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서 고린도전서 강해가 끝마쳐진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교회들 가운데 가장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들의 성숙되지 못한 신앙이 어떻게 지체들에게 역사하고 있었으며, 온전하지 못한 부활신앙은 또한 어떤 폐해를 주고 있었는지까지도 살펴보았다. 그중에서 오늘은 바울이 자기의 마음 속에 담고 있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꺼내놓았다.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진정 바라고 바랬던 성숙한 신앙은 대체 무엇이었던 것일까? 그 비밀이 오늘 밝혀진다. 2021-10-27(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25)[최종회] 교회성도를 위한 연보와 바울의 마지막 부탁 및 인사(고전16:1~2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bn6GG5k6h2Q [혹은 https://tv.naver.com/v/23209272 ]

 

1. 들어가며

  고린도전서는 총 16장으로 구성된 것으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다. 그중의 핵심 사항은 1장부터 15장 안에 들어 있으니, 고린도전서는 15장으로 끝났다고 해도 큰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6장은 일종의 '첨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6장은 너무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장에서 자신의 속에 있는 마음을 마지막으로 꺼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조금만 비집어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의 속마음이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도를 하기 전에 그가 한 말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누가 되었든지 저주를 받으라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6:22). 바울은 왜 이러한 말을 마지막으로 써야 했던 것일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좀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 첨언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의 말은 알고 보면 참으로 뼈아픈 말이기 때문이다. 

 

2. 고린도전서 16장은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고린도전서는 총 16장으로 구성된 편지로서 내용을 뜯어보면 총 세 부분인 것을 알 수 있다. 첫 부분은 1:1~9의 도입부이며, 중간 부분은 1:10~15장까지의 본론부요, 끝 부분은 16장으로서 종결부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본론부는 또다시 1:10~6장까지의 전반부가 있다. 이 전반부에서는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도덕적 무질서에 대한 바울의 책망과 훈계가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1~4장까지는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분파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5장에서는 근친상간의 음행의 문제를 그리고 6장에서는 성도 간의 소송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7장~15장까지의 후반부인데, 여기에서는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신앙 생활의 중요한 현안들에 대한 바울의 목회적 답변이 기록되어 있다. 그중 7장에는 성도들의 결혼과 이혼과 재혼에 관하여 기술되어 있고, 8~10장에서는 우상 제물의 취식 문제, 11장에서는 예배 중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와 성찬식 전에 진행되었던 애찬식이 갖고 있는 문제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2~14장에서는 고린도전서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의 문제를 다룬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처럼 성령의 은사가 풍성히 나타난 교회가 성경에는 나오지 않으며, 또한 그것으로 인하여 그렇게 시끄러운 교회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12장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9가지 은사와 한 몸 됨의 관계 그리고 성령의 직분의 은사를 다루고 있고, 13장에서는 사랑의 은사를, 그리고 14장에서는 방언과 예언 그리고 방언 통역의 은사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5장에서는 고린도전서에 유일하게 나오는 교리에 관한 부분으로서 '부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과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가능한가? 그리고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으며, 부활 때에는 어떠한 몸을 입는가 하는 것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종결부로서 16장이 있다. 오늘은 이 마지막 종결부를 쭉 살펴보고 그것을 정리하고자 한다. 종결부로서 고린도전서 16장은 또다시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1~4절에서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의 수집 및 전달 방법에 대한 지침이 나온다. 그리고 5~12절에서는 바울의 고린도 교회 방문 계획 및 디모데 파송 소식 그리고 고린도 교회가 궁금해하고 있는 아볼로의 고린도 방문 여부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3~24절에서는 바울의 마지막 권면 및 문안 인사 그리고 축도가 나온다. 

 

3. 가난해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바울은 어떻게 연보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가?

  사실 고린도 교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 예루살렘 교회는 '할아버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의 전도로 인하여 최초의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고, 이어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한 전도자들 곧 바울의 전도팀에 의하여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가 A.D.53~55년경에 심한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롬15:25~26). 아마도 예루살렘의 선지자 아가보가 예언한 대로 로마의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므로 그들로부터 영적인 소산을 물려받아 성장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게 바울은 이미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바와 같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제 그와 같은 사실을 확인하면서 어떻게 연보를 할 때에, 억지나 인색함으로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헌신과 기쁨의 연보가 될 수 있는지를 말한다. 그것은 매주 첫 날(당시에 이방인들은 안식 후 첫 날인 오늘날의 '주일'에 모였다)에 각 성도들이 자기의 형통함의 정도를 따라 미리 연보할 것을 따로 떼어 두었다가 바울이 갈 때에 연보를 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고전16:2). 하나님께서는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내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고후9:7). 또한 미리 준비하여 연보하는 것이 참 연보다운 연보이기 때문이다(고후9:5).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드린 연보를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그것은 원래 바울이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것이 바른 것이지만 혹시 모를 불신을 종식시키기 위해, 고린도 교회가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 주고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바울도 함께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과 같이 가겠노라고 말한다(고전16:3~4). 그렇다. 바울은 교회에서 물질이 중요한 문제인 만큼, 헌금의 투명한 전달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역할까지도 기꺼이 내려놓은 것이다. 

 

4.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어떤 방문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가?

