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삼위일체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 창조사역을 하실 때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실 때에는 당신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셨다. 그리고 구원자로서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고 구약 4천년간 350번 이상이나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의미는 당신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진짜로 메시야를 보내주셨는데 그분은 아들이자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그 아들은 십자가에서 구속에 관한 모든 약속을 성취하시고 하늘로 다시 가셨다. 그리고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리고 오시는 성령님은 오직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증거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결코 우리 자녀의 합격이나 남편의 진급, 집을 사거나 팔거나 하는 것을 지시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금이빨이 되게 하거나 뒤로 쓰러지게 하시는 분도 아니시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께서 이 땅에 무엇하러 오셨는지 그리고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분이 사람 속에 들어오신 증거와 표적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역사하신다.

2019-08-14() 하계수련회 셋째날
제목: 우리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가?(03) 그가 성령을 보내셔서 지금도 역사하고 계심으로(19:1~7)
https://youtu.be/bemezjboorA


1. 들어가며

    예수님은 우리가 과연 믿고 따라갈만한가?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실재하지 않았으며 그 이야기는 신화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교도들의 신화를 모아서 엮은 소설같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는 신화다(미지북스,2008)"라는 책의 주요내용이다. 하지만 오늘날 아무도 이 책을 논문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 책은 어떤 부분도 그 진실성을 보장해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다빈치코드와 같은 소설 책으로만 읽히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내용 자체가 허구였으며 짜집기였고 조작이었기 때문이다("예수는 신화가 아니다" 도서출판 누가, 2008년) 그렇다면 믿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대체 누구신가? 과연 그분은 믿고 따를만 한 것인가? 그것을 우리는 지금 3일동안 다루고 있다. 오늘은 세번째로서 마지막 시간이다. 오늘은 예수께서는 지금도 살아서 성령으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살펴볼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그분은 하늘에 오르신 뒤에 보좌에 앉아서 쉬고 계시지 않는다(어떤 분은 더러 보좌 우편에서 아버지와 상의하시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그분은 승천하신 뒤에 곧바로 자신을 대신하여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으며, 지금도 인류의 구원사역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신다(요5:17). 그래서 오늘은 성령님은 누구시며,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일을 행하고 계시며, 지금도 그분을 체험하려면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성령님은 누구신가?

  그리스도인들 중에 상당수는 성령님을 예수님 말고 또 다른 세번째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동안 교회 전통이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하나님이라고 가르쳐온 것을 잘못 이해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A.D.381년 큰스탄티노플신조에서 처음으로 첨가한 신앙고백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믿고 있다(이 세상에 있는 신학자는 단 한 명도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말 천국에 가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계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66권을 다 읽어보라. 하나님의 우편에 또 다른 보좌가 있다는 말씀이 있는지를 말이다. 신구약성경은 다 하나님의 보좌는 한 개 뿐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다니엘도 그렇게 보았고, 이사야도 그렇게 보았으며, 에스겔도 그렇게 보았고 스가랴도, 미가야도 그렇게 보았다. 그리고 신약에 들어와서 보니, 죽기 직전에 스데반도 그렇게 보았고, 사도요한도 밧모섬에서 그렇게 보았다. 특히 사도요한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밝혀놓은 천상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좌 위에 앉아계신다. 단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의 보좌요 하나님의 보좌 위에 바로 예수님께서 앉아계시는 것이다(계3:21, 7:17, 22:1,3). 어떤 분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었더니,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말한다. 삼위일체신앙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성경66권을 다 읽어보라. 천국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단 개 뿐이며, 거기에 승천하신 예수께서 앉아계시는지를 말이다(그런 의미에서 찬송27장은 천국에 가 보고온 사람같아 지은 찬양같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대체 누구신가? 계5:6에 보면, 성령님이 누군지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사도요한은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것에게는 일곱 뿔들이 달려 있었고 일곱 눈들도 가지고 있었다(다 상징이다. 실제 일곱눈과 일곱뿔을 지녔다면 괴물일테니다. 숫자 일곱은 완전수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 눈들은 "온 땅 안으로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영들"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한편 구약의 선지자였던 스가랴가 본 것에 의하면, 그 눈들은 여호와의 일곱눈들(숙4:10)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 성령님은 어린양으로 예표되는 예수님의 영이신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이 땅을 감찰하기 위해 내려보내신 당신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 성령인 것이다. 그런데 "일곱영"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이 우주만물을 완전하게 감찰하고 계심을 말해준다. 그렇다. 성령님은 예수님과는 다른 세번째 하나님이 아니시다. 예수께서 완전한 영으로서 이 땅에 보내신 영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별설교(요14~16장)을 보면, 예수께서는 당신이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는 것이 오히려 제자들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시면 보혜사를 그들에게 보내어 줄텐데, 그러면 보혜사가 와서 무소부재의 방식 안에 존재하심으로 제자들을 언제든지 돌보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라고 했다(요14:18~19). 이는 앞의 문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요, 뒤의 문장은 그분이 성령으로 다시 오실 것임을 예언하신 것이다(사실 오늘 전하는 이 말씀만 제대로 듣는다고 하여도 영안이 확 열려서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성령님은 세번째의 또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또다른 자기자신이시다. 성령님은 예수께서 당신 대신 보내신 예수님의 눈들로서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겠지만 믿는 이들 속에 거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렇다고 구약시대에 성령이 없었느냐? 그것은 아니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이 땅에 보내시어 꾸준히 일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라고 불리었다(창1:2,출31:3).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신 후에는 "여호와의 영"이라고도 불렸다(삿3:10,6:34).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당신의 영을 보내시어 일을 하셨기 때문이다.

