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제물을 먹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사실 영적으로 볼 때에는 매우 심각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상의 제물 문제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동일한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우상을 숭배해도 귀신이 들어오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음식을 통해서 귀신이 몸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것을 정확히 규명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우상제물 취식에 관한 올바른 관점을 갖도록 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사례를 갖고 들어오며, 성만찬의 사례를 가지고 들어온다. 과연 사도바울은 우상제물취식의 문제를 어떻게 결론지어 말했을까?

2021-06-30(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14) 사례를 통해 살펴본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과 귀신과 교제하는 것의 상관관계(고전10:1~11: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cyMONf3mYi0 [혹은 https://tv.naver.com/v/21088092 ]

 

 

1. 들어가며

  성도가 되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까? 사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들이 없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제물이 바쳐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는 것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떠한가? 만약 우리가 부처상에다가 절을 하고 그것에게 소원을 빈다고 쳐보자, 그때 영적으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또한 조상이 죽은 날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쳐보자. 그 제삿상에 올려진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나에게는 아무런 일이 없을까? 그러므로 우상이나 우상의 제물에 관한 원칙적인 기술과 그것의 실제는 다른 것이다. 이 세상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유일한 신이시기 때문에 우상은 없다고 말하는 진술은 맞다. 그렇다고 우상에게 절을 하는데 과연 귀신이 그 우상에 달라붙지 아니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론상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과 실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두 번의 시간에 이어서, 그리스도인이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바울의 최종적인 결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상관이 없는 것인가?

 

2. 고린도전서 10장의 위치는 어떠한가?

  고린도전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한 부분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책망하는 부분이고 또 한 부분은 성도들이 바울에게 질문한 것을 답변하는 부분이 잇다. 책망하는 부분은 고전1~6장까지인데, 1~4장까지는 교회의 분열과 분파를 책망하는 내용이고, 5장은 근친상간의 죄를 책망하고, 6장은 성도간의 송사를 책망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답변하는 부분은 고전7~15장까지인데, 7장은 결혼과 이혼과 재혼에 관한 답변이고, 8장에서 10장까지는 우상의 제물 취식문제에 대한 답변이며, 11장은 여자가 머리에 쓰는 문제와 성만찬에 대한 답변이고, 12~14장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답변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5장은 부활에 관한 답변이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고린도전서 10장은 우상의 제물 취식 문제에 대한 결론부분에 해당한다. 바울은 여기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답변하고 있다. 

 

3. 고린도전서 10장은 우상제물 취식문제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고전10:1~11:1)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우상의 제물 취식문제를 어떻게 답변한 것인가? 사실 우상의 제물 취식문제는 고전8장에서부터 답변하고 있다. 고전8장에서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는 것처럼 답변한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우상은 실제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도 없다는 믿고 있는 성도들이 고린도교회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실족시키지 않고자 그렇게 답변한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고전9장에 들어가서는 자신의 사도적인 권리를 언급하면서 자신에게 있는 모든 권한을 쓰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자신에게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다 쓰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말한다. 그리고 고전10장에 와서 우상의 제물에 대한 취식문제에 결론적인 답변을 한다. 그것은 이렇다.

  바울은 고전10장에서 나눠서 3부분으로 우상의 제물 취식문제를 언급한다. 첫째, 이미 일차적인 구원을 받아 광야에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의 실례를 언급하면서, 비록 모세에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영적인 음식인 만나와 영적인 음료인 반석에서부터 나오는 생수를 마셨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남용하고 오용하다가 결국 멸망당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빠져나와 광야로 나오는데까지는 다 성공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남용하다가 결국 광야에서 다 엎드려져 죽었다는 것이다. 둘째, 성만찬의 실례를 언급함녀서 성도들이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듯이, 귀신의 식탁과 귀신의 잔을 먹고 마시면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 된다고 언급한다. 이것은 결국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면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 된다는 논리를 통해 우상의 제물을 먹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셋째,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때부터 성도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살 것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여야 한다고 권면한다. 

 

4. 출애굽후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백성 중 우상숭배한 자는 지옥에 갔는가?(고전10:1~13)

  바울은 고전10장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는지에 관하여 말한다. 그는 먼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제의 사건을 예로 들어서 일차적인 구원을 받은 자라도 우상의 제물을 먹다가 멸망당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즉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를 나오게 되었으며, 홍해에서 애굽의 군사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바다를 건넘으로 그들의 신분이 바뀐 사실을 언급한다. 그때 홍해를 건너기 전까지 이스라엘인들의 신분은 종이었고 또한 도망자이었으나, 홍해에서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킴으로써 승리자기 되었으니, 그때부터는 자유인이 되었음을 언급다. 하지만 그들이 비록 자유민이 되어 광야로 나왔다고 할지라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습성을 버리지 않아 광야에서도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고(고전10:7, 출32장의 송아지우상숭배사건), 음행을 저질렀으며(고전10:8, 민25장의 모압여인과 음행한 사건), 하나님이 계신지 아니 계신지를 시험하였을 뿐만 아니라(고전10:9, 민21장의 불뱀사건), 그리고 원망불평하다가(고전10:10, 민14장의 10명의 정탐꾼의 보고에 따른 백성들의 원망불평 등등)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었다는 것이다. 즉 출애굽1세대 가운데에는 20세 이상의 장년의 남자들 모두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는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었다는 것이다. 그럼, 그때 그들이 그렇게 광야에서 멸망을 받게 된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그들에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따라가지 않고 불신앙의 다수를 따라갔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수"라 함은 가나안 정탐꾼들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과 같은 자들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이 좋은 땅이라는 것은 인정하였으나, 그 땅은 이스라엘 민족을 삼켜버릴 땅이라고 보고하였으며, 가나안 족속 중에는 거인족이 있어서 자기들은 그들 앞에서 메뚜기와 같다고 함으로서 이스라엘민족이 그들의 의견에 넘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원망과 불평은 하늘을 찌르게 된다. 결국 부정적인 보고자였던 10명의 정탐꾼들과 그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아 원망했던 20세이상의 남자들은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다가 40년 안에 다 죽게 된다. 이것을 두고 사도바울은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당했다(고전10:5)"고 인용하였다. 더욱이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도 역시 애굽에서부터 탈출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았지만 그렇게 해서 광야로 나온 이들이 전부다 광야에서 멸망당했다고 언급함으로서 이를 확증해 준다(유1:5). 결국 광야에 나왔으나 우상숭배한 자들은 다 지옥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계21:8)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또 하나의 사실은 출애굽에 관해 보도하고 있는 고린도전서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40년동안 인도하시고 보호해주신 이를 "그리스도"라고 언급(고전10:9, 헬라어원문참조)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도 역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이를 "예수님"이라고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이것은 헬라어대문자사본을 참고할 것). 다시 말해 구약시대에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이끄시고 먹이시고 심판하셨던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한 분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는 여호와이셨고, 신약에서는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여호와와 신약의 예수님을 동일한 한 분 하나님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20세 이상의 출애굽1세대 중에는 거의 없었다. 고로 인간의 구원은 처음 믿을 때에 따놓은 당상은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믿음과 회개로 구원을 이미 받은 자라도 죽는 날까지 회개함으로 구원을 이뤄가야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 번 가졌던 믿음을 어떤 중에서도 부인하지 않아야 하며, 죽는 그날까지 회개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5. 추도예배드리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고 하여도  귀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가?(고전10:14~22)

