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30(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9)] 다락방강화(1)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요13:31~14:15)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Q-xColgXlB0 [또는 https://tv.naver.com/v/40839383]

1. 들어가며

  우리는 요한복음 중에서 13장부터 17장까지의 말씀을 가리켜 다락방강화라고 부른다. 사복음서에는 3종류의 집중적인 말씀이 있으니, 산상수훈의 말씀(마5~7장)과 다락방 강화(마24~25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락방 강화(요13~17장)의 말씀이 있다. 오늘 우리는 이것들 중에서 지난 주에 이어 다락방강화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한다. 다락방강화란 예수께서 인류구속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 자리인 마가락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에,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 그리고 성만찬을 제정하셨다. 그리고 가룟유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언급하셨다. 하지만 가룟유다는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룟유다가 떠난 뒤,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리고 이제 떠날 때가 되었음을 언급하셨다. 그러자 걱정하는 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3가지 약속을 해주셨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고 하시면서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설명해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 인류를 사랑하시는가에 대한 절절한 고백이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께서 성만찬 제정 이후에 주신 다락방 강화의 첫번째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2.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나가자 왜 예수께서는 그 일로 인해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대체 어떤 경우 영광을 받으시는가? 예수께서는 가룟유다가 자신을 팔려고 나가자 자신이 이제 영광을 얻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들로 인하여 하나님도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셨다(요13:31~32). 왜 예수께서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나가자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인가?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이 영광인지를 알려준다. 요한복음은 크게 표적의 책(요1~12장)과 영광의 책으로 나뉜다(요13~21장). 그중에서 영광의 책은 다락방강화에서 시작되는데 그것은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나가는데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영광이라는 개념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크게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뤄지는 것을 가리킨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좁은 의미로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실행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 인류의 속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사탄마귀와 죽음이 정복되며,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여 원래 있던 영광스러운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서 부활승천하시어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일이 직접적인 실행은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것이었다.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 순간에 인자가 영광을 얻었으며, 아버지도 그 일로 인해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불법을 행한 사탄마귀가 심판을 받게 되고 지옥에 떨어질 인류의 구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새 계명이란 대체 어떤 의미인가?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가시면서 이제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새 계명을 주신 것이었다. 그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더러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새 계명'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사실 옛 계명을 축약한 것이다. 사실 옛 계명은 십계명을 가리키는데, 예수께서는 십계명을 단 두 계명들로 요약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신6:5, 레19:18).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두 계명들을 한 번 더 축약하셨다. 그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보면, 시간적으로 새로운 이라는 의미의 '네오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아니하고, 질적으로 새로운 이라는 의미의 '카이노스'가 쓰였다. 왜냐하면 이미 구약시대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을 압축한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질적으로 새로운 계명이 되는가? 그것은 첫째로, 서로 사랑해야 할 대상과 범위가 훨씬 더 넓어졌기 때문이요, 둘째로, 거기에는 하나의 조건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했던 것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먼저, 서로 사랑해야 할 대상과 범위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것은 옛 계명에서 이웃사랑이 할례받은 유대인들에게 한정되었는데, 새 계명은 그 범위를 제한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서로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것고 같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요13:1). 귿들의 목숨이 끊어져 더이상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없을 때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비근한 예로서,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할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자신을 배신하여 팔아넘긴 가룟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 사랑의 실천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사건이다(요13:4~11).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목숨을 제자들을 위해 내놓는 것이었다(요15:12~14). 그렇다. 주님의 사랑은 이처럼 끝없는 사랑이요 조건없는 희생적인 사랑이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용서해주시는 사랑이다. 우리는 이 사랑을 배워서 실천함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고로 예수께서는 제자도의 표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13:35).

 

4. 예수께서는 이제 제자들을 떠나서 어디로 가신다고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세족식을 통해 보여주셨고, 가룟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부여하심으로 보여주셨다. 그래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이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비롯한 인류구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놓으셔야 했다. 그러나 그분의 떠나심은 단순히 제자들을 버리고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래 가졌던 영광의 상태로 들어가시기 위한 떠남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 떠나가실 곳은 대체 어디인가? 다락방강화에 따르면, 그것은 4가지 표현되었다. 그것은 '자신을 보내셨던 이'이자(요16:50, '하나님'이시며(요13:3), '아버지'를 향하여(요16:28) 떠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장소는 곧 '아버지의 집'(요14:2) 곧 '천국'(요17:24)이다. 이것은 인자가 이전에 있었던 곳을 가리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땅에 창조되기도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광스러운 존재로 아버지의 품 속에 계셨다(요1:18). 그러다가 때가 되어 아들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전에 있던 곳으로 떠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서 "내가 가는 곳을 지금은 따라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 올 것이다"(요13:36)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곧바로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과 사역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마치게 되면 베드로도 주님의 뒤를 이어 죽음을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지금 왜 주님을 따라갈 수 없느냐고 하시면서 주님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이라고 내놓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의 용기를 가상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래서 실족하지 않도록 얼마 안 있다가 닭 울기 전에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해주셨다(요13:38). 

 

5.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몇 가지로 말씀하셨는가?

