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2(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37)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은 과연 세상 왕인가 하늘의 왕이신가?(요18:28~19:16)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vS4blY0YJKo [또는 https://tv.naver.com/v/45413279]

 

1. 들어가며

  예수께서는 과연 왕이신가? 만약 예수께서 왕이시라면, 그분은 이 세상의 왕이신가 아니면 영적 세계에서 왕이신가? 우리가 사복음서를 공부할 때에 마태복음을 가리켜 흔히 '왕의 복음'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서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1장부터 예수께서 왕이시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다윗은 아브라함의 13대손인데, 예수님은 다윗의 30대 후손으로 태어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42대 족보 가운데 오직 다윗에게만 왕이라는 칭호를 넣어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왕의 후손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2장에 가면, 동방박사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을 경배하러 오는 장면을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 예수님은 왕이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대체 어떤 왕이신가?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왕으로 다스리기 위해 오신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하늘나라로 데려가셔서 왕으로 삼으시기 위해 오신 것인가? 

 

2.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어떤 죄목으로 빌라도에게 고소했는가?

  요한복음 18:28~19:6의 말씀은 산헤드린 공회의 고소로 인하여 예수께서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1차로 심문받은 과정(요18:28~40)과 이어서 2차로 심문받는 과정(요19:1~16)이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예수께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소집된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에게 신성 모독죄를 적용시켜 이미 사형을 결의한 상태에 있었다(마26:65~66, 눅22:66~71). 하지만 유대 사회는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또한 그것을 집행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그럴려면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에게 재가를 받아야 했다. 그러자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를 이끌고 총독 관저로 향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고소했다. 그가 악한 일을 행했다는 것이다(요18:30). 그러나 총독 빌라도는 이 사건의 음모를 간파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놓아 보내려고 했다. 왜냐하면 예수에게서 결코 반역의 음모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는 끈질겼다. 예수께서 신성 모독죄를 지었으니 사형 언도를 내려달라고 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하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눅23:2, 요18:7).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리스도가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셨다는 말인가?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자기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믿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뿐이다. 

3. 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그토록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그토록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일환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것의 한 부분은 돈 때문이고, 또 한 부분은 사실 명예와 인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산헤드린 공회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중에 사두개인들은 제사장인 그룹을 가리키며, 바리새인들은 장로들 그룹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의 한 그룹인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 때부터 이미 예수님과 충돌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성전에 오셔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신 뒤, 제물을 팔고 있고 돈을 환전해 주는 사람들을 내쫓아 버리셨기 때문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들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2:16)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사두개인들 그룹 곧 제사장 그룹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으로 돈벌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전에 사용되는 제물을 팔면서 적게는 수 배에서 많게는 수십 배 비싸게 팔아 이윤을 남기고 있었으며, 그들은 이방 나라의 돈을 성전 세겔로 환전해 주면서 환전 수수료를 터무니없이 챙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돈벌이를 방해하는 방해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바리새인들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들에게도 예수님은 눈엣가시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회당과 길거리에서 율법을 가르치자 사람들이 점차로 바리새인들에게 물으러 가지 않고 예수님을 향해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 해석과 외식을 험하게 질타하였기 때문이다. 그 대표가 바로 부모님을 공경하기 싫으면 부모를 공경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르반')고 말하면서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는데, 이러한 해석을 바로 바리새인들이 그들에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동안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흠숭을 받아온 바리새인들은 이제 예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들의 잘못된 해석을 정확히 바로 잡아 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위선을 고발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합동으로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소한 사건이다. 그렇다. 오늘날도 진리를 전하는 자를 정죄하고 이단으로 몰아가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돈벌이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자에 대한 아주 강한 시기 질투심이 그 원인인 것이다.

 

4.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빌라도의 질문에 왜 즉답해 주지 않고 되물었던 것일까?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예수님을 넘겨받은 후 로마 총독 빌라도는 자신의 관저에서 예수님에게 1차로 심문을 한다. 그때 맨 처음 던진 질문은 바로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인지에 관한 질문이었다(요18:33). 그것은 아마 총독 빌라도에게도 궁금했을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렇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그렇지 않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오히려 그 질문을 받고는, 빌라도 본인이 정말 궁금해서 예수님에게 던진 질문인지, 아니면 예수님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인지를 되물었다(요18:34). 이것은 답이 둘이 될 수도 있고, 둘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빌라도가 개인의 차원에서라도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인지를 묻는다면 예수님은 결단코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때 예수께서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대답해 버린다면, 예수님은 얼마든지 로마 나라에 대한 반역 죄인으로 취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빌라도가 유대인들이 말한 것을 인용하여 묻고 있다면, 예수께서도 얼마든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대답을 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것이며, 그것을 위하여 이 세상에 들어오셨기 때문이다(요18:37). 왜냐하면 예수께서 왕이셔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그분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메시야로 오셨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유대인들의 측면에서 볼 때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 곧 메시야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빌라도에게 그 답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빌라도에게 다른 질문으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 예수님은 과연 어떤 왕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과연 어떤 왕이신가? 예수께서는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질문에 다시 대답하실 때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 말씀을 헬라어에서 직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요18:36~27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왕국은 이 세상에서부터 있지 않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에서부터 있어 왔다면, 나에게 속한 이들인 내 종들(휘페레테스=아랫사람들)이 싸우고 있을 것이다. 혹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데 지금 나에게 속한 왕국은 여기로부터 있지 않다." 37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분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너 자신은 왕으로 있지 않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 자신이 내가 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하여 나 자신은 태어난 채 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위하여 세상 안으로 온 채 있다. 이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함이다. 진리에서부터 있는 모든 이는 내 음성을 듣는다."

