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하나님의 경륜(29)] 우리가 누릴 생명이란 어떤 것이며, 그것의 속성과 특징은 무엇인가?(요일1:1~2)_2024-02-05(월)

https://youtu.be/Tn7arpgEeD4 [또는 https://tv.naver.com/v/48258914]

 

1. 들어가며

  '생명'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생명이란 첫째로, 사람이 살아서 숨쉬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힘이라고 하며, 둘째, 여자의 자궁 속에 자리잡아 앞으로 사람으로 태어날 존재라고 하기도 하고, 셋째, 동물과 식물의, 생물로서 살아 있게 하는 힘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생명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생명 활동은 목격되지만 생명 자체를 볼 수 있거나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식물의 예를 들자면, 어떤 씨앗이 생명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는 땅에 심어 봐야 한다. 움이 트고 싹이 나면 그 씨앗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씨앗에는 생명이 없었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생명을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생명이 갖고 있는 속성과 특징을 과연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오늘은 하나님 경륜의 분배의 첫 번째 과정으로서 생명 분배와 관련하여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생명'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성경에서는 생명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 아버지만 갖고 계시다가 아들에게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요5:26). 그렇다. 생명은 이 세상에 속한 것 곧 물질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만 존재하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이 갖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하나님의 많은 속성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어찌 보면 영적인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나타내 보이셨으니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출현이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는 우리 인간들 중에 "아들을 가지고(모시고) 있는 자는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요일5:12)"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요한 사도는 이러한 생명을 자기를 포함한 12사도들이 보았으며 심지어 만져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요일1:1~2).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나타난 하나님'이자(요1:18) 동시에 '생명의 표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요일1:1~2). 고로 만약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영원히 생명의 본질에 접근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이 세상에 출현하기까지 생명은 사실 감추어진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살아 있는 식물과 동물에게 일시적으로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맛보기를 보여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식물과 동물의 생명활동을 통해서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식물이나 동물은 생명의 그림자이요 예표일 뿐 생명 그 자체는 결코 아니다. 

 

3. 드디어 예수께서 보여 주신 생명의 속성은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보여 주신 생명의 속성은 어떤 것인가?

  첫째, 이 생명은 아버지로부터 나온 아버지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생명은 물질세계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만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아들에게 주었고 아들이 그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둘째, 이 생명은 영원히 사는 생명이자 영원히 살게 해 주는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요3:16, 5:24).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로부터 태어날 때에는 사람의 혼의 생명과 육의 생명만 가지고 태어날 뿐 영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받아야 한다. 이것은 생명이신 예수님에게서 받아야 한다. 고로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지 못한 사람은 이 생명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영생하지 못한다. 

  셋째, 이 생명은 사망도 이겨볼 수 없는 생명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죽으실 때 그분은 육이 죽은 것인가 영이 죽은 것인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그분이 죽으신 부분은 피와 살에 해당하는 육이 죽은 것이다(히2:9,14). 다시 말해 예수님의 영과 혼과 육체 중에 육체가 그날 죽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영은 어떠한가? 어머니의 배속에서 태어나는 사람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날 때부터, 아니 더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 들어오실 때부터 자신의 영 속에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영은 생명을 가진 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이 생명을 해칠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하시는 말씀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지고 온 생명은 부활생명으로서 사망이 죽일 수 없는 생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 생명으로 죽은 육체를 3일 만에 다시 살리어 부활하신 것이다. 사망이 생명을 이겨볼 수 없다는 진리는 어둠이 결코 빛을 이겨보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4. 생명의 특징은 무엇인가?

  생명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 생명이 무엇인지에 관해 그 누구도 말해 주지도 않았고 또한 그 누구도 그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생명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셨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통해서 그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비유를 통해서 3가지로 말씀하셨다.

  첫째, 예수께서는 생명을 '물'이라고 표현하셨다(요4:14). 생명은 물과 같다는 것이다. 그럼 생명체에 물은 어떤 것인가? 물은 사실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다. 물이 없으면 생명체는 죽기 때문이다. 또한 물은 근본적으로 목마름을 해소시켜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를 살게 해 주는 요소이자 영원한 갈증을 해결해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때 비로소 영혼의 갈증이 끝나서 만족감을 얻게 되고 행복을 느끼게 된다. 참된 만족과 평안, 기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 예수께서는 생명을 '떡'이라고 표현하셨다(요5:35). 여기서 떡이라 함은 사람이 먹을 양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의 힘은 양식을 먹어야 생긴다. 그리고 떡을 먹어야 생존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표현하셨다. 이는 자신을 먹어야 살 수 있고 자신을 먹어야 힘을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고로 예수님을 생명의 양식으로 취하지 않는 자는 죽게 된다.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건강이 나빠진다. 