  사도바울은 이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고 있을 것"을 권면한다(고전10;14). 왜 그런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로서 모일 때에 성만찬을 집행하여 그리스도의 한 떡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한 피에 참여하고 있는데 어떻게 되어서 귀신의 식탁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참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의 경우도 제물들을 먹는 자들은 곧 제단에 참여하는 제사장들이라고 하면서, 만약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가 곧 우상에 참여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상의 제물이나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실제로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고 그 제물을 먹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이 되어 성만찬에 참여하면서도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이가 있다면 그는 귀신과 교제하고 있는 자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마시며, 동시에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참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계속해서 행하게 된다면 그 사람들은 결국 그들을 위해 피흘리겨 죽으시고 자신의 생며을 내놓으신 예수님을 질투하게 할 것이며, 주님을 노여워하게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만약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주님보다 더 강한 자라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렇다. 이방인들이 제물을 바치는 것은 다 우상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바치는 것이다. 또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도 귀신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결단코 우상에게 절하거나 섬겨서도 아니되며 우상의 제물을 먹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 노여워하시게 함으로서 자신의 후손 3~4대까지 저주가 임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출20:5). 

  문제는 오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이 과연 이방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잘 몰라서 예수님을 믿고도 제사를 지낸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상숭배행위"라고 알려짐에 따라, 예수믿는 사람들은 이제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물론 어떤 교단에서는 십자가 긋고 제사음식 준비하고 또한 제사음식을 먹어도 괜찮다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그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제사음식을 만드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행위에 동참하는 일이기 때문이며, 제사음식을 먹게 되면 귀신들이 그 음식을 통하여 자기의 몸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인 비을 아는 자는 더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기도 하지만, 조상도 몰라보는 자식이라고 야단을 맞을까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가족이 죽은 날에 장례예배(임종예배, 입관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를 드리기도 하며 또한 매년 그날에 모여서 추도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그럼, 이것은 괜찮은 것인가? 사실 그것이 괜찮은 것인지 괜찮지 않은 것인지는 죽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것이 우상숭배행위인지 아닌지를 말이다. 하지만 지금 알 수도 있으니, 그렇게 해서 추도예배 장례예배 드린 성도들이 과연 저주를 받지 않고 살고 있느냐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아니올시다이다. 대부분의 성도들 역시 불신자와 마찬가지로 병들기도 하고 사건사고에 시달리기도 하며 자식이 이상하게 되기도 하고 물질이 새어나갈 뿐 들어오지 않는 일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다는 아니겠지만 그러한 이유들 중에는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같은 것을 드림으로 귀신을 자기의 몸 안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시체를 놓고 예배드리는데 어찌 귀신이 들어오지 아니하겠으며, 죽은 날에 모여 예배드리는데 어찌 귀신이 설치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은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단절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장례가 났을 때에는 산 사람에게 조문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의 초상 앞에 꽃을 바치는 이들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 왜냐하면 꽃을 바치는 것은 향불을 태우는 행위를 대신하는 우상숭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도예배도 더이상 드리지 말라. 그날 죽은 자가 절대 오지 않고 귀신이 와서 그 예배를 받기 때문이다. 

 

6. 우상의 제물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성도가 늘 고민해야 할 사항 2가지는 무엇인가?(고전10:23~11:1)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라 할지라도 그것이 죄가 되는지 아니 되는지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그것이 죄가 되느냐 아니 되느냐 하는 것은 사실 영적으로 보면 그렇게 했을 때에 귀신이 사람 몸 속으로 들어오느냐 안 들어오느냐를 보면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성도들이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사용할 때에는 그것이 믿음이 연약한 자로 하여금 죄를 대범하게 범하도록 조장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죄가 되는 것이다. 또한 믿음이 연역한 자를 실족하게 하는 일이라면 그것도 역시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모든 것이 다 가하다(허용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했으며, 모든 것이 가하다(허용될 수 있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것이 사람을 다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고전10:23). 그러므로 누구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할 때에는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위하여 특히 믿음이 연약한 자의 유익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고전10:24). 그리고 그는 더욱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고 권면한다(고전10:31). 왜냐하면 성도들이 자신이 가진 자유를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할 이유는 그것 때문에 믿음이 연약한 자를 걸려넘어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의 조심스러운 모습 또한 남을 배려하는 모습 그리고 절제된 행동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10:33). 

