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분열로 아파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분열을 이겨내게 하는 최고의 묘약은 무엇인가? 바울은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라고 제시한다. 대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무엇을 처리하셨기에, 바울은 교회분열의의 해결방안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인가? 거기에는 바울 자신이 선교정책으로 삼았던 방식이 나오게 된 중요한 사건이 등장하게 된다. 이제 바울의 간증의 들어보자. 그래서 우리에게도 분열의 아픔이 있다면 이것으로 실마리를 찾아보자.

 

2021-04-21(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05)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10가지 일들(갈2:1~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r8BxPlm8xlU   [혹은 https://tv.naver.com/v/19749679  ] 

 

 

1. 들어가며

  고린도교회 안에는 10가지 중요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자신이 고린도교회를 개척하고 1년6개월동안 머물러 심혈을 기울였던 고린도교회가 어지럽혀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써 보낸다. 이 편지는 고린도교회를 사랑하는 바울의 마음이 배어 있고,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하는 아비의 마음이 묻어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발생한 갖가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을까? 그중에 첫번째 문제는 "분열"의 문제였다. 바울은 교회가 이미 4개의 파로 나뉘어져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분열과 파벌을 잠재우고 교회가 하나될 수 있도록 하나의 묘안을 제시해야 했다. 그런데 그가 제시한 방법을 들었을 때에 사실 아무도 댓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바울의 선교관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고린도교회에 발생한 분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이 제시한 해결책으로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바울은 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하려고 노력했으며, 그것이 분열의 아픔을 딛고 하나되게 해주는 묘책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특별히 오늘은 고린도교회가 "고린도"라는 항구도시에 세워지게 된 배경을 살펴보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처리하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을 성령 안에서 하나되게 하는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오늘도 성령의 놀라운 계시가 이 메시지를 듣는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길 바란다. 

 

2. 고린도 교회의 분열의 문제를 바울은 어떻게 해결했는가?

  바울은 글로에에 속한 사람으로부터 고린도교회의 분열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자 바울은 우선적으로 고린도교회을 칭찬하면서 그들의 분쟁에 문제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기들을 지도해준 지도자를 따라 4개의 분파로 분열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교회를 개척했던 바울을 따르는 바울파, 바울의 뒤를 이어 부임하여 교회를 성장시킨 아볼로파,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베드로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게바파, 그리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리스도파, 이렇게 4개의 분파로 갈리어 있었다. 모두들 자기들을 가르치고 그리고 자기들에게 세례를 준 노선을 따라 분파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자 바울은 어떻게 한 몸인 교회가 여러 개로 나뉠 수 있느냐며 책망한다. 그리고 자신은 고린도교회에 간 것은 자신이 세례를 주려고 간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러 간 것이며, 더욱이 고린도교회에서 직접 세례를 준 것은 몇 명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비록 자신이 세례를 주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이라 말한다. 물론 아볼파도 그랬고, 게파파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혹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 다른 분파로 분열할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분모 곧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되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러면서 교회가 하나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아니고서 교회는 분열과 분파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요했다. 

 

3.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교만을 어떻게 잠재웠는가?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어떻게 탄생했으며 또한 고린도교회의 성도의 구성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언급하면서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도 자신을 자랑할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언급한다. 그들이 고린도교회에서 자신을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은 자기들은 원래 별 볼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을 자녀가 될 수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사를 풍성히 부어주시고,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신분이나 직업이나 사회적으로 고귀한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인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린도"라는 도시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알아야 한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그리스의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와 더불어 고린도는 그리스에 속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로마는 이 세 도시들을 묶어서 하나의 속주로 다스렸는데, 그 속주의 이름을 "아가야"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아가야의 수도가 바로 고린도였던 것이다. 당시 인구 40만의 거대도시가 바로 고린도였다. 하지만 고린도가 이렇게 큰 도시가 되었던 것은 얼마 안 되었다. 왜냐하면 로마가 고린도를 쳐들어 왔을 때에 고린도가 로마에 끝까지 항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가 완전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로마가 전쟁할 때에는 조금은 신사적이었다. 공격하려는 도시가 항복해오면 그 도시를 파괴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치를 허락했다. 다만 속주로서 통치해야 했기에, 통치자를 그리 보내 다스렸고, 그 도시에는 세금을 부과했다. 그런데 고린도는 그러한 것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자 로마는 항복하지 않는 고린도를 철저히 파괴했다. 정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도록 파괴시켜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도시에 살아남은 자들은 다 포로로 잡아가서 노예로 넘거버렸다. 그래서 수백년동안 고린도는 폐허도시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로마가 전쟁을 마친 퇴역군인들을 위해, 잿더미로 변한 고린도를 그들 처소로 허용해주었다. 그러자 전쟁 때마다 텐트를 치고 다리를 놓았던 퇴역군인들은 자신이 평소 때 하던 기술들을 총동원하여 고린도를 번드르한 도시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고린도 도시는 아름다웠지만 대신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하층민일 수밖에 없었다. 장교가 아닌 퇴역 말단 군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왜 그들이 그렇게 교만해졌는지를 책망하면서, 그들이 원래 어떤 사람들이었지를 상기시켰다. 그들을 첫째로, 높은 헬라철학을 공부한 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들은 지위가 높은 권세있는 정치가들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그들은 상류계급에 속한 귀족출신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지혜롭지도 못하고 가진 것도 별도 없고 높은 신분이나 지위도 가지지 못한 자들을 선택하시어 지혜롭고 강하고 가지고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랑할 것이 있다면 천하고 멸시받고 가진 것 없었던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고, 은사를 풍성히 주신 예수님만 자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인 고린도전서 1장 하반부의 말씀이다.