  셋째, 예수께서는 생명을 '빛'이라고 표현하셨다(요8:12). 빛은 모든 생명체를 살아 있게 만들고 성장하게 만드는 힘이다. 특히 식물 생명체로 하여금 자라게 하여 꽃을 피워 아름답게 할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게 한다. 이처럼 생명은 모든 생명체의 성장의 동인이자, 생명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인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생명체를 산출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사실 생명체만이 생명을 번식시킬 수가 있다. 

 

5. 하나님의 경륜상 하나님의 생명 분배는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의 경륜의 관점에서 볼 때 생명 분배는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신 것은 그 사람 속에 자신의 생명을 분배해 주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볼 수도 없었고 만질 수도 없던 생명을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나타내셨다. 아들은 표현된 생명으로서 그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으니 그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당신을 사람들이 물과 양식과 빛으로 취하도록 죽음의 과정을 거쳐 생명주는 영이 되시었다. 그리고 믿는 자들 속에 들어가시기 시작하셨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자기의 영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자기 안에 분명하게 아버지의 생명, 영원한 생명, 사망이 죽일 수 없는 생명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명이신 한 분 하나님께서 생명을 가지고 아들로 이 세상에 들어오셨고, 아들은 생명주는 영이 되어서 지금도 우리 믿는 이들의 영 안에 거처를 삼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놀라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자기 마음속에 영접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불러 그분이 가진 생명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며,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에 부요하게 된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롬10:12). 그러므로 우리가 약해지고 힘이 없어질 때면 이렇게 외쳐 보라. "주 예수여, 당신은 나의 생명이십니다." "주 예수여, 당신은 나의 풍성이십니다.", "주 예수여, 당신은 나의 완전하신 능력이십니다." 

 

 

2024년 02월 05일(월)

정보배목사

2024-02-04(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귀신이 떠나가게 하기 위한 정말 중요한 요건은 무엇인가?(엡5:18)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MyyjRg8BSuU [또는 https://tv.naver.com/v/48258851]

 

1. 들어가며

  귀신을 이기기 위해서는 정작 무엇이 필요한가? 오늘날은 귀신이 가득 찰대로 가득 차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 오실 시기가 다 되었기 때문에 귀신의 활동도 그만큼 증가된 것이다. 한 마디로 지금은 귀신 충만의 시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이에서부터 노인에게 이르기까지 귀신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증상을 고쳐 보기 위해 우선은 병원부터 찾는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의 문제가 정신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중에 어떤 이들은 이것이 영적인 문제가 아닌가 하여 귀신쫓는 목사님들을 수소문하여 찾는다. 하지만 그분들에게 기도 받을 때에는 좀더 나은 것 같지만 기도가 끝나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면 그리고 며칠 지나면 또 그 모양이다. 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안수해 주는 사역자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인가? 즉 사역자의 능력이 부족해서인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귀신축사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부분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것을 통해 축사사역에 과연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살피고 온전한 귀신축사를 통하여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2. 귀신이 잘 나가지 않는 이유는 사역자의 문제인가 아니면 본인의 문제인가?

  지금의 시대는 귀신이 총출동하여 활동하고 있는 시기다. 사람마다 귀신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고칠 수 없는 질병들이 난무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신기가 나타나거나 우울증세를 앓고 있는 분들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보면, 신내림 굿을 해야 한다든지 아니면 교회에 나가서 귀신을 쫓아주는 목사님을 만나서 귀신을 떼어내야 한다든지 하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신내림을 받자니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 싫고, 그래서 귀신쫓는 사역자들을 찾게 된다.

