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주신 5가지 직분은 무엇이며,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직분의 은사는 무엇인가? 오늘날의 교회에게 있는 '목사'라는 직책은 과연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가? 그리고 '방언'이나 '예언'같은 신령한 은사는 언제까지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보다 더 좋은 은사가 있는 것인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말은 대체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오늘은 고전12장과 13장에 대해서 말씀을 함께 나누자.

 

2021-09-01(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20) 교회 안에 주신 직분의 은사들과 사랑의 은사(고전12:28~13: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PV0RUNQT6QQ [혹은 https://tv.naver.com/v/22220994 ]

 

1. 들어가며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직분들이 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시대에 교회가 탄생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때 있었던 직분들 중에는 지금도 있는 직분도 있으나, 그때는 없던 직분이 지금에 와서 새롭게 생겨난 것도 있다. 하지만 초기 교회 가운데 직분은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데에 꼭 필요한 은사였다. 그러한 직분의 은사에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가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에 이러한 직분들은 어떤 직무를 수행하던 것이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직분의 은사들 중에서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는 두 가지 은사는 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을 공부하면 우리는 이어서 사랑의 은사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사랑의 은사는 어떤 은사인지 그리고  이 은사가 다른 은사들과는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고 차이점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 사랑의 은사의 속성은 대체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은사들이 지난 한계점과 그것들의 존속 시기는 언제까지인지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아무쪼록 직분의 은사들과 사랑의 일반 은사에 대해 주님의 가르침을 주목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교회에게 주어진 5중직 중에서 복음 전하는 자는 어떤 직분의 은사인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28과 에베소서 4:11을 통하여, 교회에게 주어진 은사에는 5가지 직분의 은사가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은사들에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가 있었다. 이것들 중에서 '사도'와 '선지자'의 은사에 대해서는 지난 주에 살펴보았고 오늘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의 은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복음 전하는 자'의 직분은 초기 교회 당시 사도와 선지자들과 함께 교회를 세우는 은사에 속한하는 은사다. 그리고 복음 전하는 자는 사도와 선지자와 더불어 똑같이 어떠한 하나의 장소에 머물러서 사역하지 않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일하는 은사다. 즉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또한 다른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사역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이 은사는 일종의 '선교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선교사는 타지역이나 외국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되, 그곳에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면, 이 은사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교회를 세우는 은사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 '복음 전하는 자'의 은사자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들로서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빌립(집사)가 성경에 나온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전도자다. 그래서 그는 적어도 3차례 이상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였다(딤후1:11, 갈1:6~9). 그리고 둘째로, 복음 전하는 자 곧 전도자에는 '디모데'가 있다. 특별히 디모데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자로 임명하여 파송한 사람이다. 그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 전파하기를 힘쓰라"고 하였던 것이다(딤후4:5). 그로 하여금 전도자의 직무를 성실히 감당할 것을 권면한 것이다. 셋째로, '빌립(집사)'이라는 전도자가 있다. 그는 원래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수집사로 피택된 인물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불어닥친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던 차에,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그곳에 사마리아 교회가 개척이 된다. 그러므로 복음 전하는 자 곧 전도자는 오늘날에 전도사 정도의 신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준 사도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나가서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를 세웠으며, 세례도 주었다. 그리고 빌립 같은 경우에는 능력도 행사하였고 축사도 행했다. 수많은 표적들과 기사들이 그에게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와서 이러한 의미의 순회 전도자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3. 목사와 교사의 직분의 은사는 어떠한 은사인가?

  직분으로 교회 가운데 주신 '목사'와 '교사'의 은사는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함께 초기 교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직분의 은사자들이었다. 왜냐하면 목사와 교사의 은사자들로 인하여 교회가 든든히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와 교사는 이단의 세력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하고, 귀신으로부터 지켜내며, 세상으로부터 이기는 성도가 되도록 인도하고 세워주는 은사자들이었다. 특히 '목사'와 '교사'의 은사자는 앞의 3가지 은사자와 달리, 한 곳에 머물러 일하는 사역자들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양육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목사와 교사는 자기가 섬기는 교회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고, 거기에서 풀타임 사역자로 평생을 일하는 분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목사의 은사란 어떤 것인가? 목사의 은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오중직의 직분 은사들 가운데서, '교사'의 은사자와 더불어 함께 등장하고 있는 은사인데(엡4:11), '목사와 교사'라는 명칭을 보면, 단어는 2개이지만 한 개의 정관사만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목사는 반드시 교사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목사나 교사는 양육자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사'라는 명칭은 사실 성경에는 나오지 않고, '목자'로서 나온다. '목자'는 헬라어로 '포이멘'인데, 양떼들을 지키고 돌보는 목자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왜 교회의 성도들을 양육하는 직분을 일컬어 '목자'라고 했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양으로 생각하시고 당신을 목자로 말씀하신 것에서 기원한 것이 아닌가 싶다(시100:3). 그리고 예수께서도 당신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셨기 때문이다. 어느 때에 예수께서 당신을 소개하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10:11,14~15). 그러므로 오늘날 목사라는 직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양 무리 곧 교회의 성도들을 목양하는 자를 일컫는다. 이는 예수께서 부활 후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사역을 위임하실 때에,"너는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일컬어서 '양들의 큰 목자(히13:20)'라고 하였고, 베드로도 예수님을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벧전2:25)'이자 '목자장(벧전5:4)'이라고 말했다. 

  그럼, 목사는 어떤 직무를 수행하는 자인가? 한마디로 목사는 하나님이 맡기신 양 무리를 목양하는 직무자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양떼를 먹이는 일을 하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양떼를 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양 무리를 '먹인다'(보스코)'는 말은 양들로 하여금 풀을 뜯게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목사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먹일 수 있어야 한다(요21:15,17). 그리고 목사는 양 무리를 '치는(포이마이노)' 일을 행한다. 여기서 '친다'는 말은 '돌보다, 지키다'라는 말로서, 양떼들을 하여금 세상에서 승리하게 잘 돌보고, 그들을 사탄 마귀와 귀신으로부터 지켜내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자는 2가지를 사용하는 자다. 하나는 '막대기'로서 양들을 헤치려 오는 동물들을 후려치는일을 행하는 것이며, 반대로 '지팡이'로서는 양떼들을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로 인도하는 것이다. 

