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음행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소문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으니까 쉬쉬하고 덮어버리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행한 처방전대로 그 사람을 징계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이 나은가? 그리고 만약 교회에서 그런 문제를 다룬다면 어떤 방법과 절차를 따라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권징조치가 왜 교회에서 시행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와 목적은 대체 무엇인가? 오늘은 교회에서 잘 시행되고 있지는 않지만, 바람직한 권징방법이 무엇인지 그 실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2021-05-19(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09) 음행한 자들을 교회는 어떻게 치리해야 하는가?(고전5:1~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VRVSOXMtIAU  [혹은  https://tv.naver.com/v/20296019 ]

 

1. 들어가며

  교회에서 음행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교회에서 발생한 일이니만큼 부끄러운 일이지 남들에게 소문나지 않도록 쉬쉬하면서 은혜롭게 처리한다는 미명하에 없던 일로 여기고 덮어버리는 것은 좋은가? 아니면 그 문제의 당사자에게 교회가 공식적으로 절차를 밟아 징계처분을 내려야 하는가?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당면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인 도덕적인 무질서 문제 중에서 성적인 문란행위에 대해서 오늘 본문말씀으로 그 답을 제시한다. 고린도 교회의 청년이 자신의 계모를 취하는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당시 교회내에도 음행의 죄가 용납되는 그러한 상황에 놓여 있따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성도의 생활을 감독해야 할 고린도교회는 도덕적 권위와 질서가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그냥 그 문제를  덮어버리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어떤 처리를 명령했을까? 그리고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도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들을 처리할 것인가?

 

2. 고린도전서 5장의 내용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 당면한 10가지 문제에 대한 바울의 훈계와 책망을 기록한 책이다. 그중에서 1장부터 4장까지는 고린도교회의 분쟁의 문제를 다루었다. 교회가 4개의 분파로 나뉘어져서 자신의 지도자를 추켜세우면서서 파벌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인삿말을 시작으로 하여 교회의 분쟁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단락에서 음행의 문제를 언급한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교회 내에 음행의 문제가 이미 발생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묵인하고 방치하고 있었다. 그러자 교회가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도바울은 교회는 반드시 이 문제를 놓고 결의하여 적어도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자에게 출교라는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을 명령한다. 

  한편, 근친상간의 음행 죄를 다루고 있는 고린도전서 5장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는 교회 안에 발생한 근친상간의 범죄자를 단죄할 것을 명령하는 부분(1~5절)과, 이어 범죄자가 교회에 미칠 수 있는 악한 영향력을 고려해 교회가 그에게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징조치인 출교를 시행하라고 촉구하는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3. 일반적으로 음행의 죄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음행의 죄에 대해 성경은 먼저 율법의 십계명에 언급하고 있을 만큼 인간이 지켜야 할 아주 중요한 계명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간음이나 음행의 죄가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근친상간의 죄는 두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을 만큼 율법은 단호한 조치를 명령하고 있다(출20:14, 레20:10~11). 그렇다면, 음행이나 간음의 죄에 대해 우리 주 예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그리고 지금은 부활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 예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처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을까? 

  먼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한 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예수께서는 천국백성의 윤리를 다루고 있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하여 이 문제를 언급하셨다(마5:27~32). 그 말씀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간음이란 행동으로만 간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것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셨다(마5:28).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음행한 이유 없이 이혼한 자와 결혼하는 것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있어서 재혼이란 오직 배우자의 사별의 경우에만 해당한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더욱이 사도바울은 재혼을 한다고 할지라도 믿는 자들 안에서 재혼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고로 성도들은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고전7:10~11). 배우자가 음행한 경우라도 이혼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이혼하면 평생 혼자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마5:32, 마19:9, 막10:11~12). 

  그렇다면 왜 성경에서는 음행의 죄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말하는가?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음행의 죄는 사람의 몸 안에 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몸은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 곧 성령의 전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창기의 지체로 만들기 때문이다(고전6:18~19). 믿는 자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것과는 정반대의 행위를 해서 되겠는가?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실 것이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7)"라고 말이다. 또 하나는 음행의 죄가 교회의 거룩성과 순결성을 손상시키는 매우 중대한 범죄가 되기 때문이다.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겠지만 음행의 죄는 누룩과 같아서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히 크다. 그러므로 이러한 범죄가 교회 안에 용납된다면 순결하고 거룩해야 할 교회는 금새 부패한 집단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음행의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돌이키지 아니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엄중한 처벌만이 그를 기다리게 된다. 즉 구약성경에서는 음행중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되어 있다(레20:10~11, 신22:22). 또한 부활승천하사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분께서는 그러한 사람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계21:8). 이어 사도바울도 이런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고전6:9~10). 그러므로 음행의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는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음행의 죄는 심각한 범죄인 것이다. 

 

4. 고린도교회 내에서 일어난 근친상간의 죄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처리할 것을 명령했는가?