  먼저, 구제 헌금의 문제를 언급한 바울은 이제 자신의 고린도 교회 방문 계획을 그들에게 밝힌다. 그것은 당시에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고 있었지만 육로를 이용하여 마케도냐(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거쳐서 아가야(아덴, 고린도)로 이동할 계획이라고 말한다(고전16:5~6). 그리고 만약 고린도에 도착하게 된다면 고린도에서 겨울을 보낼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다음 선교지로 생각하고 있는 로마와 서바나(스페인)에 대한 계획을 고린도 교회에 전달하고 그 교회로부터 선교 지원을 받았으면 한다고 말을 꺼낸 것이다(고전16:5~6). 이러한 고린도 방문 계획은 일시적으로 잠깐 스쳐 지나가는 고린도 교회 방문이 아니라 고린도에서 약 3개월 정도 머물면서 다음 선교지를 향해 출발하겠다는 계획인 것을 밝힌 것이다(고전16:7).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전도 활동으로 세운 교회들 가운데 두 번째로 바울이 애지중지한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2차 전도 여행 때에 얼마 머무르지 못했던 마케도냐의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그에게 몇 번이고 선교 헌금을 보내왔는데, 고린도 교회는 상당히 큰 규모의 교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 합당한 사례비도 주지 않았을 뿐더러 선교 헌금이나 구제 헌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은 하나님께서 에베소에 열어 놓은선교의 문을 닫을 수 없기에 그곳에 잠시나마 머물러 있지만(물론 동시에 대적자들의 방해도 심했다), 곧 고린도에 가게 된다면 4차 전도 여행을 준비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고린도 교회의 지원을 받고 싶다고 말을 꺼낸 것이다(고전16:6). 고로 바울의 고린도 교회 방문 계획과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관한 말씀을 종합해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마땅히 실천해야 할 실제적인 사랑과 헌신에 대해 지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받은 은혜가 무궁무진한데도 불구하고 구제 및 선교 활동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다. 받은 은혜는 많았지만 그것을 갚지 못하고 받기만 하는 교회가 고린도 교회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내는 헌금을 가리켜 '은혜'라고 일부러 둘러서 표현한 것이다(고전16:3). 받은 은혜를 그들은 자기들만 받고 다른 이들에게는 그 은혜를 나눠 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와 아볼로의 소식을 그들에게 전달해 준다(고전16:10~12). 사실 바울이 이 고린도 전서의 편지를 쓰고 있을 때에 그는 이미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에 보낸 상태였다(고전4:17). 그러면서 그들에게 디모데에 대해 소개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아들과 같다고 했으며(고전4:17), 자신과 같이 주의 일에 힘쓰는 자라고 했다(고전16:10). 그러므로 그가 나이가 어리다 하여 업신여기지 말고 바울을 영접하듯이 그를 영접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래서 그가 그 교회에 가더라도 멸시받지 않고 평안히 다시 자기에게로 올 수 있도록 편의를 봐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돌아올 때에는 그 교회에 있는 몇몇 형제들을 같이 보내 달라고 요청을 한다. 이는 그 교회가 이전에 자기에게는 제대로 교역자 대우를 하지 못했지만 이번에 보낸 디모데에게만큼은 합당한 대우를 해 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그들이 궁금해하는 아볼로의 소식도 전해 준다(고전16:12). 왜냐하면 그들은 아볼로가 오기를 많이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볼로에게 고린도 교회가 보낸 형제들과 함께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것을 많이 권했음을 언급한다. 하지만 아볼로는 그때는 갈 뜻이 전혀 없고 기회가 되면 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는 아볼로의 사려 깊은 행동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도 그 교회가 분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아볼로가 그곳을 방문하고 이어서 바울이 또 방문하면 틀림없이 아볼로파와 바울파가 대립하여 또다시 서로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복음 사역자들에게는 자기에게 맡겨진 은사와 달란트를 따라 교회를 섬기고 온전케 해야 한다. 하지만 언제 그 일을 해야 하는지도 매우 중요하다. 복음 사역자들은 때마다 일마다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5. 바울의 마지막 권면은 무엇이며, 어떤 문안 인사를 했는가? 

  바울은 늘 고린도 교회를 걱정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 있어서는 정말 부족함이 없는 교회였는데, 그들의 성품과 행동 그리고 말은 여전히 어린아이 같아서 분쟁과 시기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최종적으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5가지 사항을 권면한다(고전16:13~14). 첫째, 깨어 있으라. 둘째, 믿음에 굳게 서라. 셋째, 남자답게 행동하라. 넷째, 강해져라. 다섯째, 그러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그렇다. 고린도 교회는 어린아이와 같이 약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남자답게 강하게 될 것을 마지막으로 주문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문안을 한다. 먼저는 그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바울을 찾아온 세 명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근황을 전하면서 그들을 칭찬한다(고전16:15~18). 특별히 그중의 한 명인 '스데바나'는 아가야의 첫 열매로서 그의 온 집안이 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면서, 교회에서도 성도 섬기기에 알려진 사람이니만큼 그리고 주의 일에 수고하는 자들인 만큼 그를 존중해 주고 그런 일을 하는 형제들에게도 순종할 것을 권고한다(고전16:15~16). 아마도 그는 바울이 아가야의 첫 성이었던 아덴에 전도하러 갔을 때에 전도된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가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데 혁혁한 일을 한 것 같고, 이제 고린도 교회의 제반 문제를 물어보기 위해 고린도 교회의 파송을 받아 에베소에 온 것이다. 그러자 바울은 '스데바나'를 칭찬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온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에 대해서도 더불어 칭찬을 하는데, 이는 자기가 그들로 인하여 답답한 마음이 시원함을 입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노고를 알아주라는 것이다. 

  이어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의 안부를 그 교회에게 전한다. 바울이 위치한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베소 교회, 골로새 교회, 두아디라 교회, 서머나 교회. 히에라볼리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등등)이 문안하고, 특히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에 만나서 바울의 협력자가 되어 준 아굴라와 브리스가 그리고 그 집에 있는 교회의 문안을 전한다. 사실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에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으나,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가 있어서 그들은 바울처럼 텐트 만드는 일을 함으로 그 수입으로 바울의 선교 사역을 위해 지원하고 있었다. 또한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시에도 에베소에까지 와서 그를 돕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마 바울 평생에 가장 고마운 분이 이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 전도팀 및 교회 그리고 고린도 교회가 각각 거룩한 입맞춤 곧 성령 안에서의 영적인 교제 곧 기도의 교통을 계속하라고 권면한다(고전16:20).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편지가 사도인 자기의 친필이 들어간 책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필레오'사랑으로 친구 간의 사랑) 아니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언급한다(고전16:22a). 이는 그들이 진정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은 하지만 지금처럼 자기 교회를 개척해 준 지도자를 사랑하여 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한가를 말한 것이다. 그만큼 그 교회의 지체들은 받은 은혜를 실천하는 면에서는 매우 부족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라나타'('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아람어)라는 말로서 당시의 성도들 간의 인삿말을 그들에게 전한다(고전16:22b). 이는 주께서 그들의 세대에 오실 것을 다 기대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도 그들은 받은 은혜를 남에게 베풀면서 살지 않고 있었고, 계속해서 받으려고만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우리도 과연 언제까지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어린아이로 살아갈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끝으로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신의 사랑이 그들에게 가득하기를 축복하면서 편지를 마무리 한다(고전16:23~24). 

 

6. 나오며

  바울에게 있어서 고린도 교회는 아마도 에베소 교회 다음으로 공을 듬뿍 들인 교회인 것 같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 중에서 고린도 교회는 두 번째로 오래 머물렀던 교회였으며, 그 교회의 문제를 들었을 때에는 직접 자신의 사람을 보내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게는 편지도 두 차례 이상으로 써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같다고 말했다(고전3:1).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은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 같이 서로 간에 치고박고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을 교회의 공중 예배 시간에 자랑하듯 말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영적인 성숙도는 매우 낮은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린도'라는 지역은 특성상 이러한 은사들이 없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고린도 교회는 탄생하지도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하는 말씀처럼 고린도 교회는 음행과 우상 숭배가 가득한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받아들였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에게 매우 다양하고 많은 은사들을 주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린아이인지라 그것을 사용할 줄도 잘 몰랐고 그것을 자기 자랑하는데에만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로 바울은 그 교회의 개척 목회자로서 그 교회가 성숙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교회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아비와 같은 심정으로 권면을 하였다. 때로는 엄하게 책망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달래기도 하면서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해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준 것이다. 그런데 그는 편지를 마감하면서 그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맹점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면서 이전까지는 그들이 받기만 했던 신앙생활이었다면, 이제는 나눠주는 신앙생활을 감당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피력한 것이다. 그들이 이와 같은 바울의 염원을 알아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이 서신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읽어 보면 그들은 여전히 어린아이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 우리도 교회에 다닌지 수십 년이 흘렀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의 신앙 안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은 정말 값없는 은혜를 받았지만 그것을 누군가에게 나누기 위해서 응당 내가 치러야 할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이제 우리도 달라져야 함을 느낀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아가서에 나오는 술람미 신부처럼, 다른 신부를 산출하고 양육하며 성장하는 신부가 되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다. 