 

4. 교사의 은사는 무엇이며 어떤 직무를 수행하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교회에게 주신 마지막 직분의 은사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사(디다스칼로스)'라는 은사다. 이는 성경을 잘 해설하고 가르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교사는 목사의 은사와 더불어 짝을 이루고 있다. 왜냐하면 목사는 교사처럼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위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딤전5:7). 그렇지만 교사가 반드시 목사인 경우가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고린도 교회에 '아볼로'라고 하는 성경 교사가 있었기 때문이다(행18:24~25). 그는 목사도 아니었고 복음 전하는 자도 아니었다. 그런데 목사나 교사의 다른 은사에 비해 다른 것은 둘 다 한곳에 머물러서 성도들을 양육한다는 점이다. 특별히 교사는 성경을 잘 배워서 성경을 잘 가르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도 성경 교사로서(딤후1:11, 2:7) 구약의 율법을 잘 해석하여 그것을 신약의 성도들에게 잘 전달하는 일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제자로서 디모데를 택하여 에베소 교회에 목자와 교사로서 파송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에게 성경을 읽는 것과 권면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권하였던 것이다(딤전4:13). 

 

5. 사랑의 은사는 왜 필요한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의 초반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특별 은사를 언급한다. 그리고 이어서 후반부에서 직분의 은사를 언급한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너희는 더욱 더 큰 은사들을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했다(고전12:31). 그리고 '사랑의 은사'를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사랑의 은사는 매우 가장 좋은 은사요 큰 은사임에 틀림없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3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사도 바울은 아무리 신령한 은사들 곧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방언을 발설할 수 있는 자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같고,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말했다(고전13:1). 그리고 예언의 은사가 있고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아는 지혜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있으며, 산을 옮길 수준의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고전13:2). 오 정말 그러한가? 그렇다. 거기에 사랑이 없다면, 말의 은사는 말장난에 불과하여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가 모든 소유물로 다른 사람들을 구제하고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자기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했다(고전12:3). 왜냐하면 그렇게 수고했어도 천국에서는 아무것도 계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 사용에 있어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그것을 자신의 마음의 기저에 깔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6. 사랑이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이서 사도 바울은 사랑이 어떤 것이며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한다(고전13:4~7). 사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다(요일4:8).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생자를 아낌없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대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사랑의 특성을 총 15가지로 소개한다. 그것을 헬라어원문을 가지고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고전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질투)하지 않으며, 사랑은 자랑하지(허풍떨지) 아니하며, 교만하게 되지 아니하며, 5  수치스럽게 행동하지 아니하며, 자기 자신의 것들을 찾지(구하지) 아니하며, 분노하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꾀하지 아니하며, 6 불의에 대하여 기뻐하지 아니하며, 그런데 진리에게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들을 덮어주며, 모든 것들을 믿으며, 모든 것들을 소망하며, 모든 것들을 견디느니라

  그렇다. 사랑은 일종의 구호나 관념이 결코 아니다. 사랑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덕목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천이 없는 사랑은 공허한 것이다. 그렇다면 15가지 사랑의 항목들 중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속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내'라는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하나님을 저버리고 떠나갔고 죄를 지었지만 끝까지 오래 참으셨다. 그리고 회개하기를 끝까지 기다려주셨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도 나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며, 그가 회개하여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기까지 기다려 주어야 한다. 

 

7. 초자연적인 은사들과 사랑의 은사는 어떻게 다른가?

  끝으로 사도 바울은 각종 초자연적인 은사들과 사랑의 은사를 비교한다(고전12:8~13). 그러면서 말하기를 예언이나 방언, 지식의 말씀의 은사 등이 참으로 놀라운 은사일지라도 이것들은 결국 한시적이며 부분적이라고 말한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만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중 어떤 것도 천국에까지 필요한 은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세상의 모든 것까지 그가 다 아는 것은 아니며, 그가 영안이 열리는 은사와 환상의 은사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천국과 지옥을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귀신과 천사들 모두를 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 부분적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시거나, 우리가 개인적으로 죽어 하늘에 올라간다면, 이러한 신령한 은사들을 다 그치게 되고 폐지될 것이다. 그것들이 천국에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렇더라도 어린아이 때에는 이러한 은사들이 상당히 유효하게 쓰인다고 말이다. 왜 그런가?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현존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랑의 은사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듯 사랑의 은사도 영원한 것이다. 천국에서도 사랑의 은사는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사모하고 추구하는 은사를 정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단연코 사랑의 은사를 선택해야 한다. 사실 우리가 끝까지 자신을 지켜내야할 '믿음'도 중하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소망'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은 역시 '사랑'이기 때문이다. 