  어느날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서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든는다. 그런데 그러한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었다. 그 내용인즉 어떤 형제가 자신의 아버지의 여인을 취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성도들의 태도였다. 아무도 그 문제를 놓고 탄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덮어두려고 했던 것 같아 보인다. 그 문제를 놓고 통한히 여기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고 그 아들을 교회에서 쫓아내지도 않았던 것이다. 참고로 이 사건에 등장하는 "여인"은 아버지의 '귀네'(여인, 여자, 아내, 첩)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 그녀가 아버지의 둘째부인이었는지 그리고 그 형제의 아버지께서 지금도 살아 계신지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팩트는 어떤 아버지의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의 여인과 음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패륜적인 범죄행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그 형제는 왜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고린도 도시의 문화와도 많이 관련되어 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고린도에서 음행은 비일비재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성적인 문란함은 이 도시의 신전에서도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프로디테(미의 여신)의 신전에는 창기가 항상 상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음행을 제사의식의 하나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한 문화가 교회 안에도 들어온 것이다. 그것을 교회는 묵인하고 있었다. 교회는 그것을 용납했으며 제재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자성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그 문제를 단호하게 취급하라고 한다. "내가 몸으로는 떠나 있지만 영으로는 이미 그를 판단한 상태에 있으니, 그를 주 예수의 이름과 능력으로 사탄에게 내주도록 하라. 그래야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얻게 할 것이 아니겠는가?(고전5:4~5)"

  그런데 오늘날까지 사도바울의 이 말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이들이 상당하다. 이 말씀을 해석하기를, 사람이 음행을 저질러도 예수 잘 믿으면 그 일로 인해 육신은 혹 멸망당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영은 구원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 성경말씀을 잘못 이해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그로 하여금 주 예수의 날에 구원얻게 하려한다는 문장은 가정법 문장이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말함은 그를 교회에서 내쫓아서 그가 사탄에게 고통받다가 회개한다면 턱걸이라도 해서 구원얻게 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성범죄는 교회가 공적으로 그것을 치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성범죄에 대해 두려워할 뿐더러, 당사자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5. 다른 죄에 대해 음행의 죄를 저지른 자들이 교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말했는가?

  그렇다면 교회 내의 성범죄는 왜 다른 죄에 비하면 그 죄가 크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음행에 따른 죄의 파급력이 실로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작지만 온 덩어리에 퍼지는 누룩과도 같다고 비유했다(고전5:6). 지금도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빵을 만들 때에 발효된 밀가루의 일부를 떼어 놓는다. 그리고 다음에 만들 빵에 그것을 집어넣어 빵 전부를 부풀게 한다. 그것이 작지만 다음에 만들 빵을 온통 또한 발효시킨다. 고로 사도바울은 교회 안에 음행을 조금이라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사실 바울이 그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할 때에는 교회 안에 누룩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새부터 묵은 누룩이 교회 안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온 교회를 부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누룩에 의해 오염된 성도들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유월절 양이신 예수께서 희생이 되신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또다시 묵은 누룩을 교회 안에 들여온 것이다. 그러자 왜 그것을 내버리지 않고 있느냐고 호통을 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예배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절기를 지키는 것들과 같은 것인데, 이제 성도들이 예배할 때에는 묵은 누룩이나 악하고 사악한 누룩을 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누룩이 없는 빵, 순전하고 진실한 빵 곧 불순물이 들어있지 않는 순수한 빵과 같은 말씀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고전5:7~8). 

 

6. 성도가 교회밖에서와 교회안에서 음행하는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후 사도바울은 근친상간의 음행의 죄와 아울러, 고린도전서를 보내기 전에 써 보냈던 편지에서 언급했던 음행의 문제를 꺼낸다. 그것은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했던 권면에 대한 그들의 오해를 시정하기 위해서여였다(고전5:9). 왜냐하면 그 편지를 받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 일부가, 바울의 편지글에 나오는 내용 곧 "도무지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는 말씀을 오해하여,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과도 사귀지 말라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만일 음행하는 자와 사귀지 않으려 한다면, 세상 밖으로 떠나가서 살라는 말이냐로 받아친 것이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만일 그리하려면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서 은둔생활을 해야 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바울이 말했던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는 것은 교회 내에 형제라고 불리는 자가고 음행을 하고 있다면 그런 자들과는 사귀지 말라는 뜻이었다고 바로 잡은 것이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야 원래 죄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에 바로 잡으시겠지만, 교회 안의 사람들 중에 음행하는 자들은 교회 공동체가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해서라도 그것을 바로잡지 않게 되면 결국 교회는 자기의 순결성과 거룩성을 상실해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7. 음행하는 자를 교회가 단호하게 출교조치를 하는 목적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왜 교회 내에서 음행하는 자들을 엄격하게 바로 잡으라고 명한 것인가? 그것은 교회적으로 보았을 때에 가장 거룩하고 순결해야 할 교회가 음행으로 더럽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고전3:17). 그러면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고전6:9~10), 최후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계21:8). 그리고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그 사람이 사탄의 시험을 받으면서 만일 회개하게 된다면 비록 그의 육신은 멸망당하겠지만 그의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고전5:5). 또한 이 과정 전부를 지켜보고 있는 성도들도 이 일로 경성하여 함부로 음행의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음행의 죄를 범한 자를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권징 시행방법을 따르면 될 것이다. 예수께서 형제가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마18:15~18). 그것은 첫째,  개인이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는 것이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아니한다 둘째로, 두 세 증인을 데려가서 그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들으면 그 형제를 얻는 것이지만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셋째, 교회에 그러한 사실을 공표하고 교회에서 치리를 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취급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때 교회공동체가 결정한 사항에 대해 예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결정으로 인정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마18:18). 고로 우리는 교회가 오늘날 공적으로 기도하고 범죄자들을 합법적으로 치리하는 권위가 회복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 일을 통해 범죄자가 자신의 죄를 빨리 뉘우치고 돌아서게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면 사탄의 밥이 되지 않을 것이고, 용서함을 받아서 순수한 떡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8. 나오며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는 예수께서 가르쳐준 범죄자에 대한 징계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있다. 교회가 치리를 시행하려고 하면 금방 다른 교회로 교적을 옮겨버리기 때문이다. 아니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세상 법정으로 자신의 문제를 끌고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바울의 권면의 말을 새기고 또 새겨야 한다. 개인이든 교회공동체든 사람에게 징계를 받으며 그것으로 끝날 수 있는 문제이지만, 그 문제를 그대로 놔둔 채 있으면 결국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려가 멸망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긍휼없는 심판만이 그의 분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할 수만 있으면 징계를 받더라도 여기서 징계를 받고 회개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주님 앞에 갔을 때에는 더이상 회개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교회에서 범죄자들을 치리하고 있는가? 그런데 겁도 없이 죄를 범하고 있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함께 찬송하고 예배하는 뻔뻔스러움도 극치를 이루고 있다. 장차 그의 후손이 받을 어마어마한 징계를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이 명백할 때에는 도망치듯 교회를 빠져나가 다른 교회로 옮겨버리기 쉽상이다. 그러니 징계조치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도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가르쳐준 권징의 처방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실제로 출교조치는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바로잡아주지 않는다면 그 영혼이 결국에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그를 위해 기도하고 관심을 갖고, 그가 회개하여 돌이킬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2021년 05월 19일(수)

