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가족이나 교회의 식구들 가운데 장례가 발생했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우상숭배행위라고 알게 되었으니, 아예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단절해 버리는 것만이 상책인가?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가, 혹시 장례가 났을 때에 장례예배를 드릴 것인지 안 드릴 것인지를 선택하게 하는 교회라면 그나마 괜찮은 교회이겠지만, 교회의 방침이 장례예배는 죽은 자를 위해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산 자를 위로하는 예배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고서 예배를 강행할 경우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예배에 참석할 수도 없도 참석하지 아니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교회의 구역장이나 장로들 같이 중직자의 경우라면 더욱 어렵다. 그리고 당회가 있는 담임목사의 경우에는 쉽게 예배 방침을 바꿀 수도 없고, 부목사의 경우에는 담임목사의 목회방침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어렵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옳는가? 여기, 그 해결에 도움이 될 몇가지 조언들이 있다.

2019-08-18(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장례가 나면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눅9:57~62)
https://youtu.be/gwuhNw8eiOQ


1. 들어가며

  가족이나 친척 중에 혹은 성도의 가정에 장례가 났다고 치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례예배에 참석해야 하는가? 아니면 죽은 자를 위하여, 죽은 자 때문에 드리는 예배는 유사 우상숭배행위이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씀드려야 하는가? 현재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교회는 사람이 죽으면 즉시 장례예배를 드린다. 임종예배, 입관예배, 발인예배, 하관(화장)예배 등 적어도 4번 이상은 예배를 드리며, 또한 유가족들을 위해 위로예배를 몇 차례 더 드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죽은 자에게는 부정이 임한 것이므로 조문도 가지 말아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장례가 났을 때의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데가 많지 않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자기의 가족이나 교회의 성도들 중에 장례가 났을 때에 실제로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2. 내가 섬기는 교회는 장례예배를 드리는 교회인가 드리지 않는 교회인가?

  한국교회는 언제부터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드리게 된 것일까? 그것은 생각보다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제가 속해 있는 장로교에서는 1970년대말에 예식서에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들어갔다. 그러나 감리교 총회에서는 벌써 1934년에 "교리와 장정"의 책 속에 부모기일 추도예배 순서가 들어가 가 되었다. 감리교단에서 추도예배가 권장되기에 이르자, 이 영향을 받은 구세군과 성결교단도 1950년에 이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오늘날 대한민국의 거의 대부분의 교단에서는 다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수용하여 예배드리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교회에서는 추도예배나 장례예배가 없었는데, 나중에 교회가 그것을 수용하게 되어, 지금의 교회들은 아무런 저항없이 그러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일까?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목회자가 집례를 하니까 그냥 따라서 장례예배를 드리고 또한 추도예배도 드리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예배에 해당하며, 더 나아가서는 성경의 진리에 부합한 예배인지에 대해서는 묻고 행하는 이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장례가 나면 어떻게 했을까? 그들은 장례가 나면 당일에 시체를 파묻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의 시체는 부정하다고 율법에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장례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는 조상 대대로 부모공경에 남다른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사실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귀신의 해코지를 무서워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사실 선교사들에 의해 성경이 보급되기 전까지, 한국인들에게 귀신은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냥 무당들이 말을 하면,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서 보면, 다 귀신이 죽은 조상의 흉내를 내고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기 위해 만들어낸 교묘한 술책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렇지만 성경이 보급되면서 그리고 선교사들에 의해 조상제사는 귀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라고해서 금지되었다. 그렇지만 대대로 조상제사를 드려왔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되었어도 조상제사를 단숨에 끊어내지는 못했다. 잘못 했다가는 불효자식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도 있었고, 조상도 몰라보는 파렴치한 후손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추도예식"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1897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궁궐에서 물품을 관장하는 정3품의 높은 벼슬을 가진던 정동감리교회 이무영 성도가 모친 기일을 맞아 추도예배를 고안해 낸 것이다. 어머니 제사를 안 드리자니, 불효자식이라는 말을 듣겠고, 드리자니 우상숭배행위를 금하는 상황에서, 이무영성도는 둘 다를 절충한 기독교식 추도예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핍박을 교묘히 피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다가왔고, 예수님을 믿는데도 자손들이 온갖 불치병과 저주와 가난에 시달리는 원인으로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계2:23~24).

  그렇다면 현재 한국교회들 중에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유사 우상숭배 행위로 규정하고 이러한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있는 교회는 얼마나 될까? 정확히 조사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는 알 수는 없지만, 통합측의 경우 0.4%정도가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그나마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완전한 우상숭배행위로 보고 금하고 있는 윤석전목사가 소속되어 있는 침례교단 소속의 교회들 중이 상당한 교회가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는 것 같다.

 

3.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가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회라면?

