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을 맹추격하던 사울에게 다윗을 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십 황무지에서 다윗을 포위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런데 사울은 그 절호의 기회를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왜 그랬을까? 다윗은 그때 완전히 잡혀 죽을 수 밖에 없는 위기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그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왜 그랬을까? 이 사실의 인과관계만 제대로 파악한다고 하여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 가운에 찾아오는 위기상황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2021-12-24(금) 금요기도회

제목: 사무엘상강해(35) 쫓기는 다윗과 추적하는 사울이 멈춘 그곳, 셀라하마느곳(삼상23:1~2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NwTJ5FYFxck [혹은 https://tv.naver.com/v/24312508 ]

 

1. 들어가며

  다윗의 도피여정 가운데 가장 힘겨웠던 순간이 오늘 본문에 등장한다. 오늘 다윗의 도피여정은 이렇다. '그일라'에서 '십' 황무지로, '십' 황무지에서 '마온' 황무지로 다윗이 도망을 친다. 그런데 아마도 '사면초가'라는 단어가 바로 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다윗은 기브아를 탈출하여 열심히 도망을 쳤다. 사울왕이 이쪽으로 오면 저쪽으로 도망을 쳤고, 사울왕이 저쪽으로 오면 이쪽으로 도망을 쳤다. 하지만 오늘 '마온' 황무지에서 다윗은 더이상 도망갈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그렇다면 이때 다윗은 과연 어떻게 그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오늘 이 장면을 통하여 인간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만났을 때 어떻게 그 위기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것을 직접 경험한 다윗은 거기서 하나님을 노래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2. 자기도 도망치기 바쁜 이 때에 왜 다윗은 그일라 주민을 구출하려고 했는가?

  다윗은 참으로 인정이 많은 사람 같다. 왜냐하면 자기도 도망치기가 바쁜데 그일라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블레셋의 습격을 받아 타작마당의 곡식을 빼았고 가축을 잃어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물었기 때문이다. 그냥 모른 채 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자기 코가 석 자인데 지금 남의 힘든 형편을 돌아볼 때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삼상23:2)" 그러자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을 말리며 말했다. "우리가 지금 유다에 있어도 사울왕의 맹추격에 노출되고 있는 상황인데, 어찌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러 가야 합니까?" 그러자 다윗은 또 하나님께 묻는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또 다시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겨줄 것이다" 그러자 다윗은 두 말 하지 않고 곧바로 헤렛 수풀에서 약 9km 떨어진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 거민들이 빼앗긴 곡식과 가축까지 찾아온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3.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가?

  그렇다면, 다윗은 그일라 주민들을 구출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어떻게 들은 것인가? 다윗이 그때 지시받은 음성은 직접적인 것이었는가 아니면 간접적인 것이었는가? 우리는 이것을 두고 다음과 같은 2가지로 상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정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 음성을 들려주었을 가능성이다. 물론 다윗은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었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을 들었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가능성도 있다. 그것은 대제사장의 판결 흉패에 들어있는 우림과 둠밈으로 물어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제사장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에봇을 입고 도망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자의 견해도 가능하다. 아마도 후자의 가능성이 더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일라에서 아비아달이 입고 있는 에봇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것과 같이 헤렛 수풀에서 그일라 주민을 블레셋에서 구해야 할 것인지 묻는 것이 서로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단,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에는 이것인지 저것인지 둘 중의 하나만 물을 수가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우림과 둠밈으로는 두 가지를 동시에 물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일라 주민을 구출한 다음에, 사울이 내려올 것인지와 동시에 그일라 주민이 다윗을 사울에게 넘길 것인지 두 가지를 물었을 때, 대제사장 아비아달은 한 가지씩만 알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삼상23:11~12). 

 

4. 그일라 주민과 십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에게 넘겨주려고 한 것은 다윗에게 어떤 충격을 안겨 주었는가?

