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을 하게 되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 어떤 이는 기도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어떤 이는 귀신을 쫓아내는데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유익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그것은 방언이 "자기의 덕을 세운다"는 것이다. 이 뜻은 대체 무엇인가? 왜 방언으로 기도하면 자기자신을 건축할 수가 있는 것인가? 이것을 알면 방언의 놀랍고도 신비한 세계가 열리기 시작한다.

2020-06-21(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성령의 은사(03) 방언을 말하게 되면 어떤 유익이 있는가?(고전14:2~4)
https://youtu.be/rwhDTa2FwZ0 [혹은 https://tv.naver.com/v/14400662 ]

 

 

1. 들어가며

  예수믿는 사람들은 회개하고 주일성수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만이 필요한 것이었다면 성령께서는 사람 속에 내주하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의 성령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에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에게 3년반동안이나 들어서 배웠던 말씀으로 충분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가 대체 무엇이며, 그중에서도 방언의 은사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며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왜 예수께서는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그것을 강조하셨는가? 그것은 그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파해야 할 세상과 그리고 대상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첫째, 이 세상은 이미 마귀의 소유가 되어서 마귀의 손아귀 아래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요일5:19). 그러므로 마귀의 손아귀에게 무엇인가를 빼내오려면 최소한 마귀보다는 능력이 많아야 했다. 그런데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하지 않고 어찌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둘째, 이 세상으로부터 사람을 구출해오려면 최소한 이 세상의 임금인 마귀와 그의 천사들(귀신들)보다는 더 능력이 있고 지혜로워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찌 담대하에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고로 우리는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의 은사로 무장하여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셋째, 강략한 세상사람들의 마음이 문이 열려지게 하려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무장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3. 어떻게 하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며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가?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이것은 정의하기가 쉽다는 이야기이지, 실제가 쉽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가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십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성령세례받기를 원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면 되는 것이다. 맨 처음으로 마가다락방에 모여있는 120명의 성도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그것은 성령받기를 간절히 기도했다(행1:14). 그랬더니 정말 10일 후에 그들 위에 성령세례가 부어졌다.  

 

4. 성령세례받은 자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최초의 성령세례 사건에서는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다(행2:4). 그리고 고넬료가정에도 방언의 은사가 주어졌으며, 바울이 에베소에 가서 성령받기를 위해 기도했을 때에는 그들에게 "방언"과 "예언"의 은사가 주어졌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받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들에는 어떤 것들이 더 있는가?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들이 있으니, 그러한 은사들에는, 방언와 예언의 은사 외에도 7가지를 더 말씀하고 있다. 그것을 정리해 보면, 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고치는 은사, 능력행함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들 분별함의 은사, 각종 방언말함의 은사, 방언들 통역함의 은사 등이 있는 것이다. 물론 로마서 12장이나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일반적인 은사나 직임으로서의 은사가 더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것들 중에 초자연적인 은사로서 단연 으뜸인 것은 역시 고전12장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은사들인 것이다. 

 

5. 방언의 은사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방언"의 은사란 어떤 것인가? 오늘날까지 방언의 은사는 상당한 논란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방언의 은사를 "외국어"로 보는 입장과 더불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로 보는 입장이 서로 첨예하게 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방언의 은사를 외국어로 보는 이들은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외국어가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 예루살렘에는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15개국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그들이 저마다 자기들이 태어난 곳의 지방말로서 방언을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행2:6,8). 나름대로 설득력은 있지만, 그것은 듣는 사람이 그렇게 들었는지, 그날에 특별하게 그들로 하여금 외국어로 말하게 하셨는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문맥을 통하여 살펴보면, 그날 120명 성도들은 질적으로 다른('헤테로스) 언어들로 말했으며, 또한 사람드르이 반응이 술취했다는 것이고(외국어로 말하는 것을 보고서 그들리 술취했다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4장이 바울이 말했던 방언과 똑같은 단어("글로싸")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가 방언이라는 것을 믿는다. 이와 관련하여 방언에 대한 정의는 이전에 전했던 말씀을 참고하기를 바란다(https://youtu.be/jnYuRgy27mg). 

  그렇다면, 바울 자신도 말했고, 에베소교회의 성도들도 말했던 방언 곧 "글로싸"가 무엇인가?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 정체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밝혀준다. 그것에 대한 설명은 2가지다. 첫째, 방언은 말하는 은사로서,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말이며, 이것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영으로 하나님과 비밀들을 서로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고전14:2). 그리고 둘째, 방언은 거듭난 사람이 자신의 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다(고전14:14). 그렇지만 그 방언을 자신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마음에는 열매맺을 수 없다고 하였다. 고로 우리는 방언이란 "거듭난 사람이 자신의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고 기도하는 영의 언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6. 방언의 은사는 어떻게 표현되고 표출되는가?

