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39) 다윗 왕국의 시동을 걸기 시작하다(삼상27:1~12)_2021-12-30 (목)
 

1. 다윗의 마지막 도피처가 된 곳은 어디였는가?

  두 번째로 다윗과 조우를 통하여 사울왕은 그동안 자기가 죄없는 다윗을 죽이려했다는 것을 시인하고 다윗이 차기 왕이 될 것도 알고 그를 축복한다. 그리고 둘은 헤어진다. 하지만 다윗은 이제 사울왕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그곳은 바로 '블레셋' 땅이었다(삼상27:1~2). 다윗은 이제 8년 만에 또다시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가서 망명을 요청하고 있다(삼상29:3). 그런데 이번에는 8년 전과는 상황이 좀 많이 다르다. 전에는 소년 몇 명과 망명하러 갔었고, 다윗을 두려워하는 신하들에 의해 다윗은 아기스왕 앞에서 침을 흘리며 미친 체하다가 도망쳐 나와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벌써 정예 군사 600명에다가 부녀를 포함하여 최소 1,800명 이상이 다윗을 따라 망명을 요청해 온 상황이기 때문이다. 

 

2. 왜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는 다윗의 망명을 받아 주었는가?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는 의외로 다윗의 망명을 쉽게 받아 준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마도 적의 적은 내 편이라는 공식에 따라, 자기 편의 사람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아기스왕의 적은 사울왕이었다. 그런데 사울왕의 적이 또한 다윗이었으니, 적에 대한 적으로서 다윗은 얼마든지 자기의 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다윗 휘하에 어느 정도 군사들도 있기 때문에 잘하면 다윗을 자신의 부하 장수로 써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또 흘러갔다. 그러자 다윗이 왕에게 요청을 했다. 자신이 왕에게 은혜를 입었다면 이제는 왕도에 함께 살지 않고 따로 나가 살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왕은 남방에 있는 변방의 버려진 마을인 '시글락'을 그에게 허락한다. 그런데 그때도 역시 아기스는 다윗을 떠보는 중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이 왕도에 계속 있다면 언제 다윗이 자기에게 구테타를 일으킬지도 모르니 떠나 보내는 것이 더 나아 보였고, 또한 다윗이 남방의 변방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되는 셈이었다. 그러므로 쾌히 승락을 하고 다윗과 그의 일행을 시글락으로 가게 한다. 

 

3. 왜 다윗은 아기스에게 자신들의 거처를 달라고 했는가?

  다윗도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은 급한 불은 우선 끄자는 데에 중점이 있었다. 왜냐하면 사울왕이 자기에게 두 번씩이나 약속을 했지만 언제 또다시 번복할지 모르니 우선 사울왕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피신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 땅에 피하면 또 사울이 추격해 올 것 같으니, 아예 외국에 망명을 요청해야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만약 사울이 다윗이 거처하고 있는 블레셋 땅이라도 침범해 들어온다면 전쟁하자는 것이 되므로 사울도 함부로 쳐들어 올 수 없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더 다윗이 망명을 요청한 이유중의 하나는 자기가 이끄는 공동체 처자식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수 년 전에 다윗은 아비가일과 아히노암과 결혼을 했었다. 그러자 다윗의 부하들도 결혼을 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식솔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다윗이 블레셋 땅으로 망명한다고 하니 그들도 저마다 가족을 데리고 가드로 이동하였던 것이다(삼상27:3). 그러나 이전에는 그러한 상황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때는 다윗과 그의 군사들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가정을 꾸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부녀와 자식들을 데리고 도망 다닐 수는 없는 형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부녀들과 자식들은 어떤 장소에 살게 해야 했다. 그리고 다윗과 부하들은 언제든지 도망을 치든지 전쟁을 하든지 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윗은 기꺼이 블레셋으로 가기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가서 자기들이 살 수 있는 땅을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다윗을 잘 이용할 수 있다면 손해볼 것이 없을 것으로 판단한 가드의 아기스왕은 계속 다윗을 주시하면서 그를 지켜보기로 한다. 