  그렇다면,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가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회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때에도 추도예배나 장례예배가  유사 우상숭배행위라고 생각지 아니하면서,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예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물론 그것은 영적으로 심각한 우상숭배 행위에 해당됨으로, 자신과 후손에게 치명적으로 결과를 가져다 주는 요인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첫째로, 자신은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엄연한 우상숭배행위라고 믿는 성도의 경우를 가정해보자. 그런데 자기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목회자는 지금 그것이 우상숭배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 교회의 방침으로는 장례예배가 우상숭배행위가 전혀 아니라고 보는 가운데, 자기 가족이나 구역식구나 교회식구가 상을 당했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때에 과연 나는 장례예배에 참석해야 하는가 아니면 장례예배에 참석하지 말아야 하는가? 사실 오늘날 자신이 교회의 중직자가이거나 구역장이라면 교회식구들의 한 명이나 그의 가족이 사망했을 경우, 교역자가 인도하는 장례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속으로 그것을 우상숭배행위로 알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로 참석하지 않는 것도 한 두 번이다. 언젠가는 자신의 신앙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우상숭배행위로 보느냐 마느냐는 오늘날 대한민국교회의 경우 신앙의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안 가자니 교회의 방침을 어긴 것 같고, 가자니 우상숭배행위에 동참하는 것이 되어버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은 그것을 우상숭배행위로보니 절대 갈 수 없다고 선포하면 되는 것인가? 우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복음을 전하러 파송하실 때에 하신 말씀을 되새겨보자. 그때에 주님은 "뱀처럼 지혜롭로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마10:1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왜 그들에게 "뱀처럼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말씀하셨을까? 사도바울의 말에 의하면,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도 했다. 우리가 어떤 신앙행위에 대해 잘못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표현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가 정한 방침을 따라가야 한다. 무턱대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했다가는 그것 때문에 자신이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99,6%가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믿고 있는데, 거기에다 대고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는 우상숭배 행위입니다"라고 말하면, 나만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평신도로서 장례가 났을 때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무턱대고 목사님을 찾아가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는 우상숭배행위이니, 저는 이제부터 더이상 장례예배에 참석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전포고하듯이 말해버리면 속이 후련하겠는가?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가치판단기준이 나름대로 서 있어서 그것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상대방이 인지할 수 있도록 시간적인 안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본인도 그것이 정말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고 조사해고 알아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내 주장이 옳으니 나는 내 뜻대로 행하겠소"라고 과단성있게 말하기보다는 좀 더 생각해보고, 조심스럽게 그 문제를 꺼내보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뱀처럼 지혜롭게 행동하라는 주님의 명령의 본 뜻은 아니었을까?

 이제는 둘째로, 이제 막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우상숭배행위로 믿게 된 교역자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만약 교회를 개척했던 담임목사의 경우라면 그그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차근차근 그 이유를 설명하고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안 드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회가 있는 당회장 목사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만약 당회원 중의 한 명이라도 그것을 거부하거나 반대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장로가 노회에 그 문제를 제소한다고 치자, 시시비비를 떠나서 그 문제는 상당히 시끄럽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문제가 잘 해결된다고 할지라도 앙금은 쉬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가 부목사였다고 치자. 부목사는 담임목사를 섬기라는 직책이기에, 부목사가 장례예배가 우상숭배행위라고 믿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부목사라도 교회의 방침을 따라가야 할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에는 이제 양심이 문제가 된다. 그것이 분명 우상숭배행위임이 분명한데, 부목사로서 그러한 예배를 드리지 아니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때에 우리는 나아만장군의 경우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아람나라의 나아만 장군이 북이스라엘에 가서 엘리사로부터 문둥병을 치유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그는 여호와만을 자신의 하나님의 섬기기로 결단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주군인 아람나라 왕이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림몬신에게 절을 할 때에, 그때 왕을 부축하는 나아만 장군도 림몬 신 앞에서 허리를 굽혀야 하는 상황에 놓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나아만은 그 문제를 엘리사에게 아뢴다. 그러면서 나아만 장군은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왕하5:18)"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엘리사는 나아만의 청을 듣고는 더이상 그에게 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나 허용은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목사의 경우, 만약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의 방침이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예배로 인정하는 교회라면 임명받은 그 해까지는 그대로 교회의 방침을 따라야 할 것이다(물론 회개도 같이 해야 할 일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해를 넘기기 전에 그는 결단해야 한다. 하나는 당회장목사님을 설득하여서 교회가 장례가 발생했을 때에, 성도가 예배를 드릴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결의를 하면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장례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교회가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드릴 자는 드리고, 반대로 드리지 않을 자는 드리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주어진다는 측면에서는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방침을 바꿀 수 없는 경우라면, 부목사는 교회의 방침에 따르든지 아니면 자신의 직임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 교회를 사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나서는 교회를 개척해야 할 것이다. 교회를 개척하지 않고서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용은 평신도로서 구역장이나 장로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교회에서 계속해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방침에 순종하지 않는 구역장이나 장로들은 그 직임을 아마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구역장이나 중직자는 교회의 방침을 가장 앞장서서 순종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성도들 중에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우상숭배행위로 알고 그것을 거절하고 있는데, 목회자가 그 성도에 대해서 이상한 사람 취급하거나 그와 상종하지 말라고 교회에 광고하거나, 그가 이단에 물들었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끝까지 그 교회에 남아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우상숭배라는 것을 모든 성도들로 알게 하고, 그 폐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하고자 하는 사명이 있다면, 그는 그 교회에 계속 남아서 그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마치 두아디라교회에 남아 있으나 거짓 선지자 이세벨에 물들지 않고 올곧은 신앙을 계속해나가는 몇몇 사람의 경우에 해당한다. 또한 사데교회의 경우 흰 옷을 입고 다니는 성도로서 그 교회를 끝까지 진리로 수호하겠다는 결의가 있으면 그교회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신앙에 따라 결정할 일이다. 그러나 목회자가 이러한 성도들을 계속해서 이단시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할 경우에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교회를 떠나는 것이 그 교회의 목회자에게나 자신에게나 더 낫지 않겠나 싶다.

