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왜 모든 성도에게 빠짐없이 달란트와 사명을 주시는 것인가? 우리를 쉽게 부려먹으시려고 그러신 것인가? 왜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는가? 그가 주인의 재산이라도 축내거나 허랑방탕하게 써서 그렇게 된 것인가? 그리고 그가 쫓겨난 장소는 대체 어디인가? 달란트에 얽힌 그동안 알려지지 않는 많은 비밀들이 여기에 있다. 오늘은 그 놀라운 비밀을 한번 들추어내 보자. 2021-09-05(주일) 주일낮1부예배 제목: 바른종말신앙(18)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왜 두 방면으로 갈라지게 되었는가?(마25:24~3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Zu34YC22SMI [혹은 https://tv.naver.com/v/22297524 ]

 

1. 들어가며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나, 달란트의 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는 종말을 맞이하는 자세에 관한 비유 말씀들이다. 이 세 개의 비유는 셋 다 그 결과가 둘로 딱 갈라지게 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로 딱 갈라지고, 달란트의 비유는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갈라지게 되며, 마지막으로 양과 염소의 비유는 만세 전에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을 양과 그리고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로 들어갈 염소로 갈라진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렇게 둘로 딱 갈라지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는가? 그가 주인의 것이라도 허비했던 것인가? 세상 쾌락을 위해 주인의 것을 낭비라도 했던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게 되었는가?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임직자를 세울 때 이 말씀을 즐겨 사용하는 본문으로서가 아니라, 마지막 시기에 심판을 준비하는 성도의 자세로서 들여다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 비유 말씀을 통하여 과연 '달란트'라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사명과 직임을 맡았다는 것이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리고 지옥의 형벌에도 차등이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놀라운 영적인 진보가 있기를  바란다. 

 

2. 달란트의 비유는 어떤 이야기인가?

  달란트의 비유는 불신자들에게 주신 비유가 아니다. 먼저는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비유이고, 오늘날에는 이 말씀을 듣는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비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 말씀을 듣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라고 주신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어떤 이야기인가? 그것은 어떤 부자 주인이 먼 여행을 떠날 때에 자기의 종들을 불러다 놓고 자신의 소유물을 맡겼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주인이 그냥 자신의 소유물을 넘겨준 것이 아니라 종들의 능력에 따라 맡기게 된다. 그러자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자신에게 준 은전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게 되는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을 그만 땅에 파묻어 두고 만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주인이 다시 돌아왔다. 그때 주인은 달란트를 주었던 종들을 불러서 회계를 한다. 그러자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이 자신에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그것들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다고 했다. 그러자 주인이 매우 기뻐하면서 그에게 칭찬을 하고는 그가 앞으로 누릴 복에 관하여 말씀해 주신다. 그것은 당장은 주인의 즐거움 안으로 들어 오라고 하는 것이었고, 앞으로는 더 많은 주인의 것을 그에게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달란트 받은 자의 보고가 있었는데, 그도 역시 두 달란트를 더 남기게 되었다고 보고하니 주인은 또다시 크게 기뻐하면서 다섯 달란트 더 남긴 종의 경우처럼 똑같은 종류의 칭찬을 해 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 달란트 받았던 자의 차례였다. 그는 주인에게 말했다. "당신은 씨 뿌리지도 않았으면서 거두려고는 하는 주인이고, 알맹이를 얻으려고 흩날리지도 아니하면서 모으려는 가혹한 분이라고 알았기에, 당신이 두려우서 달란트를 땅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여기에 있습니다."하고 그 달란트를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주인은 그에게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여, 나는 씨 뿌리지 않았던 곳에서 거두고, 흩날리지 않았던 곳에서 모으는 줄을 네가 알고 있었느냐? 그러면 너는 마땅히 내 은전들을 환전업자들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돌아온 후에 나의 것을 이자와 함께 내가 받게 했어야 했다"고 하면서, 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라고 명령하였으며, 그 쓸모없는 종을 더 바깥 쪽의 어둠 안으로 쫓아낼 것과 그러면 거기서 울부짖음과 이빨들을 갊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 내용이다. 

 

3. 주인이 종들에게 맡겨준 '달란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비유는 사람마다 주어지는 달란트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여기에 나오는 비유 가운데 '주인'은 예수님을 뜻하고, 종들은 '주인'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을 받은 사역자들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주인이 종들에게 주셨던 '달란트'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이 달란트를 능력, 은사, 사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체는 하나님께서 예외없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서 일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자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아무것도 없이 빈털터리로 살아가도록 놔두지 않고 그로 하여금 일할 수 있도록 기본적으로 자본금을 배려한 것이 바로 '달란트'인 것이다. 

