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35) 사마리아의 성령세례와 가짜 회심자 시몬을 위한 사도의 처방(행8:14~25)_2022-09-01(목)

https://youtu.be/bLizjW1ZaV8  [혹은 https://tv.naver.com/v/28957528 ]

 

1.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어떤 관계였는가?

  '유대인들'이란 남북분열 왕국시 남유다의 2개지파(유다와 베냐민)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사마리아 사람들은 북이스라엘의 10개지파의 후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상극이었다. 왜냐하면 B.C.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할 때 앗수르가 혼혈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만 혼혈민족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북이스라엘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는 섬긴다. 그렇지만 신앙과 혈통의 정통성을 잃어버린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는 남유다 사람들이 그들을 좋게 보아줄 리는 없다. 왜냐하면 남유다도 역시 B.C.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당했지만 그들은 신앙의 지조와 혈통적인 지조를 지켰으며, 포로된 지 70년만에 예루살렘에 다시 귀환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유다인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개 취급하듯 하였으며, 북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그렇게 자신을 대하는 남유다인들을 좋아하지를 않았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남유다인이었던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할 때에 있었던 하나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것은 행로에 곤한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했을 때에, 그 여자가 하는 말이,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말했기 때문이다(요4:9). 그런데 요한복음의 저자는 그 여자가 왜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상종하지(서로 교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남유다의 유대인들이 북쪽 갈릴리로 왔다 갔다 할 때에는 대부분 직선 거리였던 사마리아를 버리고, 다들 요단강 동편길을 돌아서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마리아 지역에도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들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 둘 사이를 이제는 형제 관계로 회복시키기 위해 새로운 일을 행하신다. 

 

2. 사마리아 교회가 사도들이 오기전까지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그런데 사마리아 지역에도 이렇듯 복음전파가 있었다. 그것은 스데반의 순교로 인한 거대한 핍박 때문에 흩어진 유대인들 중에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빌립[집사]가 사마리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의 말을 듣고 그리고 그가 행하는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하여 사마리아에서도 믿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들 역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은 그곳에 파송한다. 그러자 그들이 그곳에 내려간다. 하지만 가서 보니 그들이 아직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사마리아의 성도들이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한 것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아예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성령 자체는 받았으나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는 것인가? 신앙에 있어서 어떤 것이 불분명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에는 성경의 원문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다. 그리고 실제가 어떠한가도 같이 살펴보아야 한다. 그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성령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사도행전 8장의 기록은 이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답변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16절에 나온다. 이 말씀을 개역성경으로 보면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은 것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이와 다르다. 헬라어 원문에는 "왜냐하면 아직 그들 중에 아무 위에도 성령이 [그들] 위에 내려온 채로 있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직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은 채 있어오고 있었다"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마리아 성도들은 그들 위에 내려오시는 성령(곧 성령의 은사)을 받지 못한 것일 뿐 성령자체를 받지 못한 상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들이 내려가서 그들에게 성령세례를 받게 하심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  둘 사이의 소원한 관계를 형제 관계로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3.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과 성령세례는 받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사마리아 성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빌립[집사]를 통하여 복음을 들었고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자신의 구주로 믿었다는 것을 의미한다(12절). 또한 그들은 빌립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왕국)에 관해서도 들었었다(12절). 그러므로 그들이 들었고 믿었던 복음은 완전한 복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령은 언제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오시는가? 사람들 중에 어떤 이는 회개하고 믿을 때에 성령이 동시에 들어온다고 말한다(행2:38, 10:44). 하지만 어떤 이는 믿고 난 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성령께서 들어온다고도 말한다. 실제로 보면 둘 다의 경우가 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믿을 때가 아니라 성령께서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갈 때 그 사람이 거듭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가리켜 '회심'이라는 용어로 부른다. 그러므로 믿는 것과 회심은 같은 시간대에 일어날 수도 있고 다른 시간대에 일어날 수도 있다. 살펴 보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1년 안에는 다 '회심'을 경험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성도들이 믿을 때에 성령세례를 다 받았을까를 질문한다면, 그들은 믿을 때에 대부분 성령자체는 받기는 했지만 위에 부어지는 성령세례는 아직 받지 못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그렇다. 사마리아의 세례받은 성도들 중에는 아직 회심이 안 된 자들도 섞여 있었으나 대부분은 성령자체는 다 받은 것이다(고전12:3).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머리 위에 부어지는 성령세례는 아직 받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4. 시몬은 과연 회심한 자였는가?