정병진목사

 

 

고린도전서 1~4장까지의 이야기는 교회의 분열을 어떻게 종식시킬 것인가를 다루는 본문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교회의 분열과 분파문제를 다루었던 것일까? 그리고 교회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종류의 문제는 그 기저에 무엇이 깔려져있는가? 바울은 이제 교회의 분열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서 그 기저에 숨어 있는 문제를 끄집어 올린다. 그리고 그것을 처리한다. 바울이 끄집어올려 분쇄했던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것을 해결하지 않는 한 교회의 분열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021-05-12(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 강해(08) 하나님의 성전 훼손 경고와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헌신적인 수고와 책망(고전3:16~4:2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XlM2mqJBUso [혹은 https://tv.naver.com/v/20178624 ]

 

 

1. 들어가며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에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목적으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다. 바울은 이 편지 전에도 어떤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고전5:9). 그 편지를 통해서 보더라도 고린도교회에는 여러가지 산적한 문제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전에 보냈던 고린도전전서가 남아있지 않아서 그 편지에 어떤 내용이 실려있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은 그때의 편지를 통해 그들의 문제들을 파악하였고 그들이 진정 해결받고자 하는 문제들과 새로 발견된 문제들을 바로잡고자 이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보낸 고린도전서를 보면 고린도교회에는 당시 적어도 10가지 이상의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중에서 오늘 다룰 문제는 지금까지 계속 다루고 있는 첫번째 문제로서, 분쟁과 분열에 관한 문제다. 고린도교회가 교회사역자를 중심으로 여러 분파들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교회를 나누는 것으로서 한 몸 안에 여러 지체들을 아프게 하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처음 4장을 할애했다. 그래서 그중에 오늘은 교회의 하나됨을 해치는 가장 기저에 숨어있는 고린도교인들의 교만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그럼 바울은 어떻게 분열의 깊은 내막에 들어있는 교만의 문제를 해결했던 것일까? 어떻게 그들을 책망하여 그들로 하여금 겸손케 만들어 교회의 하나됨을 추구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2. 고린도전서 1~4장의 내용은 대체 무슨 내용인가?

  바울은 서두의 인삿말(고전1:1~9)을 필두로 하여 곧바로 교회의 분열과 분쟁에 관한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한다. 교회는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1:10). 그런데 바울은 들은 소문에 따르면 고린도교회는 이제 나는 바울파, 나는 아볼로파, 나는 게바파, 나는 그리스도파라고 나뉘어서 서로 분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보낸 사역자들이 어떻게 분파의 중심에 서 있게 되었는지를 질문하면서, 교회를 사역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교회의 분열에 대한 치유책으로서 그들의 공통분모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그들 모두에게 있는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만을 추구한다면 교회의 분열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거리끼는 것이며,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사실 이것만이 교회의 분열의 아픔을 치유하고 하나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처방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소극적인 것들을 다 끝내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에서 죄와 사탄귀신들, 세상과 육신, 옛사람과 자아, 율법과 옛창조, 사망과 저주 등의 소극적인 것들을 다 끝내셨기에, 십자가의 도를 붙잡고 나아갈 때 비로소 그들의 분열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진정 깨우쳐 주실 분은 성령님이므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붙여준 사역자를 존중 이상으로 높이 받들거나 그들을 대상으로 분파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사역자들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붙여준 하나님의 일꾼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다 자기에게 주어진 파트를 담당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는 이들이므로, 각기 자기가 일한대로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건축가가 그리스도라는 터(기초)위에 교회라는 건축물을 세우게 될 때에는 주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교회를 세워간다면서, 혹 자기자신의 이름을 내는 건축물을 짓는다면 그것은 훗날 심판 때에 그 어떤 것도 계산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열심히 수고했고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날에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은 거품이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왜냐하면 그날 그들의 공적을 불로 시험할 것인데, 불에 의해 타버리는 재료들 곧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지은 건축물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하나님의 속성들에 의하여 세워진 건축물 곧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건축물만이 그때 남겨짐으로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지난 주까지의 전한 말씀의 핵심들이다. 

 

3. 한 번 구원받았으면 그 구원은 영원히 안전한가?