 

4. 추도예배나 장례예배가 우상숭배행위라고 믿는 성도는 장례식장에 아예 가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추도예배나 장례예배가 우상숭배행위라고 믿는 성도는 결코 장례식장에 가지 말아야 하는가? 아니다. 자기의 가족이나 구역식구의 가족이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장에도 찾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한 가족의 식구를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경우에는 가서 조문은 해도 될 것이다. 다만, 조문을 하기는 하되, 영정 사진을 두고 거기에 절을 하거나 그 앞에서 묵념을 하거나, 국화꽃을 바치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절을 하거나 묵념을 하거나 국화꽃을 바치는 행위는 사실 과거에는 죽은 자에게 향을 피우는 일 대신에 행하는 우상숭배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실 언제부턴가 향을 피우는 것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국화꽃이 자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장례가 나면 왜 상당한 가족들은 검정색의 옷을 착용하고, 국화꽃을 바치게 하는가? 이것이 어디에 나온 전통인가? 이것은 결코 우리나라의 전통방식은 아니다. 우리나라 정통방식은 삼베옷을 입고 머리에 두건을 쓰고, 손에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발에 집신을 신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많이 불편하고 힘들기에 간편식으로 바뀐 것이다. 그것도 영락없이 일본식으로 바뀐 것이다. 일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검은색 상복을 입고 국화꽃을 바치기 때문이다. 그것을 여러 상조회들이 받아들여 지금 우리나라 장례식장에서도 검정색 상복을 입고 국화꽃을 대령해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고보면 이것은 외래문화인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들어가보면, 조상제사도 하나의 외래문화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은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일도 사실은 알고보면, 반만년의 우리나라 역사 가운데 채 500년도 안 된 짧은 역사를 지녔기 때문이다. 즉 조상제사는 조선의 왕이 중국으로부터 조상제사도를 받아들여 종묘사직제사를 드리면서부터였다. 그때가 바로 조선 정종 때(A.D.1398~1400)였다. 한편, 우리나라의 평민들도 죽은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된 때에는 조선후기 정도였으니, 짧아도 매우 짧은 역사요, 그것도 중국 송나라 주희(A.D.1130~1200)에게서 들여온 외래문화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가족이나 교회의 식구의 가족이 상을 당하면, 가서 위로해주라. 하지만 결코 우상숭배행위를 하지 말라. 죽은 자에게 절하거나 꽃을 바치지 말라. 다만 상주에게 절하는 정도까지는 괜찮다. 왜냐하면 상주가 귀신들린 경우가 아니라면 그 사람에게 절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상숭배행위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절할 때에 살아있는 상주 뒤에서 귀신이 와서 절을 받아먹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죽었을 때에는 귀신들이 즉시 시체를 곧바로 접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귀신들은 사람의 몸을 자기의 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마12:43~45). 하지만 사람이 살아있을 때에는 그 사람도 하나의 인격체이니까 귀신이라도 결코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가 죄를 지었을 때에만 합법적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주에게 절을 하는 것은 허용이 된다는 것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물론 상주에게 절을 하지 않고 손만 잡아주어도 된다. 그리고 위로의 말 한 마디를 건넨다.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길 빕니다"라고 말이다. 그리고는 장례식장이라면, 식사하는 장소로 이동한 다음, 유가족들 중에 자기교회 식구와 관련된 유가족들을 불러다놓고 장례식에 귀신이 틈타지 못하도록 그리고 유가족들이 다투지 않고 장례절차를 마치도록 그리고 유가족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해주면 된다. 이때 기도만 하는 것은 예배의 행위라고 보지 않는데, 이는 요한계시록에 천상의 예배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예배의 순서가 찬송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찬송하고 기도하면 그것이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찬송하는 일을 하지 말라. 다만 기도만 해주라. 그래서 장례식장의 식구들이 귀신들이 오는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5. 본인의 가족에게 장례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는 자기 가족 식구들 중에 돌아가셨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우리 주님께서는 가족의 상을 당했을 경우라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렇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 죽은 자들로 자기의 (육이)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라.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였다. 이것은 복음을 전파하여 아직도 살아 있으되 회개하고 구원받을 기회가 있는 자를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뜻한다. 이미 죽은 자는 그의 영혼이 천국 혹 지옥에 가고 없는데, 거기에다 대고 우리가 빌어본다고 한들, 지옥에 떨어진 죽은 자가 살아돌아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옥에 떨어진 자가 다시 살아나서 천국에 들어갈 리도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식구들 중에 장례가 났다고 할지라도, 첫째, 목회자를 불러 예배를 드리도록 요청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다만 교회에 그와같은 사실을 알려 조문을 할 수 있도록만 하면 된다. 둘째, 장례절차는 교회 목사님께서 오셔서 입관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화장예배) 등을 주관할 것이 아니므로, 그냥 상조회에 맡겨두 상조회에서 다 알아서 해 준다. 주님께서도 "영이 죽은 자들로 육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고 했으니, 상조회를 직업으로 알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간소하게 입관을 하게 하고, 발인하게 하면 된다. 그것을 두고서, 어떻게 해야 바르게 행하는 장례절차인지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그리고 셋째, 장례절차가 완전히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목사님께 부탁드려 (장례식장이 아니라) 가정예배를 부탁하면 된다. 이것이 진정한 위로예배다. 왜 그런가? 구약시대의 경우 죽은 시체를 만지면 일주일동안 부정하고, 그 공간 안에 들어가 있어도 일주일동안 부정하다고 했기 때문이다(민19:11,14).