  그렇다면 사마리아 교회의 세례받은 성도들 가운데 아직 회심을 경험하지 않는 자는 대체 누구였는가? 우리는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가 바로 마술사 '시몬'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을 믿었고 그리고 세례를 받았던 목적은 처음부터 잘못 되었었고 아주 나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도 빌립 집사처럼 귀신도 쫓아내고 중풍병자나 못 걷는 사람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고 싶어서 그렇게 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큰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듣고 싶어서 세례까지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 이러한 자들에게 성령께서 들어가서 그를 거듭나게 하실 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사마리아 성도들 중에 거듭나지 않은 성도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는 믿는 이들을 안수할 때에 하나님의 선물 곧 성령의 은사가 그들 위에 부어지는 것을 보고 그는 또다시 깜짝 놀란다. 그러자 그는 사도들에게 은화를 갖다 주면서 자기도 그러한 권세를 행할 수 있도록 그것을 전수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함으로 그의 실체가 드디어 드러나게 된다. 그가 예수님을 믿었던 목적이 여느 사람과 달랐던 것이다. 자신이 빌립이나 사도들로부터 능력과 권세를 더 받아서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능력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그렇게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5. 가짜 회심자 시몬에 대한 사도의 처방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가짜 회심자 시몬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처방은 어떠했는가? 빌립은 아직 영안이 열리지 않아서 마술사였던 시몬의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정확히 보지를 못했다. 단지 시몬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였고 또한 세례를 받기를 원했기에 그에게 세례를 준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들의 눈에 그는 악한 자였다. 마음이 올바르지도 않았다(21절). 돈을 주고 하나님의 선물을 사려고 획책했기 때문이다(18~19절). 그의 속에는 악독이 가득하였고 불의의 공동결박으로 꽁꽁 묶여있었다(23절). 이는 여러 귀신들이 그를 결박으로 묶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 그는 다른 사람과 원래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 그는 귀신의 힘을 힘입어 자기가 능력있는 하나님의 사자인 것처럼 사마리아 사람들을 속여왔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들의 눈에는 그가 어떤 자였던 것이 보인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를 엄히 책망한다. 베드로는 그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면서 그로 하여금 회개할 것과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촉구한다(22절). 그래서 자신의 악함을 회개하여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예수 믿기 전에 이방신을 열심히 섬겼거나 그러한 일에 종사한 자는 자기 속에 악한 영들이 많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그런 자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상숭배 죄를 철저히 회개하지 않으면 악한 영들이 다시 그를 제자리로 되돌아가게 만들 수도 있고, 일평생 그를 괴롭힐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수믿는 자들 중에 우상숭배를 많이 행한 자는 보다 더 철저한 회개가 필요하다. 여기서 '철저한 회개'라는 말은 자신이 우상숭배자였던 사실을 철저히 인정하고 여러 번이고 계속해서 그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악한 영은 섬길 때마다 그 사람 속에 들어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은 자신이 우상숭배를 행던 죄의 숫자만큼 여러 번 반복적으로 회개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이 있는 후에 시몬이 그렇게 회개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만약 우리들 중에 그러한 자가 있다면 그는 보다 더 철저하게 회개를 해야 할 것이다. 

 

 

2022년 09월 01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 강해(04) 복음전파를 위한 성령 세례는 어떤 종류의 것인가?(행1:4~5)_2022-06-09(목)

https://youtu.be/GlZY0S3eg0g  [혹은 https://tv.naver.com/v/27276790 ]

 

1.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아버지의 약속'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실 시각이 이르자 제자들에게 분부하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원문: '아버지의 약속')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다음 구절만(행1:5) 보면 성령 세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도행전 1장과 연결되어 있는 누가복음 24장의 말씀을 보면, 그것은 바로 '성령'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눅24:47~49). 왜냐하면 그분을 예수께서 파송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눅24:49).

눅24:47~49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그리고 예수의 말씀(행1:5)의 말씀을 통해서도 위와 같은 사실은 확인된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말을 인용하면서 성령 세례가 곧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행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2. '아버지의 약속'은 구체적으로 어떤 성령에 관한 약속인가?