  바울은 복음사역자들의 수고와 노력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한 뒤 이어지는 본문(고전3:16~17)을 통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그것은 구약의 하나님의 성전으로 예표되었던 하나님의 교회가 만약 자신을 더럽히게 되면(부패시키거나 못쓰게 만들거나 파괴시키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그 사람을 멸하실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파멸"이란 결국 구원에서 탈락하는 것을 포함하는 용어다. 이러한 사상은 곧이어 등장하는 여러가지 문맥들 곧 고린도전서 6장과 9장과 10장과 11장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나온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한다. 한 번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구원에서 절대 탈락하는 일이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건 성경적인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문맥을 보지 않았거나 구원에 관한 본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은 한글성경만 보았을 뿐, 헬라 대문자사본은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주장일 것이이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성경구절은 없다. 그렇지만 그것을 믿는 분들이 있다. 믿는 것이야 자유이겠지만... 혹 그러한 분들 중에는 고전3:15의 말씀이야말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증거하는 구절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은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3:15)"고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한 번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혹시 상을 받지 못할 수는 있어도, 누구나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명심할 것은 이들의 주장은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건축자들 곧 사역자들에게 대해서 바울이 했던 말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무렵(A.D.53~58)에는 아직 거짓 사도들이나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는 때가 아니었다. 특히 고린도교회는 바울에 이어 아볼로 사역했던 교회로서 아직 그러한 사역자가 나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고로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심었고 아볼로가 물을 주기까지는 했지만, 이제 그 위에 진짜 건축물을 세울 사역자가 나타난다면 그는 조심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바울이 고전3:15의 말씀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는 이미 타락하여 죄된 본성을 이기지 못한 채 교만함에 가득차 있는 자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었기에, 바울은 만약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계속해서 더럽힌다면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파멸시키실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성령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는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며, 앞뒤는 어떻게 짜여져 있는지까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구원과 상급에 관한 문제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다루게 될 주제이니만큼 그때 가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4. 성도가 사람 곧 교회의 사역자들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이어서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고린도 교인의 꾀(교활함)를 지적한다(고전3:18~20). 주님께서는 이러한 지혜는 헛 것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높이기 위해 괜히 사역자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에 바울과 아볼로 등을 사역자로 주신 것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하여 주신 것이지, 그들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기를 높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성장과 성숙을 위하여 오늘도 사역자들을 붙여주신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일도 경험하게 하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통해 교회는 성숙해져야 하고 성장해나가야 한다. 고로 고린도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붙여준 사역자들을 통하여 온전한 교회가 되기를 힘써야 했다. 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을 자랑하기 위해 사역자들의 이름을 들먹이고 있었다. 하지만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붙여준 일꾼이라는 것을 알아야 햔다. 그리고 교회란 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고전3:23). 결국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사역자들을 구실로 자기 자랑하기를 그쳐야 하는 것이다. 

 

5. 교회의 사역자들은 어떤 존재이며 그들은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교회의 사역자들은 어떤 자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누군가 교회에서 사역자로서 수고할 때에 무엇에 주의해야 하는가? 바울은 교회의 사역자들은 2가지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사환)이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라는 것이다(고전4:1). 여기서 "사환"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휘페레테스"라는 것으로서,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것은 쇠사슬에 묶여서 죽는 날까지 노를 젓는 일만을 하는 비참한 노예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만약 그들이 그 일에 충성하지 못하게 될 때에 그들은 언제든지 제거되었다. 그런데 이 말이 나중에는 좀 더 확장되어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자로서 쓰였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했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일꾼(휘페레테스)이라는 것이다. 이는 교회의 사역자들은 사람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포함하는 말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교회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서의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비밀이란 하나님 속에 감추어있는 구원의 놀라운 비밀을 가리킨다. 그것은 말씀연구와 기도 그리고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서 빛비춤을 받을 수 있는 것인데, 교회의 사역자들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말씀에서 이러한 말씀의 진리를 찾아내어 전달해주는 자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가 단에서 내려가서 있을 때에는 마땅히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하겠지만, 한편으로 교회의 사역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그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종이 되어버리면, 어느새 성도들은 그를 이리저리 판단하게 되고 그를 조종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사람의 눈치를 보다보면 말씀의 본래적인 뜻을 전달 못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이러한 사람들의 판단에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또한 자기도 자기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판단은 주님의 평가에 비해 불완전하며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며,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의 평가에 주의를 기울이다보면 자칫 그리스도의 사환이나 하나님의 말씀맡은 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사역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 판단할 터이니, 그때까지는 판단을 유보한 채, 자기에게 수여된 사명에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그럼, 왜 사도는 이런 말을 고린도교회에게 쓰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사역자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고린도교인들을 교만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사역자들을 이리저리 판단하다 보면 자기의 판단을 절대화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하나님께서 붙여준 사역자들을 자기들 맘대로 요리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사역자들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6.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교만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이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담임하면서 자신과 아볼로는 성도들에게 어떤 본을 보였는지를 말한다. 둘은 결코 서로 경쟁하거나 서로를 비방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고전4:6). 다만 고린도 교인들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역설적인 화법으로 지적한다(고전4:7). 그들이 받은 언변이나 지식 그리고 성령의 은사는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바울과 아볼로를 통하여 배운 것들인데도 그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언변과 지식과 은사가 최고라고 자랑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벌써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바울팀은 언제나 남의 종이 되어서 섬기며 살아왔다고 말한다. 심지어 복음을 전파하다가 붙들려서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였고, 때로는 세상의 더러운 것(오물)과 만물의 찌꺼기(때)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바울팀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축복하였으며, 박해를 받으면서도 참았고, 비방을 받으면서도 그들을 대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복음을 전파하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없이 다니기도 하였으며 수고하고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교인들은 어떻게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들은 원래 퇴역군인들의 후손으로서 문벌상으로도 보잘 것 없었고, 신분상으로도 보잘 것 없던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은혜를 통하여 지혜로운 자가 되었음에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잘 나서 그렇게 된 것 모양으로 자기교만에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은혜로 된 것이지만 원래 자기 것들인 것처럼 우쭐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과 바울팀의 삶과는 전혀 상대되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라고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해 희생한 것도 아니고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7. 분열에 관하여 바울이 전하는 최종적인 경고는 무엇인가?

