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8(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33)] 마가다락방에서 예수께서 드리신 제사장적 기도의 핵심 3가지는 무엇인가?(요17:1~26)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CVYNTtuJ3wQ [또는 https://tv.naver.com/v/42328077]

 

1. 들어가며

  요한복음 가운데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께서 남기신 마가다락방 강화 곧 세족식과 성만찬 및 새 계명 수여, 고별설교(14~16장) 그리고 마지막 대제사장적 기도(17장)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여기에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예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서 행한 위대한 조치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과 아버지께 예수 이름으로 직접 구하여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온 인류를 위한 아버지의 위대한 계획이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속에 나온다. 그러므로 사실 요한복음 가운데 중요하지 않는 말씀이 하나도 없지만, 그중에서도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게 해 달라고 하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17장)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오늘날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를 배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의 3가지 핵심은 무엇이었는지를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드린 기도를 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유언적인 말씀을 주신 후,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간절한 기도를 올리신다. 이 기도의 내용을 사도 요한 영감을 받아서 고스란히 기록해 놓았으니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17장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내용이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서 인류 구속의 희생제물로 예수님 자신을 드리기 위한 기도와 남겨질 제자들과 미래의 모든 성도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시대였던 16세 중반의 루터교회의 신학자 데이비드 촤이트러스(David Chytraeus, 1530~1600)는 이 기도를 인류의 구속을 위해 예수께서 드리신 '대제사장적인 기도'라고 명명한 바 있다. 

 

3. 예수께서 마가다락방에서 드리신 대제사장적 기도의 핵심 주제 3가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수난받으시기 전날 밤 아버지께 드린 고별기도의 핵심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크게 3가지다. 첫째는 예수님 자신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기도이고(1~5절), 둘째는 앞으로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할 제자들을 위한 중보기도가 있다(6~19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는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될 미래의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가 있다(20~26절). 첫 번째 기도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라고 정의한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기도는 제자들과 온 인류를 위한 중보기도라고 정의할 수 있다. 

 

4. 예수님의 3가지 기도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그날 어떤 내용의 기도를 드렸는가? 우리는 예수께서 드리셨던 기도의 몇 가지 내용을 잘 알고 있다. 그분은 하루를 시작하실 때에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막1:35). 그리고 12명의 제자들을 사도로 지명하실 때에는 밤이 새도록 기도하시기도 하셨다(눅6:12~13). 그리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는 아버지에게 감사기도하시고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을 무리들로 알게 해 달라고 하면서 당신의 말을 받아달라고 기도하셨다(요11:41~42).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별기도가 있고, 마지막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그리고 제자들의 안위를 위해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적이 있으셨다(눅22:39~46). 그렇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 마가다락방에서 아버지께 올리신 고별기도는 대체 어떤 내용의 기도였을까? 성경에 기록된 기도 가운데 가장 긴 본문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의 내용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를 이제 살펴보자. 

  첫째, 가장 먼저는 예수님 자신과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비는 기도를 드렸다(1~5절). 그 내용은 한 마디로 "나를 영광스럽게 해 주시고, 나를 통하여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해 달라"는 기도다(요17:1,5). 그렇다면 여기서 '영광스럽게 해 달라'는 기도란 대체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은 곧 있게 될 자신의 죽음을 통해 자신에 주어진 아버지의 뜻이 이 땅 위에서 잘 성취되기를 비는 기도라는 것이다(요17:4).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제물로 바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달라는 기도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께서 아버지로부터 나오셨다가 다시 아버지를 향하여 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비참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억울한 것으로도 보지 않았다. 그것 영광스러운 죽음이라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잘 성취될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도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제는 남겨두고 떠날 제자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렸다(6~19절). 이 기도는 두 가지로 구별된다. 첫 번째는 제자들을 지켜 달라는 기도였다(요17:11,12,15절). 그것을 줄이면 "제자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였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의 보전기도는 또 다시 2가지 구분된다. 하나는 내적 분열로서부터의 보전으로서,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였고(요17:11), 또 하나는 외적인 요소로부터 보전 곧 악한 자인 사탄으로부터 지켜 달라는 기도였다(요17:15). 그리고 두 번째는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요17:17). 그것은 진리의 말씀으로 그들이 깨끗하게 되고 구별되게 해 달라는 기도다. 

  셋째, 마지막으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들을 포함하여 제자들의 복음 전파를 통해서 구원받을 미래의 성도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렸다(10~26절). 그리고 세부적으로 그 내용을 보면, 미래의 성도들이 하나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고(21~23절), 아버지와 아들 안에 있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21절). 그리고 앞으로 예수님을 믿어야 할 세상 사람들을 위한 기도로서는 첫째로, 아버지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해 달라는 기도(21,23절), 그리고 둘째로, 아버지께서 세상 사람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23절)를 드렸다. 그리고 앞으로 예수님을 믿을 사람들로 하여금 첫째로, 이들도 다 예수께서 계시는 천국에 함께 있게 해 달라는 기도(24절)와 예수께서 이미 갖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 십자가 사건으로 얻으실 영광을 보게 해 달라는 기도(24절) 드렸다. 

 

5. 예수께서는 과연 누구에게 기도를 드렸는가?

  그렇다 예수께서는 과연 누구에게 기도를 드렸을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는가? 아니면 여호와께 기도를 드렸는가?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는 꼭 아버지께 기도하신다. 요한복음 17장의 고별기도에서도 역시 예수께서 기도를 드리는 대상은 아버지로만 나온다.

  먼저, 고별기도 이전에 예수께서 기도를 드리신 장면이 2번 나오는데, 그때도 역시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셨다(요11:41~42, 12:27~28).

요11:41~42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2:27~28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둘째, 고별기도 때에는 무려 6번이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신다(요17:1,5,11,21,24,25)

요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17: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기도의 대상을 부를 때, '하나님'이나 '여호와'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이 하나님이시고(요20:28), 구약시대에는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셨던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요8:24,28,58).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이 땅에 파송신 분으로서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신다. 

  그렇다면 왜 굳이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인가? 그것은 아버지와의 관계성 및 친밀한 관계성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는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래서 그때에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독생자였다. 예수님만이 아버지에게 홀로 하나 뿐인 아들이었던 것이다. 이는 오직 생명을 이어받은 아들이 되어야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공식적으로 기도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아버지께 기도했다는 것은 하나님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언제나 아들 자신과 함께 계시는 분이신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멀리 떨어져 계신 객관적인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가까이 계시고 자신의 기도에 좋은 것을 주시려 하시는 친밀한 아버지께 기도한 것이다(마7:9~11). 