  그러면 이때에 두 종류의 경험을 하게 된다. 하나는 전혀 자신에게 반응도 없고 차도도 나타나지 않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자기 안에 큰 귀신이 들어 있어서 귀신이 자신을 감추고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경우일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사역자가 능력이 부족해서 귀신이 떠나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분명 안수를 받았을 때에는 귀신이 떠나가는 것 같지만 안수를 받고 집에 돌아오거나 며칠 지나면 또 옛날과 똑같아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더 강력한 능력을 가진 사역자들을 수소문하여 찾게 된다. 그래서 자기에게 붙어 있는 귀신을 떼어내려고 동분서주한다. 그러면 자기에게서 귀신을 쫓아주는 사역자를 만날 때까지 계속해서 찾아다녀야 한다는 말인가? 대체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이 떠나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진정 사역자가 귀신쫓는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귀신들린 본인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

 

3. 사역을 받았을 때 진짜 귀신이 쫓겨나가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사역자로부터 귀신축사를 받았을 때에 진짜 귀신이 나가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그것은 첫째, 사역자가 매우 큰 영권을 갖고 있는 경우이다. 즉 사역자가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강력한 영권을 가지고 있어서, 귀신들린 자에게서 즉시 귀신을 쫓아주는 경우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라도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이러한 사역자를 만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500년 짜리 혹은 천 년 짜리 귀신을 단번에 쫓아낼 영권을 가진 사역자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실제로 그렇게 강력한 사역자를 만나서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할지라도, 그 이후에 귀신을 방어할 자생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귀신이 또다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다시 들어오는 귀신은 절대로 그냥 혼자만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귀신은 강제로 쫓겨났기 때문에 매우 화가 나 있는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그 귀신이 다시 들어올 때에는 자기보다 더 크고 힘이 센 귀신들을 데리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처음 형편보다 나중 형편이 더 악화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럴수록 귀신들림의 현상은 더 강화된다. 그럼, 치료에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이다. 

  둘째, 귀신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자생력을 갖춘 상태에서 귀신을 떠나보내는 경우이다. 이는 자기에게서 귀신을 떠나보내되 오로지 사역자에게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권세와 힘을 키워가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경우다. 이런 자는 떠나간 귀신으로부터 확실히 공격을 덜 받는다. 그리고 떠나가는 귀신은 많아지지만 들어오는 귀신은 점점 더 없어진다. 이것이야말로 바람직한 귀신축사의 경우라고 하겠다. 

 

4. 실제적으로 귀신은 어떤 경우에 잘 떠나가는 것이며 떠난 귀신이 다시 들어오지 않는가?

  축사사역을 해 보면 어떤 자에게서 귀신이 잘 떠나가며, 또한 떠난 귀신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지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2가지 경우다. 

  첫째, 회개를 충분히 한 상태에서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귀신이 사람의 몸속에 들어올 때부터 합법적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나갈 때에도 합법적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귀신은 왜 들어오는가? 그것은 본인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들어오는 것이다(창3:14, 요일3:8). 그러나 조상들의 우상숭배의 죄 때문에도 귀신이 들어온다. 즉 조상들 속에 들어 있던 귀신들이 나와서 그의 후손에게 들어가는 것이다(출20:5). 그런데 이 둘은 둘 다 합법적으로 들어오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진정 귀신을 떠나가게 하려면 귀신이 떠나가는 합법적인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이 지은 죄이든지 아니면 조상들이 지은 죄이든지 그 죄들을 진심으로 자백함으로 회개하는 것이다(요일1:9). 그러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부터 깨끗하기 때문에 귀신은 떠나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죄를 인격적으로 보면, 사실 우리 몸속에 들어 있는 귀신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귀신을 쫓아내야 귀신도 역시 합법적으로 떠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는 들어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회개하면 예수님의 피가 그 사람의 죄를 씻어버리기 때문에, 귀신들도 그 사람 속에 들어가야 할 법적인 근거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많이 하고 귀신축사를 받을수록 귀신은 잘 떠나가는 것이며, 떠나가는 귀신도 다시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떠나가는 귀신도 합법적으로 떠난 것이므로 해코지도 하지 못한다. 