  이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을 지적한 것에 대해서 아비의 심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은 아니다(고전4:14)"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와 같이 대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복음으로써 그들을 낳았기 때문이라 했다(고전4:15). 사실 그리스도 안에는 많은 교사들이 있다. 하지만 아비와 같은 교사는 그리 많지는 않다고 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아버지가 되어서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그들에 말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을 돌아다보고 반성하라는 것이다.

  이어 바울은 진정 하고자 하는 말이 더 있지만 보내는 편지 말고도, 따로 보내는 디모데가 있으니, 그를 통해서 자신의 뜻이 전달될 것이라고 했다. 혹 어떤 이는 바울이 고린도에 오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주께서 허락한다면 속히 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을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 잘하는 것에 있지 아니하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에 다시 나아갈 때에는 과연 매를 가지고 나가게 될른지 아니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영)으로 나아가게 될른지는 그들이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마무리한다. 이렇게 함으로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자신들이 가졌던 교만한 마음을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까지 대신 보내서 진정 그들이 회개하게 될른지를 확인해 보겠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사람이 가진 교만함을 단 번에 버린다는 것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8. 나오며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의 나이는 약 오십대 중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사도바울은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에게서 때로는 아버지의 엄위한 모습도 발견할 수 있지만 때로는 어머니의 자상한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더불어 복음사역자로서 복음사역에 대한 완전한 변호도 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도바울은 한 편으로는 매우 겸손했다. 자신에 대해서는 결단코 무엇인가를 누리고 살려고 하거나 스스로 왕노릇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가진 모든 이권을 내려놓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전해야 할 말복음에 있어서만큼은 늘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복음사역자들을 함부로 판단하는 교만한 이들에 대해서 따끔한 질책도 아끼지 않았다. 복음사역자들에게 자긍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분열의 기저에는 교만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분석해내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세 자신이 교만한다고 생각되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그들이 얼마나 지금 잘못되어 있는지를 정확히 지적했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사람이며 성령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만약 성령께서 그들을 진단할 수 있도록 이러한 지혜를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렇게 그들의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가 있었겠는가? 기도의 사람이자 성령의 사람으로 사도바울은 교회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교회의지킴이다. 이제 끝으로 그는 고린도교회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위치와 성령의 지혜를 가지고서 그들의 분열의 문제를 일단락 짓는다. 그리하여 이 편지를 받은 고린도교회는 분열이 사라지게 된다. 

 

2021년 05월 12일(수)

정병진목사

교회의 사역자들치고 사실 열심히 수고하지 않는 사역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렇게 힘쓰고 수고했던 것에 대한 보상은 과연 어떻게 주어지는 것인가? 그리고 성도들의 수고와 노력도 상이 있을터인데 그때 과연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 것인가? 모든 것이 다 상으로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기준에 따라서 평가된 후에 주어지는 것인가? 그것에 대한 속시원한 답이 바로 오늘 말씀에 들어 있다.

2021-05-05(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07) 하나님의 사역자와 성도들이 장차 받게 될 상과 벌(고전3:1~1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kMtTwy0sIjg  [혹은  https://tv.naver.com/v/20028648 ] 

 

1. 들어가며

  고린도전서는 어떤 책인가?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2차전도여행 때에 개척했던 교회를 향해 3차전도여행을 하면서 보낸 편지이다. 바울 고린도전서를 보낼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여러 경고를 통해 들었던 고린도교회의 상황과 또한 이 번의 보내는 편지 곧 고린도전서를 보내기 전에 이미 그들과 주고 받았던 편지 속에 그들의 궁금증에 대해 답하는 형식으로 이 편지를 썼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는 일반적으로 교회가 개척되어 성장하는 가운데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문제들이 등장한다. 굵직한 것만을 보더라도 10가지의 문제들이 보인다(.분쟁, 근친상간, 소송, 음행, 결혼 및 이혼, 머리에 쓰는 것, 주의 만찬, 영적 은사들, 부활). 그중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분쟁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고회 사역자들의 역할과 기능 및 그들의 수고에 대한 보상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고린도전서 3장의 위치는 무엇인가?

  고린도교회내의 있는 분쟁에 대해서 소식을 들었던 바울은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그것이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분쟁을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로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장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러한 십자가의 말씀과 하나님의 지혜라고 할지라도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깨달을 수 없다. 그러므로 혼에 속한 사람은 결단코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가 되었다면 그는 진정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고린도전서 2장의 내용이다. 이어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미성숙함을 책망하면서 사역자들의 역할과 위치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사역자들에게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터 위에 교회를 어떻게 건축해야 하는지를 주의하라고 당부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배울 고린도전서 3장 전반부의 내용이다(고전3:1~15).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과연 고린도교회의 어떤 면을 보고서 그들을 영적인 어린아이로 진단했던 것일까? 그리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사역자의 역할과 위치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했으며, 그들의 수고와 노력에 대해서 합당한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했을까?