 

4. 바울은 왜 고린도에 갔을 때에 약해지고 두려워하고 떨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고린도에 갔을 때에 약해졌고 두려워했으며 심지어 떨었다고 증언하였다. 왜 그랬을까?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선교철학 곧 복음을 전할 때에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만을 증거하기로 했다는 그의 철학이 나오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도 고린도지역에 전도하러 가기 전까지 그는 은근히 자신의 탁월한 언변능력과 헬라철학에 대한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였던 자였기 때문이다. 사실 바울이 1차전도여행을 갔을 때 그는 거의를 교회를 세우지 못했다. 2차전도여행을 하면서 드디어 하나둘씩 교회를 개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다 작았다. 그런데 2차전도여행 때에 엄청난 규모의 교회를 개척하게 되는데, 그 교회가 바로 "고린도교회"라는 교회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해서 고린도에서 상당히 큰 선교의 열매를 맺게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바울이 고린도에 갔을 때에 약해졌고 두려웠고 떨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고린도에 오기 직전 바울은 아덴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 깨달은 교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헬라철학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스토아철학자도 있었고 에피쿠로스철학자들도 있었기에,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창조의 하나님을 고상하게 전하는 방식을 취했었다. 왜냐하면 헬라철학자들은 만물의 기원에 관하여 아주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 실패였다. 그렇게 유명한 헬라철학자들의 도시에서 전도의 열매를 거의 맺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아덴에 가기 전에 머물렀던 지역들은 작은 도시였지만 그래도 거의가 다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2차전도여행하면서 교회를 세우지 못한 곳은 오직 아덴(아테네) 뿐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때에 비로소 결심을 하게 된다. 고상한 척하며 자신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을 자랑하는 전도방식의 복음전파는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가 다음으로 선택한 고린도에 왔을 때에는 걱정이 많이 되었다. 왜냐하면 헬라의 도시에 왔으나 헬라철학을 이야기하자니 선교의 열매가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구속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단도직입적으로 전하자니, 과연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나타나지 않던 주께서 밤의 환상 중에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바울을 격려하는 것이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며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18:9~10). 그러자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가 누군지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만을 중점적으로 증거하였던 것이다. 그랬더니 정말 1년 6개월 만에 고린도 지역에 엄청난 규모의 크기의 교회를 개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5.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10가지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전했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가 누군지에 관해서는 공부를 했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에서 이루신 일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지난 시간에도 잠깐 살펴보았지만 바울은 "십자가"의 이미를 의무나 사명 그리고 고난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소극적인 것들을 처리하는 도구이자 장소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와 옛사람과 옛창조에 속한 것들을 포함하여 약 10가지를 끝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와 옛사람과 옛창조에 속한 것들이 살아있는 한 사람들은 자기자랑고 교만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처리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고 실천하는 자들 중에는 결코 자신을 자랑하거나 교만한 사람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와 옛사람과 옛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끝내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가져가셔서  끝내버린 것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죄와 죄들을 끝내셨다(롬7:18~20, 8:1~2, 6:22, 엡1:7, 골1:14). 예수께서는 자기의 육신에 죄를 정한 후에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음에 넘기셨다(롬8:1~2). 한 마디로 죄값을 치르신 것이다. 그럼 그분이 치르신 죄값은 자기의 죄값이었는가? 누구의 죄값이었는가? 그것은 세례요한의 안수를 통해 전가받았던 인류의 죄값이었다(요1:29).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류의 죄값을 처리하는 것이었다(롬6:23, 고전15:3~4).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누구나 둘째사망의 고통이 주어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이미 그 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류에게 들어온 죄된 본성(원죄)으로부터서도 해방을 받는다(롬6:22). 왜냐하면 죄된 본성보다 더 강력한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에 보내셔서 이기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성령을 좇아 행하는 모든 자들을 주님은 죄된 본성에서 해방시키시고 계신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길 수 있게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이다(롬8:1~2). 그래서 모든 성도들은 누구나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죄들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때에 죄들이 용서되기 때문이다(엡1:7, 골1:14)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사탄마귀와 귀신들을 처리하셨다(요일3:8, 히2:14, 골2:15).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셨다. 왜냐하면 죄없는 예수님을 그가 십자가에서 불법적으로 죽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탄의 불법적인 행동은 결국 자신이 가진 사망권세를 내어놓게 하였다(히2:14). 그래서 그때 이후 사탄마귀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예수님께 빼았기게 되었고 그것을 넘겨받은 예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갖고 계신다(계1:17~18). 정확히 말하면 그날 사탄이 죽인 것이 오히려 자기 자신이었다. 그리고 사탄마귀는 저 지구 땅속 음부로 쫓겨난다. 또한 그날 십자가 주위에 몰려들었던 귀신들도 자신의 최고사령관이 예수님께 패하였기 때문에 무장해제당하고 만다(골2:15). 그러자 예수께서는 귀신을 쫓는 권세를 이제는 믿는 자들에게 내어주셨다(막16:17~18). 그래서 모든 믿는 자들은 위임받은 예수님의 권세를 이용하여 귀신을 쫓을 수가 있게 되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그날 십자가에서 세상도 함께 처리하셨다(요일2:16, 갈6:14, 요일5:19,4). 사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말을 들어 그의 말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던 세상 모든 만물에 대한 권한은 마귀에게 넘어가고 말았다(눅4:4). 그때 이후 온 세상은 마귀 수중에 들어갔다(요일5:18).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귀를 처단하심으로 세상도 같이 처리하셨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와 이생의 자랑이라는 것들인데 이 모든 것이 그날 처리됨으로 이런 것들이 더이상 성도들을 주장할 수 없게 하신 것이다(요일2:16). 

  넷째,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육신을 처리하셨다(롬8:3~4, 5~6, 7~8, 12~13, 갈5:16~17). 예수께서는 자기의 몸에 인류의 죄를 전가받으신 후에 십자가로 가져가셨고 그 몸을 죽음에 넘기우셨다. 그리하여 죄된 본성으로 장악된 육신은 죽음에 넘어갔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의 육신은 더이상 우리 자신을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도적으로 육신에게 내주기 전까지, 육신은 결코 우리의 몸을 함부로 주장할 수 없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육신을 자신의 주인으로 알고 따라간다면 그는 지금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는 계속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될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처리된 육신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성전삼고 거하시는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갈5:16~17).

  다섯째, 그리스도께서는 옛사람도 십자가에서 함께 처리하셨다(롬6:6, 엡4:22~24). 옛사람이란 타락한 본성을 따라 행하는 옛날의 나 자신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성령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날 십자가에 자신의 육신을 못박으셨다. 그리고 그 육신이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킨다. 타락한 본성을 따라사는 옛날의 우리 자신, 그것이 옛사람인데, 예수께서 그날 옛사람도 같이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그래서 그날 못박혀 죽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나 새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우리는 새 사람이다. 