  구약 시대에도 성령께서는 여전히 활동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두 명의 선지자 곧 에스겔과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장차 보내실 성령에 대해 2가지를 계시해 주셨다. 하나는 믿는 이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에 관한 약속이고(겔36:24~28), 또 하나는 모든 육체 위에 부어주시는 성령에 관한 약속이다(욜2:28~32).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성령에 관한 약속은 어떤 예언에 대한 성취인가? 그것은 사도행전의 기록들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둘 다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선 최초의 성령강림 사건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데, 그때에는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그들 위에 부어지셨으며 동시에 그들의 속에도 내주하셨기 때문이다. 그들 위에 부어졌다는 것은 120명의 성도들 위에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청각적으로는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성령께서 믿는 이들 속에 들어와서 거주하게 되신다는 것은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방언'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방언'이란 거듭난 성도의 영 속에 성령께서 들어오실 때에 나타나는 반응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죽어 있던 사람의 영이 살아남으로 인하여(죽어 있던 영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공급됨으로) 영이 말을 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사람의 바깥에서는 부어지는 성령으로, 사람의 안에서는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로 아버지의 약속은 내주하시는 성령과 부어지시는 성령 모두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베드로는 부어지는 성령을 어떻게 받았다고 언급하였는가?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은 2가지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약속이 동시에 성취된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이러한 성령을 어떻게 경험하였을까? 그것은 베드로의 설교와 고백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당시 성령받기를 간절히 기다리던 120명의 성도들 중의 대표는 사도 베드로였다. 오순절날 오전 9시경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내려오셨다. 그러자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모습은 당시 오순절을 지키러 예루살렘 와 있던 헬라파 유대인들을 흥분시켰다. 왜냐하면 그들은 120명의 갈릴리 촌 사람들이 유창하게 15개국의 각국 나라 방언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이 부어지셨다는 증거가 '방언'으로 나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에 대해 베드로가 일어나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설교를 하였는데, 베드로는 이러한 현상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장차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의 육체 위에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행2:17~18). 다시 말해 당시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 강림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의 선물을 안겨 주신 것이다. 마가 다락방의 120명의 성도들을 사로잡으신 성령께서 방언이라는 선물을 주신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외적인 충만함과 동시에 내적인 충만함이 동시에 일어났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성령이 부어지실 때에 내적으로도 성령이 충만케 됨으로 방언을 말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자기에게 부어지는 성령 세례를 받을 때에 반드시 어떤 표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제일 처음 성령 강림 사건에서는 그것이 곧 '방언으로 말함'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고넬 가정에서도 역시 방언 말함과 더불어 방언 찬양이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부어지는 성령 세례였는데 그때에는 어떤 현상이 나타났는지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한 현상을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어떤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보고 갓 세례받았던 전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에게 자신도 안수하여 성령받게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며 베드로에게 돈을 주었기 때문이다(행8:18~20).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베소에서 성령이 부어지는 사건이 또 한 번 나오는데, 그때에도 역시 방언을 말하게 되었으며, 예언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행19:6).

 

4. 성령 세례가 외적으로 부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인가?

  베드로 사도는 성령이 외적으로 부어질 때에 성령께서 어떤 선물을 주신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여기에서 '선물'이란 '성령의 은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계시적인 신앙 고백 직후 예수님으로부터 천국 열쇠들을 받았었다(마16:19). 그래서 그는 첫 번째로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사용하였다. 오순절날 자기 나라 방언소리를 듣고 달려온 15개국의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인 죄를 회개하였고, 무려 3,000명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베드로는 천국 열쇠를 두 번째로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서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고넬료 집안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때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던 자들에게 그대로 성령이 부어졌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주어졌는데, 고넬료 집 모든 자들에게서 방언의 은사와 방언 찬양의 은사가 나타났다(행11:44~46). 그리고 그와 같은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할 때에 그는 이렇게 말했.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다"고 했다(행11:17). 결국 방언과 방언 찬양은 성령의 선물이었다는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로 외적으로 성령세례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성령께서 안에도 내주하시면서 그 사람의 영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심으로 인하여 방언을 말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넬료 가정에서는 방언과 방언 찬양이 나타났고,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에는 방언과 예언이 나타났다(행19:6). 

 

5.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 세례를 받게 된다면 누구든지 외적인 어떤 표시가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가?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사람들이 성령을 받게 되는 장면이 무려 4번에 걸쳐서 나온다. 그렇게 해서 생겨났던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고넬료 가정 교회 그리고 사마리아 교회와 에베소 교회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들 중에서 거의 다 방언을 말했다는 것이다(사마리아 교에 그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 방언은 외적으로 성령 세례가 부어질 때, 내부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의 사건인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 의하면, 모두가 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아닐 수도 있다(고전12:30). 그러나 성령 세례가 부어지면 성령으로부터 어떤 선물이 주어지는 것이다. 초기 교회 가운데 나타났던 '방언'도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중에 하나인 것이다(고전12:8~10).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성령 세례를 주시는가? 그것은 그렇게 해서 부어지는 성령 세례를 받게 되면 담대함이 생겨서 복음을 힘있게 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를 통한 어떤 신비적인 경험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감사함으로 받게 해 주는 놀라운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는 분들도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눅24장의 예수님의 당부처럼(눅24:47~49), 먼저 회개를 한 다음에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고 성령 세례를 받으면 나중에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영들과 성령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자기 속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일평생 고통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로 성령 세례가 복음 전파에 필수적인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 전에 회개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무시하면 일평생 자신의 선택한 것에 대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2022년 06월 09일(목)

정병진목사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중에 가장 중요한 은사는 대체 무엇인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것을 방언의 은사라고 보았다. 그럼 오늘날에도 진짜 그러한가? 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면서, 방언의 은사가 가진 장점과 단점을 알려준다. 그리고 좀 더 바람직한 신령한 은사로서 예언의 은사와 방언통역의 은사를 추천한다. 왜 바울은 이러한 2가지 은사를 추천해야 했는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2021-09-08(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21) 방언과 예언과 방언통역의 은사에 대하여(고전14:1~1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TAFyAGbodLQ  [혹은 https://tv.naver.com/v/22356999 ]

 