  이어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비록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지만 그들이 근심하지 말아야 할 3가지 이유를 말씀하셨다. 그것은 첫째로, 주님의 떠나가심을 아주 버림이 아니라 잠시 떠나가는 것으로서 곧이서 자기를 대신하여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는 일이므로 근심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요14:16~19). 그러므로 오히려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은 그 단어가 뜻하는 바 대로 '돕는 자'로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제자들에게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생각나게 하실 것이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주님이 비록 떠나간다고 할지라도 제자들이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하면 그 기도소리를 들으실 것이요 기도한 대로 시행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요14:13~14). 우리는 여기서 기도응답의 주체가 누군가를 보게 된다. 이전까지 기도응답의 대상은 하나님이었다. 하지만 예수께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시면 자신이 제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 한 마디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만 실은 그분이 하나님 자신의 또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예수께서 제자들의 곁을 잠시 떠나가 있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관계를 청산하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 곧 아버지의 집에 가서 그들이 살 장소를 마련하고 처소를 준비하러 가기 때문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다(요14:2~3). 그래서 거처가 준비되면 다시 와서 제자들을 영접하여 그리로 데려가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떠나가심을 제자들을 처소를 준비하기 위해 떠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근심할 일이 아니라 기뻐할 일인 것이다. 

 

6. 장차 제자들이 들어가게 될 천국은 어떻게 생겼는가?

  예수께서 천국에 먼저 가신 이유는 천국에서 제자들이 살 처소를 마련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천국에 집을 잘 지어보려고 이 땅에 사실 때에 그의 직업으로 목수의 일을 하셨다. 그래서 목수의 아들로 30년을 사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의 집을 잘 지어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우리 성도들이 거주할 처소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2층천에 있다. 사도 바울은 고후12장에서 자신이 셋째하늘(삼층천)에 다녀왔다고 간증했다. 그렇다면 3층천은 또 어디인가? 천국에 가보시지 않은 분은 이것을 잘 모르겠지만 천국은 두 개의 하늘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지구 위의 새들이 날아다니며 은하계의 별들이 있는 하늘이 1층천이라며, 천국은 두 개의 하늘로 구성되어 있어서, 아래층(2층천)에서 사람들이 거주한다. 그리고 윗층(3층천)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러므로 천국 성도들은 평소 때에는 2층천에서 살다가 예배드릴 때에 3층천으로 올라가서 예배드린다. 참고로 천국의 마을은 총 24개의 마을로 구획이 나눠져 있으며, 거기에는 24장로들이 왕노릇하고 있다. 이들이 예배 때가 되면 자신의 마을 사람들을 이끌로 3층천으로 올라와서 예배를 드린다. 그런데 절기가 되면 24마을에 사는 모든 천국성도들이 다 3층천으로 올라가서 예배를 드린다. 이 모든 사실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 보면 다 알 수 있는 사실이다. 

 

7. 왜 예수님만이 하늘 아버지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기 위한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인가?

  이어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이 어딘지를 알려주신다. 그것은 그 길을 모른다고 도마가 언급했기 때문이다(요14:5). 그때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가지 자기선언 가운데 6번째 선언으로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자신을 통해서만 아버지께 올 수 있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아버지께로 가기 위한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진리요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가 예수님 없이는 갈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며, 살 수도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아버지의 집으로 가기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며, 아버지의 집을 어떻게 가는지 가르쳐주는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아버지의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때, 당신 자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이때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면,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실 수가 없으시다. 자기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니 자기를 통하여 아버지께로 올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8.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기를 이미 본 채 있었는데도 자신의 실체가 누군지를 모른다고 언급하셨다. 고로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을 아는 채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도 아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이미 예수님을 알았고 또한 보았다면 이미 아버지도 안 것이고 또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4:7). 그러자 빌립이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달라고 했다(요14:8).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신을 본 자는 이미 아버지를 본 것인데 왜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면서,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또한 아버지 안에 예수께서 계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4:10). 고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시고 있는 레마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거하시면서 당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또다른 자기 계시이자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아니면 하나님이신가? 예수께서는 이미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자신이 누군지를 알려주셨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여호와로 믿고 있는 바로 그분이라고 하셨다. 그분은 자기를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는데, 그분이 바로 자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8:24,28,58).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미 자기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셨다(요10:30).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두 분인가 한 분인가? 그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쉽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한 분이셨다(신6:4).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정하시고 아들 안에서 아들을 위하여 그리고 아들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아들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와서 천국에서 사람들이 거주하도록 하실 계획을 세우셨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할 줄도 아신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할 방도를 고민하셨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인류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을 속죄제물이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들 가운데 흠없는 속죄제물이 될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사람이 되셔서 인류를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래서 아들로 이 땅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한 유일한 존재이므로 예수께서 아들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하늘에는 보내신 아버지가 계시면서 동시에 이 땅에 보내어진 아들로 존재할 수 있었다. 고로 우리는 예수께서 아들인 것은 분명히 맞지만 그분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려고 죽기 위해 사람이 되어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교회를 사셨다고 말했다(행20:28).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피를 흘리실 수가 없다. 그런데 죄속함은 오직 피흘림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피흘리기 위해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또다른 자기 계시이자 또다른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나를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며, 내 말은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으려면 유일하신 한 분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보내셨던 또 다른 하나님의 표현인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다(요17:3). 

 

9. 왜 예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시기 전에 베드로와 도마의 질문을 허락하셨는가?