  그렇다면, '달란트'는 어떻게 해서 정해지고 분배되는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며 실제 영적인 세계를 꿰뚫고 볼 때 알 수 있는 사실은 '달란트'는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부여한 사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것에 의해서 정해진다. 첫째, 달란트는 부모의 신앙적인 유산으로 인하여 결정된다. 부모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충성했고 열심을 내었느냐에 따라 또한 부모가 얼마나 회개를 많이 했느냐에 따라 자식에게 주어지는 은사와 달란트와 능력이 어느 정도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상당히 큰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그 사람을 보내실 때에 주신 사명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천국에 그의 영혼이 있다가 이 세상으로 보내어서 어머니의 자궁 안에 들어가게 된다. 보통 임신 후 두 달 정도 지난 시기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보내어지는 사람의 영혼의 나이는 사실 제각각이다. 그 영혼의 나이가 클수록 사명이 큰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달란트를 정하실 때에 부모의 신앙의 유산만으로 정하시지 않는가 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 세상은 악한 자인 사탄 마귀의 세상이므로 그냥 놔 두어서는 스스로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올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람을 지정하여 이 땅에 내려보내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 그래서 이러한 사명도 그 사람의 달란트를 결정해 주는 것이다. 셋째, 달란트는 위의 2가지 것 외에도 본인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 간구하는 소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부모로부터 영적 유산을 받은 것도 없고 하늘의 소명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이 땅에 살다가 말씀을 들어 보니 하나님께서도 소원을 갖고 계시는데 내가 그 소원을 자신이 이뤄 드리겠다고 소망하고는 주님께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달란트의 분량을 주실 수가 있는 것이다. 결국 각자의 달란트는 이 세 가지 것에 의해 결정되어 그 사람의 몫이 되는 것이다. 

 

4. 왜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달란트를 주시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상관하시고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시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셔서 자기 나름대로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시는가? 그 대답은 사실 너무나 놀라운 것이요 충격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한 달란트 받았던 자 곧 악하고 게으른 자가 나왔던 이유들 중의 하나가 바로 그가 이러한 사실을 잘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달란트를 주시는 진정한 이유를 분명히 밝혀 주셨다면, 아마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란트는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달란트(자본금)로 천국의 것을 준비하라고 주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없는데, 이 세상에서 하늘의 것을 준비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와서 누리게 될 축복을 이 땅에서 보다 더 쉽게 장만할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란트에 대한 우리의 기본 개념은 상당히 수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교회에 다니는 상당수의 성도들이 한 달란트 받았던 자의 생각을 똑같이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무슨 꿍꿍이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주인이 준 돈을 가지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것이 자기의 것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해 봤자 자기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았던 자처럼 그 돈을 열심히 불려 줄 생각이 아예 없었다. 누구 좋은 일 하려고 그 돈을 불리겠어 하면서 그는 그 돈으로 일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그 은전들을 고리대금업자에게도 맡기지 않았다. 다만 그 돈을 축내지만 않으면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땅 속에 파묻어 두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훗날 주인이 돌아왔을 때에 그것을 그대로 꺼내어 주인의 손에 안겨 주었다. 그렇다면 그 종은 선한 종인가 악한 종인가?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평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주인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악한 종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도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 결산할 때에 자기가 남긴 것 만큼을 자기에게 도로 준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고 그때 주었던 자본금까지도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사실을 몰랐다. 참으로 어리석은 종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자신이 섬기고 있는 주인이지만 주인이 어떤 분인지를 도무지 알지 못한 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주인을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자기를 실컷 부려먹고 그 이익만을 챙기는 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 주인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것을 종들에게 줄 것인지를 생각하고 연구한 끝에, 내려 준 방법이 바로 미리 달란트를 맡겨보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가 감당할 수있는 분량 만큼의 달란트를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를 더 남긴 종이나 두 달란트를 남긴 종이나 둘 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 충성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들은 주인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시 주인이 돌아올 때에 어떻게 하면 주인을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무런 이유없이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분량의 돈을 맡겼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에 주인이 그들에게 맡긴 돈의 액수는 어마어마하게 큰 것이었다. 왜냐하면 한 달란트는 은 34kg 정도 되는 돈으로서,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데, 그때 주인이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주었던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결국 1달란트는 노동자의 20년치 품삯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니 한 달란트 받은 자라도 기본 자금은 넉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이라도 이렇게 생각했어야 했다. 주인이 나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어마어마한 돈을 맡기실 때에는, 나에게 어떤 기대나 각오 그리고 결단이 있었을 것이 아닌가 하며 생각했어야 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형편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렇게 많은 달란트를 받을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왜 그렇게 많은 것을 맡겨 주셨는가를 한 번쯤은 생각해 봤어야 했다. 그래서 주인의 기대와 바램에 부응하는 자가 되기를 사모해야 했던 것이다. 최소한 아무런 조건없이 그 많은 돈을 자신에게 맡겨 준 주인에게, 똑같이 보답하려는 마음이나마 가졌어야 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와 두 달란트를 받은 자는 그러한 마음을 똑같이 가졌지만, 한 달란트를 받았던 자는 주인을 나쁜 고리대금업자요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해 가는 가혹한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는 아예 처음부터 일하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찌하든지 그것을 잘 보존해 놓았다가 주인에게 돌려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그 많은 세월 동안 그것을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보관하였으니 땅속에 묻어 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러한 생각 속에서 열심이 나오겠으며, 충성스러움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그는 주인을 더 부자되게 하려는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 돈을 가지고 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의 기저에는 자신의 게으른 습관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는 주인을 이롭게 하는 것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기가 땀 흘려 주인을 위해 일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날 결산 때에 그는 주님으로부터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쫓겨난 곳은 어디인가?