 

8. 나오며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건축하게 하고 교회를 건축하게 하기 위해 성령의 선물로서 은사들을 각자에게 분량을 따라 주시고 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교회들 가운데 직분의 은사로서, 어떤 사람에게는 사도의 직책을, 어떤 사람에게는 선지자의 직책을 그리고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의 직책을 주시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직분의 은사들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고로 교회는 각종 은사들과 오중직의 직분을 통하여 반석 위에 든든히 세워져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은사들이 교회에 풍성하다 할지라도 각자에게 사랑의 은사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은사를 받았다가 잘못 사용하여 훗날 심판의 때에 주님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거나, 아울러 불법을 행하는 자로 낙인 찍혀 주님으로부터 버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사는 정말 교회의 질서 가운데 겸손하게 그것도 남을 섬기는 것으로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직분의 은사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남들 위에 군림하지 말아야 하며, 신령한 은사를 이용하여 남의 돈을 갈취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아니 된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값없이 내주시고 섬겨주셨듯이 우리도 값없이 주어진 은사와 직분을 가지고 이웃 형제를 섬길 수 있어야 한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9월 01일(수)

정병진목사

 

 

오늘날 교회 안에는 목사와 전도사, 장로와 권사와 집사 등의 직분의 은사자들이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생존해 있을 때에는 교회 안에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그리고 목사와 교사라는 직분의 은사자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도와 선지자 그리고 복음 전하는 자들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 당시 이러한 직분자들이 존재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래서 오늘은 교회 안에 있는 은사의 5가지 직분들 가운데, 전체적인 개념 이해와 더불어 이러한 은사자들의 존재 목적 그리고 사도와 선지자의 은사의 직분이 무엇인지를 집중 조명해 보고자 한다.

2021-08-25(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19) 교회 안에 주신 여러 직분의 은사들과 그것을 주신 목적(1)(고전12:28~3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LUq7P-UB604  [혹은 https://tv.naver.com/v/22087797  ]

 

1. 들어가며

  사도 바울이 교회를 개척할 당시에 교회에는 어떤 직분의 은사가 있었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당면한 여러 문제들의 해법을 제시하는 가운데 교회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를 언급하게 되는데, 그것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까지의 말씀이다. 그중에서 고린도전서 12장은 3가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첫째는 성령의 9가지 특별 은사를 언급하고 있고, 둘째는 교회의 지체들의 유기적인 통일성과 다양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셋째로, 바울은 교회에게 주신 직분의 은사를 언급한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게 주신 은사의 직분을 총 8가지로 언급하는데, 그것은 3가지와 5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3가지는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교사들이며, 뒤의 5가지는 능력들, 병 고침들, 도움들, 다스림들, 방언들의 종류들이 있다. 앞의 3가지는 초기 교회 가운데 확실히 굳어진 전문적인 교회의 직분의 은사라고 한다면, 뒤의 5가지는 교회 가운데서 주신 은사들(특별 은사들과 일반 은사들)을 조금 더 많이 활용하는 자들에 대한 소개인 것 같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주신 전문적인 은사는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 뿐인가? 아니면 더 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교회 가운데 이러한 은사를 주신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교회 안에 어떤 직분자를 전문적인 직분의 은사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직분의 은사들과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은사들을 주신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주신 5가지 직분의 은사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어떤 전문적인 직분의 은사를 주셨을까?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서는 3가지 전문적인 직분의 은사만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 선지자, 교사'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교회 가운데 주신 전문적인 은사를 2가지 더 언급하였다. 그것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목자)'라는 은사다(엡4:11). 고로 성경에 기록된 직분의 은사는 크게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등의 5가지로 나눠볼 수가 있다. 참고로, 여기에 등장하는 '복음 전하는 자'란 오늘날에 '선교사'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르며, 목사는 '목자(포이멘)'에 대한 대용어이다. 즉 원래는 '목자(포이멘)'라는 은사인데, 이것을 목양과 관련되어 '목사'라는 용어로 바꾼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5가지 직분의 은사를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왜 교회에게 5가지 직분의 은사를 주시는 것인가?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5가지 직분의 은사를 주신 목적을 3가지 언급하고 있다(엡4:11). 그것은 첫째,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는 성도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채비시켜 주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5중직을 주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목사의 가르침과 양육이 없이 성도 혼자서 온전해지기는 어려운 일이다. 둘째, 이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는 교회의 성도들로 하여금 섬기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는 섬김을 통해서 천국 백성의 삶을 살게 되며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거기에서 받을 상급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또한 배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이란 교회를 가리킨다. 즉 교회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건축되기 위해서는 5중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처럼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5중직의 직분을 가진 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4. 5중직의 직분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교회 가운데 주신 5가지 은사들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우선 첫째, 이러한 직분이 지금은 없어진 직분인가 아니면 현재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직분인가 하는 것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는 지금의 시대에는 없어진 직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도 바울이 이 서신서를 쓰고 있을 당시에 쓰여졌던 직분자로서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는 지금의 시대에는 없어진 직분들이라고 하겠다(하지만 '선지자'의 직분과 '복음 전하는 자'는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으나 비슷하게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오늘날까지 여전히 유효할 뿐더러 지금까지도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직분은 역시 '목사'와 '교사'의 직분이다. 그리고 둘째, 한 곳에 머무르지 않은 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직무를 감당하는 직분의 은사가 있고,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이 죽을 때까지 직무를 감당하는 직분의 은사도 있다. 전자에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가 있다면, 후자에는 '목사와 교사'가 있다고 하겠다. 

 

5.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라고 주신 2~3가지 직분의 은사는 무엇인가?

  그런데 사도 바울은 교회에게 주신 5중직 가운데서 2~3가지는 교회를 세우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직분의 은사라고 언급하였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기초)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엡2:20)"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들 중에서 필수적인 것은 '사도'와 '선지자'이며, 덧붙여 한 가지 추가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 전하는 자'다. 이러한 직분자는 교회를 세우는데 반드시 필요한 직분의 은사에 해당한다. 사실 교회라는 개념이 구약시대에는 아직 없었다. 오순절 성령을 받은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교회라는 개념이 없을 때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교회라는 것이 이런 것이라고 정의되기 시작했다. 그렇다. 아직 이 땅에 '교회'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기에 12사도들은 '교회란 이런 것이다'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생겨난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던" 것이다(행2:42).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와 그리고 안디옥 교회에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의 원형의 모습을 잊지 않을 수 있고,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6. 사도 바울은 어떤 직분의 은사를 받았는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대체 어떤 직분의 은사를 받았을까? 사도 바울은 에배소서 4:11에서 언급한 5가지 직분의 은사를 다 받은 사역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그는 사도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에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딤전1:1). 뿐만 아니라 그는 디모데후서에서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복음 전하는 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ㄷ딤후1:11)"라고 말했다. 그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복음 전하는 자와 교사로도 세우심을 입은 것이다. "이를 위하여 내가 [복음을]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교사)이 되었노라(딤전2:7)"고 말함으로써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 전파자'요 '사도'요 '교사'로 부름 받았음을 분명히 말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선지자'였다(행13:1). 그는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였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행13:1)" 그렇다. 그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의 교사이자 선지자였던 것이다. 더욱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여 거기에서 1년 6개월 동안 목회를 하였다(행18:11). 그리고 에베소 교회에서는 3년 동안 목양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여러분(에베소 장로들)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 이는 그가 목사(목자)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로 사도 바울은 사도와 선지자이자, 복음 전하는 자이면서 목사였고 교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사도는 어떤 직분의 은사이며 그 종류는 어떠한가?