  그렇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부터 있는 왕국의 왕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이미 이 세상의 임금(통치자)인 마귀의 소유가 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하수인들인 인간들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왕들에는 로마의 황제 디베료가 있고, 왕을 대신하는 로마 총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땅에서부터 태어나서 왕이 되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하늘에서부터 오신 하늘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왕국도 이 세상에서부터 있는 왕국이 아니다. 하늘에서부터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이 세상으로 들어오셨는가? 그리고 왕의 후손으로 태어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첫째 아담에게 주셨던 왕권을 사탄 마귀로부터 되찾아 믿는 자들에게 다시 되돌려 주려고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믿는 이들로 하여금 귀신들을 쫓아내어 이 땅에서부터 하늘의 왕적 통치를 누리다가 셋째 하늘에 마련된 천국에서 영원히 왕 노릇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위임된 권한을 사용하여, 이 세상의 임금인 마귀 아래에 있는 부하 귀신들을 쫓아내어, 이 땅에서부터 왕적 통치를 누려야 한다. 그것이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탄 마귀를 이기셨던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귀신을 쫓아낸 자들만이 천국에서도 땅의 왕이 되어 다스리는 자가 될 것이다. 

 

6. 왜 아담에게 주어진 이 땅의 왕권이 마귀에게 넘어가고 말았는가?

  하나님께서는 결코 마귀에게 왕권을 주지 않으셨다. 왕권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신 첫 사람 아담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보이는 만물을 창조하신 후 만물에 대한 모든 통치 권한을 오직 아담에게만 허락하셨기 때문이다(창1:26~27). 그러므로 아담이 타락하기 전까지, 이 지구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자 왕은 첫 사람 아담이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 아담에게 세상의 통치권을 주시되, 영원히 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생명까지도 주시려고 작정하셨다. 그래서 하늘의 상속자가 되게끔 계획해 놓으셨다. 그래서 그것이 실현되도록 에덴동산 한가운데에 생명나무를 심어 놓으셨다. 만약 그때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선악과보다 먼저 먹었다면 아마도 이 지구와 보이는 만물의 영원한 통치자는 영원히 첫 사람 아담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기 전에 사탄이 만들어 놓은 선악과의 열매를 먼저 먹고 말았다. 이는 마귀가 하나님의 뜻에 불만을 품고 첫 사람 아담을 자기 부하로 만들기 위해 덫을 쳐 놓았는데, 그만 아담이 그 덫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선과 악을 먼저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리하여 사람은 지금까지 선만을 계속해서 택하지 못한 채, 악도 같이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만물의 통치권은 뱀인 사탄 마귀에게 넘어간 상태에 있다. 왜냐하면 영적 세계에서는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기 때문이다(벧후2: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들 중에 하나는 마귀에게 빼앗겨버린 만물의 통치권을 되찾아 믿는 자들에게 주시기 위함인 것이다. 그래서 믿는 성도들이 비록 이 세상 임금인 마귀가 지배하는 곳에서 살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예수 이름의 권세로 마귀와 귀신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지배하며 살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사탄 마귀와 한판 승부를 벌여 마귀를 3대 0으로 이기신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마귀의 부하들인 귀신들을 내쫓기 시작하셨으며, 하늘로 가시면서 그 일을 믿는 성도들에게 위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예수께서 위임해 주신 왕의 권세를 이용하여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우리 성도들이 진정한 왕적 통치 상태인 상태적인 천국을 이룰 수가 있기 때문이다. 

 

7. 예수님의 왕국은 어디에 세워지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왕국은 결코 눈에 보이는 이 땅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요18:36). 이 세상은 이미 이 세상 임금인 마귀에게 넘어간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예수께서 마귀로부터 취하셨던 왕적 통치권을 믿는 자들에게도 주심으로, 그것을 사용해 귀신들을 물리치게 하셨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은 이 땅, 이 세상, 이 나라 정부에서 왕 노릇하는 것을 굳이 탐낼 필요가 없다. 다만 영의 세계에서 왕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자가 되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된 이 세상은 주님이 재림하심으로 다 없애버리시고, 이 세상 임금인 마귀마저 영원한 감옥인 무저갱에 가둬버리고 끝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진정 왕 노릇할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 곧 하늘나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 왕 노릇을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부터 귀신과 싸워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의 기업은 왕 노릇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하늘나라의 기업은 이 땅에 있는 귀신들을 얼마나 물리치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 땅에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자는 결국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영의 세계에서 왕 노릇을 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서도 기업을 차지하고 거기에서 왕 노릇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8. 나오며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왕국에 왕이 되는 것에 결코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그 땅에 관심을 두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쫓겨난 뒤에 영원한 심판을 앞두고 있는 마귀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영원히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도 진정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이 세상 나라에서 왕 노릇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들어갈 진정한 왕국은 저 셋째 하늘에 있는 하늘 왕국이기 때문이다. 또한 왕이 되는 것도 이 세상이 아니라 저 하늘나라에서 왕이 되는 것이라야 한다. 그런데도 믿는 이들 중에는 아직까지 이 땅에서 어떤 왕국을 세우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영원히 들어가지 못하는 마귀만이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 마귀는 믿는 자들이라도 그를 이 땅에 영원히 묶어두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정 사모할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왕국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저 하늘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그 나라에 들어가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 세상에 속한 귀신들과 영적 싸움을 계속 싸우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귀신들과 영적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던 분들이 있다면,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 땅에서부터 귀신을 쫓아내는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가서도 천국의 기업을 물려받고 거기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되, 더 큰 힘을 가진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 그럴수록 천국에서도 더 큰 기업을 차지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23년 11월 22일(수)
정보배목사