  그렇다면, 방언은 어떻게 표출되는 은사인가? 그것은 총 4가지로 표현된다. 첫째는 말하는 것으로 표현된다(고전14:2). 사도행전에 읽어보면 성령세례를 받고 있는 장면이 4차례에 걸쳐 나오는데, 그중에서 3번은 분명하게 그들이 방언을 말했다고 언급하고 있다(행2:4, 10:46, 19:6). 그리고 그때 주어진 방언의 은사는 "방언을 말하는(발설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고로 우리는 방언의 은사가 "말하는 은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방언의 은사는 기도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즉 방언은 기도하라고 주어지는 은사라는 것이다. 즉 방언은 기도의 한 방편으로서 활용되는 은사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영으로 기도하는 것을 두고 방언의 은사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알아들을 수 없으니 기도할 때에는 방언으로도 기도하고, 마음으로도 기도하라고 하였다(고전14:14~15). 셋째, 방언의 은사는 찬양으로도 표현된다. 그렇다. 방언을 많이 말하게 되면 아름다운 천사의 음률같이 찬양으로도 방언이 나온다. 알아들을 수 없는 찬양이나 그 음률은 정말 멋있는 찬양인 것이 방언찬양인 것이다. 

 

7. 방언은사의 유익한 점은 무엇인가?

  그런데 사도바울은  고린도전14장에서 성령의 9가지 은사 가운데 신령한(영적인) 은사들 3가지를 언급한다. 그것은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 그리고 더불어 "방언통역"의 은사다. 그중에서도 "방언"의 은사는 자기의 덕을 세우기 때문에 유익하다고 하였고, 예언의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때문에 유익하다고 하였다(고전14:4).

  그렇다면, 방언이 "자기의 덕을 세운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이 말은 "자기자신을 건축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방언이 사람의 덕망을 좋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짓고 건축하고 세운다는 뜻인 것이다. 그렇다면, "세운다"는 헬라어 단어는 어떤 것인가? 헬라어 단어로 "세운다"는 말은 "오이코도메오"라는 단어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뜻은 "짓다. 세우다. 건축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서 파생되어서 2가지 의미가 더 있다. 하나는 "다시 짓다. 다시 세우다. 다시 건축하다"는 뜻이다. 즉 "재건하다"는 뜻이 2차적인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더 있으니 그것은 "복구하다. 복원하다"라는 뜻이 더 있다. 결국 "자기자신을 세운다"는 말은 위의 3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방언이 자기자신을 건축한다고 하는 것은 첫째로 아무것도 세워진 것이 없는 자에게는 자시자신을 잘 세우게 해 준다는 뜻이요, 둘째로 잘못 지어진 것이라면 그것을 허물로 다시 지을 수 있게 해 준다는 뜻이며, 셋째로 이미 자기자신이 무너져 있는 자는 복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자신의 영을 건축하여 튼튼하게 만들어주고, 자기자신을 보호하게 만들어주는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고 많이 활용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오직 방언의 은사만이 자기자신을 건강하게 만들어주고 튼튼하게 만들어주고, 이미 허물어져 있는 자신의 영을 다시 복구하게 만들어주고, 잘못 지어진 것은 다시 짓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8. 방언의 은사는 실제적으로 자기자신을 건축하는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방언의 은사는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시제로 방언을 말하는 당사자는 상당히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방언을 말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를 정작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를 받아 방언의 은사로서 말하거나 기도하는 사람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방언통역을 40년이상 20만명 이상에게 하였으나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어떤 분에 따르면(이런 분은 우리나라에 몇 명 없다), 방언할 때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정확히 알려준다. 그때 방언의 약 10~20% 정도가 "기도"이며, 방언의 80~90%정도는 하나님과의 비밀스런 대화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영이 하나님과 비밀로 대화를 한다는데, 그것은 최소한 그것이 매우가치가 있고 소중하고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대화하는데 하찮은 것을 가지고 비밀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실제 예를 들어보자. 먼저, 방언하는 자가 무엇을 기도하고 무엇을 대화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방언할 때 그것이 기도인 것은 자신의 영이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대부분 자기자신의 미래를 위한 소망의 기도인 것을 알 수 있다. 목회자의 경우에는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을 천국에 잘 데려가게 도와달라는 기도한다. 또한 쓰임받되 오랫동안 쓰임받게 해 달라는 기도도 있다. 그리고 중학생의 방언기도를 들어보면, 자기의 부모님이 꼭 예수믿고 천국가게 해달라는 기도가 나온다. 그리고 이어 방언의 대부분은 사실 주님과 대화하는 것이다. 그때에 주님께서 우리의 영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그것은 우리의 미래에 되어질 일들 곧 나의 바람직한 것들 곧 사명같은 것을 미리 알려주거나 또한 그 일을 위해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너는 결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급하게 서두르지도 말라. 무엇을 안다고 교만하지도 말라. 이미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감사하라. 영적으로 깨어있는 종들과 함께 하라. 잘못된 것을 분별하고 책망할 것은 책망하라." 그래서 주님과 대화는 상당부분이 책망과 권면과 위로의 말씀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가끔씩은 조건적인 약속의 말씀도 주신다. "네가 교만하지 않고 충성한다면, 얼마후 너에게 더 많은 것을 안겨줄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도 붙여줄 것이다. 아니 구하지 않는 것까지도 줄 것이다" 등등이다. 그리고 장로들에게는 "주의 종을 대적하지 말라. 비난하지 말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일반 성도들에게서는 누구를 미워하거 비난하지 말라고 하기도 한다. 