 

3.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데 이제 아들로 오신 하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또다시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럼, 예수께서는 무슨 이유로 하나님은 당신의 영을 이 땅에 보내셨는가? 그것은 이제 믿는 자들 속에 성령을 보내주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믿는 자들마다 개인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그들을 도와주시기 위함이다. 사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고 있었다. 천자창조사역 등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당신의 영을 보내어 일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께서도 승천하시어 무소부재의 하나님이 되셨는데, 그리고 구약시대부터 성령께서도 역사하고 있었는데 굳이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실 이유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믿는 이들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했다(요16:7). 왜냐하면 오순절이후 예수께서 보내주시는 보혜사 성령은 믿는 이들 속에 거주하시어 성도들을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다.

 

4. 성령님은 오셔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가?

  구약시대에는 사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방식이 지금과 달랐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이후부터는 사람 밖에서는 성령으로 역사하셨고, 사람에게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심으로,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오기를 바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고 우상과 이방신들을 섬겼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다. 그러자 결국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북이스라엘의 경우 앗수르왕 살만에셀에게 B.C.722년에 멸망당해야 했고, 남유다는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B.C.586년 멸망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남유다가 멸망당할 무렵 하나ㅣ님께서는 당시 선지자였던 예레미야(사역시기 B.C.627~580)와 에스겔(사역시기 B.C.593~571) 그리고 조금 후대의 요엘선지자(사역시기 B.C.835~796)를 통해 장차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방식을 장차 바꿀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첫째, 성령을 사람 속에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렘31:33~34, 겔36:26~27). 둘째,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역사하는 방식에서 모든 사람에게 다 역사하는 방식으로 바꾸시겠다고 말씀하셨다(욜2:28~29,행2:17~21,10:45).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성령께서 사람 속에 들어오실 때에 하나님의 생명(조에)를 가지고 들어오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믿는 자는 곧바로 지은 죄들을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거듭나게 하신다)는 것(요3:5~6,고전12:3)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제 믿는 성도 각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서 도와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오순절이후 성령께서는 구체적으로 첫째, 믿는 자들을 위로격려해주시고(요14:26,15:26), 둘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시며(요16:13), 셋째, 예수님 누구신지를 증언해주시며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를 기억나게 하시고(요15:26,14:26), 넷째, 다른 모든 것들을 가르쳐주시고(요14:26,요일2:27), 다섯째, 믿고 영접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증언해주시고(롬8:16), 여섯째,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인치시고 보증해주시며(엡1:13~41,4:30,고후1:21), 일곱째, 지은 죄를 책망하여 회개하도록 도와주시고 있다(요16:8).