  그렇다면 한 달란트를 받았는데 그대로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고스란히 그대로 바친 종이 주인으로부터 들었던 결산의 말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가 악하고 게으르다는 것이다. 그가 악하다고 한 것은 그가 주인을 매우 곡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주인을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종들을 부려먹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악덕 고리대금업자 정도로 알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고 있는 주인은 사탄 마귀인 것이지 결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시 우리에게 자본금을 그냥 무료로 대주시면서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받아 누릴 것을 장만하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달란트를 받았던 자가 쫓겨나게 되었던 장소는 대체 어디인가? 성경에 보니, 그곳은 '더 바깥 쪽의 어두운 곳'이다(마25:30).

  그런데 새 예루살렘 성 밖도 크게 세 가지 종류의 각각 다른 장소가 있었다. 첫째는 그냥 '성 밖'이다. 이곳은 미련한 다섯 처녀가 남겨진 장소요 버려진 장소다(마25:10). 하나님의 임재를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장소가 바로 그 성 밖인 것이다. 둘째,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쫓겨난 장소로서 '바깥 어두운 데'가 있다(마25:30). 그런데 이 표현은 비교급으로서, '더 바깥의 어두운 곳'이다. 그런데 이 장소는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종류의 지옥에 떨어져 이빨을 갈게 되는가? 그것은 마태복음에 보니 세 종류다. 첫째로, 예복을 입지 않고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갔다가 쫓겨난 자로서 그는 손과 발이 묶인 채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게 된다(마22:13~14). 둘째로, 주의 종들이기는 한데, 주님이 늦게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는 세상의 친구들과 함께 쾌락을 쫓아갔던 악한 종이 있다(마24:51). 그런데 이 친구는 채찍질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까지 받을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있다. 그는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났다. 하지만 그는 손발이 묶이지도 않았으며, 채찍질을 받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을 받지도 않았다. 지옥은 이처럼 각각의 장소가 있다. 셋째로, 불이 타는 장소에 떨어진 자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은 믿음 있는 자라 말하지만 행함이 없는 거짓된 믿음을 소유한 자로서 '가라지'이자 '염소'다. 그렇지만 세 군데의 장소 공히 성 밖에 있는 장소들인 것이 분명하다.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이며, 형벌 받는 곳이자, 항상 불과 유황이 타는 못이다. 그러기에, 지옥에서도 차등 형벌이 존재한다는 것을 여기서도 파악할 수 있다. 

 

6.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럼,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달란트의 비유를 들으며, 어떤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내게 과연 어떤 달란트가 주어졌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이기도 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게 해 주는 자본금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했다면 이제는 그 사명을 따라 충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 것은 우리를 부려먹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이용해 하나님 자신의 실속을 챙기기 위함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보다 더 넉넉한 자본금을 확보하여, 하늘나라의 것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달란트를 가진 자가 가져야 할 첫 번째 생각은 하나님을 나쁜 분 혹은 악한 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과 죄인이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낮고 천한 피조물의 형상을 입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능력도 스스로 제한하시면서 기꺼이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이나 사명에 대해 불평 불만하지 말자. 달란트가 클수록 하늘에서 우리가 받을 상이 크다는 것을 생각하자. 그리고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았던 자가 충성했듯이 우리도 충성하자. 