 

2021년 10월 27일(수)

정병진목사

 

오늘날 기독교인 치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부정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부활이 언제 일어나게 되는지, 지금 죽은 성도들은 대체 어디로 가 있는지 그리고 부활체와 영체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죽으면 무덤 속에 들어가서 쉬고 있다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부활한다고 믿는 분들도 더러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부활관을 가진 자들은 자기 식구가 죽어도 화장을 못하게 한다. 장차 있을 육체의 부활을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부활에 관한 잘못된 상식들과 부활신앙의 역사 그리고 부활의 순서와 영광스러움에 관하여 전체적으로 조망해보고자 한다. 자, 놀라운 부활의 신비,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 보자. 

 

2021-10-06(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23)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의 부활(고전15:1~3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R-NJValI3Sg  [혹은  https://tv.naver.com/v/22836669 ]

 

1. 들어가며

  고린도전서에서 교리 부분이 있다면 유일하게 고린도전서 15장 한 장 뿐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인 '부활'에 관한 말씀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종말론과 관련지어서 그리스도인들의 부활관도 사실은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오늘날 들어와서 그리스도인들 중에 부활이 없다거나 혹은 부활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사람이 부활할 때에 어떤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지 또한 부활은 언제 일어나게 되는지 관하여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리고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지에 관하여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시체는 땅 속에 묻히지만 그의 영혼은 무덤 속에서 잠자는 상태에 있는가? 그렇다는 분들도 있고, 죽은 다음 하늘에 있는 낙원에 올라간다는 분들도 있다. 그리고 죽더라도 즉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서 산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누가 맞는 주장을 하고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부활에 관하여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바를 살펴보고자 한다. 만약 지금 나의 부활 신앙은 어떤 것이며, 혹 잘못 믿고 있다면 어떤 것을 잘못 믿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란다.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내가 죽은 후에 받을 다음 세계의 보상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부활 신앙에 관하여 잘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신약성경 중에서 부활장으로 일컬어지는 고린도전서 15장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웬만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기록된 아주 중요한 성경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주제로 다룰 때에는 공관복음서에 등장하고 있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만큼 공관복음서 이외에 부활에 관한 가장 중요한 말씀이 오늘 우리가 다룰 본문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에서 15장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주지하시다시피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에 발생한 신앙의 전반적인 문제들을 짚어 보고 그것에 대한 처방책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고린도전서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때에 그 내용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기록하였다. 하나는 고린도교회에 발생한 문제들을 직접 진단하여 처방전을 내리는 전반부(1:10~6장)이고, 또 하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질문했던 내용을 목회자로서 답변하는 후반부(7~15장)이다. 전반부는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고린도교회의 분쟁 및 분파 문제(1~4장), 성도의 근친상간과 음행의 문제(5장)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간의 송사문제(6장)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목회적 답변으로서, 결혼과 이혼과 재혼 문제(7장), 우상의 제물의 섭취 문제(8~10장), 공중예배 가운데 여자들이 머리에 두건을 쓰는 문제(11장 전반부)와 성만찬 문제(11장 후반부) 그리고 성령의 은사 문제(12~14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활의 문제(고전15장)가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다룰 부분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질문 가운데 부활에 관한 문제로서 교리 부분을 처음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3. 고린도 교회에서는 부활에 관하여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이 그들에게 전해 주었던 부활 신앙을 버리고 헬라 철학 사상을 수용하여 변질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활할 때에 사람이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며, 부활할 때에 어떤 방식으로 부활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궁금해하고 있는 2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고린도전서 15장을 기록하고 있다. 그중 첫 번째 그들의 질문은 12절에 나와 있다. 그것은 죽은 자들이 정말로 부활하게 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고전15:12).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35절에 나와 있으니, 부활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몸으로 부활할 것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부활할 것이냐 하는 질문이었다. 바울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처음 질문에 대한 답은 고린도전서 15:1~34에 답하고 있으며,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고린도전서 15:35~58에서 답하고 있다. 

 

4. 성도들의 부활의 예표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정말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었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의심하고 있는 죽은 성도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근거로서 먼저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실제했던 역사적인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요즘의 대부분의 종교들은 실제 교주가 그렇게 했는지 안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렇게 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실제 그렇게 했다고 믿어 버린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을 신적으로 숭배하기 위해 각색한 일이 아니라 실제로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든지 일어나지 않았든지 상관이 없는 부활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예언을 따라 죽으셨지만 성경을 따라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하면서, 이와 같은 사실은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직접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적으로 보았던 사람들을 기록해 놓고 있다. 그들은 사도 게바(베드로), 열두 제자들, 오백여 형제들, 야고보, 모든 사도들 그리고 조산아와 같은 사도 바울이었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 외에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더 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가 있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즉 그분의 부활을 막달라 마리아도 보았고,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도 보았으며,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12제자들 아님)도 보았기 때문이다. 

 

5.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전달해 준 복음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전달해 준 복음은 자기도 전달받아서 알게 된 복음이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전달받은 경로는 일반 사도들과는 달랐다. 일반 성도들이나 사도들은 복음을 받을 때에 보통 그것을 먼저 받았던 자들로부터 또다시 전달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누구로부터 들어서 전달받은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자신의 영의 눈으로 보고 알았으며, 그가 영으로 보았던 그것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가 어느새 사도 바울이 전해 준 복음에서 떠나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첫째는 사도 바울이 전해 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견고히 붙들지 않고 있었다.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고전15:1). 둘째는 사도 바울이 전해 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실제적인 일로 믿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들의 믿음을 공허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고전15:2).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확실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직접 목격하였던 자들이 여전히 바울 당시에도 살아 있었고, 또한 그것을 전해 주고 있었기 대문이다. 고로 우리는 복음의 핵심 내용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다시 우리를 위하여 일으키심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압축해 놓은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6.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제로 없었던 사건을 가짜로 말한 것이었다면 어떻게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제하지 않은 허구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며, 신앙 고백적으로만 존재하는 이야기였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부활 사건은 역사적인 사실이면서 동시에 신앙 고백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 그것을 믿고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러한 부활사건은 성도들의 구원 사건과도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가짜를 믿고 따르는 일이 될 것이고, 그러면 인류를 위한 그분의 속죄 사역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더욱이 부활이 가짜였다면 장차 자신의 부활이 있을 것임을 소망하고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죽은 후에 하늘에서 받을 상과 면류관을 기대했던 소망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결코 은밀하게 행하지 않으셨다. 당시에 예루살렘에 몰려왔던 120만 명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형 집행이 다 공개적으로 처리되도록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사형 사건도 그들의 눈 앞에서 일어난 사건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그분이 사흘 만에 살아난 것도 역사적인 사실로 보고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7. 사람이 죽으면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는가?