  다윗에게 도피생활은 참으로 힘겨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은 다 다윗을 밀고해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다윗이 처음으로 놉 땅으로 도망쳤을 때에 영문을 모르던 놉 땅의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음식을 주고 골리앗의 칼을 준 사건이 문제가 되었다. 이것을 빌미로 사울은 도엑을 시켜 아히멜렉 제사장과 그의 동네 전체를 전멸시킨 일이 있었다. 그러자 이스라엘 나라 전체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만약 도망치는 다윗을 보호해 주었다가는 동네 전체가 몰살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렇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 그리고 한 번 이러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면 한 치의 앞도 내다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십 사람들은 그때 과연 다윗을 도와주어야 할지 사울을 도와주어야 할지 잘 분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역사의 축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전혀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이전까지 다윗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은 전부다 베냐민지파 사람들이거나 이방인이었다. 그런데 이번은 다른 것이었다. 유다지파 땅에 살던 사람들이 다윗을 밀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는 그일라 거민의 배신이었다. 그일라 거민은 유대지파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다윗도 목숨을 걸고 가서 그들을 블레셋에서 구출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대표인 장로들은 이미 다윗을 사울에게 넘겨주려고 모의하고 있었다. 그러자 다윗이 도망친 곳은 십 황무지였다. 그런데 이곳도 역시 유다지파 사람들이 살고 있던 지역이었다. 사실 사울왕과 십 사람들은 같은 혈족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사울왕에게 기별을 넣었다. 다윗이 지금 자기의 땅에 들어와서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어있다고 말이다. 십 사람들은 유다 사람들이었음에도 북구하고 사울왕에게 "우리가 그를 왕의 손에 넘기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삼상23:20). 이때 다윗의 실망이 얼마나 컸을지를 한 번 생각해 보라. 그러자 이내 다윗은 그곳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고는 광야의 남쪽 마온 황무지로 도망을 친다. 그러자 이내 사울에게 다윗의 거처에 대한 정보가 보고 되었고 사울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다윗을 체포하기 위해 마온으로 향하게 된다. 

 

5. 사울왕이 다윗을 잡지 못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이처럼 사울왕은 이스라엘 영토 내에 모든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다윗을 체포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울은 다윗을 끝내 체포하지 못한다. 왜 그랬을까? 사무엘서 기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삼상23:14)" 그랬다. 아무리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하나님의 막으시면 안 되는 것이다. 반대로 사람의 보기에 절대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문제에 개입하시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내가 하는 일이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일인가 아닌가를 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에 우리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일해주시기 때문이다. 

 

6. 도망치고도 힘겨운 시간에 다윗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준 사건은 무엇이었는가?

  열심히 도망치고 있던 다윗에게 어느날 반가운 한 사람이 찾아온다. 그때는 다윗이 십 광야의 수풀에 있었을 때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왕자 '요나단'이었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장남으로서 차기 왕권을 이어받을 자로서 제일순위자였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자기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누가 왕이 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다윗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가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에 관하여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것은 요나단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특별히 요나단은 다윗을 아주 좋게 보았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될 훌륭한 인물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비록 자기와 20년 이상 나이 차이가 있는데도 그는 다윗을 친구처럼 생각했고 그를 매우 아껴주었다. 그에게는 왕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삶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에도 요나단과 같은 인물이 나라에 많이 있으면 그 나라는 복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요나단이 다윗이 숨어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비상상황인지라 요나단도 그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냥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주고 가려고 왔던 것이다. 그가 다윗에게 전해주려고 한 소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삼상23:17). 그랬다. 도망치기에 바쁘고 힘겨웠던 그 시기에 이 소식은 다윗에게 가물에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더욱 더 용기를 내게 된다. 

 

7. 마온 황무지에서 다윗이 겪은 절대절명의 순간은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인가?