마7:9~11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한편 예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시되,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2가지로 알려 주신다. 그것은 첫째로, 아버지는 거룩하신 분이라고 하셨다(요17:11). 이는 하나님의 성품이자 제1 속성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구별되신 분이자 깨끗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분이 세상과 초월해 계신 분이자, 죄도 없으시며 어둠도 전혀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아버지는 의로우신 분이라고 하셨다(요17:25). 이는 아버지께서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뜻한다. 그분은 상 줄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벌을 주실 자에게는 벌을 주시는 공평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6. 예수께서 드리신 고별기도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드려야 할 기도에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드리신 고별기도의 내용과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성도들이 드려야 할 기도에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가? 사실 예수께서는 공생애 초기에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에 제자들에게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 일이 있었다. 그때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를 가리켜 '주기도문'이라고 부른다(마6:9~13). 이는 주님께서 가르쳐 준 기도문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마6:9~13)과 예수께서 드리는 고별기도(요17:1~26)를 통해,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와 그분이 드린 기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마6:9~1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첫째, 예수님의 고별기도와 주기도문이 갖는 공통점은 기도를 드리는 대상에 대한 호칭이 '아버지'로서 똑같다는 것과 그 내용이 하나님의 영광과 뜻이 성취되기를 위하는 기도라는 점서 똑같다는 것이다. 주기도문에서는 기도를 드리는 대상이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고별기도에서는 '거룩하고 의로우신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둘째, 이 두 기도의 차이점은 예수님의 기도에는 인간의 육신적인 필요가 없으나, 우리 성도들이 드려야할 기도에는 육신적인 필요를 구하는 기도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가 주기도문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고별기도가 아마도 주님의 구속사역을 앞둔 점에서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궁극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구하는 기도였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영혼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육체를 갖고 있는 존재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 하늘에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의 중심은 여기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해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그것을 항상 공급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궁극적으로 구할 것은 육신의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기도여야 한다(마6:33).

마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7. 나오며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누구에게 어떤 내용의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인가? 이것을 잘 모를 때에는 예수님을 따라하면 된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르쳐 준 것이 있으면 그 말씀을 따라 기도하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마6:9~13)과 예수님의 '고별기도'(요17:1~26)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우리가 기도를 드려야 할 대상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이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며, 우리 하나님은 언제라도 우리에게 영적으로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그분은 자신에게 구하는 것에 넘치도록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지 못할 것이 없으시다. 

  그리고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내용으로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 곧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그분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성취되기를 위하는 기도를 드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이나 고별기도를 보면 다 이것들이 공통분모로 들어가 있다. 우리가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 거룩한 자가 될 만 아니라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앞에 충성된 자가 되도록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어서는 예수께서 계시는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새 예루살렘 성 안 만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께서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천국에 들어가심으로 어떤 영광을 얻으셨는지를 알고 그 나라를 잘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기도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도 천국에 들어가서 살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23년 10월 18일(수)

정보배목사

2023-10-11(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32) 다락방강화(4) 보혜사 성령의 사역과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요16:1~33)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LadrpTzzF1E [또는 https://tv.naver.com/v/42326657]

 

 

1. 들어가며

  요한복음 16장은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 계속되는 고난주간 중 목요일 밤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던 강화의 말씀 가운데 마지막 부분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하루 앞둔 가운데, 장차 교회의 구심점이 될 제자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여러 가지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남겨 주신다. 특히 예수께서 남기신 말씀 가운데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의 말씀을 가리켜 '예수님의 고별설교'라 부른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 땅에 오신 메시야로서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안위를 염려하시면서 그들에게 주신 주옥과도 같은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 떠난 빈 공간을 과연 누가 채울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어닥칠 핍박의 상황이 제자들에게는 슬픔과 고통이 되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성령께서 오시면 그들의 그러한 고통과 아픔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과연 요한복음 16장에서 제자들에게 어떤 귀중한 말씀을 남겨 주셨는지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자. 

 

2. 요한복음 16장의 말씀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요한복음 16장의 말씀은 어떠한 말씀인가?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6장의 말씀을 통해, 먼저는 앞으로 제자들에게 닥칠 극심한 핍박을 앞두고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핍박을 예고함과 동시에 당신 자신이 제자들의 곁을 떠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아니 예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는 것이 제자들에게 더 유익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육체로 함께하심으로 제자들을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셨던 예수님을 대신하여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것이며, 또한 그동안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통해 공급받았지만 이후부터는 아버지께 직접 기도하여 얻으라고 말씀하신다. 지금은 예수께서 떠나가심으로 슬퍼하겠지만 곧 성령이 오시면 그 슬픔은 변하여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긴 채 있으니 세상의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할 것을 권면하신다. 

 

3. 유대인들은 왜 예수믿는 자들을 핍박하려고 하는 것인가?

  예수께서는 앞으로 제자들에게 불어닥칠 핍박의 상황을 이제 비로소 말씀하기 시작하신다. 왜냐하면 그때가 되어서 제자들로 하여금 실족하지 않게 하려는 뜻에서 그렇게 하신다. 그렇다면 앞으로 제자들에게 어떤 상황이 올 것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회당에서 출교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유대 공동체에서 추방하며 또한 죽이기까지 하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아버지 하나님도 알지 못한 채 있고 또한 예수님도 알지 못한 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는 그러한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진실로 그들이 자기의 조상들의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면 응당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하는데, 그들은 하나님 믿는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을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그분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는가?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오셨는데,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이 이 땅에 들어오실 때에는 사람의 육신을 입으셨다.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성장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그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은 그분이 하신 말씀과 삶을 통해 증명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장차 대속의 죽음을 죽고 부활하심으로 증명이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죄와 죽음과 사탄 마귀로부터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몰라보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집고 들어 온 공격자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삐딱하게 보고 예수님을 잡아 제거하려고만 했던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도 그렇게 죽이려고 하였는데, 하물며 제자들은 어떠하겠는가?(요15:19) 기득권을 보호하려고 주님을 잘못 판단한 영적인 무지가 그들 자신을 마귀의 자식이 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핍박이 있을 것을 예수께서 이제야 비로소 말씀하신 것은 그동안에는 예수께서 제자들 곁에 있어서 그들을 지켜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떠나야 할 시각이 다가왔기에 제자들이 그때를 당하여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앞으로 있을 핍박과 죽음을 미리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4. 이에 근심하는 제자들을 위해 주님께서 내리신 2가지 처방은 무엇인가?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2가지 처방전을 내리신다. 그것의 하나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제자들을 보호하고 인도해 주실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자기들이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는 루트인 기도의 새 영역을 알려 주신다. 