  이렇듯 방언통역을 해보면,  자신의 영혼의 미래이 되어질 아름다운 모습을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청원하고 있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람직한 모습을 권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조건적인 축복의 말씀을 주시기도 한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는 자기자신을 건축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 자기자신의 미래의 모습을 미리 기도로 아뢰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미리 대화로 듣기 때문이다. 

 

9. 부가적으로 방언을 많이 했을 때 어떤 유익을 받는가?

   방언을 하헤 되면 부가적인 유익도 더러 있다. 이것은 방언을 주신 원래의 목적은 아니다. 참고할만한 것이다. 첫째, 방언을 하게 되면 자신은 이미 구원받은 자요 하나님께 쓰임받고 있는 그릇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유익하다. 둘째, 방언으로 기도를 많이 하면, 은사가 추가가 더해지기  때문에 유익하다. 방언을 말하는데 자기가 무슨 말로 말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언의 은사를 주신다. 그것은 자기가 자신의 방언을 알아듣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이 하는 방언의 은사를 알아듣는 은사가 있으니, 그것을 방언통역의 은사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성령세례의 가장 기본적인 은사이면서 다른 은사의 문을 여는 은사로 방언의 은사는 계속해서 다른 은사들을 더 받게 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니, 베드로는 방언을 하고 나서 치유의 은사와 기적의 은사를 받았으며, 빌립집사는 방언을 하고 나서 귀신쫓는 은사와 병고침을 은사를 받아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방언을 하고나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받았고, 영분별의 은사도 받았으며, 기적과 치유의 은사도 받았으니, 자기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귀신들린 사람이나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사람이 나았기 때문이다. 셋째, 뿐만 아니라 방언을 하게 되면 기도를 더 잘 할 수 있고 더 충분히 할 수가 있어 유익하다. 왜냐하면 모국어로 기도하다가 기도거리가 다 떨어지면 더이상 기도할 수가 없는데, 그때에 방언으로 연이어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방언의 내용을 하나님 이외에 아무도 알 수가 없다는 것 때문에 귀신도 방언을 하는 자 앞에서 주저함으로 유익하다. 왜냐하면 무슨 기도를 하나님께 하고 있는지 귀신들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10. 방언의 한계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방언은 만능인가? 아니다. 방언은 결코 만능이 아니다. 방언를 아무리 말해도 내게 소용없는 것들이 있다. 그러한 것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가 있다. 첫째, 방언을 아무리 말한다고 해도 만약 그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자신이 지은 죄도 용서받을 수 없으며, 영적인 진보도 이룰 수 없고, 속에 들어온 귀신도 쫓아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둘째, 방언을 아무리 말한다고 해도 스스로 하나님께 찬양과 시간과 물질로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보다 더 적을 것이며, 천국에서 들어가서 받을 상급도 작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아무리 방언으로 많이 기도해도, 옛사람의 성품을 가진 자신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지 않는다면, 더러운 자신의 성품을 절대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한다거나 방언을 많이 말한다는 것을 가지고 자신을 자랑하는 자랑거리로 삼지 말기를 바란다. 겸손해야 한다. 

 

11. 나오며

  그렇다. 방언은 자기의 영혼을 건강하게 하고 튼튼하게 하고 이미 허물어진 데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매우 유익한 은사다. 그러므로 성령세례가 나타났던 곳에 대부분 다 방언의 은사가 꼭 나타났다방언의 은사가 있어야 자기를 먼저 건축하여 자신의 영혼도 지키고 남의 영혼도 구원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를 외국어라고 말하거나 헛소리라고 말하거나 귀신의 장난이라고 말하는 자는 이러한 혜택들을 결코 누릴 수가 없을 것이다(물론 자기자신의 자유의지의 선택사항이지만...). 사실 방언은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기준은 절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기초를 든든히 세우고 무너진 것을 수축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려면 어떤 힘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이 바로 방언의 은사인 것이다. 왜냐하면 방언은 내 영이 주님과 비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방언은 내 영이 하나님께 자신의 소원을 미리 아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금하지 말라(고전14:39). 물론 방언을 말하는 것은 결코 만능이 아니며, 방언이 천국가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도 아니다. 다만 방언이 자기자신을 건축하는 데에 매우 유용한 은사이니만큼 교회 안에서 질서를 따라 방언을 말하거나 방언으로 기도하여 자신의 신앙에 있어서 놀라운 영적인 진보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2020년 06월 21일(주일)

정병진목사

 