  더불어 성령께서는 믿는 이들로 하여금 복음을 담당히 증거하여(행1:8) 다른 사람들도 회개하여 예수믿고 천국들어올 수 있도록 여러가지 선물들을 주신다. 성령께서 사람에게 오실 때에 그분이 주시는 선물들을 성경에서는 "은사(카리스마타)"라고 부른다. 이러한 성령의 은사에는 기본적으로 9가지가 있으니,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의 은사, 능력행함, 예언함, 영들분별함, 각종방언말함, 방언들통역함(고전12:7~11)"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옷입혀질 때까지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셨다(눅24:49).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셔서 11명의 제자들에게서는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지만, 공식적으로는 부활후 50일째 되는 날인 오순절날에 120명의 믿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부활 40일동안 지상에 계셨던 예수께서 승천하신후 약10동안 제자들은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성령받기를 기도했으니, 마침내 오순절날이 이르자 성령이 내려오셨고 믿는 자들 속에 거주하셨으며, 그때에 선물을 각자에게 나눠주셨다.

 

5. 성령께서 믿는 자들 속에 오셨다는 증표는 무엇인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영은 사실 보이지 않는다(요4:24). 그러니 만질 수도 있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다. 그것이 내 속에 들어왔는지 아니 들어왔는지 사실 잘 느끼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영으로 난 사람은 바람이 불어도 어디에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3:5~8). 고로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은 "바람(공기,숨)같은 성령"이시다. 그런데 성령을 비유하는 말씀은 이것만이 아니다. 여러가지가 있다. "불과 같은 성령(행2:1~4)", "비둘기같은 성령(마3:16)", "물과 같은 성령"(요7:37~39), "기름같은 성령(고후1:21,2:27)" 이라는 표현도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하나님의 영이시니 그분이 우리가 믿고 회개할 때에 분명히 들어왔을 텐데(고전12:3),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어도 그분이 내 영 속에 들어와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어떤 표적이나 증표, 현상들이다. 예를 들어, 성령을 받는 순간 몸에 매우 뜨거움을 느끼는 분들이 있다. 성령은 뜨거운 분이 아니지만 성령이 오셨을 때에 증상으로서 그 사람의 체질과 성격과 영의 특수성에 따라 그렇게 나타날 수도 있다. 모든 뜨거운 것이 성령이 오셨다는 증상은 아니지만, 성령이 오실 때에 뜨겁다는 분들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기록을 읽어보면, 성령을 받았을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체험했던 현상들이 있었다. 거기에 어떤 표적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을 베드로 사도는 "성령의 선물" 혹 "성령의 은사(카리스마)"라고 말했다. 사도행전에는 사실 성령이 사람에게 오시는 장면이 총5번 정도 나온다. 교회적으로 볼 때에는 3개교회 즉 예루살렘교회(행2장)와 사마리아교회(행8장) 그리고 에베소교회(행19장)에게 성령이 내려오셨고, 이방인에게는 고넬료가정(행10장)에게 오셨으며, 개인적으로는 사도바울(행9장)에게도 오셨다. 그럼, 이 5번에 걸친 성령강림사건과 동시에 일어난 공통현상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말해, 성령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는 없는 영이신데, 그들에게 성령이 오셨다는 것을 그들은 어떻게 알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간단하다. 그들이 성령받은 후에 어떤 현상(증상,표적)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확인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사마리아교회를 제외하고 다 "방언(글로싸)"을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마리아교회는 그때에 방언을 말했는지 안했는지를 기록만 되어있지 않았을 뿐, 실은 어떤 특별한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교회에 마술사 시몬이 있었는데, 그도 사도들이 와서 안수했을 때에 성령받는 것을 보고는 사도들에게 돈을 주면서 자기도 그러한 능력을 받게 해 달라고 부탁했었기 때문이다(행8:17~19). 물론 그때 베드로에게 크게 책망을 받았지만 말이다. 아마도 사마리아교회 성도들도 그때 방언을 말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에서 방언이 터질 때에는, 오순절 절기에 예루살렘에 성지순례객으로서 참여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특별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찾아온 15개국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이방언어들로 방언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막16:17에서 약속하신 말씀을 따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보며 새 방언(글로싸)을 말하며..."라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고로, "방언말함"은 믿는 이들 속에 성령이 들어오셨다는 가장 강력한 공통싸인이자 표적이며 현상이었던 것이다.

 

6. 방언은사는 왜 중요한가?

 그렇다면, 왜 방언말함이 중요할까? 그것은 성령께서 사람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에 대한 증표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 믿는 이들 속에 들어오실 때 선물(은사)을 주시는데, 공통분모가 바로 "방언:이었다. 고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방언은 누구든지 할 수 있고 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막16:17에 의하면, 믿는 자들에 대한 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방언이며, 고전12장 14장에 보면,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의 하나가 방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하는 방언"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받는 방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모든 믿는 자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서 자기의 마음 속에 받아들일 때에 생명의 성령이 들어오시는데, 그때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조에)을 갖고 들어오신다. 그러면, 거듭남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방언"이다. 고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마땅한 것이다.

