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예수님을 과연 어떻게 소개하고 있을까? 그것은 첫 시작부터 장엄하고 우렁차다. 왜냐하면 온 우주를 가져와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소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한 방에 정리해준다. 그리고 영지주의에 미혹받아 흔들리고 있는 자들도 한 방에 정리해준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서막의 말씀 곧 요한복음 1:1~18절의 말씀이다. 그럼, 요한복음의 서막에는 과연 어떤 말씀이 수록되어 있는 것일까? 이 짦은 구절 안에는 창조 이전부터 예수님의 성육신의 신비와 공생애가 다 들어있다. 이제 그곳으로 시간의 여행을 떠나보자.

 

2022-06-08(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04) 요한복음의 서막이자 선언은 대체 무엇인가?(요1:1~18)_2022-06-08(수)

https://youtu.be/OFtDV7EcPfA  [혹은 https://tv.naver.com/v/27276511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가장 늦게 기록된 복음서다(A.D.90~95년경). 그러므로 그 어떤 복음서보다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공부하려면 우리는 단연코 요한복음을 공부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요 확실한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조직신학에서 기독론을 다룰 때에 교본으로 사용하는 것이 요한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요한복음은 읽기가 참으로 편하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제대로 읽으려면 요한복음의 배경을 잘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왜 이 본문이 여기에 쓰였는지를 배경을 이해하면서 읽을 때에 가장 빨리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A.D.1세기말경의 헬라어로 기록된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헬라어의 뜻이나 문법을 100%는 다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할 수만 있으면 헬라어를 곁에 둔 채 요한복음을 공부하는 것이 그나마 요한복음을 가장 빨리 그리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요한복음의 배경사와 더불어 헬라어를 곁에 두고서 '요한복음의 서막(요1:1~18)'부분을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복음 서막은 과연 무엇을 말씀하고 있으며, 요한복음 서막이 선언하고 있는 바는 대체 무엇인가?

 

2. 요한복음 서막은 요한복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요한복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과 본론 그리고 결론이 그것이다. 서론은 요한복음의 신학적 서론을 부분을 다루고 있는 1장 1절에서 18까지의 말씀이고, 본론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와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공적 사역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1~12장)과 다락방강화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을 다루고 있는 부분(13~2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마디로 요한복음 1:19~20:31까지가 본론인 것이다. 그리고 결론은 요한복음 21장으로서, 사명부여를 기록하고 있다. 그중에서 요한복음의 서론 부분을 우리는 보통 '요한복음의 서막'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의 첫부분을 '서론'이라고 부르지 않고 굳이 '서막'이라고 불리는 것인가? 그것은 요한복음의 서론이 요한복음 전체를 거의 결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누군신지를 요한복음의 서론 부분이 처음부터 이렇다고 선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성경책에서도 볼 수 없는 장엄한 스케일로 요한복음이 출발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사복음서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면 점차 시간이 지나서 중후반 때에 가서 비로소 알 수 있지만 요한복음은 다르다. 처음부터 예수님이 누군지를 선언하고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요한복음 서막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가?

  요한복음 서막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요한복음의 서막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선언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은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찬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만큼 그리스도에 관한 선언이 아주 규모있고 또한 아름답게 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태초부터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씀이 하나님으로서 있어왔다. 모든 만물은 이 말씀을 통하여 지어졌다. 그런데 이 말씀 안에 생명이 있어왔고 그 생명이 사람들에게는 참 빛이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빛을 싫어하였고 그 빛을 배척하였다. 그분을 영접하지 않은 것이다. 특히 혈통적으로 선택받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를 배척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를 산출하기 위해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드디어 육신을 취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들 속으로 들어오셔서 장막을 치신 것이다. 그 장막 안에는 은혜와 진리로 가득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이 빛에 대한 증언하러 온 자이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는 세례자 요한다 6개월 앞서 늦게 태어났지만 말씀이신 그분은 세례요한보다 먼저 계신 이이시다. 모든 사람은 그분으로부터 은혜 위에 은혜를 받게 된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으시기 전까지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본 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품 안으로 계셨던 독생하신 하나님 곧 유일하게 태어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심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서막의 내용이다. 그럼 왜 서막에 저자는 이러한 내용을 담으려했던 것인가? 그것은 요한복음의 처음부터 예수님이 누군지를 정확히 해 두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번에 살펴보았지만 2가지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하나는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A.D.90년 얌니아 회의 이후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기도문을 낭독하고 그리스도인을을 회당에서 축출하려고 하자, 이방지역에서 회당예배에 출입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흔들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계속해서 하나님이라고 시인했다가는 같은 동족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것을 우려한 나머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신앙을 버리고 여호와만 하나님이라고 하는 고백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선재하신 예수님으로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초기 영지주의의 미혹 때문이다. 초기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결코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지고한 신이 어찌 더럽고 추한 육체를 입을 수 있겠느냐면서 그들은 '가현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즉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께서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분은 결코 사람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1장 14절에서 선재하신 예수님인 말씀이 육신을 입어서 사람이 되셨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이 사람이 되시지 아니하시면 인류의 속죄사역은 결코 성취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장 29절에서는 그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다고 계속해서 언급을 하는 것이다. 

 

4. 요한복음 서막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요한복음서는 편지가 아니다. 복음서다. 이 책이 만약 편지라고 한다면 누가 누구에게 보내는지를 대부분 적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복음서'로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소개해주는 책의 하나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다. 이것은 모든 복음서들마다 다 동일하게 그러한 것이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도 역시 자신이 그 책의 저자라고 밝히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게 되면 예수님만 드러나야 하고 예수님을 소개해야 하는 복음서의 기사에서 혹 자신이 드러날까봐 이름을 쓰기를 꺼려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저자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오늘은 지난 번과는 달리 요한복음에 나오는 원문을 가지고 한 번 저자가 누군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누군가? 그는 한 마디로 "예수께서 [아직도] 사랑하고 계시는 제자"라고 표현되어 있는 바로 그 제자다(요13:23, 19:26, 20:2, 21:7, 20). 그런데 이 문장에서 '사랑하고 계시는'이라는 단어를 보자. 이 단어는 '사랑하다'는 뜻의 헬라어 '아가파오' 동사의 직설법 미완료 3인칭 단수 구문이다. 고로 만약 이 책을 쓰고 있을 때에 이 책의 저자가 이미 작고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이 이 책을 쓰고 있다면, 그는 아마도 저자를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쓰고 있고 또한 증언하고 있는 저자가 아직도 살아있는 상태에서 자신이 직접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가리켜 "예수께서 아직도 사랑하고 계시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쓰여질 당시 곧 A.D.90~95년까지 살아있는 제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이 책의 저자인 것이다.