방언의 은사란 무엇인가? 방언은 외국어인가 아니면 거듭난 사람의 영의 언어인가? 요즘 들어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고린도현상이자 귀신이 하는 장난이며 그것은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들이 성경에 있다고 한다. 과연 성경에 그러한 근거가 있는가? 반대로 그렇다면 방언이 영의 언어이자 기도라는 근거는 있는가? 이제 방언논란을 종식시켜줄 만한 말씀이 여기에 있다. 한 번 시간을 내서 꼭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2020-06-19(금) 금요기도회
제목: 성령의 은사(02) 방언은 외국어인가 영의 언어인가?(2)(행2:1~14)
https://youtu.be/jnYuRgy27mg [혹은 https://tv.naver.com/v/14389159 ]

 

 

1. 들어가며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최초의 성령세계사건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그날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또한 그들 위에 부어짐으로 말아맘아 120명의 성도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게 된다. 그렇다면 "다른 언어들(방언들)'이란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는가? 방언의 은사는 배워서도 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은사인가 아니면 성령께서 주시는 특별한 초자연적인 은사인가? 어떤 이들은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 처음으로 출현하였던 성령의 은사는 외국어를 말하는 방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날 그들에게 터져나온 방언의 은사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2. 사람 위에 부어진 최초의 성령의 은사는 무엇이었는가?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 모여서 간절히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갑자기 성령세례가 부어졌다. 그리러자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선물로서 특별한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방언들)"로 말하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른 언어들"이라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자기들은 처음으로 들어보는 것이겠지만, 이미 다른 지방에서 말하여지고 있던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듣지 못했던 새롭고 신비한 언어였는가? 한 마디로, 그것은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였는가?

  분명한 사실은 이날 120명의 성도들이 말하게 되었던 "언어(글로싸)"는 성경에서는 "혀"(막7:33,눅1:64,행2:3,롬14:11,고전14:9) 아니면 "방언"으로 번역되고 있는 단어다. 단 한 번 "언어"(행2:11)라고 번역되기도 하였다. 이 단어에 대한 사도행전2:4의 번역은 기존에는 "방언"이라는 단어였다. 하지만 개역개정판으로 넘어오면서 "언어"라는 단어로 바뀌었는데, 이렇게 바뀐 곳은 오직 단 두 곳으로서, 행2:4과 행2:11에서만 "방언" 대신에 "언어"라고 바꾸어놓았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곳에서 이것을 표적이나 은사의 종류로서 번역할 때에는 항상 "방언"이라고 번역하였다(막16:17, 행10:46,19, 고전12:10, 13:1,8, 14:4,6,13,14,18,22,26,27,39). 그러므로 사람 위에 부어진 성령의 최초의 은사는 "방언"의 은사였다고 우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3. 방언은 어떤 은사이며 그 실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방언"이란 대체 어떤 은사인 것이며, 그 진짜 실체는 무엇인가? 방언의 은사가 무엇인지 관하여는 대부분 2가지 견해로 서로 엇갈리고 있다. 하나는 간단히 말해서 "외국어"라는 것이다. 자기나라의 말이 아니라 외국의 말이어서 자기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또 하나는 그 말은 다른 나라에서도 말해지는 "외국어"가 아니라, 이 세상에는 없는 그래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언어로서 "영의 말"(고전14:2)이자 "영의 기도"(고전14:14)라는 것이다 

  먼저, 행2:4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다른 언어들"을 외국어라고 보는 입장부터 살펴보자. 이쪽 계열은 보통 장로교쪽 계열이 많이 주장하는 편이다. 물론 장로교에 속한 모든 교단들 모두가 다 방언을 외국어라고 보지는 않는다. 어찌되었든지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방언이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외국어"라고 간단하게 말한다. 그러나 또 한 쪽 계열이 있다. 이쪽에서는 "방언"을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한다. 이쪽계열에는 오순절교단에 속하는 교회들과 목회자들의 주류를 이룬다. 이들 중에는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필연적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 곧 방언을 말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그렇다면, 방언이란 외국어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인가?

  우선, 행2:4에 나오는 "언어들(글로싸이스)을 외국어들로 보는 분들의 견해를 들어보자. 그들은 대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최초의 성령세례의 은사로 주어진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것을 정리하면 딱 2가지다.

  첫째,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세례로서 말하게 되었던 "방언"은 당시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와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기나라의 언어(디아레크토스=지방어)로 들었기 때문에, 그것은 틀림없이 "외국어"라는 것이다. 당시 해외파(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총 15개국에서 왔었는데, 그들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곳의 지방말로서 방언소리를 들었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둘째,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이방신을  따라는 고린도인들이 겪을 수 있는 고린도현상으로서, 고린도가 해양도시로서 이방신을 많이 섬기는 곳이었기에, 고린도성도들은 자기기 딴에는 신령한 방언이라고 생각하고 방언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귀신들이 그들을 속이는 속임수의 의미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이 고린도의 특수현상을 신령한 방언이라고 생각하게 된 데에는,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성경말씀을 잘못 번역한데서 오는 오류라는 것이다. 그러한 대표적인 분은 우리 통합측 교단의 노OO목사님이시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주장하는 분의 책("방언을 검증하자")을 보니, 헬라어성경을 얼마나 왜곡되이 번역하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필자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을 뿐만 아니라, 신약신학을 연구하는 자로서 헬라어를 오랫동안 공부해왔기 때문이다.