  오늘날 성령의 은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방언의 은사는 성경의 기록이 멈추면서 끝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게 믿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믿으면 될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씀한 적이 없다. 예수께서는 방언이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표적"이라고 말씀하셨고(막16:17), 바울도 방언은 성령의 은사들 중의 하나라고 분명하게 말했다(고전12장,13장,14장). 다만, 고전12:30에서 바울은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라고 기록함으로써, 방언은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음을 언급했다. 이는 성령께서 사람 속에 들어오셨을 때에 주어지는 은사가 다를 수도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성령께서 자기 안에 들어왔다는 표적으로서 방언 아닌 다른 것들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그도 역시 성령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의 기록은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오실 때에 대부분 방언을 말했기 때문에, 방언의 성령이 오심의 증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이란 어떤 것인가? 방언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듭난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고전14:2). 그러므로 그 말을 알아듣는 자가 없다. 즉 방언은 이 세상의 언어가 아니므로 알아듣는 자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그것을 통역하지 않으면 답답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방언을 귀신 씻나락까먹는 소리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언은 통역해보면 유창한 말이다. 그러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말하고 기도하는 것을 두고 그것을 터부시하거나 멀리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방언은 내 영이 하나님께서 비밀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롬8:26에 의하면,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들 위하여 친히 중보기도하신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방언은 매우 유익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영의 기도이든지 아니면 성령께서 행하시는 중보사역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언을 통역하여 그 내용을 분석해보면 크게 2가지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찬양이다. 그리고 실제 방언통역한 것을 분석해보면, 이러한 자신의 영이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방언은 얼마 안 된다. 방언 중 약 1/10이나 1/9정도 밖에 안된다. 오히려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방언의 80~90%정도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방언통역에 나오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대체 누구인가? 성부인가 성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성령이신가?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방언통역을 통해서 나오는 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사역은 확살히 분리되어 있다. 아버지가 행하시는 사역과 아들이 행하시는 사역 그리고 성령이 행하시는 사역이 분리되어 있다. 그렇다면 방언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바로 아들 "예수님"이시다. 하늘과 땅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성령를 힘입어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바로 방언인 기도다. 그러므로 방언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7. 방언의 은사가 성도들의 삶을 매우 유익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언은 사실 말(언어)의 은사로서, 기도의 은사요 찬양의 은사다. 사람은 방언을 통해서 더 많은 기도를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신령하게 찬양할 수도 있다. 그래서 고전14장은 방언이 영이 말하는 것이자(고전14:2,4~6,13,23), 기도라고 했고(고전14:14~14), 방언으로 찬양할 수도 있다(고전14:15)고 했다. 다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이기에 방언을 말할 때에는 또한 통역이 필요하다고도 했다(고전14:5,13,26).

  그런데 방언통역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방언의 기도는 2가지 용도가 있다는 것이다. 즉 방언은 내 영이 하나님께서 진실한 소원을 아뢰는 기도의 통로임과 동시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아버지의 뜻을 말하는 하나님의 바램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방언은 첫째, 하나도 나쁜 것이 없으며 이기적인 욕심이 전혀 들어있지 않는 순수한 기도라는 것이다. 사실 방언기도의 내용을 통역으로 들어보면, 다 자신의 영혼을 위한 기도요 자기자신의 가족과 주의 종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가 나온다. 방언기도에는 단 한 번도 이기적인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취직시켜달라거나, 진급시켜달라거나, 집을 사게 해달라거나, 예쁜 자매와 결혼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나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기도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다, 자신의 영혼과 가족의 영혼구원을 위한 기도인 것이다. 둘째, 방언은 예수님께서 나의 대한 바램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언통역으로 자신의 영의 기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항상 그렇게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결코 나의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로 혹시 방언통역에 자신이 주의 종이나 선교사의 사명이 있다고 나왔을지라도 거기에 합당하게 준비되지 않는 한 결코 그렇게 쓰임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사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은사와 달란트와 기질과 영적인 분량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사람으로 쓰임받을 것인지가 어느 정도 정해져있는 것 같다. 하지만 꼭 그렇게 정해진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다. 또한 정해진 분량만큼 그렇게 쓰임받는 것도 아니다. 얼마나 이 땅에서 기도하고 사모하고 바라고 노력하느냐에 따라 그 정도와 분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방언기도를 통해서 나오는 나에 대한 하나님의 바램은 하나님의 뜻이자 소원인 것이지 결코 운명같은 것이 아니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라.

