의 사후 약 11년 만에 A.D.41년경 한국 땅에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주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사도 도마(A.D.2~72)에 의해서다. 사도 도마는 인도 선교사로 파송되었는데, 인도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다가 실크로드 상인을 따라 땅끝이라고 불리워진 동방의 나라로 왔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이 알려진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이 방면에 38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온 정성을 기울여 온 학자가 있으니 그는 바로 조국현 교수다(A.D.1955~). 그는 대구 경북 엑스포 이사장을 맡고 있는 분이신데, 도마가 한국 땅에 왔으며, 한국 사람 최초로 가락국(가야국)의 시조였던 김수로왕에게 세례를 주어 기독교인이 되게 하였으며, 그로 하여금 기독교 국가를 세우게 했다고 전한다. 사실 가야라는 나라는 한동안 일본식민사관에 의해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채 있어 왔다. 하지만 가락국이 있었다는 것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나오고 일연의 삼국유사에도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삼국을 통일했던 김유신 장군의 12대 조상이 김수로왕이라는 것과 그가 A.D.42년에 나라를 세웠다고 나온다. 그리고 그 나라의 이름을 금관국이라고 고쳐 불렀다고 나온다. 하지만 그 나라도 532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나온다. 그런데 일연이 쓴 삼국유사는 정말 대단하다. 거기에는 '가락국기'라는 형태로 그 나라가 언제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구지와 같은 설화와 함께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야국이 기독교 국가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조국현 교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이제 관광해설사들이 해설을 하고 있으며, 올해 들어서 가야국과 그 나라의 고분군들이 제45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되었으니 실로 많은 발전을 거듭해 온 것이 사실이다.

 

7. 가야에 도마가 왔으며, 도마가 김수로왕에게 전해 준 복음은 무엇이었는가?

가야에 도마가 왔는지가 여러 가지 고고학적 유물들과 흔적들이 확인되고 있는 가운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2가지다.

하나는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 산87번지에 남아 있는 도마석상과 바위다. 여기에 새겨진 도마석상은 이 사람이 부처가 아니라 서양에서 온 사람임을 알려 준다. 왜냐하면 앞뒤가 바뀐 손모양과 열 발가락이 그대로 그려진 모양 리고 왼손에 있는 십자가를 물고 있는 비둘기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석상 오른쪽 바위면에 고대 히브리어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히브리어로 타우와 멤으로서 '도마'라는 이름의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가지 그림이 같이 있는데 아마도 도마는 예수님의 사람이라는 뜻인 것 같다. 그리고 그가 도마였는지 알려 주는 증거는 발 아래쪽에 중국 한나라의 예서체로 한자가 음각되어 있었으니 그 글자가 '지전행(地全行)'이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땅을 다닌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는 도마의 호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는 적어도 한국 땅을 예수께서 말씀하신 땅끝으로 알고 이 땅에 왔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김수로왕 능의 쌍어문에 그려진 오병이어의 그림이다. 그렇다면 도마는 과연 이 땅에 정말 복음을 전해 주었으며, 그래서 과연 전도의 열매를 맺었을까? 그것은 그가 42년 3월15일에 세례를 주었다는 것인데, 그 대상이 바로 김수로왕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김수로왕이 도마에게서 세례를 받고 가야라는 나라를 세웠으니, 가야국은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된 셈이다. 그러한 사실은 그가 죽은 뒤 그의 무덤 앞에 세워진 출입문(쌍어문)의 그림에서 살펴볼 수가 있다. 그것은 놀랍게도 사람(아마도 '예수님'이 아닌가 한다)의 얼굴에 온통 핏방울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오병이어의 그림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고기 두 마리는 수염 모양으로 그려져 있고, 다섯 개의 떡은 입안의 혀의 그림 모양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생명의 떡으로 오신 것을 형상화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분의 얼굴에 핏방울이 잔뜩 그려진 것은 그분이 우리 인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피 흘리신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2,0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어떻게 그 내용이 잘 보존되어 왔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얼굴의 형태도 좀 달라졌고, 1987년 이후에는 이 그림에 덧칠을 함에 따라 그 이전에 갖고 있던 그림의 형태가 일그러졌기 때문에 제대로 알 수는 없게 되어 있지만, 1987년 이전에 찍어 둔 사진에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8. 오병이어의 그림은 과연 기독교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김수로왕 능의 쌍어문에 그려진 오병이어는 과연 기독교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비잔틴 시대에 지어진 건물들의 바닥을 보면 모자이크 장식이 되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오병이어의 그림이 선명하게 장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의 복음이 동쪽으로 전해지면서 터키 지역과 인도 지역에도 물고기 두 마리의 그림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오병이어를 상징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그 그림 속에 등장하는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위에도 2개가 있는 것이고 아래도 두 개가 있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수로왕 능의 쌍어문에 그려진 오병이어의 그림에는 떡 다섯 개도 사람의 입 안에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입가 양쪽에 수염 형태로 두 개의 물고기가 그려져 있는데, 둘 다 위아래에 각각 2개씩의 지느러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판의 그림은 보통 300년마다 다시 그렸다고 한다. 그러니 적어도 7번 이상 덧칠해진 것이다. 금관가야국이 532년에 망하고 신라의 귀족으로 합쳐졌을 때에 김수로왕 능도 그때 비로소 조성이 되었고 그 출입문에 예수님의 얼굴(?)에다가 오병이어의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그 그림이 1,500년의 세월을 잘 버텨준 것만 해도 정말 고맙기만 하다. 이것은 기독교 전파 초기에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9. 나오며