  먼저, 예수께서는 자신을 대신하여 보혜사이신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6:7). 이제까지는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있었기에 어떠한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어도 그들을 지켜 주고 보호해 주실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항상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부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어떠한 귀신의 공격에도, 어떠한 사람들의 핍박 속에서도 제자들을 건드릴 수 없도록 그들을 지켜 주시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예수께서 죽음을 통해서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속에 오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곁에서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시며, 그들을 보호하고 상담해 주, 그들을 지켜 줄 돕는 자로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때 예수께서는 자신이 제자들을 떠나가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는 것이 오히려 제자들에게는 훨씬 더 유익할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 제자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도 역시 제자들과 늘 함께 있어야 했다. 예를 들어 보자. 어느 날 예수께서는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을 먼저 배를 태워 보내셨다. 하지만 귀신들이 바람과 풍랑을 일으켜 제자들이 탄 배를 뒤집으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즉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와서 바람과 풍랑을 잔잔케 해 주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 가신 뒤에 보내 주실 성령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지 않고 항상 함께 하실 것이니, 오히려 제자들에게 유익한 것이다. 

  둘째, 예수께서는 자신을 대신하여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직접 아버지께 구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도 방법을 제공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6:23~24).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계실 당시 제자들은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예수께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비롯한 영육 간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떠나가시고 나면 이제는 제자들 스스로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것인가? 그때 예수께서는 지금까지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주님께서 해결해 주었지만 성령이 오신 뒤부터는 무엇이든지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다 들어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성령이 오시면 아들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구약시대만 해도 기도하는 것은 사실 선지자의 몫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구할 수는 있었겠지만 공식적인 루트는 선지자를 통해서 기도해야 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제 중간의 어떤 중보자 없이 직접 하나님께 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신 것이다. 기도의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가 없다. 

 

5.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하실 일은 대체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중요한 말씀들을 하셨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말씀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오셔서 제자들을 도와주실 성령님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은 어떤 것일까? 그것에 대해 예수께서는 그동안 고별설를 통하여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에 관하여 3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 보혜사 성령께서는 믿는 자 속으로 들어와 거주하시고 믿는 자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요14:16~17).

  둘째, 보혜사 성령께서는 모든 것들을 가르쳐 주실 것이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했던 것들을 생각나게(기억나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요14:26).

  셋째, 보혜사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증언해 주실 것이라고 했다(요15:26).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보혜사 성령이 하시는 일을 더 확대하여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폭로사역을 하실 것이라고 했다(요16:8~11). 보혜사 성령께서 오시면 그분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에 폭로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죄에 대해 폭로하신다고 했는데(요16:9),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요16:27~31).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으로서,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요8:24). 그것이 죄라는 것이다. 둘째로, 의에 대해 폭로하신다고 했는데(요16:10), 이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그것을 폭로해 준다는 것이다. 왜나하면 예수께서는 죄를 짓지 않으셨다(요일3:5, 히4:15, 벧전2:22). 왜냐하면 그분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고후5:21). 그런데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죄가 없다면 죽지 않으셔도 되는 죽으신 것이다. 그럼 왜 죽으셨는가? 그것은 구약의 속죄일 제사가 보여 주듯이 흠없는 속죄양으로 오신 예수께서 온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고전15:3, 벧전1:19~20).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셨지만 다시 살아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때 예수께서는 누구의 죄값을 치른 것인가? 그것은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것이다. 고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예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 주는 것이며(고전15:17), 또한 그분이 우리 대신 죽으신 것이니,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칭의인이 되게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 성령께서 오신 것이다. 셋째로, 심판에 대해 폭로하신다고 했는데(요16:11), 이는 이 세상 임금(통치자)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폭로해 주신다는 뜻이다. 이 세상 임금은 사실 사탄 마귀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세상의 통치권이 아담에게서 마귀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눅4:6). 그런데 그러한 사탄 마귀를 공생애 초기에 예수께서 사람으로서 최초로 이기셨다(마4:1~11). 그리고 공생애 말기에 십자가에서 이기셨다. 왜냐하면 죄없는 예수님을 죽게 했던 죄로 인하여 그를 이 세상에서 쫓아버려 지금까지 무저갱에 갇히게 했으며, 그의 부하들인 귀신들을 쫓아낼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모든 귀신들은 다 무장해제당했다. 그들의 계급장을 떼어버린 것이다(골2:15). 그러므로 사탄 마귀가 패배자인 것과 귀신들은 패배자의 하수인들로서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의 종이 되는 영적 법칙에 따라, 귀신들은 이긴 자이신 예수님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권한을 이제 우리 믿는 자들에게 위임해 주셨으니, 모든 믿는 자들은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폭로하는 일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인 것이다. 

  둘째, 진리 인도사역을 하실 것이라고 했다(요16:13a).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요14:17, 15:26, 16:13). 그러므로 그분은 거짓말을 하실 수가 없으시다. 오직 진리의 영으로서, 진리만을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이시다(요14:6). 오직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증언하시는 것이 성령님이신 것이다. 

  셋째, 예언사역을 하실 것이라고 했다(요16:13b). 왜냐하면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개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되어질 모든 일도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날 성령께서 강림하시자, 사도 베드로는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며, 젊은이들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될 것이라고 했다(행2:17~18). 그러므로 성령을 모신 자는 장래 일을 알고 미리 준비할 수가 있다.

  넷째, 성령께서는 그 외에도 다른 많은 사역을 하신다. 우선 내주하신 성령께서는 중생케 하시고, 성품을 변화시키시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치는 사역을 행하신다. 그리고 머리 위에 내려오시는 성령께서는 성령세례를 베풀어 주시며, 각종 은사들을 주시어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 

 

6.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지만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이제 곧 있으면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주지시키면서, 한 가지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성령님과 어떤 관계인지를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요한복음 16:15의 말씀에 다 들어 있다. 

요16:15 무릇 아버지께[서 갖고] 있는 것[들]은 다 내 것[들]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성령)가 내 것을 가지고(받고 있으며) [그분이]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그렇다. 예수께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아버지께서 갖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인류를 위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후에는 하늘에 올라가서 보혜사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보내 주시는데, 이 땅에 오순절 날 강림하시게 된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가지셨던 것을 가지고 이 땅에 와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라는 이 말씀이다(요16:16,17,18,19).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전에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며, 나를 믿는 것은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의 말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내 속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있으면 다시 나를 보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 후에 보내 주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또 다른 오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의 오심이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오심은 또 다른 예수님의 오심인 것이다. 어떤 이는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은 재림으로 해석하는데, 그것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종국적인 말씀의 성취이며, 실제로는 성령님의 강림하심을 그렇게 현하신 것이다. 
 