 

7. 나오며

  그동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어 우리를 부려먹으려 하는 것이로구나 하고 말이다. 그러나 아니다. 그와 정반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려먹으시려고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 들어가서 더 큰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직분도 주시고 달란트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끝까지 잘못 생각하여 우리가 받은 직분이나 달란트를 하나님께서 우리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물질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계속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결국 그 날에 한 달란트 받았던 자의 운명에 처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달란트와 은사와 사명을 주신 것이다. 첫째, 우리가 죽을 때에 반드시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주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주인이 칭찬할 때 하신 내용과 같다. "네 주인의 즐거움 안으로 들어오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우리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될 때에는 거기에서 우리가 차지할 기업과 거기에서 누릴 영광을 위해 그것을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복과 아울러 거기에서 우리가 왕 노릇할 자가 되게 하도록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달란트와 은사와 사명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와 은사와 사명이 클수록 그것을 자신의 짐이나 부담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을 축복을 위한 기본 자본금이라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을 가볍게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달란트를 기대하고 그것을 가지고 활용하는 자는 그날에 우리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칭찬을 듣고 상급을 받게 되어 하늘의 기쁨이 가득차고 넘치며 충만하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9월 05일(주일)

정병진목사

 

 

누가 열린 새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하여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나아갈 수 있는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새 예루살렘 성의 문에 천사들이 경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들어갈 성에 왜 천사들이 그 성의 문을 지키고 있는가? 그리고 그 문은 보석들로 만들어진 문이 아니라 진주로 만들어진 문들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죽는 날, 그 성 문은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열 처녀의 비유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20210-09-03(금) 금요기도회
제목: 바른종말신앙(17) 열 처녀의 기름준비 여하에 따른 문(門)의 두 가지 역할(마25:1~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Uxo_ZegblQU [혹은 https://tv.naver.com/v/22255868  ]

 

1. 들어가며

  문은 보통 출입구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천국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은 그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마25:1~13)를 보면, 문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참여여부를 결정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문이 성 안에 들어가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문이지만, 성밖에 버려진 자들에게는 심판의 문으로 쓰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문'은 대체 어떠한 문이며, 이 문은 과연 두 종류의 처녀들 곧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에게게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문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열 처녀의 비유에 등장하는 '문(門)'은 대체 어떤 문인가?

  마25장 1~13절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우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문을 통하여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갔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그 문을 통과하지 못한 채 그냥 문 밖에 버려짐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문(門)은 대체 어떤 문인가? 본문에 등장하는 '문(門)'은 혼인잔치를 치르게 될 신랑집의 문을 가리킨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문은 신부집의 문이라고 생각해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집 안에 대기하고 있는 신부를 위하여, 신랑을 맞으러 나가도록 신부의 들러리 10명이 집 밖으로 마중 나갔던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하지만 성경을 정확히 보니, 그게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 집이 신부집이었다고 한다면, 신부를 대신하여 들러리를 나갔던 모든 처녀들은 그간 수고했다고 집 안으로 들어오게 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식을 제공받아야 마땅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랑이 문 밖으로 나와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데리고 들어간 후에 문을 닫아버린다. 그리고 뒤늦게 와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라고 외치는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신랑은 그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만약 그 집이 신부집의 문이었다면 문을 열어주고 안 열어주고 할 수 있는 권한은 신부에게 있거나 신부의 아버지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부를 위해 그동안 고생한 들러리를 집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이 집은 신랑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집이 신랑 집이었기에 신랑이 그 집의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랑 집의 이 문(門)은 영적으로 볼 때 어떤 문(門)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신랑이 누구냐에 따라 그 문의 성격도 달라진다고 말할 수 있는데, 결론적으로 이 문은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문에 등장하는 '신랑'은 종말의 때 곧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신부를 맞이하는 당사자이시다. 왜냐하면 신랑은 종말의 때에 우주적인 교회에게 혼인잔치를 하려고 이 땅으로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신랑은 교회의 영원한 신랑이 되실 우리 주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집은 신랑의 집이기기 때문에 예수님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예수님의 집은 과연 어떻게 불리게 되는가? 그것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불라게 된다. 그러므로 열 처녀의 비유에 등장하는 '문(門)'이란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누가 문(門)을 통과하여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가?