마지막 시대가 되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머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유난히도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동성애 및 양성평등법이 덜 적용되는 상황 속에 있다. 비록 코로나로 인해 기독교가 폄하되기는 하였지만, 영적으로 본다면 이 나라 사람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아니 말할 수 없다. 경제적으로 보나 기술적으로, 의학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볼 때도 그렇다. 특히 종교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는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정말 대단한 기독교 영성가들이 우리나라에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천국의 현상황을 잘 알 수 있으며, 귀신세계에 대해서 세계 최고의 정보와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나라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 더 쓰임받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가야의 사람들이 신라에게 멸망당한 뒤에도 이 나라 전국 방방곡곡에 스며 들어감으로 그 피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양천 허씨, 인천 이씨와 양산 이씨가 다 이 후손들이라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우리가 잘 아는 허균이나 허난설헌이 사실 양천 허씨의 후손이며, 동의보감을 썼던 허준도 양천 허씨의 후손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고대 한국에 전해진 이 복음을 우리나라가 1,500년 전에 그만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하나님께서 약 120년 전에 이 나라에 서양 선교사들을 보내어 다시 예수님을 전해 주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이상 예수님을 놓쳐서는 아니 된다. 회개를 통해 귀신을 쫓아내고, 예수님을 주 하나님으로 믿는 신앙을 견고히 유지하여 이 신앙을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아니 이 복된 신앙을 널리 전파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 도마에게 주어진 복음 전파 사명이 이제 우리에게 넘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주여, 이제는 우리가 이 회개와 천국복음을 온 세상 땅끝까지 전하게 하소서. 우리도 지전행이 되게 하소서. 아멘.

 

 

2023년 12월 24일(주일)

정보배목사

2023-12-17(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하나님은 인류구원을 위한 성육신 사건에 왜 요셉을 사용하셨는가?(마1:18~25)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UtecNBFkX3o [또는 https://tv.naver.com/v/45419544]

 

1. 들어가며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때가 있었다. 그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래 피조물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 구원을 위해서 그분은 사람이 되셔야 했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시려 하실 때에 우연히 그냥 오신 것이 결코 아니다. 그분이 언제 어떻게 오실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신 후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초림에 관한 약 10여 가지의 예언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의 초림에 관한 예언이 있은 후에 약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록 예수님의 초림의 예언을 이룰 만한 사람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예수님의 초림을 이룰 만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이 바로 요셉과 마리아다. 이들 중에 요셉은 예수님의 법적인 부친이 되어야 할 사람이다. 그렇다면 요셉은 아기 예수의 탄생에 있어서 과연 어떤 역할을 해야 했던 것일까? 오늘은 대강절을 맞이하여 요셉의 역할이 무엇이었으며, 그 역할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님의 초림에 관한 예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예언은 어떤 것인가?

예수님의 초림에 관한 예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예언은 무엇일까? 그중에서 2가지를 고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혈통적인 조건과 무죄성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의 첫째는 예수께서 혈통적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야 한다는 것이다(창22:16~18, 삼하7:11~13). 이것은 구약시대의 예언 가운데 장차 오실 메시야를 '네 씨'라고 정확히 표현한 단 2번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께서 여자의 씨이자 처녀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창3:15, 사7:14). 그래야 예수께서 죄없는 분으로 인류를 위한 흠없는 속죄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 마태복음이 예수께서 어떻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는지를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는 복음서라면(마1장의 족보),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어떻게 여자의 씨로 태어나시되 어떻게 처녀로부터 탄생하셨는지를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는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두 번의 시간을 통하여, 예수께서 여자의 씨이자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살펴보았고, 또한 예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그중에서 예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는데, 그 마지막 주자로서 쓰임받았던 요셉에 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그는 왜 메시야의 탄생에 있어서 마리아의 남편으로 쓰임을 받게 되었던 것일까?