  둘째, 귀신을 떠나가게 하는 불은 사역자에게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에게서도 나온다는 것이다. 축사사역자가 귀신들린 자를 안수해 보면, 자기에게서 불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사역을 받는 당사자에게서도 불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만약 자기에게서 불이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귀신도 잘 떠나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때 귀신을 쫓아낸다고 할지라도 귀신들렸던 당사자가 자기 방어 능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귀신이 다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들어올 때에는 더 악한 귀신들을 데리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이런 경우에는 귀신이 떠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떠나가게 하는 불이 사역자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린 당사자에게서도 나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역자에게서 불이 나와서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귀신들린 당사자에게서도 불이 올라와서 귀신을 태울 때에 귀신들이 꼼짝없이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고로 당사자 안에 전혀 불이 없을 때에는 자기 안에 들어 있는 귀신들을 밀어낼 힘이 없기에 귀신을 잘 쫓아내지 못한다. 그럼 귀신은 어디에 들어 있고, 성령은 어디에 들어 있는가? 귀신은 우리 육체에 들어 있고 성령은 우리 영 안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 깊숙한 곳에 들어 있는 영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바깥쪽에 있는 귀신들을 밀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의 불이 나오면서 동시에 은사자의 불이 들어와서 귀신을 태우는 것이다. 그러면 귀신도 고통을 참다가 참다가 너무 아프기 때문에 떠나갈 것을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이 떠나가지 않는 이유를 사역자에게만 돌리지 말라. 이 세상 축사사역자 치고 귀신을 떠나보내고 싶어하지 아니하는 사역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사역자의 조건 외에도 귀신을 쫓아보내려는 자가 믿음이 없을 때에는 자기의 속에서부터 성령의 불이 전혀 타오르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귀신은 그냥 버텨내는 것이다. 떠나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밖에서부터 강력하게 불이 들어오고 또 안에서 불이 밀고 치고 올라오면 귀신들은 당황한다. 그러면 그 강력한 불에 자신의 몸이 타버린다. 그러므로 귀신들은 그 불의 고통을 참고 참다가 마침내 떠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들린 당사자는 자기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신 성령님으로부터 불을 붙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성령님이 들어 있지 않는 자는 귀신을 쫓아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사역자에게 부탁하기 전에 자기 안에 먼저 성령님을 모셔들여야 한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역자의 도움을 받아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5. 성령의 불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귀신을 태워 고통을 안겨주는 성령의 불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우선 첫째로, 이전에 설명한 바와 같이 성령의 불은 안수자에게서도 나오고 귀신들린 자 속에서도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귀신들린 당사자는 성령의 불이 오로지 안수하는 사역자에게서만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불은 은사자에게서만 나와서 귀신들린 자에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 본인의 영에서부터도 동시에 나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듭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영 속에 성령께서 들어오신 상태이기 때문이다(고전3:16, 6:19~20). 그러므로 귀신들린 당사자가 안수를 받을 때에는 안수자의 불만 의지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성령에게서부터 함께 불을 바깥쪽으로 밀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귀신이 견디지 못하고 떠나가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성령의 불은 사람 속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의 불은 사실 우리의 지성소인 영 속에 계신 성령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성령의 불은 우리 믿는 이들의 영 속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불은 하늘에서도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의 제단에 있는 불을 천사들이 가지고 내려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천사들 중에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하늘의 제단으로부터 불을 가지고 와서 안수받는 자의 머리에 붓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아무래도 높은 영적 계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럴수록 불의 양은 더 커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역자가 높은 계급일수록 천사도 큰 천사가 불을 가지고 와서 사역자를 돕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하늘에 있는 불을 다스리는 천사를 부릴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속에서부터 성령의 불이 타오르게 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위로부터 내려오는 불과 자기 속에서부터 나오는 불을 귀신들린 당사자의 몸에 집어넣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귀신이 떠나가는 것이다. 

 