 

7. 나오며

  성경 말씀에도 '원리'가 있고 '실제'가 있다. 원리 그대로 실천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실제에서는 불가능한 것들도 역시 많다. 예를 들어 사람이 물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른 발이 물에 빠지기 전에 왼 발을 내딛으면 되고, 왼 발이 빠지기 전에 오른 발을 내믿으면 된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일 뿐 실제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물 위를 걸어갈 만큼 발을 빨리 움직일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론적으로도 역시 우상은 없다. 또한 우상이 없으니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어떠한가? 인간이 경배하고 섬기는 모든 대상에게 귀신이 관계하여 섬김을 받고 있다. 그때에 귀신들은 합법적으로 사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을 얻는다. 그렇게 하여 사람이 우상숭배행위를 하기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에 있어서 우상이 없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우상의 제물도 역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우상의 제물은 어떤 식으로든지 먹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만일 불신자가 성도들을 대접한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우상의 제물로 만든 음식일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때는 그 음식을 먹어줄 수도 있어야 한다. 그것은 불신자가 나를 사랑해서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 고기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라고 말한다면 그 고기는 먹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하게 하거나 모든 것이 덕을 세워주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보면, 모든 것이 불가하지만 모든 것이 무익한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더욱 세우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의 기준은 사랑에 기초해야 한다. 그리고 남의 유익을 위하는 일에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한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6월 30일(수)

정병진목사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는 사도라 할 수 없었겠지만 고린도교회에게는 그가 사도였다. 왜냐하면 그가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에 혹시 누가 될까봐서 그들에게 자신을 부양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복음사역자들에게는 적어도 4가지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주님이 부르신 그날의 승리의 면류관을 위해 그날도 자기의 몸을 쳐 복종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왜 그날도 이렇듯 경주하고 있었던 것일까?

2021-06-23(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13) 사도의 권리와 절제를 통한 승리자가 받을 면류관(고전9:1~27)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ChqXBHjlL8I [혹은 https://tv.naver.com/v/20957694 ]

 

 

 

1. 들어가며

  사도바울이 쓴 13권의 책들 중에서 교회에 관하여 가장 자세하게 쓴 책이 있다면 역시 고린도전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는 교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총망라하여 정리한듯 보이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고린도전서는 총1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듣고 책망하는 부분이 전반부(1~6장)이라고 한다면, 후반부에 가서는(7~15장)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물어온 문제들에 대해 대답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게 될 고전9장의 내용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지에 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가 믿음이 약한 형제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라는 말씀 가운데 등장한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운 개척자이기에 얼마든지 고린도교회부터 부양받을 있는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절제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의 이러한 태도를 통하여 우리는 자유와 권리를 가진 성도들이 어떻게 믿음이 약한 자를 배려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으며, 복음전파사역자로 부름받은 이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그 각오를 엿볼 수가 있다. 

 

2. 고린도전서 9장의 위치와 중심주제는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9장은 고린도전서 7~15장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본문으로서 고린도교회가 바울에게 제기한 각종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 중의 하나다. 바울은 7장에서는 결혼과 이혼과 재혼문제를 다루었고, 8장에서는 우상의 제물의 취식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9장은 새로운 주제가 아니라 8장의 연장선상에서 지식에 앞서는 사랑과 자유절제의 원리를 자기자신을 모범으로 삼아 설명하는 부분이다. 바울은 고전9장에서 자신에게는 사도로서 고린도교회에게 월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위해서 자기가 가진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권리를 남용하여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책망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라고 해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사용하기를 권면하고 있다. 

 

3. 바울이 사도로서 갖고 있는 4가지 권리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 즉 사도나 복음전파자로서의 권리가 어떤 것인지를 먼저 언급한다(고전9:1~14). 이때 바울은 자유인이었고 사도였으며, 예수님을 본 자였음을 말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자신의 사도로 인침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는 자신이 사도로 파송받아 세운 열매였기 때문이다(고전9:1~2).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말하여 자신의 생계비와 선교비를 부담해주도록 부탁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까지 남아있던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 그리고 게바와 같은 복음사역자들은 그들이 선교사역을 감당할 때에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다니고 있었고 또한 그것에 대한 부양을 교회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전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렇지 하지 않곻 있었다. 또한 그는 바나바와 함께 1차전도여행을 할 때에도 바나바와 함께 일을 하면서 자기의 경비를 충당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복음전파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렇다손치라라도 바울 자신에게는 아래와 같은 4가지를 근거를 통하여, 고린도교회로부터 자신이 부양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말한다. 