  사람이 죽는다면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인가? 어떤 이는 사람이 죽으면 무덤 속에서 잠자는 상태로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무덤 속에서 그의 육체가 신령한 몸으로 변하여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으면 죽은 즉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서, 사람의 육체는 원래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의 영혼은 즉시 부활체를 입고 악인은 땅속(음부, 지옥)으로 내려가고, 의인은 천국에 올가가기 때문이다. 둘 다 부활체를 입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들은 이 땅에서 입었던 육체를 다시 입는 것이 아니다. 영혼에게 몸이 주어짐으로 영의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죽었을 때에 쉬는 상태에 있다가 장차 주님 오시는 날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요한계시록을 보라. 이미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의 모습이 계속해서 나온다. 거기에는 24장로들도 나오고, 순교자들도 나오며, 144,000명의 처녀들도 나오고, 사도들과 선지자들도 나온다.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A.D.95년경에 쓰여진 책이라면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약 60~65년이 지난 시점에 이미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 중에는 왕 노릇하는 성도들도 있었던 것이다. 

 

8. 예수님을 비롯한 죽은 성도는 어떤 순서대로 부활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부활은 어떤 순서대로 일어나는가? 사도 바울에 따르면 첫 사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부활체를 입은 순서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첫째는 부활의 첫 열매인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계속해서 성도들의 부활이 있을 것임을 말해 준다. 그분은 부활의 첫 열매이시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예수님만 부활하셨고 나머지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시에 부활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첫 열매라는 단어의 의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다. 구약시대에 죽었던 모든 성도들은 영혼의 상태로 낙원에 가 있다가,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처음으로 살아나심으로 부활체를 입으신 직후에 모두가 한꺼번에 부활체를 입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낙원에 있던 성도들이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구약의 성도들 중에 이기는 자들이 144,000명의 명단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중에 대표자들은 24장로의 명단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신약의 성도들은 개인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오늘 이 시간까지 천국인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체를 입고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이후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개인적으로 부활체를 입는 성도들을 가리켜 사도 요한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계20:5~6). 그리고 주님의 재림시에는 한꺼번에 성도들의 추수 곧 휴거가 일어난다(살전4:16~17). 이것을 일컬어 '둘째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성도들의 마지막 부활인 것이다. 그리고 악한 영들의 높은 계급들인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사망을 멸하신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부활의 순서를 이렇게 말했다. 

고전15:23-26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9. 고린도 성도들이 부활을 믿고 있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고 있는 일부 고린도 성도들이 사실은 부활을 믿고 있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만약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면 죽은 자를 대신하여 세례를 받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고전15:30). 이것은 사실 성경적인 세례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있었던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그러한 사례를 들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미 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고 있었다고 말한다. 사실 바울 일행도 죽음을 무릅쓴 채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이유는 부활이 있음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고전15:31~32a). 만약 정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고 할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고전15:32).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깨어서 의를 행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죄를 짓지 말라고 한다.  

 

10. 나오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 신앙은 내세에 대한 신앙의 기초가 되는 아주 중요한 영역이다. 다음의 생이 없다고 한다면, 누가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으며 누가 주의 일을 충성되이 감당하겠는가? 부활은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생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인생의 목표가 달라질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영역인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죽음 후에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죽도록 충성한 사람에게는 커다란 상이 주어질 것이다. 물론 성도들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 모든 성도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기꺼이 고난을 감수할 수 있고, 죽음까지도 불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수고와 노력 그리고 헌신과 봉사, 심지어 순교까지도 사실은 부활 신앙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부활은 성도들 개인의 가장 큰 소망이며, 가장 확실한 기대인 것이다. 이것을 믿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자신의 인생을 주님께 드릴 수있으며, 선교사로 자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주를 위해 몸된 교회에서 충성하는 것이다. 다음 이 시간에는 부활 때 입을 새로운 몸이란 어떤 것이며, 그때에 그에게 어떤 영광이 주어지는지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2021년 10월 06일(수)

정병진목사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가운데에 말의 은사에는 방언과 방언통역과 예언의 은사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은사들은 교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것을 교회에서 사용하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할 때 이러한 은사들을 받을 수 있는가? 소나무 몇 개의 뿌리를 뽑으면 되는가? 그리고 이러한 은사를 구하려는 자는 무엇에 주의하며 구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은사는 받았지만 훗날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바깥 어두운데 떨어지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2021-09-29(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22) 방언과 예언의 은사 받는 법과 그것의 활용(고전14:20~4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LNUiRQRaTzU  [혹은  https://tv.naver.com/v/22704033 ]

1. 들어가며

  고린도전서 중에서 은사에 관한 부분은 12장부터 시작하여 14장까지 게속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은사의 문제는 고린도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에 속해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을 매우 귀하게 여겼으며 그것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이 자기의 덕만을 세운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었다.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서는 예언의 은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방언을 마치 자신의 영성을 자랑하기 위한 잣대로 삼았고 그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방언의 은사 사용을 교정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12장부터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와 더불어 직분의 은사를 언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제 14장에 들어와서 비로소 방언의 한계와 그것을 사용할 때에 주의해야 할 것을 언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방언도 좋은 은사에 해당되지만 방언은 예언에 비해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공중예배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방언과 예언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은사인지를 살펴보고, 방언이 지닌 한계점과 그것이 교회의 공예배에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은사를 사용할 때 주의할 점은 무엇인지도 함께 살펴보고, 어떻게 하면 방언이나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고린도전서 14:20~40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 들어와서 드디어 은사들 중에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방언'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바울은 방언 통역이나 예언도 방언과 함께 다룬다. 이는 방언 통역과 예언의 은사를 말하기 위함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방언의 잘못된 사용을 지적하면서, 방언의 바른 사용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면서 방언 통역과 예언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은 방언의 바른 사용을 위해서 견주어 비교하고 추천할 많은 은사가 방언 통역과 예언의 은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방언의 은사보다는 방언 통역과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우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19의 단락을 통하여, 방언이란 어떤 것이며 교회의 덕을 세움에 있어서 방언은 대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말한다. 이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방언보다는 예언이 상대적으로 유익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4:20~25절에서는 방언과 예언의 상반된 역할에 대해서 다룬다. 즉 이 두 가지 은사가 성령의 은사를 믿지 않는 자들과 불신자들에게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알려 준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4:26~40에서는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교회에서 사용할 때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이때 사도는 그것들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까지도 같이 알려 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은사 사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서와 품위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은사에 대한 말씀을 마치게 된다. 

