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6(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7) 아버지와 아들이 하는 일과 그분의 증언 및 유대인들의 반응(요5:19~4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qX5BhrlimAk  [혹은 https://tv.naver.com/v/30435192 ]

 

1. 들어가며

  요한복음은 참으로 읽기가 쉬운 책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가장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은 다른 공관복음서에 비해 쉽게 쓰여졌지만 그 내용을 곰곰이 읽다보면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이 그렇다. 그 말씀들은 그냥 단순히 예수님의 생각에 떠오른 것을 들려주신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것을 그대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물을 초월해 계시고, 한 분으로 계신 하나님의 생각으로 성경을 읽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도 나오는 것이다. 특히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게 될 말씀들도 이러한 말씀 가운데 첫 번째 말씀에 해당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셨다. 물론 군중이 알아듣기 쉽도록 바꾸고 바꾸어서 말씀하신 것이지만, 듣는 이들은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보혜사 곧 돕는 자이신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성령님에 의지하여 주님께서 직접 들려주신 말씀들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가운데 아들의 사역의 원칙 그리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2가지 권한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이다(요5:19~29). 그리고 왜 예수님의 말씀들은 믿을 만한 것인지에 대하여서도 4가지 증거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요5:30~40).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들을 배척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탄식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요5:41~47).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실체에 대해 보다 더 주님 가까이 가 보자. 

 

2.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가운데 아들의 사역의 원칙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는 일은 당신 스스로 하는 일이 아니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리고 당신이 들려주시는 말씀조차도 당신 스스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고 하셨다. 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보여 주신 것을 말씀하시고 행할 뿐 아니라 또한 아들에게 들려주시고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요5:19). 다시 말해, 예수께서 행하신 사역과 말씀의 원칙과 기준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의 사역과 말씀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아무것도 행하지 아니하셨다.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말씀하셨으며(요8:28),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씀하고 행했으며, 들은 대로 말씀하고 행하셨던 것이다(요8:38). 그러므로 아버지의 말씀을 듣기를 원한다면 예수님께 가서 말씀을 들으면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이다(요10:30). 아들 안에 아버지가 계셨고, 아버지 안에 아들이 계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보여 주셨거나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실행하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았던 예수께서도 안식일이었지만 일을 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시려고 안식일에도 일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3.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2가지 권한은 무엇인가?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들에게 보이지 않고 행하시지 않으셨다. 그런데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자신을 정죄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지켜보았던 것들보다 더 큰 것들을 장차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요5:20). 그럼 장차 보게 될 큰 것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으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던 것처럼 아들도 역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죽은 자들을 일으키고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요5:21). 그리고 둘째,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 되심으로 인하여 심판하는 권한을 아버지로부터 위임받아 심판을 집행하는 것이라고 하셨다(요5:22,27). 

  그렇다면 먼저, 예수께서 어떻게 죽은 자들을 일으키고 살리셨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홀로 계셨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아들을 낳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때부터 아버지가 되셨다. 그리고 아들에게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생명을 주셨다(요5:26). 그리하여 아들에게도 생명이 있게 하셨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구약 시대에 죽은 자들을 일으키고 살려내었듯이 예수께서도 그렇게 행하실 수 있었다. 우리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엘리야나 엘리사 선지자들을 통하여 죽은 자를 일으켜 살려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아버지를 따라 죽은 자를 일으키고 살려내셨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내셨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 및 죽은 지 4일된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도 살려내셨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람을 일으키시고 살려내신 일은 일종의 예표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진짜는 성도들이 죽을 때에 그들에게 부활생명으로 살아나게 하시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부활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나님을 몰라 악한 일을 자행했던 자들은 그때에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하실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부활시킬 때에 무덤 속에 있는 자를 부활시킨다고 하셨는데 이는 무슨 말일까?(요5:28). '무덤'이란 대체 무엇인가?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파묻어 두는 실제 무덤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육체가 곧 속사람의 무덤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의 겉사람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육체는 흙에 장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이 무덤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은 즉시 사람의 영혼은 자신의 육체에서 빠져나와 곧바로 음부와 낙원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덤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은 헛된 일일 뿐이다. 

  이제는 예수께서 어떻게 심판을 집행하시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께서는 심판을 행하실 때에는 당신 스스로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셔서 그분의 판단대로 판단을 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요8:16). 그러므로 예수님의 심판은 항상 의로울 수밖에 없다(요5:30). 그렇다면, 왜 아버지께서는 심판을 아들에게 다 맡기시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께서 피조물인 사람의 형상 곧 종의 형상인 사람의 육체를 입고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되심으로 인하여 아들에게 심판의 권한을 위임하신 것이다(요5:27). 그리고 심판의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하시게 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도록 하기 위함이다(요5:23). 왜냐하면 우리가 나중에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재판장으로서 예수님을 지켜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 예수님의 증언 곧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참이요 진리라는 4가지 증거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은 항상 진리이며 당신의 심판은 항상 의롭다고 하셨다(요8:45~46, 5:30, 8:14).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항상 진리이고 참이 되실 수밖에 없는 증거는 무엇인가? 이때 예수께서는 그런 증거로서 4가지를 언급하셨다. 

  첫째, 아들이 누구시며 아들의 말이 진실인지 증언해 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라고 했다(요5:31,37). 사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예수께서 누군지를 맨 처음 말씀하셨던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3:17). 그런데 예수님을 책 잡으러 왔던 유대인들은 그 누구도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또한 아버지를 본 사람도 없었다. 사실 구약 시대 아브라함 이전의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들 음성으로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아브라함 때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두 명의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다(창18:1). 그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양을 취하신 채 나타나셨다. 이것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목격한 사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보았던 그분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보지도 못하였고 볼 수도 없을 뿐더러 보여지지도 아니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딤전6:16). 그렇지만 아들은 보셨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분이시기 때문이다(요6:46). 

  둘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해 주었기 때문이다(요5:33). 세례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이자 광야의 외치는 소리라고 하였다(요1:23).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성령이 내려오셔서 위에 머물러 계신 분으로서, 사람들에게 장차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이신 예수님이라고 했다(요1:33~34).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가리켰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 만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그가 잠깐 비추다가 사라질 등불과 같은 존재였지만 세례 요한을 보고 즐거워하였다(요5:35). 그러나 예수께서는 굳이 사람의 증언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시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세례 요한의 증언을 취하셨을 뿐이다(요5:34).