  여섯째, 그리스도께서는 그때 자아도 처리하셨다(갈2:20, 마16:24~25). 여기서 '자아'란 사람의 혼을 가리킨다. 그런데 뱀이 하와를 꼬일 때에 혼이 어떻게 되었는가? 그만 사탄의 말에 미혹되어 비정상적으로 커졌다. 그래서 뱀의 말을 순종하고 말았다. 그러자 인간의 자아도 뱀에게 속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는 '자아' 곧 인간의 혼은 지금도 더러운 본성이 지배하는 육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실 때에 우리의 자아도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셨다는 것을 믿으으로 주장해야 한다(갈2:20). 타락한 혼도 같이 못박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 자아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고로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자기자신을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려는 혼에게 자신을 내어줄 것이 아니다(마16:24~25). 그러면 이미 죽은 자아를 다시 살려내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일곱째,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처리하셨다(갈3:19, 13, 23, 4:9~11, 롬7:1~2). 다시 말해 그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따라 자기자신을 죄값으로 내어주셨다. 그래서 죄값을 치르셨다. 이것은 결국 율법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죄값은 이미 치러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에 우리 자신도 죽었다. 그러므로 이미 죽은 시체를 율법이 더이상 정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강하고 힘센 율법이라도 죽은 시체에게까지 율법의 힘을 드리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율법은 사람이 살아있을 때에만 적용되는 법이기 때문이다(롬7:1~2).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르는 순간 우리도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을 때에 율법으로부터 우리도 자유케 된 것이다. 

  여덟째,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옛 창조를 끝내셨다(고후5:17, 계21:1, 벧후3:20~13). 그리스도께서는 옛 창조에 속한 것들 모두가 같이 부패했고 같이 사탄의 본성이 주입되었다는 것을 아셨기에, 그것을 끝내시기로 결정하셨다. 그리고 오히려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창조물을 만드시기롤 결정하셨다(고전15:45). 그러므로 교회는 이전에 없던, 전대미문의 새로운 유기체가 될 수 있었다. 주님께서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끝내시고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셨기 때문이다(고후5:17). 그러나 옛창조에 속한 것들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전히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계21:1, 벧후3:10~13).

  아홉째, 그리스도께서는 그날 사망도 함께 처리하셨다(고전15:20, 요11:25~26, 고전15:55, 히2:14).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실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가 마귀의 권세를 박살내셨다. 그가 죄없으신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사탄에게서 빼앗으셨다. 그리고 직접 그 열쇠를 사용하여 사망과 음부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셨다. 이것을 "부활"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그날 예수께서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갖게 되셨을 뿐만 아니라 3일 뒤에는 그 권세로 음부의 문을 열고 나오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은 사망이 계속해서 그를 붙잡아 둘 수가 없게 된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주님께서 멸망시키셨기 때문이다(히2:14).

  열째,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저주도 함께 처리하셨다(신11:26~28, 렘17:5, 말2:2, 갈3:13, 3:10, 계22:3). 저주란 죄로 인하여 내려진 징계들을 가리킨다. 이것들은 한 마디로 재앙이며 불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생명의 활동을 방해하고 기쁨과 복을 앗아가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실 때에, 주께서는 죄 뿐만 아니라 모든 저주까지 동시에 치르셨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으로 인하여 모든 저주에서 해방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잠깐 더 생각해야 할 것은 그날 예수께서 저주를 끝내셨다는 표현을 잘 이해야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날 예수께서 인류가 받아야할 모든 저주를 다 몸으로 받으셨음을 의미하지만, 그것에 내게 효력을 발휘하게 하려면 회개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죄를 지었을 때에 그러한 죄의 결과로 인해 이미 우리 몸과 삶과 자녀에게 저주가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받기 위해서는 과거의 죄들을 낱낱이 자백하여 털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 뿐만이 아니라 내 조상의 죄까지도 동시에 해당된다. 이것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저주로부터 깨끗하게 해주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요일1:9). 

 

6. 나오며

  왜 바울은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려고 했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능력이라고 말해야 했을까? 그것은 십자가에서 모든 악한 것들이 다 처리되었거나 끝장났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모든 소극적인 것들의 값을 처리하신 장소가 바로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가면 죄와 죄들을 비롯한 모든 악한 요소들이 다 거기에서 죽게 된다. 이는 그것들이 더이상 우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악한 자는 여전히 우리를 농락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저주 가운데 살고 있다.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날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끝장내셨으며 처리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행한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뒤에 회개해야 한다.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귀신들이 우리 속에서 떠나가도록 하려면 우리의 입술로서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해야 하기 때문이다(요일1:9). 그놈들도 우리 몸에 들어올 때에는 합법적으로 들어온 것이기에 나갈 때에도 합법적으로 나가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합법적으로 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이 바로 죄를 자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은 죄들을 자백하는 회개를 할 때에, 그 자리가 하늘의 법정이 되고 그러면 무죄 선고가 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2천년전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형벌을 다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우리는 더이상 죄값을 치르거나 저주를 받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 몸에 남아있는 세력들이 있기에 우리는 그놈들에게 나가도록 명령도 해야 한다. 그래서 그놈들이 떠나가고 성령이 우리의 몸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우리도 우리의 못된 성질도 달라지게 된다. 이제는 우리의 성품과 언어와 행동이 사탄에서 벗어나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분열도 사라지고, 분파도 사라지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게 된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며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게 된이다. 이것이 바로 분열의 최종해결책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4월 21일(수)

정병진목사

십자가는 어떤 도구인가? 십자가는 고난을 상징하는 것인가? 영광을 의미하는 것인가? 사실 십자가는 2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나는 자신의 사명을 다한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자신을 끝낸다는 것을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만을 전한다는 것은 무슨의도도로 말한 것인가? 여기 그 해답이 있다. 그것이 분쟁 해결을 위한 가장 확실한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2021-04-14(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04) 교회의 분열과 그 치유책으로서그리스도의 십자가(3)(고전1:18~3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7weJUmD2sGk  [혹은   ]

 