 

3. 방언과 예언은 어떤 목적으로 주어진 은사들이며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사실 방언과 예언은 초자연적인 은사들 중에서 '방언 통역'의 은사와 더불어 '말'의 은사에 속한 은사에 해당한다. 그런데 '방언'과 '예언'은 그 목적에 있어서 거의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방언은 개인을 세워 주는 은사라고 한다면, 예언은 교회를 세워 주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방언이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사라고 한다면, 예언은 남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언과 예언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먼저, 첫째로 방언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자. 방언은 한 마디로 개인의 덕을 세워 주는 은사라고 할 수 있다(고전14:4). 왜냐하면 방언을 통역해 보면, 방언은 자신의 영에게 주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약 80~90%정도이며, 자기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약 10~20%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언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 3가지 정도로 나온다. 하나는 위로과 격려의 말씀이 나온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의 눈물을 보았노라. 모든 사람이 내 교회를 버리고 떠날 때에 너 만큼은 나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아 주어서 참으로 고마웠다. 너의 진심 어린 기도를 내가 들었으니 이제부터 내가 너의 앞 길을 친히 인도해 주마." 라는 말이 나온다. 또 하나는 책망(꾸짖음)과 폭로의 말씀도 들어 있다. 예를 들어, "너는 왜 나의 종을 쫓아내는 일에 앞장을 섰느냐? 내 종은 내가 판단한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내 종은 내가 세웠으니 내가 판단할 일인 것인데, 네가 네 손으로 그 종을 쫓아내었으니 네가 만일 그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너와 너의 집을 향한 나의 징계가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니라."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사명과 과업에 대한 말씀도 들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너를 이 땅에 보낸 것은 너만 믿고 구원 받으라고 보낸 것이 아니다. 네가 회개함으로 네 자식과 네 집안까지 일으켜 세우라고 내가 너를 보낸 것이다. 너는 네가 했던 일에만 만족하지 말고, 이제는 너의 눈을 들어 너의 가족과 너의 가문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고로 이렇듯 방언의 내용이 위로와 격려, 책망(꾸짖음)과 폭로, 사명과 과업에 대한 메시지인 것을 가정해 보면, 그것이 예언과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방언은 이러한 말씀을 방언하는 당사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을 통역하는 자가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적을 믿지도 않은 자나 불신자가 방언을 듣는다면, 아마도 그들을 미쳤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둘째로 예언의 역할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하자. 예언은 사실 방언과 비슷한 은사이면서도 방언과는 좀 성격이 다르다. 좀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방언 통역이란 방언하는 자의 말을 통역자가 듣고 그것을 해석해 주는 것이지만, 예언은 성령께서 내 영에게 주신 말씀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고로 예언도 마찬가지로 주님이 그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만을 뚝 떼어놓고 본다면 그것이 통역되어 나온 방언인지 혹은 예언인지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예언에는 상대방의 영이 드리는 기도가 들어 있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예언은 정말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예언으로서의 기능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6가지 측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첫째는 권면과 위로의 역할을 수행한다(고전14:3). 그리고 둘째는 책망과 판단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고전14:24). 또한 셋째는 폭로와 가르침의 기능도 같이 수행한다(고전14:25,31). 왜냐하면 예언을 통하여 상대방이 감추고 있는 일이 드러나게 됨으로 그 사람을 책망하여 결국 그를 회개로 이끌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예언을 모든 회중이 같이 듣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을 기뻐하며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배울 수도 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을 배우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도 배우게 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어떤 죄를 제일 싫어하시고 또한 어떤 일을 매우 기뻐하시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초자연적인 은사로서 예언은 많은 사람을 주님 앞에 엎드리게 한다. 그리고 그럴 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게 되며,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고 고백하게 된다(고전14:25). 

 

4. 공적인 예배시 방언과 예언은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바울은 이제 공예배시에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어떻게 실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한다. 사도 바울은 먼저, 첫째로 공중예배 때에 등장하는 예배의 요소들 곧 찬송시나, 가르치는 말씀이나 계시 그리고 방언 그리고 방언 통역이 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에 팔요한 것임을 지적한다(고전14:26). 그리고 이어서 둘째로, 공중예배시 방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설명해 준다(고전14:27~28). 즉 교회에서 방언을 사용할 때에는 첫째, 방언하는 자를 두 명 내지는 세 명 정도만을 세우라고 했다. 그리고 둘째, 중구난방식으로 방언하게 하지 말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차례대로 방언을 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교회에서 방언을 하게 할 때에는 반드시 방언 통역자를 세워서 방언하는 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온 회중이 들어서 알게 하라고 하였다(고전14:27). 만약 교회에 이렇게 통역할 수 있는 자가 없다면 방언은 결단코 공중예배시에 사용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도 혹시 방언을 하고 싶다면 그때에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하나님에게만 말하라고 하였다(고전14:28).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공중예배시 예언을 할 때에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말했다(고전14:29~32). 이때에도 역시 방언 통역 때와 마찬가지로, 첫째, 예언을 두 명이나 혹시 많으면 세 명 정도만을 선별하여 예언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둘째, 역시 이것도 차례대로 질서있게 해야 하며, 셋째, 예언이 끝나면 예언의 내용을 100%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과연 그 예언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사탄 마귀로부터 온 것인지를 분별하라고 하였다. 왜 그런가? 그것은 예언이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는 단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언은 보통 상대방을 보면서 그때 자기의 마음에 주님께서 떠오르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때 예언하는 자의 마음과 발성 기관을 거치면서 예언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언하는 자가 죄를 짓고도 회개를 하지 않았다든지, 하나님 앞에 불경건한 신앙 생활을 하다가 은사를 사용하게 되면 예언이 잘못 나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예언할 때에도 성령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즉 사람이 예언을 할 때에 다른 이에게서 또 예언이 나오면, 그때에는 전에 예언하고 있던 자가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의 사람이 예언을 하고 있지만 그 예언이 틀리게 전달될 경우,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시켜서 그 예언을 막으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로 사도 바울은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뒤에 예언하는 자들의 영에 제제를 받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이다(고전14:32).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화평 중에 부르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고전14:33). 