6. 축사자의 도움으로 귀신을 떠나보내려 할 때 당사자는 어떻게 자기 안에 성령의 불을 더 강하게 지필 수가 있는가

  그렇다면 축사사역자의 도움을 받아 귀신을 쫓아내려 할 때에 가장 신경을 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부터 얼마나 불이 타오르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고로 자기의 속은 아주 냉랭하고 차가운데, 사역자만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내려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자기 방어 능력을 전혀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귀신을 축사하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귀신은 시도 때도 없이 공격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귀신들린 자신이 사역자로부터 안수받을 때에만 귀신이 떠나가는 것이라면 축사받는 것을 고려해 봐야 한다. 그러한 축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불은 내 속에서도 타오르게 해야 한다. 내 속에서도 장작불 같은 것이 타올라야 귀신이 떠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내 속에서 성령의 불이 타오르는가? 그것은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다(엡5:18). 그럴려면 찬송도 뜨겁게 불러야 하고, 기도도 뜨겁게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귀신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귀신이란 어떤 존재이며 왜 어느 때에 우리를 공격하는지를 배우고, 또한 귀신축사에 사용되는 예수의 이름이 과연 얼마나 큰 능력과 권세를 가진 이름인지도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점점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럴수록 귀신은 더 잘 떠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귀신을 떠나보내기 위해 성경을 공부한 적도 없고, 땀흘려 기도한 적도 없으며, 찬송도 대강 부르면서, 사역자의 능력만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 보내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귀신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성령이 충만케 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7. 나오며

  사실 귀신축사는 축사사역자와 귀신들린 당사자가 합력할 때 가장 큰 효과가 나타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능력 있는 사역자의 안수를 받으면 자기 속에 있는 귀신이 떠나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회개도 제대로 한 적이 없으면서 사역자에게서 안수를 받아 귀신을 쫓아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귀신이 떠나가지 않는다. 회개를 하지 않았기에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야 할 이유도 없을 뿐더러,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상황에서 귀신이 떠나가도록 허용하지도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호 협력이 필요하다. 축사자는 영권을 더 갖춰야 할 뿐만 아니라, 귀신들린 당사자는 믿음을 키워나가야 한다. 그래서 성령으로 자신을 충만케 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영에서부터 성령의 불이 타오르게 해야 한다. 그래서 사역자가 손만 대면 귀신이 떠나갈 정도로 준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은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으면서 오로지 사역자의 능력만 의지하는 것은 바람직한 축사방법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이 귀신으로부터 받는 고통만 더 가중시킬 뿐이다. 축사자나 당사자나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요, 물질만 낭비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철저히 회개하라. 회개기도문으로 철저히 자신의 죄와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귀신이 떠날 준비를 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 회개를 했으면 능력 있는 사역자의 도움을 받아서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 더욱이 귀신을 쫓아낼 때에도 자기의 속에 있는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면서 사역자로부터 불의 안수를 받아야 한다. 자기는 여전히 냉랭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사역자만 의존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축사방법이 아닌 것이다. 

 

2024년 02월 04일(주일)

정보배목사

 

2024-02-04(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하나님의 경륜(28)]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히2:14)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sctG7UaZ7Fo [또는 https://tv.naver.com/v/48258910]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사실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성도라면 누구나 창세로부터 거짓의 아비 마귀와의 싸움을 싸워야 하는데, 그것을 이길 유일한 방법은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는 것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부터 쓰여지기 시작하여 주후 100년경까지 쓰여진 66권의 성경을 통해 거짓의 아비 마귀를 물리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마귀를 물리친 선배들의 전투 방법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마귀를 왜 물리쳐야 한다고 말씀하는가? 그것은 소극적으로는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면 우리가 불편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적인 완성이 곧 마귀를 물리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경륜의 완성이 마귀와의 싸움이라는 것을 성경에서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마귀를 멸하는 것은 대체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2. 성경의 시작과 마지막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은 대체 어떠한 것인가?