  셋째,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채 있는 사역들(행위들)이 곧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의 말씀이 참된 것인지를 증언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요5:36). 사실 예수께서는 결코 스스로 어떤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다. 다 아버지께서 보여 주시거나 명령하신 것을 준행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분이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 환자를 낫게 하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며, 못 듣는 사람의 귀를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말하게 하신 것은 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신 일이었다(사35:5~6, 마11:5). 예수께서는 자신의 뜻을 행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이 땅에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요5:30, 6:38~40).

  넷째, 구약 성경의 기록들이 예수께서 누구시며 그분이 바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요5:39).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성경(구약 성경)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요5:39). 그런데 그 성경 기록은 다 예수님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는 책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영생을 얻게 될 것인데, 그것은 구약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바로서 아들을 믿을 때에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아들을 향하여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그분을 정죄하고 죽이려 하였다. 그러므로 아들을 미워하는 것은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미워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들은 구약 성경의 말씀들을 읽고 암송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구약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바 그리스도를 믿으려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심판하고 판단하는 일에 그것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5. 유대인들에게 모세는 장차 어떤 존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는 이제 안식일에 행하신 병자 치유를 빌미로 예수님을 시기 질투하고 정죄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과 모세의 차이를 말씀해 주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그들을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하여 그들에게 안식을 주려고 오셨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까지 그토록 믿고 추앙하고 따르고 있는 모세는 장차 심판 때에 그들을 정죄하고 고발할 것이라고 하셨다(요5:45). 그리고 그들이 진정 모세의 글들 곧 모세 오경을 믿었다고 한다면 모세 오경이 증거하고 있는 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모세 오경을 믿지 않는 증거라고 하셨다. 비록 그들이 모세 오경을 귀하게 여기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붙잡기 위해 모세 오경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재판하기 위해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6.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는 중에 예수 자신이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왔다고 말씀하셨다(요5:43). 예수께서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한사코 아버지를 "나를 보내셨던 분"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대체 어떻게 아버지로부터 오셨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신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왔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아버지의 이름 속에 담겨 있다는 뜻이며, 예수께서는 그 일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이름 속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는가? 구약 시대에 아버지의 이름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1인칭으로 보면, '에흐예'이시고, 3인칭으로 보면 '여호와(야훼)'이시다(출3:14~15). 그런데 아버지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다. 아니 실제로는 아들로 오신 것이다.  다시 말해 아버지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와로서 인류를 구원하고자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새 이름이 바로 '예수'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 '에흐예'이든지 '여호와(야훼)'였듯이, 신약의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혹은 '여호와께서 구원자이시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 죄많은 인간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하신 것이다(마1:21~23).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셨다는 것을 정말 모르고 있었다. 아니 그럴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으로(창3:15) 그리고 '아들'로 오실 것이라고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창18:10,14), 이사야 선지자에게 예언적으로 선포하도록 하셨다(사9:6). 그러나 오직 세상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취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그들은 구약 성경을 그토록 많이 보았지만 거기에 기록된 채 있는 아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7. 나오며

  예수께서 누구신지는 정말 신비 중에 신비이다. 그분은 아들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이다(요10:30).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와 구분은 되지만 분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려면 어린아이처럼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하고, 주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때에 비로소 예수께서 누군지가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고 계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명예와 인기와 영광에 눈이 팔려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결코 보여질 수가 없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에게 직접 말씀을 들려주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오해하였고 잘못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적대 세력의 대명사로 통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질문 때문에 예수께서 누군지를 더 확실히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을 불신하고 미워하였던 그들은 결국 화를 면키 어려웠다. 그렇다. 하나님은 홀로 한 분 곧 유일하신 분이시다. 하지만 그분은 아버지와 아들로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 아들은 누구인가? 피조물의 눈에 결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려고 사실 만세 전에 아들을 낳으신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한 분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만물은 그분의 발아래 있으며 모든 피조물들은 그분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아들이 육신을 입고 어느 날 사람으로 태어나셨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분을 예수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분은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아들로 계셨던 분이다. 그리고 그분이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피흘릴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신 것이다. 이러한 은혜를 받은 자가 바로 우리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의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겠는가? 오직 날마다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릴 뿐이다. 

 

2022년 10월 26일(수)

정병진목사

 

2022-10-19(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6) 예수께서 제2표적과 제3표적을 행하신 이유과 그 영적인 의미(요4:43~5:18)_2022-10-19(수)

https://youtu.be/jmcWkoGiMRE  [혹은 https://tv.naver.com/v/30429688 ]

 

1. 들어가며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기적들과 표적들을 행하셨다(요2:23, 20:30). 그중에서 성경에 기록된 채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어떤 기적들은 아예 '표적'이라고 표기되어 나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수많은 기적들 중에서 왜 어떤 것은 표적이라고 말해지며 또한 그것이 성경에 기록으로 남겨져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요한복음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표적의 책'(요1~12장)이자, '영광의 책'(요13~21장)이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요한복음 1장에서 12장까지 7가지 표적들을 살펴볼 수가 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이 표적들 중에서도 꼭 알아야 할 표적들을 7가지로 정리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바,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가리켜 예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표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4장과 5장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표적을 행하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 4장의 표적은 우리도 잘 알다시피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살린) 사건'이요(요4:43~52), 요한복음 5장의 표적은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이다(요5:1~18). 그렇다면 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쳤던 이러한 기적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기록한 것일까? 여기에는 분명한 어떤 의도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께서 행하신 2번째와 3번째 표적을 살펴보면서, 왜 예수께서 이러한 표적을 행하셨는지 그리고 그 표적의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2.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 가셨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에 들러 희어진 곡식을 추수하신다. 그리고 이틀 후에 갈릴리로 가신다. 그러자 예루살렘에서 절기를 지키러 왔다가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았던 갈릴리 사람들은 이제 갈릴리에서도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한다. 그때였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가나에 가셨다. 그곳은 이전에 예수께서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신 장소였다. 그런데 그곳에 왕의 신하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가버나움에서 헤롯 안디바(재위 B.C.4~A.D.39)의 친족인 것 같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왕의 신하'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바실리코스'라고 나온다. 이는 그가 '왕에게 속한 자'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그는 왕족이었든지 왕의 신하이었든지 상관없이 왕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자 왕의 신하(왕족)는 그 아들의 병을 고쳐보기 위해서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무려 34Km나 되는 거리를 달려온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 계속해서 요청하였다.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라고 말이다(요4:47). 그러자 주님께서는 거기에 모여 있는 군중들을 향하여 "만일 너희는 표적들과 기사들을 보지 못한다면, 너희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표적주의 신앙을 나무라듯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환영하던 무리들 역시 예루살렘에서부터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버나움의 왕의 신하도 마찬가지였다. 