 

3.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어떻게 진단했는가?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영적인 건강 상태를 어떻게 진단했을까? 그것은 고전3: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다. 바울은 그들의 영적 수준을 영적인 어린아이라고 진단했다.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영적인 사람들이라고 자처했지만, 실은 그들은 다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양식, 밥)은 먹을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그들은 육신에 속한 자로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아직도 그들에게 있는 시기와 분쟁이다. 그렇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상당히 높은 영적인 수준으로 자들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고린도 지역이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갖가지 은사를 주어서 그들에게 은사들이 가득하게 했지만, 그들의 신앙은 아직도 미성숙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을 배려할 줄 몰랐고 오직 자기를 자랑하기에 바빴으며 그리고 자기를 가르치고 양육해준 사역자들을 따라 분파를 만들어 시기와 질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한 몸인 교회를 찢어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들을 영적으로 어린아이라고 진단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도바울이 말한 "젖"이란 무엇을 가리키며, "단단한 식물"이란 또 무엇을 가리키는가? 여기서 "젖"이란 유아가 먹는 양식으로서 이미 부모에 의해 어느정도 분해되어 아기가 바로 마기시만 해도 되는 부드러운 양식을 가리킨다. 그리고 "단단한 식물"이란 곡물이나 고기 종류의 양식으로서 그것을 받아먹는 자가 스스로 이빨로 씹어서 소화시켜야 하는 거친 양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젖'은 영적인 어린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신앙의 기초적인 교리라고 한다면, '단단한 식물'이란 좀 더 영적으로 성장한 자가 먹을 수 있는 양식으로서, 책망이나 영적 전쟁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이나 섭리 또한 하나님의 뜻과 같은 깊은 신앙의 말씀들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단단한 음식이란 장성한 자의 음식으로서 "의의 말씀" 같은 것이라고 하였고, 또한 스스로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히5:11~14).

 

4. 고린도교회에 있어서 사역자들의 위치와 역할은 어떤 것이며 그들이 받을 상은 무엇인가?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한지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럼, 그들은 어떤 영적인 상태에 있었는가? 그들은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게 복음을 전해주었거나 자신에게 말씀으로 양육해 준 사역자를 떠받들어 숭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사역자들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교회에 붙여준 사역자들의 위치와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그들에게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인가?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고전3:5)" 그렇다. 아볼로나 바울같은 이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붙여준 사역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역자"란 어떤 의미의 말로 쓰인 것인가? 이 단어를 헬라어로 보면, "디아코노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디아(~을 통하여)"라는 접두어에다가 "코니스(먼지)"라는 명사가 붙어서 태어난 말로서, 먼지가 일어나도록 뛰어다니며 봉사하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바울은 세상에서 쓰이고 있는 이 단어를 차용하여, 그들을 교회의 일꾼 혹은 봉사자들을 의미하는 단어로 바꿔 사용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사역자들이란 먼지와 같아서 하나님께서 그를 불어버리면 언제라도 날아가버릴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도 가져왔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사역자들로서 교회를 세우고 양육하는 책임을 맡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사역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특별히 사도바울은 고전3:9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란 "하나님의 밭(경작지, 농장)이요, 하나님의 집(건축물)"이라고 하였다. 이는 사역자들이 교회를 자신의 농장으로 보고, 자신의 건축물로 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고전3:10). 그러므로 교회사역자는 누구나 자기자신의 농장을 만들거나 자기자신의 건축물을 세워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농장을 만들고, 그리스도의 건축물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에 주의하지 않는 건축자가 있다면, 그는 이어지는 본문에 나오는 말씀처럼 자신의 노력과 수고를 시험받을 때에 자신의 모든 공적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상을 받을 수도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늘 언제나 자신은 하나님께서 불러서 일하게 한 먼지와 같은 사역자임을 깨닫고,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와 달란트에 따라 일하는 봉사자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가 진실로 심는 이로서 사역했다면 훗날 그에게 합당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가 물주는 이로서 사역했다면 훗날 그에게 합당한 보상이 또한 주어질 것이다(고전3:7~8).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성도의 신앙을 성장시키는 분은 자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고전3:6).

 