  첫째, 일반관습을 보더라도 자신은 교회로부터 부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고전9:7). 그때 바울은 3가지 비유를 든다. 그것은 군인의 비유요, 포도원 농부의 비유요 양치는 목자의 비유다. 다시 말해 군인이 군복무를 할 때에는 당연히 급료를 받으면서 군복무를 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포도원 농부가 포도를 재배하는 것은 포도의 열매를 먹기 위함이 들어있으며, 양치는 목자가 양떼를 치는 것도 역시 양으로부터 양의 젖을 얻기 위함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둘째, 율법규정에 보더라도 그렇다는 것이다(고전9:8~11). 모세의 율법에 보면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신25:4)"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규정은 하나님께서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셔서 만든 규정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역자들을 위하여 주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밭가는 농부가 장차 곡식을 추수할 것을 기대하지 않고 밭가는 자들이 어디에 있으며, 곡식을 떠는 자도 함께 무엇인가를 얻을 소망을 가지지 않고 떨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영적인 것을 뿌렸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육적인 것을 거둔다는 것은 결코 과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셋째, 실제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들 역시 성전에서 나오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제사장들 역시 제단에 드려진 것을 먹고 있다는 것이다(고전9:13). 이는 민수기 18장에 나오는 규정을 말하는 것으로서, 당시 이스라엘의 레위인들은 백성들의 십일조를 받아 살라고 하였고,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드린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 중에서 불에 태우지 않는 것을 받아 살라고 하였으며, 또한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드린 요제와 거제 그리고 첫열매(기름,포도,곡식,양떼와 소떼 등) 및 레위인들이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받아서 누리며 살라고 하였다. 이것은 레위인들과 제사장은 기업이 따로 없고,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여 하도록 임명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사역자들이 성도들로부터 부양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하셨던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고전9:14). 사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실 때에도 역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흐들이 복음을 전하러 갈 때에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발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왜냐하면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마10:9).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러 다니면서 어떻게 해 왔었는가? 그는 고린도교회를 비롯한 다른 교회에 짐을 지운 일이 없었다(빌립보교회는 자원에서 두 세번 보낸 적이 있기는 하다). 차라리 먹을 것이 없으면 자신이 굶어죽을지언정 바울은 결코 교회에게 그 짐을 지우지 않겠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바울이 자신에게는 이미 부양받을 권리가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장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 바울은 왜 복음사역자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바울은 복음전파자로서 아니 고린도교회에서는 사도로서 얼마든지 부양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파한 것인가? 그것은 3가지 측면에서 그렇다고 말했다. 첫째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값없이 주어진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런 장애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고전9:12). 복음을 전파하면서 뭔가를 기대하면서 전파하는 것은 값없이 받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돈으로 바꾸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권리를 다 이 땅에서 사용해버린다면 장차 천국에서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고전9:18). 다시 말해 복음을 전파할 때 값없이 전파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쓸 수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상해주실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형편처지를 헤아려 행동하는 이유는 아무쪼록 그들 가운데 있는 한 사람이라도 실족시키지 않도로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고전9:22). 그러므로 바울은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자신을 맞추어 살았다.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어 유대교에서 떠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살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그는 디모데와 같은 믿음 좋은 동역자가 필요했는데, 전 세계에 흩어져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바울은 그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였다. 이는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유대인이어서 유대교의 순수한 신앙을 가졌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방인이어서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 있었는데, 그를 자신의 동역자로 삼기 위해 그는 기꺼이 그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한 것이다(행16:1~30. 그리고 본인도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에 율법과 성전을 훼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정결례를 행하기도 하였던 것이다(행21:17~29). 뿐만 아니라 그는 율법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자신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은 자이지만 율법없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 율법 아래에 자신을 두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율법"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바울은 이방인들을 매우 사랑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오직 믿음과 회개로 구원얻는다는 것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도들에게도 알리기 위해, 예루살렘공의회에 자신의 동행자로서 데려온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지 않게 한 것이다(갈2:3). 이는 그가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된 이유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아무쪼록 여러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여러종류의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엇다. 

 

5. 천국에서 승리관을 얻기 위해 경주하는 경기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은 자신은 복음전파자로서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들에게 설명한다(고전9:24~27). 그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이해를 위해 2~3년마다 열리는 이스트미안 경기를 예를 든다. 참고로 고린도 시에서 개최되는 이스트미안 경기는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다음의 유명한 운동경기다. 바울은 이스트미안 경기 중에서 사람들에게 좀 더 알려져있는 2가지 종목을 언급하는데 하나는 육상경기였고 또 하나는 격투경기였다. 그러면서 그는 첫째, 육상경기의 예를 들면서 스타디움에서 모두가 다 경주를 한다 할 지라도 상(승리의 월계관)을 얻는 이는 오직 한 사람뿐이라고 했다(고전9:24). 이는 모든 사람에게 다 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기억하고 자신도 그 상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둘째, 이러한 운동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선수들도 철저히 자신을 절제하면서 관리를 한다는 것이다(고전9:25). 그렇듯 자신도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절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당시에 이스트미안 경기에 나가는 자는 적어도 10달 이상을 코치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했다. 특히 먹고 마시는 것에 절제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10달만큼은 술을 금했으며, 체중을 맞추기 위해 음식을 조절하였고, 식이요법을 동원하였으며, 심지어는 성생활까지 통제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하늘의 경주를 하는 자들은 보다 더 자신의 권리나 욕망을 절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 것이다. 특히 이 세상의 경주자들이 얻을 상은 월계수 잎으로 만든 월계관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버리고 썩어져버릴 것이지만 하늘에서 성도들이 받을 승리의 면류관은 영원히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니만큼 얼마나 더 노력을 기울여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셋째, 경기에 참여하기 위해 훈련받고 있는 선수치고 그냥 훈련하는 선수는 없고 모두다 하나같이 분명한 목표를 세워놓고 훈련을 받는다는 것이다(고전9:26). 다시 말해, 성도들이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복음사역자로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결국 천국에서 받을 상(승리의 면류관)을 위함인데, 이러한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지 않는다면 상에서 미끄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은 자신이 남에게는 이렇게 말해놓고 정작 자신은 그 상에서 멀어지거나 혹은 구원에서 떨어질까봐 오늘도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고 있다는 것이다(고전9:27). 헬라어원문을 보면, "쳐"라는 말은 "눈이 멍이들게 가격한다". "거칠게 다룬다". "혹독하게 다룬다"는 뜻으로서, 죄된 본성이 가득한 자신의 몸을 혹독하게 다루지 않는 한 결국 죄된 본성에게 자신이 질 수도 있기에 자신의 몸을 그때도 멍이 들도록 쳐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바울은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 그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복종케한다"는 말은 "종이 되게 한다". "노예로 끌고간다"는 뜻으로서 그는 자신의 몸을 노예처럼 하나님의 뜻에 예속시키면서 끌고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자신의 몸을 거칠게 다루지 않으면 자신도 그만 정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6. 나오며

  그렇다. 이렇듯 사도바울은 자신이 가진 자유와 권리를 결코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실족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값없이 받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믿음이 약한 형재라도 다 그리스도께서 피값을 주고 산 형제들이기 때문에, 혹시 그들을 실족케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신이 가진 권세를 다 사용해버린다면 행한대로 보상받을 수 있는 천국에서 자신이 받을 보상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 쓰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으로 구원받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천국에서 자신이 수고하고 애쓴 만큼 보상받게 하고, 또한 경주에 최선을 다하여 승리의 면규관을 얻는 성도가 되게 하는 데에 온갖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사실 천국에 들어가보면, 일한 만큼 수고했던 댓가는 자신으로 천국집으로 지어지지만, 자신을 쳐 복종키시고 절제함으로서 맡겨진 사명에 승리하는 자가 되었을 때에는 천국에서 면류관을 쓰는 성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오늘도 우리는 약한 지체를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자기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또한 하늘에서 받을 보상과 면류관을 위하여 자신을 통제하고 다스리고 절제하고 훈련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1년 06월 23일(수)