  그럼 그 제자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사실 요한복음 자체에서도 이 책의 저자가 누군지를 알려주는 몇 가지 단서들이 나온다. 그것은 첫째, 예수께서 아직도 사랑하시고 있는 제자는 베드로와 동일한 수준급의 제자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를 '다른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시몬 베드로'의 이름을 같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요18:15),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요20:2)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의 '다른'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보면, '알로스'이다. 그런데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알로스(=another)'라는 단어가 있고, 또 하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헤테로스(=different)'가 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보내실 보혜사 성령을 말씀하실 때에 주님은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때에 사용된 '다른'이라는 단어는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 '알로스'가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베드로를 언급하면서 쓰고 있는 '다른 제자'라는 표현에서 '다른'이라는 단어도 역시, '전혀 다른 종류의 다른'이라는 뜻을 가진 '헤테로스'가 아니라, 모두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의미를 가진 '알로스'가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 책의 저자는 베드로급의 동일 수준의 다른 제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저자를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라고 추정한다든지, 아니면 사도 요한과 이름이 같은 '마가 요한'이라고 추정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들은 결코 베드로급의 동일 수준의 제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둘째, 이 책의 저자는 성만찬 때에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군지를 묻던 자로서, 예수님과 아주 친밀한 자라는 점이다. 그리고 당시 대제사장과도 아는 사이어서 예수께서 심문받으실 때에 대제사장의 집의 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유일하게 그곳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예수님과 친밀도 높은 제자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의 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이름이 세례 요한의 이름과 같은 확률이 높은 제자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가 세례 요한의 이름을 언급할 때, 다른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그 이름 앞에 그를 구별시켜주는 용어 '세례'라는 말을 붙히지 않고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저자 자신도 이름이 요한이지만 둘이 서로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의 이름을 사용할 때에는 그냥 '요한'이라고 쓰고 있지만 자신의 이름을 사용해야 할 때에는 이름 대신에 '예수께서 아직도 사랑하시고 있는 제자'라고 애둘러 표현한 것이다. 이는 동일한 이름을 서로 구별하기 위함이다.  그럼, 왜 사도 요한은 굳이 자신의 이름 대신에 '예수께서 아직도 사랑하시고 있는 제자'라고 별칭을 사용한 것인가? 그것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복음서가 예수님만을 드러내야 하는데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면, 혹 자기의 이름이 드러나서 혹 예수님에게 누가 될까봐 일부러 숨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저자가 요한복음의 서막에서도 자신이 누군지를 조금은 암시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와같은 사실을 숨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14절과 16절에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서 나타난다. 우선 요한복음 1장 14,16절의 말씀을 헬라어로 직역해보자. "그리고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 안에 장막을 치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지켜보았다(바라보았다). 마치 아버지에게서(파라) [있는] 독생하는 분(독생자)과 같은 영광을. 은혜와 진리의 어떠하심이 충만한"(요1:14 직역문) "왜냐하면 우리 자신 모두는 그분의 충만함으로부터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요1:16)" 저자는 이 두 문장에서 자신을 '우리'라고 표현을 통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 속한 저자는 그분이 육체가 되신 상태에서 그분에게서 나오는 영광을 직접 자신이 지켜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사도 요한의 뒤를 이은 후대의 어떤 다른 제자가 자신을 사도 요한이라는 사람에게 투영시켜 표현하고 있다는 가설이 틀렸음을 증명해준다. 이 책의 저자는 12제자들 가운데 가장 친밀한 세 명의 제자들(베드로, 야고보, 요한) 중 하나로서, 세례 요한과 이름이 같은 사도 요한인 것이다. 

 

5. 요한복음 1장 1절은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요한복음 1장 1절의 말씀만큼 쉽고도 어려운 말씀을 없을 것이다. 문장은 아주 간단하고 짧아서 읽기에 어려움은 없다. 먼저 우리 개역성경으로 읽어보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그런데 이 말씀은 번역문의 하나일 뿐이다.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것이다. 이 말씀은 "말씀이 하나님이다"는 것을 선언하는 문장이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하다. 이는 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을 가리키며, 3절까지 이어지게 되면 말씀의 창조성까지 언급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다른 문장과 달리 헬라어에서 정확하게 직역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 문장을 헬라어에서 보다 더 뜻에 가깝게 번역하면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요1:1[직역] 시작 안에 그 말씀이 있어왔다. 그 말씀은 그 하나님에게서 있어왔다. 그 말씀은 하나님(정관사없음)으로 있어왔다.