 

3. 메시야의 탄생에 있어서 요셉은 왜 필요했던 것인가?

메시야 곧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구원자로 오실 분에 대한 예언은 사실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의 타락 직후부터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 400년 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메시야가 오실 혈통적인 조건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언은 바로 메시야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어야 하고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마1:1). 그래서 마태복음 1장의 족보(마1:2~16)를 살펴보면,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42대 후손이자 다윗의 28대손으로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바로 윗대의 조상은 누구인가? 그는 '요셉'이다. 요셉은 아브라함의 41대손이자 다윗의 27대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요셉으로부터 직접적인 씨를 받아서 탄생한 것은 아니었다. 고로 마태복음 1:16은 그것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마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렇다. 요셉은 처녀였던 마리아의 남편 역할만 했을 뿐 직접 씨를 전하는 역할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얼핏 보면, 요셉은 아예 처음부터 필요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3장의 족보를 보니, 마리아 역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눅3:23~38). 다시 말해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 따르면, 요셉은 아브라함-다윗-솔로몬으로 이어지는 가문의 사람이었던 것이고, 누가복음 3장의 족보에 따르면, 마리아는 아브라함-다윗-나단으로 이어지는 가문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을 해야 했던 것일까? 참고로 여기에서 '약혼'이라 함은 이스라엘 나라에 있어서는 법적으로 결혼과 같은 효력을 지닌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왕의 후손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다(삼하7:11~13). 다윗의 자손이기는 하되, 왕위를 이어받을 가문의 후손, 곧 다윗-솔로몬으로 이어지는 후손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자신의 조상이 다윗-나단이었기에 왕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조상이 솔로몬이었기에 왕위가 계속되어 온 가문이었다. 그러므로 마리아에게 있어서 요셉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4. 메시야의 탄생에 있어서 요셉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그러하면 메시야의 탄생에 있어서 요셉의 역할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의 꿈속에 나타났던 천사의 고지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때 주님이 보낸 천사가 꿈속에서 요셉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마1:20~23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때는 요셉이 마리아와 정혼(약혼)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요셉이 마리아와 정혼한 상태에서 거의 1년이 다 되어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문이 요셉에게도 들려온 것이다.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자 요셉의 고민은 깊어갔다. 만약 요셉이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면, 그녀는 사람들에 의해 음행의 죄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면 정혼한 상태에서 처녀의 순결을 해친 파렴치한으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자 요셉은 은밀하게 파혼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갖고 있는 아이는 분명 자신의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을 때에 주의 천사가 꿈속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천사는 그녀에게 임신이 된 것은 외간남자의 아이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며, 그렇게 된 것은 그녀가 임신한 아이가 장차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B.C.730년경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따라 그녀가 처녀인 상태에서 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태어나면 그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아이의 이름을 '예수' 즉 구원자라고 부르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러자 요셉은 그녀에 관한 모든 빌미스러운 일은 자신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까지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였다(마1:24). 그래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5.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한 이후에도 자발적인 행했던 일은 무엇인가?

그런데 요셉은 매우 신중하고 경건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자기의 아내로 취했으나 그 뒤에도 그녀와 아기를 보호하려는 일을 계속해서 준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라는 천사의 지시나 하나님의 지시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이 다윗왕의 가문의 적자라는 것을 제대로 깨닫게 되었으며, 또한 그녀도 다윗의 가문의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시집온 것이며, 그녀가 자궁에 품고 있는 아이도 그냥 일반적인 아이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할 메시야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는 연약한 아내 마리아와 그녀가 낳을 아기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이후로도 2가지를 실천하게 된다.

첫째, 그녀를 자기의 아내로 데려왔으나 아기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마1:25). 그녀의 순결을 계속해서 지켜 주고 싶었던 것이다. 메시야의 탄생에 있어서 자신의 부정이 그녀에게 임하지 않도록 그녀를 지켜 주기로 결단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실상 첫날밤도 치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는 그녀의 순결을 지켜준다.