  '사도'란 어떤 직분의 은사인가? '사도'란 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를 가리킨다. 베드로를 비롯한 어린 양의 12사도는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아서 사도가 된 자들이며(눅6:13,9:1, 마10:1~2), 사도 바울을 비롯한 바나바 등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분으로부터 직접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심을 받아서 사도가 된 자들이다(행14:14). 그러므로 베드로는 할례자들의 사도가 되었고,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갈2:7~9). 그런데 사실 사도는 자기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으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야" 사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1:1). 그렇다면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서신서 등을 통하여 어떤 사람이 사도가 되었고 그래서 쓰임을 받았는가? 첫째, 주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직접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라야 했다(고전9:1). 둘째, 복음을 위해서라면 고난과 죽음도 참고 인내하는 자라야 했고, 셋째,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통하여 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증거가 있어야 했다(고후12:12). 사도 바울은 정말 부름받은 사도였기에 독사에 물렸어도 죽지 않을 수 있었고, 기사도 많이 나타났으니 죽은 청년인 유두고를 살려 내었으며, 점치는 귀신을 쫓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사람 위에 놓아도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것이 치료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과연 '사도'라는 직분이 존재하는가? 한 마디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사도와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것이 없었을 때,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정의했던 사람들이 바로 '사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어떤 곳인지, 교회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기초를 닦은 이들이 바로 사도였던 것이다. 사실 이들에 의해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온전케 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걸어간 발자취와 그들의 말과 그들이 구약을 해석한 것이 기록되어서 신약성경의 책이 되었다. 그러므로 만약 자신의 말이 성령의 계시에 따른 것이어서 그것이 고스란히 성경책이 될 수 있다면 그는 '사도'라고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그러한 사람은 더 이상 없다고 보여진다. 성경책에 나온 사람 이외에 사도직의 은사를 받은 자는 없는 것이다. 다만 오늘날에도 사도적인 권능과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도 한다.

 

8. 선지자는 어떤 직분의 은사이며 그 특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선지자가 있는가? 사실 선지자는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종들 가운데 하나였다. 구약시대에 선지자는 주로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하였으며,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일을 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일은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여전히 선지자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28에서 언급하고 있는 수준의 선지자는 더이상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러한 수준의 선지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음성을 직접 듣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행13:2, 11:28), 성령의 계시를 받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엡3:4~5). 그리고 새로 들어온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폭로하여 죄를 회개하고 책망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고전13:24~25). 더욱이 선지자는 개인과 교회와 국가에 대해서 미래의 일을 예언할 수도 있어야 한다(행22:29, 21:11).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이 수반되지 않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선지자라고 하면서 활동하면 아니된다. 특히 선지자의 은사를 조금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서 자신이 마치 선지자인량 행동해서는 결코 아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선지자에는 누가 있었을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에 신약성경에 선지자들이 몇 명 나온다. 첫째로, 유대인이었던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있었다. 그는 예언하기를,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내려와서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하였다(행21:11). 그리고 둘째,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에 파송한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A.D.49년경에 예루살렘 공의회가 끝난 후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에 파송되었다. 그들은 바로 '유다'와 '실라'라는 선지자다(행15:32). 이들은 당시 선지자로서 성령의 음성을 직접 들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말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셋째, 안디옥 교회에도 역시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바나바와 바울도 들어 있었다(행13:1). 

  그렇다면, 왜 신약시대가 되었음에 불구하고 '선지자'의 직분의 은사가 필요했던 것인가? 그것은 교회를 건축하는 데에 사도의 직분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성경을 기술할 때에 선지자의 직분을 가진 자들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 지금도 선지자의 직분이 필요한가? 사실 구약시대의 선지자의 직무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기에,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도 다시 오실 메시야에 관하여 선포하고, 성도들의 죄를 책망하여, 회개시키는 사역자로서 선지자는 지금도 필요하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수준의 선지자는 아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짜 마지막 시기가 되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거짓 표적과 기사를 행할 것이며, 택하신 자들이라고 미혹하여 넘어뜨리려고 할 것이다(마24:24).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도 여전히 선지자의 직무는 요청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여전히 거짓된 선지자들이 게속해서 활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이 쓰여질 당시만 해도 버가모 교회에서는 발람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었고,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이세벨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오늘은 부활 승천하신 우리 주 예수께서 하늘 보좌에서 이 세상에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를 파송하셨고, 또한 목사와 교사를 임명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렇다. 교회의 성도들이 온전해지고, 봉사의 일을 행하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교회 위에 세우신 직분의 은사자들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이들 중에서 교회를 세우기(건축하기) 위해서는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로서의 직분자가 반드시 필요하며, 교회의 성도들을 목양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찰 때까지 인도하려면 '목사'와 '교사'의 직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이러한 5중직 중에서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교회 가운데에 내려 주신 직분들 곧 5중직을 살펴보았고 예수께서는 왜 그러한 직분의 은사를 교회에 허락하셨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성경 각 권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5중직을 체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사도와 선지자가 대체 누군지를 공부하고 깨달을 수 있었다. 다음 이 시간에는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의 직분에 대해 살펴보기를 원한다. 