  예수께서 떠나가시기 전, 주님은 베드로와 도마의 질문을 받아주셨다. 베드로의 질문은 주님이 어디로 가는지 그곳을 알 수 없기에 그곳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요13:36). 그리고 도마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을 자신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 길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요14:5). 그 대답으로 예수께서는 자신만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며, 그 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진리이며, 그 길로 들어서도록 해주는 생명이라고 하셨다(요14:6). 그리고 바로 아버지되신 그분이 자기 안에 있다고 하셨다. 그러니 자기를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며, 자기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이는 결국 제자들이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이며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와 도마의 질문을 통해 예수께서 아버지로께로 가는 중보자이심과 동시에 하나님 자신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베드로의 고귀한 질문을 통해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고(마16:16), 도마의 질문을 통해서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요20:28). 바로 이 두 사람의 질문이 있었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과연 누구시며 왜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10. 나오며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죽음은 영광으로 나아가는 바로 그 길의 끝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아니 된다. 죽음은 영광의 부활을 위한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당신이 죽음의 길에 들어선 것을 기뻐하셨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남겨두고 떠나가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셨다. 그래서 그들이 당신이 떠나가면 근심하고 두려워할까봐 그들에게 유언으로 말씀을 남기셨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13~17장에 나오는 '다락방강화'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남기고 간 이 말씀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당신이 잠시 떠나가시면 조금 있다고 보혜사 성령을 당신을 대신하여 돕는 자로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때라도 필요한 것이 있어나 위험한 일이 있을 때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으니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이 바로 기도다. 그리고 예수께서 천국에 먼저 가신 것은 우리가 살 처소를 예비하러 가는 것이기 기뻐할 일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께서 잠시 제자들의 곁을 떠나간 것은 제자들을 아주 떠나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버린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미래를 준비해주기 위함이요, 또한 영이 되셔서 항상 제자들의 곁에서 제자들을 도와주시기 위해 떠나가신 것이다. 그리고 필요한 것마다 채워주시기 위해 떠나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신 것을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오신 보혜사 성령을 환영하고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가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금이라고 기도하여 필요한 것을 얻고 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비록 잠시 떠나가심이 영원한 떠나가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우리를 배려하시는 방법의 하나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응답을 자신이 해 주신다는 말씀 속에서 그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요14:14).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은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인들에 대하여 나타내신 사랑이 곧 아버지의 사랑 그 자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신성만 가지고 있어 결코 죽으실 수 없으셨기에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죽기 위해 인성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신 한 분 하나님, 곧 예수님께 영원히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린다. 할렐루야. 

 

 

2023년 08월 30일(수)

정보배목사

2023-08-16(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8)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께서 행하신 참으로 귀하고 놀라운 일(요13:1~30)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1rJV4x9OeH0 [또는 https://tv.naver.com/v/40838782]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정말로 특별한 책이다. 그러니까 공관복음 곧 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과는 달리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주 하나님이라는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내용의 70%는 공관복음서에 나오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총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 전반부(1~12장)은 예수님의 7가지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되어서 '표적이 책'이라고 불리고, 후반부(13~21장)은 예수께서 하나님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쓴 것이기에 '영광의 책'이라고 불린다. 그중에서 요한복음 13~17장은 예수께서 마가다락방에서 행하신 사역과 말씀과 기도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3장은 마가다락방에서 있었던 4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세족식(1~20절), 유월절 식사(21~30절), 성만찬 후에 주신 새 계명(31~35절), 베드로의 부인 예고(36~38절)가 들어 있었다. 그중에서 오늘 읽었던 본문의 말씀(요13:1~30)은 마가다락방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한 기록인데,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는 2가지 사건을 만나게 될 것이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얼마나 사랑하셨는를 보여주는 2가지 사건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13장은 시작부터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정확히 그 배경을 알려준다. 그때는 유월절 하루 전날 밤이었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세족식과 유월절 식사를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유월절 하루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으며, 유월절식사를 하신 것인가? 그 이유가 바로 1절에 나와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제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 아버께로 가실 때가 왔다는 것을 아시고는 이 세상에 있는 당신자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곧 있으면 가룟유다가 자신을 배반하여 떠나가서 대제사장에게 가서 돈을 받고 자신을 넘겨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마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떠나갈 것을 아셨다. 하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혹시 제자들은 주님을 배반하고 버리고 떠난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시길 원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2가지 사역을 행했다. 하나는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유월절 식사를 통하여 가룟유다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것이었다. 

  

3. 예수께서 아셨던 2가지 사명은 무엇인가?

  그런데 이때 예수께서는 2가지 사실을 아신 채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것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하나는 아버지께서 인류구원을 위한 모든 일을 아들 자신에게 맡기셨다는 것을 아셨다. 그것은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주어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었다(3절).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나오셔서 이 땅에 오셨지만 다시 하나님이 계신 곳 곧 하나님을 향하여 떠나가야 한다는 것을 아셨다(3절). 그러면 육신의 몸으로는 두 번 다시 이 세상에 오시지 못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그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제자들이 나중에라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자신이 육체로 있을 때에 무슨 일을 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선택하신 것이 바로 세족식이며, 유월절 식사에 이어지는 성만찬의 제정이다. 고로 이때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당신의 사명은 당신 자신을 인류의 대속죄제물로 내어주는 일이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들이 받게 될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4.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이유 5가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많은 일들 중에서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려고 하셨던 것일까? 겸손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신 것인가? 섬김과 희생의 도를 알려주시려고 하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어떻게 해서 죄를 씻음받게 되는지를 알려주시려고 하신 것인가? 아니면 사랑을 보여주시되 행함과 실천을 통한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시려고 하신 것인가? 아니면 주인이자 선생이라도 섬기는 것이 어떤 삶이라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주시려고 하신 것인가?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세족식은 바로 이러한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는 복합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첫째,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겸손이 무엇인지를 손수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세족식을 행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자신을 종의 신분으로 낮추어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섬김을 받아야 하실 분이지 그분이 우리를 섬겨야 할 의무가 없다. 하지만 그분은 종이나 하는 일을 제자들에게 행함으로 육신을 갖고 있을 때에 그분이 행할 수 있는 최대의 겸손을 제자들에게 알게 하신 것이다. 