1. 들어가며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에 발생한 10가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책이다. 바울이 개척했던 고린도교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 특히 그들을 가르쳤던 지도자들과 세례를 주었던 지도자들에 의해 분파가 갈리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지역상 항구에 위치해 있었던 만큼 여러 우상들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고린도교회에 특별히 은사들을 많이 부어주었다. 그래서인지 고린도교회는 말씀도 풍성했고 은사도 풍성했다. 하지만 그들이 누리고 있던 사회문화와 음식문화 및 결혼문화 등은 교회의 가르침과 충돌했다. 하지만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 채 그들을 자기자랑에 열중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발생한10가지 문제점들을 극복하는 방안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제시한다. 대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기에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치유책으로서 그것을 제시한 것일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주에 이어 교회의 분열과 그 치유책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 그 말씀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구원얻어 하늘의 상속자가 되기 원하는 모두에게도 바른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2.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발생한 여러 문제들의 근본적인 해결책으로서 제시한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발생한 모든 문제들의 근본적으로 해결책으로 사실 한 가지를 제시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그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어떻게 모든 문제의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그 효능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대체 믿는 자들에게 어떤 능력과 지혜와 효능을 안겨주는 것이기에 그것이 교회의 모든 문제의 해결의 열쇠라고 하는 것인가? 그것을 사도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와 부활하신 그리스도라고 소개한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를 내용별로 분류하지 않고 주제별로 분류한다면, 고린도전서의 전반부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고린도전서의 후반부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먼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어떻게 되어서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의 열쇠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든 문제들을 끝내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경에서 2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그것은 때로는 고난과 핍박을 감수하는 것이기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효능을 힘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모든 것을 끝내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십자가는 우리의 사명을 가리키기도 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끝내는 도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어서 사도바울은 모든 것의 새로운 출발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보았다. 그분이 부활의 첫열매로서 산 자들의 소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옛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끝낸 사람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고로 교회에 발생하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결은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부활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성경의 중심주제는 무엇인가?

  그렇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는 그것이 무엇을 향해 촛점이 맞추어져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모른다면 우리는 성경을 역사 책이나 천문학 책으로, 윤리도덕 책이나 문학책으로 그저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쓰였는가?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그리스도를 들고 나온 이유와 같은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성경의 중심주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성경을 읽게 된다면 우리는 헛다리를 짚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구약성경의 중심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이나 다같이 동일한데 그것은 오직 우리의 구원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해주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성경의 기록목적을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어디를 펼치든지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고린도전서 10장에는 출애굽 여정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스라엘백성이 홍해를 건넌 것을 두고 이스라엘 백성이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것이 꼭 우리가 옛사람을 끝낸 세례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들어와 신령한 만나를 먹고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신령한 음료를 먹었다고 언급한다. 그런데 바울은 이 반석을 곧 그리스도라고 소개한다. 왜냐하면 쪼개져서 생수를 넘치게 공급한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 성령을 공급하시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시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많은 예표들을 만나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4.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를 자랑해야 하는가?

  바울은 고전1:26~31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진정 누구를 자랑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그것은 자기를 가르친 스승도 아니고, 자기에게 세례를 준 영적 지도자들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여야 한다고 했다(고전1:30). 사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만나기전까지 다 무명의 사람들이었다. 고로 고린도성도들이 어떤 직업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던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질문을 던진다. "너희 중에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대체 누구며, 유능한 자가 누구며, 가문이 좋은 자가 누구냐? 왜냐하면 너희들은 과거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자들이었고, 세상에서 약한 자들이었으며, 세상에서 천한 자들이자 멸시받는 자들이었고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들은 높은 교육을 받은 헬라철학자들도 아니었으며, 지위가 높은 권세있는 정치가도 아니었고, 상류계층의 귀족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가진 것 없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제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부유한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과거를 잊어버린 채 교만한 자가 되어 있엇던 것이다. 그러자,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오직 그리스도 예수 뿐이라고 주문한다.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지혜란 말의 뜻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고전1:30).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3가지 방면의 은혜의 공급자라는 뜻이다. 첫째, 그것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의로움이 되셨음을 의미하고, 둘째,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거룩함이 되셨음을 의미하며, 셋째, 그리스도께서 귿르에게 구속함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로움을 얻게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지 못한 채 있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의롭다고 칭함을 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가 거룩함이 되었다는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거룩한 자로 변모하고 있음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구속함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자신의 핏값으로 사서 그들에게 참된 자유와 해방을 주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성도들 스스로는 그 누구도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으며, 성화될 수 없으며, 자유와 해방을 누릴 수 없었는데,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그것이 가능해졌으니 오직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라는 것이다. 

 

6.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능 10가지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10가지 효능은 대체 무엇인가?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끝내 버린 것 10가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그날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만 언급할 것이 아니라 그날 그분이 무엇인가를 끝내셨다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인간 스스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10가지 문제를 그리스도께서 해결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이것은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므로, 오늘은 그 핵심사항만 정리해본다).

  첫째, 그날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죄들을 처리하시고 끝내셨다는 것이다. 이는 성도들의 죄로부터 해방되고 죄들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사탄마귀과 귀신들을 처리하셨다는 것이다. 그날 그리스도께서는 사탄마귀의 머리를 박살내심으로 사망권세를 무력화시켰고, 귀신들을 무장해제시켰기 때문이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처리하여 세상이 주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끝내셨다. 넷째, 그리스도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줄곧 역사하고 있던 육신을 끝내셨다. 다섯째, 그리스도께서 옛사람을 처리하시어, 새사람이 되게하셨다. 여섯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동시에 사람의 자아 곧 혼도 같이 처리하셨다. 일곱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율법을 처리하셨다. 여덟째, 그리스도께서 옛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그날 끝내셨다. 아홉째, 사망마저 끝내셨다. 사탄마귀가 그날 불법을 저질렀기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마저 꺾으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모든 저주로터 당신의 백성들을 완전히 해방시키셨다. 이것이 그날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처리하신 것들이자 끝내신 것들이다. 놀라운 것은 이것들은 오직 예수님 이외에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오직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7. 나오며

  이처럼 십자가는 모든 것을 끝내게 하는 놀라운 도구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가 그 십자가 위에서 죽는다고 끝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오직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분이 그날 십자가에서 이루어놓으신 일들은 그분을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자들에게 고스란히 적용이 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고로 그날 그리스도께서 끝내신 것들은 곧 우리의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고소린히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찬양과 감사를 드리자. 사도바울은 일치감찌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자랑과 교만과 으시댐은 십자가에서 처리할 때에 비로소 끝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무엇인지 문제가 발생하고, 다른 사람과 분쟁이 일어나려 할 때에는 우리 자신을 십자가로 가져가야 한다. 그리고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면 된다. 그때 우리가 명심한 것은 우리 자신을 개선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십자가로 가져가서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음을 선포하고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분의 죽으심의 효능이 즉시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해보자. 건투를 빈다. 