1. 들어가며

  모든 은사에도 대전제가 있다. 그것은 사랑의 은사가 모든 은사 사용에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신령한 은사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기본적으로 겸비된 사람에게 어떤 은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떤 은사가 우리와 우리 교회에 필요할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은사들의 문제를 직시하면서 은사들 중에는 개인을 세워주는 은사가 있는가 하면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4장의 전체 내용이다. 그렇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잘못된 은사 사용에 대해서 알려주고 바른 은사 사용을 위한 실제적인 예로서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비교하여 말한다. 그것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비록 방언의 은사가 신비롭게 보이고 멋있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공예배에서 무분별하게 사용되면 오히려 공예배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 교회를 세우는 데에는 유익하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신령한 은사를 사모한다면 방언의 은사보다는 상대적으로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그렇다면 대체 방언의 은사는 어떤 은사를 가리키며, 예언의 은사는 어떠한 은사이길래 바울은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권면하는가? 그리고 대체 방언이 가진 한계는 무엇인가?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서 방언과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의 정의와 아울러 이 은사들의 유익성과 한계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이러한 3가지 은사를 어떻게 받을 수 있고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것에 대한 부작용은 없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고린도교회에 예배 중 은사 사용에 있어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예배 중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방언의 은사 사용이 교회를 건축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어떻게 그것을 알았을까? 그것은 고린도교회가 방언의 은사를 최고의 은사로 알고 사모하면서 그 은사를 예배 중 사용했지만 그것이 교회의 건덕에 전혀 유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방언을 말하다 보면 방언이 자주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방언의 소리를 분석해 보면 어떤 방언은 일정한 형식이 있고 그 소리가 분명하기도 하지만 어떤 방언은 도무지 방언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유치하게 들리는 방언도 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가 방언의 은사를 매우 귀하게 여기고 또한 사모하다 보니, 일종의 좋은 방언과 나쁜 방언이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방언이 지닌 한계점을 지적하면서 방언이 공중 예배에서 사용될 수 없다는 이유를 설명한다.

 

3. 바울은 왜 방언의 은사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는가?

  그래서 바울은 교회에서 은사를 사용하려면 방언의 은사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고 그것을 사용할 것을 권면한다. 그렇다면 왜 방언을 공중 예배에서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방언 자체가 지키는 한계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므로, 그것을 공중 예배에 사용한들 아무도 알아듣는 자가 없으며 그 방언을 듣고 '아멘'이라고 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일만 마디의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보다는 한 마디의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이 더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방언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방언 통역자를 세워야 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둘째, 방언은 개인을 세워주는 은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방언은 개인을 세워주는 은사이지만 예언은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이기 때문에 바울은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왜 그런가? 여기서 '세운다'는 말은 '덕을 세운다'라는 뜻이 아니다. 이 단어는 '오이코도메오'라는 단어로서, 이 단어의 일차적인 뜻은 '짓다. 세우다. 건축하다'의 뜻이지만, 이 단어에 대한 이차적인 뜻이 '다시 짓다. 다시 세우다. 다시 건축하다'는 뜻으로서 '복구하다, 복원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는 교회를 건축하거나 교회의 쓰러지고 허물어진 곳을 일으켜 세우는 은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영적으로 무너져 있다. 그런데 허물어져 있는 자신의 영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사실 방언이 필요하다. 방언을 하게 되면 자신의 영을 건축하여 튼튼하게 만들어 주고 이미 허물어져 있는 자신의 영도 다시 복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언은 교회 자체를 그렇게 세워주고 복구하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왕 신령한 은사를 사모한다면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 것이다. 셋째, 방언의 은사는 방언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도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에 마음에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적으로 깨닫고 돌이키고 배우게 하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 것이다. 

 

4. 방언이란 어떤 은사를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대체 '방언'의 은사는 어떤 것인가? 방언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정의하고 있는 곳은 사실 성경을 통틀어서 고린도전서 14장 밖에 없다. 나머지는 그곳에 그러한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방언이라는 언어가 대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주지는 않고, 그곳에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방언을 어떤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가? 그것은 고린도전서 14:2과 고린도전서 14:14~15에 나온다. 이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직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으로 발언하고 있는 자는 사람들에게 발언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영으로 비밀들을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14:1415  왜냐하면 내가 만일 [계속]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으면,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나의 이성(생각=누스)은 열매가 없이 있느니라. 15 그러면 무엇이 있느냐? 나는 영으로 [장차] 기도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역시 나는 이성(생각=누스)으로도 역시 기도할 것이다. 나는 영으로 [장차] 찬송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나는 이성(생각=누스)으로도 역시 찬송할 것이다.