  보통 성경을 번역할 때에는 굳이 정관사를 번역하지 않지만 이 구절에서는 좀 번역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세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 세 번째 문장에 나오는 명사단어가 정관사가 붙어있는 단어도 있고 안 붙어 있는 단어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정관사의 유무에 따라 이 문장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먼저 처음 문장을 보자. "시작 안에" 이는 헬라어로 '엔 아르케'를 번역한 것이다. 영어로는 'in beginning'이라고 번역되는 문장이다. '시작에' 더 정확히는 '시작 안에'라고 번역해야 한다. '아르케'라는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다. 만약 이 단어가 정관사를 붙여서 "엔 테 아르케'라고 했다면 "그 시작 안에"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러면 이 문장은 어떤 시작을 알리는 특정한 사건이 있어 시간이 시작되는 시점을 말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 즉 아무도 알 수 없는 어떤 시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작은 창세기 1장 1절과는 약간 비교가 된다. 왜냐하면 창세기에는 하늘들과 땅의 창조를 시작하는 시작점을 말씀하지만 여기서는 시간을 알 수 없는 어느 시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6. 요한복음 서문에 나오는 '로고스(말씀)'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그 말씀' 곧 '호 로고스'(the word)라는 단어는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보통 '로고스'하면 주로 '말(씀)'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이는 단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뜻을 가진 단어가 있다. 그것은 '[흐]레마'라는 단어다. 성경에는 말씀을 뜻하는 2가지 단어가 있는 것이다. 이 두 단어의 차이를 알면 '로고스'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레마'는 어떤 단어인가? 레마도 역시 로고스처럼 말을 뜻하는 단어이기는 한데, 지금 입에서 혀의 작용을 통해 발설되어 입김과 더불이 나오는 말을 가리킬 때에 그 말은 '레마'라고 하며, 이미 말해진 것으로서 그 말을 인용하거나 그 말을 사용할 때에는 '로고스'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1:1의 '로고스'는 그때 당시 예수님의 입 속에서 발설되어지는 말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뜻의 레마는 요한복음 6장에 나온다.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자신이 너희에게 발설한 채 있는 바 그 말들은 영이요 그리고 생명이다.(요6:63)" 그러므로 보통 '레마'는 현재 혀의 작용을 통해 발설되고 있는 말이므로 그때 말한다는 단어는 '말하다(레고)'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발설하다'는 뜻을 가진 '랄레오'라는 헬라어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께서 어둠 가운데 "빛이 있으라"고 선언하실 때에 그 말은 '레마'인 것이지, '로고스'가 아닌 것이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입에서 발설되기 전의 말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개역성경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께 함께 계셨다"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로고스는 레마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로고스'는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말을 언급할 때에도 사용되는 단어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용하는 '말'과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말'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헬라어로서 '참되다'는 단어의 차이를 언급하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요21:24에 보면,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에 나오는 '참된'이라는 단어는 '알레테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거짓된 것에 반대하는 '참된'이라는 단어다. 즉 가짜에 대해 가짜가 아닌 '참된'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요1:9에 의하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에 나오는 '참된'은 헬라어로 '알레디노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부분적인 것에 대하여 완전하다는 '참된'이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즉 이 세상에는 불완전한 것으로서 빛이 있는데, 예수님은 불완전한 빛이 아니라 완전한 빛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고스'라는 개념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다. 즉 세상에도 사람들이 쓰는 말이 있지만 이 말도 창조적인 능력도 있어서 신성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은 불완전한 것이며, 완전한 것에 대하여 일부분만이 해당할 뿐이다. 그러나 선재하신 예수님을 지칭하는 '로고스'는 말은 말이지만 완전한 말인 것이다. 흠이 하나도 없는 말, 결격사유가 전혀 없는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로고스'를 단지 '말씀'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다르게 번역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말씀'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고스'라는 단어는 모든 것을 얼마든지 존재하게 만들어주는 정말 완전한 창조주로서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러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7.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있어온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있어온 것인가?

  이제는 두번째 문장 가운데 사용된 "함께"라는 전치사를 살펴보자. 이 전치사는 헬라어로 '프로스'라는 단어인데, 이 전치사가 목적격 명사와 함께 사용될 때에는 기본적으로는 '~을 향하여' 혹은 "~과 함께"라고 번역이 된다. 그렇지만 이 단어는 또한 "~에게" 혹은 "~을 위해"라고도 번역되기도 한다. 그ㄹ렇다면 우리는 어떤 뜻으로 이 전치사를 번역해야 하는가? 만약 이 전치사를 "하나님과 함께" 있어 왔다는 것으로 번역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향하여"라고 번역하게 된다면,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증언하기가 조금 어려워진다. 이는 말씀이 처음부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의미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공부하겠지만 요한복음에서 이 '말씀'이란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씀하실 때에는 한사코 "아버지에게서" 혹은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왔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그 말씀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어왔다'라고 번역한다든지 혹은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왔다'고 번역한다면,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의미가 없는 번역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말씀이 한 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다른(헤테로스) 데에 있는 말씀이라고 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요1:1의 두번째 문장은 "그 말씀은 그 하나님에게서 있어왔다"라고 번역함이 가장 적합한 번역이 아니겠는가 싶다.

 

8. 요한복음 1장 1절은 어떠한 고정된 상태를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현재도 계속해서 진행중인 동작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리고 첫번째 문장과 두번째 문장 그리고 세번째 문장 역시 모두가 다 동사는 동일한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도 시제가 똑같다. 다시 말해서, '있어왔다'는 동사는 '에이미(be)'라는 동사의 직설법 미완료 3인칭 단수 구문을 취하고 있다. 헬라어로 '엔'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동사의 미완료동사라는 것이다. 미완료라는 것은 과거에 시작된 행동이 아직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을 때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 동사를 "~있다(계시다)"나 혹은 "~이다"라고 번역하고 있는 한글번역본은 번역이 미흡한 번역이고, 영어로도 이 동사를 'was'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미흡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어를 한글로 굳이번역한다면, '있어왔다'라고 번역함이 가장 좋은 번역이라고 본다. 그 뜻은 "과거에 있었는데 아직도 있으며 언제까지 있을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요1:1의 3개의 문장은 똑같이 미완료구문으로 번역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첫번째와 두번째의 문장은 완전자동사로 번역해야 하고(있다), 그리고 세번재 문장은 불완전자동사로 해석해야 한다(~이다). 왜냐하면 첫번째와 두번째 문장은 보조용언이 나오지 않지만, 세번째 문장은 보조용언이 "하나님'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1:1의 번역은 "[알 수 없는 어떤] 시작 안에 그 말씀이 있어왔다. 그 말씀은 그 하나님에게서 있어왔다. 그 말씀은 하나님으로 있어왔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그나마 괜찮은 번역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세번째 문장을 살펴보자. "그 말씀은 하나님(정관사없음)으로 있어왔다"는 세번째 문장은 주어와 주격보어가 be동사를 두고서 배치되어 있는 문장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있어왔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으며, "그 말씀은 하나님으로 있어왔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알려진 헬라어문법에 따르면, be동사를 기준으로 무엇이 주어가 되고, 무엇이 주격보어가 되는지를 결정해주는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관사가 붙어있는 명사가 주어가 되어 주어부분가 되고,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는 명사가 주격보어가 되어 술어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은 정관사가 붙어있고, '하나님'은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기 때문에 이 문장은 "그 말씀은 하나님으로 있어왔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원만한 번역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요1:1의 문장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문장으로서, 매우 중요한 문장인데, 그 말씀이 육신을 입어 예수님이 되셨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에 관한 놀라운 계시의 말씀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여 번역하느냐에 따라, 종전처럼 두 개의 위가 강조되는 문장으로 번역할 것인가('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왔다', 혹은 '그 말씀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어왔다') 아니면 한 분 하나님을 강조하는 문장으로 번역할 것인가('그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있어왔다')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의 다른 표현이므로, 아무래도 한 분 하나님을 강조하는 문장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다. 왜냐하면 두 위를 강조하는 것으로 잘못 번역했다가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읽기가 정말 쉬운 책이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말씀을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고 힘들다고 저절로 말하게 만들고 마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충분히 소화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것들 곧 헬라철학이나 유대교 그리고 영지주의 이단같은 배경지식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말씀의 배경에는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 내지는 한 분 하나님 및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학적인 주제들까지 찾아서 해석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요한복음의 서막에 쓰인 단어 하나하나를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철학과 종교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들일수록 요한복음을 해석하기 어려워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약학자들 가운데 가장 험난한 골짜기를 걸어가는 분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요한문헌들(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분들의 노고를 인정해드려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자들 중에는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채 연구만 하는 분들이 있어서 요한복음의 말씀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이러한 난관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정말 확실하게 공부할 수 있어야 한다. 신학자들이 너무 어렵게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는 요한복음의 핵심을 꿰뚫어서 살아계신 우리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의 가르침을 통하여 요한복음의 심오한 진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진리를 우리가 깨달을 수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 책을 기록으로 남기게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영적인 스승이신 보혜사 성령이 항상 곁에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회개하여 악한 영들이 우리의 생각과 사고를 지배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요한복음의 진리에 마침내 도달해 있을 것이다. 할렐루야!