 

6. 나오며

  자기 가족이나 교회식구 가운데 장례가 나면 움직이지 아니할 수 없다. 구약시대에는 누구든지 시체를 만지거나 시체가 있는 장막 안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일주일동안 부정하게 되고 정결케 하는 의식을 준행하지 아니한 상태로 성막(성전)에 들어가면 죽임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만 제사장이라도 자기 가족이 죽었을 때에는 시체를 만지고 장막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했다. 하지만 대제사장은 그것도 안 되었다. 그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망이 있는 것과 거룩한 장소는 함께 할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무영 성도의 모친기일제사 대신에 드린 모친기일추도예배 때문에 오늘날에 거의 모든 교회가 죽은 자를 위한 제사나 장례식 대신에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예수믿는 성도가 되었어도 저주와 가난과 질병과 사건사고가 떠나지 않고 있는 줄을 거의 대부분 모른다(계2:22~23). 아니다.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는 분명히 변형된 우상숭배행위에 해당한다. 그것을 행하면 귀신이 와서 그 예배를 받고 경배를 받고 기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무 짜르듯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단절하여서 가족간에 성도와 목회자간의 의를 상하게 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예수님도 뱀처럼 지혜롭게 행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비둘기처럼 순결을 지킬 수 있야 한다. 둘 다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지혜가 필요한 때다. 오늘 전한 말씀이 그러한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래 본다.

 

2019년 08월 18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조문하는 것은 그리 문제되지는 않으나, 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는 우상숭배행위가 되는가?(민19:11~22)_2019-08-19(월)

https://youtu.be/PMSDdCngNhU

 

1.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는 정말 우상숭배행위일까요?

   그렇습니다.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는 변형된 제사의식이기 때문입니다.

 