  우리에게는 성경 66권이 있다. 그중에서 창세기는 시작의 책으로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씨앗의 기록이라면, 요한계시록은 결론의 책으로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열매들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는 창세기 1~3장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경륜이 어떤 것인지 그 씨앗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그 가운데 지구를 만드셨고, 또한 지구 가운데서도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으며, 그 동산의 생명나무 앞에 아담을 두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씨앗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천지창조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신 아담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작업이었으며, 에덴동산 한가운데에 생명나무를 두셨다는 것은 아담에게 당신의 생명을 분배해 주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이다. 고로 아담은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생명을 얻어야 했으며, 생명을 얻되 더 풍성하게 얻어야 했다. 그래서 영원히 에덴동산의 풍요를 누리면서 에덴동산을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악한 자 뱀 곧 사탄 마귀의 출현으로 훼방받고 만다. 왜냐하면 하와와 아담이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고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생명을 분배해 주기 전에 죄의 문제를 먼저 처리해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사람으로 오셔야 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인류를 대신하여 죄값을 치르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부활 승천하신 후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 그리고 믿는 자들의 영 속에 거처를 정하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해 주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생명은 영의 영역에서 출발하여 혼의 영역을 적시고 육체의 영역까지 적실 때에 비로소 생명 분배가 완성된다(고후4:10~11). 그리고 이 일을 성취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영과 혼과 육의 영역에서 구원을 이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세우신 하나님의 경영 계획 곧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런데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20~22장의 말씀을 통하여 창세기에 뿌려진 씨앗이 어떻게 열매 맺고 추수가 되는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비로소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하여 에덴동산이야말로 새 예루살렘 성의 하나님의 보좌를 본떠서 만든 동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둘 다 거기에 생명수가 있고 생명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에덴동산에 침범하여 아담과 하와를 속였던 뱀이 먼저 불못에 던져진 후에, 아담과 하와로 지칭된 사람들이 땅의 왕들과 만국 백성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똑같은 신분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왕적 지위를 가진 자로 참여하지만, 어떤 사람은 다스림을 받는 백성의 위치로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성도들이 천국에서 갖는 지위와 신분에 차이를 가져다주는 것인가?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였던 뱀 곧 마귀를 멸하는 것과도 매우 큰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서 왕적 지위를 얻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마귀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벧전5:8). 그런데 지금 마귀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하늘에서 쫓겨나서 무저갱에 갇혀 있는 상태에 놓여 있으므로, 오늘날 믿는 자들은 그가 올려보낸 귀신들과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경륜 속에 들어 있으신 예수님의 죽으심은 오직 인류의 속죄만을 위한 것이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기로 작정하신 '생명 분배'와 '땅의 분배'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신 인간에게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분배해 주시고 천국 땅을 기업으로 나눠주시려고 모든 것을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탄 마귀의 개입으로 인하여, 아담이 그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생명 분배와 땅의 분배에 앞서 '속죄'가 하나 더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경륜은 '속죄'와 '생명 분배'와 '땅의 분배'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어 죽으신 것은 오직 인류의 속죄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와 요한 사도는 그것만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며(요일3:8),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되어 죽으신 것은 마귀를 멸하기 위함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히2:14). 그렇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인류의 속죄만을 위한 죽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중요한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마귀를 멸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사용되어졌다는 것이다. 대체 예수님이 죽는 것과 마귀의 멸망당함은 어떤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정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예수님의 성육신의 또 다른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4.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3가지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성경 66권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이유를 3가지로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 인류의 시조이자 대표였던 아담이 지은 범죄의 댓가를 대신 지불하기 위함이었다(막10:45). 왜냐하면 아담이 지었던 죄의 삯은 사망이었기에 죽으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이다(창2:17, 롬6:23). 그런데 인류 가운데 죄없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값을 속량하시려고 대신 사람이 되신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코 죽으실 수 없기 때문이다(요4:24).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것이다(요1:29). 