 

2022년 06월 08일(수)

정병진목사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들려주는 놀라운 복음서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책이 바로 요한복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등장하는 '기적'은 그냥 기적이 아니다. 다 표적들로서의 의미가 있는 기적들만 모아놓은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1장부터 선재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7가지 자기선언이 요한복음의 중심부에 나온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책의 기록목적을 보게 된다. 자, 그래서 오늘은 요한복음강해 세 번째 시간으로서 요한복음의 저자가 누구며, 예수님의 7가지 자기선언과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놀라운 혜안이 열려지기를 빈다.

 

2022-06-01(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03) 요한복음 대체 어떤 책인가?(03)(요1:1~5)_2022-06-01(수)

https://youtu.be/TUEAT5aM04Y  [혹은 https://tv.naver.com/v/27141207 ]

1)요한복음의 저자(애제자)

2)예수님의 7가지 자기선언

3)요한복음구조 분석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네 번째로 기록된 복음서이다. 그런데 기록된 내용과 방식이 앞서 기록된 공관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과는 상당히 다르다. 내용으로만 본다면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는 약 92%가 일치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서에 비해 대부분 유대와 예루살렘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고스기독론과 선재기독론 그리고 7가지의 "에고 에이미(나는~다)"라는 예수님의 자기선언을 통하여 예수님의 신성이 매우 많이 강조되고 있기도 하다. 또한 내용의 기술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 즉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날에 일어난 사건을 무려 5장(요한복음의 1/4정도)이나 기술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 고별설교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또한 요한복음은 기적들을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고 '표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저자는 복음서의 기술목적을 뚜렷히 밝혀놓고 있으며 저자가 누군지도 정확히 밝혀놓고 있다. 또한 복음서의 기술방식이 귀납적이 아니라 연역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이 아주 특별한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 오늘은 이러한 특별 복음서로서 요한복음을 거시적으로 한 번 더 살펴볼텐데, 오늘은 요한복음의 저자인 애제자가 과연 누구이며, 예수님의 7가지 자기선언 및 요한복음의 구조에 대해서 집중하여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요한복음의 저자인 애제자는 과연 누구인가?

  요한복음의 저자는 누구인가?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이 복음서를 누가 기록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 21장 24절의 말씀에 나온다. 이 말씀을 헬라어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이는 이 일들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는 제자이다. 그리고 이 일들을 기록했던 [그 제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이라는 것을 알아온 채 있다. 그런데 역시 예수께서 행하셨던 바, [같은 종류의] 다른 것들도 많은 것으로(많이) 있다. 만약 어떤 그것들이 하나씩을 따라 [계속] 기록된다면, 나는 세상이 책들로 기록되고 있는 것들을 수용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한다." 그렇다. "이이"가 바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인 것이다. 그럼, '이이'는 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지는 않지만, 예수께서 사랑하고 있어온 제자이다(요21:20).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저자인 '애제자'는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오늘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누구인지 외적인 증거와 내적인 증거를 살펴보고 한다. 다음 주에는 헬라어 원문상으로 그것을 살펴볼 것이다. 

  첫째, 성경 외의 기록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누구라고 알려져 있는가? 성경 외의 기록 가운데 초기 기독교 교회사를 저술했던 교회 역사가가 있으니 그는 바로 '유세비유스(A.D.260~340)'라는 사람이다. 그는 팔레스틴 가이사랴 출신의 헬라 신학자이다. 그는 가이사랴의 감독을 지낸 바 있다(A.D.314~). 그는 가이사랴에서 감독으로 지내면서 A.D.324년까지 전10권의 방대한 교회사를 기록하게 된다. 이 책에서 그는 요한복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또한 고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였던 이레네우스(A.D.130~202)의 진술도 기록해 놓고 있다. 먼저, 유세비우스 자신의 견해는 어떠했는가? 그는 자신의 책 "교회사"의 제24장 "복음서의 순서"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우리는 논란이 없이 확실한 요한의 저서들을 제시하려 한다 .그의 저서들 중에서 복음서는 전 세계의 교회에 잘 알려져 있으며, 우선적으로 진정한 그의 저작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고대인들은 정당한 근거를 기준으로 하여 그것을 네 번째 위치에 놓았다... [중략]. 마태와 요한은 기록된 의견을 남겨주었다. 전승에 의하면, 그들은 필요에 의하여 그 일에 착수했다고 한다. 마태는 처음에는 히브리어로 복음을 전파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나라로 가야 했기 때문에 복음을 모국어로 기록하여 자신이 없는 공백을 그 기록으로 보충해 주었다. 한편, 마가와 누가가 복음서를 펴낸 뒤,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고 복음 전파해온 요한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복음서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기록된 세 개의 복음서는 사람들에게 유포되어 있었고 요한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그 복음서들을 인정하였고 그것들의 진실성을 증언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최초에 행하신 몇 가지 일과 복음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것도 증언하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복음서 기록에 착수하라는 요청을 받은 사도 요한은 앞의 세 기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지나쳐 버린 주님의 행적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리고 유세비우스는 이레네우스가 쓴 "거짓 교리의 타도와 논박" 제3권에서 요한복음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고 써놓고 있다. "마태는 히브리인들과 함께 머물면서 히브리 방언으로 복음서를 기록하였고, 바울과 베드로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웠다. 이들이 떠난 뒤, 베드로의 제자와 통역관이었던 마가는 베드로가 전파했던 것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해주었다(마가복음). 바울의 동역자였던 누가도 바울이 전파한 복음을 기록하였다(누가복음). 주님의 가슴에 기댔던 제자 요한도 아시아의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복음서를 기록했다(요한복음)."