2023-11-08(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36) 예수님의 붙잡히심과 대제사장의 심문 및 베드로의 부인(요18:1~27)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lIn_oNn4c9I [또는 https://tv.naver.com/v/43802537]

 

1. 들어가며

  요한복음 18장과 19장은 예수께서 잡히시고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중에서 18장은 예수님의 자발적 의사에 따른 체포(1~11절)와 안나스의 심문 및 베드로의 3회 부인사건(12~27절) 및 유대 총독 빌라도의 1차 심문(28~40절)을 보도하고 있다. 그중에서 오늘은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 및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오늘 말씀 말씀을 통하여 체포과정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의연한 모습과 베드로의 부인을 통해, 나도 과연 고난과 죽음 앞에서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당신을 잡아가려고 온 가룟유다의 일행을 어떻게 맞이하셨으며, 또한 그분이 잡혀가는 과정 속에서도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살펴보고, 그 과정에 보여주는 베드로의 비겁한 모습을 좀 더 깊이 살펴보고자 한다. 

 

2. 요한복음은 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생략했던 것일까?

  우리가 복음서를 처음 대할 때에는 보통 공관복음서부터 순서대로 읽는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을 먼저 접하게 된다. 그때 우리가 공관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매우 고뇌하시는 인간적인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죽음 앞에서 고난을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을 피하고 싶지만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는 모습이다(마26:39). 

마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와 다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적인 측면을 강조해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의연하게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목숨을 빼앗기는 예수님이 아니다.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내놓으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는 고뇌에 찬 기도를 드리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생략되어 있다. 

 

3. 예수님의 체포과정에 나타난 예수님의 신성적인 측면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을 잡으러 온 가룟유다 일행들에게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의연한 예수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가륫 유다가 로마군병들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하속들이 등불들과 횃불들과 무기들을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에 그들 앞으로 당당히 나아가신 후에 말씀하신다. "너희가 누구를 찾고 있느냐?"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하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라고 대답하신다(요18:5, 8). 그리고 그들이 찾는 이가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밝혔으니 제자들이 가는 것을 내버려둘 것을 말씀하신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그날 자신이 잡혀가야 인류구속을 위한 아버지의 뜻이 이뤄질 줄 알시고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시되 제자들의 안전을 끝까지 지켜주신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게 할 것이라는 그분의 말씀을 이루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시자,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이 뒤로 나자빠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상의 말씀과 사실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함부로 포박할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첫째 그분은 그분 자신을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니라'는 말을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나는 ~이다'라는 말로서, 출애굽시 3:14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낸 이름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분이 스스로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해 대속물로 내어주려고 작정하지 않았다면 그분은 아무도 결박할 수 없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죽게 되신 것은 그분이 힘이 없어서도 아니고 그분이 죄를 지어서도 아니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기꺼이 내어주려 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그분은 결코 아무라도 체포할 수 없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이 그분이 자기 자신을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가룟 유다의 일행이 뒤로 나자빠짐으로 인하여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내어주려 했지만 악의 무리는 죄없으신 그분의 권위 앞에 스스로 엎드려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악이 선을 이길 수 없으며, 사망이 생명을 이길 수 없으며, 사탄이 예수님을 이길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4. 예수께서는 왜 베드로에게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을까?