2.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유사 우상숭배행위가 되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고전10:20에 의하면,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고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는 형식만 기독교형태로 바꾼 것일 뿐 변형된 우상숭배행위인 것입니다. 둘째,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행위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장례가 났거나 죽은 자를 기념하기 위해 드리는 장례추도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할 뿐더러, 죽은 자를 위해 드리거나 죽은 자 때문에 드리는 예배이기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는 어떻게 됩니까? 사탄마귀가 와서 그 예배를 대신 받게 됩니다. 셋째,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는 죽은 자 때문에 드리는 예배이므로 죽은 자를 미화하고 죽은 자를 신격화하는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사 우상숭배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넷째, 구약시대에 죽은 자의 시체는 부정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민19:11~22). 고로 죽은 자 때문에 예배를 드린다면 예배가 더이상 예배가 되지 못하고 그만 더럽혀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이름이 더럽혀진 예배를 받으시지 아니합니다. 특히 장례예배는 대부분 죽은 시신이 있는 장소나 현장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죽은 시체를 만진 자도 부정한 것이지만 그 시체가 있는 공간(장막)도 함께 부정해지고, 그 시체를 만진 자가 접촉한 것도 부정해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죽은 자가 있는 장례식장에 가서 죽은 자를 위해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섯째,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는 원래 교회의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는 원래 교회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1897년 정동감리교회 이무영 성도가 모친 기일을 맞이하여 핍박을 면해보기 위해 고안한 것을 교회가 받아들인 것이고, 이어서 교단이 받아들인 것입니다. 고로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는 합당한 예배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고로,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는 기독교예식을 빙자한 유사 우상숭배 행위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3.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나 우상숭배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는 현상적이고 결과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첫째로, 사례적으로 보았을 때에 성경에는 단 한 번도 죽은 사람을 위해 그러한 예배를 드렸다고 한 사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문했거나 장례식을 치렀다는 대목은 나옵니다. 사람이 죽었으니 가족을 잃은 것이요, 가족을 잃었다는 것은 잠시동안(혹은 영원히)이지만 이별의 슬픔(아픔)을 맞게 된 것이기 때문에, 가서 위로하고 조문하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서 죽은 시체로 인하여 부정해졌고 부정한 공간에 가서 예배를 드려준다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죽은 시체가 있는 공간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나무에 붙어있는 살아있는 꽃을 억지로 꺾어서 화분에 꽂아놓고는 박수치며 기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에 그것을 통해서 성도들에게까지 저주와 가난과 질병 그리고 사건사고와 우환이 끊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믿는 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담당했기 때문에, 더이상 받을 저주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저주를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죽은 자를 위해 예배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사 우상숭배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의 율법 중에서 의식적인 부정은 더이상 사람을 정죄하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완성하심으로 폐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십계명을 어길 때에는 지금도 그것은 사람에게 정죄를 합니다. 다시 말해, 성도라도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어기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죽은 자를 위해 예배를 드리거나 국화꽃을 바치는 행위는 분명히 우상숭배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우상숭배행위가 아니라고 한다면, 왜 예수 잘 믿는 성도가 중한 암병에 시달리게 되고, 사건사고에 늘 치어살며, 자녀들은 유리방황하며, 가난이 떠나지 않으며, 질병에 걸려 고통받는 자가 그리도 많은 것입니까? 성도들치고 사실 범죄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되돌아보아도 추도예배와 장례예배 이외에는 성도들에게 다른 심각한 우상숭배행위가 발견되지 않습니니다(물론 권사가 하도 기도응답이 되지 않아서 점치러 왔었다는 것을 무당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겠죠). 어찌보면 사실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우상숭배행위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바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왜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드리면 저주가 찾아옵니까?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는 첫째, 사망이 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망은 사실 마귀가 사용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왜냐하면 사탄마귀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이기 때문입니다(히2:14). 그런데 신명기30:19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여기에 보니, 생명과 복이 한 짝을 이루고 있고, 사망은 저주와 한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고로 사망이 임한 곳에는 저주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둘째, 추도예배나 장례예배에 귀신이 와서 그 경배를 받는데, 귀신은 저주받은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누군가가 죽었을 때에 그의 유가족을 위로하고 조문을 하는 것은 사실상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물론 죽은 영정 사진 앞에서 절하거나, 죽은 영정 사진 앞에 국화꽃을 바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 죽은 사람의 영정 사진을 놓고 절을 하거나 국화꽃을 바치게 되면 그때에는 그것을 받는 대상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죽은 사람을 가장한 귀신들입니다. 이때 귀신들은 저주받은 영이기 때문에,그날 절하거나 꽃을 바친 사람에게 그 저주받은 영의 영향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 속으로 귀신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로 추도예배나 장례예배를 드리면 저주가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5. 성도가 특히 중직자가 중한 병에 걸렸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 앞에서 회개시켜 천국에 데려가시려고, 지금 징계 안에 두신 것인데, 이 때에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를 위한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고로, 중직자로서 구역장이나 장로 권사 그리고 목회자가 중한 질병에 걸렸으면, 즉시 자신이 우상숭배한 죄는 없나, 음행의 죄나 심각한 범죄를 한 것이 없나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회개하지 못한다면 그는 죽을 때에 구원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계3:5). 그러므로 가족 중에 중한 병에 걸렸다면 즉시 그 사람을 위해서 첫째, 중보기도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사람이 회개하여 죄를 완전히 씻어버리게 해달라고 청원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 사람 주변에 몰려들고 있는 귀신들을 결박해야 합니다. 귀신이 계속이 찾아와 그를 겁주거나 속여버리기 때문입니다. 한 번 구원 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속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2019년 8월 19일(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하나님은 왜 죽은 시체를 접촉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절하지 말라고 하셨는가?(유1:9)_2019-01-25(금)

https://youtu.be/sXCkNoPOqO8

 

1. 신약성경 유다서는 비록 1장짜리 성경책에 불과하지만 많은 영적인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유1:4~5,25),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는 것(유1:5,21~23), 천사들이 쫓겨나게 된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들의 활동이 무엇인가 하는 것(유1:6,9,14), 영원한 불의 형벌 곧 불못의 형벌을 받을 자들의 마지막 죄악상이 무엇이며(유1:7)과 하나님의 심판과 예수님의 재림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유1:5~7,14), 그리고  죽은 성도의 부활이 어떠하는가 하는 것(유1:14)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진리들 중에서, 오늘은 미가엘천사와 루시퍼(사탄마귀) 천사장의 권한과 그 역할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오늘날 시체를 놓고 행하는 의식이 얼마나 하나님을 노하게 하며, 우리더러 징계를 받게 하는 원인이 되는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 미가엘은 모세의 시체에 대해서 마귀에게 권한 행사를 하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께서 너를 꾸짖기 원한다고만 말한 것입니까?(유1:9)