정병진목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우상은 사실 허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먹어도 되는 것인가? 사도바울은 처음에는 그것을 먹을 수 있다고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 지나서는 먹을 수 없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믿음 약한 형제를 위해서라도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왜 우상의 제물은 우리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을 이제 정리해보도록 하자. 2021-06-09(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12)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괜찮은 것인가?(고전8:1~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cXxgjUXqF_U [혹은 https://tv.naver.com/v/20664975 ]

 

1. 들어가며

  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먹어도 되는가? 얼핏 읽어보면 그래도 된다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 바울은 왜 처음에는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일까? 그러나 결국에는 먹지 말라고 그렇게 끝을 맺었던 것일까? 우상에게 제물이 바쳐지면, 그 제물에게 어떤 변화라고 생기는 것인가? 오순절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이 다 깨끗하다고 하셨으니(행10:15), 어떤 것이라도 먹을 수 있지 아니한가? 바울은 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의 취식문제를 고린도전서 8장에서 시작하여 10장에 가서 비소로 마치고 있는가?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를 왜 고린도전서 8장에서 완전히 끝마치지 아니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성도들에게 늘 고민이 되는 우상의 제물의 과연 그리스도인이 먹어도 되는 것인지를 심도있게 살펴보려고 한다. 

 

2. 고린도전서 8장은 고린도전서에서 어느 위치에 놓여 있는가?

  고린도전서 8장은 고린도전서의 본론의 초반부에 위치하고 있다. 고린도전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도입부가 1:1~9까지이며, 본론부는 1:10~15:59까지다. 그리고 끝으로 결론부는 16:1~24까지다. 이중에서 본론부(1:10~15:58)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이중에서 전반부(1:10~6:20)는 고린도교회의 분쟁과 도덕적 무질서에 대한 책망과 훈계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7:1~15:58)은 고린도교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 문제들에 대한 바울의 목회적인 답변을 다루고 있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는 문제들은 근친상간의 문제(5장), 소송의 문제(6장), 결혼과 이혼과 재혼의 문제(7장), 우상의 제물 취식문제(8,10장),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와 성찬식 문제(11장), 성령의 은사의 문제(12~14장), 부활의 문제(15장) 등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 가운데 고린도전서 8장은 고린도교회가 당면한 아주 심각한 음식 취식 문제로서, 우상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을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먹어도 되는 것인지를 다루고 있다. 당시 고린도에서는 작게는 12개의 신전이 있었고, 섬기는 신들이 무려 36개나 있었다고 하니, 우상의 신전에 바쳐지는 제물이 어마어마했었다. 그러므로 신전에 바쳐진 제물의 일부는 다시 일반시장으로 유통되어 시민의 식탁에도 오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과연 먹어도 되는 것인지, 혹은 우상의 신전에 가서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에 관하여 늘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예루살렘공의회게 결정한 사항(행15:20,29)을 그대로 전달하기보다는, 사랑과 자유와 절제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방향에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3. 미혼녀(처녀)의 결혼여부와 과부의 재혼에 관하여 바울은 어떤 답을 제시해 주었는가?

  처녀의 결혼 문제나 과부의 재혼 문제나 바울은 항상 독신으로 그냥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다(고전7:25~40). 왜냐하면 그것은 2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임박한 환난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요(고전7:26), 또 하나는 주를 섬김에 있어서 독신이 훨씬 더 유익하기 때문이라고 했다(고전7:32~34). 그러나만 이것도 자신의 권면일 뿐 본인의 결정하라고 하였으며 바울도 그것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먼저, 첫째로 처녀의 결혼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어떤 답을 제시했을까? 그것은 주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워 임박한 환난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할 수만 있으면 홀로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고전7:25~26). 왜냐하면 만약 누군가 결혼하게 된다면 그들은 어떻게 하면 남편을 그리고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까 염려할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서로 나누인다는 것이다(고전7:32~34). 그렇지만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주의 일에만 골똘하여 몸과 영을 다 주님께서 헌신할 수 있는 잇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을 권면하는 바울의 대전제는 주님의 재림이 자기시대에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주님의 재림은 성취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너무 임박한 재림사상을 갖고 있어 결혼을 하지 않고 지내기보다는 오늘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하면서, 오늘 내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그들에게 말하기를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창1:27~28).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독신의 은사를 소유한 것이 아닌 이상, 다 결혼하여 자손을 번성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자신을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둘째로 바울은 혼기를 꽉 채운 처녀딸을 둔 부모가 자신의 딸을 과연 결혼시킬 것인가 아니면 결혼을 약속한 약혼자가 자신의 약혼녀와 결혼할 것인가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 그런데 고전7:36에 나오는 말씀은 그 대상이 결혼적령기를 앞둔 딸을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약혼녀를 말하고 있는지가 조금 애매하다. 그러므로 이전의 개역한글판에서는 전자의 입장을 가지고 이 부분을 번역했지만, 개역개정판으로 넘어오면서 후자의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어떤 번역이 되었든지 상관없이, 결혼을 앞 둔 사람의 결혼을 중단시킬 것인가 아니면 결혼을 추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 질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들에게 부모나 약혼자라도 결혼하게 하는 것도 죄짓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만약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면 그것도 잘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그래도 결혼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잘한 선택지라고 말했다(고전7:36~38).

  마지막으로 바울은 과부에 대한 재혼의 문제도 언급한다(고전7:39~40). 사도바울은 남편과 사별한 과부는 자유롭게 시집갈 수 있다고 했다. 단, 주 안에서만 재혼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과부라도 시집가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 더 복이 있다고 했다. 사도바울은 항상 현재 자신이 처한 형편을 받아들이면서 그거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권한다. 