  그렇다. 방언이란 2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방언은 거듭난 사람의 영이 하나님과 말하는 언어이다(고전14:2). 곧 거듭난 사람의 영의 언어가 방언인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다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늘에 다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목놓아 울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셨는지, 그분의 사랑과 희생이 너무나 크시다는 것을 깨닫고 그분을 이제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새롭게 모신다. 그때에 그는 거듭나게 된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 사람의 영 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이때 하나님의 자녀가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에 그 영이 죽어 있다가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바로 방언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응애'하고 말을 하듯이 자신의 살아난 영이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의 영이 말하는 것이 바로 방언인 것이다. 하지만 이 방언은 자신의 영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대화하는 새로운 채널로 부여한 것이기에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말을 알아들으신다. 만약 그것을 통역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비밀 대화인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방언이란 거듭난 사람의 영의 기도라는 것이다(고전14:14~15).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가 사용하는 일상 용어가 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한국어다. 그러나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한국 아이들의 경우는 영어와 한국어가 동시에 일상 용어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상 용어는 혼의 언어다. 배워서 하는 것이요, 나와 다른 사람과의 의사 소통의 채널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방언은 다르다. 방언은 영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그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다. 내 혼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있지만 내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있는 것이다. 내 영이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바로 방언인 것이다. 그래서 방언 통역의 은사를 가지고 사람이 자신의 영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통역해 보면, 자신의 영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말이 약 80~90% 정도가 되며,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영의 기도는 약 10~20% 정도 된다. 나는 잘 인식하고 있지 않아도 영은 자신의 소원을 알고 벌써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방언이다. 그리고 방언의 분량이 많아지고 깊어지면 어느 순간부터는 방언 찬양도 나온다. 방언에 음률이 붙어서 자신의 영이 노래를 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방언 찬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5. 방언은 '외국어' 중의 하나요 고린도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이란 거듭난 사람의 '영의 말'(고전14:2)이자 '영의 기도'(고전14:14~15)라고 분명하게 정의하였다. 하지만 방언이 영이 말하는 언어가 아니라 '외국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더러 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방언이라는 은사는 신약성경이 완성됨과 동시에 교회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한 최초로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고 있는 나오는 '방언'도 그때 예루살렘을 찾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지방에서 쓰던 지방어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고린도전서 14장에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서 '방언'은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무아지경에서 지껄이는 일종의 귀신들의 속삭임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고린도지역에만 나타났던 고린도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고린도전서 14장을 번역하고 있는데, 신약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사료된다. 그분들의 이름을 굳이 거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오로지 성경을 믿고 성경에 나온 말씀대로 따라가야 한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이란 어떤 언어였을까? 정말 '지방말'이었던 것이었을까? 사도행전 2:4에 보면,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셨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으로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한다(행2:4). 그런데 이번에 우리말이 개역개정판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방언'이라는 용어가 '다른 언어들'로 뒤바뀌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개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방언'이 '다른 언어들'로 바뀐 것이다. 명백한 성경 번역의 퇴보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등장하는 '다른 언어들'은 헬라어로 보면, '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other tongues)'라는 단어로서 완전히 종류가 다른 언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언어가 히브리어, 헬라어, 로마어 같은 종류의 이 세상의 언어였다면, 그것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알로이스 글로싸이스(another tongues)'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 사용된 단어는 종류가 다른 언어로 곧 '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로서 영이 사용하는 특별한 언어인 방언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무엇보다도 오순절날 사람들 중에 어떤 이는 120명 성도들의 말했던 언어를 들은 후에 "이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라고 말했다. 자기들이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였기에 술 취한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방언'은 분명히 '글로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약속한 표적으로서 주어지는 방언도 역시 '글로싸'이다(막16:17). 그리고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서 말해졌던 언어도 '글로싸'였고,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오셔서 베풀어졌던 방언도 역시 '글로싸'였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안수할 때 성령께서 은사를 주셨는데 그때 받은 방언도 역시 '글로싸'이다. 그리고 방언이 무엇인지에 대해 쓰고 있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도 방언이라는 단어도 역시 '글로싸'라고 나온다. 모두가 다, 이 세상에서 사용하지 않은 다른 종류의 방언들(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을 지칭하는 표현들이라고 하겠다. 

 

6. 방언 통역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진행되는가?

  그렇다면 '방언 통역'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방언 통역이란 다른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내가 알아듣는 은사를 가리킨다. 원래 방언은 그 사람과 하나님만 소통하는 대화 채널이어서 그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하고 있으며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인데,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게 되면 그 사람의 방언이 무슨 내용인지를 알게 듣게 되는 은사가 바로 방언 통역의 은사인 것이다. 방언 통역의 은사는 보통 3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상대방이 방언하는 것이 무슨 내용인지를 영이 느낌으로 그냥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언 통역은 상당히 실수할 때도 있다. 정확하지 않은 것을 통역하다 보면 방언의 내용에는 없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대방의 방언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들리는 것이다. 즉 한국 사람이라면 한국어로 들리는 것이다. 상대방은 분명히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영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알기 쉽게 한국어로 들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듣고 그대로 말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잘 되신 분은 동시 통역이 가능하다. 상대방의 방언을 들으면서 바로 동시에 통역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 통역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들추어 낼 때가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말했다가 그만 그 사람의 체면이 손상되고 그 사람의 숨은 죄가 드러남으로 성도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순화하는 말로 바꾸어서 통역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방언하는 당사자만 알아듣고 회개를 할 수가 있다. 셋째, 방언하는 자의 입술에서 글자가 나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에는 한국어로 글자가 되어 입에서 나오는 것이 영안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입으로 나오는 글자를 읽어 주면 된다. 이것이 방언  통역이다. 이러한 사람은 지구상에 몇 명 안되는 방언 통역 은사라고 할 수 있다. 