 

2021년 08월 25일(수)

정병진목사

 

 

 

여자들은 왜 긴 머리를 하고 사는 것일까? 그리고 남자가 긴 머리를 하고 다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답을 성경에 제시하는 곳이 있다. 고전11장이다. 고전11장에는 여자가 교회에 나올 때에는 왜 머리에 베일을 써야 하는지 3가지 이유로 말한다. 그리고 지금은 달라졌지만 성만찬 때에 왜 애찬이 문제가 되어서 그것이 성만찬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는지를 말해준다.

2021-07-07(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15) 예배 중 여자가 머리에 는 것과 무분별한 성만찬을 주의해야 할 이유(고전11:2~3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Sj4-zYRFoG0 [혹은 https://tv.naver.com/v/21194635 ]

 

1. 들어가며

  고린도전서 11장은 고린도전서 7장부터 시작된 문제들 곧 고린도교회가 안고 있는 신앙생활의 중요한 현안들에 대해 바울이 제시하는 목회적 답변을 기록하고 있다. 그중의 두 가지로서 사도바울은 공적 예배시에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답변하고 있다. 그것의 하나는 공적예배시에 여성의 예배포(머리에 쓰는 것)의 착용에 관한 문제(고전11:2~16)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성찬(고전11:17~34) 때에 음식을 먹는 것에 관한 문제다. 특히 고전11장부터 14장까지는 공적예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대표적인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바, 고전11장에서는 위의 2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고전12~14장에서는 성령의 은사들을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오늘은 과연 오늘날에도 예배포를 사용하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과연 개신교인들도 예배포를 사용해야 하는지와 혹 그것을 써야 한다면 왜 써야 하는지를 살펴보고, 더불어 성찬식을 행할 때에 정말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여성의 예배포 사용과 성찬의 집례의 핵심적인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당시 고린도교회의 여성의 예배포의 착용문제는 교회내의 남녀간의 평등 및 질서문제와 연관되어 논란이 되고 있었으며, 교회의 하나됨을 확인하는 자리인 성찬식이 오히려 빈부간의 위화감을 조성하여 성찬의 본질적인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러자 사도요한은 왜 여성이 예배포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다루며, 성찬식의 핵심사항이 무엇인지를 집중해서 말한다. 

  먼저, 고전11:2~16에 나오는 여성의 예배포 착용문제를 살펴보자. 이 문제는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인 배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헬라에서는 여인들이 외출하거나 공적인 모임에 참석할 경우 반드시 머리를 수건을 써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의 권위 아래에 있다는 표시였다. 물론 이것은 당시 남성우월주의 사상에 대한 반영이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 일단의 여자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 갖는 자유를 근거로 더 이상 자신이 속박당하지 않겠다면서 교회에 출석할 때에 그만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는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에는 전혀 문제될 것은 아니다. 지금은 여자가 공적인 모임에 참석할 때 머리에 수건을 쓰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는 상당히 중대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당시 사회문화적인 배경하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있는 여자는 창기(창녀) 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도들이 교회에서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모르는 불신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마치 부도덕한 자들의 집합소로 오인하게 만들 수 도 있었다. 이에 바울은 당시의 남성우월사상을 지지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 질서와 창조질서(고전11:3~10) 및 인간의 자연적 본성과 사회적 관습(고전11:13~15)에 따라 여성들의 예배포 착용이 합당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여성은 교회에서 예배포를 착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전 11:17~34의 말씀은 성찬 곧 주의 만찬에 관한 교훈을 다루고 있다. 한 마디로 고린도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성만찬은 이제 주의 만찬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 일부 성도들이 주의 만찬을 훼손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주의 한 몸됨에 참여하는 거룩한 의식으로서 주의 만찬이,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가난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일그러진 잔치로 변질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바울은 주의 만찬의 의의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며, 만찬 참여자의 바른 자세가 무엇인지를 말한다. 

 

3. 여성도들은 왜 교회에서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에 예배포를 착용해야 하는가?

 요즘에는 여자 성도들이 교회에서 기도할 때에 예배포(머리에 쓰는 너울 같은 것)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단쪽에서는 쓰는 것 같다. 하지만 개신교회에서는 예배포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긴 머리는 예배포를 대신하는 것이라고 사도바울이 말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바울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예배포를 사용하지 않는 사례가 있어서 그것이 옳은지에 관한 질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교회내에서 여자 성도들이 왜 예배포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3가지 차원에서 설명을 하였다. 

  당시 여자가 예배포를 쓴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머리의 권위가 있지 않다는 것을 표시하는 행위였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라고 생각한 일부의 여자 성도들이 교회에서 기도할 때나 예언을 할 때에 예배포를 착용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 안팎으로 상당한 물의를 일으켰다. 왜냐하면 여성이 공적인 자리에서 너울을 쓰지 않는 것은 본인이 창녀인 것을 드러내는 표시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여자 성도들이 교회에서 공적인 예배를 드릴 때에는 예배포를 사용하라고 권면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영적 질서의 차원에서 여자는 예배포를 착용해야 한다는 것이다(3~7절). 왜냐하면 영적인 질서상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고전11:3).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이요 질서다. 왜냐하면 이 세상 사람치고 자신이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해서 남자로 태어난 사람이 없고,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해서 여자로 태어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대로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 대해 영적인 질서상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하셨다. 또한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긜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머리"라는 개념은 권위의 우선순위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머리가 몸에 비해 더 권위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이 땅에 아들로 오셔서 사역하실 때에는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으시고 아버지의 권위를 받아들이셨다. 그러므로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다. 하지만 둘의 관계가 아드로가 아버지의 관계일 경우에 아들이신 예수께서 철저지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셨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여자의 머리가 남자인만큼 여자는 남자의 권위에 순복해야 한다. 곧 이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영적인 하나의 룰이기 때문이다. 