 

8. 방언의 은사는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그럼, 어떻게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는가? 그것은 기도할 때에 그냥 내 영이 말하는 대로 내 입술과 혀를 맡기면 된다. 우리나라 말로 발음을 또박또박 말하려고 하면 오히려 방언이 잘 안 나올 수도 있다. 방언은 사실 말하는 은사이기 때문에 그냥 자연스럽게 말을 하면 된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지 못하는 분들도 가끔씩 있는데, 이런 분들은 밖으로 말을 하려고 하지 않고 속으로 말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는 통성으로 기도할 때에 더 잘 나오는 것이다.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자신의 혀를 자연스럽게 맡기면 내 영이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랄랄랄 롤롤롤"과 같은 식으로 방언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창피하게 여겨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방언통역을 해보면, 그러한 방언이라도 그 내용은 유창한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할 때에 몇 개의 단어가 아니더라도 부모는 잘 알아듣고 응수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듣기에는 "랄랄랄 롤롤롤"으로 들릴지라도 통역해보면 그 내용도 다 다르며, 다 유창한 언어로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방언을 부정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아는 이들은 "랄랄랄 롤롤롤"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만서 조롱하는데, 진짜 방언통역하시는 분을 아직 못만나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요, 방언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몰라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가보면 다 알게 될 것이니,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럼, 방언은 어떻게 직접적으로 하게 되거나 받게 되는 것인가? 방언을 표적으로 보면 그것은 말하는 것이지만, 은사로 보면, 그것은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어떤 사례가 있었는가? 사도행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딱 3가지 방법으로 방언을 받았거나 말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성령받기를 간절히 기도할 때에 성령을 보내주심과 동시에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행2:1~4). 대표적인 경우는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의 방언의 나타남이다(행2:1~21). 사실 가룟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이미 성령을 받았다(요20:22). 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간절히 기도하여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마가다락방에 모여 10일동안 간절히 기도했다. 마침내 오순절날이 되었고 그때 오전 9시에 성령이 내려오셨고 성령이 그들 마음 속에 들어가시자, 드디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둘째, 말씀을 전하는 이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을 때에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행10:44~46). 그 대표가 바로 고넬료가정이다(행10:1~48). 고넬료는 자기의 식구들을 모아놓고 베드로 사도를 초청하여 말씀을 들었는데, 그들이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던지 이미 말씀듣는 중에 성령의 은사가 부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입술에서 방언이 저절로 나왔고 방언찬양도 아울러 나왔던 것이다. 째, 이미 성령받은 권위있는 자의 안수기도를 받을 때에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행19:6). 이러한 대표적인 경우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에게 바울이 안수함으로 성령받고 방언도 받고 예언의 은사도 나타난 사건이다. 물론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교회에 가서 안수했을 때에 그들도 성령을 받았고 표적도 같이 나타났다(행8:14~17). 그리고 다메섹의 경건한 자 아나니아아가 말 위에서 떨어져 식음을 전폐하고 있던 사울에게 안수했을 때에도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은 벗겨지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졌고 방언도 말하게 되었다(행9:17~18, 고전14:18). 한 마디로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즉시 방언으로 말하게 해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방언의 표적이나 방언의 은사를 주시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라는 것을 더욱 더 확신을 가지고 살게 하려는 것이자, 더욱 더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기 위함이다(행1:8).