 

2021년 04월 14일(수)

정병진목사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최소 4개의 분파가 있었다. 바울이 이 심각한 분열의 문제를 인편으로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무엇인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렇다면 서로 분쟁으로 다투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어떻게 하나될 수 있도록 권면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2가지였다. 하나는 그들의 공통분모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예수께서 달려 죽으신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그것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대체 그 공통분모란 무엇을 가리키며, 십자가는 또한 어떤 의미였던 것일까? 오늘은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는 해결책 2가지를 알아보자.

2021-04-07(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03) 교회의 분열과 그 치유책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2)(고전1:10~3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4IVPPI09PMk [혹은 https://tv.naver.com/v/19459979 ]

 

1. 들어가며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고린도교회의 분열에 대한 치유책으로서 두번째 방법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한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떠난 후 문제가 생겼다. 문제점을 정리해보면 약 10가지 정도가 된다. 그래서 바울은 A.D.55년경 봄 무렵에 소아시아지역의 에베소서에 머물러 있으면서, 아가야지방의 수도였던 고린도에 자신이 개척했던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편지를 써보내는데, 그 첫번째 편지가 바로 고린도전서다.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고린도교회의 영적 그리고 도덕적 무질서에 대한 책망과 권면 및 교회생활과 관련한 제반질문사항에 대한 목회적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이것들 중에서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분쟁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바울이 그 문제에 대한 해격책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는데, 그중의 하나인 서로간의 공통분모인 그리스도에 관하여 소개하였고, 오늘은 그중의 두번째 요소인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아무쪼록 정교하는 않지만 이 한 편의 설교를 통하여,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겪고 있는 분열과 분쟁에 관한 불씨들이 해소되고 교회가 하나가 되는 일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2. 고린도전서 1장이 차지하는 위치는?

  우리는 지난 번에 서론(머릿말)(1:1~9)부분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지난 주부터는 고린도교회가 안고 있는 당면한 10가지 문제점들에 대해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그것의 첫번째 부분은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분쟁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다가 시간관계상 끝맺어야 했고 오늘 그 다음 부분을 다루고자한다. 오늘 우리가 다룰 부분은 1:10~4:20까지 나오는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분쟁"에 관한 부분인데, 그중에 1:10~31으로서 이 문제 앞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고린도교회의 분열에 대한 책망과 아울러 바울 자신의 사역을 실례로 들어 고린도교회의 분열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그 첫번째 해결책으로서 그들이 공통분모인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다(1:10~17). 이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열에 대한 두번째 해결책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소개한다(1:17~25). 특히 이 부분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를 비교하면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자 하나님의 지혜인 것을 소개한다(고전1:25). 그리고 그리스도 못박혀 돌아가셨던 십자가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소개한다(고전1:18). 그런데 바로 이것이 바로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는 두번째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출신성분과 아울러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이 누군지를 3가지로 소개함으로 1장을 마무리한다(1:26~31). 

 

3. 교회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첫번째 열쇠로서 고린도전서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는 대체 누구신가?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 성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느냐 또한 자신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느냐고 반문하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구원하기 위해 못박히신 분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누가 고린도교회에 와서 사역했든지 모두다 세례를 줄 때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분쟁의 해결을 위해서는 모두에게 공통분모인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실 고린도교회는 세워진지 몇 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교회가 4개의 분파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분파는 교회를 개척했던 바울을 따르는 바울파였다. 그리고 두번째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를 교육하고 든든하게 세웠던 아볼로파, 그리고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영향을 받아 그를 지지하고 따르는 게바파, 그리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들은 그리스도파로 하여 자신을 자신의 스승 밑에 놓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분열과 분쟁의 사실 앞에서 바울이 선택한 비장의 무기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였다. 그러므로 교회가 분열과 분파를 막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세례를 주었거나 사역했던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로 뭉쳐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특히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편지를 쓸 때 수신인으로서, "우리나 너희나" 똑같이 그리스도를 주로 부르는 자들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고전1:2). 이는 오직 주 예수만을 불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대체 어떤 분이며 대체 누구인가? 고린도전서는 그리스도가 누군지에 관하여 많은 정보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보화주머니다. 그래서 세어보니 적어도 17개의 항목이나 된다. 우리는 고린도전서에서 그리스도가 누군지에 앞으로 총17개 항목에 대해서 보다 더 자세히 공부하게 될 것이다. 오늘은 다만 그 항목의 기본개념만을 집고 넘어가고자 한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전해주고 있는 그리스도는 총 17가지 항목이나 된다. 첫째와 둘째는 그분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이다(고전1:15). 셋째와 넷째와 다섯째는 그분은 하나님의 지혜로서, 3가지 것들 곧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라고 소개한다(고전1:30). 여섯째는 그분을 "영광의 주님"이라고 소개한다(고전1:8). 그리고 일곱째는 그는 그분을 교회공동체의 "기초"요, 신앙의 "기초"라고 소개한다(고전3:11). 여덟째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유월절 양"이라고 소개한다(고전5:7). 여기서 "유월절 양"이라 함은 헬라어로 "파스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분은 유월절 양을 포함하는 "유월절 그 자체"라는 것을 원문으로 알 수 있다. 아홉째, 열째, 열한째는 고린도전서 10장에 나오는 개념들인데, 바울은 그리스도를 "신령한 음식"(고전10:3), "신령한 음료"(고전10:4), 쪼개진 "신령한 반석"(고전10:4)이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신령한 음식"이라 함은 그분이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참 떡이라는 의미이며, "신령한 음료"라 함은 그분의 쪼개어진 반석에서 나오는 생명의 물(생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분을 "쪼개진 신령한 반석"이라 함은 생명의 산출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고 열두째로서 그리스도는 "머리"로 소개되어 있다. 여기서 머리는 모든 사람의 머리이자 교회의 머리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는 그분이 모든 사람의 통치자이면서 교회의 주관자되심을 언급하는 것이다. 열셋째로서 그리스도는 "몸이자 지체"라고 소개된다(고전12:1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이란 교회를 가리키며, 교회는 또한 여러 지체들로 구성되고 있는 바, 바울은 그리스도를 몸이자 지체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열넷째부터 열일곱째까지는 고린도전서 15장(부활장)에 등장하는 개념들인데, 여기에는 총 4가지 항목이 있다. 먼저 열넷째로 소개되고 있는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열매"이시다(고전15:20). 여기서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이시라고 함은 구약의 성도들 중에서 단 한 명도 부활체를 입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부활의 첫 열매로서 아버지 앞에 간 첫번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은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죽은 후에 하늘 안으로 들어갔을 때에 그들은 영체의 상태로 들어갔으며, 낙원이라는 곳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참으로 나눌 이야기가 많다. 그것은 고전15장 강해 때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고 열다섯째로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 소개되고 있으며(고전15:45), 열여섯째로 그리스도는 "살려주는(생명주는) 영"으로 소개되어 있고(고전15:45), 마지막으로 열일곱째로 그리스도는 "둘째아담"으로 소개되어 있다(고전15:47).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이자 둘째 사람이라 함은 그분이 사람으로서는 두번째 사람이지만 그분이 마지막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모든 인류가 첫번째 사람이었던 아담의 씨를 받아서 태어나는 천연적인 사람 곧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생명주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하나를 더 얻게 된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이요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생명이다.  결국 예수님은 생명주는 영이 되시는 것이다. 그때 생명주는 영으로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생명이신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육적으로는 첫째 아담으로부터 첫번째로 태어나지만, 이 땅에 살 동안에 반드시 둘째아담이신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거듭태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만이 결국 천국에 입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아담으로만 태어난 천연적인 사람은 만약 죽기 전에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는 죽을 때 이 땅에 남겨지게 될 터인데, 그가 들어갈 처소는 지구의 땅속인 음부요 불못이다(계21:8). 