  둘째, 창조의 질서의 차원에서 여자는 예배포를 착용해야 한다는 것이다(8~10절). 왜냐하면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기 때문이며, 또한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창조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고전11:8~9). 그러므로 여자는 권세 아래에 있다는 표시 머리에 베일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창조순서에 있어서 남자가 먼저 지음을 받았고 그 후에 여자가 지음을 받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자를 돕는 배필로서 여자가 창조되었다. 고로 창조의 질서유지 차원에서 여자는 예배포를 착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은 여자들은 천사들 때문에도 예배포를 써야 한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원래 하나님을 수종드는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그들 중의 일부가 그것을 거절함으로 귀신이 되었듯이, 여자들도 권세 아래에 있다는 것을 표하기 위해서라도 예배포를 착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또한 다르게 해석하면, 최초의 범죄가 하와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이때 하와는 자신의 머리인 남편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른 머리 곧 뱀의 말을 들음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다시는 자신의 남편의 말 이외에 다른 머리는 따르지 않겠다는 표시로 예배포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인간의 본성 및  사회문화적인 관습의 차원에서도 여자는 예배포를 착용해야 한다는 것이다(13~16절).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남자가 긴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럼이 되지만, 여자가 긴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된다는 것을 본성이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통념상 여자가 자기의 머리에 뭔가를 쓰지 않고 돌아다닌다면,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창녀로 오인할 수 있기 때문에라도 여자들은 자기의 머리에 베일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면, 혹시 이러한 논거를 빌미로 남자가 남성우월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사도바울은 주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아니하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다는 것과 맨 처음에는 여자도 남자에게서 나왔지만 그후부터는 여자 없이 남자는 결코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여자는 결코 남자에게 종속적인 것이 아니며, 둘은 상호 동등한 관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고전11:11~12). 

 

4.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성만찬을 할 때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었는가?

  이어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가 공적예배를 드릴 때에 발생하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를 언급했다. 그것은 주의 만찬을 먹을 때에 잘못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자들이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어버림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고 책망한다. 왜냐하면 부자들이 자기들이 싸온 음식을 자기들이 먼저 갖다 먹음으로 자기들은 먹고도 남음이 있었지만, 가난하거나 없는 사람들 혹은 노동자들은 미처 저녁식사를 준비도 못하는 상황에서 굶주리는 가운데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당시 이러한 일들일 생겨났는지를 살펴보자.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교회가 주일 새벽에 모이든지 아니면 주일 저녁에 모여야 했다. 왜냐하면 그때에 이방인의 세계에서는 공휴일이라는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로마 시민에게 비로소 일주일에 하루를 쉬게 한 때는 그때로부터도 한 참이 지나간 후인 A.D.321년이었다. 고로 일요일이 공휴일로 선포되기 전까지 모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에도 다 일을 해야 했다. 그러므로 아침 일찍 모이거나 퇴근후에 교회로 모였던 것이다. 그런데 저녁에 모일에 때에는 음식을 각자 싸오게 했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종들을 시켜 좋은 음식을 맛있게 장만해올 수 있었겠지만 노동자들은 그럴한 시간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에 음식을 가져온 자들이라도 다같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어느새부턴가 부자들이 기다리지 못한 채 자기들이 싸온 음식을 먼저 갖다 먹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는 배불렀고 취한 사람이 발생하는가 하면 가난하고 없는 사람들은 시장한 상태에서 성만찬을 집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실시하는 성만찬이 그만 주님께서 교회에게 성만찬을 하라고 하신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예수께서 전해주신 성만찬예전의 본래의 취지가 무엇인지를 설명함과 동시에 왜 성도들 중에 성만찬을 행한 뒤에 연약한 자가 생기고 병든 자도 생기며 또한 죽은 자가 나타나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주의 떡과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성만찬이 한 떡에 참여케 함으로 모든 식구들이 예수 안에서 하나인 것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성만찬의 자리는 무슨 죄를 지은 자라도 다 용서를 받는 사죄의 은총의 자리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고린도교회에서의 성만찬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르는 기준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애찬과 성찬의 집행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먼저 자기자신을 살핀 후에야 주의 살과 피를 기념해야 한다고 했다. 만약 하나된 주의 몸의 의미를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게 되면, 자기의 죄(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고전11:29). 그러기 때문에 믿는 자들 중에도 성만찬에 참여할수록 건강이 더 약하게 되고,  병든 자도 나오며, 심지어 죽은 자도 나온다는 것이다(고전12:30). 그러므로 성만찬에 참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5. 나오며

  이처럼 사도바울은 고전11장에서 여자가 공예배에 참석할 때에 머리에 베일을 써야 한다고 하였고, 주의 뜻에 합당한 성만찬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집에서 음식을 먹고 오든지 아니면 교회에서는 기다린 후에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 번 옳은 지적이라고 본다. 사실 남녀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있을 뿐, 동등하며 상호의존적인 존재들이다. 다만 영적 권위의 관점에서 볼 때 남자는 여자의 머리에 해당하며, 창조론적 관점에서 남자가 우선적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여자의 창조목적이 남자를 돕기 위한 것이었으며, 아담에게서 하와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마땅히 자신의 머리에 권세 아래있다는 것을 표로서 면사포를 써야 하는 것이다. 혹히 써야할 면사포가 귀찮다면 긴 머리로 대신해야 하는 것이다. 혹시 여자들이 머리에 쓰지 않고 있으면 세상사람들이 볼 때 교회의 여성도들 창녀들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영적인 질서, 창조의 목적 및 인간의 본성과 당시의 사회적인 관습에 따라, 여자는 교회에 나와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에 반드시 예배포를 착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그 누구라도 거룩한 성찬예식을 참여하면서 그것을 이용해 자기가 부자인 것을 자랑해서는 아니 되며, 그것을 빌미로 가난한 자들을 괴롭혀서는 아니 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당시 성찬에 앞서 있었던 애찬이 이미 주의 만찬의 합당한 개념에서 빗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애찬 때에 자기의 음식을 먼저 가져다가 먹음으로 부자들은 배불렀고 가난한 자들은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말한다. 사실 자기가 싸온 음식을 자기가 먹을 것 같으면 굳이 교회에 그것을 가지고 와서 먹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집에서 먼저 먹고 오라는 것이다. 그러면 위화감도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애찬과 성찬을 같이 먹기 위해서는 아무리 모임 시간이 저녁시간이고 또한 배가 고프다고 할지라도 같이 먹기 위해서는 기다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 주의 만찬이 부자와 약한 자를 갈라세우는 용도도 사용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죄가 되어 약해지고 병들고 죽는 사람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2021년 07월 07일(수)