 

2. 구약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우리는 모세의 시체를 놓고 천사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다만 모세는 모압평지 앞에 있는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게 주님의 부름을 받고 죽었다고 말해줍니다. 누가 그를 장사했는지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벳브올 맞은 편 모압 땅에 있는 어느 골짜기에 장사되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신34:1,5~6). 그리고 그가 묻힌 곳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1:9에 의하면, 그가 죽고 그의 영혼이 빠져나간 후에 그의 시체에 대해서 사탄마귀가 무엇인가를 행했으며, 그러자 그것 때문에 미가엘 천사장이 루시퍼(사탄마귀)와 다투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미가엘에 마귀더러 "왜 그렇게 하느냐?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추측이 됩니다. 하지만 마귀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모세의 시체에 대해 미가엘도 어찌할 수 없는 어떤 권한이 주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미가엘과 같은 대천사라 할지라도 마귀에게 더 이상 마귀가 잘못하고 있다는 판결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미가엘은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가 저지르고 있는 행동을 보고도 어찌하지 못한 채, 다만 "하나님께서 너를 꾸짖기를 원한다"고만 말했던 것인가요? 그것은 모세의 시체에 대해 미가엘은 자신이 비록 천사장이었음도 불구하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미가엘은 마귀가 모세의 시체에 대해 무슨 짓을 하는 것을 보았지만, 그의 행동을 제지하거나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사람이 죽으면 그의 시체에 대해서 마귀가 할 수 있는 어떤 권한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마귀의 권한은 대체 무엇입니까?(창3?14)

 

3. 창3장은 하와와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와 그들의 책임을 묻고 죄에 대한 징계를 내리는 장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범죄에 대해 하와에게 핑계를 댔고 하와는 뱀에게 핑계를 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옛 뱀(계12:9)에게 즉시 징계를 내리기 시작하시는데, 징계 가운데 의미심장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뱀에게 "너는 네가 사는 모든 날동안) 흙(아파르)를 먹을 것이다(창3:14)"고 말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흙"이란 진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땅(지구)의 티끌, 먼지(아파르)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셨던 바로 그 재료들 가운데 하나로서, 사람의 육체를 만든 재료입니다. 그것은 "땅의 흙"이라고 나와있지만 히브리어를 보면, 이 흙은 진흙은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뱀에게 먹고 살라고 했던 바로 그것 곧 "땅의 티끌, 먼지(아파르)"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뱀이 실제로는 흙은 먹고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앏니다. 고로 이 말씀은 옛 뱀 사탄마귀가 인간을 상대로 이겼으니(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는 법에 따라), 사탄마귀가 사람의 육체의 구성성분인 몸(시체)를 먹고 살게 되었음 곧 사탄이 사람의 시체에 대한 권한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으면 시체는 즉시 사탄마귀가 접수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속에 귀신이 들어가서 활동합니다. 문제는 죽은 시체 속에 귀신이 들어가서 활동해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신들은 죽은 자의 시체 속에 들어가, 보기에도 무섭게 만들고 두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시체 앞에서 꼼짝 못하고 두려워 떨며 절하고 섬기는 어떤 의식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귀신은 죽은 시체 속에 들어가 있다가, 적당한 사람(의지가 약한 사람, 죄짓고 회개하지 않고 있는 사람, 극진히 자기를 경배하는 사람)을 물색하여 자신을 경배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믿는 자들이 죽은 자를 위해 예배하고 꽃을 바치고 고개를 숙여 묵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4. 그렇습니다. 죽은 시체는 영혼이 빠져나간 땅의 흙(티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놓고 경배하거나 꽃을 바치거나 묵념을 하면 되겠습니까? 사람은 죽으면 죽은 즉시 시체는 귀신이 접수하니다. 그것 안에 영혼이 빠져나가고 없으니 귀신이 들락날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체가 넣어둔 관을 놓고 예배한다거나, 영정사진을 향해 절을 한다거나, 국화꽃을 바치거나 고개를 숙여 묵념하게 되면 그것은 귀신이 자신을 섬기는 행위라고 판단하여, 그 사람에게 합법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이러한 행위를 절대 삼가해야 하겠습니다. 죽은 자에 대해서 어떤 예의를 갖추는 의식(경배의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구약시대에는 사람이 죽을 때에 그 시체 대해 절대 가까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레21:1). 만약 죽은 시체나 뼈나 무덤에 접촉했으면 7일동안 부정하게 되고, 7일후에는 맑은 물에 씻는 정결예식을 한 후에 하나님의 성막(성전)에 들어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민19:11~18). 특히 거룩한 직분을 감당하는 레위인이나 제사장의 경우는 절대 시체를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단, 자신의 부모 형제자매와 자식들의 경우만은 예외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대제사장이 되었으면 그는 가족이라 할지라도 시체에 접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그순간에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예뵤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몸이 더럽혀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체를 접촉하였는데도 결국 정결하게 하지 못하게 된 자는 여호와의 성막(성전)을 더럽힌 것이므로 이스라엘에게 끊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민19:13,20). 오늘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후 구약의 정결법은 이미 폐지되었습니다. 그러한 행위 때문에 정하게 되거나 부정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도덕법으로서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았으니, 우상을 경배하는 행위는 무지 큰 죄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모르고 행했든지 알고 행했든지 우상숭배의 죄는 자손 3~4대까지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출20:5). 더욱이 구약의 의식법에는 사람이 시체를 접촉할 뿐만 아니라 문둥병환자와 접촉하거나 유출병이 있는 자와 접촉해도 자신이 더렵혀진다고 했으며, 그런 자는 유월절을 지킬 수도 없고, 성막에 예물도 드릴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민9:6~7). 그렇다면 오늘날에 추도예배, 장례예배 등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5. 그렇습니다. 죽은 자를 놓고 어떤 의식을 행하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의 행위가 되며, 고전10장에 의하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도 우상숭배와 동일한 죄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0:16~19,21~22).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교회가 드리는 추도예배나, 장례예배(죽은 뒤에 드리는 임종예배, 입관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 화장예배)를 절대 행해서는 아니 되겠으며, 예배를 안 드린다고 하더라도 죽은 사람의 영정사진 앞에서 어떤 의식을 절대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성령충만하지 않았을 때에는 그 일로 인해 귀신이 많이 틈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유족을 위로하는 것인데 또한 옛날부터 해오던 좋은 전통인데, 뭐가 그리 나쁜 것이냐고 말하겠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날 모인 것이 죽은 자 때문에 모인 것이 아닙니까? 그렇면, 그 예배는 죽은 자를 위한 예배이기 때문에 죽은 자에게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와서 대신 그 예배를 받습니까? 귀신들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상숭배하지 맙시다(고전10:14,요일5:21). 그것은 주님을 노여워하게 하시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고전10:22).