 

4. 사도바울은 성도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수 있다고 했는가 먹을 수 없다고 했는가?

  성도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 처음에 사도 바울은 그럴 수 있다고 하는 긍정적인 말로 시작은 한다. 그렇지만 끝에 가서는 자기자신은 믿음이 약한 형제를 위해 고기조차도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0장에 가서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 자체가 귀신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고전10:20). 그렇다면, 왜 사도바울은 처음에 성도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수 있다고 말했을까? 그것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사도바울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들 특히 믿음이 약한 지체를 많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혹시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는 성도들 중에는 "이런 것들 먹으면 안 될텐데..."하면서 먹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런 자들에게 우상을 제물을 먹지 말라고 명령하게 되면, 그들은 이때까지 귀신을 먹고 마셨으며 귀신과 교제한 사람이었다고 정죄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래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즉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우상일지라도 자신이 그것을 우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상이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오직 살아계신 한 분 하나님만이 신중의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서 이것을 말한다면, 이 명제는 사실상 실재가 불가능한 가정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수많은 우상들이 있는데, 거기에 누군가가 와서 절을 하고 음식을 차려놓고 향을 피우면, 귀신들이 와서 그 경배를 받고 또한 음식을 먹고, 향의 냄새를 맡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상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의 배후에는 반드시 귀신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맞지만, 그것을 섬기게 되면 그 조형물에게 귀신이 달라붙어 귀신이 경배를 받고 귀신이 음식도 받아먹는다. 그러므로 실제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상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은 당연히 귀신의 소유가 되기 때문이며, 귀신도 그 제물에 달라붙어 이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신이 달라붙은 음식을 누군가가 먹게 된다면, 귀신은 당연히 그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크게 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5.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도바울 이외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어떠한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3가지에서 살펴볼 때에 그렇다. 그것은 구약시대에도 그렇게 말했고, 오순절 성령강림후 교회시대에서 그렇게 권면했으며,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 예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첫째, 구약시대에 시편106편 기자는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으면 그 행위로 주님을 격노하게 만들며, 그렇게 됨으로 재앙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고 했다(시106:28~29). 그러니까 만약 자신이 주님을 노하게 만들기를 원하고 재앙받기를 원한다면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려면 우리는 결코 우상의 제물을 절대 먹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둘째, 오순절 성령강림후 교회의 시대의 견해를 살펴보자. 그것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데, 그것은 최초의 교회회의의 합의사항으로서 그 기록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때 예루살렘공의회에서 수장격이었던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행15:19-20)" 그렇다. 이방인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 대한 주의사항으로서, 3가지를 주의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것은 첫째로 우상에게 바쳐진 더러운 제물들, 둘째로는 피, 셋째로는 목매어 죽인 것들, 넷째로는 먹는 것은 아니지만 "음행"을 멀리하라고 정한 것이다. 사실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이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다 깨끗하고 거룩하게 되었다. 하지만 단 하나,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만큼은 더러운 제물이므로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행15:29). 그러므로 아무리 성도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우상의 제물을 함부로 먹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셋째,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요한계시록 2~3장에 기록된 교회를 향한 권면의 말씀 가운데 들어있다.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들 중에서 '두아디라교회'와 '버가모교회'를 향하여 주께서는 "우상의 제물"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셨다. 첫째로, 누군가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된다면 주님께서 그를 당신의 검으로 싸울 것이라고 하셨다(계2:16). 이는 그를 죽이시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둘째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를 질병의 침상에 던질 것이며,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그의 자녀를 사망으로 죽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계2:22~23). 이것 또한 질병과 환난과 자녀의 죽음이니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한다. 

 

6. 사도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할 이유로서 제시한 또 하나의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에게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 하나를 제시한다. 그것은 믿음 약한 형제를 위해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높은 지식이 있어서 우상의 신당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지만, 믿음이 약한 형제가 그것을 본다면 그도 우상의 제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을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그러면 그 형제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자신은 지식이 있어서,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형제의 양심을 한다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먹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만일 음식이 자신의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자신은 영원히(세상이 존재하는 한) 고기 자체를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전8:13). 왜냐하면 자신의 자유로 인하여 믿음 약한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렇다. 모든 그리스도인에는 저마다 자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자유가 믿음이 약한 형제에게 혹 걸림돌이 된다면 그 자유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절제해야 하는 것이다. 곧 자신이 가진 자유와 지식의 남용이 형제를 실족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성도들은 우상의 제물은 먹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주께서 그 형제를 위해서도 죽으셨는데, 왜 그 형제로 죄를 범하게 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무효로 만드느냐고 책망한 것이다. 

 

7. 사도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을 때에 중요한 잣대로 여겨야 할 사항을 무엇이라고 했는가?

  고로 사도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가장 고려해야 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했다. 즉 그것은 자기가 우상에 대하여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자기 맘대로 행동할 것인가? 아니면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비록 자신은 무엇이든지 다 먹을 수 있어도 형제를 위해서 먹을 것을 자제하느냐 하는 것이다(고전8:1~3).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데에 있어서 지식을 좇지 말고 사랑을 좇아가라고 말한다. 이는 다음과 같이 말로 요약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3-24)" 그렇다. 모든 것이 가능하고 자유로운 것이지는 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보다는 남의 유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고전6:12). 

 

8. 나오며

  사도 바울이 우상의 제물에 관하여 말하였던 것을 종합해보면, 결국에는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는 귀신의 식탁에 참여하는 행위이며, 그것은 자신을 결국 귀신과 교제하는 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한 결론적인 언급은 8장이 아니라 10장에 등장한다. 그는 먼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우상은 아주 없는 것이며 살아계신 하나님만 한 분 계시기 때문에, 우상의 제물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을 깊게 들여다보면 역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함은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는 자들을 실족하지 않기 위한 배려였으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은 얼마든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믿음이 약한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다. 우상의 제물은 먹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이는 구약시대에도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며,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결코 주보다 강한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격노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 이는 우상의 제물을 먹을 때에 달랑 우상의 제물만 먹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다보면 어떤 경우에는 우상숭배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은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와 우상의 제물을 먹는 행뤼를 각각 다른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동일한 행위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본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믿음이 약한 형제를 위해서라도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서는 아니 된다.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귀신이 우리 몸 속에 치고 들어오기 때문이요 그러면 저주를 나타나기 때문이다. 