  그런데 다윗의 도피여정 가운데 가장 심각한 상황이 찾아오고 있었다. 다윗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거기는 십 황무지였다. 여기서 '황무지'라는 말은 그곳이 뻥 뚫려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나무가 없어 숨을 곳이 없는 장소가 바로 황무지이기 때문이다. 사실 다윗도 수풀이나 요새에 거주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다윗의 거처를 밀고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다윗도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곳이 바로 마온 황무지였던 것이다. 반대로 사울왕에 있어서 그 장소는 다윗을 찾아내어 체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는 장소가 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황무지에는 계곡들이 많이 있어서 이쪽 계곡에서 저쪽 계속까지 건너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거리도 가깝지 않을 뿐더러, 만약 계곡을 내려가서 상대편 지역으로 올라가다보면, 적을 향하여 올라가는 형국이 되는데 그것은 전세에도 불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울왕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빙 돌아가 다윗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쪽 방향으로 돌아서 가보면 다윗은 어느새 저 반대편에 가 있었다. 그러다가 사울왕이 이제 양동작전을 펴기 시작한다. 그러자 결국 다윗도 에워싸이게 되었다. 그러자 다윗은 급히 계곡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사울도 따라서 내려가면 다윗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사울에게 급히 전령이 찾아왔다. "왕이시여, 급히 오소서. 지금 블레셋 사람들이 이 땅을 침노하고 있나이다."(삼상23:27) 아무리 다윗을 잡고야 말겠다고 하는 투지로 불타오르고 있는 사울왕이지만 나라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기에 그 순간 그는 다윗을 쫓는 것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블레셋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코 앞에 있어 곧 잡을 수 있는 다윗이었지만 사울왕은 그곳을 떠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자 다윗은 일보직전에 놓임을 받게 된다. 그러자 다윗은 그곳 이름을 "셀라하마느곳"이라고 칭하게 된다. 그 뜻은 "분리의 바위"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자기와 사울왕을 분리시켜주셨다는 뜻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날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다윗은 그날 잡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블레셋이 쳐들어옴에 따라 사울왕도 다윗을 어쩌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가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피할 길도 마련해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사람이요 불순종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죄없는 다윗을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경험을 한 후에 하나님만이 자신의 온전한 피난처요 요새라는 것을 노래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것이 시편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시91:2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8. 나오며

  그렇다. 하나님이 모든 일들을 주관하신다. 그분의 눈에 들면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당신의 사람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고 경외해야 할 분은 다른 분이 아니다. 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자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다윗은 위기상황에서도 그일라 주민을 구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어찌 했는가? 그는 그분의 뜻에 순종하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도 과연 다윗과 같은 삶인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만약 아무리 나 자신이 보기에 멋진 일이고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은 다 허물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아니 될 일도 되어지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초자연적인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물질의세계를 영의 세계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은 영의 세계에서 왕 중의 왕이시다. 그분의 말씀에 굴복하지 아니할 존재는 그 어떤 것도 없으며, 그분의 명령 하나면 모든 것이 중지되고 그분의 말씀대로 다시 셋팅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노력해야 한다. 그분만이 우리의 피난처와 산성이요 요새이시며 피할 바위이시기 때문이다(시18:2). 

 

시18:1-6
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3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4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5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6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2021년 12월 24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34) 놉 땅의 제사장 학살사건이 들려주는 영적인 교훈(삼상22:1~23)_2021-12-24(금)

https://youtu.be/WEr6r1v5Fl4 [혹은 https://tv.naver.com/v/24312273 ]

 

1.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악령에 속한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나님께 속한 다윗과 악령에 속한 사울은 갈수록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곰곰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속한 사람과 악령에 속한 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성경에 기록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서 양과 목자의 비유의 말씀을 하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그렇다. 악령 곧 사탄마귀가 온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명시키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였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신하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리고 자초지종도 파악하지 않은 채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의 집을 반역의 공모자로 만들어 하루 아침에 몰살시켰기 때문이다. 젖먹는 아이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어떠한가? 사람을 죽이는 에 혈안이 되어있는 것이라 오히려 사람을 살리게 된다. 그리고 생명이 더 풍성하도록 만들어 준다. 다윗은 언제나 그랬다. 그는 남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2. 사람은 왜 달라지지 않고 구원받지 못하는가?