 

2019년 01월 25일(금)

정병진목사 


20189월 특별새벽집회


주제: “내 가족을 구원하기 위한 효과적인 8가지 방법은 무엇인가?”

 

[제목] 가족구원을 위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상숭배

[찬송]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말씀] 요한계시록 2:20~23(신약 401)

2018.9.8()

1. 들어가며

내 가족을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가만히 있으면 자동적으로 가족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시기를 원하신다(딤전2:4), 하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해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모든 준비를 이미 다 마치셨다. 구원을 위해 남아있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가족에 관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이렇게 말했다.

딤전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그렇다. 사도바울은 이 말씀 외에도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면 가장 먼저 자신의 가족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16:31). 그래서 우리는 그동안 가족구원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7번에 걸쳐 살펴보았다. 첫째로, 노아를 통해서는 부모의 모범적인 삶의 실천이 구원의 요소인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둘째, 야곱처럼 처자식을 위해서 드리는 사생결단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과 셋째, 여리고성의 기생라합의 경우처럼 구원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알게 되었으면 자신의 목숨을 담보해서라도 가족구원을 위해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넷째로, 엘리제사장을 통해서는 아무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귀한 자식이라 할지라도 자식이 하나님을 능멸하고 하나님을 말씀을 버젓이 어길 때에는 반드시 그를 책망해서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을 들었다. 또한 다섯째로, 다윗처럼 부모가 가장 바라는 것은 자식이 하나님을 잘 섬겨 구원얻는 것임을 유언으로 남겨야 한다는 것과 여섯째로, 호세아 선지자의 경우처럼 아무리 배우자가 가정을 등지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 떠나버린다고 하더라도 그를 끝까지 품어줄 수 있는 끝없는 사랑이 요청된다는 것도 배웠다. 그리고 일곱째로, 자식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임을 인식하여, 자식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라면 주께서 내리는 어떠한 냉혹한 처분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흔들리지 말고 자녀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한다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예도 배웠다. 하지만 이러한 7가지 구원요소 외에도 가족구원을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곧 우상숭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상숭배의 죄는 내 육체와 영혼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녀와 손자에게까지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우상숭배의 위험성이 무엇인지를 한 번 살펴보고 우상숭배의 죄가 있다면 회개하고 우상숭배행위를 멀리할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 두아디라교회는 어떤 교회이며 무슨 문제가 있었는가?