7.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으심을 어떻게 표현하셨는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중의 하나는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 주는 일이다(막10:45). 그러므로 그분의 모든 사역의 촛점은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죽는 속죄양으로서의 죽으심이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비참한 죽음으로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사회의 지도자들인 종교 지도자들(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고 심지어 정치세력인 로마의 총독으로부터까지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신성 모독죄요, 로마 총독이 보기에는 반역죄인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렇게 대역죄인으로 죽으신 것이 아니다. 만약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죽음을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큰일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3년 동안 예수께서는 과연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보여 주시고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날 때가 가까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의 죽으심은 이 땅에 오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아버지를 향하여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6:28).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죽으심은 예수께서 대역죄인으로서 죽는 죽음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의 완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이 누구시며, 이제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심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임을 밝히 일러 주셨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수긍하게 되었다(요16:29~30). 

 

8. 예수께서 고별설교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예수께서는 이제 고별설교의 마지막 말씀에서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지금까지 고별설교의 최종적인 목표를 그들에게 들려 주신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떠나가심을 알고 두려워하지 말며 오히려 평안을 누리라는 것이다(요16:33). 왜냐하면 예수께서 떠나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오히려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하시고 도와주실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언제라도 필요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간구할 때 다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은 인류의 죄를 없애 사람들을 구원시키기 위한 죽음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류의 적인 사탄 마귀를 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류는 결코 사탄 마귀를 이길 수가 없다.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기 때문이다(벧후2:19). 그러나 예수께서 오셔서 첫사람 아담을 이긴 마귀를 이기셨다. 그리고 마귀를 이기심으로 그 밑에 있는 졸개들인 귀신을 내쫓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와 능력을 위임해 주셨다. 그리고 죽고 부활 승천하실 때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권세와 능력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셨다(막16:17~18).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와 싸워 이긴 자가 되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미 사탄 마귀와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이미 사탄 마귀와 싸워 이겼다는 것을 계속해서 주장해야 한다. 그것을 붙들고 귀신에게 그것을 말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듣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주지시켜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이미 이긴 싸움을 싸워 승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이제 이 땅에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성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걱정되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남겨 놓고 떠나가야 할 제자들의 안전과 안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그 무엇보다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임해 있는 두려움과 걱정 근심을 없애 주고 싶셨다. 또한 자신이 제자들 곁을 떠나가신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용기를 가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천국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그들을 무장시켜 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먼저 첫째로, 예수께서 얼마나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있는지를 세족식을 통해 보여 셨다. 그리고 둘째로,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죄인들을 위한 속죄사역이라는 것과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의 분배에 있다는 것을 성만찬을 통해 알려 셨다. 그리고 셋째로, 제자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2가지 처방전을 더해 주셨다하나는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이었고, 또 하나는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그들에게 주시는 것이었다. 그때 예수께서는 보혜사 성령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육체를 입고 있던 예수님보다 더 유익한 일이라고 하셨다(요16:7).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영으로 임재해 계심으로 언제 어디에서나 제자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떠나가신 이후에 필요한 것들은 언제 어디서나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면 응답을 받을 수 도록 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오심이 하나님의 또 다른 오심이었듯이, 성령님의 오심도 예수님의 또 다른 오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마침내 제자들도 그와 같은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 세상에 놓고 떠나가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안심을 하신다. 그때 제자들이 성령님의 오심이 곧 예수님의 또 다른 오심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러한 이해에 도달해야 한다. 그래서 이 세상 통치자를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를 귀신에게 적용하여, 그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2023년 10월 11일(수)

정보배목사

2023-09-20(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31)] 다락방강화(3) 참 포도나무 비유와 새 계명 준수 요청 및 핍박 예고(요15:1~27)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0FCMTH5zZ60 [또는 https://tv.naver.com/v/40877809]

1. 들어가며

  사실 복음서 중에서도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이 우리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을 매우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제 나눈 말도 다 기억 못하는데, 사도 요한은 60년 전,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 마가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들려준 말씀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일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60년 전의 일을 기억해 그때 들었던 말씀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할 수 있겠는가? 고로 우리는 성경은 인간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그대로 전해준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쓰였지만 헬라어는 문법적으로도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 들려주신 유언과도 말씀을 오늘 이 시간에도 볼 수가 있다. 그중에서 이번 시간에는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마가락방의 강화의 말씀 가운데 세 번째 시간으로서,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눠서 살펴보려고 한다. 첫 번째 부분은 1~11절의 말씀으로서, 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하여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친밀한 연합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12~17절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 상호간에 실천해야 할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18~27절의 말씀은 성도에 대한 세상의 핍박 및 이에 대한 성도의 자세가 나온다. 우리는 이상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께서 유언으로 남기고자 했던 말씀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파악할 수가 있다. 

 

2. 예수께서 말씀하신 7번째 자기선언은 무엇이며, 그 말씀의 의미는?

  예수께서는 이제 자신을 가리켜 '나는 포도나무요(5절), 참 포도나무(1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7가지 자기선언 가운데 맨 마지막 번째 선언이다(요6:35, 8:12, 10:7,9, 10:11,17, 11:25, 14:6, 15:1,5).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자신을 '감람나무'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무화과나무'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그분에게서 포도송이의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포도'라는 단어는 사실상 2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것이 아주 많이 맺힌다는 것이다. 포도는 일반적으로 포도송이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었을 때에 수많은 열매가 산출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앞으로 많이 생명을 얻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다. 둘째, 포도는 그 쓰임새가 포도주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곧 예수께서는 포도즙처럼 우리 죄를 위해 피를 흘려 죽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2장을 보면,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두고,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뭔가를 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에, 주님께서는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분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흘려 죽으실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 우리는 예수께서 포도나무라는 자기선언을 통해서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해 피흘려 죽으실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그냥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지 않고, '참('알레디노스')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그것은 '알레디노스'라는 단어에 그 핵심이 들어 있다. '알레디노스'라는 단어는 '프쉬데스'라는 단어와는 그 뜻이 반대다. 그런데 '프쉬데스'라는 단어는 '가짜의, 거짓된, 사기의, 허상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반대로 '알레디노스'라는 단어는 '진짜의, 진실된, 사실의, 실제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로 예수께서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시에 가짜로 행세하는 포도나무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바로 유대종교지도자들이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언제부터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빗대어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B.C.700년경인 이사야 선지자 때부터다(사5:1~7, 렘2:21, 호10:1).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을 만들고 거기에 극상품인 포도를 심고는 거기에서 극상품 포도열매를 맺기를 바라셨다고 하셨다(사5:1~7). 하지만 이스라엘이 맺은 것은 전혀 먹지 못할 들포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은 참 포도나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지금 유대인들은 참 포도를 생산하지 못하는 가짜 포도나무이며, 진짜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바로 자신 곧 예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죽지도 않을 뿐더러, 그들은 결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3. 과연 누가 열매맺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있는가? 

  만약 포도나무가 포도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당신은 포도나무이지만, 제자들은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라고 말씀하셨다(5절). 그러므로 가지가 포도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포도나무에서 절대 잘라지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2절). 가지는 어찌하든지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농부이신데(1절), 농부는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 열매를 맺고 있지 않으면 그 가지를 제거해버리실 것이라고 하셨다(2절). 그리고 이미 열매를 맺고 있는 가지라면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가지를 깨끗하게 처리해주실 것이라고 하셨다(2절).