 

4.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분들의 근거는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노OO목사님은 왜 고전14장에 나오는 성경말씀을 어떻게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그분은 고전14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특히 3가지 말씀은 잘못된 번역으로서 사람들이 말씀을 잘못 알아들어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착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 그분의 주장(번역)과 실제 헬라어성경말씀은 어떤 것인지를 서로 비교해 보도록 하자.

  첫째, 그분은 고전14:2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말을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기 때문에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을 직역하면 이렇다.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을 발설하고 있는 자가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발설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무더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영으로 비밀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고전14:2의 말씀에 대해 노OO목사님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이 방언을 말할 때에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말한다고 한디만 알아듣는 자가 없었던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OO목사님의 번역은 크게 잘못되었다. 그렇게 번역한다면 그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말을 바울이 인용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생각하고 있거나 말했던 것을 인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방언을 발설하고 있는 자는 사람에게 발설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발설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영으로 비밀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14:2의 말씀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방언을 잘못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말이 아니라, 왜 방언이 신령한 은사인지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둘째, 그분은 고전14:14의 말씀도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나 이 본문도 잘못 번역한 것이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고전14:14 왜냐하면 내가 만일 [계속해서]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기 대문이다. 그런데(그럴지라도) 나의 마음은 열매가 없이 있느니라(열매가 없느니라)

   그리고 그 다음구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나는 [장차] 영으로 기도할 것이다. 그럴지라도 역시 나는 마음으로 기도할 것이다.(고전14:5)" 그렇다. 바울은 말한다. 방언으로 말하고 있는 자가 통역하기를 계속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가 있는데(고전14:13), 그것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는 자신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마음으로는 아무런 열매가 맺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방언은 통역을 해서 마음으로도 열매를 맺도록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그분은 고전14:18의 말씀도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외국어들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노OO목사님은 이 말씀의 본래적인 뜻은 자신이 방언기도를 일반성도들보다 더 많이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번역도 잘못된 번역이다. 왜냐하면 헬라어원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전14:18 내가 너희의 모든 사람들보다 방언들을 [계속해서] 더 발설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렇다. 이 말씀은 바울이 다양한 종류의 방언들을 말하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방언들을 더 많이 말하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종류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많은 것 곧 분량이 많은 것에 대한 감사이기 때문이다. 만약 바울이 여기서 다양한 종류의 방언들을 말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려고 했다면, 그는 자신이 "다른(알라이스) 방언들(글로싸이스)"을 더 많이 말한다고 했어야 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방언들을 더 많이 말한 것에 대해서만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이 외국어로서, 성경이 쓰려질 때까지만 존속하다가 사라진 특별한 은사였다는 그분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근거를 성경에서 가져오려고 했으나, 오히려 성령을 더 왜곡되이 번역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을 뿐이다. 성경은 결코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해서 번역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근거로 책을 내고 세미나를 개최하여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호도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하지 말아야 행동으로 보인다. 

 