  둘째,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시고, 그 생명을 인간에게 분배해 주시기 위함이었다(요12:24, 요10:10).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어떤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타나시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려는 생명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시기 위해 예수께서 죽음을 선택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죽지 않으면 그 생명은 예수님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음은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의 해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마지막으로 그것은 마귀를 멸하기 위함이었다(요일3:8, 히2:14).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속죄의 죽음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분의 죽으심은 두 번째로 생명을 해방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속죄를 위한 죽음이 되었든지, 아니면 생명의 해방을 위한 죽음이었든지 다 인간을 위한 죽음이다. 하지만 세 번째는 이와는 성격 자체가 다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마귀를 심판하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잡기 위한 방법으로 사람이 되셔서 죽으시는 것을 선택하신 것인가? 그것은 바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셨던 이유와 맞물려 있기도 하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죽게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5.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결과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지도 아니하시고 그것을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지만 않았어도 사람은 범죄하지 않았을 수 있을 것이다. 고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셨다는 것은 의도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에덴동산의 한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것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인간도 역시 하나님처럼 전적으로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하나만 선택하도록 하셨다면 그것은 전적인 자유의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생명과를 선택하든지 선악과를 선택하든지 전적인 자유의지를 주셨음을 선악과를 통해서 알게 하셨던 것이다. 둘째, 선악과의 섭취 금지 명령을 통해 인간이 뛰어난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여전히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는 피조물 가운데 인간 위에 아무것도 없지만 인간 위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그 이유는 마귀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게 하여 마귀의 죄성을 만천하에 드러냄으로서 그를 심판하기 위한 덫으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그렇다. 선악과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알려 주고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것을 알려 주기 위함도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범죄한 마귀를 멸하기 위한 덫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6. 왜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멸하기 위한 덫으로서 선악과를 두신 것인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멸하기 위한 덫으로서 선악과를 두신 것인가? 그것은 마귀가 하늘에서부터 범죄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피조물로서 품지 말아야 할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이로서 그는 하늘에 있었을 때에 이미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 버렸다. 그럼, 왜 그랬을까? 마귀도 원래는 천사로 창조되었는데 그 위치를 벗어난 것이다. 원래 모든 천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창조된 영적인 피조물이다(시103:20~22). 그때 무엇보다도 사탄 마귀가 된 루시엘 천사장은 다른 천사들 위에 있는 최고의 천사로서 완전함에 있어서 하나의 모델로 창조가 된 존재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다른 천사들보다도 더욱더 많은 지혜가 주어졌고 또한 가장 아름답게 창조가 되었다(겔28:12). 그리고 하나님의 동산 에덴은 그가 거주할 처소로서 주어졌다. 그런데 그가 종의 위치를 벗어나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을 품은 것이다. 자기가 하늘 위로 올라가서 모든 천사들 위에 자신의 보좌를 높여 그들의 섬김을 받으려 하였고, 고위급 천사들의 회의를 자신이 주재하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사14:13~14). 그런데 그것은 그가 직접 어떤 행동을 취한 것도 아니었고 말로 표현한 것도 아니었다. 이러므로 마귀가 최초로 마음으로 죄를 범한 것이다. 그러자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직접 말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옮기도록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두셨다. 그리고 아담에게는 그것을 따먹지 말라고 경고하셨으며,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자 마귀는 지근거리에서 이 말씀을 듣고 있었다. 사실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시고 거기에다가 에덴동산을 창설하여 그것을 누군가에게 주셔야 한다면, 자신에게 그것을 주셔야 함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흙덩이에 불과한 아담에게 주시자 마귀가 화가 난 것이다. 그래서 사탄 마귀는 누구의 말을 듣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는 종이 되는 법칙(롬6:16)과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는 영적 원리(벧후2:19)에 따라,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듣게 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한 것이다. 그러자 그때 사탄 마귀가 비로소 자신의 본성을 밖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거짓말로 하와를 유혹했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속였던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두신 것은 마음으로 범죄한 자 마귀의 죄를 더 드러내어 그를 심판하시려 함이었다. 그래서 그의 죄된 본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게 하기 위해 선악과를 그곳에 두신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에다 최종적으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함으로써 마귀는 3가지 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하늘에서는 가장 먼저, 마음으로 죄를 지었고, 에덴동산에서는 말로 죄를 범했으며, 골고다에서는 행동으로 죄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마귀는 아담으로 하여금 자기의 말을 듣게 함으로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망의 권세를 거머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이후 사탄 마귀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가 되어 인간 위에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요12:31, 히2:14~15). 

 