  누가 문을 통하여 어린양의 혼인잔치 예식에 참여하게 되는가? 그것은 그날 신랑의 신부가 될 자들이다.  일명, '이기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고(계21:7),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택함을 받은 자들(계21:2,9)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오늘의 비유에서는 열 처녀들 중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 해당한다. 이들은 어린양의 피에 자신의 더럽혀진 옷을 깨끗히 빨았던 자들이요(계7:14), 자기 자신 안에 더이상 죄가 남아있지 않는 자들이다. 왜냐햐면 날마다 어린양의 피에 자기 자신의 옷을 빨고 있었기 때문이다(현재분사형)(계22:14). 그러므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또렷히 있는 자들이다(계21:27). 

 

4.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은 어떤 문인가?

  그렇다면, 장차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치러질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는데 필요한 문은 대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간 신부의 자격에 관한 말씀이 나오는데(계21:27), 그때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가지, 어린양의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자라야 한다고 했다. 고로 이 문의 역할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을 안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하는 최종 관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서 그가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면 그의 영광은 한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만일 그 성 문 앞에서 자기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아서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성 밖에 남겨지거나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빨을 갈든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 그는 결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성 밖에 버려진 존재, 성밖에서 형벌을 받는 존재, 영원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할 존재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어린양의 신부가 되도록 그토록 많은 기회를 주셨는데 그것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한편,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이 성의 문에 관한 좀 더 많은 정보가 있다.

  첫째, 이 성의 문은 동서남북에 한 개씩만 있는 문이 아니라, 각 방향마다 3개씩 있어서 동서남북의 문들을 각각 합치면 총 12개나 된다는 것이다(계21:13). 그러므로 이 성의 문은 누구든지 동서남북에서 다 오더라도록 참여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그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은 틀린 것이다. 주님의 우주적인 오심(파루시아)의 때에 우리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을 말이다(마8:11~12).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에는 이방인이 그 잔치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될 것이고,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 잔치에 못 참여하게 될 것이다. 둘째, 이 문들 위에서 12명의 천사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계21:12). 왜 그런가? 천국에 악한 영들 곧 귀신들이라도 몰래 쳐들어오거나 공격하기 때문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문은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인 전투천사들이 방어할 것기 때문이다. 귀신들과 싸우는 대상은 전투천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12천사들은 어떤 천사들인가? 그들은 바로 천국의 경비담당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을 지키고 있는 천사는 경비담당 천사들로서 출입을 통제하는 천사들인 것이다. 그럼 왜 12천사들이 이 성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문을 두루도는 화염검을 가진 천사가 경비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이 천사들은 사람이 못 들어오게금 출입을 통제하는 것이지 외부에서 침입하는 귀신들과 싸우기 위해서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어떤 누군가가 그 성 안으로 못 들어가도록 막는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이 문은 진주 문이라고 되어 있다(계21:21). 왜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은 진주 문인가? 왜 그 문은 금으로 된 문도 아니고, 은으로 된 문도 아니며, 12가지 보석으로 만들어진 문도 아닌가? 왜 그 문은 진주로 만들어진 것인가? 그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진주는 사실 자신의 연한 살결에 모래 알이 들어와 상처를 낼 때에 그것에 반응하는 조개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상처와 고통과 아픔의 결과물이 바로 진주인 것이다. 주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이 땅에 고통받고 외면당하고 핍박 당하는 성도들의 눈물이 모여 진주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준비한 기름이다. 진주는 사실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말해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통당하고 핍박하고 심지어 죽임당하는 순간에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주님을 시인했던 증거가 바로 진주문이 되어 눈 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 성의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자는 대체 누구인가? 좀 전에서 언급했지만 그들은 한 마디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라고 하겠다(계21:27). 그러므로 경비 천사들은 사람들이 그 성의 문으로 나아올 때에 성 안으로 들여보내주거나 그렇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한다. 물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정하심과 허락하심 하에서 일어나는 일들일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천국에 가보시면 알겠지만, 천국에서 천사나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종)로서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혹 인간이 천사보다 한 단계 더 낮은 지위를 갖고 있다면, 천국이라고 해도 그 천사를 함부로 부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자신의 권한 하에 주어진 천사들을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천사들이나 인간들은 천국에서 서로 공손한 말을 한다. 물론 이 땅에 보내어진 천사들을 구원얻을 후사들(상속자들)을 섬기라고 보내어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사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게 되어 있다. 혹시 천국에 가브리엘이나 미가엘 천사장을 보았다면 그들은 상당히 높은 계급을 가진 천사들로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자가 이리 오라 저리 가라고 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5. 이 성의 문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가?