  한편, 어떤 사람들은 방언기도가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방언기도는 내 영의 소원이요, 하나님의 뜻이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를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만약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게 되면, 방언기도의 내 기도나 하나님의 뜻은 내게서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날마다 회개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십계명을 어긴 것은 없는지 살펴보면서 십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에, 방언기도의 기도가 이뤄지는 것이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도 성취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로서 "회개기도"를 대신하려고 하지 말라. 그리고 방언기도로서 "감사"나 "봉사"를 대신하려고 하지 말라. 또한 방언기도로서 내 성품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아니다. 이런 것들은 다 나의 땀과 노력과 고백과 고군분투가 필요한 것들이다. 이런 것이 없이 맨날맨날 방언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영적 진보는 결코 없음을 알아야 한다. 회개기도도 동반되고, 감사와 봉사를 생활화하면서, 자신의 성품을 바꾸기 위해 기도하면서 방언기도도 할 때에, 방언기도의 내용이 이뤄지는 것이지, 방언기도만 냅다 한다고 해서 방언기도가 이뤄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를 하려면, 통성으로 충분히 기도하여 회개하고, 나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남을 위한 중보기도를 한 다음에, 마지막에 가서 방언기도로 하는 것이 좋다. 방언기도는 미래의 나의 모습을 미리 아뢰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회개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면, 어느날 과거에 자신이 방언기도를 한대로 자신이 이미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회개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애쓰지도 아니하면서 냅다 방언기도만 하고 있으면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만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9. 나오며

  성령은 누구신가? 성령은 세번째 하나님이 아니다. 그분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 한 분 하나님께서 겔36장의 약속에 따라 경륜적으로 이제 믿는 이들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물론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그분은 단독적으로 인격을 가지고 일하시며 말씀하시기도 하신다(행16:7).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며, 동시존재하시고, 상호내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이들 안에 들어오실 때에는 사실 물질이 아니라 영으로 들어오시기에 그분의 오심을 우리가 만지거나 느낄 수는 없다. 다만 그분이 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어떤 현상이나 표적이나 은사로 알 수 있을 뿐이다. 한편 이때 어떤 현상이나 표적이나 은사가 자신에게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령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고전12:3, 요3:5~6). 우리는 단지 곁에 서 있는 나뭇잎이 흔들리고 자신의 이마가 시원함을 느낄 때에,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듯이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와 계시다는 것을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거의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이 방언을 체험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이 성령을 받은 자의 대표적인 현상이나 표적이며 은사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방언기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하는 분은 방언기도의 유익을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요,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인정하는 않아서라는 것을 알고, 오직 통성기도, 회개기도, 중보기도, 그리고 방언기도의 순서로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2019년 8월 14일(수)

정병진목사 


오늘날 교회에도 여전히 선지자가 존재하는가? 선지자가 존재한다면 그 선지자는 여전히 구약시대처럼 예언을 하는 자인가? 아니면 예언과는 상관없는 자인가? 그리스도인들 중에 많은 이들은 신약시대에는 더이상 선지자직이 남아있지 않다고 알고 있거나, 신약시대의 선지자직에도 여전히 예언이 들어있다는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둘 다 아니다.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선지자의 직분이 있기 때문이요, 오순절이후 선지자 직분을 수행하는 자라도 그는 더이상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신약시대 이후의 선지자직이란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자가 아니며, 그는 교회를 세우는 자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엡2:20). 그리고 우리는 교회를 세우는 자로서 선지자는 2가지 직무를 수행하는 자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이후의 선지자 곧 교회를 세우는 선지자는 대체 교회에서 어떤 직무를 수행하는 자인가? 오늘날 선지자란 대체 어떤 직분을 가진 자인가? 오늘은 이것에 대해 집중해서 살펴보자.

2019-01-20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오늘날 선지자란 어떤 직분을 가리키는가?(엡2:20~22)
https://youtu.be/bHZFalKBBrQ


1. 들어가며

  오늘날에도 예언사역을 하는 곳들이 더러 있다. 예언사역을 하는 곳에는 꼭 환상과 꿈도 같이 나온다. 그리고 축사와 치유사역도 병행하는 곳이 많다. 그런데 한 번 예언사역을 성령사역으로 알고 그것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좀처럼 거기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도들은 예언사역을 무시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성경은 예언사역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언제까지 있을 것이라고 했는가? 또한 초대교회를 세웠던 장본인들은 대체 누구였는가? 그들은 사도들이었는가 아니면 선지자들이었는가? 성경은 교회를 세우는 직분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지자인 것을 증거하고 있다(엡2:20). 그리고 실제로 이방인 교회들을 집중적으로 세웠던 사도바울도 안디옥교회의 선지자 중의 하나였다(행13:1). 그런데 성경은 동시에 거짓선지자의 미혹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마24:11). 그들을 분별해야 한다고 말한다(요일4:1).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은 오늘날 예언사역과 선지자들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내 영혼과 교회를 세우는데 더 유익이 되는 것일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교회가운데 현재도 있는 예언사역과 선지자의 직분과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오늘도 우리에게 성령의 혜안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2. 예언의 은사는 종결되었는가 아직도 여전히 유효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언은 존재하는가? 고전12장에 보면, 예언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성경이 완성됨과 동시에 성령의 은사도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어디에 그러한 근거가 있느냐고 물어보면, 고전13장을 언급한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행하던 것들 곧 예언과 방언과 지식도 함께 폐해진다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고전13:8~10).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온전한 것이 오는 때는 그성경이 완성된 때라고 나와있지 않다. 그때는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보는 때라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고전13:12).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성령의 은사의 하나로서 예언의 은사는 계속 있을 것임을 알라.