 

4. 다윗이 시글락에 머물면서 한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다윗이 시글락에 머물면서 한 일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사실 '시글락'은 원래 유다 지파의 땅으로 할당되었다가, 시므온 지파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다시 유다 지파의 땅이 된 곳이다. 그런데 다윗 당시 시글락은 블레셋의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아기스왕이 다윗에게 시글락을 하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드의 왕도로부터 약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시글락에 위치한 다윗은 그곳에서 무슨 일을 했던 것일까? 그것은 자기 식솔들의 식량과 의복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글락이 이스라엘과 블레셋 그리고 애굽 땅의 경계선에 있는 지역인지라 주변에는 타 민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많았다. 그러자 다윗은 시글락 주변에 있는 족속들 즉 그술 사람들과 기르스 사람들과 아말렉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쳤다. 그리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은 다 죽이고 가축으로서 양과 소, 나귀들과 낙타들 그리고 의복을 구해 왔다. 그리고 일부를 전리품으로 아기스왕에게 바쳤다. 그러자 아기스왕은 블레셋의 변방을 수호하고 주변을 정복하여 블레셋의 영토를 확장해 준 다윗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그리하여  다윗을 더욱 신뢰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묻는다. "오늘은 어디를 쳤느냐?" 그러자 다윗은 유다의 변방 지역을 쳤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곳은 유다 변방에 위치한 마을들이었으므로, 그 대상은 유다 사람들은 아니었다. 만약 그때 다윗이 유다 사람들을 쳤다면 그는 유다의 왕이나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비밀이 새 나가지 않도록 다윗이 주변 타민족을 칠 때에는 대부분 사람을 살려 두지 않았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살려 두면 다윗의 실체를 보고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시글락에 거주하면서 비로소 한 마을의 부족장처럼 왕처럼 백성을 돌보고 먹이고 입히고 하면서 장차 왕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시험해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5. 다윗이 블레셋에 망명한 것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다윗이 블레셋에 망명한 것을 두고 잘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제는 안정을 누려야 할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랬다. 그때 당시 다윗도 결혼하였고 이어서 부하들도 결혼을 치름으로 처자식이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므로 다윗도 그들의 안정을 찾아 주어야 하는 순간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취할 수 있었던 가장 안정된 선택지는 바로 '망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을 잘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없는 것은 블레셋은 원래 이스라엘의 원수가 아닌가? 다윗 자신도 가드 사람 골리앗과 전쟁할 때에 할례받지 아니한 사람이라고 그들을 칭했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자들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골리앗과 전쟁할 때에 다윗은 다곤신을 섬기는 그들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능멸하도록 놔 둘 수 있겠느냐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가 지금 블레셋 나라에 망명을 하고 말았으니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에 전쟁이라도 터진다면 다윗은 과연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그러므로 다윗의 이러한 선택을 두고서 우리는 그를 칭찬할 수는 없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진짜 그러한 일이 터지고 말았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에 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윗은 아기스왕을 따라 전쟁에 나가야 했다. 블레셋 편이 되어 이스라엘을 무찔러야 할 판이 된 것이다.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때였다. 다윗의 전쟁 참가에 제동을 걸고 나선 이들이 있었으니, 가드 왕(방백)을 제외한 나머지 4개의 왕들(백뱅들)이었다. 그들은 다윗이 절대 자기들과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언제 돌변하여 전장에서 자기들의 대적이 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그를 데려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언급하기를, 과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노래했을 때에 여인들이 만만의 칭송을 돌리던 자가 다윗이 아니냐는 것이다(삼상29:5). 그러니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기스왕도 다윗을 불러 다른 수령들이 다윗을 좋아하지 않으니 돌아가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다윗이 블레셋 장수가 되어 이스라엘을 치는 격이 될 뻔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가 어찌 장래에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도 블레셋의 다른 방백들의 마음을 들어서 움직여 다윗이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혹 우리가 생각하고 기도해야 할 기도 제목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일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지 못할 상황에 처하지 않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일할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만 높일 수 있게 해 달라고 미리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윗을 도와주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들도 도와주실 것이다. 