  사람은 잘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달라지는 사람이 있기는 있다. 그런데 이때 변화되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달라지지 아니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꾸 변명을 하거나 남을 탓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내 회개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당신 앞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기만 하면, 징계를 내리다가도 금방 그것을 철회하시며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끝내 회개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때 사람이 달라지지 아니하는 이유에는 명예욕과 권력욕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일 수도 있고, 시기질투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 특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회개하지 않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사무엘상하의 말씀이 사울왕과 다윗왕을 비교하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과 회개하는 사람의 차이를 보여주려는 의도에서다. 그런데 사울왕이나 다윗왕이나 범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다윗왕이 더 큰 죄를 범했다. 하지만 사울왕은 이유를 대면서 변명하였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끝내 회개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도 등장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삶에 무엇이 잘못되었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항상 하는 행동이 있었다. 그것은 그 죄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기꺼이 인정하고 그 잘못으로부터 돌이켰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똑같은 죄를 또 다시 범하지 않았다. 

 

3. 사무엘상 22장에서 다윗과 사울의 행동이 보여주는 각각의 특징은 무엇인가?

  다윗은 도망치는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부모와 소외되고 환난당한 자를 챙기는 사람이었다(삼상22:1~2). 왜냐하면 그의 부모는 사울이 다윗을 찾지 못했을 경우에는 보복살인을 할 대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울시대에는 의외로 압제를 당하는 자들도 있었고, 원통한 일을 당한 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보니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다는 소문이 났을 때 모두들 그리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왕에게 희망을 걸어본 것이다. 그런데 사울은 달랐다. 자기 밑에 사람들을 기용한 후에는 그들을 늘 이용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자는 자기를 반대하는 자요 역적이라는 것을 계속해셔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자기 밑에 신하들을 임명할 때 베냐민 지파의 사람 일색으로 배치한 다음, 그들을 향해서는 왜 나에게 충성하지 않느냐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삼상22:7~8). 사울은 이전에 이미 백성들의 밭과 포도원을 빼앗아 베냐민 사람에게 주었다. 그리고 천부장 백부장도 베냐민지파 사람으로 임명을 한 것이다. 그러므므로  자기를 돕지 않고 다윗을 돕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가만 두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4. 악한 자 도엑이 저지른 죄는 대체 무엇인가?

  그때였다. 사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사울의 신하들 중에 한 명이었던 에돔 사람 도엑이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다윗의 공모자고 고발하게 된다. 왜냐하면 다윗이 혈혈단신으로 아히멜렉을 찾아왔을 때에 일어난 일을 그가 보았는데, 그는 모든 일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준 것만 보고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울은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자기에게로 불렀다. 그리고 사울은 그가 다윗과 공모하여 다윗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을 여쭈어본 것은 자신을 대적한 일이고 반역한 일이라고 몰아부쳤다. 그러나 아히멜렉은 그간에 돌아가고 있었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아는 바에 따라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왕으로 하여금 자신을 공모자로 몰아가지 말 것을 당부했다. 실제로 아히멜렉 자신은 크고 작은 일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울은 호위병들을 시켜 돌아가는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아히멜렉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사울은 도엑을 지켜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한다. 그러자 도엑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였으니, 그날 에봇입은 자 85명을 죽였고, 더 나아가 제사장의 성읍이었던 놉 땅에 가서 그들의 자식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아기까지 싸그리 죽이고 말았다. 그것도 가축까지 말이다(삼상22:18~19). 그러자 훗날 다윗은 도엑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노래를 지어 남겨놓았으니, 시편 17편, 35편, 64편, 109편, 140편 등은 도엑의 일로 인하여 다윗이 지었던 시편들이다.  