  그때였다. 시몬 베드로가 칼을 꺼내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 중에 하나인 말고의 오른편 귀를 잘라버렸다(요18:10~11). 그래서 참고로 베드로는 왼손잡이였을 가능성이 있다. 어찌되었든, 말고는 당시 전직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의 종으로서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사실 공관복음서에는 베드로가 귀를 잘라버린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이었다는 것까지는 기록해놓고 있지만 그의 이름이 '말고'라는 것은 기록해놓지 않았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기자인 그의 이름까지 기록해놓고 있다. 이는 사도 요한이 대제사장 아는 사이로 있어왔기 때문이다(요18:15). 그러므로 그때 귀가 잘린 종의 이름까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하여 공관복음서의 저자들보다도 사도 요한이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더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체포당시의 상황을 더 정확히 알 수 있다. 특히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고백했던 것이 한 집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 두 집에서 일어났던 사건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예수께서는 말고의 귀를 다시 붙혀주신 뒤에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채 있는 바 그 잔을 내가 결코 마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잔을 마시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었고 그것을 예수께서 받아들여야 인류의 속죄사역을 성취할 수 있었기에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넣으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잔'이라고 언급한 것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포괄적인 의미라고 보인다. 사실 그것은 예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시는 것과 합쳐져서, 결국 십자가에서 죽는 것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감당해야 할 십자가는 사실 2가지인 것이 나온다. 그중 하나는 '고난의 잔'이며, 또 하나는 '죽음의 세례'다(막10:39). 그렇다. 하나님의 사람 중에는 자신이 마셔야 할 고난의 잔을 사명으로 가진 자들이 있다. 그때에는 기꺼이 그 고난의 잔을 받아들여야 한다. 무력을 사용해서 고난의 잔을 뿌리쳐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당시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칼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셨다(눅22:38). 이는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지키라고 그렇게 준비시킨 것이 아니라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를 보호할 준비를 하라고 하신 것이었다.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5. 베드로는 어떻게 예수께서 심문을 받고 있는 대제사장의 집 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누가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갔던 제자가 되었는가? 우리는 요한복음의 기사를 통하여 그는 바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그가 바로 사도 요한이었다는 것을 내증을 통해서 확인해 본 바가 있다. 그럼, 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사도 요한이 갖고 있는 특별한 인간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당시 전직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친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나스의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서성이는 베드로를 문밖에 나가 데리고 그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요18:15). 그리하여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최후로 남긴 말이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가 있게 되었으며, 왜 예수께서 자신의 동생들이 많이 있었지만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셨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대제사장인 안나스와 친분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요18:15). 

  그럼, 사도 요한은 어떻게 대제사장인 안나스와 친분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안나스의 종들로부터 제지받지 않고 안나스의 집을 출입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2가지 사실을 가정해볼 수 있다. 첫째는 사도 요한이 갈릴리에서 잡은 물고기를 예루살렘에 납품할 때에 대제사장과 거래를 했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시 사도 요한은 갈릴리의 어부였지만 실은 그의 아버지가 가장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형인 야고보와 함께 아버지 세배대를 돕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 잡은 고기를 예루살렘 납품하게 되었는데, 그때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이자 대제사장인 안나스를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둘째는 사도 요한이 대제사장의 가문의 후손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사실 사도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는 제사장의 외손녀였다. 왜냐하면 살로메의 어머니는 '안나'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안나'는 세례요한의 어머니였던 엘리샤벳과 자매지간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친자매지간이다. 마리아가 언니이고, 살로메가 그녀의 동생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인 안나와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샤벳은 자매지간 내지는 친족이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기록을 살펴보면, 엘리샤벳은 아론의 자손이라고 나오며(눅1:5), 엘리샤벳은 마리아의 친족(아마도 '이모')로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눅1:36). 그러니 안나도 아론의 자손인 셈이다. 그러한 제사장의 딸이었던 안나가 유다지파 사람인 헬리와 만나서 두 딸들만 낳은 것이다. 그들이 바로 마리아와 살로메다. 그런데 마리아가 유다지파 사람 요셉과 약혼을 한다. 그래서 마리아에게서 예수께서 탄생하신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에 있는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혹시 위의 두 가지 사실이 하나가 되어 당시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동일한 조건을 가지고 있던 사도 요한의 형인 야고보는 왜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의문으로 남는다. 그것은 비록 사도 요한이 대제사장과 친분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당시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라고 자신을 밝히게 되면 신상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에 야고보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을 포기했던 것이 아닐까 추정해볼 수 있다. 고로 주님을 길을 따르는 것은 위험부담이 있다는 것을 우리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자가 결국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께서 예루살렘 올라가실 때에 자기의 아들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야고보와 요한의 모친이자 예수님의 이모였던 살로메였다. 그때 주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셨다. 그때 그들은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지 못했던 야고보는 가장 먼저 자신의 목숨을 순교의 제물로 내놓아야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12제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의 제물로 자신을 내주었기 때문이다(행12:2). 

 

6. 주님을 모른다면서 3번까지 부인했던 베드로, 그는 언제 어디에서 그렇게 부인했던 것일까?

 

 


7. 나오며

 

 

 

 

2023년 11월 08일(수)

정보배목사

2023-11-01(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35)]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중보기도에 나타난 놀라운 영적 비밀들(2)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x6fZMwBoWEs [또는 https://tv.naver.com/v/43709735]

[참고] 아하야흐로 오신 예수님( https://dongtanms.kr/76575 )

 

1. 들어가며

  요한복음 13~17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하루 전날 밤, 마가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세족식을 행하시고, 성만찬을 제정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유언적으로 들려주시고, 이어서 혼자 아버지께 기도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중에서도 예수께서 아버지에게 기도하신 내용에 대해서 우리는 지난 두 차례의 시간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께서 기도하신 내용 가운데 나오는 중요한 용어들을 깊이 들여다보려고 한다. 거기에는 인류 구원을 향한 한 분 하나님의 사랑과 열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의 뜻과 구원 경륜이 담겨 있는 용어들 중에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것들로서,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에게 아들에게 주신 것' 그리고 '우리'라는 용어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심오한 뜻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요한복음 17장의 구조는 어떠한가?