  그렇다. 성경 외의 기록 중에 유세비우스와 이레네우스의 증언에 따르면, 요한복음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서를 익히 알고 있던 사도 요한이 기록한 네 번째 복음서로서, 마태와 마가와 누가가 기록하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들과 그들이 지나쳐 버린 주님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랑하고 있었던 제자는 사도 요한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둘째, 이제는 내적인 증거로서, 요한복음서와 다른 복음서들에 기록된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어떠할까? 요한복음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는 저자가 누군지 알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단서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첫째로, 애제자는 성만찬석에 참여했던 12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애제자는 성만찬 때에 예수님의 품에 의지했던 자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요13:23, 21:20). 누가복음에 따르면, 성만찬 때에 함께 참여했던 제자들은 '사도들'이었다고 증언하고 있고(눅22:14), 또한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열 둘'이라고 나온다(마26:20, 막14:17). 그러므로 예수님의 12제자들 중의 한 명이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인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성만찬석에서 애제자에게 예수님에 물어보라고 시킨 자가 베드로였고, 떡을 받고 떠나가서 얼마 자살했던 가룟유다는 12명의 제자에게서 제외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애제자는 예수님의 10명의 제자들 가운데 있다. 둘째로, 애제자는 예수님 부활 이후 갈릴리 바닷가로 고기잡으로 갔던 7명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 천사의 고지에 따라 제자들은 갈릴리로 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같이 식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때 갈릴리 바닷가에는 7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바돌로매), 세배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또 다른 제자 둘'이라고 나와 있다(요21:2). 그런데 베드로가 애제자의 미래에 대해 질문하고 있으니, 애제자는 베드로를 제외한 나머지 6명의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4명의 제자가 누군지를 본문에 나오지만, 나머지 2명의 제자들은 그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제자 2명'이 누군지를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미쌍관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요한복음 1장에서 제자들이 이름이 나오는데, 그들의 이름은 '안드레와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한 사람, 베드로,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이다. 더불어 예수님의 12제자들 가운데 그 이름이 나오는 것은 요한복음 6장에 '안드레와 빌립'이라는 이름이 나온다(요6:5,8,68), 또한 요한복음 14장에는 "도마와 빌립'이라는 제자의 이름이 나온다(요14:5,8).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명단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12명 중에서 앞에서부터 7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나다나엘)"이라고 쓰여 있다(행1:12, 눅6:14). 그러니 다른 두 제자는 '빌립과 안드레'일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 둘'이라는 문구에서 '다른'이라는 헬라어 단어가 '같은 종류의 다른'을 의미하는 '알로스'라는 단어로서, 같은 벳세다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로, 애제자는 대제사장을 알고 있는 이로 있어온 자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6명의 제자들(야고보와 요한, 안드레, 빌립과 나다나엘, 도마) 중에서 과연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는 자는 누구일까?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야고보와 요한이 대제사장과 아는 이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왜냐하면 야고보의 요한의 어머니는 '살로메'인데, 그녀는 예수의 이모로서(막15:40, 요19:25, 마27:56), 제사장의 딸이거나 제사장의 딸의 딸(외손녀)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리아와 살로메는 자매지간으로서, 대제사장 가문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장에 보면,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고지를 받은 후, 유대 산중('헤브론'으로 아론자손의 제사장들이 분배받은 성읍)에 있는 자신의 친족 엘리사벳을 문안하는 장면이 나온다. 엘리사벳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로서 그녀는 아론의 자손이라고 나온다. 엘리샤벳의 아버지가 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리아과 엘리샤벳과 친족간이라는 말은 마리아 및 살로메의 어머니('안나')와 엘리샤벳은 서로 자매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엘리샤벳이 제사장의 딸이라면 사도 요한의 외할머니도 역시 제사장의 딸일 것이고,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도 제사장과 결혼한 제사장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6명의 사도들 가운데 가장 제사장과 아는 사이가 될 확률은 아무래도 야고보와 요한이 되는 것이다. 넷째로, 애제자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도 상당히 관련이 있는 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힐 때, 끝까지 따라갔던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애제자인데(요19:26), 그때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모친 마리아를 자신의 애제자에게 그의 어머니로 모시라고 부탁했고, 어머니에게는 애제자를 그녀의 아들이라고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자신의 모친 마리아를 애제자에게 맡겼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죽는 순간까지 그 자리에 있던 제자가 애제자 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만약 애제자가 마리아의 외조카(자신의 여동생인 살로메의 둘째 아들)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 에베소에 가보면 사도 요한의 무덤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덤 옆에 마리아의 교회의 터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에베소에서 말년에 요한복음을 저술했던 요한이 바로 끝까지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모셨을 것이 예상되는 것이다. 다섯째로, 애제자는 베드로와 아주 가까운 사이인 어느 제자이다. 왜냐하면 성만찬 때에도 누가 예수를 팔 자인지 고개짓으로 애제자에게 물어보라고 시켰던 자가 베드로였기 때문이요(요13:23~26),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와서 전했을 때, 베드로와 애제자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요20:1~10). 그런데 애제자가 먼저 무덤에 도착했어도 그는 무덤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자 베드로가 들어간 후에 애제자도 함께 들어간다. 그리고 부활후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께 사명을 받은 베드로가 자신과 가까운 애제자는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어보았기 때문이다(요21:20~23).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같은 동네 사람이자 같은 어부로서 동업자이며, 주님으로부터 첫 4명의 제자로 부름을 받아 함께 있었고,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는 같이 다녔기 때문에 베드로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도행전 3장과 8장을 읽오보면, 성전에 기도하러 갈 때도 같이 갔었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할 때에도 같이 간 자가 베드로와 요한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여섯째로, 애제자는 베드로와 견줄만한 제자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애제자가 같이 나올 때에 애제자는 베드로의 "다른 제자"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다른'이라는 단어는 '같은 종류의 다른'이라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알로스'가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베드로와 같은 급의 제자라는 말이다. 이는 그가 베드로와 견줄만한 제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6명의 제자들(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도마, 야고보)가운데, 과연 베드로와 결줄만한 자는 누구이겠는가? 그는 사도요한일 것이다. 한편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12명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가까이 두셨던 세 명의 제자들의 이름이 나온다. 그들은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다. 왜냐하면 이들 세 명은 12명의 제자들 중에서 예수께서 특별히 데리고 가신 일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에도 주님은 세 명의 제자들만 따로 데리고 갔었고(막5:37), 변화산에 올라가서 변형되실 때에도 그랬으며(마17:1),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세 명의 제자만을 따로 데리고 가셨기 때문이다(막14:33). 고로 애제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기록시기가 A.D.70~95년 경이라면, 그는 요한일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왜냐하면 요한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A.D.44년에 순교하게 되고, 베드로도 역시 A.D.68년경에 순교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세기 하분까지 살아 남아있어서 요한복음을 기록할 자는 사도 요한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저자는 사도 요한일 수밖에 없다고 정의할 수 있다. 