 

3. 지금의 시대에도 우리는 예언하려고 하거나 예언을 받으려 다녀야 하는가?

  그렇다면 성도들은 그때까지 늘 예언을 사모하고 예언받으려 다녀야 하는가? 그런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선지자의 직분이 존재하며(엡2:20), 예언의 은사가 있으니(고전12:10),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고전14:1)고 주장하는 곳이 있다. 그곳은 대부분 신사도와 빈야드운동 하는 곳이거나 그곳과 관련을 맺고 있는 쪽이다. 그런데 방금 주장하는 것에는 성경에 어긋난 주장이 전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다.

  자, 물어보자. 첫째, 성경은 예언하려고 하라고 했는가 예언을 받아야 한다고 했는가?(고전14:1). 안타깝게도 성령의 은사를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예언하는 자보다는 예언을 받으려는 자가 훨씬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둘째, 예언받은 은사자가 말하고 있는 예언은 정말 100% 성령의 음성인가 아니면 자신의 생각도 들어가는가? 여기에 "예"라고 대답할 분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가 그것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양수리 수원지에 있는 물을 깨끗하다. 하지만 서울의 달동네의 수도꼭지에 나오는 물은 녹물이다. 물은 원래 깨끗한 물이었다. 하지만 물을 실어나르는 수도관이 오래 되면 녹물이 나오기 마련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의 은사로 주어지는 예언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그 예언을 받아 말하는 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셋째,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가 예언을 말할 때, 그것은 100% 성령의 음성뿐인가 아니면 귀신이 주는 것도 있는가? 이 질문에 100% 성령의 음성 뿐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가장 큰 문제가 되는 항목이 바로 이 항목이다. 사람이 예언을 말할 때나 받을 때에 거의 대부분은 100% 무방비상태에서 예언을 말하거나 받는다. 도둑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자신을 내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는가? 사탄이 알곡 가운데 순간적으로 몰래와서 가라지가 뿌리고 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탄이 사람을 속이는 가장 큰 수단이 바로 예언과 꿈과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이 100% 전부다 성령으로부터 왔다고 보증하기는 어렵다. 왠만하면 구별을 못한다. 그것이 귀신이 가르쳐 준 것인지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는 것인지 잘 분간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을 사탄도 잘 안다. 그러므로 사탄은 예언을 통해서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아버린다. 그러므로 예언을 받는 자는 예언하는 자의 말에 100% 묶여버린다. 예언을 받지 않으면 불안해서 살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예언중독에 걸리고 그러면 거기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언에 대해 무엇을 경고했는가? 어린아이 때에는 예언도 필요하고 방언도 필요하지만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그것을 버렸다고 했다(고전13:11). 그리고 예언하는 자는 반드시 차서를 따라 예언하되 반드시 분별하라고 했다(고전14:29~31). 하지만 이 세상 어떤 사람이 예언을 분별해낼 만큼 영적이며 성령충만한 자인가? 성경 전체를 다 알고 있는 자라도 그것을 분별해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예언은 분명 성령의 은사이기는 하지만 가장 조심해야 할 영역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사탄이 우리를 속이고 묶어두는 데에 가장  잘 이용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 하신 일이 없다. 성령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도 그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영이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영이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4. 은사로서의 예언과 선지자의 직무수행은 같은 종류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그런데 예언의 은사와 선지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다시 말해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를 선지자라고 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성령받은 자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일뿐 그것은 선지자의 직분을 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직분은 교회를 세우는 자이기 때문이다.

엡2:20-22 너희(에베소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사도바울은 교회를 세워가는 5가지 직분이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러한 직분에는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다(엡4:11). 이러한 직분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한다. 그래야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성령의 은사로서 예언이 들어가지 않는다. 예언은 예언일 뿐이다.