 

2021년 06월 09일(수)

정병진목사

 

 

그리스도인들은 결혼해서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독신으로 살아도 되는가? 그리고 성도들은 배우자의 간음을 제외하고는 다른 이유로 이혼할 수 있는가? 주님께서는 어떤 이혼은 절대적으로 불가하다고 하셨는가? 그리고 재혼도 어떤 재혼만 가능하다고 하셨는가? 바울은 당시 고린도교회의 상황과 임박한 재림의 상황을 앞두고 성도들의 결혼관에 대해 말한다. 이 말씀들은 일생에 꼭 한 번은 들어보아야 할 말씀이 아닌가 싶다.

2021-06-02 수요기도회(11)
제목: 고린도전서강해(11) 그리스도인의 결혼 이혼 재혼 독신에 관한 질문에 답하다(고전7:1~4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Aw4wiJ1Wnbo  [혹은  https://tv.naver.com/v/20545820 ]

 

1. 들어가며

  고린도전서는 크게 1~6장까지가 전반부라고 한다면, 7장~16장은 그 후반부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전반부가 주로 "도덕적인 무질서"에 대한 책망과 훈계를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는 고린도교회가 바울에게 편지를 보내 질문했던 것을 바울이 목회자로서 답변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을 기점으로 하여, 결혼문제(7장), 우상의 제물 취식문제(8장,10장), 공적 예배의 문제(11장), 은사의 문제(12~14장), 부활의 문제(15장) 등을 차례대로 다룬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고린도전서 7장은 고린도교회가 질문한 것들 중에서 결혼문제에 관하여 바울이 답변하는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사람은 왜 결혼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지를 말하고 있고, 부부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며, 미혼자는 결혼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리고 과부는 재혼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등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기혼자의 경우 과연 자신의 배우자가 불신자라면 이혼을 해야 하는지의 문제까지도 그리고 더불어 누가 독신생활을 할 수 있는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의 결혼에 관한 전반적인 생활을 다루고 있다. 

 

2. 바울의 결혼관을 다루기 전에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 2가지 사항은 무엇인가?

  사실 고린도교회가 바울에게 결혼문제에 대해 질문을 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2가지 배경이 있다. 그것은 고린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육체는 추하고 악하며 영혼은 순수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이원론적 가르침 즉 헬라철학 사상에 영향을 받아 두 극단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육체는 악하고 영혼은 순수하기 때문에 육체를 어떻게 사용해도 상관이 없으며 본능이나 육욕을 충분히 만족시켜도 결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육체와 본능은 악한 것이기 때문에 영혼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육체를 억압하여야 하며 육체가 지닌 본능과 욕망을 모두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자의 사람들은 음행과 방탕을 일삼았고 결혼과 이혼도 아주 거리낌 없이 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자의 사람들은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하면서 결혼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 양극단에서 어떤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바울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답을 쓰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에 의하여 임박한 종말사상이 이미 들어온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들 세대에 주님이 오신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의 결혼을 시켜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쓰는 그 순간까지도 여전히 자기 시대에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고 있었기에, 고린도교회는 더더욱 자녀의 결혼문제를 두고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영혼과 육체를 나누는 이원론적인 헬라철학 사상에 따라 양극단에 치우쳐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주님의 임박한 재림을 앞둔 상태라면 과연 성도들은 결혼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또한 이혼과 재혼도 과연 어떻게 하고 살아야 한는지 그리고 독신으로 살려면 어떤 사람이 가능한지를 답변을 주어야 했다. 그래서 쓰여진 것이 바로 "고린도전서"인 것이다. 

 

3. 성도들의 결혼여부에 관한 기본원칙과 부부생활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바울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고전7:1)"고 선언함으로써 일단 결혼하는 것보다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고전9:8). 하지만 그는 음행 때문에 절제할 수 없다면 죄를 짓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고전7:2). 다시 말해 독신생활은 일종의 은사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각기 은사에 따라 결혼도 해야 하고 독신생활도 하는 것이다. 바울처럼 독신생활을 하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독신으로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욕이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고전7:9). 

  그렇다면, 결혼한 부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울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부부생활의 기준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7:3). 여기에서 "의무"라는 것은 경제적인 뒷받침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인 의무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자기의 몸은 자기가 아니라 배우자에 의해 주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고전7:3~4). 다시 말해, 아내의 몸은 아내가 주장할 것이 아니라 남편이 주장하는 것이며, 남편의 몸도 역시 남편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혼생활에 있어서 성생활의 권한을 배우자에게 넘김으로서 음행의 죄를 피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오늘날 부부의 이혼사유의 저변에는 성적인 만족도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부부는 자신의 배우자에 대한 성적인 의무를 잊어버려서는 아니 된다. 특히 부부가 따로 떨어져 있을 시간도 기도할 시간만 해당이 되며, 그것도 합의상 그렇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왜냐하면 잘못하여 사탄이 시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의 결혼문제와 과부의 재혼문제 그리고 이미 결혼한 자의 이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울은 이제 아직 결혼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결혼문제를 언급한다. 바울의 기본적인 입장은 언제나 한 가지였다. 그것은 "그냥 나와 같이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라는 것이다(고전7:8). 그런데 절제할 수 없다면 결혼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자신은 꼭 독신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러한 논조는 고린도전서 7장 내내 사실 계속해서 언급된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계속해서 독신생활을 권장하였던 것인가?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임박한 환난을 앞둔 상황에서 결혼보다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을 쓰고 있을 당시만해도 교회는 자신의 시대에 주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고전7:26). 또한 둘째, 주의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장가가지 아니한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 주를 기쁘시게 할까하고 생각하겠지만, 이미 장가간 자는 세상 일들을 염려하여 어찌하여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을 나누어지기 때문이다(고전7:33~34). 다시 말해 흐트러뜨림이 없이 주를 섬기기 위해서는 독신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은 아직까지도 지연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얼마나 지연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이제 과부들의 재혼의 문제를 언급한다. 우선 바울은 과부들도 자신과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면한다(고전7:8). 여기서 '과부'란 남편과 사별한 여인을 가리킨다. 그런데 바울은 남편과 사별한 과부는 다시 결혼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고전7:39). 왜냐하면 당시 여자는 남편의 수입이 없으면 살아가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결정도 자신의 뜻대로 하기를 바란다면서, 만약 재혼을 한다면 오로지 주 안에서만 결혼하라고 권면한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과부는 재혼하기보다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 복있는 자라고 권면한다(고전7:40). 