 

4.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두번째 열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분쟁을 끝낼 수 있는 두번째 열쇠는 무엇인가? 사도바울은 그것을 일컬어 "십자가의 도(말씀)(고전1:18)"라고 말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할 때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고전1:23)"라고도 하고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고전2:2)"이라고 했다. 이것을 종합해보면,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분쟁을 종식키킬 수는 해법윽로서 공통분모는 "십자가"인 것이다. 주께서 달려 죽으신 십자가, 바로 그 십자가가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분쟁을 없애주는 두번째 요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십자가가 분열과 분쟁의 없애주고 화목을 가져다주는 열쇠가 되는 것인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에 대한 개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5. '십자가'란 어떤 의미이며, 십자가가 처리해놓은 10가지 사항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과연 "십자가"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성경에서 십자가의 개념은 불신자들이 볼 때와 성도들의 볼 때가 각각 다르다. 불신자들의 눈에 십자가는 한 마디로 "저주의 십자가"로서 거리끼는 것이요 미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로마에 반역하는 자들을 죽이기 위한 극형도구로서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가장 잔인한 살인도구로서 사람을 죽을 때에 가장 수치를 느끼게 해주는 도구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러한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거기에서 숨을 거두심으로 십자가의 의미는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을 끝내버리는(죽음에 넘기우는) 도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다름 아닌 모든 것을 끝내는 도구로 보았던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있어서 십자가는 우선 자신이 지고 가야할 사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분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라는 의미는 자신의 사명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고, 고난이나 고통, 수치와 멸시라는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어렵도 힘든 고통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개념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소극적인 모든 것을 다 끝낸다는 의미를 가리킨다. 그래서 방루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바울이정말 자랑했던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십자가는 모든 소극적인 것들을 다 못박아 끝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대체 무엇을 끝내셨는가? 예수께서는 그때 십자가 위에서 대체 무엇을 끝냈는가? 그리고 멸하셨으며 무효화시켰으며 없애버리셨고 약화시켜버린 것인가? 신악성경에 나오는 것으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쵝소한 10가지 항목이 된다. 그것을 이 시간에는 항목만이라고 살펴본다면, 첫째, 죄와 죄들이다. 둘째, 사탄마위와 귀신들이며, 셋째는, 세상을, 넷째는, 육신을, 다섯째는, 옛사람을, 여섯째는, 자아를, 일곱째는, 옛창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덟째는 율법을, 아홉째는 사망을, 열째는 저주를 예수께서 완성하시고 없애버리셨다. 그런데 이것들의 공통점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들 모두는사탄에게 속하는 소극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사람으로서는 이러한 것들 중에서 단 하나도 이길 수 없다. 사람은 이들에게 포로로 잡혀 있든지 노예가 되든지, 이것들의 소유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이전에, 이것들로부터 사람을 구출해내어 해방시켜줄 존재나 시스템과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타나심임으로 인하여 그리고 십자가에 그것을 가져가서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이 모든 것을 하루 아침에 다 무력화시켜버렸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오늘도 예수께서 이루신 일을 믿고 받아들임으로 이 모든 혜택을 다 누릴 수가 있게 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가? 그러므로 이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사도바울은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참고로, 앞에서 언급한 10가지 항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6.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로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3가지 혜택은 무엇인가?

  이제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로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3가지 유익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방금 앞에서 보았듯이 십자가가 처리한 것들 중에는 사탄에게 속한 부정적인 10가지 항목이 있다. 하지만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가 받을 수 있는 혜택 즉 긍정적인 항목에도 3가지가 있다. 우리도 역시 그리스도와 함게 십자가에 못박힘ㅇ느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이 3가지가 있는 뜻이다. 그것은 고전1:30에 나와 있다. 그 항목을 원문으로 보면,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인데, 이것도 다음 시간에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오늘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가 되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이 3가지가 있다는 것, 곧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적극적인 혜택이 3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넘어가기로 하자. 