  그렇다면 지금 가지는 가지인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가지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인 유대인 그룹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실제적으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맺고 못하고 있는 가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가지된 자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한다. 이것을 예수께서는 '내 안에 거하는 것' 곧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면서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자가 곧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라고 말씀하셨고(8절), 그들이 바로 장차 예수님의 '친구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3,14,15절). 여기서 '친구들'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필로이'(복수)라는 단어인데, 이를 정확히 번역하면, '사랑하는 자들'(복수)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고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어찌하든지 예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참고로 여기서 '머문다('메노')라는 단어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나눈 자들로서, 그분과 친밀한 영적인 교제를 지속적으로 가지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야 우리도 역시 '포도'라는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4. 예수 안에 머무는 자가 받게 될 4가지 축복은 무엇인가?

  계속해서 예수 안에 머물러 있는 자는 어떤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일까? 예수께서 당신 안에 머물러 있는 자가 받을 축복을 작게는 2가지로 말씀하셨고, 크게는 4가지로 말씀하셨다. 첫째로, 예수 안에 머물러 있는 자는 열매를 맺되 더 잘 붙어있는 자가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다(4~5절). 그리고 둘째, 예수 안에 머물러 있는 자가 되어야 어떤 기도를 하든지 기도 응답이 잘 된다는 것이다(7절). 특히 우리 자신의 기도가 더 응답이 잘 되게 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교제하고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그분의 말씀이 지금 나에게 레마말씀으로 들려야 한다고 하셨다(7절). 그렇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라도, 성령을 통해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을 수 없다면, 그의 기도는 금방 응답이 안 될 수가 있다. 그리고 더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안에 머무르되, 좀 더 가까이에 머물 수 있다면,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영적인 선물에 힘입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감당할 때에는, 그 시에 필요한 말씀 곧  그 시에 내 안에서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레마말씀이 잘 들려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더 가까이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기도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기도응답이 매우 잘 될 것이다. 그리고 셋째와 넷째는 부가적인 사항인데, 먼저 셋째로, 우리가 예수 안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8절). 왜나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열매도 많이 맺게 되는 것이며,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똑바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8절). 그리고 넷째로, 우리가 예수 안에 머물러 있으면 예수님께서 기쁨이 충만케 되고 우리들도 기쁨이 충만케 된다는 것이다(11절). 왜냐하면 둘 사이의 친밀한 교제는 하나님의 응답을 가져오고 선물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쌍방간에 기쁨이 충만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예수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면 어찌 될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그는 잘려진 가지가 되어 밖에 던져질 것이다. 둘째로, 그러면 그 가지는 말라질 것이다. 셋째로, 그러면 사람들이 그것을 가져다가 모아서 불 속으로 던져버릴 것이다. 이는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구원에서 탈락하게 된다면 그의 맨 마지막은 불구덩이에 속에 들어가는 것임을 말해준다. 

 

5.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한 2가지 조건은 무엇인가?

  사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듯이, 자신이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었다고 아무리 우긴다 할지라도, 자기에게서 예수님의 열매나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사실상 그는 그리스도와 연합관계가 끊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채 있지 않고 그분과 연결되어 있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특히 그분이 말씀하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던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9~10절).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은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다면, 그 주장은 거짓말이요 헛것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는 이이자, 주님의 계명들을 실천하고 있는 이가 바로 주님의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8절). 그리고 그러한 자가 바로 주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자 곧 주님의 친구들('필로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이 곧 주님의 친구들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주님께서는 주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하다가 말씀하셨다. 그것은 첫째로, 주님이 명령하고 있는 말씀들을 계속해서 행하는 자라고 하셨다(14절). 그렇다. 주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 것은 곧 주님의 계명들을 준행하는 것이며, 주님의 말씀들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도 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렇게 실천하는 것이다. 둘째로, 주님의 친구들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모든 것을 그도 아는 이라고 하셨다(15절). 예수께서 3년반동안 공생애 가운데 하신 일은 제자들을 곁에 두신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보고 그대로 행하며, 그분이 들려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대로 실천하며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제 3년반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모든 말씀을 전해주었으니, 이제는 자신의 제자들은 더이상 '종'('둘로스')이 아니라 '친구'('필로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도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내용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알고 그 가운데 자신이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알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과 계획도 모른 채 살아가면서, 어찌 예수님의 사랑받는 자가 될 수 있겠으며,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6. 예수님의 친구들이 되는 자에게 주어지는 2가지 축복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자기의 제자들인 열 한 사도들에게 이제는 아버지의 모든 뜻과 계획을 그들에게도 전수해주었으니, 그들오 주님의 친구들이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는 2가지 혜택이 있다고도 말씀하셨다. 그것의 첫 번째는 성령의 내주와 동행하심이다. 이것은 마가다락방의 강화말씀의 핵심주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날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나눠서 성령의 내주하심과 동행하심에 대해서 말씀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의 오심은 곧 또 다른 자기자신의 오심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진정 예수님의 제자들이자 친구들인 자에게 성령은 이제 예수님을 대신하는 가장 놀라운 교사이면서 동시 인도자이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기도응답의 약속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친구들이 되는 자에게는 주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6절). 그렇다. 주님과 친밀하게 지내는 자는 예수님으로부터도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로부터도 많은 기도응답을 받게 되는 것이다. 

 

7. 예수께서 말씀하신 세상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며, 세상은 왜 제자들을 그토록 핍박하고 죽이려고 할까?

  그런데 예수께서서는 제자되고 친구가 되는 자에게는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이 세상의 임금(통치자)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임금과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이 있는 한, 제자들이 하는 일을 가만 두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성령에 내려오시면 제자들이 능력을 받고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에 가장 필요한 것으로 성령을 보내주시고, 뿐만 아니라 기도응답의 축복을 더해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과 이 세상 임금과의 충돌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미리 제자들에게 장차 제자들에게 일어날 일을 알려주셨다. 그것은 첫째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였듯이 제자들도 미워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예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제자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였듯이 제자들도 미워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둘째, 세상이 주인인 예수님을 핍박하였다가 종인 제자들도 당연히 핍박할 것이라고 하셨다(20절). 그리고 세상이 제자들을 핍박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전파하는 제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셨던 이 곧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며, 아버지를 알지 못한 채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21~23). 그러므로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러한가?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기 때문이요,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서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이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은 곧 그들이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24절).