 

5. 다윗은 놉 땅의 제사장들이 죽임당했던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

  다윗은 얼마후 놉 땅의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했고 놉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이는 아히멜렉의 아들이었던 아비아달이 난을 피하여 다윗에게도 도망쳐 왔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윗은 그에게 말했다. "네 아버지의 집의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은 나의 탓이로다(내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삼상22:22~23)" 그렇다. 다윗은 놉 땅의 제사장들이 죽게 된 것을 그들의 잘못만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판단하였고 그 일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다윗이 지은 죄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거짓증거의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날 다윗은 사울왕의 특명을 받고 아히멜렉에게로 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거짓증거는 이것보다도 사건의 위중성에 있는 바, 다윗이 저지른 완전한 범죄라고도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은 부득이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거짓증거의 죄를 그냥 넘어가지는 않으셨다. 그렇다면 실제로 놉 땅의 제사장들이 죽임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얼핏 보기에는 사울왕의 잘못된 판단, 다윗의 빌미 제공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실은 아히멜렉의 4대 조상이었던 엘리제사장 때에 있었던 바, 엘리와 그리고 그의 두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장차 하나님께서 엘리 집안에서 노인이 없게 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삼상2:31~32). 그렇다.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려면  그에게 회개가 동반되지 않았을 때다. 하지만 아히멜렉은 자기도 몰랐지만 결국 다윗을 돕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는 엘리 제사장 때에 이미 예고되어진 말씀이 정말 비참한 상황에서 성취된 것이 아니라 의롭게 성취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은 순교의 반열에 들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블레셋이 쳐들어와서 죽었다고 해보자. 얼마나 비참한 죽음이었겠는가? 그러므로 혹시 우리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되었다고 해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 회개하고 의롭게 살아간다면 나중 심판 때에도 하나님의 긍휼이 있을 것이기 분명하다. 

 

2021년 12월 24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33) 다윗에게 있었던 숨기고 싶었던 부끄러운 일들(삼상21:1~15)_2021-12-23(목)

https://youtu.be/ge5I09ClWyU [혹은 https://tv.naver.com/v/24312015 ]

 

1. 사울왕으로부터 쫓기게 된 다윗이 요나단과 작별한 후에 찾아온 곳은 어디였는가?

  사울은 자기의 왕권을 다윗에게 넘겨주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윗을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역행하는 것이었고 자기 아들 요나단의 뜻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는데 자신의 인생의 모든 것을 다 투자한다. 그의 마지막 10년의 인생을 여기에 바친 것이다. 그러자 뒤이어 사울왕의 의중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게 된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곁에서 떠나보내기로 결정한다. 에셀 바위 옆에서 그렇게 둘은 서럽게 울고 헤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때 다윗은 어디로 도망쳤을가? 그가 찾아간 곳은 따로 있었다. 그곳은 대제사장 아히멜렉이 제사장으로 있는 놉 땅이었다.

 

2. 왜 다윗은 대제사장을 제일 먼저 찾아갔는가?

  이제 요나단과 헤어진 다윗은 실로 도피여정을 시작한다. 그런데 그가 제일 처음 선택하여 찾아간 곳은 놉 땅이었다. 왜냐하면 여기에 대제사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다윗은 도피 여정을 시작하면서 곧장 자기의 부모가 있는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놉 땅으로 갔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중에 놉 땅에 있었던 일을 지켜보고 사울에게 보고했던 도엑의 말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 이유가 큰데, 그 첫 번째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께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 뜻을 여쭈어 보기 위해 다윗은 일부러 그곳에 간 것이다(삼상22:10). 그렇다. 다윗은 그간 국가의 중대한 일이나 전쟁을 하기 전에 늘 하나님의 뜻을 묻고 행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그가 선택한 것은 제사장에게 찾아가는 묻는 일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그곳에 간 김에 먹을 것을 얻기 위함도 있었다(삼상22:10, 21:3). 그는 배가 고팠가 때문이다. 3일 동안 먹지 못했던 것이다(삼상21:5). 사실 그의 도피는 힘겨운 것이었다. 이 일이 바로 있기 전에 요나단에게도 죽음이 한 걸음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삼상20:3). 그처럼 다윗은 위험하고도 급박한 상황 가운데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도망칠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급히 도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를 따르는 몇몇 소년들과 함께 아무도 몰래 기브아를 떠났던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그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혹시 칼이나 창과 같은 무기가 있으면 그것을 얻으려고 놉 땅에 있는 제사장을 찾아간 것이다. 