 

2021년 12월 30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38) 사울의 범죄시인과 다윗축복선언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삼상26:1~25)_2021-12-29(수)

https://youtu.be/L_Zss6bpRjE  [혹은 https://tv.naver.com/v/24415652 ]

 

1. 사무엘의 사후 다윗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류는 어떤 것인가? 

  사무엘의 죽음 이후 다윗에게는 새로운 기류가 포착되기 시작한다. 이전에 없었던 안정세가 찾아온 것이다. 이전에 다윗은 정말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러니 자기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그런데 사무엘이 죽기 직전에 엔게디 동굴에서 다윗은 사울과 조우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다윗은 사울을 살려 준다. 이어 사울은 다윗이 자기를 살려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사울의 심경의 변화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그리고 나서 마온의 나발 사건이 터진다. 이것이 사무엘상 25장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하여 다윗은 훌륭한 아내를 얻게 되니, 그가 바로 나발의 아내였던 과부 아비가일이었다. 그런데 다윗과 아비가일의 결혼은 새로운 국면으로 다윗을 이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스르엘 사람이었던 아히노암과의 결혼 역시 이내 다윗을 경제적인 안정으로 이끌어 주기에 충분했다. 먹을 식량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헷 족속의 합류는 군사적으로도 다윗에게는 많은 도움이 된다. 그중에서 잘 알려진 장군들이 있다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히멜렉과 그리고 나중에 등장하는 우리야 장군이다. 그러니 이제는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의 동향을 살필 수 있는 정도까지 된다(삼상26:4).

 

2. 하길라 산에서 사울과 다윗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다시 십 사람들의 밀고로 인하여 사울은 다윗을 잡으러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하길라 산 근처까지 내려온다. 그리고 길가에 진을 친다. 이제 다윗은 정탐꾼들을 통하여 이 소식을 접하게 되고 기회를 엿본다. 어느날 다윗은 자신의 부하들 중에서 요압의 동생이었던 아비새를 데리고 야밤에 적진으로 향한다. 그런데 모두가 잠들어 있었다. 그러자 아비새가 말했다. 하나님께서 오늘 주군의 원수를 갚는 기회를 주셨으니 자신이 가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땅에 꽂게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그를 죽이지 말라고 명령한다. 누구든지 자기의 손을 들어 여호와의 메시야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쳐서 죽이시든지 아니면 전장에서 나가서 죽게 되든지 그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고 하고서 나온다. 그리고 나서 아침에 멀리 맞은 편 산 꼭대기에 선 다윗은 이스라엘의 군사들과 군대 장관 아브넬을 향하여 꾸짖는다. "아브넬아, 너는 왜 왕을 지키지 아니하느냐? 지난 밤에 왕을 죽이려고 한 사람이 들어갔는데, 아무도 지키는 자가 없었노라. 여호와의 메시야를 지키지 못한 네 죄가 크니, 너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자로다. 왕의 창과 물병이 있나 어서 가서 살펴보라."고 꾸짖는다. 

 

3. 다윗이 아비새에게 사울왕을 죽이지 말라고 한 것과 아브넬더러 그를 지키지 못한 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했던 말은 나중에 어떻게 다윗에게 복으로 돌아오게 되었는가?

  다윗은 두 번씩이나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삼상24:3~6, 26:8~11). 그리고 그때마다 자기의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해쳐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그의 부하들에게 주군에 대한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각인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즉 한 번 자기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섬기기로 했다면 그 왕을 결코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브넬이 왕을 잘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두고 책망을 하자, 결국 다윗의 부하들도 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큰 죄가 된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중에 전장에서 다윗에게 위험한 일이 발생했을 때, 부하 장수들은 목숨 걸고 치고 들어가서 왕을 건져내게 된다. 그리고 왕으로 하여금 전쟁터에 있지 말기를 간청한다. 이는 자기들이 이제는 전쟁을 수행할테니 왕은 명령만 하시라는 것이다. 왕이 죽어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다윗이 진심으로 사울왕을 아끼며 죽이지 않았던 것은 결국 부하들의 충성심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 다윗의 말과 행동을 듣고 보고 배운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왕들 중에 다윗의 시대처럼 충성스러운 부하가 나온 시대는 이전에도 없었으며 이후에도 없었다. 주군에 대한 부하의 태도를 다윗으로부터 그대로 배웠기 때문이다. 