  요한복음 17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기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는, 자기 자신과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이다(1~5절). 예수께서는 이 기도를 통해 당신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잘 완성할 수 있도록 아버지에게 부탁하셨다. 둘째는 남겨두고 떠나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이다(6~19절). 이는 당신을 대신하여 이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실행할 제자들을 위해 비는 기도인데, 그 기도는 크게 2가지였다. 하나는 제자들을 지키고 보전해 달라는 기도였다(11절). 그것은 제자들이 분열되지 않도록(11절) 그리고 악한 자인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지키고 보전해 달라는 기도였다(15절). 그리고 또 하나는 그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한 자가 되도록 기도했다(17절). 이는 제자들이 세상에 있으나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존재가 되고 깨끗한 존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셋째는, 제자들을 통해서 믿게 될 미래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이다(20~26절). 그것은 그들이 하나되게 해 달라는 기도로서, 그들도 성부와 성자의 하나됨처럼 그 하나 안에 머물러 있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믿음과 사랑이 충만케 되기를 기도했으며(21~23절), 그들이 예수께서 거주하실 천국에 함께 있게 해 달라는 기도(24절)와 더불어,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다(24절). 

 

3.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떠한 이름인가?

  예수께서는 이 땅에 무엇하러 오셨는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중보기도를 들어 보면, 그분은 오직 아버지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드러내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요17:6),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기 위해 오신 것임을 알 수 있다(요17:26). 그렇다. 예수께서는 오직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알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과의 논쟁 가운데서도 예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고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요5:43). 

  그렇다면 그 이름은 대체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지키고 보존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으며(요17:11,12,15), 또한 그분의 이름으로 아무도 멸망하지 않게 지켜 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요17:12). 그리고 더불어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과 믿는 이들을 서로 하나되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요17:11,20~22).

  그러면 아버지의 이름은 대체 무엇인가?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의 이름 하면, '여호와'라는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정확히 말한다면, '여호와'라는 이름은 구약시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감람산에서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 가운데,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것을 명령하셨다(마28:18). 그런데 놀라지 말라. 그분의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세례를 줄 때에는 단 한 번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로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는 것이다(행2:38, 8:16, 10:48, 19:5). 그래서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행2:38), 사마리아교회 성도들 역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행8:16). 그리고 고넬료 가정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행10:48), 에베소교회 성도들도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행19:5). 그러므로 아버지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구약에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시된 여호와께서 인류를 구원하러 사람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럼 신약성경에 계시된 예수의 이름은 어떤 이름인가? 신약성경에 계시된 예수의 이름은 크게 5가지 이름으로 쓰였다. 첫째는 '구원의 이름'이다(행4:12, 롬10:13). 다시 말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둘째는 '권세와 능력의 이름'이다(막16:17~18). 이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더러운 귀신들이 쫓겨나기 때문이다. 셋째는 '기도 응답의 이름'이다(요14:13~14, 15:26, 16:23~24,26).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이름은 기도할 때 응답의 이름으로 사용된다. 이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주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넷째는 '죄사함의 이름'이다(요일2:12). 그분의 이름으로 사람이 죄사함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다섯째는, '치유의 이름'이다(행3:6, 약5:14). 왜냐하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가 낫게 되고 고침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지키고 보존할 수 있었으며,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을 하나되게 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버지의 아들은 항상 하나였으며(요10:30), 또한 이름도 하나였던 것이다(요5:43).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빌립의 요구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요14:9).

  또한 구약시대 한 분 하나님의 이름과 신약시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을 합치면 그분이 곧 '알파와 오메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그러한가? 사실 구약시대에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셨고, 신약의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인데, 이것을 합치면,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마침이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학자들은 '여호와(야훼)'가 실제 발음이 아니라, '아하야흐'가 실제 발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아하야흐'라는 이름은 '나는 알렢(알파)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편 하늘에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다(계1:17, 2:8, 22:13). 그리고 '나는 알파와 오메가'(계1:8, 21:6, 22:13)이며 '나는 시작과 마침'(계21:6, 22:13)이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소개하신 분이 누구인가? 그분은 주 하나님이요 전능하신 이이시다(계1:8). 그런데 이분은 누구인가? 그분은 곧 주 예수님이시다(계22:13,16).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이 '나는 알파이다'라고 하신 분이고, 신약의 하나님이 '나는 오메가이다'라고 말씀하신 분으로서, 두 분이 하나라는 것을 그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지키고 보존할 수가 있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서로 하나되게 하실 수가 있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4. 아버지께서 세상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아들에게 주신 것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가운데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말씀을 만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으려고 아들에게로 나아올 때에 그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구원하려면 아들에게는 그들을 구원할 만한 권세와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어떤 것을 받은 것일까? 그것은 총 4가지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은 첫째로,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요17:2). 그래야 당신을 믿고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요17:2). 둘째로, 레마 말씀을 받았다(요17:8). 그래야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그 시에 주시는 말씀을 하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아버지의 이름을 받았다(요17:11,12). 좀 전에도 살펴보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곧 아들의 이름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구체적으로 5가지로서, 구원의 이름이요, 권세와 능력의 이름이자, 기도 응답의 이름이며, 또한 죄사함의 이름이요 치유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넷째로, 영광을 받았다(요17:22,24). 저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될 빛나는 영광을 받았으니, 그것을 제자들에게 역시 나눠줄 수가 있었고, 제자들도 그 영광을 보았고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 주님께서 그들에게 부탁하신 사명을 완수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다(요17:7). 그러므로 아들도 아버지의 것을 가지고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5. 예수께서 말씀하신 1인칭 복수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계시의 말씀들도 있으니, 그것은 예수께서 창조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가진 채 있었다는 그분 스스로의 고백이다(요17:5).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로 오셔서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인간을 구원하고 하늘에 들어와서 살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늘의 기업을 물려받아 왕 노릇하게 하시려는 계획이 어느 날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이미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그분은 이러한 일을 펼쳐나가실 때에 아버지와 아들로 인하여 그 일을 행하실 것을 이미 갖고 계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 자신을 가리켜 '우리는 언제나 하나'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셨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떨어져 있거나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인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이다(요17:11, 21~22).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항상 하나였던 것처럼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 그리고 미래의 성도들도 역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였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서로 하나라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17:11[직역]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세상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세상 안에 [있습니다]. 나도 역시 당신을 향하여 스스로 가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당신이 나에게 주신 채 있는 바 당신의 이름으로(안에서) 그들을 지켜 주옵소서. 이는 그들이 우리와 같이 하나로 [계속]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요17:21~22[직역] 이는 모든 이들이 하나로 [계속]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버지여! 당신과 같이 내 안에, 나도 역시 당신 안에 [있는 것 같이]. 이는 그들 자신도 역시 우리 안에 [계속]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당신이 나를 파송했다는 것을 세상이 [계속] 믿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22 나도 역시 당신이 내게 주신 채 있는 바 그 영광을 그들에게 준 채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로 있는 것 같이, 그들이 하나로 [계속]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6. 나오며