  고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검사를 맡는 장소는 바로 새 예루살렘 성 문 앞이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기는 자 곧 거룩한 신부들만이 그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서 살 자이자 어린양의 신부가 될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 천사장의 호령에 이어, 신랑되신 예수께서 밖으로 나와서(재림하시어) 그들을 데리고 들어간다. 그러므로 이때 슬기로운 자들에게 이 문은 영원한 "구원의 문"이 될 것이다(마25:10, 눅13:23~25). 왜냐하면 이 문은 그들에게 영원히 걱정 근심 슬픔 눈물, 아픔과 사망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완전한 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이 어떤 자들에게는 "심판의 문"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는 이 문을 앞에서 저지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미려한 다섯 처녀들에게 이 문을 심판의 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5:9). 그러므로 그날 미련한 처녀들에게 이 문은 심판의 문이 될 것이다. 영원히 주님과 교제가 단절되는 것을 알려주는 문이 될 것이요, 걱정 근심 슬픔 눈물 그리고 아픔과 사망이 없는 새 예루살렘 성이 어떤 곳인지를 뼈져리게 알게 해 주는 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6. 나오며

  그날이 우리에게 가까워지고 있다. 주님은 이미 문 앞에 와 계신다고 하셨다(마24:33). 여기서의 문은 어떤 문인가? 이전에는 몰랐지만 이 문이 바로 새 예루살렘 성의 문인 것이다(계21:9, 22:14~15). 보좌에서 내려오시어, 이미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과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지상으로 재림하시기 위해 그분이 지금 새 예루살렘 성 문 앞에 서 계시다는 뜻이다. 고로 우리 중에는 가까운 미래에 주님의 재림을 목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른지도 모른다. 그날 그 문은 우리에게 어떤 문이 될 것인지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보니 그 문은 "열린 문"이라고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열려있었기 때문이다(계3:8). 왜냐하면 그 교회 성도는 적은 능력을 지녔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그 문은 닫힌 문이 될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은 자는 기본적으로 그 문은 닫힌 문이 될 것이고(계3:20),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도 역시 그 문은 닫힌 문이 될 것이며, 맡겨진 일에 충성하지 못한 자,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도 그 문은 닫힌 문이 되고 말 것이다. 오늘 본문처럼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에게 그 문은 영원한 닫힌 문이 될 것이다. 그렇다. 지금부터라도 기름등불을 잘 준비하자. 주님이 언제 오시더라고 활활 타오르고 있는 등불을 지녀 어둠을 뚫고 신랑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보자. 건투를 빈다. 

 

2021년 09월 03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종말신앙(16)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열 처녀에게 꼭 있어야 할 기름은 무엇인가?(마25:1~13)_2021-09-03(금)

https://youtu.be/5jZ_zWOELI8  [혹은  https://tv.naver.com/v/22243488 ]

 

1. '열 처녀의 비유'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미련한(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신랑이 신부를 취하기 위해 자기 집에서 나와서 예비 신부들을 데리고 들어가려 하는 시각에, 같이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기름이 없어 등불이 꺼져 가고 있었기에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말을 듣고서 자기들도 자기의 등에 채워 넣을 기름을 사기 위해 어디론가 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시간에 문은 닫히고 말았던 것이다. 

 

2.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는 바 열 처녀에게 꼭 있어야 했던 '기름'은 어떤 것인가?