  둘째, 예수께서는 섬김과 희생의 방법과 원리를 제자들에게 깨우쳐주시려고 세족식을 행한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예루살렘 입성하면서부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등극하면 누가 과연 예수님의 보좌 좌우편에 앉아 다스실 것인지에 대한 초미의 관심사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성만찬 이후에도 '누가 크냐?'고 하는 다툼이 있었기 때문이다(눅22:24). 그때 주님께서는 당신은 섬김을 받는 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자가 천국에서 들어가서도 큰 자가 되고 섬김을 받는 자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눅22:26).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다른 사람들을 발을 닦아주는 종보다 비스듬히 누워서 먹는 자가 더 크지만 예수께서는 섬기는 자로 오셨음을 제자들에게 알게 하시려고 일부러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이다(눅22:27). 

  셋째, 한 번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자라도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씻어서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세족식을 행하신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을 때에 베드로가 그것을 막아섰기 때문에 그 일 때문에 알려진 놀라운 영적인 비밀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한 번 예수님을 믿어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게 되었다면 그 뒤에는 회개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베드로와의 대화를 통해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주님이자 스승이셨던 예수께서 종이 되어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받아 자신들의 발을 씻기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판단했다. 그러자 그는 즉시 주님의 일을 막아섰다. 그리고 말했다. "주님, 당신자신께서 어찌 제 발들을 씻기나이까? 절대 그럴 수 없나이다."(요13:6). 그러자 주님께서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베드로야, 만약 내가 네 발들을 씻기지 않는다면 너는 나와 함께 차지할 분깃(몫)이 없느니라"(요13:8). 이 말씀은 천국에서 받을 상이 없다는 것이다. 즉 주님도 상을 받지 못하고 베드로도 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는 즉시 마음을 바꾼다. "그렇다면, 제 발만 씻어주실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손들과 머리까지도 씻어주소서"(요13:9). 그러자 주님께서는 속죄에 관한 영적인 비밀을 알려주셨다. "이미 목욕한 채 있는 사람에게는 전체를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고 그 때에는 더럽혀진 발만 씻으면 되느니라."(요13:10). 그렇다. 한 번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피에 목욕하여 깨끗하게 된 사람은 매일 목요할 것이 아니라 더럽혀진 부분만 씻어 깨끗하게 하면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 그러므로 한 번 예수님을 믿어 죄사함을 받은 자라도 그 뒤에 다시 범죄하면 온 몸은 더럽혀지지 않고 어떤 부분만 더럽혀지는 것이니 그가 범죄한 바로 그것만 회개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허락한 죄사함이 죽는 그 순간에 취소가 되고 만다.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워버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의 구원은 취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지은 죄들에 대해서 그냥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자백하여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를 깨끗히 씻어내야 한다. 그것을 알려주시려고 주님께서는 더럽혀진 발만 씻어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넷째, 사랑이란 생각과 이론만이 아니라 행함과 실천을 통해 증거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세족식을 행하신 것이다. 사랑은 생각만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정말 사랑하신다는 것을 직접 종의 신분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이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아무리 자기가 주인이며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할지라도 섬김이 뒤따르지 않는 것은 진짜 주인이 아니며 진짜 선생이 아니라는 것을 본을 통하여 보여주시려고 세족식을 행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세족식을 마치시고는 그들에게 이러한 의미를 가르쳐주셨다. 즉 "너희 자신들이 나를 선생님이라고 하고, 주님이라고 소리내어 부른다. 그리고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때문이다. 하지만 나 자신이 주와 선생이 되어서 너희들의 발을 씻겼다면, 너희 자신들도 서로들의 발들을 씻겨줄 의무가 있는 것이니라.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인 것이다. 이제 내가 했던 것처럼 너희들도 행해야 한다"(요13:13~15). 그렇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주인이며 선생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은 더이상 종과 제자들을 섬기려교 하지 않는다. 부리려고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은 이 땅에서 남을 부리고 명령하고 일을 시키는 자가 크게 되는 나라가 아니라, 그 반대의 나라인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실천했다고 해서 주인과 선생이 갑자기 종과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니, 아낌없이 섬기기를 실천하라고 말씀하셨다(요13:16).

 

5. 예수님은 어떻게 자신이 주 하나님이시며 전지전능자이시다는 것을 보여주셨는가?

 

 

6. 유다의 배신을 이미 아셨지만  그의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 주께서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는가?