5. 방언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말이자 영의 기도인지를 증거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정말 행2:4에서 최초의 방언이 과연 사람을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인지 그 근거들을 살펴보록 하자. 참고로, 자신은 방언을 외국어로 알고 있고, 성경기록이 종료된 이후 더이상 방언의 은사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을 두고 이래야 저래야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천국에 가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제대로 알고 믿는다면 영적인 측면에서 매우 큰 유익이 있는 것인데 그것을 누리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면,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던 방언의 은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인 것을 증거하는 성경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약 10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예수께서 방언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 방언이란 "지방말"(디아레크토스)"이 아니라, "방언(글로싸)"이라고 말씀하셨고, 그것도 "새 방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막16:17).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표적들이 따라올 것인데 그것을 중의 하나가 "새 방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도, 방언을 외국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마가복음 16:9~20의 말씀이 원래 마가복음에 있었던 말씀이 아니라 후대에 첨가된 말씀이라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렇게 믿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 손에 이러한 말씀에 들려져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있지 않나고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는 "새 방언"을 말씀하신다고 했는데, "새로운 지방말(외국어)"을 따르는 표적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외국어는 가서 배우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표적에 포함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나오는 "새[로운]"이라는 말은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키는 헬라어 "카이노스"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언어를 믿는 자들에게 표적으로 따라올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질적으로 다른 언어를 두고, 자신은 현재 모르고 있지지만 당시 다른 지방에서 쓰고 있는 단어를 가리킬 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처음 방언(글로싸)이 나타났던 마가다박방에서 그때 함께 모여있던 20명의 성도들이 사용하던 "다른(헤테라이스) 언어들(글로싸이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행2:4). 그렇다. 최초의 방언은 그냥 "방언(글로싸)"가 아니었다. "다른 방언들(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른(헤테로스, 원형)"이라는 단어다. 헬라어에서 "다른"이라는 단어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알로스(another)"가 있고, "헤테로스(other)"가 있다. "알로스"는 같은 것들이 많은 중에서 조금 다른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요, "헤테로스"는 질적으로 다르며 종류가 다를 때에 사용하는 "다른"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이라는 단어가 바로 "알로스"다. 이는 보혜사는 예수님과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니라 예수께서 이제 영으로써 다시 오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2:4에 나오는 "방언"은 질적으로 전혀 다르며, 종류가 전혀 다른 방언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니, 만약에 이 세상에 있는 언어들로서 서로 연관성이 있는 외국이였다면 "알로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질적으로 전혀 다른, 이 세상 사람들 중에 그 누구도 쓰지 않았던 질적으로 새로운 언어가 출현하게 된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사도바울은 방언이란 거듭난 성도가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말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 소리는 들어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질적으로] 새로운 언어로서, 인간의 혼이 말하는 언어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말이라고 했기 때문이다(고전14:2). 그렇다. 이것은 이 세상 다른 나라에 가면 들을 수 있는 그러한 말이 아니다. 특히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이시다. 심지어 방언을 말하는 자신도 그 의미를 모른다. 왜냐하면 그 영이 비밀을 하나님께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결코 다른 나라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외국어일리가 전혀 없다. 

  넷째,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 처음으로 내뱉는 말이라고 했기 때문이다(행2:4,10:44~46,11:15~18). 오순절성령강림사건부터 성령께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사람에게 오신다. 하나는 그 사람의 속에 오신다. 그 사람의 영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요14:16~17). 이것을 "성령의 내주"라고 한다. 그런데 동시에 성령은 사람 위에도 부어진다. 이것을 "성령세례" 혹은 "처음으로 받는 성령충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때 성령의 내주를 경험한 자들에게 성령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들어왔는지 안 들어왔는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분이 가지고 온 것은 생명이다. 아버지의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이요 파괴될 수 없는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신다. 그런데 그 생명은 자신의 어떠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처음으로 표출되는 사건이 바로 자신의 영이 출생했다는 것을 알리는 어떤 울음과도 같은 소리다. 그것이 곧 방언인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자신의 영에 하나님의 생명이 더해진 것에 대한 자연적인 반응이 곧 방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부어질 때 대부분 방언(글로싸)를 말했던 것이다. 

  다섯째, 바울을 이것을 영의 기도라고 바울이 언급했기 때문이다(고전14:14~15). 바울은 방언을 영이 비밀을 말하는 것이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하는 말이라고 했다(고전14:2). 뿐만 아니라 바울은 방언을 영의 드리는 기도라고 분명하게 말했다(고전14:14).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고 있다면 그는 영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했기 때문이다(고전14:15).

  여섯째, 방언을 들었던 자들 중에는 갈릴리출신의 120명의 성도들을 향해 "새 술에 취하였다"곧 "미쳤다"고 하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행14:13, 고전14:23). 오순절날 방언소리를 듣고 찾아온 15개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소동하였다. 그리고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겼다고 했다. 그리고 다 놀라 당황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에 어떤 이는 "새 술에 취하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오전9시였으니, "이 사람들이 아침부터 술에 취했나?"라고 의아하게 생각한 것이다. 자신들이 토종언어로 그들이 말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아침부터 술에 취했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한 또다른 증거가 고전14장에 나온다. 만약 교회가 다 함께 모여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말하게 된다면 이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그들을 보고 "미쳤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방언은 통역을 해야 하고, 통역이 없으면 잠잠하고 예언을 하라고 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외국어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 혹은 "미쳤다"라고 말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식해졌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오순절날 유대인들에게 터뜨리고 나왔던 방언과 가이사랴의 고넬료와 그의 가족이 경험했언 방언(글로싸)은 서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행10:44~46, 11:15~17). 사도베드로가 이방인의 가정 고넬료의 집에 초대받아 복음을 전했을 때에 그들이 말씀을 듣다가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방언(글로싸)을 말하였고, 하나님을 높이 찬양(방언찬양)했기 때문이다(행10:46). 그러자 이것을 예루살렘교회에 가서 보고한 베드로는 자기들에에게 성령이 부어짐으로 성령세례가 있었던 것처럼 고넬료가정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러한 성령의 선물에는 동일하게 "방언(글로싸)"이 있었다. 그러므로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말했던 방언과 고넬료가정에서 말했던 방언은 동일한 방언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넬료가정을 생각해보자. 그들에게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누가 거기에 있었다고, 그들이 외국어로 말했겠는가? 아니다. 그들도 알아들을 수 없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언어를 말했던 것이다. 그것이 곧 방언이다. 

