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3(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도 과연 악한 영들이 있었을까?(행15:36~4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E_ek8LbBS3k  [혹은 https://tv.naver.com/v/30826490 ]

 

1. 들어가며

  과연 최고로 영성이 깊었던 대사도인 사도 바울에게도 과연 악한 영들은 역사하고 있었을까? 우리가 육적인 시야만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잘 모를 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라 할지라도 깨끗한 영안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사정을 달라진다. 그러므로 만약 지금이라도 마음이 청결하고 깨끗한 사람이 된다면, 우리에게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영안으로 진단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 그러한 영성을 가진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중심으로, 과연 바울 속에 과연 어떤 악한 영들이 역사하고 있었는지를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에게는 어떤 악한 영들이 역하고 있었던 것일까? 

 

2. 사도 바울에게 역사했던 악한 영들은?

  아무리 뛰어난 영성을 가진 사람이 할지라도 악한 영들이 하나 없는 완벽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혹시 만약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분은 사람으로 오셨던 주 예수님 뿐이실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는 악한 영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나 사실은 성경기록만을 보더라도 얼마든지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볼 악한 영들은 성경에 기록된 것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러니 실제는 이보다 악한 영들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분명히 알 것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처음부터 악한 영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자식을 태중에 잉태하는 순간부터 악한 영들의 공격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도 바울 속에는 어떤 영들이 역사하고 있었을까? 악한 영들 중에서 바울에게 역사했던 영을 큰 영 내지는 숫자가 많이 들어 있는 영의 순서로 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바울에게는 '교만의 영'이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울의 몸 속에 사탄의 사자(천사) 곧 가시를 넣어두신다고 했기 때문이다(고후12:7).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교만해 질 수 있기 때문에 주께서 그것을 아시고 그에게 사탄의 사자를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도 처음에는 자신에게 역사하고 있는 영 곧 육체의 질병을 일으키는 영을 쫓아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무려 세 번씩이나 기도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바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다. 그리고 오히려 주께서는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왜냐하면 내 능력은 약한 때에 완전하여 지기 때문이다"고 말씀해 주셨다(고후12:9). 고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죽는 날까지 교만의 영이 역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바울에게는 '논쟁하게 하는 영'도 있었다. 사도 바울은 사실 정말 많이 배운 사람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예루살렘에 유학온 유학파였다. 그리고 당시 바울은 최고의 율법교사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의 대가였다. 한 마디로 율법에 대해서는 실력파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라틴어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다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사람이든지 만나면 그 나라의 언어로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다. 이처럼 바울은 많이 배웠을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만나서 대화를 할 수 있었기에, 그에게는 항상 논쟁하게 하는 영이 뒤따라다녔다. 예를 들어보자. 그의 전도여행 가운데 가장 논쟁했던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아마도 2차 전도여행 중에 만났던 아덴(아테네)이었을 것이다. 그는 거기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의 논쟁을 벌였다(행17:18). 그래서 당시 철학자들은 그를 '말쟁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그는 말로서 다른 사람에게 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처럼 논쟁하게 하는 영이 있었던 것이다. 

  셋째, 바울에게는 '우울의 영'이 역사하고 있었다. 바울을 영성이나 실력이나 능력 면에서 보면, 그는 베드로를 능가하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베드로의 율법주의적 삶을 책망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최대의 약점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육체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바울은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있을 때에 12사도로 부르심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른 12사도들에게 뒤질 정도의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늘 못 마땅하게 여기거나 그를 비난하는 자들은 바울을 진정한 사도가 아니라고 말했다(고전9:2~5, 고후11:5~6, 12:11). 그러므로 그는 이 일에 대해 많은 변명을 해야 했다. 그는 사실 많이 우울해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죽는 그날까지 늘 우울의 영이 붙어다녔다. 