  마지막으로 이제 바울은 이미 결혼한 자들에게 이혼의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왜냐하면 이미 결혼자들 중에 상당수가 이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부부가 서로 신앙이 달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배우자의 한 쪽은 믿은 자이지만 반대쪽이 믿지 않는 경우 상당수가 이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바울은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에 먼저 바울은 가장 먼저 여자는 어떤 이유에든지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고전7:10).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혼했다면 재혼하지 말고 그냥 지내든지 아니면 다시 남편과 힙하든지 하라고 권면한다(고전7:10~11). 이것 또한 주의 명령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만일 믿는 여자에게 믿지 않는 남편이 있는데 그 남편이 함께 살기를 바란다면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믿는 자의 자녀가 부모의 신앙 때문에 거룩하게 될 수 있고, 구원도 받을 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지 않는 남편일지라도 혹 믿는 아내 때문에 거룩하게 되고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주의 명령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바울의 논조는 믿는 아내된 자가 불신 남편을 구원할 수 있을른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믿는 남편이 불신 아내를 구원할 수 있을른지 어찌 알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고전7:16). 그러나 믿지 않는 자가 이혼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그래도 성도는 화평 중에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고전7:15).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일찍이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우리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남자는 자신의 부모를 떠나서 자신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만들어 가정을 꾸려나가야 한다고 하였다(마19:4~5). 그것은 구약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신 것이다(창2:24). 그런데 주님께서는 창세기에는 없는 말씀을 한 마디 더 하셨으니, 그것은 한 번 결혼하면 이제 그 두 사람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된 것이니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을 나눠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이다. 한 마디로 한 번 결혼했으면 절대 이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마19:6). 실로 사람 둘이 만나 결혼을 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짝지어준 것이라고 하면서 이혼을 불가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예외사항이 있으니, 그것은 배우자가 음행을 하는 경우라고 말씀하셨다(마19:9). 그러므로 배우자의 음행이라는 이유를 제외하고는 서로 이혼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혼한다면 그것은 둘 다 간음을 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마19:9, 막10:11~12, 막5:31~32).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승천하신 주께서는 음행하는 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게21:8). 이러한 이혼과 재혼에 관한 주의 말씀은 사실 바울의 말씀에도 고스란히 들어 있다. 

 

5. 결혼생활에 관련지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신분과 처지는 어떻게 관리하는 것이 좋은가?

  이어서 바울은 고전 7장의 세번째 단락에서 지금까지 결혼생활에서 적용시켰던 원리를 보다 확장시켜 일반적인 삶에도 적용을 시킨다. 그것은 성도가 세상에서 어떤 신분이나 어떤 처지에 놓여있든지 초연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세번째 단락에서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행하라"는 말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였다(고전7:17,20.24). 즉 부르심을 받은 자는 자신의 위치가 어떤 신분이든지 초연히 자신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삶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성도가 결혼을 하든 안 하든 혹은 자신이 불신배우자와 살든지 안 살든지 상관없이 지금 현재 있는 위치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인위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바꾸려하고 하지 말고, 그 처지와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여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노력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값지고 고귀한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 누군가가 할례자인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굳이 무할례자가 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무할례자인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았다면 굳이 할례자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할례가 사람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며 살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종인 상태에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더라도 결코 낙망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님께 속한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으로 있을 때에 자유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면 그때는 그 기회를 이용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가 종의 신분을 가졌느냐 아니면 자유인의 신분을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르심의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고로 자신이 어떤 신분을 가졌을지라도 그것은 아름답고 고귀한 것임을 깨달으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에 의해 피값으로 사신 바 되었기에, 그리스도에게 예속된 자일 뿐 어떤 사람도 타인에 의해 예속된 신분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각각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태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고전7:24). 

 

6. 나오며

  그렇다. 바울시대에는 임박한 종말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매우 특별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독신이라는 것을 굳이 고집하지 않았다. 임박한 종말이 가까이 오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바울은 독신생활을 하라고 고집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대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특별히 독신은사를 받아서 성적인 욕구를 절제할 수 있는 자라면 독신생활도 괜찮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어떠한 상태로 부름을 받았든지 자신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이 부르심을 받은 자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성욕을 절제할 수 없으면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들은 결혼을 하라고 하였다. 결혼은 결코 죄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혼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성도가 혹 이혼당하는 일은 발생할 수 있어도, 성도가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혼도 사별의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결코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하기 위해서 이혼을 하는 것을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재혼도 주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의 실제는 어떠한가?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너 나 할 것없이, 쉽게 이혼하고 쉽게 재혼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혼을 하거나 재혼을 하여 자녀가 뿔뿔히 흩어지게 된다면, 자식의 상처는 누가 다 치료해줄 수가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성도는 혼자 살려고 하지 않는 이상 이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이혼해서 재혼한다면 둘 다 간음자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좋아서 우리가 서로 만나 결혼한 것을 주님께서도 당신이 짝지어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만큼 주님께서도 우리의 생각을 존중하신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성도가 함부로 결혼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함부로 이혼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혼자가 되었으면 굳이 독신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지 말 것이며, 미혼자라고 해서 굳이 결혼생활을 갈급해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적인 신분과 처지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6월 02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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