  그렇다면,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여기에서 예수께서 언급하신 '세상'이란 어떤 사람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세상'을 지칭하실 때에 '그들'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20, 21, 22, 24, 25절). 그렇다면 대체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이 세상의 임금인 사탄마귀를 따르는 자들'이다. 사실 요한복음에서는 '세상'('코스모스')이라는 단어를 3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우주 내지는 지구라는 의미로 사용된다(요16:28).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지구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도 사용된다(요3:16).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이 세상 임금(요12:31, 14:30, 16:11)인 저 악한 마귀를 따르고 그의 지배를 받는 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을 보고도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바로 여기에 속해 있었다. 이것은 이미 요한복음 8장에서 언급한 바 있다. 

 

8. 예수님이 누군지를 증언해 줄 두 가지 대상은 무엇인가?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던 것 같이, 제자들도 미워하고 그리로 심지어 죽이기까지 할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증언할 자가 둘이라고 말씀하신다. 첫째는 보혜사 성령이시다(26절). 보혜사 성령 곧 예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제자들에게 보내실 성령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실 것인데, 저분이 오시면 증언하실 한 분이 있으니 그분이 곧 예수님이신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진리이시다(요14:6). 그리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러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26절). 왜냐하면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요14:17, 15:26, 16:13).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다(27절). 그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과 공생애 시작과 함께 3년반을 지내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아버지의 말씀을 다 들었다. 그리고 배웠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제 자기가 예수님에께서 들었던 것을 증언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제자들로부터 성령을 받은 이 시대의 우리 자신들도 그분을 증언하는 책임이 주어진 것이다. 

 

9. 나오며

  사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은 주님의 제자들이자 친구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을 사실상 당신의 '제자들'이자 '친구들'로 삼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분을 증언하기 위함이다(27절). 이는 그분이 대체 누구시며 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는지를 증언하는 것이며, 또한 그분이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증언하기 위해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불러내셨기 때문이다(16절).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을 들어야 하고 그것을 숙지해야 한다. 그리고 모르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께 물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세례를 받고 능력을 받아야 한다. 아니 사실상 이것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요 완전한 방법인 것이다(행1:8). 그래야 마귀에게 속해있고 붙들려 있는 사람들을 꺼내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악한 마귀와 귀신들은 결코 그냥 자기의 포로들을 우리에게 내주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발악을 하고 때로는 저항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를 공격하는 일까지도 행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2천년전에 이미 그들의 대장인 마귀를 이기셨기 때문이다(요16:33). 그러므로 우리는 강하고 담대해져야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미 이루어놓으신 일을 과감하게 선포해야 한다. 복음을 증거하는데 은사가 필요하면 주님께 간구해야 한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로 장착해야 한다. 마귀와 귀신들도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천사들까지 부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권세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을 증언하라.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과업이자 예수님의 유언이기 때문이다. 

 

2023년 09월 20일(수)

정보배목사

2023-09-13(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30)] 다락방강화(2)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에 대한 약속과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요14:16~31)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JqfqzCq_X_k [또는 https://tv.naver.com/v/40877110]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좀 특이한 책이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갈릴리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요한복음은 유대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관복음서가 예수님의 인성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배치도 좀 특이하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의 총분량 중 절반 곧 전반부(1~12장)가 예수님의 3년반 동안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는 데에 비해, 요한복음의 절반 곧 후반부(13~21장)는 단 며칠 간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요한복음 13~17장까지는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밤에 일어난 일들과 말씀의 기록이다. 그리고 18~19장은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 그리고 죽음이 기록된 하루 동안의 기록이다. 그래서인지 13~19장까지는 요한복음 총 분량의 1/3이나 차지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13~16장까지는 예수께서 마가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으로 채워져 있다. 이 부분을 사람들은 보통 '다락방강화'라고 부른다. 그럼 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하루 전날 밤 들려주신 말씀을 4장이나 걸쳐서 기록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 기록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14장 중간 부분부터 마지막 절까지 살펴보게 될 것인데, 이 부분에서 사도 요한은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성령에 관한 약속(16~20,26절)을 말씀하고 있고, 새 계명('엔톨레')과 사랑('아가페')에 대한 교훈(21~25절), 그리고 평안('에이레네')에 관한 메시지와 이 세상 임금('아르콘')(27~31절)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2.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에 관해 약속을 다락방 강화의 핵심 주제로 말씀하셨는가?

  당시 제자들은 사실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자꾸 떠나간다는 의향을 내비치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제자들 곁에 계속 머물러만 있는다면 제자들은 사실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계시면 어떤 문제라도 다 해결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제 제자들의 곁을 떠나간다고 말씀하기 시작하신다. 그러자 제자들은 마음에서부터 요동을 치기 시작했고 불안해졌다. 심지어 두려워하기까지 했다(요14:27).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의 당부를 하셨다. 오히려 예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는 것이 그들에게 더 유익한 일이 될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오히려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4:28).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대신하여 보혜사 성령이 오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령께서 제자들과 죽는 그날까지 떠나가지 않고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요14:16). 그렇다면, 보혜사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오시는 것이 왜 제자들을 기쁘게 하고 평안을 주는 것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방식이 구약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3. 보혜사 성령께서는 앞으로 제자들과 어떠한 방식으로 함께 하신다고 하셨는가?

  그렇다면,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면 어떻게 제자들과 함께 하는 것인가? 그것은 2가지 방식으로 함께 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첫째는 성령께서 제자들의 '곁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라고 하셨다(요14:17). 그리고 둘째 성령께서 제자들 '속에도' 계시는 것이라고 하셨다(요14:17). 그리고 곧 예수님을 대신하여 오시게 될 성령께서는 제자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요14:16). 

  먼저, 성령이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는 새로운 방식에 대해 살펴보자(요14:16). 그것은 2가지 방식으로서,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 '곁에' 머무르게 되실 것이고, 또한 제자들 '속에' 계실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성령의 존재방식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라고 아니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성령의 존재방식은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사람들의 '위에'만 거주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삿3:10). 그것도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지명한 소수의 몇몇 사람들에게만 있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성령께서는, 성령받은 자가 범죄하였을 경우에는 그 사람을 떠나가기도 하셨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사울왕에게서 성령이 떠나갔던 예이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부리신 악신이 그이 위에 내려오고 말았다(삼상16:14).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다윗은, 자기가 범죄한 후 자신에게서 성령께서 떠나가지 않을까 염려되어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른다(시51:11). 그런데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간 후에, 장차 아버지께서 보내주실 성령은 제자들 '곁에' 머무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제자들 '속에'도 머물러 계실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성령께서 믿는 자들의 영 속에 들어와서 둘이 하나가 되는 방식을 뜻한다(고전6:17). 그러므로 이것은 오순절 성령의 놀라운 변화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 