 

3. 무엇이 과연 올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왜 표적을 보고 찾아온 무리들을 향해 나무라듯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표적주의 신앙이 온전한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표적을 본 자들은 표적 때문에 주님을 신뢰하기도 하지만 표적이 사라지면 주님을 버리는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공생애 3년 동안 표적을 행했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하지만 예수께서 힘없이 붙잡혀 가시고 또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신앙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신앙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도 믿는 신앙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말미암기 때문이다(롬10:17). 그런데 이때 당시 가버나움의 왕의 신하도 역시 표적주의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왔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는 신앙을 바꾸기 시작한다. 표적주의 신앙에서 말씀신앙으로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나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순간, 말씀만으로도 자신의 아들이 나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왕의 신하는 다시 한 번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셔서 자신의 어린 자식을 고쳐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주님께서 딱 두 마디 말씀을 하셨다. "가고 있어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요4:50)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 이때 왕의 신하가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도 예수님에게 이렇게 불평을 했을 것이다. "고쳐 주시려면 와서 고쳐 주실 일이지, 그렇게 말만 휙 던져버리면 그것으로 아이가 고쳐지기라도 하는 것입니까?"하고 말이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믿었다. 그리고 진짜 가버나움으로 가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보증수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다가 자기 집에서 오는 종들을 만났다. 그런데 그 종들은 "아이가 살아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집을 떠나올 때만 해도 아이는 막 죽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살아난 것이다. 언제냐고 물으니 전날 일곱 시쯤에 열병이 떠나갔다고 했다. 계산해 보니 그 시각은 주님께서 그 아이가 살아 있다고 하던 바로 그 시각이었다. 그러자 왕의 신하와 그의 집안 식구들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된다. 

 

4.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려낸 것을 왜 표적이라고 했을까?

  그렇다면 단지 죽어 가던 아이를 살려 놓은 사건을 두고 왜 사도 요한은 그것을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라고 말하였던 것인가? 여기서 '표적'이라는 말은 기적은 기적인데 어떤 영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기적을 가리킨다. 특히 그 사건이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 주는 사건일 때 그 기적을 '표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어 가던 아이를 살린 이 기적을 두고 왜 사도 요한은 표적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3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이 사건은 예수께서 '말씀'으로서 사망을 향하고 있는 아이에게 '생명'을 되돌려 주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요1:1~3), 말씀 안에는 생명이 들어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요1:4). 그러므로 이 사건은 예수님이야말로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한 생명을 주시는 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이 사건은 예수님만이 진정한 왕이신 것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왕의 신하는 왕족으로서 자기의 죽어 가는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돈도 있었을 것이고 권력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헤롯 안디바왕이 자기의 친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도 고칠 수 없었고 어떻게 해 볼 수 없었던 것을 예수께서 오셔서 해결해 주심으로서, 예수님만이 인생들의 진정한 왕이신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사실 나다나엘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별 볼 일 없는 분으로 알았다가 그분이 누군지를 깨닫고는 즉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했었다(요1:49). 셋째, 이 사건의 핵심은 바로 아버지가 죽어 가는 아들을 살려낸다는 것인데, 이것은 장차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어 가는 아들 예수님을 살려내는 예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죽어 가는 자신의 아들을 가리켜, '아들(휘오스)'이라고도 했다가, '어린아이(파이디온)'라고도 말했다. 특히 예수님을 만나서 말할 때에는 '어린아이'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다. 아이는 약하기 때문에 더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네 어린아이가 살아 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아들은 아버지보다 모자라는 유약한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와 동등하시다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내신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한 분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5. 예수께서 행하신 세 번째 표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예수님의 공생애의 2년 차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명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명절을 지키기 위함도 있으셨겠지만 거기서 하실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양의 문 앞에 위치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이나 누워 있었던 중풍병자를 고치시려 그곳에 간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연못가에는 다양한 종류의 병든 자들이 있었다. 맹인들, 다리 저는 사람 그리고 혈기 마른 사람 등 다양한 종류의 환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예수게서는 그중에 38년된 중풍병자를 찾아가셨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5:6) 그때 그는 자신은 도무지 병고침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예수께 말씀드렸다. 왜냐하면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면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는 자가 낫게 된다는 말이 있어서 병든 자들이 몰려 있는데, 자기는 자기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도 없고, 또한 자기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고 있어라. 그리고 네 침상을 들어올려라. 그리고 걸어가고 있어라."(요5:8).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병은 치료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침상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맨 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세 번째 행하신 표적은 38년이나 되어서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일어나서 걷게 했다는 것이다. 

 

6. 왜 예수께서는 그 많은 병든 자들 중에서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치셨던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에는 사실 땅에 떨어질 그러한 말씀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필요한 말씀이었으며 그 말씀은 다 진리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예수께서 스스로 하시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에게 할 말을 일러 준 것이며(요12:49~50), 아버지에게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그대로 그리고 자신이 보고 들은 그대로 하시는 말씀이었기 때문이다(요8:26,28,38). 고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분을 이 땅에 보내셨던 아버지의 말씀이었다(요14:24). 또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계셔서 그분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요14:10). 그러므로 그분의 행동 하나에도, 그분의 말씀 한 구절에서도 우리가 빼내야 할 말씀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이며(요10:30), 예수님은 아버지의 또 다른 표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누군가를 찾아간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가신 것이고, 예수께서 누군가에게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명절에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서 38년이나 되었던 중풍병자를 찾아가신 것은 의도적인 방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38년된 중증환자를 찾아가신 것일까? 그것은 죄로 인하여 38년이나 징계를 받고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간 것이다. 고로 예수께서 방문하신 곳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예루살렘이었고,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신 곳은 베데스다 곧 '긍휼의 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38년된 병자를 찾아가신 것은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어 광야에서 38년간을 고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중풍병자가 38년간을 그 병으로 고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제 그를 징계로부터 거두어 내어 안식을 주시기 위해 찾아간 것이다. 그러니까 지은 죄로 인하여 움직일 수도 없고 걸어 다닐 수 없는 이스라엘을 다시 살려 내어 걸어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곳에 가신 것이다. 이제 38년간의 징계를 끝내시고 이스라엘에게 참된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해 그 사람에게 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 중풍병자를 고치신 날은 바로 안식일이었던 것이다. 