 

7. 나오며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분쟁은 의외로 심각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문제의 해결에 사활을 건다는 각오로 하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듯 보인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분쟁의 문제를 무려 4장에 걸쳐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만약 고린도교회가 갖고 있는 이 분열과 분쟁의 모습이 종식되지 않는다면 고린도교회는 교만하여져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분열과 분쟁을 겪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그 분열과 분쟁을 극복할 수 있는 처방전으로 어떤 것이 있다는 것도 같이 제시하였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와 그분이 못박혀 죽으신 "십자가"다. 고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공통분모로서 붙들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이시며, 체험으로 통해 소극적인 것은 끝내고 적극적인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들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사탄에게 속한 소극적인 것들이 끝나지 않는다면, 새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날마다 소극적인 것들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기운 채, 적극적인 것들은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분열과 분쟁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한 마음과 한 뜻으로 그리스도만을 추구하고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021년 04월 07일(수)

정병진목사

 

같은 신앙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 싸운다면 우리는 어떻게 두 사람을 도와서 화해시킬 수가 있는 것일까? 양쪽 사람을 불러다놓고 두 사람의 의견을 끝까지 잘 들어주면 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상담 잘하는 분에게 보내면 되는가? 여기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가 여러가지 분파로 나뉘어 있을 때에 그들을 하나로 만들었던 방법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었다고 추측을 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2021-03-31(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02)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그 치유책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1)(고전1:10~3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SG5l85raENU [혹은 https://tv.naver.com/v/19308967 ]

 

 

1. 들어가며

  성경에 등장하는 교회들 가운데 가장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교회를 고르라면 그 교회는 아마도 고린도교회일 것이다. 지난 주에도 잠깐 살펴보았지만 고린도 교회에는 당시 약 10가지 문제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중의 첫번째 문제은 분열과 분쟁의 문제였다. 교회가 여러 개의 분파로 나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를 제일 처음으로 거론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를 책망과 권면의 말씀을 하면서 그들을 타이르기도하고 어우르기도 하였다. 그래서 오늘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들 가운데 첫 번째 문제였던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분쟁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그중에서 오늘은 이 문제가 발생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고 그 문제에 대한 2가지 치유책 중에서 첫번째 치유책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고린도전서 1장 10~31절의 말씀의 위치는?

  고린도전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장1~9절은 도입부, 1장 10절~15장 58절은 본론부 그리고 제16장의 종결부로 되어 있다. 지난주에는 도입부까지 살펴보았는데, 도입부에서는 고린도교회에 대한 바울의 칭찬과 인사가 들어가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본론부(1:10~15:58)가 시작되는데, 본론부는 다시 1:10~6장까지의 전반부와 7~15장까지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이것들 중에 전반부인 1:10~6:20은 주로 고린도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 즉 고린도교회 내의 분쟁 및 도덕적 무질서에 대한 책망과 권면을 다루고 있다. 또한 그중에서 1:10~4장까지는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분쟁에 관한 책망과 권면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고전1:10~31의 말씀은 고린도교회의 분열에 대한 책망과 바울자신의 사역을 실례로 한 분열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3. 고린도교회의 분열 및 분쟁의 소식이란 어떤 것이었나?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칭찬과 인삿말을 건넨 직후 그들에게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가지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글로에의 집 편으로 듣게 되었었던 교린도교회의 분열과 분쟁소식을 언급한다. 교회가 각각 바울파와 아볼로파와 게바파 그리고 그리스도 등의 4가지 당파로 분열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데, 어찌 나뉘어질 수가 있느냐며 질책을 시작한다. 그리고 바울 자신이 고린도에 간 것은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함이었던 것이지, 어떤 파당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사례를 들어 교회가 분열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4. 고린도교회는 어떻게 해서 4개의 분파가 생겨났던 것일까?

  그렇다면 고린도교회는 어떻게 해서 4개의 분파가 생겨난 것일까?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 4개의 분파가 생겨난 것을 순서적으로 적어 놓고 있다. 맨 처음으로는 바울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볼로파, 그 다음 순서로는 게바파 그리고 그리스도파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어찌 그리스도께서 나뉘었느냐고 반문한다.

  그렇다면, 왜 고린도교회는 이렇게 4개의 분파가 생겨난 것일까? 먼저, 바울파를 생각해보자.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장본인이다. 바울이 자신이 2차로 전도여행(A.D.49~52)을 하면서, 고린도지역에 1년 반가량을 머무르면서 교회를 개척했다(행18:11). 당시 고린도는 아가야지방의 수도로서 여러가지 면에서 헬라의 중요한 중심 도시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떠난 이후 아볼로가 그 교회에 가서 사역했다. 아볼로는 당시 헬라철학의 중심지 였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언변이 좋았고 성경에 능통한 자였다(행18:24). 그가 일찍이 주의 말씀을 배워 예수에 관한 것을 열심히 전하며 가르쳤지만, 그는 단지 요한의 세례까지만 알 뿐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이름으로 주는 세례와 성령세례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러자 그가 에베소에 왔을 때에, 이미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길을 정확히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그가 고린도로  가고자 하자, 추천서를 써주어 아가야 교회가 아볼로를 잘 영접해주도록 부탁하였다. 그래서 바울의 대를 이어 고린도교회에 가서 사역한 사역자가 바로 "아볼로"라는 인물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말고 다른 편지에서 그를 율법교사로 소개하고 있으며(딛3:13), 고린도전서에서는 자신의 형제로 두는 자라고 했다(고전16:12). 결국 우리는 고린도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바로 세운 사람이 아볼로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서 헬라철학에 매우 조예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설득력있는 말로 사람들을 잘 가르칠 수 있었다.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학자출신의 목회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상당했었던 것 같다. 고로 이제 고린도교회에는 개척멤버로서 바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게 되었고, 이어서 아볼로에 의해서 예수믿고 세례받고 성도가 된 자들은 아볼로를 지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기를 지지하는 그룹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를 지도해준 스승을 자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이 어느 노선에 있는지는 자기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것과 또한 누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이어서 게바파가 생겨났다. 왜냐하면 바울이나 아볼로에게서 세례를 받지도 아니하고 가르침을 받지 못했던 이들이 고린도교회에 합류하게 되면서부터다. 그들중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게바(베드로)에게서 직접 세례를 받았거나 아니면 게바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자가 고린도에 와서 고린도교회에 합류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과정에서 자신을 게바파라고 헸을 것이다. 사실 게바(베드로의 아람어식 원이름)가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했는지는 지금까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그 어디에도 기록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게바는 주로 팔레스틴 지역 곧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그리고 안디옥 등지에서 사역한 사역자였다.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주고 안수하여 성령세례를 주는 등의 일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고전9장에 보면, 베드로가 자신의 아내된 자매를 데리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바울이 언급이 나온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선교사로서 고린도까지 와서 복음을 전해주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만은 없다. 그러다보니, 고린도교회는 이제 개척멤버파인 바울팔,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파인 아볼로파 그리고 베드로를 따르는 원조파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자 이것도 저것도 줄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들을 그리스도파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고린도교회에는 무려 4가지 파벌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파가 생겨난 이유가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이들은 자신의 스승을 누구로 두었는가 하는 자부심이 강한 나머지 분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고린도교회는 자신에게 누가 복음을 전해주었느냐에 따라 그리고 누구로부터 말씀을 배웠느냐에 따라 자신을 지도해준 지도자에 대한 지나친 충성심이 잘못 변하여 파당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5. 바울은 분파주의로 인한 고린도교회의 분열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시도했는가?