 

5. 구약시대의 선지자직과 교회시대의 선지자직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나타난 선지자직과 오순절성령강림 이후 교회시대의 선지자직은 같은가 다른가? 그것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가 예언한 것은 세례요한까지라고 분명하게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다(마11:13).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에 대한 예표로서 율법과 선지자의 직접적인 예언은 예수께서 오심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예언의 기능 가운데 하나인 메시야에 대한 예언은 이제 종결된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선지자가 행하는 직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하나는 메시야를 예언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일이다. 그런데 메시야를 예언하는 직무는 예수께서 오셔서 완성하심으로 폐지되었다. 그렇다면 여전히 남아있는 선지자의 직무 하나는 무엇인가? 그것은 회개를 촉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시대에 선지자들은 성도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직무를 여전히 수행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6. 오순절 이후 교회를 세웠던 선지자는 어떤 직무를 수행하는 자인가?

  사도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교회를 세우는 기본적인 2가지 직책과 더 나아가 5가지 직책이 있음을 말했다. 여기서 2가지 직책은 사도과 선지자직을 가리킨다(엡2:20). 그리고 거기에 덧붙혀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라는 직분이 더 있다(엡4:11).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자신을 어떤 직책을 가진 자라고 소개했을까? 그는 딤전과 딤후에서 자신을 사도요 복음전하는 자요 교사라고 소개했다(딤전2:8, 딤후1:11). 그런데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안디옥교회에는 교회지도자들을 소개할 때에 2가지 직분이 나온다. 그것은 선지자와 교사직이다(행13:1). 그런데 안디옥교회의 5명의 지도자들 가운데 사도바울이 그 명단에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선지자의 직무도 받은 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사도직, 선지자직, 복음전하는 직, 교사직을 가지고 있는 자였고 그것을 수행하던 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행전에 있는, 교회가 출현했던 역사를 통해서, 맨 처음 유대인으로 구성된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행2:36~37). 그런데 이방인으로 구성된 안디옥교회는 선지자들과 교사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행13:1).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쓸 때에, 에베소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세워졌다고 언급했던 것이다(엡2:20). 그렇다. 사도직과 선지자직은 교회를 세우는 직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이후로 선지자직은 구약처럼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자가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직무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사도베드로와 사도요한은 교회 가운데에 있는 거짓선지자와 거짓교사들에 대해 매우 조심해야 함을 경고했다(벧후2:1, 요일4:1~3). 거짓선지자와 거짓교사들은 교회를 세우는 자가 아니라 교회를 허무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요일4:1~3에서, 거짓선지자들을 분별해야 한다면서, 어떤 자가 거짓선지자인가를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 잘못 가르치는 자라고 하였다(요일4:1~3). 고로 교회시대의 선지자직은 교회를 세우는 자로서, 이미 오신 메시야 곧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잘 가르치는 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교회시대의 선지자직이란 여전히 구약시대의 직무였던 회개촉구의 직무를 이어받은 자도 해당되므로, 교회시대의 선지자직은 교회를 세우는 자로서, 이미 오신 메시야를 잘 가르치는 자이자, 회개를 촉구하는 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7. 나오며

  오늘날에 과연 누가 선지자인가? 예언의 은사가 나타나고, 병을 고치고 능력을 행하는 자인가? 아니면 사도바울처럼 성도를 온전케 함으로 교회를 세우는 자인가? 그렇다. 오늘날의 선지자는 구약적인 선지자의 직무를 그대로 수행하는 자가 더이상 아니다. 구약적인 선지자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였고 회개를 촉구하는 자였다. 하지만 신약의 선지자는 더이상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는 자가 아니다. 이제는 오신 예수님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자다. 더불어 구약시대의 예언자처럼 회개를 촉구하는 자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사도요한에게 A.D.96년경 마지막 시대에 활동한 두 증인을 소개했는데(계11:3), 그들을 "두 선지자"라고 말했다(계11:10). 그리고 설명에 그들은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자인 엘리야와 같은 일을 행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계11:5~6). 율법이 예표로 말했던 메시야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전파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자가 바로 마지막 시대의 선지자라는 것이다. 물론 이 시대의 선지자는 구약의 율법 가운데 도덕법인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하며, 의식법만이 예수께서 오셔서 완성하심으로 폐지되었음을 가르치는 자이다. 건투를 빈다.

 

2019년 01월 20일(주일)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