5. 교회사역자는 건축가로서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자신도 교회의 사역자의 하나이지만 자신이 남에게 전파한 후에 도리어 버림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고 고전9장에서 언급한다. 그렇다. 사역자는 자기가 교회의 개척이나 양육을 책임 맡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교회는 그분의 농장이자 그분의 건축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사역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권면한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 사용하되, 지혜로운 건축기술가들이 되어야 한다. 누가 교회의 터를 닦아둔 채 있다면 그 위에 자신이 어떤 건축물을 세워야 하는지 심사숙고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쌓아올렸던 모든 흔적없이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건축기술가들은 이처럼 누구의 농장에서 누구의 건축물을 세우고 있는지를 항상 명심하고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6. 사역자들의 수고와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고 한다. 또한 누구나 자신의 업적을 남기려고 한다. 그러나 교회의 사역자들은 자기의 이름을 남기거나 자신의 업적을 남기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을 남기고 그리스도의 업적을 남기라고 부름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사람의 눈이 보기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계산되어지는 업적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업적이든지 그날에 불시험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남긴 업적이 불시험을 통과할 때에 다 타서 없어진다면 그는 자신이 그간 수고했고 노력했던 모든 결과물들은 하루 아침에 잃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자신의 수고와 노력이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 열매맺을 것인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불시험을 통과할 때 없어지 아니하고 영원히 남아있을 업적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해 사도바울은 재료가 매우 중요하다고 권면한다. 어떤 재료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건축가가 집을 지을 때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을 사용하면 그것은 불시험을 잘 견뎌낼 것이다. 왜냐하면 불이 붙어도 그것들은 타지도 않을 것이며 변형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는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즉시 불타 없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건축기술가가 집을 건축할 때에는 반드시 금이나 은이나 보석같은 자료를 사용하여 건축물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그것이 불시험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역의 자료들로서 금과 은과 보석 및 나무와 풀과 짚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사도바울은 고전 3장에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하여 따로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아마도 들으면 금방 알 수 있는 것들이어서 그렇게 썼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재료들을 두 가지의 묶음으로 구별하여 기록하였다. 하나는 불에 타지 않는 것들로서 한 묶음이요 또 하나는 불에 타는 것들들로 한 묶음이다. 그러나 같은 묶음이더라도 각각의 값어치는 다르다. 즉 금과 은과 보석은 각각의 값어치가 서로 다를 것이며, 나무와 풀과 짚도 각각 값어치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이 두가지 묶음의 자료를 언급할 때에는 어떤 마음으로 이것들을 등장시켰을까? 아마도 이것은 그것들이 건축재료이니만큼 어떻게 해서 조성된 것인지에 주안점이 있었을 것이다. 먼저 금과 은과 보석을 보자. 이것들은 결코 흔한 것들이 아니며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도 아니다. 좀 귀한 것들이다. 그리고 값어치가 나가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엄청난 고열과 엄청난 압력을 통과했던 것들이다. 그것은 아마도 고난과 핍박과 역경을 통과함으로서 비로소 산출되는 재료들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성경에서 예표론적으로 본다면, 삼위 하나님의 속성을 언급하고 있다. 즉 금은 불순물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는 순수하고 깨끗한 성부의 속성을 가리키고, 은은 독을 제거해주는 성자의 속성을 가리키며, 마지막으로 보석은 여러가지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생성되는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건축물의 재료가 하나님으로부터 산출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연유하여 산출된 공적만이 영원히 남게 되며, 그것이 그에게 상급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반대로 또 하나의 묶음은 그냥 자연상태에서 쉽게 얻어지는 것들이요 흔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금이나 은이나 보석에 비해서 나무나 풀이나 짚은 금방 구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더군다가 이것들은 어떤 엄청난 고열이나 압력의 과정을 거친 것들도 아니다. 그냥 자연상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뿐이다. 아직 다루심을 받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이 만약 시험하는 불이 엉겨붙게 된다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재료들은 즉시 불에 다 타서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지 않은 천연적인 성분을 가지고 교회를 건축하고 있는 건축자라면 그날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상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다르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도 않으며, 언제 어디서든지 그 값어치가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재료로 하나님의 교회를 건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7. 나오며

  그렇다 교회를 분열시키는 원인에는 성도들이 사역자들을 우상화하는 데에도 있다. 사역자를 신성시하는 것이다. 그 사역자의 말이라면 성경과 틀린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냥 믿는 것이다. 그분이 하신 말이면 다 옳은 것이라고 믿고 따라가는 것이 교회의 분열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천국에 들어갈 때 상얻기가 힘들다. 아니 천국에 들어가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말세에는 거짓선지자와 거짓그리스도들이 일어나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해주셨기 때문이다. 성도들을 미혹하고 죽이는 요한계시록의 짐승들의 속성을 보라. 그들의 속성도 선지자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잘못은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결국은 어떠한 것인가? 불못행이다.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거짓선지자들을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지실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계21:8). 그렇다. 사역자가 잘못되면 주님이 피값으로 사신 교회에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에 씨를 뿌리되 자기의 씨를 뿌리게 되고, 자기의 건축물을 세우기 때문이다. 그런 자에게 그날이 찾아오면, 심판대 앞에서 나아가 자신의 공적을 시험받기 될 때에 큰 어려움을 만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공적을 하나도 인정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수고했으나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은 주님의 성분인 금과 은과 보석이었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천연적인 인간의 본성들로서 나무와 풀과 짚이었기에 그날 다 불 타 없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역자들은 성도들로부터 숭배를 받아도 안 되지만, 교회의 터를 닦고 건축물을 세울 때 자가의 건축물을 세우지 않도록 정말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터 위에 그리스도의 농장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고전3:9). 그리고 그 최종 건축물은 그리스도로 지어진 건축물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고전3:9). 그러한 결과만이 불시험을 통과하게 될 것이며, 그날 불시험을 통과하여 남은 것만이 영원히 그 사람에게 상급으로 장차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5월 05일(수)

정병진목사

 

사도바울은 교회분쟁의 해결의 열쇠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찾는다. 거기에서 주께서 모든 소극적인 것들을 다 끝내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깨닫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일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령이 없이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비밀한 지혜를 결코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영적 분별력의 기초로서 성령의 역할은 대체 어떤 것인가? 2021-04-28(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06) 성령으로만 깨달을 수 있는 비밀한 하나님의 지혜(고전2:6~1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kYrIruN7Bj4 [혹은 https://tv.naver.com/v/19924864 ]

 