  보통 사람들은 열 처녀에 꼭 필요한 기름을 '믿음, 선행, 성령' 혹은 '성령충만'이라고 언급한다. 또 어떤 이는 '성령의 열매, 회개의 열매'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열매'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은 '기름'이란 성령이 오히려 더욱 더 활활 타오르게 해 주는 어떤 재료여야 하는 것이지, 성령이 일한 어떤 결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열매'는 성령께서 일하신 어떤 결과물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결과물들은 장차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그 사람의 상급(천국집, 면류관, 보좌 자리)을 결정짓는데 작용하는 요소인 것이지,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게 해 주는 요인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말해 주고 있는 기름은 첫째, 꺼져 가는 등불이 계속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해 주는 어떤 것, 즉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 주는 어떤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둘째, 이 기름은 그냥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반드시 댓가를 지불하고서 사야 하는 어떤 것이다. 자신의 기름이 부족하다고 해서 남의 것을 그냥 빌려다 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자기가 확실히 값을 주고 산 것이라야 한다. 셋째, 이 기름은 언제든지 신랑이 나오면 그분 앞으로 나아가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는 어떤 것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있는 말씀(계22:14~15)에 따르면, '회개'라고 할 수 있다. 자기의 두루마기를 빨아야 언제라도 주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알려주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그렇다. 기름은 회개하여 자신을 멸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어떤 것이다. 넷째, 이 기름은 혹 주님의 재림이 지연된다고 할지라도 언제라도 주님이 오시면 곧바로 주님을 영접할 수 있게 해 주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3. 자신은 그 기름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 기름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혼인 잔치의 문이 닫힌 후에 열어 달라고 외치는 열 처녀의 비유 말고도, 구원의 문이 닫힌 후에 열어 달라고 외치지만 집주인인 예수께서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한 채 있다"라고 하는 또 다른 본문(눅13:25~27)에서, 우리는 기름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눅13:25-27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저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서 '집주인'은 26절에 나오는 바로 '주님'이신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그때 그들을 모른다고 하실 분은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이 말씀의 핵심은 이렇다. 겉으로 볼 때 자신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그분과 교제하였으며 가르침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자신은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실제로 주님께서는 그를 알아온 채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 핵심 포인트다. 그렇다,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민족이라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역시 아니다.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신앙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평소의 삶 가운데에 있었는가가 중요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 밖에 남겨질 자들은 그 날과 그 시까지 자신이 그러한 존재가 될 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과거가 당연히 자신을 구원받게 해 줄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날에 그들은 버림을 받은 것이다. 고로 그 '기름'이 아닌 것은 겉으로 볼 때에는 그동안 줄곧 주님과 함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것은 기본이었을 것이고, 교회에 나가서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드리고, 제자 훈련도 받고 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그는 버림을 받는다. 

 

4. 열 처녀가 갖고 있었어야 했던 '기름'은 대체 무엇인가?

  고로 열 처녀가 가지고 있어야 했던 기름이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고자하는 개인의 계속적인 몸부림이요, 회개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들었을 때에 자신의 마음 가운데 부딪혀 오는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을 고치고자 하지만 그것을 고치려 하지 않는 자신을 보고서 금식하며 작정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의 간절한 호소를 들으면서도 그것에 반응하지 않는 자신을 보면서 눈물로 호소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반응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기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소절의 찬양도 기름이 될 수 있고, 나 같은 죄인을 살려 주기 위해 주님께서 고통 당하신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하여 이렇게 살아보겠노라고 다짐하는 눈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다짐으로만 끝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졌을 때에 비로소 그것은 진실한 한 방울의 기름이 되는 것이다. 

 

5. 혼인 잔치에 참여하려면 내게 기름만 있으면 되는가?

  그런데 여기서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의 기름만으로는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기름과 함께 등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마25:4). 내가 회개하면서 주님의 책망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지만 성령과 무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여 어떻게 해서든지 거룩한 성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몸부림을 성령께 드림으로서 등불이 활활 타오르게 해야 한다. 고로 성령과 무관하게 스스로 행하는 회개나 금식이나 순종은 사실 헛된 것일 수 있다. 성령과 함께, 성령의 음성과 함께, 성령께서 보시고 기뻐하시고, 성령께서 보시고 흡족하게 하는 회개가 되고, 금식이 되며, 순종이 될 때 그것은 기름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보충된 기름으로 인하여 성령께서 활활 타오르게 될 때에 그는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2021년 09월 03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바른종말신앙(14) 새 예루살렘 성 바깥은 지옥인가(마25:1~13)_2021-09-01(수)

아침묵상입니다.https://youtu.be/Nhob-SNkymo  [혹은 https://tv.naver.com/v/22220770  ]

 

1. 천국 곧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누가 들어가는 곳인가?

  천국 곧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를 보면, 신랑의 오심을 잘 준비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들어간다(마25:10). 그런데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간 처녀를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의 신부'라고 표현하고 있다(계21:2,9). 다시 말해서, 열 처녀의 비유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혼인잔치는 바로 그 성 안에서 진행된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7년 대환난 기간 중에 공중에서 펼쳐진다는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신부가 신랑의 집인 거룩한 성에 들어갈 때에 혼인잔치가 진행되는 것이며, 그때 성에 들어간 처녀의 신분이 어린양의 신부이자 어린양의 아내로 변하는 것이다(계21:9).