정병진목사

 

 

고린도교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회였다. 아니 그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아닐른지... 그래서 고린도전서를 읽을 때에는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이 들어간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에는 과연 어떤 문제들이 있었던 것인가? 그것들 중에서 고전 6장에서는 대체 무슨 문제를 다루고 있는가? 우리는 고전 6장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누군지에 관한 정체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내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누군지가 밝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대체 누구인가? 2021-05-26(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10) 성도간의 소송과 자유오용과 음행문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고전6:1~2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c1dgt4U0rqw [혹은 https://tv.naver.com/v/21156285 ]

 
 

1. 들어가며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도바울은 자신이 개척했던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여러 사람과 편지를 통해 접하고는 고린도교회가 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교정하고자 이 편지를 썼다. 그 중에서 오늘은 성도들간에 발생할 수 있는 다툼에 관한 처리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성도에게 주어진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음행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당연시하는 몇몇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왜 성도들이 음행을 피해야 하는지를 쓴 것을 다루고자 한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교회의 성도들 간에 다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때에 교회에서는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은가? 그리고 교회에서 일어난 생활의 여러 문제들을 세상법정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과연 옳은지도 살펴볼 것이고, 또한 배가 음식물을 요구하듯이, 몸이 요구하는 성적인 욕구를 행하는 뭐 그리 잘못되었는지를 묻는 고린도교회에게 바울이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지도 살펴보고자 한다. 

 

2. 고린도전서와 고린도전서 6장에는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가?

  당시 고린도교회에서는 10가지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다. 1)분열 2)근친상간과 음행 3)소송 4)결혼과 재혼 5)우상의 제물 먹는 것 6)머리에 쓰는 것 7)성만찬 8)영적인 은사들 9)방언과 예언 10)부활 등의 문제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교회의 파벌과 분열의 문제는 이미 1장에서 4장 강해에서 다루었다. 그리고 지난 주에는 근친상간과 음행의 문제(5장)를 다루었다. 그래서 오늘은 5장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서, 교회의 성도간의 소송의 문제(6:1~8)와 더불어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말씀(9~11절) 그리고 성도에게 주어진 자유의 오용에 대한 권면(12~13절) 및 음행의 죄에 대한 본질(14~20절)을 공부하고자 한다. 한 마디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겪고 있는 성적인 부도덕함과 도덕적인 범죄에 대하여 바른 지침을 제시하고 있는 바,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6장의 내용인 것이다. 

 

3. 성도간에 다툼이 생길 경우 성도는 그 문제를 왜 세상법정으로 가져가면 아니 되는가?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다보니 성도간에도 때로는 다툼이 생길 수가 있다. 그럼 먄약 우리 교회에서 이러한 다툼이 일어날 때에는 어떻게 그 문제를 처리해야 좋은가? 내가 옳은지 상대방이 옳은지를 끝까지 따져보고, 결국에 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또 한 사람은 의인이 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더욱이 그러한 문제를 세상의 법정으로 가져가서 따져보는 것은 과연 합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사도바울은 매우 엄하게 꾸짖음으로 응수한다. 성도간의 다툼의 문제를 결코 세상의 법정으로 가져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거룩하게 된 성도가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는 세상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고전6:2). 고로 세상이 성도들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불의한 세상법정으로 가서 자신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거룩한 자가 불의한 자에게 재판을 부탁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둘째, 성도가 장차 천사들도 심판할 것인데, 어떻게 세상 일 정도를 판단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고전6:3). 고린도교회 안에는 이것을 심판할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냐고 바울은 반문한다. 셋째,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와 사건을 어찌 불신자인 법관들에게 묻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 세상법관이 얼마나 교회를 앝잡아 보겠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 둘이 양편에서 서로 물고  뜯는 모습을 보는 세상법관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저렇게도 물어뜯고 싸우며 사는구나 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멸시하겠느냐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되면 십계명의 제3계명인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만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고, 세상법관들도 교회 자체를 도덕 수준이 낮은 수치의 집단으로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고로 사도바울은 설령 성도들에게 다툼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결코 세상 법정에 절대 송사(고소)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과도 결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간의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끌고간다면, 그것은 한 몸된 형제들을 미워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살인죄도 성립될 수 있으며, 한 몸된 교회를 분열시키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세상법정으로 가지고 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럼 이때에는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 사도바울은 첫째, 차라리 자기가 불이익을 당하고 오히려 자기가 속임을 당하더라도 결코 세상 법정으로 가지 말라고 했다. 둘째, 설령 상대편이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할지라고 그것을 들추어 내어 그의 허물을 떠벌릴 것이 아니라, 형제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포용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상대방은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만 이기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그들의 잘못과 허물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들려주면서, 혹 그렇게 해서 자기가 이기게 되더라도 고발하는 일은 "사탄의 장난"에 놀아난 꼴이 되고 만다고 하였다. 그러면 송사에서 나 자신이 이긴다고 할지라도 그는 이미 패배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자기가 설령 속임당하고 자기가 빼앗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자기는 그렇게 살겠노라고 언급한다. 