 

7. 예언이란 어떤 은사를 가리키며 그것의 7가기 기능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예언'의 은사란 어떤 것인가? '예언'의 은사는 일반적으로 결코 알 수 없는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일을 미리 알고 그것을 미리 말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가리킨다. 그 대상은 개인이 될 수도 있고, 교회가 될 수도 있고, 국가와 민족이 될 수도 있다. '아가보'라는 예루살렘 출신의 예언자는 얼마 후 나라에 흉년이 들 것을 예언하였으며(행11:27~28), 개인적으로는 바울이 장차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면 그의 손발이 묶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다(행21:11). 그렇다면 예언자는 어떻게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일을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보통 세 가지 방법으로 알게 되어 예언을 한다. 첫째, 마음 속에 성령께서 어떤 영감을 떠오르게 함으로 알게 된다. 그때에는 그냥 그것이 알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언을 하게 되는데,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예언은 틀릴 수도 있다. 자기가 마음으로 생각한 것이나 사탄 마귀가 넣어 주는 것을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현재의 모습이나 미래의 모습이 환상으로 보여지는 것을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이전의 예보다는 더 분명한 것이지만 이것도 사탄 마귀가 보여주는 것을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셋째,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모습을 글자로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한국에 살고 있지만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글자가 떠서 보이는 예언이 있다. 글자가 떠서 보이고 영의 상태가 환상으로 보일 정도라면 그분의 영성은 상당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예언의 은사는 예언 뿐만 아니라 책망과 판단, 위로와 권면, 폭로와 가르침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8. 나오며

  우리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다고 성령의 은사를 무조건 무시하거나, 그것을 귀신의 장난으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 2천년 전 오순절날 마가 다락방에 오신 성령이나 지금의 성령은 똑같은 한 분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에 주셨던 성령의 은사가 지금은 없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있는 것이다. 거기에 방언이 들어 있다. 그런데 방언에는 몇 가지 단점이 있다. 그것은 모든 은사들 중에서 자기 개인만을 세워주는 은사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은사는 다 남을 위해 존재하는 은사들이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는 다르다. 방언의 은사는 이 외에도 2가지 단점이 더 있으니, 그것이 남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이다 보니 그것을 공중 예배 때에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도 없는데 어찌 그 방언을 듣고 성도들이 '아멘'이라고 화답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방언은 아무리 말을 유창하게 한다고 해도 그 말의 뜻을 알아 들을 수 없으니 자신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이 좋은 은사이기는 하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의 경우처럼 굳이 예배 시간에 방언을 사용해야 한다면, 그때에는 반드시 방언 통역자를 세워서 방언 통역을 듣고 성도들이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언의 은사를 구하여서 그것으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맞는 말씀이라고 하겠다. 방언은 사실 자신을 세워 주고 복구하는데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도구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서는 남을 가르칠 수도 없고 깨우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공예배에서는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오직 개인적인 목적으로 따로 기도할 때에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우리가 방언을 말하면 말할수록 다른 은사들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으며, [회개한 후에] 방언을 말한다면 방언을 말하면 말할수록 영적인 능력들이 계속해서 공급되기 때문이다. 

 

 

2021년 09월 08일(수)

정병진목사

 

 

오늘날 교회 안에는 목사와 전도사, 장로와 권사와 집사 등의 직분의 은사자들이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생존해 있을 때에는 교회 안에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그리고 목사와 교사라는 직분의 은사자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도와 선지자 그리고 복음 전하는 자들이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 당시 이러한 직분자들이 존재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래서 오늘은 교회 안에 있는 은사의 5가지 직분들 가운데, 전체적인 개념 이해와 더불어 이러한 은사자들의 존재 목적 그리고 사도와 선지자의 은사의 직분이 무엇인지를 집중 조명해 보고자 한다.

2021-08-25(수) 수요기도회
제목: 고린도전서강해(19) 교회 안에 주신 여러 직분의 은사들과 그것을 주신 목적(1)(고전12:28~3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LUq7P-UB604  [혹은 https://tv.naver.com/v/22087797  ]

 