1. 들어가며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 이어 2장에 들어와서도 역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계속 강조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이자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지혜라 할지라도 그 지혜가 모든 사람에게 다 열리는 것이 아님도 언급한다. 그것은 그것을 깨우쳐주시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지가 중요한 관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깨우쳐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성령을 거부하는 자는 그것을 결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감추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함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비밀한 하나님의 지혜와 그것을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이 세상의 지혜와 이 세상의 통치자들의 지혜의 한계를 살펴보고,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고린도전서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배경를 우선 살펴볼 것이며, 이어서 비밀한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2. 바울이 고린도전서 이전에 써보냈던 편지는 무엇이며, 그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던진 질문은 무엇인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갑자기 이런 말을 언급한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고전5:9)" 그렇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쓰기 전에도 적어도 하나 이상의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보냈던 것이다. 그때에도 역시 고린도 교회의 음행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였고 그내용인즉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실행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다시 한 번 편지를 써보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발생한 10가지 이상의 문제들을 언급하면서 사도로서 그리고 그 교회를 개척한 지도자로서 그들을 권면하고 책망을 한다. 한편 이러한 권면이나 책망을 살펴보면, 바울의 영적인 판단에 따라서 쓴 것도 있지만, 이전에 바울의 편지를 받고서 그들이 바울에게 질문한 것들도 더러 있다. 그러한 질문에는 작은 질문까지 포함해서 약 7가지나 된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은 대개 "~에 대하여(관하여)"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던진 질문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임박한 재림을 앞두고 과연 결혼해야 하는가?(고전7:1) 둘째, 처녀 딸(혹은 약혼녀)를 둔 아버지(혹은 약혼남)가 자신의 처녀 딸(혹은 약혼녀)를 시집보내야 하는가 아니면 독신으로 살게 할 것인가?(고전7:25). 셋째, 우상의 제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고전8:1~3) 넷째, 우상의 제물은 과연 먹어도 되는가?(고전8장,10장) 다섯째, 신령한 은사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성도는 어떤 은사들을 구해야 하며, 또한 방언과 예언은 교회생활에 어떤 유익이 있고 도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고전12:1~14:40) 여섯째, 성도들은 어떻게 연보를 준비해야 하는가?(고전16:1) 일곱째, 형제 아볼로가 그들에게 과연 갈 것인가 아닌가?(고전16:12)
 

3. 이 세대의 지혜와 이 세대의 통치자들은 절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한 지혜란 무엇인가?

  사도바울은 이 세상(시대)의 지혜와 이 세상(세대)의 통치자들의 지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고전2:6~7).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면 그들은 결코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고전2:8~9). 그러므로 성령의 도움 없는 이 세상의 지혜와 이 세상의 통치자들의 지혜는 사실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깨달을 수도 없으며, 그것으로는 구원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감추어진 지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혜가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만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구원할 계획 곧 깊은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4. 성령의 깨우쳐주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라면 누구나 영적인 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되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기를 원한다면 성령의 도움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지적한다(고전2:10~11).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고 통달하시기 때문이다(고전2:10). 사실 사람의 사정은 사람 속에 있는 영 외에는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고전2:11).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알고 구원을 받기를 원한다면, 그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그런 까닭에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는 영적인 것을 분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란 세상으로부터 오는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육신에 속한 자들 곧 혼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어리석게만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가진 지혜로서는 십자가의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도무지 깨달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에게서만 나타나는 증상은 아니다. 혼에 속한 사람에게서도 그러한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왜나하면 그 사람의 혼이 여전히 육신에게 포로로 잡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혼적인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이미 육신에게 팔려있기 때문에, 거듭나서 성령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성령께 자신을 위탁할 줄 모르면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혼이 발달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자기 안에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잣대로 모든 것을 분석하고 판단을 한다. 그들에게 판단기준은 성령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이미 그들 안에 들어와 있어도 그들 자신의 주권을 성령께 내주지 않는다면 그는 여전히 혼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자들을 가리켜 우리는 "혼에 속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혼에 속한 사람은 불신자들 중에도 있지만 믿는 자들 중에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의 깨우침을 따라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빨리 돌이켜 영에 속한 사람으로 전환해야 한다. 만약 영으로 자신을 돌이키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깊은 것을 결코 깨달을 수가 없다. 특히 자기자신 안에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것을 거부한 사람은 결코 스스로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서 믿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지혜를 얻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또다른 보혜사로서 이 땅에 오신 성령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자신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시기를 사모하고 그분에게 자신을 맡길 수 있어야 한다. 그때에 비로소 그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다. 그러면, 어느날 십자가의 못박힌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게 될 것이고 온전한 구원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온전히 깨달을 수가 있다. 

 

5. 나오며

  고린도전서는 사실 교회서신이다. 곧 고린도전서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라 교회의 전 회중에게 보낸 책이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는 다른 어떤 책보다도 교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제반 문제를 다 망라하고 있다. 또한 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까지 함께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혹 오늘날 자신의 교회가 고린도교회처럼 성장하지 못한 채 분쟁하고 싸우고 있다면 필히 고린도전서를 읽게 할 필요가 있다. 고린도전서에는 어떻게 교회에 발생한 분쟁과 무기력함 그리고 성도들의 교만을 제거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 반대로 순수하고 온전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고린도교회는 한 두 가지 문제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교회는 크게 10가지 이상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작게 본다면 약 15가지 정도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써보냄으로 그러한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그 해결의 핵심은 바로 "십자가에 못박한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면 그 어떤 것오 제자리에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분이 누군지를 알려주고 그분이 하신 말씀을 깨닫게 해주는 성령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성도들의 신앙의 성숙과 신앙의 성장 속도는 사실 그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있으며, 성령의 인도를 얼마나 받고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모든 문제의 해결의 열쇠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자신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영으로 대신하여 오신 보혜사 성령께 달려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고전2:16에서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한다. 그것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와의 영(루하흐 예호바)"을 "주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언급한다는 것이다(사40:13~14). 여기에 나오는 "주"는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가리킨다. 이는 구약의 여호와가 주님이신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오신 분이 곧 성령님이라는 것이다. 성령님이란 보혜사이신 예수님의 또다른 오심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건승을 빈다. 

 

2021년 04월 28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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