 

4. 하길라 산에서 다시 목숨을 건지게 된 사울은 다윗에게 어떤 말을 하였는가?

  하길라 산에서 다시 목숨을 건지게 된 사울은 멀리서 들려오는 다윗의 음성을 듣고는 자신을 살려 준 다윗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첫째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말을 세 번씩이나 하였으며(삼상26:21), 둘째는 다윗을 3가지로 축복했기 때문이다(삼상26:25). 그랬다. 사울이 정말 달라졌다. 그런데 사울의 왕정 초기에는 어떠했는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에 따라 하나님의 영이 떠나갔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령이 역사하였다. 그리고 다윗을 더 높이는 여인들의 음성을 듣고는 이내 시기 질투심이 솟아 올라왔다. 그러자 이내 감정은 미움에서 살인의 감정까지 번져 나갔다. 그리하여 다윗에게 협조한 사람들을 처참하게 유린함으로서 그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오늘 그의 음성을 들어 보라.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시인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삼상26:21)." 그리고 조금 있다가는 자신의 목숨을 아껴 살려 준 다윗을 축복하기까지 했다.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삼상26:25)." 그랬다. 사울의 마음이 확실히 달라진 것이다. 이전에 그가 가지고 있던 시기 질투심이나 미움과 살인의 감정은 지금 이 순간에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다. 그리고 악령도 역사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적인 비밀은 누구에게든지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잘못을 시인하는 자는 귀신이나 저주도 역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때 회개를 사람에게 하든지 하나님께 하든지 결과는 같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에게 불효하는 자부가 있다고 치자, 그때에는 대부분 자부의 자녀에게 틱 장애가 온다(다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때 자부가 시어머니에게 무릎 꿇고 잘못을 시인하고 효도하게 되면 자녀의 틱 장애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상 숭배의 죄가 아닌 경우 자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회개하면 그 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저주들이 멈추게 되는 것이다. 

 

5. 사울의 항복 선언이 알려 주는 4가지 영적 사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길라 산에서 일어난 사울의 심경 변화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영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사탄의 왕국이 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사탄의 왕국은 무너지고 말며,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지고 만다는 것이다. 둘째, 악이 선을 이기는 것 같으나 결국에는 선이 악을 이긴다는 것이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이 악이 아무리 득세한다고 해도 결국 선이 악을 이기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인간의 강력한 힘이나 사탄의 능력이 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그것은 새 발의 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넷째, 사탄은 죄를 짓고 있는 사람에게만 역사할 수 있는 것이지 죄를 짓고 있지 않는 회개하는 자들에게까지 역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울은 자기를 살려 준 다윗을 보고 두 번씩이나 회개를 한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이후에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우를 범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사울은 자신의 종말이 비참한 죽음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수 있다. 

 

2021년 12월 29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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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37) 다윗의 분노를 잠재운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삼상25:1~31)_2021-12-28(화)

https://youtu.be/mIFI92w4rQ4  [혹은 https://tv.naver.com/v/24314165 ]

 

 

1. 사무엘상 25장은 어떤 내용이 쓰여 있는가?

  사무엘상 25장은 크게 3가지 이야기가 쓰여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사무엘의 죽음이다(삼상25:1). 이제 사무엘이 84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사사 시대의 마지막 주자로서 부름을 받아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였고, 다윗에게도 기름을 부음으로 왕정 시대를 열었던 기도의 사람이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대처가 나온다(삼상25:2~38). 이 이야기는 뒤에 계속해서 다룰 것이다. 세 번째는 두 여인과 다윗과의 결혼 이야기다(삼상25:39~44). 다윗은 자신의 아내 미갈을 사울이 다른 사람 곧 갈림에 사는 라이스의 아들 발디에게 시집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두 명의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는 마온의 과부였던 '아비가일'이었고, 또 한 사람은 유다지파 이스르엘 사람 '아히노암'이었다. 참고로 아히노암은 다윗의 세 번째 부인으로서 다윗의 맏아들 '암논'을 낳은 여인이 되었으며, 아비가일은 다윗의 두 번째 부인으로서 다윗의 둘째 아들인 '엘리압'(삼하3:3) 혹은 '다니엘'(대상3;1)이라고 이름하는 아들을 낳은 여인으로서, 오늘 두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 여인의 남편 나발을 하나님께서 치심으로 죽게 되었을 때 다윗은 사람을 보내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결국 다윗의 두 번째 아내가 된다. 