  여덟째, 바울은 이것을 "영이 드리는 기도"라고 말했기 때문이다(고전14:14). 바울은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은 영의 기도라고 말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방언을 통역해보면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으로 증명된다.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방언을 통역해보면, 방언의 내용은 자신의 기도와 예수께서 성령으로 그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나뉘는데, 대부분 자신의 기도는 약 20%정도로 방언통역이 되며, 약 80%정도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그에게 하시는 책망이나 권면이나 위로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고로, 방언은 영의 하는 말임과 동시에 영이 드리는 기도인 것이다. 외국어를 사용해 드리는 기도를 가리켜 초자연적인 신령한 은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홉째, 바울은 통역을 할 수 있게 하는데,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했기 때문이다(고전14:13). 바울은 신령한 은사들 중의 하나로서 방언의 은사를 언급했다. 그런데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 없어 자신의 마음으로도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반드시 공중예배 즉 교회에서 예배 중에 그것을 말해야 한다면 반드시 통역을 하라고 말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가? 그것이 만약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외국어라면 그 나라에 가거나 그 나라 사람에게서 배우면 된다. 하지만 바울은 통역하기를 배우라고 말하지 않았고,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하였다(고전14:13). 이는 방언통역도 초자연적이며 신령한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방언도 초자연적인 신령한 은사일 뿐만 아니라, 방언통역도 동시에 초자연적이고도 신령한 은사인 것이다. 

  열째, 방언은 자신의 덕을 세워준다(복원한다, 복구한다)고 했기 때문이다(고전14:4). 바울은 방언은 뜻도 내용도 모르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더 많이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다(고전14:18).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했다(고전14:39). 왜냐하면 방언은 자기를 세우주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고전14:4). 왜 그런가? 사실 예언은 교회를 세워주지만(건축하지만), 방언은 자기를 건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방언기도는 자신의 진정한 소원, 영이 아뢰는 진정한 소원이 들어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에게 진정 권면하고 책망하고 인도하시는 음성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대로 실행된다면 그의 영에 매우 유익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이 무슨 뜻이며 내용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면 방언하는 자는 방언통역을 해보아야 한다. 만약 방언통역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기도를 계속 드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그러한 영의 기도가 먼저 선행되고 영적인 사람은 자신의 기도도 점차로 영의 기도와 일치를 이루게 되는 날이 오는데,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달라 몇 달, 몇 년, 몇 십년 뒤에 실행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영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바라시는 바람직한 모습이 들어있고, 자신의 영의 소원이 들어있기에, 자신을 세워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운다"는 말의 헬라어원문은 "오이코도메오"라는 단어로서, 이는 "짓다, 건축한다"는 뜻 외에도 "다시 짓, 재건축하다"라는 뜻도 있으며, "복구하다. 복원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무너진 자신의 영적 상태를 다시 복원시켜주는 것이 곧 방언기도이기 때문에 바울은 방언기도가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6. 나오며

  방언,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은사임에 틀림없다. 구약시대에는 단 한 명도 방언을 말하는 자가 없었다는 점에서도 이것의 귀중함을 증명된다. 사실 고전12:8~10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은사들 가운데 오직 2가지 은사만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했었다. 그것은 바로 방언이요 방언통역이다. 그래서인지 최초의 성령세례로 나타났던 성령의 은사는 다름 아닌 "방언"이었다. 방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사실 사도행전으로 기록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신령한 은사로서 방언과 예언 그리고 방언통역에 관하여 고전14장의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그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고전14장의 말씀을 통하여, 방언의 실체가 무엇이며, 그것이 성도에게 어떤 유익을 끼치는 것까지 알 수 있다. 그렇다. 방언은 고린도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헛소리도 아니다. 그것은 귀신이 사람을 사로잡아 행하는 악령의 일도 아니다. 그것은 신령한 일이다. 그것은 영이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듭난 영이 성령에 의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비밀을 말하고 또한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러한 것도 말했다. "다 방언들 말하는 자겠느냐?(고전12:30)" 그렇다. 성도들 중에는 방언을 못하는 자도 있을 수 있음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의 기준을 방언을 가지고 말해서도 아니 되겠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은사가 이미 종료되었다느니, 외국어라느니 말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방언으로 말함으로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영적인 유익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지 우리는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2020년 06월 19일(금)

정병진목사

 

[참고] 고전14:2, 14:14, 14;18의 헬라어원문과 노OO목사님의 사역(개인적인 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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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성령의 은사(01) 방언은 외국어인가 영의 언어인가?(행2:1~13)_2020-06-19(금)

https://youtu.be/bhQYC947ksA [혹은 https://tv.naver.com/v/14368584  ]

 

 

1. 성령세례가 부어질 때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요?