 

3.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7가지 자기선언은 대체 무엇이며 그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과연 누구라고 기술되어 있는가?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전반부의 기록들 곧 요한복음 1~12장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행하신 7가지 표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나타나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러므로 7가지 표적의 기술목적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이러한 7가지 표적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소개해주는 7가지 자기선언도 나온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누구시며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셨는지를 7가지 자기선언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선언(7가지)은 요한복음 6장에서 처음 나온다. "나는 생명이 떡이다(요6:35)" 그리고 15장에 마지막으로 나온다. "나는 포도나무다(요15;1,5)" 즉 예수님의 자기선언 7가지는 요한복음 전반부 곧 표적의 책에서 출발하여 거기에 5가지가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의 후반부 곧 영광의 책에서 2가지가 더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 예수님의 그 위대한 자기선언은 어떤 것이며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처음으로 예수께서는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셨다(요6:35,51). 이는 예수께서 네번째 표적을 일으키신 후에 말씀하신 것으로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모세와 함께 있었을 때에 먹었던 '만나와 메추라기' 그리고 '반석의 생수'를 생각나게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즉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에 떡과 생수를 먹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육신의 양식에 불과했으므로 먹고도 다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살과 피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므로 먹고 죽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둘째, 그분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8:12). 이 말씀은 초막절 때에 들려주신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어둔 세상을 밝혀주는 참된 빛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믿고 따르면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요8:12).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스라엘의 절기 가운에 초막절은 밤이 되면 엄청난 불을 밝히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런데 그 축제기간에 어떤 여인이 간음을 하다가 붙잡혔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초막절의 빛 가운데 있으면서도 간음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아시고는 이 세상의 빛은 일시적인 것이기에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지만 예수님은 어둠을 진짜로 몰아내고 영원한 빛을 주심으로 빛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 가운데 살게 해주신다는 것을 이 선언은 강조한다. 

  셋째, 그분은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0:7,9). 이 말씀은 양은 출입구인 문을 통하여 꼴(양식)을 먹기도 하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양들과 같은 우리 인간들은 자신을 위한 영원한 꼴(양식)을 얻을 수 없다. 결국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분만이 문이기에 그분을 통하여 들어가며 나가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 안에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며 꼴(양식)을 먹을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10:9~10). 

  넷째, 그분은 "나는 선한 목자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0:11,14). 선한 목자는 돈 받고 일하는 삯군과도 아니며, 양들을 훔쳐서 파는 강도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돌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한 목자는 양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던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 삯군이란 대체 어떤 존제인가? 그것은 양도 자기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 이 비유에 나오는 '이리'는 사탄마귀을 지칭한다. 고로 양과 같은 인생들이 사탄마귀에게 농락당하지 않고 그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에게 나아와야 한다. 그분은 양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놓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섯째, 그분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1:25~26). 이것은 마르다가 자신의 오라비였던 나사로 죽었을 때 예수께서 너무 늦게 도착하시자 그만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자,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육체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살게 될 것이요, 무릇 [육체가] 살아서 나는 믿게 된다면 그는 [영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분은 사람의 영혼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되, 육체가 죽어도 영혼을 다시 살 수 있는 영생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예수께서 생명이요 부활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임을 아시고, 일부러 늦게 오셔서 죽은지 나흘된 나사로를 살려내신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신이 생명의 주관자요 부활생명의 수여자인 것을 가르쳐주신다. 

  여섯째, 그분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4"6). 이 말씀은 예수께서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할 때가 되셨음을 아시고, 이제 자신이 떠나게 되면 남겨지게 될 제자들을 위로하고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일러주시는 말씀 가운데 나오는 자기선언이다. 우리는 그때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모아서 예수님의 '고별설교(고별연설)'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이때 예수는 자신을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아버지와 하늘처소(천국)으로 안내해주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이자 생명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예수만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니 어떠한 환난과 어려움과 부딪히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사명을 잘 완수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오라는 격려의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여섯 번째 선언부터는 자기와 아버지의 관계를 같이 말씀하신다. 자신이 이 땅에 온 것은 아버지에게로 제자들을 연결시켜주는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들을 알라고 말씀하신다. 

  일곱째, 그분은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5:1,5). 이는 예수께서는 참된 포도나무이고 우리 믿는 이들은 그 가지이기 때문에, 만약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포도나무에 잘 붙어있어야 한다고 하는 뜻에서 말씀하신 자기선언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포도나무가 항상 잘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지가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도록 깨끗하게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믿는 이들이 주님께 붙어있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그분 안에 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이 믿음으로 포도나무에 접붙힘을 받았다고 해도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그분 안에 거해야 한다. 그분에게 붙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느 가분 안에 있어야 함을 의미하며, 그래야 아버지의 돌보심을 받게 되고 그리하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생명과 더불어 열매를 맺게 해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4. 요한복음은 어떤 구조인가?