 

7. 38년된 중풍병자는 어떻게 안식을 얻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38년된 중풍병자는 어떻게 안식을 얻게 되었는가? 그것은 첫째, 전적으로 그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때문이다. 왜나하면 중풍병자는 절대 혼자서는 일어설 수도 없고 걸어갈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였다. 그런데 주님께서 일부러 그러한 사람을 찾아가서 그의 병을 낫게 하신 것이다. 둘째,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순종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3가지를 명령했다. "일어나고 있어라(에게이로). 너의 침상을 들어올려라(아이로). 걸어가고 있어라(페리파테오)" 첫 번째와 세 번째의 동사는 '현재 명령형'이고, 가운데 동사는 '과거 명령형'이다. 현재 명령형은 계속해서 그것을 하라는 명령이고, 과거 명령형은 단번에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그때 중풍병자는 아무런 댓구를 하지 않았다. 만약 보통 사람 같았으면, "아, 이 사람아, 당신 말대로 내가 일어설 수 있고 자리를 들 수 있으며 또한 걸어갈 수 있었다면, 내가 왜 여기에 이렇게 누워 있겠는가? 이 사람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처음 보는 청년 같은 예수님에게 아무런 댓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을 본다. 왜냐하면 이 병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하나님께서 과연 누구에게 광야에 엎드려지게 했느냐고 말이다(히3:17). 그것은 범죄한 자들이라고 했다(히3:17). 그래서 누가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느냐고 질문하면서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이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자들이었다고 했다(히3:18~19). 그러므로 그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도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예수님을 배척했으며, 죽이려고 덤벼들었다. 그리고 불법적으로 산헤드린 공회를 열어 예수님을 정죄했고 죽이는 일을 하였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죽고 부활하신 후에 40년이라는 회개의 기간을 주셨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자 A.D.70년 디도장군에 의해 이스라엘 나라는 멸망을 고하게 된다. 

 

8. 예수께서는 왜 안식일에 그 중풍병자를 고치셨는가?

  예수께서는 인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도 병자를 고쳐 주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택하신 날은 안식일이었다(요5:9).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면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리라는 것을 모르셨을까? 아니다. 예수께서는 일부러 안식일을 택하여 그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이다. 그것은 유대 율법주의요 형식주의에 빠져 있던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금세 유대인들은 그 병자에게 물었다. 누가 자신의 병을 고쳐 주셨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그가 말하려 했을 때에는 이미 예수께서 피하고 없으셔서 누구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후 예수께서 그 사람을 만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더 이상)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는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고쳐 주신 이는 예수님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이 말을 듣자마다 유대인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예수님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안식일의 본 정신을 바로 세워준 것이다. 왜냐하면 38년 동안이나 질병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고쳐 주는 일이야말로 그에게 참된 안식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님을 죽이려고 달려들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이지만 그날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죄와 질병과 귀신에게 시달리고 있는 자들을 놓아주시려고 그분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역시 아버지의 또 다른 체현이신 아들 예수께서도 동일하게 아버지처럼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제정하신 여호와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겉모습만을 바라보고 있는 유대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안식일을 허물어뜨리는 장본인이라고 판단했고, 더욱이 하나님을 자기 자신의 아버지라고 말함으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자로 여기는 신성 모독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엄격한 구약의 율법시대일지라도 안식일에도 제사드리는 제사장들은 안식일법에서 예외였으며, 비록 그날이 안식일일지라도 소나 나귀가 구덩이에 빠졌으면 그들도 빠진 동물들을 건져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지 말라는 율법 말씀도 없었다. 다만 그날에 일하지 말라는 것을 과대 해석함으로 물건(침상)을 운반하는 것을 안식일을 어긴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으로서 안식일법에 저촉되지도 아니할 뿐더러, 참된 안식을 제공해 주고 있는 분이시기에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신 것이다. 

 

9. 나오며

  요한복음은 예수가 누구신가가 사실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그래서 그분을 앎으로 인하여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작정하고 쓴 복음서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이나 표적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몇몇 표적만을 선별하여 요한복음에 기록해 놓았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 기록된 사건은 정말로 중요한 사건들이 아닐 수 없다. 그 사건들과 표적들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께서 과연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밝혀 주는 단서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행하셨던 제2표적과 제3표적 역시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는 사건들이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2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이야말로 말씀이 육신을 되신 하나님으로서, 그분이 곧 살리는 분 곧 생명 수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분이 모든 인류의 왕이시자,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제3표적을 통하여, 그분은 구약의 여호와로서, 죄로 말미암아 38년 동안 광야에서 고통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시고 그들에게 안식을 제공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안식일의 제정자이자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제2표적이나 제3표적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 주기 위해 세팅되어 있었던 현장이었음을 살펴볼 수가 있다. 우리는 과거 예수께서 행하셨던 제1표적(요2:1~12)에서도 왜 그날이 여섯째 날이었으며, 또한 왜 그 장소에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것 역시 여섯째 날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한 후 결혼시켰던 날로서, 장차 신부를 취하러 오실 신랑되신 예수님의 결혼 잔치의 예표인 것을 함께 살펴보았다. 그렇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시려 하는데, 어찌 미리 세팅된 채 없이 그 일을 하셨겠는가? 그분이 행하신 모든 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셔서 행하시는 일이요 그분이 하신 말씀 또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주 하나님'(요20:28)으로 고백하고 있는 요한복음서의 저술 목적인 것이다. 