 

4. 성도가 불의를 행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사실 교회안에 있는 성도들이든지 아니면 교회에 출석하지 않지만 교회 밖에 있는 성도들이든지 만약 자기를 성도라고 일컫는 사람이 불의를 행하게 되었을 경우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사도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 부분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쳤다. 이 세상에서 음행을 저질렀거나 도덕적으로 부패한 삶을 산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왕국을 결코 상속으로 물려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고전6:9).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서, 먼저 음행의 죄나 간음죄 그리고 동성애와 같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죄를 저지른 자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다(고전6:9~10). 그리고 이어서 성범죄 이외에도 다른 도덕적인 죄를 범하는 자는 그도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사도바울은 혹 과거에 고린도 성도들 중에 누가 그러한 일을 한 적이 있었겠지만, 이제는 그러한 더러운 행위들을 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이미 씻음을 받은 자들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라면서 그리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미 거룩하게 되었고 의롭게 된 자들이라면서 그러한 자들이 죄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옛날로 다시 돌아가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다시 사는 자는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럼, 사도바울은 이미 성도가 된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자는 누구라고 했는가? 사도바울은 그러한 사람들의 종유를 10가지로 말했다. 그들은 음행하는 자들, 우상숭배하는 자들, 간음하는 자들, 동성애자들 중에서 여자역할을 하는 자들과 남자역할을 하는 자들, 도적들, 탐욕을 부리는 자들, 술취하는 자들, 모욕하는 자들, 속여 빼앗는(강탈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참고로, 여기서 이러한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는 말은 그들이 천국에는 들어가지만 그곳에서 상은 못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 자체를 못 들어간다는 말이기 때문이다(고전3:17).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왜 고린도 교회에게 이러한 경고를 하고 있는가? 그것은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 가운데 누군가를 "미혹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고전6:9). 그것은 교회의 구성원들 중의 일부가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을 받아들여, 이미 자신은 예수님을 믿어 영이 깨끗하게 되었으니 육은 무슨 죄를 지어도 자신의 영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음행을 저질러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성도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결코 미혹을 받지 말라"고 하면서, 음행하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며, 그런 자들은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을 수 없다고 경고하였던 것이다. 

 

5.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어디에 쓰라고 주신 자유인가?

  이어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죄를 짓는데 자유롭게 쓰라고 주어진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언급한다(고전6:12~13). 왜냐하면 고린도교인들 중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을 남용하거나 오용하여 그것을 가지고 죄를 짓는데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리는 이러한 것이었다. 배의 욕구가 음식물을 요구하듯이, 성의 욕구가 음행을 요구하기 때문에 음행을 저지르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고전6:13). 그러자 사도바울은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가는 육신도 폐하실 날이 올 것이기 때문에, 육신을 죄짓는 데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몸은 음란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자신의 핏값을 주고 산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고전6:19~20). 몸은 성령의 전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지, 그것으로 창녀(매춘부)의 지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의 각 부분인데, 어찌 성도의 지체의 각부분을 창녀(매춘부)의 지체로 만들려고 하느냐면서, 그러한 자는 창녀와 하나가 되어 죄의 몸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성령과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6. 음행의 죄는 왜 본질적으로 다른 죄와 어떻게 다른가?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사람이 범하는 죄들 가운데 음행의 죄는 죄의 성격이 다른 죄들과는 많이 다르다고 했다(고전6:18). 다른 죄들은 몸밖에 죄를 범하는 것이지만 음행의 죄는 자기의 몸 안에 죄를 범하기 때문에 사람의 속에 이미 들어온 성령까지도 더럽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육체만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까지도 동시에 같이 더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음행의 죄를 밥먹는 것처럼 쉽게 여기지 말고, 음행의 죄를 멀리하라는 것이다. 그만큼 음행의 죄는 자신의 영혼까지 파괴하는 큰 죄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영광스런 몸의 부활을 입으셨듯이, 성도들도 언젠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에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에는 그동안 자기의 몸을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따라 영광의 부활을 입게 될 것인지 아니면 수치러운 부활에 참여할 것인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고전6:14). 그런데 어찌 자신의 몸을 창녀의 지체를 만들어 수치스러운 부활에 참여하려느냐는 것이다. 그런 자는 결국 수치스러운 부활에 참여하여 결국 지옥에 떨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자신의 몸을 창녀와 합하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고전6:15~16). 무엇보다도 성도들 자신의 몸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핏값을 주고 산 것인데 어찌 자신의 것인량 마음대로 쓰려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고전6:20). 

 

7. 나오며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모시고 사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어떠한가? 대부분 자기 안에 귀신들을 모시고 사는 존재들이다. 고로 실제로 귀신이 그들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있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알고 살든지 아니면 자신이 그러한 존재인지를 모르든지 현실은 실제로 그렇다. 심지어 자기 안에 성령을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자기의 생각을 귀신에게 빼앗기게 되면 그도 세상사람처럼 살 수가 있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서 교회에서 일어난 성도간의 다툼의 문제를세상법정의 불의한 자들에게 심단해달라고 의뢰하고 있느냐고 사도바울은 꾸짖는다. 성도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장차 심판때가 되면 성도가 세상도 판단하고, 타락한 천사들도 심판할 터인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고 손해를 당할지언정 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어서 그를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성도들은 믿을 때에 이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맘대로 죄를 지으라고 주어진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상대방을 섬기라고 주어진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핏값을 주고 산 우리의 몸을 어찌 창녀에게 내주어 방탕한 삶을 살 수 있느냐면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심히 책망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살다가 만일 회개하지 못한 채 죽게 되면 그 사람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도 정신차려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만 살 존재가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도 살아갈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에 우리의 미래는 지금 우리의 몸을 우리가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고로 성도들이라면 빨리 깨어서 밖으로 나와야 한다. 세상사람처럼 살아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성령을 모신 자처럼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5월 26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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