 

2. 예루살렘 성 안에는 누가 들어갈 수 없는가?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를 보면, 예루살렘 성 안에는 미련한 다섯 처녀가 못 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니,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 남겨진 자들이 누구인가를 보니 첫째, 회개하지 못해 자신의 죄를 씻음받지 못한 자들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성 밖에 있다(계22:15). 그리고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도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계21:27). 그렇다. 성 밖은 누가 들어가는가? 죄를 지었으나 자기를 두루마기를 빨지 못해서 옷이 더럽힌 자들이 들어가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고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겨진 것이다.

 

3. 성 밖은 천국인가?

  성 밖은 결코 천국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오직 새 예루살렘 성만을 천국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마4:17, 계21:14~15). 그곳에는 눈물도, 사망도, 애통하는 것도, 곡하는 것도, 아픈 것도 다시 있지 않다(계21:4).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자기의 더럽혀진 두루마기를 빨아야 하는 것이다. 죄를 남김없이 회개해서 더러운 옷을 예수님의 피로 씻어내야 들어가는 곳이 거룩한 성인 것이다.

  그렇다면 미련한 다섯 처녀가 들어가지 못하고 남겨진 '성 밖'이란 대체 어떤 곳인가? 주님께서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 그것을 사러 간 동안에 성 밖으로 나오셔서 여분의 기름까지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주여 주여"하면서 열어달라고 외치는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성 밖에 남겨진 처녀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마25:12)" 그렇다. 성 밖은 주님의 임재가 없는 장소다. 주님의 임재를 상실한 곳이 바로 성 밖인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그렇다고 이곳을 천국의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주님의 임재가 없는 곳을 어찌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게 주신 말씀에 보면, 이기는 자라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한다고 하셨다(계2:7). 그런데 성 밖은 둘째 사망이 있는 곳이다. 이기는 자만 둘째 사망을 받지 아니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째 사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사망'이 육체와 영혼이 영원히 분리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둘째 사망'이란 하나님와 우리 사이가 영원히 분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임재를 잃어버린 성 밖을 천국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곳은 실질적인 '지옥'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4. 주님께서는 성 밖에는 어떤 종류가 있다고 말씀하셨는가?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성 밖에는 3종류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첫째, 열 처녀의 비유에서는 '문 밖'(곧 영적으로 새 예루살렘 성의 12진주문 밖)이라는 장소가 나온다(마25:10). 그리고 둘째,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바깥 어두운 데'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장소가 있다(마25:30). 마태복음 24:51에 보면, 슬피 울며 이빨을 가는 장소는 또한 채찍질을 당하고 외식하는 자가 벌받는 장소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이곳을 '천국'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순 없다. 이곳은 지옥의 한 켠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곳은 형벌 받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는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이라고 장소가 나온다(마25:41). 이곳이야말로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임이 정말 분명하다. 고로 우리는 성밖은 지옥이라고 말해야 하고, 다만 지옥에도 차등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주님의 임재가 없는 곳, 형벌을 받는 곳, 영원한 불이 타오르는 곳. 왜냐하면 이처럼 지옥도 다양한 장소가 있는 것이다. 

 

5. 어떻게 하면 우리도 장차 거룩한 성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천성에 들어가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다. 예수님을 믿고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킬 뿐만 아니라 철저히 회개하는 것이다(계22:14). 회개 없이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성 밖에 남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형벌 받는 장소로 쫓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불과 유황이 타는 못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어떤 형식이든지 그곳은 한 번 그곳으로 떨어지면 결단코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장소다. 고로 우리는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철저한 회개생활만이 천성에 입성하는 온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룩한 성에 들어가더라도 거기에는 왕노릇하는 자도 있고 섬기는 자도 있다(계21:24, 마20:26~27). 그러나 천국에서의 신분이나 지위는 이 세상에서의 상하관계, 주종관계와는 완전히 다르다. 비굴함이나 수치심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 보다 더 충성해야 한다. 착하고 충성된 자라야 열 고을의 권세도 차지할 수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눅19:17). 날마다 회개하라. 그리고 죽기까지 충성하자. 이것이 우리의 미래를 가장 잘 대비하는 방법인 것이다. 

 

2021년 09월 01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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