 

 

2022년 10월 19일(수)

정병진목사

2022-10-05(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5) 생수와 예배에 관하여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말씀(요4:1~42)_2022-10-05(수)

https://youtu.be/EMzCkOuNO40  [혹은 https://tv.naver.com/v/29743485 ]

 

1. 들어가며

  사마리아 여인, 그녀는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살고 있던 어떤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물을 뜨러 왔다가 예수님과 마주치게 된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시면서, 왜 베뢰아를 거쳐서 가는 우회 길을 선택하지 아니하시고 그날 따라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는 직행로의 길을 선택한 것인가? 혹시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더 큰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일까? 그때 예수께서 그녀에게 주실 수 있다고 하신 '생수'는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리고 그 여인이 질문했던 '예배'의 핵심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은 사마리아 동네의 창녀였던 것일까?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 관련지어 참으로 질문할 것도 많이 가지고 있고 알아볼 것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혼의 갈증은 예수님을 만나면 끝이 난다"는 제목의 설교의 본문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전도법 강의에 주요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요한복음 4장의 핵심 주제는 대체 무엇인 것인가? 오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이 이야기의 주제를 한 번 살펴보고, 그동안 풀지 못했던 궁금증들을 풀어봄으로서 주님이 주신 위대한 말씀의 진면목을 함께 나누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 요한복음 4:1~42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대체 무엇인가?

  요한복음 4:1~42절에는 사실 3가지 중요한 작은 주제가 나온다. 첫째는 '생수'를 주제로 하여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께서 대화를 나눴다는 내용이다. 둘째는 '예배'를 주제로 하여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께서 대화를 나눴다는 것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는 추수에 관하여 예수께서 제자들과 대화를 나눴다는 내용이 이어 나온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4:1~42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대체 무엇인가? '생수'인가, '예배'인가, '추수'인가? 오늘 본문을 다 공부하고 나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만,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추수'라는 거대한 주제 가운데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그리고 제자들과의 대화 및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대화가 등장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다른 길을 통해서 갈릴리로 갈 수도 있으셨는데, 일부러 사마리아 길을 통과하여 가는 것을 선택하셨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또한 그분의 양식이 다름이 아니라 이 땅에 '자신을 보내셨던 이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요4:34)이라는 말씀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곧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일부러 사마리아로 가신 것이다(요4:6).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와 같은 사실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데, 특히 4절 말씀에, "그런데 그분은 사마리아를 통하여 통과하여 가는 것을 반드시 해야만 하셨다(원문)"는 말씀에 들어 있다. 그렇다. 그분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제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아셨다. 그러고는 희어져 추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들을 향해 일부러 찾아가신 것이다. 그때에 가장 먼저 사마리아 전도의 첫 시작점으로 주님의 눈에 들어온 사람을 만났으니 그가 바로 우물가의 한 여인이다. 

 

3. 사마리아 여인은 정말 창녀였는가?

  그렇다면 그날 물을 뜨러왔던 여인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과연 '창녀'였을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녀의 신분을 창녀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느 때에 신부가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했는데, 그녀가 창녀였다고 설교함으로 대부분의 주석들이 이 여자를 창녀로 주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4장에서는 그녀를 어떤 여자로 표현하고 있는가? 그것은 창녀가 아니라 기구한 운명을 가진 여인으로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여자를 주님께서도 '귀네'라고 불렀기 때문이다(요4:21). 이것은 주님께서 그녀를 귀부인으로 칭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이 여자는 낮 12시에 물을 뜨러 온 것이 아니라 오후 6시에 물을 뜨러왔던 평범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요4:6). 왜냐하면 오늘 본문 6절에 의하면, 그 여인이 물을 뜨러 온 시각이 '대략 6시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그 시각이 오후 6시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시간은 로마의 시간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힌 시간을 요한복음 19장에서도 로마시간법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준 시간이 '제 6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그 시각이 아침 6시였기 때문이다(요19:14).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쓴 복음서이기 때문에 공관복음의 시간 기록 방법처럼 유대인의 시간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 시각은 예수께서 여행 중에 피곤해서 지쳐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씀하고 있다(요4:6). 즉 예수께서 낮 12시부터 피곤하여 물가에 앉으신 것이 아니라, 아침부터 온종일 걸으신 후에 비로소 저녁 6시쯤 되어 사마리아 동네에 도착하셨기 때문에 피곤하신 것이다. 셋째, 만약 이 여자가 창녀였다면 나중에 그녀가 동네에 들어가서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간증할 수도 없으며,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창녀가 말한 것을 귀담아 듣고 예수님을 만나러 나올 사람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4:28~30). 그런데 보라. 이 여인의 말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넷째, 이 여인은 남자를 여러 명 거느린 여자가 아니라 정식으로 남편을 다섯 명 두었지만 기구한 운명 때문에 그때 같이 살고 있던 남자와는 결혼도 못한 채 지내왔기 때문이다. 남편을 다섯 두었다는 것을 통해 그 여인을 창녀라고 볼 수 없다. 창녀는 남편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고로 그녀는 기구한 운명 때문에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사별을 했거나 아니면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불쌍한 과거를 가진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새로 만난 남자와는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지금 살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 여인을 비롯한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 전체가 당시 메시야를 매우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여인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했을 때 동네 사람들도 메시야를 만나러 물가로 나아온 것이다. 

 

4. 예수께서는 어떻게 해서 여인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주었는가?

  예수께서는 이미 선험적인 지식으로 사마리아 동네의 영적인 상황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군가가 그곳에 가서 복된 소식을 전해주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번 기회에 직접 그곳에 가서 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해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일부러 사마리아 동네를 향하여 간 것이다. 그래서로 그곳 마을의 입구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 그분이 멈춰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동네 사람 누군가는 물을 뜨러 그곳에 올 것이라고 예상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그리고 손에는 두레박을 가진 채 물을 뜨러 오고 있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간단하게 물을 달라고 하는 청을 한다. 그러자 일반적인 일이었다면 그것은 너끈히 청을 들어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사마리아인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보였기에 그 청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하지 않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예수님의 청을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까?" 그러자 주님은 그녀가 관심을 갖지 아니할 수 없는 말씀을 그녀에게 들려주신다. 그것은 만약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고 또한 그분이 줄 수 있는 선물 곧 생수가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오히려 자신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자 여인은 예수님에게는 물을 길을 두레박도 없고, 그 우물은 매우 깊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떻게 생수를 가지고 있게 되었기에 그러한 말씀을 하는 것이냐면서 반문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우물 물을 마시는 자는 또다시 목마르겠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물을 마시는 자의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구치는 물의 샘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자 그녀는 그러한 물이 정말 있다면 자기에게도 주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게 하고, 물을 긷기 위해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일상적인 화제를 통하여 영적인 진리를 이끌어내시고,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시키는 대화법을 통하여 그 여인을 전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5.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주실 수 있다고 하는 '생수'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생수(생명의 물)'는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아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사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답이 들어있다. 첫째로, 그것은 그것을 한 번만 마시더라도 다음 시대까지 결코 목마르지 아니할 물이라고 하셨다(요4:14). 그리고 둘째로, 그 생수는 그것을 받은 자의 속에서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물의 샘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4:14).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생수라는 것은 이 세상의 물질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갈증을 영원히 해결해줄 그러한 물은 이 세상에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물이 이 세상의 물이 아니라 천국에서 오는 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천국에는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계22:1). 고로 이 물은 하나님의 생명(조에)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결국 생명을 가지고 사람 속에 들어오실 '성령'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두 번씩이나 '하나님의 선물'을 '성령'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행8:20, 11:17). 또한 성령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시면서 그분이 주실 수 있는 것은 '생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계22:17). 그리고 예수께서도 초막절 끝날에 생수의 강에 대해 설교하시면서, 그것은 믿는 자의 뱃속에서 솟아올라오는 성령의 물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7:37~39). 