 

 

7. 나오며

 

 

2023년 08월 16일(수)

정보배목사

 

- 업로드중입니다.-

2023-02-08(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7)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올 결과와 주님을 따를 자들의 진정한 각오(요12:20~5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KoE8uAkbZpw [또는 https://tv.naver.com/v/33096949]

 

1. 들어가며

  예수께서 드디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런데 이번 예루살렘 방문은 여느 때와는 달랐다. 공생애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이지만, 이번 유월절 방문은 다른 방문 때와는 아주 많이 달랐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방문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아주 많이 소동케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죽은 지 나흘된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렸다는 소문이 이미 예루살렘에도 다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감람산 벳바게까지 마중을 나가 그분을 맞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바닥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때로부터 나흘 뒤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신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대체 무슨 일을 하신 것인가?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달리 이후 예수께서 몇몇 헬라인들의 방문을 맞이함으로 4일간의 삶을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월요일에 일어났던 기사들은 다 생략한 채, 화요일에 있었던 일들을 이어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입성 첫날에 예수께서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일까? 그리고 이때 들려주신 말씀은 공관복음서의 말씀과는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서 어떤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2. 몇몇 헬라인의 방문을 맞이한 예수께서는 군중들을 향하여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예수께서 입성하시자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다. 이때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관심거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때 헬라어를 말할 줄 아는 빌립과 안드레는 그들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한다. 그때였다. 예수께서 그들을 향하여 말씀을 시작하셨다. 그것은 바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것이다(요12:23).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광'이라는 말은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이 영예롭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분의 어떠하심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예수께서는 이때를 위하여 이 땅에 들어오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통하여 당신의 어떠하심을 드러내시려 하셨던 것이다. 고로 영광이란 바로 예수 안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영광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어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다(요12:27~28). 그때 하늘에서부터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라고 하는 음성이었다(요12:28). 사람들은 그 음성을 '천둥소리'였다고도 말하였고, '천사의 소리'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성부의 음성으로서, 이미 예수님을 통해 영광스럽게 한 일이 있고 앞으로도 예수님을 통해서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라는 음성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이미 과거에 아들을 영광스럽게 한 일이 있었으며, 이제 앞으로 또한 영광스럽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영광이라는 의미는 결국 하나님의 생명을 밖으로 드러내는 일을 가리킨다. 고로 결국 예수께서 생명을 가진 채 이 땅에 육신을 입은 몸으로 오신 것 곧 성육신이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한 일이 되는 것이며, 또한 장차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인하여 당신의 생명을 해방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3. 예수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2가지 결과는 무엇인가?

  이때 예수께서는 이방인의 방문을 통해, 이방인들을 포함한 온 인류를 위해 그분이 행하실 죽음의 놀라운 의미를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그것은 크게 2가지였다.

  첫째는, 그분이 이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음에 넘겨지게 되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요12:24). 여기서 한 알의 밀알이란 생명을 소유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또한 많은 열매란 그 생명을 많은 자들이 받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것은 예수님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해방하시는 것이었다. 그 생명은 절대 건드릴 수 없고 파괴할 수도 없으며 영원히 사는 생명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이 생명을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으셨다(요5:26).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지상에 계셨을 때에는 오직 예수 안에만 이 생명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생명을 해방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이든지 이방인들이든지 상관없이 그것을 나눠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생명의 위대한 영광을 드러내실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을 예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게 됨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비유로서 말씀하신 것이다. 

  둘째는,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됨으로 이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 마귀를 바깥으로 내던질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12:31). 그렇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류의 죄사함과 생명 분배만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이 세상의 통치자로 있는 사탄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도 오신 것이다(요일3:8). 그리고 그 방법은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 위에서 죽음에 넘겨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때 당시 사탄 마귀는 아마도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아담의 후손으로서 이미 다 자기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데, 오직 한 사람 예수님만이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만 죽여 없애버린다면, 모든 인류가 다 자기의 손아귀에 들어올 줄로 알았다. 하지만 마귀는 몰랐다. 그렇게 해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이면 그것은 자신이 불법을 저지르게 되어 심판받고 쫓겨난다는 것을 말이다.

 

4. 사탄 마귀는 언제 어떻게 어디로 쫓겨나게 되었는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사탄 마귀가 하늘에서 쫓겨난 것을 창조시에 있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즉 일반적으로 성도들은 천지만물을 창조하기 전 혹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직후에 사탄 마귀의 타락이 있었으며, 그때 하늘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과연 옳은 것일까? 만약 사탄 마귀가 하늘에서 쫓겨난 것을 천지창조 전후로 본다면 성경 말씀 중에 틀린 부분이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욥기서 1장과 2장을 읽어 보면, 사탄이 하나님 앞에 서서 보고하기를 "내가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다"고 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의 허락을 받고 땅에 내려가서 욥을 시험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사탄은 어전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또한 열왕기상 22장을 보면, 미가야가 보았던 하나님의 보좌 환상이 나온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군대인 천사들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기를 자신이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아합왕을 꾀어 길르앗 라못에서 죽게 하겠다고 제안하는 모습이 나온다. 여기에서도 역시 사탄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다. 그렇다. 구약시대에 사탄은 악한 일을 수행하는 자로서, 여전히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탄생 전후로 하늘에서 쫓겨난 듯하다. 그때 사탄은 혼자만 쫓겨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천사들과 함께 쫓겨나게 되는데 이들이 결국 귀신이 된다(게12:7~9). 그래서 그때 이후로 사탄은 하나님을 모방하여 음부에 자신의 보좌를 만들어 놓고 귀신들의 통치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그도 비로소 예수께서 하나님에게도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님을 시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려고 시도한다. 이때 사탄은 예수님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였다. 이는 그도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잘 몰랐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런데 예수님은 악한 영들이 하나도 없는 깨끗한 분, 죄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예수님을 시험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시험을 다 물리쳐 이겨 버리신다. 그러자 잠시 물러나 있던 사탄이 작전을 세운 것은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죽이도록 조종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십자가에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게 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일은 죄 없는 사람에게 사망 권세를 사용한 것이 됨으로 사탄 마귀는 자신이 가진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예수님에게 내어 주고 지상에서 쫓겨나 아직까지 무저갱에서 못 올라오고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 대환난의 때에 잠깐 올라와서 마지막으로 발악을 하게 될 터인데(계11:7, 17:8, 20:2~3,7~8), 그때 순교자의 숫자가 차게 됨으로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바로 요12:31의 말씀에 이 세상의 통치자가 장차 '밖으로'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미 하늘에서 쫓겨난 이후 이 세상의 통치자로 활동하고 있던 사탄 마귀가 무저갱으로 쫓겨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사탄 마귀는 그때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주님께 내어 준 채 무저갱에 갇히게 되는 신세가 된 것이다. 