 

5. 모든 교회에서 여자는 항상 발언하는 위치에 서 있을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은사 사용에 있어서 질서가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고전14:33). 그러므로 공중예배 시간에 방언을 사용할 때나 예언을 할 때에는 반드시 차례를 따라 순서대로 말해야 한다고 하였다(고전14:27~28). 이어서 바울은 모든 성도가 교회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말씀하셨던 바와 같이(창3;16),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여자가 남자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 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어떤 질서를 정해 주셨으니, 그것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으로서 질서있게 창조하셨다는 것이다(고전11:3). 그러므로 여자가 교회에서 자꾸 말하다 보면 교회가 소란스럽게 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왜냐하면 생태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더 많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을 보더라도 여자는 뱀에게 계속해서 말을 한다. 이때 남자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함으로 인하여 여자가 먼저 꾀임을 받아서 죄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도 굳이 여자가 말을 하려고 한다면 직접 나서서 말하기보다는 자기의 집에서 자기의 남편에게 물으라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소란스럽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여자가 남자에게 묻지 않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까지 하였다. 이는 은사의 사용에 있어서 대원칙과도 같은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참고로 이러한 명령은 당시 시대적인 상황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에,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와 똑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강요하는 용도로 사용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6.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영성을 갖기를 위하여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자는 어떤 생각으로 바울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은사의 사용과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두고서 자기 나름대로의 원칙을 세워서 그것을 정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통해서 나왔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들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이 도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권면한다(고전14:36). 그리고 특별히 고린도교회를 직접 개척하고 세웠던 사도 바울은 은사에 대해서는 고린도교회에게 좀 더 강경하게 말하였다. 그것은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영적인 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이 주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만일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하거나 모르는 자가 자기를 선지자나 영적인 자로 자처한다면 그는 영적으로 무지한 자라고 말했다(고전14:38). 그는 영적인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7. 방언과 예언 및 은사 사용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예언과 방언에 대해서 이렇게 마무리 한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있으며, 방언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고 있어라(고전14:39)" 그렇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영적인 것을 사모하려면 방언보다는 예언하기를 더 사모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워주는 것일 뿐 교회의 덕을 세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은사를 구하는 대원칙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바울은 교회에서 개인적으로 방언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금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상황은 어떠한가? 방언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방언이 마치 구원의 확실한 표적인 것인 양 떠들어대는 교단도 있으며, 반대로 방언을 지나치게 무시한 나머지 방언을 고린도 현상 내지는 귀신들의 장난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양쪽 다 잘못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도 더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고 말이다(고전14:18). 왜 그런가? 방언이야말로 초자연적인 은사로서, 다른 은사들을 받게 하는 일종의 첫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요, 방언을 많이 말할 때에 다른 은사들도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해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은사를 사용할 때에는 2가지 태도를 꼭 지켜 줄 것을 권면하였다(고전14:40). 그것은 품위있게 은사를 사용하고, 질서를 따라서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내가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무조건 그 은사를 최고로 여긴 채 함부로 사용하여서 교회를 소란스럽게 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때로는 가진 은사라도 잠시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으며,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이 될 때까지 때로는 기다릴 필요도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찌되었든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따라 은사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더 성숙한 은사자의 통제가 없이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귀신의 밥이 될 확률이 매우 크며,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아 바깥 어둔 데에 내던져지는 이들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8. 어떻게 하면 방언이나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할 때 이러한 신령한 은사들을 받을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영적인 것들을 [계속] 사모하고 있어라. 그런데 너희들은 더욱더 예언하기를 [계속] 사모하고 있어라(고전14:1)". 그렇다. 사도 바울은 신령한 은사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사모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방언이나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받으려면 이러한 은사를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떤 사람이 이러한 은사를 더 많이 받게 되는 것인가? 그것에 관하여는 몇 가지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니, 첫째, 방언이나 방언 통역이나 예언의 은사는 다 기도를 많이 하라고 주시는 은사라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도를 많이 하라고 주신 은사들이 대부분인데 기도도 많이 하지 않으려 하면서 은사들을 사모하면 안 되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은사는 예언의 은사의 경우처럼 그것이 자신의 영적인 상태로 혼합되어 밖으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은사를 사모하는 자는 반드시 청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이 더럽혀진 상태에 있으면서 은사를 사모하여 은사를 받게 된다면 그 더러움은 누가 과연 책임질 것인가? 그리고 회개를 하지 못해 청결하지 않는 자가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면 성령과 함께 동시도 귀신도 역사하여, 귀신이 보여주고 들려주고 생각나게 한 것을 성령이라고 함으로 나타나게 될 결과들은 누가 또 책임을 지겠는가? 그러므로 거룩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자는 반드시 자신을 청결하게 만드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모든 은사는 섬기기 위해 주어진 은사이므로 주신 하나님께 보은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모든 은사를 다른 지체를 섬기라고 주어진 은사요,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신 은사이기 때문이다. 고로 방언을 제외한 모든 은사들은 다 남을 섬기라고 주신 은사들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려 하고, 그것을 남을 위해 섬기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으려 하면서 그것을 구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자는 반드시 자신을 주님께서 헌신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은사가 좋다하며 간구했다가 결국 그 은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묶어 둔다면, 결국 주님 앞에 책망받을 일을 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결국 은사를 받기 사모하는 자는 남들보다 더 많이 기도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하고, 섬기는 은사이기에 남들보다 더 부지런해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보다 남을 섬기기를 더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남 섬기기를 자기를 섬기는 것보다 우선할 수 있는 자가 은사를 간구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9. 나오며

  성령의 은사 중에 방언이 은사가 과연 최고의 은사인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권면하였다. 이는 교회를 건축하는 데에는 방언의 은사가 아니라 예언의 은사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고로 바울은 모든 은사들은 다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주어지는 은사이니만큼,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한 것이다. 그래도 방언의 은사는 개인의 덕을 세워주는 데에는 그만한 은사가 없기 때문에 방언 말하기를 금해서도 아니 된다고 하였다.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신령한 은사는 방언 통역의 은사요 예언의 은사이니 이러한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한 것이다. 특별히 조금 전에서도 살펴보았지만 그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인 경우에는 방언 통역이나 예언은 거의 비슷한 은사라는 것도 함께 살펴보았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달랐다. 어떤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없고 하나님만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을 유창한 발언을 따라 신령함의 정도로 측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는 결국 바울에 의해 크게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교정을 받아야 했다.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말릴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공예배시에 사용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방언을 교회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역을 세우라고 하였고, 만일 통역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때에는 잠잠하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방언이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큰 소리로 내뱉는 은사이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들의 눈에 그것은 미친 사람의 소리처럼 들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친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성령의 제일 표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최초로 나타났던 예루살렘교회가 그랬고, 이어서 이방인 최초로 믿는 자였던 고넬료 가정에서도 그랬으며, 베드로의 뒤를 이어 이방인 선교에 집중했던 바울의 선교 현장에서도 그렇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방언이 만사 형통의 방법은 결코 아닌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는 아무런 유용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방언은 결코 회개를 대신할 수 없으며, 방언은 결코 자신의 성품을 바꾸어 주지도 못하며, 방언으로서는 감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방언을 비롯한 신령한 은사를 구하려는 자는 반드시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더욱더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남들보다 더 많은 기도를 하기 위해 그러한 은사를 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더불어 진정 남보다도 더 십계명을 지키면서 성결한 삶을 살려고 하면서 은사를 구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은 시간을 다른 지체를 섬기려는 의도에서 은사를 구하고 있는지도 돌이켜 보아야 한다. 어찌되었든지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면 그는 사역자로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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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9월 29일(수)