 

3. 다윗이 얻어 먹은 음식은 과연 다윗이 먹어도 괜찮은 것이었는가?

  그런데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것은 과연 다윗이 아히멜렉 제사장으로부터 받아 먹은 음식(빵)이 다윗이 먹기에 합당한 음식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그때 자기의 손 안에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일반적인 떡은 없었고 오직 안식일에서 성소에서 물려 내온 떡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다(삼상21:4,6). 사실 율법 규정을 보면, 제사장이 성소에서 물려 낸 떡 곧 진설병은 오직 제사장과 제사장의 가족만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레24:5~9). 하지만 다윗은 유다 지파의 사람으로서 제사장의 지파가 아니었기에 그 떡을 먹을 조건을 갖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그의 소년들은 제사장으로부터 그 떡을 받아서 먹었던 것이다(마12:3~7, 막2:26, 눅6:3~4).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행위를 범죄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과연 이때 다윗은 율법을 어기고 만 것인가? 아니면 이러한 경우는 부득이한 경우로서 그래도 받아 줄 만한 특별한 종류의 일인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율법의 규정 자체로만 본다면 다윗이 진설병을 먹은 것은 율법을 어긴 것이다. 하지만 안식일이나 혹은 다른 일들이라도 사람을 살리는 일인 경우 용납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다윗이 이러한 행위에 죄가 없는 것임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긍휼의 차원에서 보면 다윗의 행동은 그래도 받아 줄 만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는 동물이 구덩이에 빠져도 건져내 살려내는데,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갈 때에는 우선 살려 놓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율법의 규정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때 다윗은 진설병 음식 외에도 엘리멜렉 제사장으로부터 무기도 얻게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몇 년 전 다윗은 블레셋과 전투할 때에 물매 돌로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그의 칼을 뽑아 그의 목을 벤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골리앗의 칼을 전리품으로 습득하여 자기 집에 갔다 놓았다(삼상17:54). 그것이 어떻게 보자기에 싸여서 성소에 보관되어 있었는지 그 과정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때 이후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왕에게 드렸거나 아니면 하나님께 드림으로 놉 땅의 제사장이 보관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것이 다시 다윗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진심으로 드리면,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꼭 기억해 놓으셨다가 나중에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에 도로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여기서도 알 수가 있다. 

 

4. 다윗이 아히멜렉 제사장을 속여 그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묻고 식량을 얻고 무기를 얻었던 것은 괜찮은 일인가?

  다윗이 이히멜렉 제사장에게 혈혈단신으로 왔을 때에 제사장이 그에게 물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로 홀로 왔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왕이 내게 어떤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 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이다(삼상21:2). 그런데 사실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다윗은 자신이 도망자인 것을 숨기기 위해서 일부러 둘러서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윗이 이렇게 말한 것은 과연 죄가 되는 것인가? 어찌 보면, 이것을 두고 다윗이 지혜롭게 답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엤지만, 그것은 사울왕이 실제로 한 말이 아니라 다윗이 지어낸 말이기 때문에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다윗의 이 거짓말로 인하여, 놉 땅에 있는 제사장들 85명과 제사장의 아들 딸들이 죽어야 했으며, 가축까지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은 그때 놉 땅에 있는 아히멜렉의 제사장이 가문이 전멸을 당하시디피 하였고, 이때에 죽은 사람들 중에는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까지도 다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삼상22:18~19). 그러므로 다윗이 한 말을 두고 결코 잘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십계명 중에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말씀에 완전히 저촉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법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지 사람을 죽게 하려고 주어진 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5. 다윗이 놉 다음에 도피처로 찾아간 곳은 어디였는가?