1. 들어가며

  사도 바울이 교회를 개척할 당시에 교회에는 어떤 직분의 은사가 있었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당면한 여러 문제들의 해법을 제시하는 가운데 교회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를 언급하게 되는데, 그것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까지의 말씀이다. 그중에서 고린도전서 12장은 3가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첫째는 성령의 9가지 특별 은사를 언급하고 있고, 둘째는 교회의 지체들의 유기적인 통일성과 다양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셋째로, 바울은 교회에게 주신 직분의 은사를 언급한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게 주신 은사의 직분을 총 8가지로 언급하는데, 그것은 3가지와 5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3가지는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교사들이며, 뒤의 5가지는 능력들, 병 고침들, 도움들, 다스림들, 방언들의 종류들이 있다. 앞의 3가지는 초기 교회 가운데 확실히 굳어진 전문적인 교회의 직분의 은사라고 한다면, 뒤의 5가지는 교회 가운데서 주신 은사들(특별 은사들과 일반 은사들)을 조금 더 많이 활용하는 자들에 대한 소개인 것 같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주신 전문적인 은사는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 뿐인가? 아니면 더 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교회 가운데 이러한 은사를 주신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교회 안에 어떤 직분자를 전문적인 직분의 은사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직분의 은사들과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은사들을 주신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주신 5가지 직분의 은사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어떤 전문적인 직분의 은사를 주셨을까?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서는 3가지 전문적인 직분의 은사만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 선지자, 교사'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교회 가운데 주신 전문적인 은사를 2가지 더 언급하였다. 그것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목자)'라는 은사다(엡4:11). 고로 성경에 기록된 직분의 은사는 크게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등의 5가지로 나눠볼 수가 있다. 참고로, 여기에 등장하는 '복음 전하는 자'란 오늘날에 '선교사'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르며, 목사는 '목자(포이멘)'에 대한 대용어이다. 즉 원래는 '목자(포이멘)'라는 은사인데, 이것을 목양과 관련되어 '목사'라는 용어로 바꾼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5가지 직분의 은사를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왜 교회에게 5가지 직분의 은사를 주시는 것인가?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5가지 직분의 은사를 주신 목적을 3가지 언급하고 있다(엡4:11). 그것은 첫째,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는 성도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채비시켜 주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5중직을 주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목사의 가르침과 양육이 없이 성도 혼자서 온전해지기는 어려운 일이다. 둘째, 이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는 교회의 성도들로 하여금 섬기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는 섬김을 통해서 천국 백성의 삶을 살게 되며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거기에서 받을 상급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또한 배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이란 교회를 가리킨다. 즉 교회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건축되기 위해서는 5중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처럼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5중직의 직분을 가진 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4. 5중직의 직분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교회 가운데 주신 5가지 은사들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우선 첫째, 이러한 직분이 지금은 없어진 직분인가 아니면 현재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직분인가 하는 것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는 지금의 시대에는 없어진 직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도 바울이 이 서신서를 쓰고 있을 당시에 쓰여졌던 직분자로서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는 지금의 시대에는 없어진 직분들이라고 하겠다(하지만 '선지자'의 직분과 '복음 전하는 자'는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으나 비슷하게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오늘날까지 여전히 유효할 뿐더러 지금까지도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직분은 역시 '목사'와 '교사'의 직분이다. 그리고 둘째, 한 곳에 머무르지 않은 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직무를 감당하는 직분의 은사가 있고,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이 죽을 때까지 직무를 감당하는 직분의 은사도 있다. 전자에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가 있다면, 후자에는 '목사와 교사'가 있다고 하겠다. 

 

5.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라고 주신 2~3가지 직분의 은사는 무엇인가?

  그런데 사도 바울은 교회에게 주신 5중직 가운데서 2~3가지는 교회를 세우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직분의 은사라고 언급하였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기초)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엡2:20)"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들 중에서 필수적인 것은 '사도'와 '선지자'이며, 덧붙여 한 가지 추가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 전하는 자'다. 이러한 직분자는 교회를 세우는데 반드시 필요한 직분의 은사에 해당한다. 사실 교회라는 개념이 구약시대에는 아직 없었다. 오순절 성령을 받은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교회라는 개념이 없을 때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교회라는 것이 이런 것이라고 정의되기 시작했다. 그렇다. 아직 이 땅에 '교회'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기에 12사도들은 '교회란 이런 것이다'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생겨난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던" 것이다(행2:42).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와 그리고 안디옥 교회에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의 원형의 모습을 잊지 않을 수 있고,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6. 사도 바울은 어떤 직분의 은사를 받았는가?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대체 어떤 직분의 은사를 받았을까? 사도 바울은 에배소서 4:11에서 언급한 5가지 직분의 은사를 다 받은 사역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그는 사도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에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딤전1:1). 뿐만 아니라 그는 디모데후서에서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복음 전하는 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ㄷ딤후1:11)"라고 말했다. 그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복음 전하는 자와 교사로도 세우심을 입은 것이다. "이를 위하여 내가 [복음을]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교사)이 되었노라(딤전2:7)"고 말함으로써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 전파자'요 '사도'요 '교사'로 부름 받았음을 분명히 말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선지자'였다(행13:1). 그는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였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행13:1)" 그렇다. 그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의 교사이자 선지자였던 것이다. 더욱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여 거기에서 1년 6개월 동안 목회를 하였다(행18:11). 그리고 에베소 교회에서는 3년 동안 목양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여러분(에베소 장로들)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 이는 그가 목사(목자)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로 사도 바울은 사도와 선지자이자, 복음 전하는 자이면서 목사였고 교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사도는 어떤 직분의 은사이며 그 종류는 어떠한가?