 

2. 마온의 거부였던 나발, 그는 누구이며 그는 왜 다윗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그에게 모욕을 주었는가?

  유다지파 지역인 '마온'에 갈렙의 후손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나발'이라는 사람이었다(삼상25:2). 그는 부모로부터 재산을 많이 물려받은 자로서, 당시 양이 무려 3천 마리에, 염소를 1천 마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마온에 사는 사람들 중 갑부에 속한 자였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이름처럼 좀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그는 거칠고 난폭했으며 행실이 악하였기 때문이다(삼상25:3). 심지어 그의 종들도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달랐다. 그의 아내는 '기쁨을 주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의 '아비가일'이었는데, 그녀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고 용모도 아름다웠다(삼상25:3).

  그런데 어느날 나발에게 양털 깎는 시기가 찾아왔다. 이때는 사실 양떼의 주인에게 많은 수입이 들어오는 시기이므로 보통은 주변 사람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인다. 그러자 다윗도 자기의 청년들 10명을 그에게 보내어 그로부터 은혜 입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나발은 열렬한 사울 지지자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사울왕으로부터 뛰쳐나간 다윗이라고 그를 맹비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그는 다윗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다윗은 대체 어떤 놈이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더냐? 요즘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뛰쳐나간 종이 많이 있다는데, 내가 어찌 내 떡과 내 물 그리고 나의 양털 깎는 자들을 위해 잡은 고기를 어디서부터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놈들에게 나눠주겠느냐?(삼상25:20~11)" 이처럼 나발을 다윗을 경멸하였다. 아마도 그는 사울왕이 블레셋을 쳐부수고 난 뒤 나발의 양떼들이 있던 곳 곧 갈멜에다가 전쟁 승전 기념비를 세운 것을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사울왕을 흠모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사실 어느 지파 사람인가? 그는 유다지파의 사람이며, 그것도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을 정복했던 경건한 갈렙의 후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다지파 사람인 다윗을 이렇게 홀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나발의 양치기를 얼마나 돌보아 주었으며 성벽이 되어 주었는가? 그는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 자였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지만 그는 자기를 위해서는 엄청나게 큰 잔치를 벌여놓고 술에 취해 있었다. 그는 사실 자기의 배만 위하고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줄 모르는 몰인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3. 나발의 소식을 들은 다윗은 어떤 결단을 내렸는가?

  그러자 나발이 자신의 종들을 통해 자신의 청원을 거절하고 자신에게 모욕을 주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이내 분개한 나머지 나발과 나발에 속한 모든 남자들을 다 죽이려고 작정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에게 속한 남자들 600명 중에서 400명에게 칼을 찰 것을 명령하였다(삼상25:13). 그런데 그때였다. 하나님이 도운 일이 일어난다. 양치던 종이 주인의 아내인 아비가일에게 찾아가, 나발이 다윗이 보낸 자들을 그만 빈 손으로 돌려보냈을 뿐만 아니라 다윗을 모욕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아마 다윗이 보낸 자들을 아비가일은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러자 아비가일은 즉시 다윗에게 갖다 줄 음식을 준비한다. 떡 200덩이, 포도주 두 가죽 부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 볶은 곡식 다섯 세아(70리터), 건포도 100송이 그리고 무화과뭉치 200개를 가져다가 나귀에게 싣고 다윗에게로 향한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은 잘 알지 못하게 호젓한 길을 따라 다윗에게로 간 것이다. 

 

4. 분노하여 군사를 끌고 오던 다윗은 왜 나발을 치려고 했던 뜻을 접게 되었는가?