둘째, 그녀가 아기를 낳을 무렵이 되었을 때,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지켜 주기 위해 자신의 고향 베들레헴까지 마리아를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눅2:1~6). 왜 그랬을까? 왜 그리 험난한 길을 요셉은 굳이 마리아를 데리고 떠난 것일까? 그것의 일차적인 이유는 모든 유대인들이 자기의 고향에 가서 호적하라는 로마 황제의 칙령이 있었기 때문이다(눅2:1). 그러나 여자는 예외였다. 여자는 호적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셉이 굳이 자기의 아내를 데리고 고향으로 떠나간 이유는 만약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아기를 낳았을 때에, 혹시 그녀에 대한 과거의 잘못된 소문으로 인하여 그녀에게 해가 입혀지지는 않을까 해서였다.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요셉의 아이가 아니라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녀를 데려가기로 결단한 것이다. 그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부터 약 230Km나 떨어져 있는 베들레헴까지 요셉은 마리아를 데리고 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리하여, 메시야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B.C.700년 전의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가 되었다는 사실이다(미5:2).

 

6. 하나님을 뜻을 이루기 위해 자발적으로 행동했던 요셉에게 주어진 또 다른 복은 무엇이었는가?

사실 요셉이 자신의 아내와 아기를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은 것과 자신의 아내 마리아를 호적하는데 데리고 간 것은 순전히 요셉의 결정이었다. 요셉은 자신의 아내와 아기를 지키고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자기 스스로 깨달아 실천했던 것이 결국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할 일이 주어진 채 있는지 전혀 모르고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그러한 사명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대부분 요셉의 경우처럼 초자연적인 어떤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자신이 어떠한 사람으로 이 땅에 보내어졌는지를 깨닫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곧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는 사명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육신의 쾌락을 절제하는 일이었고, 또한 자신에게 부담되는 일이었지만 기꺼이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바라고 바랐던 것이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도 그가 해야 할 일을 계속해서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또 주의 천사를 보내 어떤 지시를 하게 하신 것이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이다. 첫 번째는 헤롯대왕이 아기를 죽이려 하니 빨리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하라는 것이었다(마2:13). 그리고 또 얼마 후에는 헤롯대왕이 죽자 또 주의 천사를 보내,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으니 이제는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마2:19). 그래서 자신이 원래 살았던 땅인 갈릴리 나사렛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그래서 메시야가 나사렛 사람이라고 하는 예언이 또 성취가 된 것이다.

사실 주님이 직접 보낸 천사를 마주 대한다는 것은 일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아니 한 번만 있어도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천사가 아무에게나 보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관여하실 때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셉은 그의 일생에 그 일을 3번씩이나 경험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7. 요셉이 처음 천사를 만났을 때부터 그가 진실로 깨달은 사실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요셉은 왜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이루기 위한 사람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에게 무엇을 말씀하려 하는 것인지를 깊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요셉이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는가? 첫째, 왜 자신이 아브라함과 다윗 가문의 직계 후손으로 태어났는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둘째, 왜 자신이 마리아와 약혼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셋째, 천사가 나타나서 말할 정도로 자신에게 막중한 사명이 주어진 채 있었다는 것도 깨달은 것이다. 넷째,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은 4천 년 동안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기다리고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다섯째, 자기가 헬리 집안의 장녀와 약혼한 것이 단지 두 가문을 하나로 합치는 것만이 아니었고, 그것은 메시야가 태어날 길을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여섯째, 자기 자신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인 만큼 값진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자리에서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고 그 일을 해 나갔던 것이다.

 

8. 나오며

사실 알고 보면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자기에게 어떤 과업을 가진 채 이 땅에 태어난다. 그러나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진정 하나님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요셉처럼 살아가기 시작한다. 내가 진정 주님의 뜻을 이뤄드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좋을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지 말라. 그렇게 살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때부터 또다시 우리의 갈 길을 더 자세히 인도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깊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내가 왜 이 시대에 태어나서 지금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것은 모두 우연일까? 아니다. 요셉의 꿈이 우연이 아니었듯, 우리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도 우연한 것은 없다. 다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 가운데 우리가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요셉과 같은 일이 있을 것이다. 아니 지금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회개와 천국복음을 듣는 자가 되었다면 그는 바로 지금 이 말씀을 더욱더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낼 때에 벌써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수준의 사람으로 만든 채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올 한 해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나 자신이 깨달은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을 하나로 연결해 보라. 그러면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길을 쭉 걸어가라. 그것이 요셉이 걸어갔던 길이요 곧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인 것이다.

 

 

2023년 12월 17일(주일)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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