  그렇다면, 분파주의로 인하여 분열된 고린도교회를 바울은 어떻게 하나가 되게 해야 했을까? 바울은 우선 자기가 고린도교회를 개척하게 된 것은 분파를 만들라고 했던 것이 결코 아니었음을 상기시킨다. 당시 분파는 자기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는데, 그는 고린도교회에서 세례준 자가 몇 명 안 된다고 말했다. 이는 그가 고린도지역에 간 것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었던 것이지 결코 세례를 주기 위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세례를 주었던 사람도 딱 두 사람뿐으로, 당시 고린도의 회당장이었던 그리스보와 또한 한 사람 가이오 뿐이었다고 언급한다. 이는 그가 세례를 주기 위해 그곳에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자기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 자랑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바울은 귿르에게 "내가 과연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느냐?"고 반문한다. 그리하여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든 상관없이 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어 구원얻게 된 것도 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때문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러므로 서로 나뉘어있는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다 "그리스도"라는 공통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라는 공통됨을 찾아야 비로소 서로간의 분열이 없어지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지, 자신이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또한 자신이 누구에게 지도를 받았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바울은 [어디서 세례를 받았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그곳 출신의 사람이었던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도 한 번 더 세례를 베풀었다고 언급하면서, 그 외에는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이름의 분파를 더 이상 지칭하거나 만들지 말라는 명령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울은 그곳에 보내 교회를 세우게 하심은 세례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고전1:17).

  그러므로 사람이 분파주의에 휩쓸려 하나됨을 파괴하고 분열하게 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도 바울의 이 말씀을 통해서 배울 수가 있다.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서로 팽팽하게 싸우고 있는 양 편 혹은 여러 편의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하나되게 하려면, 양쪽과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분모를 찾아서 그들이 서로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어야 함을 배울 수 있다. 자신이 비울 바울파라고 하든지 아니면 아볼로파라고 하든지, 게바파라고 하든지 그리스도파라고 하든지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게 하고 말하게 하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들 누구라도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도 받았기 때문이다. 고로 자기들에게 와서 누가 사역했든 상관없이 그들이 모신 것은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를 배우게 된 것이다. 고로 오늘날 교회에서 분쟁이나 분열이 발생할 때에는 바울이 가르쳐준 이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때에는 서로 싸우는 앙편진영의 공통분모를 찾아내고 그것을 묵상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로서 천국에 가면 서로 남남이거나 대적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천국에 가서는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한 형제와 한 자매이기 때문이다. 

 

6. 고린도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되지 못하게 했던 2가지 요소는 무엇이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그러한 요소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을 바울은 2가지로 언급한다. 하나는 유대적인 사고방식이요, 또 하나는 헬라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은근히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들이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고전1:22). 그렇다면 헬라인들은 또 어떠한가? 그들도 역시 지혜를 찾는 사람들이었다(고전1:22)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 모두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힌 돌아가신 그리스도는 하나의 걸림돌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저주의 십자가에서 달려 죽은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또한 헬라인들도 역시 예수께서 사람들을 규합하여 가르치기는 했어도 많은 제자들을 규합하지 못한 채 죽었기기 때문에 또한 유대의 한 촌 동네에서나 활동하던 무명의 청년 정도로만 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분이 하신 말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특히 헬라인들에게 예수님은 결코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헬라철학을 바탕으로 우주의 근원과 우주의 존재목적을 지혜로 풀면서, 가장 잘 우주의 이치를 잘 설명하는 사람을 따르기를 좋아하였고 또 새로운 사상이 나오면 그것에 열광하면서 그렇게 듣기 위해 몰려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은 그들에게 관심거리가 될 수가 없었다. 로마에 대항하다가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이요, 죽을 때에도 가장 잔혹한 형벌을 받아 죽임당한 반역 죄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누구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헬라철학을 가지고 해석해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 또한 결코 그들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렇다.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데에는 기적만으로도는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헬라철학으로도 불가능한 것이다. 고로 능력이나 기적, 혹은 이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또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사람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에 관하여서는 시간관계상 다음주에 계속해서 이어서 설명하겠다. 

 

7. 나오며

  그렇다. 교회가 분열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이유이든지 하나님의 뜻과는 역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죽음을 하루 앞둔 채 마가다락방에서 기도하셨을 때에도,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와 항상 하나였듯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도 서로가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요17:11,21~22). 또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쓴 편지에 따르면, 분열과 분쟁은 성도가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고 죄된 본성을 가진 육체를 따라가며 살 때 맺게되는 육체의 열매라고 나온다. 다시 말해 분열은 사탄의 속성 가운데 하나에 해당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늘 이간질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사람과 사람 사이이를 이간질시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서로가 하나되기 위해 힘써야 할 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보낸 편지를 통하여, 하나님도 한 분이시요, 주님도 한 분이시요 세례도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고 권면하였던 것이다(엡4:4~6). 이를 위해서 우리는 너와 내가 무엇이 다른지를 늘 생각하고 말할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과연 어떤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지를 늘 확인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그것으로 인하여 너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그러면 싸우거나 분쟁할 이유가 점차로 없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3월 31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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