  그때였다. 다윗 앞에 어떤 여인이 다가오더니 자신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말하는 것이었다. "내 주여 원하건대 그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삼상25:23)." 그녀가 그때 한 말은 2가지였다. 한 가지는 자신의 남편 나발의 행한 일을 마음에 두지 말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리석은 자로서 그렇게 행동한 것 뿐이라고 말하고는, 우선 자신이 다윗의 종들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받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말을 이어갔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다윗 왕의 미래에 관한 조심스러운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다윗은 앞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며 자신도 그렇게 될 줄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다윗이 나발과 그에게 속한 남자들을 쳐서 죽여 없애버린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훗날에 누가 말하기를, 다윗이 그때 무죄한 피를 흘렸고 힘이 약한 원수를 보복하고 다녔다고 한다면, 다윗에게 큰 흠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한 치의 불명예가 가지 않도록 나발을 죽이는 일을 재고해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죄값을 물을 일이 있다면 여종인 아비가일에게 물어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노여움을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사실 다윗의 원수는 사울왕이었다. 그런데 만약 다윗이 나발을 친다면, 권세있는 사울 왕에게는 아무 것도 대항하지 아니하고, 마온의 약한 사람 그것도 아무것도 무장하지 않은 시골 사람을 죽여 없앤 격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틀림없이 다윗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장차 왕이 될 자는 흠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다윗의 결정을 심사숙고해달라는 것이다. 그러자 다윗은 그녀의 말로 인하여 감동을 받는다. 그녀가 행한 행동과 그녀가 한 말이 너무나 지혜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말을 그대로 받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녀의 분별력있는 행동을 두루 칭찬한다. 그렇다. 한 여인의 분별력 있고 사려깊은 말이 분노하고 있는 다윗의 마음을 가라앉게 만들어, 훗날 다윗의 명예를 흠이 가지 않게 한 것이다. 

 

5. 다윗의 도피 여정의 이야기 가운데 왜 아비가일과 그리고 아히노암의 이야기가 들어 있을까? 

  사실 다윗의 도피 여정은 숨 쉴 틈이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사무엘서 기자는 아비가일의 이야기를 이 사건들 사이에 넣어서 소개해주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돕기 위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붙여주셨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특히 다윗에게는 다윗과 함께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 거물급의 인물들을 붙여주셨다는 것과 아비가일과 같은 현명한 사람을 붙여줌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왕으로서 품위를 갖추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다윗을 돕는 사람이 붙었듯이 듯 자신을 돕는 지혜롭고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를 붙여달라고 말이다. 또 하나는 다윗을 따르던 자들이 먹을 식량문제가 어떻게 공급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즉 다윗과 함께 자들은 장정만 600명이었으니 아마도 여성이나 아이까지 합치면 1,000명이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광야에서 도망다니며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었는가? 그것은 처음에는 베들레헴에 살던 자기의 가족들로부터 공수해 올 수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식량문제는 걱정없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왜나하면 아비가일이 유다지파의 사람이었기에, 그녀가 다윗에게 시집옴으로 그녀의 남편이 가진 재산이 다윗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취한 부인이 바로 '아히노암'이었는데, 이 사람 역시 유다지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주지하시다시피 아비가일은 유다지역인 마온과 갈멜지역에서 가장 부자였었다. 그리고 아히노암 역시 유다지역에 속한 이스르엘의 유력한 사람의 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훗날 다윗이 유다에서 새로운 왕국을 세울 때에 유다 지역의 사람들 모두가 하나같이 다윗을 전적으로 응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21년 12월 28일(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36)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진정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삼상24:1~22)_2021-12-27(월)

https://youtu.be/s8eVEkVVBVY  [혹은 https://tv.naver.com/v/24313395 ]

 

1. 어느날 동굴 안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다윗은 어떻게 했는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울에게 쫓겨 동굴 안쪽에 숨어 있을 때였다. 사울이 용변을 보려고 그 굴 약간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용변을 보기 위해 그는 자신의 왕복 겉옷을 한쪽에 벗어놓고 볼 일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굴 안 쪽에서는 사울을 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윗과 다윗과 함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의 하나가 말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넘긴다고 하셨는데 지금이 그때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사울을 해치지 않았다. 벗어둔 겉옷자락을 살짝 베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인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가 됨이니라(삼상24:6)" 그리고는 다윗은 자기의 사람들에게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용변을 마친 사울은 왕복을 입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용변을 보는 동안에 일어난 일을 전혀 모른 채 말이다. 