  다윗이 놉 땅에서 아히멜렉 제사장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였다. 마침 그곳에 '도엑'이라는 사울의 목자장이 어떤 일로 와 있었다. 그러므로 아히멜렉 제사장이 다윗에게 베풀어 준 일을 도엑은 고스란히 보게 된다. 그리고 다윗도 눈치로 그가 사울왕에게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보고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더이상 이스라엘 영토 내에서 자신을 숨길 장소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자 그는 이웃나라로 망명을 시도한다. 이스라엘에 근접해 있는 블레셋 나라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가서 망명을 시도한 것이다(삼상21:10).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블레셋의 사람들은 다윗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 소문이 이미 다 퍼져 있다는 것을 다윗도 알게 된 것이다. 그러자 다윗은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간파하고는 즉시 미친 사람 흉내를 내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대문짝에 자신의 몸을 긁적거리면서 침을 흘리다가 미친 사람 취급받고 왕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갖고 있어야 할 체면과 품위를 그곳에서 완전하게 구기게 된다. 그는 이렇게 행동하지 말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는 몇 년전만 해도 가드의 거인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싸우면서 무슨 말을 했는가? 어찌 할례받지 아니한 이방인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도록 내버려두느냐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번에는 다윗이 그러한 대적의 왕을 찾아가서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일을 두고두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하고 또 회개하였다는 것을 그가 남긴 시편 34편과 52편과 56편을 보고 알 수 있다. 이처럼 다윗에게도 숨기고픈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던 것이다. 어찌 사람인데 모든 것이 다 완전할 수 있겠는가! 

 

2021년 12월 23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상강해(32) 요나단은 왜 그토록 다윗을 아끼고 지키고 사랑했는가(삼상20:1~17)_2021-12-22(수)

https://youtu.be/Hckt1EiX5VE

 

1. 사울왕이 사무엘이 있는 라마 나욧까지 쫓아오자 다윗은 어디로 도망쳤는가?

  사울왕이 자신의 아들과 요나단과 자신의 모든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했을 때, 요나단은 왜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에게 왜 까닭없이 다윗을 죽이려 하느냐면서 반문한다. 왜냐하면 다윗은 왕의 신하로서 범죄한 바가 없으며, 왕에게도 죄를 짓지 아니하였고, 왕의 말에 충성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울왕은 자기 집으로 간 다윗을 제거하려고 암살조를 보낸다. 그러자 다윗은 아내인 미갈의 도움을 받아 사무엘이 거주하고 있는 라마로 피신하게 된다. 그러자 사울은 또다시 거기에도 암살조를 보낸다. 그러자 이제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그 행위를 막으셨으니 보낸 암살조가 라마 나욧에 도착하기만 하면 다들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사울이 직접 라마 나욧으로 가는데 그러자 이번에도 역시 하나님의 영이 역시 사울에게도 임하여 하루 밤낮을 누워서 예언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윗은 그 틈을 이용하여 왕의 궁궐이 있는 기브아로 가서 요나단을 만난다. 그리고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한다. 

 

2.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요나단에게 다윗이 제안했던 것은 무엇인가?