  이제는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이 어떤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자. 요한복음은 총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수미쌍관형으로 구조를 갖추고 있어서, 서막이 1장이라면, 결론이 21장인 것이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요한복음의 1:1~18까지가 서론부분이라면 결론부분은 21장인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1:19~20장까지의 본론부가 위치해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유대지역을 중심으로 한 예수님의 공생애를 1~12장 전반부에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부터 체포받으시고 심문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를 13~20장에 배치해 놓았다. 그런데 우리가 이전에도 살펴보았지만, 1~12장의 전반부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있엇던 7가지 표적들을 기록해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저자가 7가지 표적을 통하여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을 말해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6장부터 15장에 걸쳐서 예수께서는 여러 사건들 속에서 자기자신이 누군지를 7가지로 선언하신다. 그리하여 당신이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요한복음 13장부터 21장까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전에 하셔야 하는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좀 더 세분하면, 13~16장은 고별연설(고별설교)을 기록하고 있고, 17장은 그분의 대제사장적인 기도가 나오며, 18~19장은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과 죽음의 과정이 나온다. 그리고 20장은 그분의 부활기사가 나오고, 21장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제 육신을 벗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것 곧 팔리고 고난받고 죽으시고 부활하는 과정을 가리켜 그분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는 과정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어떤 신학자는 요1~12장을 "표적의 책"이라고 부른다면, 13~21장은 "영광의 책"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12장이 7가지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뎜, 13~21장까지는 예수께서 어떻게 영광을 얻게 되는지 그 과정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5. 나오며

  요한복음은 참으로 놀라운 책이다. 사실 기독론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이만한 책이 없을 정도다. 물론 사도 요한이 쓴 또 다른 책 곧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 를 기록하고 있는 요한계시록도 요한복음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과연 예수께서 누구신가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요한계시록과 더불어 요한복음을 꼭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유일한 복음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바로 이 요한복음을 통하여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을 확실히 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을 중심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땅에 사람으로 활동하신 예수님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태는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그리스도의 직무 중에서 왕직을 수행하시는 것을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마가는 종으로 오셔서 섬기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는 족보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누가는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기에, 그분이 아담의 후손으로 오셨음을 족보상으로도 기록하고 있다. 즉 우리는 인간으로 오셔서 활동하신 예수님을 공관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를 통하여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과 말씀을 중심으로 요한복음을 쓰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에 없는 내용을 92%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로고스)으로서 선재하신 분이요 창조주이심과 더불어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이며, 주 하나님이신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앞으로 우리는 요한복음의 각 장에 나온 말씀과 사건을 중심으로 요한복음을 더 깊이 들여다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을 믿고 따르고 순종하여 영생에 이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022년 06월 01일(수)

정병진목사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다른 복음서이다. 그렇다면 요한은 왜 다른 세 개의 복음서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편지를 새롭게 써야만 했던 것일까? 당시 이 편지를 받을 대상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왜 요한은 그리스도의 인성보다는 신성을 강조하는 이 편지를 그러한 공동체를 위해 써야 했던 것인가? 오늘은 요한복음 강해의 첫 번째 시간으로서 요한복음이 왜 쓰여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살펴보고 이 요한복음을 통해서 성도들이 영원히 누릴 될 혜택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022-05-18(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01) 요한복음 대체 어떤 책인가(01)(요1:1~5)_2022-05-18(수)

https://youtu.be/TZ0Z-gKUXfA [혹은 https://tv.naver.com/v/26877531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과연 어떤 책인가? 우리는 요한복음을 흔히들 '사복음서(네번째 복음서)' 내지는 '영적인 복음서'라고 말하곤 한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이 쓰여지기 전에 이미 기록된 다른 세 가지 복음서들에 비해,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도 요한은 이미 기록된 채 있는 세 가지 복음서들 곧 마가복음와 마태복음 그리고 누가복음 외에 또 다른 복음서를 기록해야 했던 것인가? 사실 네 개의 다른 복음서들 가운데 복음서의 기록목적을 기술하고 있는 것은 요한복음 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요한은 복음서의 기록 목적을 기록으로 일부러 남긴 것인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이 당시에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어떤 배경이 자리잡고 있음을 예상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요한복음에 대한 서론 중에서 첫번째 시간으로서,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과 더불어 요한복음이 쓰여질 수밖에 없던 배경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을 통해 요한복음을 읽고 요한복음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많은 영적인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2. 다른 세 가지 복음서와 비교하여 요한복음만 가지고 있는 특징은 무엇인가?

  믿는 이들이라면 누구든지 성경은 읽은 것 자체만으로 상당히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이들 속에 영적인 스승인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영적으로 깨끗해진 성도라면 성경을 읽을 때에 성령께서 깨우쳐주시는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려 21장이나 되는 요한복음을 다 이해하고 터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을 읽거나 아니면 요한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원한다면, 요한복음의 특징에 대해 알고 들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이 다른 앞의 세 가지 복음서에 비해서 다른 점이나 어떤 특별한 점이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서가 다른 세 가지 복음서에 비해 다른 특별한 점은 대체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3가지 것들이 있을 것이다.

  첫째, 요한복음은 앞의 세 가지 복음서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책이라는 점이다. 고로 보통은 요한복음 외에 다른 앞의 세 권의 복음서들을 일컬어 '공관복음서'라고 부른다. 이는 다른 세 권의 복음서가 공통된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세 가지 복음서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갖고 있는 '인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요한복음은 앞의 세 가지 복음서에 비해 유대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복음서가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즉 다른 세 가지의 공관복음서들은 대부분 갈릴리에서 펼치신 주님의 사역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유대의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사실을 더 많이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요한복음의 기술방식이 연역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나머지 세 가지 복음서들은 기술방법이 귀납법적이다. 즉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기술할 때에 처음부터 곧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예수님이 누구신 것을 증언한다. 그리고나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하지만 공관복음서는 이와 반대다. 공관복음서는 귀납법적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즉 공관복음서들은 예수께서 누군지를 조금씩 조금씩 설명해 나간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예수님은 바로 이러이러한 분이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서술방식에 있어서 요한복음은 나머지 세 복음서와는 다르다. 

 

3. 요한은 왜 요한복음을 기록하려고 했던 것인가?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은 무엇인가? 왜 요한은 이미 세 가지 복음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째 복음서를 저술해야만 했는가? 교회 역사가였던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A.D.260~340)는 자신이 쓴 교회사를 통하여,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왜 쓰게 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사도 요한은 마가, 마태, 누가의 기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지나쳐 버린 주님의 행적을 기록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나머지 세 가지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 무려 92%를 차지하고 있다. 사도 요한이 이미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이야기는 생략한 채 그들이 기록하지 않은 부분들을 기록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서의 말미에서 그가 왜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되었는지 그 목적을 기술해놓았다.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20:30~31에 나온다. 이제 사도 요한이 직접 말했던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을 살펴보자.