오늘 본문 말씀은 부활승천하시어 천상에 계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두아디라교회를 향하여 우상숭배행위를 강하게 책망했다는 말씀이다. 교회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개인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교회 전체의 문제였으며, 개인적으로 볼 때에는 여자 이세벨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자들과 자기 자녀에게까지 치명타를 가하는 매우 중대한 일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우상숭배의 죄란 무엇인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유형 무형의 대상을 향해 절을 하거나 거기에 음식을 바치거나 향을 피우는 등의 예의를 갖추는 숭배행위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당시 소아시아에 위치한 두아디라 사람들은 태양신(제우스)의 아들인 아폴로신(티림노스)을 자신의 수호신으로 섬기며, 황제 흉상에 절을 하며, 그 앞에 음식을 바치고 바친 음식을 함께 나눠먹는 의식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후에는 신전창기와 더불어 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이 도시에서는 이러한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로마 황제를 숭배함으로, 로마로부터 상업과 무역활동을 위한 권리를 확보할 뿐더러, 자기들의 수호신을 경배한다는 이유로 자기들의 상업조직을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도시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살려면, 황제숭배와 수호신숭배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문제는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통하여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신들을 절대 두어서는 아니 된다고 말씀하셨고, 그런 것들을 경배하거나 그것에 바친 음식을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20:3~5a, 25:2~3).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우상을 숭배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의 창조주는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그분 외에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그것들에게 예의를 갖추어 절을 하게 되면, 하늘에서 쫓겨난 타락한 천사들(귀신들)이 그 경배를 받고, 자기들이 하늘에서 쫓겨나면서 받았던 저주를 고스란히 그 경배하는 사람에게 퍼붓는다는 것을 아셨다. 그러므로 절대 금지를 명령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숭배하면 어떻게 되는 가? 성경에는 7가지의 저주들이 경고한다.

첫째, 하나님을 격노하게 만듦으로 우상숭배자에게 재앙이 임하게 된다(106:28~29).

106:28-29 그들이 또 브올의 바알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29 그 행위로 주를 격노하게 함으로써 재앙이 그들 중에 크게 유행하였도다

둘째, 저주 곧 화()를 받는다(11:28).

셋째,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임한다(5:5~6).

5:5-7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넷째, 우상숭배자는 천국에 못 들어가며, 결국 불과 유황이 타는 못 곧 지옥에 던져진다(21:8, 22:15, 고전6:9~10, 5:5~7)

다섯째, 질병의 침상에 던져진다(2:22a). 즉 온갖 불치병과 중한 병과 우울증 등의 질병에게 시달린다.

여섯째, 큰 환난에 던져진다(2:22b). 즉 모든 일이 잘 안 풀리고 어려움과 사건사고에 시달리게 된다.

일곱째, 자신의 자녀가 죽임을 당한다(2:23a). 자녀 중 정신이상자와 장애인이 나오며, 죽는 일이 발생한다.

5. 우리가 우상숭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상의 경우를 통해서 우리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자명하다.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우상숭배행위는 육체와 영혼을 둘 다를 망가뜨리는 결정적인 이유라는 것이다. 우상숭배행위는 첫째로, 자신의 육체와 삶에 온갖 저주와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둘째로, 자신의 영혼이 불타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가슴 아픈 일은 우상숭배의 일이 자기 혼자만의 저주와 고통으로 끝날 성질이 아니라, 자기 자식과 손자와 증손자에 이르기까지 저주와 고통을 고스란히 물려준다는 것이다.

20:4-5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그렇다. 우리의 자녀들은 지금도 아무런 이유없이 단지 부모가 우상숭배자였다는 이유만으로 태어날 때부터 온갖 저주의 쇠사슬에 묶여 태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내 자식이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만약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여 저주를 끊지 못한다면(3:13), 우리의 자식들은 온갖 재앙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한 채 일생을 흑암 속에 살다갈 것이다. 사실, 우리의 자녀들 중에는 지금도 밤마다 귀신들에게 가위눌리고 있고, 귀신들로부터 무엇인가를 강요당한 채 부모에게도 말도 꺼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부모의 우상숭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일평생 자신의 꿈도 펼쳐보지 못한 채 한탄하며 살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못난 부모라 할지라도 우리 자녀에게 물려주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우상숭배로 인한 저주다.

6.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 우상숭배행위를 하고 있는가?

성경은 이미 죽은 자에게 머리숙여 경배하고, 거기에 음식을 차려놓거나 향을 피우거나 하여 예의를 갖추는 행위가 바로 우상숭배요, 죽은 자에게 바친 제사음식을 먹는 것도 실은 우상숭배라고 말한다(2:14,20, 106:28~29, 고전10:20, 24:17). 그러니 오늘날 향을 피우는 대신에 죽은 자에게 국화꽃을 바치는 행위나, 영정 사진 앞에서 고개숙여 기도하는 것, 죽은 자의 기일에 추도예배를 드리는 것도 다 우상숭배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공회에서는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올 때에 반드시 지켜야할 일들로서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고 했다(15:28~29). 그렇다. 내 자식과 후손을 살리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해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인 것이다. 이것을 멀리해야 한다(요일5:21). 이것이 자식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2018년 9월 8일(토)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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