 

2. 다윗은 왜 사울을 죽이지 않았는가?

  다윗은 선으로 악을 상대하였다. 사울은 자기를 그렇게 악하게 대했지만 다윗은 사울을 그렇게 대하지 아니했다. 왜 그랬을까? 다윗이 그렇게 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다윗은 사울왕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최초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 자로서 아직도 하나님의 권위가 그에게 있다는 것을 존중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엘리 제사장이 비록 타락한 상태에 있었지만 그가 죽기 전까지는 여전히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권위가 그에게 있었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윗은 사울이 죽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권위가 그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그를 해하려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는 행위라고 여겼다. 둘째, 다윗은 자신이 사울을 심판하는 심판주가 아니며 오직 그를 심판할 수 있는 이는 하나님 뿐이심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굴에서 나온 다윗은 사울왕에게 이렇게 외치며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습니다(삼상24:12)". 그랬다. 그는 자신이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자인 것이지 하나님처럼 사람을 심판하시는 이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셋째, 다윗 자신은 사울의 왕직을 탐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사울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반대로 자신의 왕직을 내려놓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다윗이 자신의 왕직을 넘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동굴에서 자신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살려준 다윗을 통하여 비로소 그는 다윗이 왕직이 탐내고 있는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3. 이때 사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는가?

  그런데 이때였다. 다윗이 하는 모든 말을 들은 사울은 심경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그것은 첫째,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다윗은 죽어야 마땅한 놈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다윗이 도망치는 것에 협조하는 자는 공범자로까지 취급하겠다고 협박하였다. 다윗이 자기의 원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의 선대로 인하여 그의 마음이 확 돌아선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사울은 다윗더러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라고 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잘못하고 있었음을 시인하였다. 둘째, 소리 높여 울면서 자신이 이제까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었음을 고백하였다는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다윗의 마음을 몰라보았던 것이 애절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다윗이 자신을 선대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그러자 그는 다윗을 축복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사울은 다윗이 반드시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자기도 알고 있다고 언급하였고, 이스라엘 나라가 다윗의 손에 의해 견고히 서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 부탁하기를 부디 다윗이 왕이 되더라도 자기의 이름과 자신의 후손을 멸절시키지 않겠노라고 맹세하라고 하였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인 사람의 생각이고 판단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사울은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사울을 선대한 것으로 인하여 사울의 마음이 바뀌어질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선으로 악을 이긴다(갚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때 사울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 다윗을 향하여 자신의 악하고 다윗은 의롭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를 악하게 대하였지만 너는 나를 선으로 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24:17)". 이는 사울은 다윗이 베푼 선을 악한 것으로 갚으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악한 행위를 선으로 대하려 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선'과 '악'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선'과 '악'은 한 마디로 '용서'와 '미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볼 때,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과 사람의 목숨을 '죽이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선'이란 어찌하든지 상대방을 용서해주고 상대방을 살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악'은 어찌하든지 상대방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다윗은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이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를 살펴볼 때,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면서 살리려는 사람이면 선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며, 그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서 죽이려 한다면 그가 바로 악한 사람이라고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다. 

 

5.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자기의 원수에 대해 어떻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9~21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원수를 대하는 방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그렇다. 원수는 우리가 갚아야 할 일이 아니다. 그러면 다시 원수를 낳는 일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수를 갚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닌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원수갚는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맡겨두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 사람을 용서하고 그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축복해 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것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자기의 원수가 주리고 있을 때에 먹여주고, 목말라 하고 있을 때에 그로 하여금 마시게 하는 자가 되는 일이다(롬12:20).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악에게 지지 않는 것이며,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2021년 12월 27일(월)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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