7. 예수께서 죽음을 통해 마귀를 멸하신 후 그분이 마귀로부터 빼앗은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 마귀를 완전히 심판하실 수 있게 된 것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 때문이다. 사실 사탄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하였지만(요8:44),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인간을 참소하는 자로 그를 사용하셨다(계12:10). 그러므로 사탄 마귀는 예수께서 승천하시어서 그를 하늘에서 쫓아버리기까지 계속 하늘과 이 세상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욥1:6~7). 그리고 죄를 지은 자를 참소하여 형벌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되었다(마3:16~17). 그러나 마귀는 하늘에 있으면서 한 번도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을 보지도 못했으며 듣지도 못했는데,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날에 하늘에서부터 들려오는 음성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그러자 그는 아담 이후로 몸속에 귀신이 들어있지 않은 새로운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이름하여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 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자 마귀는 예수께서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아담처럼 꾀어서 자기의 말을 듣게 만들어 그분을 자신의 종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 사건이 바로 예수께서 40일간 금식기도하신 이후에 마귀가 시험한 사건이다(마4:1~11). 하지만 예수께서는 마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기록된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치셨다. 그래서 마귀는 그날 예수님에게 3대0으로 판정패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마귀를 이기신 예수께서는 그때부터 마귀의 부하들인 귀신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른 마귀는 와신상담 끝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단을 한다. 예수께서 사람이라면 그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 마귀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 곧 다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을 꼬드겨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만드는 일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사형 교사죄를 지은 것이다. 그리하여 마귀는 마음으로 죄를 지은 것(사14:13~14)에 말로 죄를 지은 것(창3:4~5)과 더불어 행동으로까지 죄를 짓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귀는 죄없는 사람을 죽여서는 아니 되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죄를 지은 사람만 사망으로 죽일 수 있었는데, 죄를 짓지 아니한 예수님을 죽여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불법이었다. 그리하여 이제 마귀는 형무소에 갇히게 될 형국이 되었다. 그곳이 바로 '무저갱'이다(계9:1,11, 11:7, 20:1~2,1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빼앗아 이긴 자이신 예수님에게 주셨다. 그것은 바로 사망과 음부의 열쇠(권세)다(계1:17~18).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사람이 죽고 사는 모든 것과 음부에 떨어지는 모든 것은 이제 예수님의 권한 아래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때 하늘 위와 땅 위의 모든 권세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마28:18~19). 동시에 마귀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전에 하늘에 있을 때에 가졌던 모든 권세와 땅 위에서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권세를 예수님에게 이양해야 했다. 그리하여 마귀가 가지고 있던 모든 권세가 예수님에게 돌려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자신의 이름을 이제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셨다(막16:17~18). 하나님의 원수를 처단하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비록 귀신들보다 능력은 떨어질 수 있어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여 귀신들을 물리칠 수가 있는 것이다. 

 

8.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에 있어서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에 있어서 우리 믿는 이들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승천 이후로 마귀와 그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쫓겨나서 땅속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마귀는 무저갱에 갇혀 지금까지 그곳에서 나오지 못한 채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임금(지배자)이 쫓겨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사건 이후부터 계속해서 이 세상의 지배자는 우리 주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리고 마귀는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음부에서 귀신들을 올려보내 사람들을 꼬드겨 죄를 짓게 하여 지옥으로 끌고 가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생명을 얻어 더 풍성하게 얻으려면 필연코 우리 인간의 육체 속에 들어 있는 귀신들을 쫓아내야 한다. 그놈들이 우리 육체 속에 있는 한 우리는 언제라도 꾀임을 받아 죄를 지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이 자신의 몸속에 있는 귀신들을 쫓아낸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첫째로는 우리의 혼의 구원과 육체의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시행해야 할 과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께 반역한 원수인 사탄 마귀의 일을 멸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귀신을 쫓아내서 음부로 보내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원수를 심판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궁극적으로 우리 믿는 이들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하늘의 상속자가 될 수 있고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죽으심은 바로 마귀로 하여금 예수님을 죽게 함으로 결국 마귀의 죄성을 폭로시켜 그가 행한 죄 때문에 그를 처벌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예수께서 육체를 입은 사람이 되지 아니하셨다면 그래서 죽을 수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마귀는 결코 불법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심으로 마귀는 예수님을 죽일 생각을 한 것이다. 왜 그런가? 선악과 사건 이후 자신에게는 사람의 육체를 죽일 수 있는 사망 권세가 들려져 있었기 때문이다(창2:17, 3:14). 하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셨기에 그를 죽여서는 아니 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판정패를 당하고 자기의 부하들이 쫓겨가는 것을 보았던 마귀는, 화가 나서 사람들을 시켜 죄없는 예수님을 죽게 만들고 말았다. 마귀는 그날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에 사망의 귀신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법을 행한 자 마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일에 동참했던 귀신들도 함께 그날 모든 계급장이 떨어져 나갔다. 무장 해제당한 것이다(골2:15). 그리고 사탄 마귀는 그날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빼앗겼다(계1:17~18). 그리고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다 주어졌다(마28:18~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마귀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어 그를 영원한 불못으로 보내기 위함이었던 것이다(계20:10). 그러므로 지금도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쫓아내는 자를 주께서는 귀하게 보시는 것이다. 그러한 일은 인간 자신의 생명의 확장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제라도 이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생명을 받은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훼방한 자, 곧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 마귀와 귀신들을 처단하는 일에도 힘써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하늘나라의 땅을 기업으로 물려받는 상속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24년 02월 04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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