  예수께서 창세 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곁에 있었으며 그때부터 아버지가 주신 영광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놀라운 영적인 비밀을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대제사장적 기도를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이는 실로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인류를 구원하고 또한 인류를 하늘의 상속자가 되게 하는 데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일하신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것을 늘 강조하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인 것과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으로서 구약시대에는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셨다.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자신의 이름을 '예수'라고 계시하셨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한 분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는데에 서로 협력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승천하신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계22:13). 이는 구약시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알파요 처음이요 시작이라'고 칭하신 것이라면, 신약의 예수께서도 역시 당신 자신을 '오메가요 마지막이요 마침'이라고 칭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 인류 구원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함께 행하신 것이다. 이것을 완성하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당신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아들에게 위임하셨다. 그러므로 아들 자신도 아버지의 것을 다 받아서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 구원받기 원하여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께서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 어렵다. 한 분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지금도 함께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합하여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은 오늘날 부부라는 것이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하나가 되었을 때에 가정에서 놀라운 일을 행할 수 있고,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하나가 되었을 때 교회에서 놀라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서 하나가 되어 일해 보자. 그러면 엄청난 일을 해낼 수가 있을 것이다. 

 

 

2023년 11월 01일(수)

정보배목사

2023-10-25(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34)]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중보기도에 나타난 놀라운 영적 비밀들(요17:1~26)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CZMqQiog_vo [또는 https://tv.naver.com/v/43708159]

 

1. 들어가며

  요한복음 17장은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마가 다락방에 드리신 중보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믿고 따르고 있던 제자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제자들을 통하여 믿게 될 미래의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3가지 기도를 통해서 주님께서 그토록 바라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고,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예수님의 제사장적 중보기도 가운데 나타난 놀라운 영적인 비밀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러한 영적인 비밀에는 '영생'의 비밀, '구원'의 비밀, '한 분 하나님'의 비밀, '아버지의 이름'과 '예수의 이름'의 비밀, '세상'의 비밀 등이 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것들 중에서 '영생'과 '구원'의 비밀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요한복음 17장의 구조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요한복음 17장의 구조는 어떻게 분류할 수 있는가? 그것은 크게 세 부분으로 분류할 수가 있다. 첫째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다. 이것은 1절에서 5절까지다. 그리고 둘째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다. 이것은 6절부터 19절까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는 미래의 성도들을 위한 기도다. 이것은 20절에서 26절까지다. 이제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보도록 하자. 

  첫째, 예수께서는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계17:1~5). 그것은 '당신의 아들'인 곧 '나'를 영화롭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그럼 그가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하라고 하신 일을 성취하는 것이다(계17:4). 결국 그것은 때가 되어 자신을 속제물로 내어놓는 일이다(계17:1). 사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할 때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는 어머니의 부탁을 들었을 때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대답했다(요2:4).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실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제 그 때가 이르렀던 것이다. 이제 다음날이면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예수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해 달라는 기도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제물로 잘 내어 줄 수 있게 되기를 간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기도야말로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계17:1). 

  둘째,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믿고 따라오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두 번째로 드린다(계1:6~19). 그 내용은 2가지인데, 하나는 제자들을 지켜 주시고 보전해 달라는 기도였다(계17:11).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진리의 말씀으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계17:16). 먼저, 제자들을 지키고 보전해 달라는 기도에는 2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적인 분열로부터 그들을 지켜주심으로 제자들의 하나됨을 끝까지 보전해 달라는 기도였다(계17:11). 그리고 또 하나는 외적인 분열로부터 지켜 주셔서 악한 자로부터 그들을 보전해 달라는 기도였다(계17:15).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제자들을 통하여 장차 믿을 미래의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계17:20~26). 그 기도의 핵심은 이들도 역시 내적인 분열로부터 하나되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계17:21~23). 그래서 장차 예수께서 가시는 그곳에 그들도 함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였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바 그 영광을 세상 사람들도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계17:24).