요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렇다.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실 수 있는 생명의 물은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성령이 사람의 영 속에 들어오게 되면, 사람의 영의 배에서부터 물이 올라와서 가슴을 채우게 된다. 그러면 그시로 그냥 만족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더이상 이 세상의 것을 가지지 않아도 부요한 마음으로 가득차게 되고 세상 것이 하나 없어도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6. 예수께서는 왜 뜬금없이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을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생수를 달라고 하는 여인에게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다. 왜 예수께서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달라고 하는 그 여인에게 갑자기 자신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죄인인 것을 모르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죄의 문제 해결없이는 예수께서는 결코 성령을 주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때 그 여인은 과연 어떻게 대답했을까? 그녀는 자신에게는 남편이 없다고 말했다. 이는 그녀가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실은 그녀의 남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솔직하게 대답할 이유가 그녀에게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예수께서 그것을 직접 확인해야 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예수님에게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도 그녀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그대로 고백하자, 그녀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를 들려준다. 그것은 그녀에게 지금까지 남편이 다섯 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이 죽어서 다시 재혼했는지 아니면 남편이 그녀를 버렸기 때문에 재혼했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그녀는 이처럼 기구한 인생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지금 간음을 저지르고 있는 상태와 같았다. 그렇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예수님에게 말씀드린 것이다. 그것이 바로 회개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모진 인생을 다 알고 있는 예수님을 가리켜, "당신은 선지자이십니다"라고 말한다. 

 

7. 여자는 왜 갑자기 예배할 장소를 물어본 것인가?

  자기의 눈 앞에 있는 유대인이 남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점차적으로 알게 된 여인은 예수께서 진정 선지자라면 알 수 있는 어떤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자기들이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물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 산(그리심산)에서 예배를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예배하는 곳은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예배에 관한 진실을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대상을 예배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는 대상을 예배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심산에서도 아니며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예배할 때가 오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때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영 안에서 진리로 예배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예배를 받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8.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면,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예배의 핵심은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먼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면 그러한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 안에서'라는 말의 뜻은 대체 무엇인가? 첫째, '영 안에서'라는 함은 유대인들이 예배드릴 때에 너무나 형식에 치우쳐 있었을 뿐 마음은 거기에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예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려 함이요, 둘째, '진리 안에서'라 함은 사마리아인들이 자기들이 정한 방식에 따라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예배 방식도 잘못된 것이요, 말씀에 없이 자기들이 정한 방식에 따라 예배하는 사마리인들의 예배 방식도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어떠한 예배인가? 그것은 형식에 따라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서 마음을 다해 예배하는 것을 가리키며, 자기의 정한 방식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에 따라서 예배한느 것을 가리킨다. 

  그러자 그 여인이 말한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가 오시게 되면 그분은 전체의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실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지금 네가 말하고 있는 이가 바로 그이이다'라고. 그러자 그녀는 지금까지 자기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이해해버린다. 즉 자기와 말씀하고 있었던 바로 그이가 모세가 예언했던 '나와 같은 선지자'(신18:15)로서, 장차 하나님께서 보내실 주실 메시야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자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 둔 채 동네로 들어간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향하여 크게 외친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9. 그 여자가 물동이까지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친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놀라은 현상이 나타난다. 그것은 첫째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싶어서다. 그리고 그분에게 감사하고 찬양하고 드리고 싶어서다. 그리고 둘째는 그분을 전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야를 만나자 그녀는 즉시 예배에 관해 질문한 것이다. 그리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자신이 행했던 만큼 많이 모든 것을 다 자신에게 말했던 사람을 와서 보라고 외친 것이다. 이분이 메시야가 아니라면 또 누구겠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그녀의 외침을 듣고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 야곱의 우물가로 몰려나온다. 그렇다. 한 여인의 능동적이고도 열성적인 외침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 모두가 메시야를 기다려왔기 때문에 그들은 메시야가 왔다는 외침을 듣고는 메시야를 보기 위해서 우물가로 몰려온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때문에 예수님에게 나아온 것이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고 메시야에게로 나아오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하게 된다(요4:42).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은 후에 몇 년이 지난다. 그리고 예수께서 인류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신다. 그리고 생수와 같은 성령을 오순절날 마가다박방에 모인 120명의 유대인들에게 보내주신다. 그리고 스데반의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자들 중에 일곱 집사의 하나인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에도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다(행8:4~13). 하지만 그때에 그들은 성령을 받지는 못한다. 그러자 예루살렘에서 이 소식을 들었던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된다(행8:14~17). 그리하여 생수와 같은 성령을 값없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약속이 그대로 성취가 된다. 