  요나단을 만난 다윗은 자신의 목숨이 경각간에 달려 있음을 고한다. 그러자 아직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요나단에게 다윗이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그건 매월 초하루가 되면 왕의 수뇌부(왕, 왕자, 군대장관, 천부장)의 식사 자리가 있을 텐데, 그때 자신이 고향 베들레헴에 매년제를 드리려고 가겠다고 말하고 갔다고 대신 이야기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의 반응이 나올 것인데 그것을 보라는 것이다. 그러자 상황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짐작한 요나단은 우선 들에 있는 에셀 바위 곁에 다윗을 피신시킨 다음, 왕이 오면 자신이 왕의 마음을 살펴보고, 만약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면 도망치도록 사인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그 암호는 요나단이 화살을 쏜 후 병기든 소년에게 화살이 더 멀리 날아갔다고 말하면 도망칠 것이요, 그 앞에 떨어졌다고 하면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3. 사울왕은 요나단의 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러자 사울왕이 돌아왔고 초하루 식사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다윗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하루는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그 다음 날에 있는 초하루 식사에 또 다윗이 불참했다. 그러자 사울은 첫째 날은 그냥 지나갔지만 둘째 날에는 다윗의 불참 여부를 요나단에게 물어본다. 그러자 요나단은 다윗이 이차저차해서 자신이 다녀오도록 했노라고 말씀드린다. 그러자 그때 나온 사울왕의 반응은 요나단을 많이 당황스럽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왕이 자기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이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감싸고 도는 것이 너의 수치와 너의 어머니의 수치가 된다는 것을 네가 그토록 알지 못한다는 말이냐? 이새의 아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너와 너의 왕국이 든든히 서지 못하지 않겠느냐?"(삼상20:30~31) 이는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었다. 그러자 요나단은 다윗을 사울왕으로부터 떠나갈 수 있도록 허용을 해 준다. 그리고 화살을 멀리 쏜다. 그리고 병기든 자를 성안으로 돌려보낸 다음, 요나단은 다윗과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을 하게 된다. 둘은 많이 울었고 다윗은 더 울었다. 아마도 다윗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경우이지만 자신의 마음을 기꺼이 알아주고 피할 길까지 마련해 준 요나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복받쳐 올라왔을 것이다. 그리고 요나단은 자기 나라에 있는 훌륭한 장수 하나를 자기 곁에서 떠나보내야 하는 안타까움 그리고 언제 다시 볼 수 없는 불투명한 상황에서 다윗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으로 울었을 것이다. 

 

4. 요나단은 왜 다윗을 끝까지 도와주는 사람이 되었는가?

  사실 에셀 바위 곁에서 헤어지게 된 요나단과 다윗은 약 10년 동안 못나게 되는데 단 한 번 잠깐 십 광야의 황무지에서 둘이 만나게 되었을 뿐(삼상23:15~17), 요나단이 죽기까지 다윗과 요나단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요나단은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사실 요나단에게 다윗은 차기 정권의 최대 경쟁자였다. 그리고 자신이 그때 가지고 있는 권한과 능력으로 얼마든지 다윗을 체포하여 아버지께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요나단은 끝까지 다윗을 보호하고 지켜 주고 그를 도와준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는지 명확한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요나단이 한 말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그는 한 마디로 자신이 왜 지금 왕자의 위치에 놓여 있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던 같아 보인다. 그는 첫째, 현재 절대 권력과 야심을 가진 사울로부터 정권을 다윗에게 안정되게 이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삼상23:17). 둘째, 자신의 사명과 본분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다윗에게 자기가 현재 다윗에게 인자를 베풀어 준 것처럼 훗날에도 다윗이 자신을 죽이지 말 것을 부탁한다(삼상20:14). 그리고 다윗이 어느 날 다윗의 모든 대적들을 다 멸할 때에도 자기와 자기의 후손에 대한 인자함(헤쎄드)를 잊지 말라고 부탁한 것이다(삼상20:15). 왜냐하면 지금 자신은 다윗을 살려 내어 차기 정권을 이양받을 왕이 되게 하는데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알려 주는 영적인 비밀은 무엇인가?

  이상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적인 비밀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사명자는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 돕는 사람을 붙여서 그로 하여금 살게 하기 때문이다. 사울은 그토록 다윗을 죽이려고 안달이 났지만 사울의 딸 미갈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끝까지 다윗 편이 되어 주었던 것은 이러한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둘째, 사명자는 너무 외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명자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반드시 누군가 협력자가 필요한데 이러한 것은 다 하나님께서 사명자에게 붙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명자가 홀로 어떤 일을 담당하고 있다고 너무 힘들어할 필요는 없다. 다윗의 경우를 보라. 다윗에게는 언제나 돕는 자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은 사명자 주위에는 그를 도와줄 사람을 언제나 배치해 준다는 것이다. 다윗의 경우에는 먼저는 사울의 가족들이 그를 지켜 주었고 나중에 다윗의 가족들이 그를 지켜 주었으며, 사울의 신하들도 다윗을 지켜 주었던 것이다.

 

2021년 12월 22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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