 

5.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의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주어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분배하는 것임을 밝히셨다(요12:24). 이는 예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도 역시 자신의 목숨을 사랑하지 말고 그것을 미워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12:25). 만약 자신의 목숨을 사랑하여 그것을 아낀다면 그는 자기의 목숨을 오히려 잃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주님을 믿고 따라서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받기를 원하는 자는 이 세상에 속한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요12:25). 그래서 주님처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자리까지도 함께 갈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도 역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정치적인 왕국을 세울 줄로 알았다. 그래서 주님이 세우신 왕국에서 자신을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것은 아버지께서 누구를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나중에 그것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시면서, 우선 주님을 따르는 자는 주님이 마시는 잔을 마시고 주님이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이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잔'은 고난의 잔을 의미하고(마26:39), '세례'는 죽음의 세례를 의미한다(막10:39). 그러나 용감하게도 두 형제는 그럴 수 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던 그 순간에 야고보는 도망쳤고 요한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정말 주님의 제자가 되어 자신의 목숨을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사도들이 순교해서 일찍 죽었지만 오직 요한만큼은 죽지 않고 자연 수명대로 살다가 주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렇다. 주님을 위해 죽기를 선택하는 자는 오히려 살게 되는 것이고, 자기의 목숨을 아까워하는 자는 오히려 먼저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그러한 자를 귀히 여겨 주신다고 말씀하셨다(요12:26). 

 

6. 왜 예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괴롭다고 말씀하셨을까?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장차 가져올 위대한 일들을 아셨다. 하지만 그분은 죽음을 앞두고 혼이 괴로워하셨다. 즉 예수께서도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 혼이 번민하신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자신의 목숨을 죽음에 내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생명의 주인으로서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으시다. 그런데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죽음에게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하는 것에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번민하신 것이다. 둘째, 자신이 죽으려면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당해야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하는 것이 죽음(둘째 사망)이요, 또한 어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항상 하나님과 하나였고 함께 하셨던 예수께서도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번민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외치셨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때 예수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다(마27:46).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이다. 이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속죄일 제사를 드릴 때에는 속죄제물로서 염소 2마리를 바치게 되는데, 그중 한 마리는 '희생양'으로 바치고, 또 한 마리는 '버림받은 양'으로 바치게 되는데, 예수께서도 역시 우리 죄를 위해 희생양으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양으로 죽으셨던 것이다(레16:7~10). 

 

7. 왜 예수께서는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셨는가?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 통치자인 사탄에게 매여 있는 자들을 향하여 권고하신다. 그것은 당신 자신이 죽음을 통해서 이 세상 임금을 쫓아낼테니까,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어서 빛의 아들이 되라고 하신 것이다(요12:35~36). 여기서 '빛'이란 곧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초막절 설교 때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8:12). 그분은 어둠 가운데 살고 있어서 그것이 사망의 길인지 생명의 길인지를 모르고 행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빛을 비추어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당시의 사람들은 빛이신 그분을 믿어서 생명을 소유해야 했다. 왜냐하면 빛이 없을 때에는 빛을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럴수록 영적으로 더욱 어두워질 것이다. 그러나 빛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더욱더 정금같이 빛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빛을 향해 나오지 않으면 그는 계속해서 어둠 가운데 걸어다니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죄를 짓고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마귀의 자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니다.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을 붙들 수 있을 때에 그 빛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생명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요, 빛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8. 그렇게 많은 표적들을 보았음에도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는가?

  정말 신기한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부인할 수 없는 표적들을 보았던 유대인들이었지만 끝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많았고, 이들에 의해 결국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된다. 왜 유대인들은 수많은 표적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신 것을 보았으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2가지 이유로 그것을 설명한다. 

  첫째, 그 이유는 유대인들의 눈이 멀어 있었고 마음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요12:39~40). 이는 이미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되는 것이었다. 그랬다. 그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었기에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기적들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많은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또한 그들에게는 고정 관념이 있었다. 하나님은 절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라든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라든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영광스러운 다윗 같은 왕만을 고대한 것이다. 그들은 수치와 모멸 속에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어갈 메시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지켜온 기득권을 박살내 버리는 예수님을 달갑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사역을 보고서 그들은 깨달아야 했지만 그들은 끝내 자신들의 완고한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다. 