 

10. 나오며

   예수께서는 왜 다른 길들을 놔두고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는 길을 선택하셨던 것일까? 그것은 사마리아가 이미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가서 그들을 추수해야 한다는 것을 아시고 처음으로 그 문을 열어젖히고자 일부러 그곳을 찾아가신 것이다. 그때에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가 바로 우물가를 찾아온 사마리아 여인이었다. 주님은 그녀가 메시야를 만나지 못해서 그때까지 자신의 영혼에 갈급함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는 그녀에게 생수에 관한 말씀을 시작으로 그녀에게 복음을 전하신다. 하지만 생수로 비유하신 성령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지 않는 자는 받을 수 없기에 그녀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한다. 부끄러운 자신의 실상이지만 그녀가 솔직하게 예수님에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자신이 그녀가 찾고 있는 메시야라는 것을 가르쳐주신다.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참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신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과 그동안 대화를 나눴던 분이 메시야이신 것을 알아차리고는, 동네 안으로 들어가서 메시야를 만난 소식을 기쁘게 전한다. 그리하여 드디어 희어져 추수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마리아에도 추수가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된 추수는 훗날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성취가 된다. 그렇다. 우리 주님께서는 지역과 인종과 민족에 상관없이 누구나 복음을 듣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들에게 값없이 생수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누구든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되어 주님을 진정 예배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신다. 

 

2022년 10월 05일(수)

정병진목사

 

2022-09-28(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4) 세례요한에 대한 재평가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의 증언(요3:22~3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Oz78Yh09CfQ  [혹은 https://tv.naver.com/v/29537866 ]

 

1. 들어가며

  사람은 자신만의 선입관을 가질 수 있다. 이전에 들어왔던 것이 있고, 그것이 점차 고정화될 때에 그것은 이내 고정관념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볼 때에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결국 사람에 대한 평가를 잘못 내리는데 일조한다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를 다시 들여다 보려고 한다. 세례 요한은 정말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인가? 아니면, 그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된 사람인가? 그리고 이어서 우리는 예수님의 탁월성 및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볼 것인데, 예수님에 대한 반응에 따라 어떤 사람은 영생을 얻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안에 머물기도 한다는 것을 함께 살펴볼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반응이 중요한 것이다. 

 

2.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왜 투덜대기 시작했으며 이때 세례 요한은 그것을 어떻게 해소시켰는가?

  어느 날이었다. 한 유대인이 찾아와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정결예식 곧 세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논쟁이 붙었다(요3:24~25). 그러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 문제를 자기의 스승에게 가서 물어보기로 했다. 그것은 스승인 세례 요한이 증언했던 이 곧 예수님께서 자기들과 떨어진 곳에서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다 그리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은 것이냐고 물은 것이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은 만약 그것이 하늘에서 주어진 채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라고 말하였다(요3:27). 그리고 자신은 그리스도가 결코 아니며 또한 그분 앞에서 파송받은 채 있는 선구자라는 것을 증언해 줄 자가 바로 자기의 제자들이라고 말했다(요3:28). 그리고 자신은 예수님 때문에 기뻐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가는 것은 신부가 신랑을 찾아가는 것이므로,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은 신랑의 친구로서 매우 기쁘다고 하였던 것이다(요3:29). 그래서 그분은 더욱 더 커지고 그분의 사역은 증가되어야 하겠고 자신은 더 작아지고 자신의 사역은 감소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요3:30).

 

3. 요한복음에서는 세례요한을 어떤 사람이라고 언급하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요한복음에 나와있는 세례 요한에 대한 기사만을 읽는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세례 요한을 추켜세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과 관련지어서 자신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사명대로 자신의 일에 충성했던 이이자 겸손한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은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고 하였으며(요1:6~9), 자신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처럼 주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한 자라고 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은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합당하지 않는 자라고 말했으며(요1:23~27), 자신의 존재목적은 그리스도를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했다(요1:31). 그렇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이며,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았던 자이다. 예수님은 먼저 계신 이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라는 것을 세례 요한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땅에서 난 이로써 땅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요3:31). 그러므로 그는 자신은 점점 더 약해져야 하고 이제 예수님께서 더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 오늘날 세례 요한을 저평가하고 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런데 오늘날 교회 가운데 세례 요한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진짜로 세례 요한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 보다도 더 작은 자로 있는가? 나중에 천국에 가 보면 다 알겠지만 천국에서 세례 요한은 24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세례 요한은 실제보다 더 작은 자로 평가받고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기사들 중에서 마태복음 11장과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죽음직전의 사건과 예수님의 평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1장이나 혹은 누가복음 7장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 때문에 실족한 사람처럼 나오고, 그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잘못 해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1장에 의하면, 세례 요한이 죽기 전에 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내리신 평가가 나온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평가를 믿어야 한다. 그런데 이 평가에 대한 해석이 아주 분분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과연 세례 요한에게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셨는가? 그것은 크게 3가지다. 첫째,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보다더 더 나은(뛰어난) 자라고 하셨다는 것이다(마11:9). 왜 그런가?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 중의 마지막 주자로서, 메시야(그리스도)가 바로 이분이라고 소개했던 최종 주자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만 예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 메시야가 바로 이분입니다"라고 소개한 마지막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던 것이다. 둘째,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라고 하셨다(마11:11a).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기 전에 먼저 그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가 세례 요한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으켜진 채 없다고 하셨다(마11:11). 고로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라는 의미는 무슨 뜻인가? 그것은 죄인으로서 여인으로부터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 요한이 최고라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따라 사가랴와 엘리샤벳 사이에 잉태되어 태어났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는 모태로부터 성령으로 충만케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는 어려서 광야로 보내져서 금식과 기도로 단련되고 영성으로 무장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려 30년동안 그는 광야에서 지냈다. 넷째로, 그가 30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메시야의 오실 길을 준비했던 자였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그는 제사장과 선지자로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예수님에게 안수를 통해 인류의 죄를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게 했기 때문이다. 여섯째로, 그는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셋째,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예수님의 평가다(요11:11b). 이 말씀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아주 저급하게 평가하고 있다. 그를 천국에서 진짜로 가장 작은 자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그것은 보통 2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첫째는 세례 요한이 마지막에 가서 실족했기 때문에 천국에서 진짜로 가장 작은 자로 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니까 천국에 있는 성도들은 중에 실제로 세례 요한보다 더 작은 자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는 세례 요한이 마지막에 죽기 전에 실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자신의 제자를 예수님에게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질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마11:3).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례 요한이 질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지를 모르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자신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파송받아 온 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몰라서 질문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는데 돌아보지 아니하는 것을 조금 섭섭해서 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 하나 잘못했다고 세례 요한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로 전락해버린 것일까? 둘째는, 세례 요한은 구약시대의 인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받은 마지막 주자였고, 그후부터는 구원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받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그가 가장 작은 자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가까이 있는가를 기준으로 본다면, 세례요한은 예수님 밖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 안에 성령으로서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는 더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구약의 성도나 신약의 성도나 천국에 가면 하나님의 백성이기도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구약의 성도라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얻고, 신약의 성도라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늦게 태어난 게 더 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 보라. 구약의 성도라고 해서 신약의 성도보다 못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대한 가장 바른 해석은 무엇인가?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는 이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로, 이 말씀이 헬라어 원문에서는 어떻게 나와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되거나 큰 자가 되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첫째로,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이렇다. "그런데 하늘들의 왕국 안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이보다는 더 크다"이다. 먼저는 이 말씀이 앞 문장을 뒤집는 역접의 문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러나'가 아니라 '그런데'라고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앞의 정의도 맞는 것이지만 그런데' 다른 말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준이 '천국 안에서'라고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천국 안에 있는 성도들이라면 아직 이 세상에 살아있는 세례 요한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인생을 마칠 때 어떤 사람이 될른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그만 실족해버리면(걸려 미끄러지면) 그가 쌓아놓은 모든 것이 결국 물거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 안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은 이 땅에 지금 살고 있는 어떤 성도들보다도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 작은 자가 되는 기준은 무엇인가? 즉 천국에서 받을 지위는 어떤 이유로 변동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사실 천국에서의 지위는 그 사람이 이 땅에서 행한 것으로 인해 결정되는데, 혹시 실수하여 잘못을 범했다고 할지라도 이미 하늘에 올라가 있는 것들은 결코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늘이 이미 쌓아둔 것이 허물어지는 유일한 경우가 있기는 있는데, 그것은 그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 사람이 일평생 수고하여 쌓아둔 하늘의 것들은 절대 없어지거나 허물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일평생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하여 30년을 준비하여 예수님을 메시야로 드러내었고 소개한 일과 예수님이 세례받으러 오실 때까지 회개를 외치며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했던 모든 것은 다 하늘에 남아 있다. 마지막에 가서 그의 섭섭한 말 한 마디로 인해 그것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로 고스란히 하늘에 남아 있는 것이다. 사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예수께서 메시야인지 몰라서 "당신이 오실 그이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옥에 갇혀 있는데도 자신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예수님에 대해 조금 섭섭한 마음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 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는 그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는 미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리자면 그는 선지자들의 중의 최고이며, 여자가 낳은 자 곧 죄인이 낳은 자 중에 최고였지만, 아직 그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아직 그들보다는 작은 자였던 것이다. 