  둘째, 그리고 성령께서 한 번 제자들 속에 들어오시면, '영원토록' 떠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요14:16). 구약시대에는 사람이 범죄하면 성령께서 그냥 떠나가셨다. 왜냐하면 위에만 머물러 계셨기 때문에 떠나가기도 쉬웠기 때문이리라고 본다. 하지만 예수께서 새롭게 보내주실 성령은 믿는 이들의 속에 거주하실 뿐만 아니라, 두 영 곧 사람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하나가 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둘은 떨어질 수가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간에 대해서는 단서가 달렸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성령께서 '영원토록' 떠나가지 않는다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니까, '영원무궁토록' 혹은 '세세토록'(세대들의 세대들까지) 떠나지 않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왜냐하면 요14:16에 나오는 '영원토록'이라는 문구는 '에이스 톤 아이오나'라는 문구로서, 이를 직역하면, '그 시대까지'(for the age)라고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까지만 믿는 이들과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음 세계로 인계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 성령이 우리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오셨다면, 그 사람이 죽는 그날까지 성령께서는 결코 그 사람을 떠나지 아니하신다. 하지만 죽는 날에 성령이 떠나가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라 할지라도 죄를 짓고 회개하지 못해서, 그날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계3:5). 누구든지 진 자는 그날, 생명책에서그의 이름이 지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인치는 시간은 우리가 구속받는 그날까지라고 한정해서 말했다(엠4:30). 다시 말해 우리 몸이 부활체를 입어 구속받는 그날까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를 떠나가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닐 수 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으로 이뤄가야 하는 것이다(빌2:12). 

 

4.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성령에 대한 2가지 명칭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당신을 대신하여 보내주실 성령에 대해 다음과 같은 2가지 명칭을 사용하셨다. 그것은 첫째로, '보혜사'라는 명칭을 언급하셨다. 이 명칭은 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돕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그리하여 이 단어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다른 번역들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영어로는 '위로자'(Comforter)(KJV), '상담자'(Counselor)(NIV). '돕는 자'(Helper)(NKJV), '변호사'(Advocate)(AMP), '중재자'(Intercessor) 등으로 번역된다. 그리고 한국어로는 '보혜사'(개역,표준새번역), '위로자'(킹제임스), '보호자'(카톨릭,현대인의 성경), '협조자'(공동번역), '돕는 분'(쉬운말) 혹은 '돕는 자'(현대어), '위로하는 자'(예수성교젼셔) 등으로 번역된다. 그것은 '보혜사'라는 명칭이 위로해주시고 보호해주시며, 도와주시며, 변호해주시고, 중재해주시는 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성령을 가리켜,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보혜사'라고 언급하셨다(요14:16). 여기서 '다른'(알로스, anoher)이라는 말은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이다. 만약 '다른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이라면, 보혜사는 '딴(헤테로서, different) 보혜사'로 말해야 한다. 하지만 성령님은 예수님과 같은 종류에 속하는 보혜사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의 보혜사로 예수께서 일하시고 있었는데(요일2:1, '대언자'로 번역됨), 이제 예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님께서도 역시 예수님과 같은 종류의 다른 보혜사로서 일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또 다른 표현이었듯이, 오순절 이후 내주하시는 성령님도 역시 예수님의 또다른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볼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요14:19). 

  둘째로, '진리의 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셨다(요14:17, 15:26, 16:13). 이는 성령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특징적으로 말해주는 명칭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는 오로지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요15:26). 그리고 성령님은 성도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실 분이기 때문이다(요16:13). 그러나 이 세상 신인 마귀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거짓의 영이자 거짓의 아버지이다(요8:44). 그러므로 마귀는 미혹하는 일을 전적으로 하는 자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이 짓는 죄들 가운데서도, 우리가 거짓말하는 죄짓는 것을 매우 싫어하신다. 그러면 거짓말하는 자는 절대로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못 들어갈 것이며(계21:27),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다(계21:8). 뿐만 아니라 새 예루살렘 성안에서 살지 못하고 성밖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계22:15). 그러므로 성도들이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항상 진리만을 말해야 하고, 진리만을 따라가야 한다.  

 

5.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에 이어 예수께서는 누가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자인지를 밝히 말씀하셨다. 그것은 주님의 계명('엔톨레')을 지키는 자라고 하신 것이다(요14:21), 그리고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지킨다는 뜻이라고 하셨다(요14:23~24). 그런 자가 되면 주님께서도 그를 사랑하실 것이고(요14:21),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실 것이며(요14:23), 또한 주님께서 자신을 그에게 나타내 보여주실('엠파니죠', 계시해주실, 알려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4:21). 이와 반대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결코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라고 말씀하셨다(요14:24). 왜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자인데도,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하는 것인가? 그것은 주님을 진정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라. 주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당장 드러내보여주실 것이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당신이 아버지와 함께 오셔서 그와 함께 거처('모네', 거할 곳)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요14:23). 그런데 영안을 열어서 보면, 실제로도 그렇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에는 우리의 영 속으로 들어오신다. 그런데 귀신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에는 우리의 몸(육체)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육체에다가 자기들의 집을 짓는다. 이름하여 귀신의 집이 그것이다. 그런데, 회개하여 귀신들을 쫓아버리면,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귀신의 집을 파괴해 주신다. 그러면 귀신의 집이 없어진 허허벌판에, 천사가 내려와서 성령이 거주할 집을 짓는다. 우리의 육체에도 성령께서 거할 곳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게는 혹 앞으로 귀신이 들어온다 할지라도 결코 그곳에 귀신의 집을 지을 수가 없다. 놀라운 일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오셔서 성령의 거처를 마련하시면 그곳은 이제 성령이 통치하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 

 