  어떤 사람에게 성령세례가 부어지면 그 사람에게서 4가지가 나타나거나 주어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의 능력이 부어집니다(행1:8,눅24:49). 둘째, 성령의 선물이 주어집니다(행2:38,11:17). 셋째, 성령의 은사가 나타납니다(고전12:8~10,31,14:1,12). 넷째, 믿는 자로서의 표적이 나타납니다(막16:17,고전14:22)

 

2. 최초의 성령세례사건은 어떤 것인가요?(행2:1~4)

  최초의 성령세례사건(행1:4~5)은 오순절날 성령께서 마가다락방에 오셔서 부어진 사건입니다(행2:1~4). 

 

3. 최초의 성령세례사건에서 나타난 성령의 은사는 무엇이었나요?(행2:4)

  최초의 성령세례사건에서 나타난 성령의 은사는 "다른 언어들(방언들)"로 말하기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4. 사도행전2:4에 나오는 여기서 "다른 언어들"은 무엇을 가리키나요?

  사도행전2:4에 나오는 "다른 언어들"은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헤테라이스 글로싸이스(others tongues)"입니다. 이 단어를 헬라어 원형으로 보면, "다른(헤테로스)" "언어(글로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글로싸"를 번역할 때에 어떠한 말로 번역하느냐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글로싸"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글로싸"를 헬라어단어로 직역하면, "혀"(막7:33,눅16:24,행2:3,2:26) "언어", "입"(빌2:11), "방언"(막16:17)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인데, 행2:4을 개역한글판 성경에서는 "방언"이라고 번역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개역개정판이 되면서 "언어(행2:4,11)"라고 바꾸어서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논란을 자초하는 번역입니다. 왜냐하면 "글로싸"라는 헬라어 단어를 "언어"라고 번역하기로 했다면, 다른 곳에서도 다 그렇게 번역했어야 했는데, 행2:4,11에서만 그렇게 번역하고, 다른 곳에서는 "방언"(행10:46,19:6,고전12:10,28,13:1,8,14:2,4,6,13,18,19,22,23,26,27,39)이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글로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행2:4에 나오는 "글로싸"를 해석하는 것은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국어"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요즘 들어서 이러한 해석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또 하나는 성령의 은사로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자 영의 언어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전14:2,14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외국어"라고 해석하는 분들은 고전14:2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언"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고린도현상으로서, 헛소리, 악령의 소리라고 평가절하합니다. 그것이 귀신 씻나락까먹는 소리, 헛된 지껄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최초의 성령세례로 인하여 마가다락방의 120명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언어"(행2:4)를 당시 15개국에서 찾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외국어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태어난 곳들의 "지방말(디아레크토스)"로 들었다는 것 때문니다(행2:6,8). 여기서 "디아레크토스"라는 말은 오직 사도행전에서만 6번 나오는 특별한 단어인데(행1:19,2:6,8,21:40,22:2,26:14), 개역개정판성경에서는 "방언"으로 2번 번역하였고(행2:6,8), 그냥 어떤 지방의 "말"로서 4번 번역하였습니다(행1:19,21:40,22:2,26:14). 고로 잘못 해석하다보면, 행2:4에서 말하여진 언어는 "지방말(디아레크토스)"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5. 행2:4에 나오는 "글로싸"가 의미하는 바는 진정 무엇인가요?

  그렇다면, 행2:4에 나오는 "언어(글로싸)"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첫째, 예수께서 믿는 자들에게 따라오는 표적으로 주어질 것이라고 했다는 "새 방언"과는 동일한 단어입니다(막16:17). 둘째, 이 방언(글로싸)이 고넬료가정의 성령세례 후에도 똑같이 주어졌습니다(행10:46). 그러므로 베드로 자신도 말하기를, 자기들도 처음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에 주셨던 것으로 성령세례받을 때에 주신 선물(행2:1~4)이 바로 그 방언이었다고 언급했습니다(행11:15~16). 고로 우리는 행2:4에 최초의 성령세례로 주어진 "언어(글로싸)"와 행10:46에 고넬료가정에서 부어진 성령세례로 주어진 "방언(글로싸)"은 동일한 종류의 언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바울이 안수함으로 에베소성도들에게 받게 했던 "방언(글로싸)"도 행2:4과 동일한 "글로싸"입니다(행19:6). 넷째, 뿐만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로서 말하는 "방언(글로싸)"과 행2:4과 동일한 단어(글로싸)입니다(고전12:10,28,13:1,8,14:2,4,6,13,18,19,22,23,26,27,39). 그런데 고전14:2에 보면, 이것은 성령세례로 인하여 은사를 받게 된 성도들이 말하는 언어로서, 그것은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말하는 것으로서 아무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 들 수가 없는데, 그것은 [자신의] 영으로 비밀을 발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행14:2). 그리고 고전14:14에서는 "방언(글로싸)"은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고전14:14)" 고로, 여기까지 우리는 잠정적으로 볼 때 "글로싸"는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에 주어지는 은사로서, 하나님의 선물이며, 또한 표적으로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지방의 언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분명한 의미는 다음 시간에 좀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2020년 06월 19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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