  둘째, 그 이유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요12:42~43). 그랬다. 유대인들 중에서 몇몇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그렇게 하면 출교를 당했기 때문이다. 즉 유대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회당 예배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보았지만 그것을 시인하지 못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좋아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역시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무엇이 진정 진리고 바른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선뜻 가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많다.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의 입술이 시인한 그대로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셨으니, 심판의 날이 되면 눈물로서 후회하겠지만 그때에는 후회한다고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9. 나오며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 한다. 죽어갈 때 느껴야 하는 혹독한 고통도 있고, 죽으면 다시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랑하는 사람과 교통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죽음에 넘기겠다는 각오없이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생명의 길로 가기 어렵다. 타협은 마귀의 속삭임으로서 결코 생명을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한 번도 죽어보지 않은 죽음 앞에서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완전한 버림당함을 경험해야 하는 죽음 앞에서 번민하신 것이다. 하지만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겠지만 죽으면 그로 인하여 생명을 해방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받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묵묵히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죽음 이후에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행하실 영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죄인을 살리는 것이요 죄인에게 아버지의 생명을 부여하는 일이며, 사람을 지배하는 마귀를 멸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기꺼이 자신을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내어 놓으신 것이다. 그분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사탄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도 이길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먼저 그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영안이 열리지 않아 영적 세계를 전혀 모른 채 신앙생활을 해서는 천국에서 훌륭한 지위를 얻기 어렵다. 고정 관념이 꽉 박혀 있어서 잘못된 성경 지식을 내려놓기 전까지 천국과 영의 세계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단이니 혹은 삼단이니 하는 핍박당함을 무서워해서는 생명의 길을 걸어가기 힘들다. 사도 바울도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이 무엇이 대단한 일인가? 주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어찌 환난을 겪지 않고 들어가겠는가? 그러나 그 모든 일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그 어떤 일도 우리에게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광의 그 길은 자기의 목숨이라도 내놓은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꼭 기억하자. 그래서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지위를 얻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3년 02월 08일(수)

정병진목사

2023-02-01(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26) 향유부은 여인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주는 교훈(요11:45~12:1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Z7PqSZouuBY [또는 https://tv.naver.com/v/32826012]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영적인 복음서로서 대부분 예수께서 하신 말씀 어록에 집중하고 있는 복음서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이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나오는 내용은 가급적 넣지 않으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약 70퍼센트는 공관복음서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과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은 다른 공관복음서에서처럼 공히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사건의 기록은 공관복음서의 기록과는 대체 어떤 것이 같으며 어떤 것이 다른 것인가? 또한 그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에서 사도 요한은 왜 공관복음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 나사로와 마리아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을 책망했던 제자를 굳이 가룟 유다라고 왜 실명을 거론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체포하자고 결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왜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처음에는 그것이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고 했으며, 예수님의 예루살렙 입성에 그렇게도 많은 환영 인파가 몰렸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이상의 이야기를 통하여, 요한복음에서만 알 수 있는 놀라운 영적인 비밀들을 발견해 보고자 한다. 

 

2.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함께 모였던 공회는 왜 예수 체포령을 결의하게 되었는가?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두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부류는 제사장 그룹으로서 사두개인들의 한 부류였다. 또 한 부류는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그룹으로서 바리새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그룹은 원래 서로 정반대의 신앙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는데에 그 둘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이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는 그해 유월절이 되기 전에는 왜 예수님을 그토록 체포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민족을 위한다고 하는 명분을 들고 나온 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 때문이었다. 가야바는 A.D.18~36년까지 대제사장 직무를 수행한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중대한 결단을 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떤 논리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체포하고 죽이도록 공회를 설득하고 사형 법안을 통과시켰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논리였다. 

요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예수께서는 비록 죄가 없을지라도 예수께서 살아 있음으로 인하여 온 민족이 망하느니 그를 죽여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때 무슨 소요사태나 로마에 대항하여 무슨 독립전쟁이라도 일으킨 것인가?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도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살아생전에 단 한 번도 자신의 제자들더러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라고 하신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온 민족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대제사장의 논리는 사실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공회에서는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을 부인할 수 없으니, 예수님께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지 않도록 예수님을 죽여 없애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그분을 살려둔다면 로마인들이 와서 자기 민족의 땅을 빼앗고 민족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종교적인 메시야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둔갑시켜 제거하려는 나쁜 의도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제사장의 말을 옳게 받아들여, 결국 예수님을 죽여 없애기로 결의한다. 하지만 그때 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은 일종의 예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진짜로 한 사람이신 예수께서 인류를 대신하여 죽게 됨으로 유대 민족도 살릴 수 있었고, 이방으로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야바는 악한 계획을 말한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한편으로 보면 예언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지도자들의 위치에 있는 경우는 더욱더 그렇다. 