6.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행하시는 역할은 대체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에 5가지 역할을 감당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첫째로,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하셨다(요14:26). 이는 성령께서 우리의 영원한 교사(선생님)이 되어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신앙과 삶에 있어서 잘 모르는 것이 있을 때에는 성령님께 물어보면 된다.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교사가 되어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 성도들은 영원한 개인교사를 옆에 둘 수가 있는 놀라운 사람들이다. 둘째로,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모든 말씀들을 기억나게('휘포님네스코', 생각나게, 깨닫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요14:26). 사실 우리는 어제 들었던 말씀도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성령께서 오시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다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그 말씀대로, 말씀을 기억하여 요한복음이라는 성경책을 쓰게 된 것이다. 셋째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증언하신다고 하셨다(요15:26). 성령께서는 증언하시되, 다른 이를 증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이 누군지를 증언하시는 것이다(요16:14).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면 우리는 성령님께 여쭤보면 된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슬프게 하거나 그분을 아프게 하는 자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넷째로, 성령님께서는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다(요16:13). 여기서 '진리'란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다(요14:6, 8:32). 그런데 성령께서는 말씀하실 때에는 결코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예수님에게 들었던 말씀만을 말씀하신다고 하셨다(요16:13). 다섯째, 마지막으로 성령께서는 장래 일을 알려주실 것이라고 했다(요16:13). 왜냐하면 구약시대 때부터 성령님은 사람들에게 예언하는 일을 하게 하셨는데, 신약에 들어와서 여전히 성령님은 꿈과 환상과 예언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인도를 잘 받으면, 미래의 일까지도 잘 알 수 있고 그 복까지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7.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이 떠나갈 것을 알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해 주셨다. 그것은 그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요14:27). 그러니 마음에 동요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불안함과 초조함까지 다 제거해주시는 진정한 하늘의 평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실 일 때문이다. 사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늘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실제로 이스라엘은 그러한 평안을 경허하기가 어려웠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징계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평안이란 히브리어로 '솰롬'이라는 것인데, 이는 대부분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평안을 가리킨다. 하지만 예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실 평안은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그러한 평안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 임금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새로운 평안인 것이다(요14:28). 여기서 '이 세상 임금'이란 헬라어로 보면, '이 세상의 통치자('아르콘')'이라는 말이다. 이는 사탄마귀를 지칭하는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요12:31, 143:30, 16:11). 그러니까 사탄 마귀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인간들은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아무리 능력있는 마귀와 귀신이라도 성령께서 거주하시는 우리의 몸을 허락없이는 절대로 건드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악한 영이 우리를 죽이는 일은 우리 몸 속에 들어있는 성령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성령님의 허락이 없으면, 아무리 힘이 센 귀신들이라도 결코 우리의 몸을 죽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성령을 보내시어 주시는 평안이란,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평안이 아니라 항구적인 평안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환경마저 초월하여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평안인 것이다. 

  

8.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감이 그들에게 기쁨이 되는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잠시 떠났다가 다른 보혜사 곧 성령으로 다시 오신다고 하셨다. 한편 궁극적으로는 재림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보혜사 오시면 제자들에게는 큰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떠나가는 것이 제자들에게 기쁨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 뒤 보혜사 성령으로 오시게 되면, 예수께서는 항구적으로 제자들과 항상 함께 하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는 제자들과 항상 같이할 수가 없었다. 예수께서 다른 곳에 계시면 제자들이 그곳으로 가야 했고, 제자들이 위험에 빠질 때에는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라도 제자들 곁으로 오셔야 했다. 하지만 예수께서 보혜사 성령으로 오시게 되면, 그때는 영으로 오시기 때문에, 언제라도 제자들의 곁에 머물러 있을 수 있고,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지켜줄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이 떠나가는 것이 그들에게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9. 왜 예수께서는 아버지가 자기보다 더 크신 분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리고 이어서 예수께서는 '아버지는 예수보다 더 크신 분'이라고 말씀하셨다(요14:28). 그렇다면, 대체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을 두고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또한 이것으로 인하여 많은 이단들도 생겨났다. 왜냐하면 이 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보다 못하신 분이라고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까지 해석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께서 피조물이라는 뜻에서 언급하신 말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으셨다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일부러 자신을 낮추어 표현하시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요한복음 13장 16절에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요13:16)" 그렇다. 예수께서는 보냄을 받은 분이시다. 그분은 결코 보낸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은 보내심을 받은 자였으므로, 보낸 자가 보냄을 받은 자보다 크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이 세상으로 들어오셨고, 다시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를 향하여 가실 분이시다(요16:28).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처음에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셨기 때문에, 순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있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시기에 둘은 똑같은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두번째 자기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동등하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그렇다. 그분은 죽기 위해 일부러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실 때에는 자신을 항상 낮추시고 아버지를 높이어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신성만 가지신 아버지께서는 하늘에 계시고, 자신은 이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있으셨기 때문이다.

 

10. 이 세상 임금이 곧 올 것이지만 마귀가 예수님과 전혀 관계될 것이 없다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인가?

  이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면서, 곧 있으면 이 세상 임금(통치자)가 올 것이라고 하셨다(요14:30). 그러나 이 세상 통치자인 마귀라도 주님과는 관계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조금 있으면 죽게 될 것이지만, 그것이 예수께서 마귀보다 힘이 없어서 죽임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죄가 있어서 마귀에게 죽는 죽음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대신 죽는 죽음이기 때문이다(막10:45). 또한 예수님의 죽음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나 정치지도자들과의 힘겨루기에서 패한 결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사실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이기 때문이다(요10:18).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목숨)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10:18). 그렇다. 예수께서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인류의 속죄를 위해서 대속물로 내어놓으신 것이다. 그분은 사탄의 힘보다 약해서 사탄에게 죽임당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그 일로 인하여 사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히려 사탄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권세만 빼앗기게 되었다. 사탄이 뛰어난 존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탄을 사용하실 뿐이다. 그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일개의 연장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사탄이 이 사건으로 인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권한 곧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예수님에게 빼앗기고 만다(계1:17~18). 왜냐하면 자신의 권세는 오직 범죄자들에게만 적용할 수 있었는데, 하도 조급한 나머지 죄없으신 예수님에게 사망권세를 잘못 적용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주님에게 넘겨 주어야 했고, 그시간부터 음부의 한 켠인 무저갱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지금까지 갇혀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곳에 계속해서 붙잡혀 있다가 재림 직전에 잠깐 놓임을 받을 것이다(계20:1~3, 7).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장차 여자의 씨가 와서 뱀의 머리를 박살낼 것이라고 하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창3:15). 사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난 것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에는 결코 못 미치기 때문이다. 

 

11. 나오며

  보혜사 성령은 대체 누구신가? 그분은 제3위의 하나님이신가? 그런데 요한복음에 따르면, 성령님은 예수님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나온다(요14:18~19). 그분은 예수님과 같은 종류의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또 다른 오심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성도들은 성령님을 제3위의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다. 이 표현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한 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을 세 하나님으로 보게 할 위험성이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 위로도 얼마든지 존재하신다. 하나님만이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이듯이(요10:30), 보혜사 성령님도 예수님의 또다른 오심이기 때문에, 결국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인 것이다. 단지 보냄을 받은 순서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을 그렇게 표현한다고 해서, 예수께서 아버지만 못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성령님이 예수님만 못하다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아버지를 향하여 간다면, 보혜사 성령을 당신을 대신하여 보내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분의 오심이 예수님의 오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궁극적으로 재림하심으로 다시 오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 때에 성령님의 오심을 예수님의 오심의 또다른 표현으로 알지 못한 채 살아가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우리는 영으로 이미 재림하신 예수님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훼방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또다른 오심으로서,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유효화시키시는 성령님을 우리가 문전박대한다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도 결국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제대로 알고 그분의 일하심을 기뻐해야 한다. 그분이 내 안에서 충분하게 일하실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것이 장차 재림하실 예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23년 09월 13일(수)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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