 

6. 세례 요한에 대한 사도 요한의 평가는 어떠한가?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위로부터 곧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계시는 이'이신 예수님은 만물 위에 계신 분이시지만, 땅에서부터 있는 이이자 땅에 속해 있는 이인 세례 요한은 땅에서 말하고 있는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말 자체부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분이 스스로 지어내서 하신 말씀이 없다. 왜냐하면 그분이 하신 말씀은 당신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셨던 아버지께서 그에게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기에(요12:49~50), 그 말을 그대로 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아요 나를 보냈던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14:24)"이라고 하셨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의 레마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고 계셨던 것이다(요3:34).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에는 실수가 없다. 즉 예수님의 말씀에는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으며, 불필요한 말씀도 하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달랐다. 그는 땅에서 난 자이기 때문에 말에 실수가 있을 수 있고 섭섭함을 표현하는 말도 간혹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얼마나 그 사람 위에 부어주셨는가 하는 것에 달려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는 성령을 한량 없이 부어주셨지만, 세례 요한에게는 그렇게까지 부어주지는 않으셨던 것이다(요3:34).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는 심판의 권한 마저 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셨지만 직접 사람이 되어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이요, 육신을 입어 인류의 죄를 속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차 우주의 종말이 찾아올 때,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이는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요5:22,27). 그리고 그분이 죽고 부활하실 때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고(마28:18), 사망의 음부의 열쇠마저 가지셨다(계1:17~18). 

 

7. 사람이 영생을 얻기도 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떨어지기도 하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그렇다면 사람이 최종적으로 영생을 얻기도 하고 혹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머물러 있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이다(요3:36). 즉 하나님의 아들을 계속해서 믿고 있는 자는 결국 영생에 이른다는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영생'이란 '다음 시대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사람이 죽고 났을 때에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살고 있을 때에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우리 죄인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믿고 그분의 음성을 순종하며 산다면, 그는 틀림없이 죽어서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즉 다음 시대에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땅에 살면서도 아들을 믿기를 거부하며, 그분의 음성에 불순종하며 산다면,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을 뿌리친 것이 되어 자신이 지은 죄의 댓가를 자신이 치러야 할 것이다. 또한 이전부터 이미 운명 지워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마침내 받고 말 것이다. 즉 그런 자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해서 머물러 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가 살아있을 때에 주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야 하며, 그분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결국 한 사람을 영생과 하나님의 진노로 나누기 때문이다. 

 

8. 나오며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여전히 세례 요한에 대해서 아주 얕은 평가를 하고 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세례 요한이 살아있는 당시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 그는 아직 죽지 않아서 그가 어떤 사람으로 천국에 들어갈 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천국 안에 있는 성도들에 비해서 그는 아주 작은 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의 최종적인 상태는 우리가 죽을 때에 결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날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 죽기 전에 우리가 어떤 말을 하며 어떠한 믿음으로 죽게 될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주인공이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쌓아놓은 모든 상을 다 얻게 될 것이다. 그러한 상에는 천국 집도 있을 것이고, 면류관도 있을 것이고,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지위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전부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준비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지 않은 일들로 인해 천국에 상이 준비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있음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한다. 아직도 천국에서 받을 영원한 상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은 오직 예수님을 믿은 자가 얼마나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또한 충성했는가에 달려 있다. 그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다거나 그분의 음성을 불순종하여 날마다 죄짓고 산다면 그는 죽을 때에 결코 영생을 보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아들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시대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면 즉시 회개하기를 바란다. 성령께서 어떤 것을 하라고 지시하면 즉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천국에서 어떤 자가 되는지를 결정해주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천국에 들어갈 때에 과연 나는 칭찬을 받고 상급받는 자가 될 것인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떨어질 것인가를 결정해 주기 때문이다. 

 

 

2022년 09월 28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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