  '사도'란 어떤 직분의 은사인가? '사도'란 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를 가리킨다. 베드로를 비롯한 어린 양의 12사도는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아서 사도가 된 자들이며(눅6:13,9:1, 마10:1~2), 사도 바울을 비롯한 바나바 등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분으로부터 직접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심을 받아서 사도가 된 자들이다(행14:14). 그러므로 베드로는 할례자들의 사도가 되었고,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갈2:7~9). 그런데 사실 사도는 자기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으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야" 사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1:1). 그렇다면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서신서 등을 통하여 어떤 사람이 사도가 되었고 그래서 쓰임을 받았는가? 첫째, 주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직접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라야 했다(고전9:1). 둘째, 복음을 위해서라면 고난과 죽음도 참고 인내하는 자라야 했고, 셋째,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통하여 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증거가 있어야 했다(고후12:12). 사도 바울은 정말 부름받은 사도였기에 독사에 물렸어도 죽지 않을 수 있었고, 기사도 많이 나타났으니 죽은 청년인 유두고를 살려 내었으며, 점치는 귀신을 쫓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사람 위에 놓아도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것이 치료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과연 '사도'라는 직분이 존재하는가? 한 마디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사도와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것이 없었을 때,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정의했던 사람들이 바로 '사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어떤 곳인지, 교회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기초를 닦은 이들이 바로 사도였던 것이다. 사실 이들에 의해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온전케 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걸어간 발자취와 그들의 말과 그들이 구약을 해석한 것이 기록되어서 신약성경의 책이 되었다. 그러므로 만약 자신의 말이 성령의 계시에 따른 것이어서 그것이 고스란히 성경책이 될 수 있다면 그는 '사도'라고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그러한 사람은 더 이상 없다고 보여진다. 성경책에 나온 사람 이외에 사도직의 은사를 받은 자는 없는 것이다. 다만 오늘날에도 사도적인 권능과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도 한다.

 

8. 선지자는 어떤 직분의 은사이며 그 특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선지자가 있는가? 사실 선지자는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종들 가운데 하나였다. 구약시대에 선지자는 주로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하였으며,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일을 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일은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여전히 선지자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28에서 언급하고 있는 수준의 선지자는 더이상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러한 수준의 선지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음성을 직접 듣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행13:2, 11:28), 성령의 계시를 받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엡3:4~5). 그리고 새로 들어온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폭로하여 죄를 회개하고 책망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고전13:24~25). 더욱이 선지자는 개인과 교회와 국가에 대해서 미래의 일을 예언할 수도 있어야 한다(행22:29, 21:11).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이 수반되지 않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선지자라고 하면서 활동하면 아니된다. 특히 선지자의 은사를 조금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서 자신이 마치 선지자인량 행동해서는 결코 아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선지자에는 누가 있었을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에 신약성경에 선지자들이 몇 명 나온다. 첫째로, 유대인이었던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있었다. 그는 예언하기를,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내려와서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하였다(행21:11). 그리고 둘째,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에 파송한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A.D.49년경에 예루살렘 공의회가 끝난 후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에 파송되었다. 그들은 바로 '유다'와 '실라'라는 선지자다(행15:32). 이들은 당시 선지자로서 성령의 음성을 직접 들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말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셋째, 안디옥 교회에도 역시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바나바와 바울도 들어 있었다(행13:1). 

  그렇다면, 왜 신약시대가 되었음에 불구하고 '선지자'의 직분의 은사가 필요했던 것인가? 그것은 교회를 건축하는 데에 사도의 직분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성경을 기술할 때에 선지자의 직분을 가진 자들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 지금도 선지자의 직분이 필요한가? 사실 구약시대의 선지자의 직무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기에,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도 다시 오실 메시야에 관하여 선포하고, 성도들의 죄를 책망하여, 회개시키는 사역자로서 선지자는 지금도 필요하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수준의 선지자는 아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짜 마지막 시기가 되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거짓 표적과 기사를 행할 것이며, 택하신 자들이라고 미혹하여 넘어뜨리려고 할 것이다(마24:24).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도 여전히 선지자의 직무는 요청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여전히 거짓된 선지자들이 게속해서 활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이 쓰여질 당시만 해도 버가모 교회에서는 발람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었고,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이세벨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9. 나오며

  오늘은 부활 승천하신 우리 주 예수께서 하늘 보좌에서 이 세상에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를 파송하셨고, 또한 목사와 교사를 임명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렇다. 교회의 성도들이 온전해지고, 봉사의 일을 행하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교회 위에 세우신 직분의 은사자들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이들 중에서 교회를 세우기(건축하기) 위해서는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로서의 직분자가 반드시 필요하며, 교회의 성도들을 목양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찰 때까지 인도하려면 '목사'와 '교사'의 직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이러한 5중직 중에서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교회 가운데에 내려 주신 직분들 곧 5중직을 살펴보았고 예수께서는 왜 그러한 직분의 은사를 교회에 허락하셨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성경 각 권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5중직을 체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사도와 선지자가 대체 누군지를 공부하고 깨달을 수 있었다. 다음 이 시간에는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의 직분에 대해 살펴보기를 원한다. 

 

2021년 08월 25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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