요한복음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표적들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보다 훨씬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이 그것들 중에 일부만을 기록한 것이다(요21:25). 왜냐하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이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 말고도 훨씬 더 많기 때문인데, 만일 그것을 빠뜨리지 않고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부족할 것 같다고 하였다. 고로 우리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말씀은 모두가 다 선별된 기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많은 기사들 중에도 현재 요한복음에 나오는 것들만 사도 요한은 기록으로 남겨둔 것인가? 그것은 요한복음에 수록하고 있는 표적들과 말씀들이 다 요한복음의 저술목적에 합당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기사들을 읽을 때에 그것들이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에 어떻게 맞는지를 확인하면서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4. 요한복음의 2가지 저술 목적은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저술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앞에서도 잠깐 살펴보았지만 딱 2가지 목적 때문이었다(요20:31). 그것은 첫째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심을 이 편지의 독자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믿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둘째로, 그분을 계속 믿으면서 동시에 그분의 이름 안에 있는 생명을 계속해서 갖고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는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이 첫째로, 예수께서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려주는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둘째로, 그분을 믿어서 생명을 계속해서 갖고 있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은 2가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오늘날 우리도 이러한 요한복음서를 읽게 된다면, 반드시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관하여 정확히 알려고 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 믿음으로 이미 자신이 갖고 있는 영생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이 복음서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5. 요한복음의 기록에 관한 세부적인 저술 목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복음의 두 가지 저술목적을 요한복음의 내용을 통하여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요한복음의 첫 번째 저술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그분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믿고 있게 하려고 이 책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첫번째 저술 목적은 2가지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요, 또 하나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앞으로 요한복음 강해를 통하여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오늘 여기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하나님이라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칭하자 그만 그들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사람이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예수님을 이해할 때에 그것이 곧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두 번째 저술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계속해서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말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계속해서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야(구원자)인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둘째, 요한복음의 두 번째 저술 목적은 무엇인가? 요한복음의 두 번째 저술 목적은 예수님을 믿어서 본인이 생명을 갖고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게 되면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생명을 갖게 되는데, 이 편지를 받을 대상은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을 때에 이미 성령께서 그들 속에 내주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때에 비로소 사람이 이제 종족이 다른 생명체가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요한복음 3장에서는 '거듭남"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 편지들의 독자들은 이미 받은 생명을 잃어버릴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갖고 있는 생명을 절대 잃어버리지 말라고 이 편지를 쓴 것이다. 만약 그것을 잃어버린다면 그는 영생의 나라인 천국에 못 들어가기 때문이다. 

 

6.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저술 배경은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왜 사도 요한은 이미 믿고 있는 성도들이라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그리스도라는 것을 꼭 붙들라고 한 것일까?그리고 영생을 계속해서 갖고 있으라고 권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첫째로,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그분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계속 믿으려 하면, 그들에게 어떤 불이익이 떨어진다든지 아니면 어떤 위험에 놓이게 된다든지 하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이 편지의 독자들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들이란 대체 무엇이엇을까? 다시의 정황을 고려해보면, 다음과 같은 큰 2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요한복음을 쓰게 된 첫 번째 배경은 유대인들의 박해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계속 고백하게 된다면 유대교에서 출교당하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A.D.90년에 유대인들이 얌니아라는 곳에 모여서 구약정경을 결정할 때에 기독교인들에 대한 그들의 조치를 나쁘게 결정했기 때문이다. 에수님의 승천이후 당분간은 유대교와 기독교은 큰 충돌없이 병존하고 있었다. 즉 기독교인들도 여전히 성전에 가서 기도할 수 있었으며, 각 지역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가서 모임을 가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A.D.70년 성전이 파괴될 무렵에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펠라라는 지역으로 도망을 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이 군대에 의해 둘러쌓이는 것을 보거든 도망을 치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겨 피난을 떠났기 때문이다. 결국 예루살렘은 로마군대에 의해 함락되었고 유대인들 사이에는 기독교인들이 비겁하게 도망쳤다고 하는 비난과 증오의 감정이 생긴 것이다. 그러자 로마의 허락을 받고 재건된 산헤드린 공회가 A.D.90년에 "나사렛파와 이단들은 순간에 망할지어다.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워 의인과 함께 섞이지 말게 하소서"라고 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저주를 담은 내용을 회당 기도문에 삽입하여 암송하도록 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이 회당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많은 기독교인들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괜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나봐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자 요한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배척에 맞서 기독교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확고히 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일차적으로는 신앙의 위기에 봉착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되 예수께서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약속된 메시야이심을 믿도록 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쓴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요한복음의 첫 시작부터 예수님은 선재하신 말씀으로서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한 것이다. 그리고 중간부분에는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라고 했다는 말씀을 기록하였으며,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도마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예수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한 것이다(요20:28).

  둘째, 요한복음을 쓰게 된 두 번째 배경은 몇몇 이단들 특히 초기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미혹 때문이다. 즉 요한복음이 쓰여질 당시 곧 A.D.90~95년이 되자, 벌써 여러 이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예수님을 단지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을 받은 선지자 정도로 가르치고 있는 에비온파 이단이 있었고, 또한 예수라고 하는 훌륭하고 지혜로운 인간에게 신적인 그리스도가 세례받을 때에 내려오셨다가 수난받기 전날 밤에 떠났다고 주장하는 케린투스(A.D.50~100)의 가르침도 교회 가운데 이미 침투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케린투스는 당시 초기 영지주의자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신적인 존재이며 동시에 성육신하신 사람이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다. 고로 요한복음은 그 어떤 복음서들보다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한 책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동시에 예수님은 초기영지주의자들의 미혹에 맞서기 위해 그분은 분명히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7. 나오며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으며 그리고 그분을 100% 하나님이자 100% 사람으로 믿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그렇게 믿으면 유대인들로부터 왕따를 당해 회당으로부터 축출되는 일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신이 몸담았던 공동체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배척을 받는다는 것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기꺼이 그것을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요한이 나선 것이다. 정말로 예수님을 가장 가까운 근거리에서 지켜보았고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았던 사도요한이 펜을 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기왕 새로운 복음서를 남길 때에는 그때에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세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아니한 부분까지 요한은 기록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다. 물론 이것 자체도 성령의 역사였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는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신성을 가진 선재하신 하나님이셨으며 동시에 우리 죄를 없이하려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약속된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는 자라야 이미 갖고 있는 영생을 결코 잃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려고 이 편지를 쓴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요한복음은 어떤 책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한 분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이 약화된 채 있는 지금의 참된 기독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주어진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라는 것을 견고히 붙들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을 결코 잃지 않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022년 05월 18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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