 

3. 예수의 죽음은 과연 비참한 종말인가 아니면 영광스러운 탈출인가?

  예수께서 드린 첫 번째 기도는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기도는 어떤 뜻일까?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더 높여달라는 기도인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때가 이르게 되면 예수께서 수행해야 할 과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때가 이르면 수행해야 할 일이었다. 예수님께 부여된 이 구원사역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의 가나 혼인잔치에서 나타났다.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에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고 말했던 것이다(요2:4). 그리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에도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12:23)"고 말씀하시면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12:24)"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땅에서 들림으로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요12:32).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을까?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해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죽는 것을 없어짐이나 파멸이나 슬픔으로 표현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죽음은 다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원래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셨던 예수께서 이제 지상에서의 모든 사명을 마치고 아버지를 향하여 가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우리는 슬퍼할 것이 아니라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도 하나님께서 원래 보내신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는 아버지께서 이 땅에 보내셨던 그 직무를 잘 마치고 돌아가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곧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곧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영생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얻는가?

  예수께서 가장 먼저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실 때에 그분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정확히 드러내신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셨던 바 모든 것을 이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주는 것이라고 했다(요17:2).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셨던 모든 것을 우리도 이 땅에서부터 누리며 사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권세와 능력을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채 사람이 죽는 것은 영생을 누리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얻은 영생을 천국에서만 누리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누리도록 허락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믿음이 있다면, 예수께서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아서 그것을 이 땅에서 누린 것처럼, 우리도 모든 육체를 다스리는 권세를 이 땅에서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영생이요, 그 영생을 가진 자가 결국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에 우리도 이러한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가? 그 답은 한 가지이면서 동시에 두 가지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계속 아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아버지께서 파송하셨던 바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아는 것이다(계17:3). 고로 이것은 두 가지처럼 보이나 사실은 한 가지다. 왜냐하면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인간 구원 때문에 하나님께서 취하신 부득이한 조치였다. 왜냐하면 사람의 죄값은 피 흘려 죽는 것이다(롬6:23, 히9:2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요4:24) 그분은 피를 흘릴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피 흘려 죽으시기 위해서 사람되어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이 땅에 들어오실 때에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 쓰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다는 측면에서 당신 자신을 '사람의 아들' 곧 인자라고 칭하셨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나오셔서 이 땅에 들어오신 분이셨기에, 그분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파송을 받아 이 땅에 들어오신 분이신 것이다. 

 

5. 장차 영생을 얻게 될 자는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인가? 아니면 복음을 듣고 스스로 믿어서 구원받을 자인가?

  장차 영생을 얻을 자는 과연 누군가?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자인가? 아니면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믿음을 받아들이는 자인가? 그것이 요한복음에 나온다. 하지만 어떤 이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들을 사용하여,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이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그것은 틀린 주장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을 한글로 번역한 사람들이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의 관점을 따라 요한복음을 번역했기 때문이다. 사실 요한복음 번역자들은 헬라어 원문(현재는 네슬알란트28판)을 따라 번역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믿고 있던 예정론 교리에 따라 번역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는 과연 어떤 구절들이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의 신학적 교리가 들어간 번역인가? 그런데 묘하게도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자들이 자신의 신학적 교리의 근거로 사용하는 말씀들이 사실 알고 보면, 성경을 잘못 번역한 본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구절들은 요한복음 17장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6장과 10장에도 있다. 그런데 사실 이것들은 헬라어 성경을 자의적으로 번역한 것이지 결코 원문을 직역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글 성경만을 갖고 있고, 그것만 읽는 분들은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이 성경적이라는 주장에 금방 동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잘못된 주장을 감추어 둘 필요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이제는 무엇이 오역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왜곡되이 번역되었는지를 살펴보고 바로잡을 때가 되었다. 

 

1)요한복음 17:2의 번역 문제

  첫 번째는 요한복음 17:2의 번역 문제다. 이 성경 구절을 보면, 중성 단수(~것)를 남성 단수(~사람)로 바꾸어 번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17:2[개역개정]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남성, 단수)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위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요17:2[헬라어(NA28) 직역] 당신께서 그에게 모든 육체의 권세를 주셨던 것처럼. 이는 당신이 그에게 주셨던 바 모든 것(중성, 단수)을 그가 그들에게 시대의(영원한) 생명으로 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절의 문제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과연 무엇을 주었는가 하는가에 있다. 모든 사람인가 아니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 개역성경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셨던 것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중성,단수)이라고 나온다. 이는 아버지께서 예수 자신에게 주신 모든 것을 이제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주려고 하셨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예수께 나아오는 모든 자들을 예수께서 구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려면 아버지로부터 인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문제가 중요한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구절에 대한 신학적인 해설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을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자들이 사용할 때에는 자신들에게 필요한 성경 구절로 인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아버지께서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작정하셔서 아들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작정한 자이기 때문에, 절대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로 한 번 구원받은 자는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만세 전의 하나님의 작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은 절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예정은 사람에 대한 어떤 사역적인 예정만 있는 것이지 개인적인 구원 예정이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으며, 모든 사람이 다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딤전2:4).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도 아버지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딤점2:6).