정병진목사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중에 가장 중요한 은사는 대체 무엇인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것을 방언의 은사라고 보았다. 그럼 오늘날에도 진짜 그러한가? 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면서, 방언의 은사가 가진 장점과 단점을 알려준다. 그리고 좀 더 바람직한 신령한 은사로서 예언의 은사와 방언통역의 은사를 추천한다. 왜 바울은 이러한 2가지 은사를 추천해야 했는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2021-09-08(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21) 방언과 예언과 방언통역의 은사에 대하여(고전14:1~1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TAFyAGbodLQ  [혹은 https://tv.naver.com/v/22356999 ]

 

1. 들어가며

  모든 은사에도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사랑의 은사가 모든 은사 사용에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신령한 은사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기본적으로 겸비된 사람에게 어떤 은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떤 은사가 우리와 우리 교회에 필요할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은사들의 문제를 직시하면서 은사들 중에는 개인을 세워주는 은사가 있는가 하면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4장의 전체 내용이다. 그렇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잘못된 은사 사용에 대해서 알려주고 바른 은사 사용을 위한 실제적인 예로서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비교하여 말한다. 그것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비록 방언의 은사가 신비롭게 보이고 멋있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공예배에서 무분별하게 사용되면 오히려 공예배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유익하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신령한 은사를 사모한다면 방언의 은사보다는 상대적으로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그렇다면 대체 방언의 은사는 어떤 은사를 가리키며, 예언의 은사는 어떠한 은사이길래 바울은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권면하는가? 그리고 대체 방언이 가진 한계는 무엇인가?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서 방언과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정의와 아울러 이 은사들의 유익성과 한계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이러한 3가지 은사를 어떻게 받을 수 있고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것에 대한 부작용은 없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고린도교회에 예배 중 은사 사용에 있어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예배 중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방언의 은사 사용이 교회를 건축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어떻게 그것을 알았을까? 그것은 고린도교회가 방언의 은사를 최고의 은사로 알고 사모하면서 그 은사를 예배 중 사용했지만 그것이 교회의 건덕에 전혀 유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방언을 말하다 보면 방언이 자주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방언의 소리를 분석해 보면 어떤 방언은 일정한 형식이 있고 그 소리가 분명하기도 하지만 어떤 방언은 도무지 방언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유치하게 들리는 방언도 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가 방언의 은사를 매우 귀하게 여기고 또한 사모하다 보니, 일종의 좋은 방언과 나쁜 방언이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방언이 지닌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방언이 공중 예배에서 사용될 수 없다는 이유를 설명한다.

 

3. 바울은 왜 방언의 은사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는가?

  그래서 바울은 교회에서 은사를 사용하려면 방언의 은사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고 그것을 사용할 것을 권면한다. 그렇다면 왜 방언을 공중 예배에서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방언 자체가 지키는 한계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므로, 그것을 공중 예배에 사용한들 아무도 알아듣는 자가 없으며 그 방언을 듣고 '아멘'이라고 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일만 마디의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보다는 한 마디의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이 더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방언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방언 통역자를 세워야 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둘째, 방언은 개인을 세워주는 은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방언은 개인을 세워주는 은사이지만 예언은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이기 때문에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왜 그런가? 여기서 '세운다'는 말은 '덕을 세운다'라는 뜻이 아니다. 이 단어는 '오이코도메오'라는 단어로서, 이 단어의 일차적인 뜻은 '짓다. 세우다. 건축하다'의 뜻이지만, 이 단어에 대한 이차적인 뜻이 '다시 짓다. 다시 세우다. 다시 건축하다'는 뜻으로서 '복구하다, 복원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는 교회를 건축하거나 교회의 쓰러지고 허물어진 곳을 일으켜 세우는 은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영적으로 무너져 있다. 그런데 허물어져 있는 자신의 영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사실 방언이 필요하다. 방언을 하게 되면 자신의 영을 건축하여 튼튼하게 만들어 주고 이미 허물어져 있는 자신의 영도 다시 복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언은 교회 자체를 그렇게 세워주고 복구하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왕 신령한 은사를 사모한다면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 것이다. 셋째, 방언의 은사는 방언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도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에 마음에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적으로 깨닫고 돌이키고 배우게 하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 것이다. 

 

4. 방언이란 어떤 은사를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대체 '방언'의 은사는 어떤 것인가? 방언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정의하고 있는 곳은 사실 성경을 통틀어서 고린도전서 14장 밖에 없다. 나머지는 그곳에 그러한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방언이라는 언어가 대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주지는 않고, 그곳에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방언을 어떤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가? 그것은 고린도전서 14:2과 고린도전서 14:14~15에 나온다. 이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직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으로 발언하고 있는 자는 사람들에게 발언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영으로 비밀들을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14:1415  왜냐하면 내가 만일 [계속]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으면,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나의 이성(생각=누스)은 열매가 없이 있느니라. 15 그러면 무엇이 있느냐? 나는 영으로 [장차] 기도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역시 나는 이성(생각=누스)으로도 역시 기도할 것이다. 나는 영으로 [장차] 찬송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나는 이성(생각=누스)으로도 역시 찬송할 것이다.