 

3.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을 왜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요한복음처럼 실명으로 그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예수님에 대한 어떤 여인의 향유 도유 사건은 사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과는 조금 다르다. 첫째로, 향유 도유 사건 장소가 다르게 나온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건의 장소를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마26:6, 막14:3).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이 장소를 '나사로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에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 즉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명시적으로 나온다. 다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향유 부은 여인을 '한 여자'라고만 기록하고 있다(마26:7, 막14:3). 그런데 이 사건에서 예수께서는 이 여인이 행한 일에 대해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녀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도 그 여인의 이름을 마태복음 기자와 마가복음 기자는 기록해 두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 이유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자들이 나사로와 마리아를 죽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산헤드린 공회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까지 함께 죽이려고 모의했었기 때문이다(요12:10). 왜냐하면 나사로의 소생 기적 사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요12:11). 그렇다. 죽은 지 나흘되었던 나사로의 소생 기적 사건은 그만큼 그 당시에는 커다란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기자와 마태복음 기자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할 때 쯤에는 유대인들의 기세가 여전히 등등해서 그 이름을 밝혔다가는 그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상황이 달랐다. 요한복음 기자가 이 사건을 기록할 때에는 벌써 A.D.90년 이후의 시점으로서 유대인들은 이미 온 세상에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었고 나라도 이미 망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기록한다 할지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사도 요한은 그 이름들을 명시한 것이다. 그렇다. 이처럼 성경 기록 하나하나에도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4.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다른 공관복음서의 기록과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누군지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말이다(요12:3). 그런데 이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요한복음이 좀더 구체적이다. 첫째,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그 기름을 붓되, 예수님의 머리에만 부은 것이 아니라, 발에까지 부었으며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까지 닦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요12:3). 둘째, 마리아가 향유를 깨뜨려 부은 것을 보고 책망했던 제자의 이름이 누군지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제자의 이름은 장차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하던 '가룟 유다'였다(요12:4).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에서는 더 분명하게 이 기사를 기록했던 것일까? 

  첫째,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까지 붓고 그분의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씻은 것은 그녀가 자신의 오빠를 살려준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그녀가 얼마나 깊이 간직하고 있었는지를 말해 주기 위함이다. 사실 여자의 머리카락은 자신의 인격을 상징하는데, 그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다는 것은 그녀가 얼마나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해 주며, 주님께 얼마나 자신을 낮추려 했었는지를 말해 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녀의 마음을 아주 귀하게 여기시고는 그녀를 높여 주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첫째로, 그녀가 한 일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시고, 낭비라고 말했던 가룟 유다를 책망하셨다. 그리고 둘째로 그녀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마리아도 아마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가 자신을 매우 낮추자 그녀를 높여 주시기 위해 그녀의 행동을 그렇게 해석하신 것 같다. 셋째로, 그녀가 한 일은 복음이 증거되는 모든 곳에서 기념하라고 하셨다. 이는 그녀의 감사의 마음과 자신을 낮춤이 우리 주 예수님을 아주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예수께서는 며칠 후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다. 

  둘째,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붓고 발을 씻겨 드리는 것을 보고 책망하고 있는 제자의 이름을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라고 밝힘으로서, 가룟 유다가 말한 것 곧 약 3백 데나리온어치나 되는 옥합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한 가룟 유다의 마음이 실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는 도적으로서 돈궤에 들어온 돈을 빼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요12:6). 이는 돈 욕심 때문에 주님을 파는 가룟 유다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리는 마리아의 대조를 통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5. 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승리의 입성 때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는가?

  요한복음에서는 예루살렘 입성 때에 예수께서 타셨던 운송 수단이 바로 '어린 나귀(오나리온)'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요12:14).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오직 여기에 한 번 사용될 뿐이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이자 이스라엘의 왕이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초라한 어린 나귀를 타셔야 했던 것일까? 정말 개선장군처럼 입성하는 왕의 행렬처럼 백마를 타고 오셔야 하지 않으셨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발이 땅에 닿을 듯한 어린 나귀를 일부러 타셨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 일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어린 나귀를 준비했어야 했다. 나중에야 그것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메시야 예언의 성취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스가랴 9:9의 말씀에, "시온의 딸,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높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었다. 또한 정치적인 메시야가 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유대 민족과 이방인들의 대속제물로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환호하는 군중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인가? 그 대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그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 어떤 은밀한 장소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를 위한 구속사건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로서 길이길이 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입성이 열광적인 입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를 공관복음서에서는 사실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누가복음에서는 열렬히 환영하는 인파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본 어떤 바리새인이 주님을 모시고 입성하는 제자들을 책망하기를 요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는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한다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19:40). 환영하는 무리들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왜 그날 그렇게 많은 인파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다는 것인가? 그것은 나사로 소생 기적 사건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죽은 지 나흘되어서 몸이 썩어서 냄새가 나던 나사로를 주님께서 살려 주셨는데, 이 사건에 대해 예루살렘 사람들과 유월절을 지키러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말 예수님을 자신들을 구원해 줄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할 십자가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알리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입성하신 것이다. 그때 상황이 어떠했는지 아는가? 그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모여서 한 말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요12:19)"

 

6. 나오며

  우리는 요한복음 11장 후반부에서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모의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본다. 왜 이러한 차이가 생겨났을까? 그것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 내려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시기심으로 비롯된 것이지만 결국 그것은 분노로 표출되었고 결국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르는데 사용되고 만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결국 사탄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자세와 각오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오빠를 죽음에서 살려주신 예수님에 대한 보은으로서 자신의 귀중한 옥합을 깨뜨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린 마리아의 모습을 닮아가야 하리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조그마한 돈 욕심에 자신의 스승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의 전철을 우리는 결코 밟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보면서 큰 감동을 받으신 것 같다. 그래서 그녀를 오히려 더 높여 주셨다. 그녀의 헌신을 더 아름답게 빛나게 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때 마리아에게서 겸손을 배우신 것이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다. 사람에게서 배우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의 옷깃을 여밀 뿐이다. 

 

2023년 02월 01일(수)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