딤전2:4,6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6 그(그리스도 예수)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대신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2)요한복음 6:37,39의 번역 문제

  두 번째는, 요한복음 6:37과 39절의 번역 문제다. 이 구절들도 역시 '중성 단수'를 '남성 단수'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6:37,39 [개역개정]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남성, 단수)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남성, 단수)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남성,단수)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6:37,39 [헬라어 직역]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모든 것(중성, 단수)은 나를 향하여 다다를(도착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여 [계속] 오고 있는 자(남성, 단수)는 내가 결코 바깥쪽으로 내쫓지 않을 것입니다. 39 그런데 나를 보내셨던 이의 뜻은 이것입니다. 내게 [이미] 주신 채 있는 모든 것(중성, 단수)을 내가 그것에서부터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마지막날에 일으켜 세우기 위함입니다. 
  우리말 개역성경에 보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고 있는 대상은 사람이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중성으로서 "~것"이다. 거기에 '모든'이 함께 붙어 있으니, 곧 '모든 것'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당신을 향하여 나아오고 있는 자를 다 구원해야 하니까,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다다르고(도착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 구절도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만세 전에 작정한 사람만을 예수께로 보내어 구원받게 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3)요한복음 10:28~29의 번역 문제

  셋째로, 이것은 가장 심각한 것인데, 이 구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요10:29에 나오는 '그것'이라는 단어를 대문자 사본(중성, 단수)을 가지고 번역하지 않고, 오히려 후대에 변형된 소문자 사본(남성, 복수)을 가지고 번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10:28~29 [개역개정]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10:28~29 [헬라어 직역] 그리고 나도 역시 그것들(양들)에게 시대의 생명(영생)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시대까지(영원히) 그것들은 스스로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들을 내 손에서부터 [장차] 낚아챌 수 없을 것입니다. 29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채 있는 바인 그것은 모든 것들보다 더 큽니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아버지 손에서부터 낚아채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0:28에 따르면, 예수께서 영생을 누구에게 주시는가가 나온다. 그것은 바로 '그들(양들)'이다. 그 양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양들이므로, 헬라어 원문에 보면 '그것들(양들)'이다. 예수께서 바로 양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29절에 보면,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아버지께서 그것들(양들)을 아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NA28)을 보면, 그것은 '양들'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채 있는 바인 바로 그것(중성, 단수)'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 말씀도 아버지께서 예수님께서 주시고 있는 것은 양들이 아니다(그것도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약속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고 있는 어떤 무엇이다. 그것에는 아버지의 지혜, 능력, 권세 등등 다양한 것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그때 주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고 있는 그것은 사실 모든 것들보다 더 큰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가지고 있는 것은 최고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아들 앞에 나아와 구원받으려는 자를 낚아챌 수가 없는 것이다. 고로 이 구절도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된 자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고, 아들은 아버지께서 주신 그 사람들만 구원한다고 하는 성경 구절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누구를 끝까지 구원하시어 그에게 영생을 주시고, 그를 낚아채 가지 못하게 하시는가? 그것은 28절에 나오는 바로 '그들(그것들)' 곧 양들이다. 그럼 그들은 어떠한 양들인가? 그것은 바로 앞 구절에 나와 있다. 그것은 양들은 양들인데, 계속해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자들이며,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자들이다(요10:27). 그렇다.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기 위해 예수님의 음성을 계속해서 듣고 있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들을 주님께서는 붙들어서 결코 영생을 다른 것이 빼앗아가지 못하게 막아 주시는 것이다. 

 

 

6. 나오며

  만약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어떤 개인을 구원하거나 멸하기로 예정한 채로 모든 것을 집행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잘못 오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거머쥔 채 당신 마음대로 행하시는 폭군 같은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자애로운 분이시다. 그런데 만약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을 매우 편파적인 분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자신이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의 입장에서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을 보면 매우 기뻐할 것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만약 반대로 자신이 멸망받기로 예정된 사람의 입장에서 만세 전 개인 멸망 예정을 보면, 그것은 너무나 억울하고도 억울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멸망으로 예정되어 있다가 결국 버림을 당하는 신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미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을 만세 전에 멸망으로 예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범죄했지만 그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들 중에서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구원의 모든 준비를 다 하셨다. 그것이 바로 모든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믿으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 만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만약 구원의 모든 권한을 하나님께서 쥐고 계신다면 그분은 결국 공의로운 분이 아니다. 그리고 결코 심판주가 되실 수가 없다. 우리 인간에게 어떤 책임이 있으니까 그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 심판이기 때문이다. 만세 전에 지옥에 보내기로 예정된 사람에게 예수님을 안 믿었기 때문에 지옥을 보낸다고 심판한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 대항할 것이다. 왜 나는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지 않으셨냐고 말이다. 또한 그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폭군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들었을 때에 그분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뿌리친 자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지옥에 들어갈 자는 아무런 댓구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값없이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받은 구원을 보전하려면 우리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 받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믿는 것을 부인해서도 아니 될 것이며, 지은 죄가 있다면 즉시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때로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을 영원히 효력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날마다 자기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깨끗한 옷을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열두 진주문을 통과하여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계22:14).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과 회개하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이지 하나님이 대신 해 주는 것이 결코 아니다. 

 

 

2023년 10월 25일(수)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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