  그렇다. 방언이란 2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방언은 거듭난 사람의 영이 하나님과 말하는 언어이다(고전14:2). 곧 거듭난 사람의 영의 언어가 방언인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다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늘에 다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목놓아 울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셨는지, 그분의 사랑과 희생이 너무나 크시다는 것을 깨닫고 그분을 이제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새롭게 모신다. 그때에 그는 거듭나게 된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 사람의 영 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이때 하나님의 자녀가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에 그 영이 죽어 있다가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바로 방언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응애'하고 말을 하듯이 자신의 살아난 영이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의 영이 말하는 것이 바로 방언인 것이다. 하지만 이 방언은 자신의 영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대화하는 새로운 채널로 부여한 것이기에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말을 알아들으신다. 만약 그것을 통역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비밀 대화인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방언이란 거듭난 사람의 영의 기도라는 것이다(고전14:14~15).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가 사용하는 일상 용어가 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한국어다. 그러나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한국 아이들의 경우는 영어와 한국어가 동시에 일상 용어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상 용어는 혼의 언어다. 배워서 하는 것이요, 나와 다른 사람과의 의사 소통의 채널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방언은 다르다. 방언은 영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그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다. 내 혼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있지만 내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있는 것이다. 내 영이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바로 방언인 것이다. 그래서 방언 통역의 은사를 가지고 사람이 자신의 영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통역해 보면, 자신의 영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말이 약 80~90% 정도가 되며,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영의 기도는 약 10~20% 정도 된다. 나는 잘 인식하고 있지 않아도 영은 자신의 소원을 알고 벌써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방언이다. 그리고 방언의 분량이 많아지고 깊어지면 어느 순간부터는 방언 찬양도 나온다. 방언에 음률이 붙어서 자신의 영이 노래를 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방언 찬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5. 방언은 '외국어' 중의 하나요 고린도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이란 거듭난 사람의 '영의 말'(고전14:2)이자 '영의 기도'(고전14:14~15)라고 분명하게 정의하였다. 하지만 방언이 영이 말하는 언어가 아니라 '외국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더러 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방언이라는 은사는 신약성경이 완성됨과 동시에 교회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한 최초로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고 있는 나오는 '방언'도 그때 예루살렘을 찾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지방에서 쓰던 지방어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고린도전서 14장에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서 '방언'은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무아지경에서 지껄이는 일종의 귀신들의 속삭임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고린도지역에만 나타났던 고린도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고린도전서 14장을 번역하고 있는데, 신약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사료된다. 그분들의 이름을 굳이 거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오로지 성경을 믿고 성경에 나온 말씀대로 따라가야 한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이란 어떤 언어였을까? 정말 '지방말'이었던 것이었을까? 사도행전 2:4에 보면,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셨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으로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한다(행2:4). 그런데 이번에 우리말이 개역개정판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방언'이라는 용어가 '다른 언어들'로 뒤바뀌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개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방언'이 '다른 언어들'로 바뀐 것이다. 명백한 성경 번역의 퇴보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다른 언어들'은 헬라어로 보면, '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other tongues)'라는 단어로서 완전히 종류가 다른 언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언어가 히브리어, 헬라어, 로마어 같은 종류의 이 세상의 언어였다면, 그것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알로이스 글로싸이스(another tongues)'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 사용된 단어는 종류가 다른 언어로 곧 '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로서 영이 사용하는 특별한 언어인 방언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무엇보다도 오순절날 사람들 중에 어떤 이는 120명 성도들의 말했던 언어를 들은 후에 "이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라고 말했다. 자기들이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였기에 술 취한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방언'은 분명히 '글로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약속한 표적으로서 주어지는 방언도 역시 '글로싸'이다(막16:17). 그리고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서 말해졌던 언어도 '글로싸'였고,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오셔서 베풀어졌던 방언도 역시 '글로싸'였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안수할 때 성령께서 은사를 주셨는데 그때 받은 방언도 역시 '글로싸'이다. 그리고 방언이 무엇인지에 대해 쓰고 있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도 방언이라는 단어도 역시 '글로싸'라고 나온다. 모두가 다, 이 세상에서 사용하지 않은 다른 종류의 방언들(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을 지칭하는 표현들이라고 하겠다. 

 

6. 방언 통역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진행되는가?

  그렇다면 '방언 통역'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방언 통역이란 다른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내가 알아듣는 은사를 가리킨다. 원래 방언은 그 사람과 하나님만 소통하는 대화 채널이어서 그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하고 있으며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인데,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게 되면 그 사람의 방언이 무슨 내용인지를 알게 듣게 되는 은사가 바로 방언 통역의 은사인 것이다. 방언 통역의 은사는 보통 3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상대방이 방언하는 것이 무슨 내용인지를 영이 느낌으로 그냥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언 통역은 상당히 실수할 때도 있다. 정확하지 않은 것을 통역하다 보면 방언의 내용에는 없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대방의 방언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들리는 것이다. 즉 한국 사람이라면 한국어로 들리는 것이다. 상대방은 분명히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영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알기 쉽게 한국어로 들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듣고 그대로 말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잘 되신 분은 동시 통역이 가능하다. 상대방의 방언을 들으면서 바로 동시에 통역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 통역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들추어 낼 때가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말했다가 그만 그 사람의 체면이 손상되고 그 사람의 숨은 죄가 드러남으로 성도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순화하는 말로 바꾸어서 통역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방언하는 당사자만 알아듣고 회개를 할 수가 있다. 셋째, 방언하는 자의 입술에서 글자가 나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에는 한국어로 글자가 되어 입에서 나오는 것이 영안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입으로 나오는 글자를 읽어 주면 된다. 이것이 방언  통역이다. 이러한 사람은 지구상에 몇 명 안되는 방언 통역 은사라고 할 수 있다. 

 

7. 예언이란 어떤 은사를 가리키며 그것의 7가기 기능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예언'의 은사란 어떤 것인가? '예언'의 은사는 일반적으로 결코 알 수 없는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일을 미리 알고 그것을 미리 말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가리킨다. 그 대상은 개인이 될 수도 있고, 교회가 될 수도 있고, 국가와 민족이 될 수도 있다. '아가보'라는 예루살렘 출신의 예언자는 얼마 후 나라에 흉년이 들 것을 예언하였으며(행11:27~28), 개인적으로는 바울이 장차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면 그의 손발이 묶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다(행21:11). 그렇다면 예언자는 어떻게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일을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보통 세 가지 방법으로 알게 되어 예언을 한다. 첫째, 마음 속에 성령께서 어떤 영감을 떠오르게 함으로 알게 된다. 그때에는 그냥 그것이 알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언을 하게 되는데,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예언은 틀릴 수도 있다. 자기가 마음으로 생각한 것이나 사탄 마귀가 넣어 주는 것을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현재의 모습이나 미래의 모습이 환상으로 보여지는 것을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이전의 예보다는 더 분명한 것이지만 이것도 사탄 마귀가 보여주는 것을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셋째,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모습을 글자로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한국에 살고 있지만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글자가 떠서 보이는 예언이 있다. 글자가 떠서 보이고 영의 상태가 환상으로 보일 정도라면 그분의 영성은 상당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예언의 은사는 예언 뿐만 아니라 책망과 판단, 위로와 권면, 폭로와 가르침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8. 나오며

  우리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다고 성령의 은사를 무조건 무시하거나, 그것을 귀신의 장난으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 2천년 전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 오신 성령이나 지금의 성령은 똑같은 한 분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에 주셨던 성령의 은사가 지금은 없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있는 것이다. 거기에 방언이 들어 있다. 그런데 방언에는 몇 가지 단점이 있다. 그것은 모든 은사들 중에서 자기 개인만을 세워주는 은사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은사는 다 남을 위해 존재하는 은사들이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는 다르다. 방언의 은사는 이 외에도 2가지 단점이 더 있으니, 그것이 남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이다 보니 그것을 공중 예배 때에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도 없는데 어찌 그 방언을 듣고 성도들이 '아멘'이라고 화답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방언은 아무리 말을 유창하게 한다고 해도 그 말의 뜻을 알아 들을 수 없으니 자신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이 좋은 은사이기는 하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의 경우처럼 굳이 예배 시간에 방언을 사용해야 한다면, 그때에는 반드시 방언 통역자를 세워서 방언 통역을 듣고 성도들이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언의 은사를 구하여서 그것으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맞는 말씀이라고 하겠다. 방언은 사실 자신을 세워 주고 복구하는데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도구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서는 남을 가르칠 수도 없고 깨우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공예배에서는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오직 개인적인 목적으로 따로 기도할 때에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우리가 방언을 말하면 말할수록 다른 은사들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으며, [회개한 후에] 방언을 말한다면 방언을 말하면 말할수록 영적인 능력들이 계속해서 공급되기 때문이다. 

 

 

2021년 09월 08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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