  넷째, 그에게는 '혈기 분노의 영'도 있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 가운데 가장 애석한 모습을 사도행전 15장에서 볼 수가 있다. 그것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에 수행원으로 누구를 두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바나바와 심각하게 다투었다는 점이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했지만, 바울은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서로 한 치의 양보를 하지 않았다. 결국 둘은 심히 다투었고 피차 갈라서게 된다. 이때 사도 바울에게도 혈기 분노의 영이 역사했던 것이다. 사실 바울에게 있었던 혈기 분노의 영은 이미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일 때부터 바울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했었다.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너무나 특심했다. 하지만 잘못된 믿음에서 출발한 그를 혈기 분노의 영이 놔주지 않았다. 

  다섯째, 바울에게는 '솔직하지 못함의 영'도 있었다. 바울은 바나바와 피차 싸운 뒤 서로 갈라져서 각기 다른 전도의 길에 올랐다. 그때에 바울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자로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이 바나바의 적극적인 배려와 추천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적어도 마가 요한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가는 문제를 놓고 바나바와 충돌했을 때에 좀 더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도 바나바에게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는 보다 더 솔직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섯째, 바울에게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는 영'이 있었다. 어느날 바울은 자신을 찾아온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바로 그전에 무슨 일을 했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종인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데 앞장 서왔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많은 괴로움을 느꼈다. 왜냐하면 죄없는 스데반을 죄를 뒤집어 씌워 돌로 쳐죽이는데 정작 자기자신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모함을 받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쓸 때에도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스데반을 죽였다는 죄책감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일곱째, 바울에게는 '주의 영광 가리게 하는 영'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나바와의 다툼은 누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 예수님을 대신하여 파송받은 사역자로서는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때에 사도 바울은 주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은 '잃어버리게 하는 영'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이 바나바와 2차 전도여행을 놓고 피차 싸우는 바람에, 바울은 사실 자신을 후원하는 교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2차 전도여행 초기를 제외하고서 바울은 안디옥 교회로부터 그 어떤 후원금도 받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바나바와 싸음으로 인하여 그는 후원교회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둘도 없는 좋은 사역자 바나바도 랕이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3. 사도 바울에게 역사했던 영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그렇다면 바울에게 역사하고 있었던 악한 영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대체 무엇인가?

  첫째, 이 세상에 온전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성경에서 가장 영성이 뛰어났던 사도 바울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남에게 감추고 싶은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둘째, 교만의 죄는 사람이 죽는 그날까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은 사역자는 더 교만할 확률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도 바울의 행적을 보면 그에게도 자기 자랑의 마음이 있었고,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도 있었으며 그리고 자기자신이 인정받으려는 욕구도 아주 많았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가 있다. 

  셋째, 자신이 가진 장점이 단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사도 바울은 강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악한 영들이 역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혈기분노의 영이 역사하는 통로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많이 배운 지식은 그를 교만하게 만들기도 하였으며, 선교에 대한 열정은 그를 양보심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넷째, 누구든지 조상적부터 내려오고 있는 세대와 가문의 영을 완전히 피해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 있는 큰 악한 영은 교만의 영이요 논쟁의 영이며, 그 다음으로는 우울의 영이자 혈기분노의 영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영들은 다 무당 점쟁이 계열의 영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역시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서 조상적부터 내려오고 있는 악한 영들로서 무당 점쟁이 계열의 영을 많이 갖고 태어난 것으로 판단된다. 고로 바울의 윗대 조상 중에 무당 점쟁이를 가까이 했든지 아니면 무당 점쟁이로 활동했던 조상들이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다섯째, 조상적부터 믿는 사람들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영들보다 자기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더 많은 영들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도 바울은 사실 조상적부터 내려오는 영은 우리나라의 경우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작다. 그러므로 그에게 역사했던 영들은 대부분 자기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더 많이 침투해 들어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는 1~2대만 위로 올라가면 다 불신자이며, 무당을 가까이 했던 민족이기 때문에 우상숭배의 영이 아주 많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악한 영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4. 나오며

  이상과 같이 사도 바울에게 역사했던 악한 영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정말 윗대부터 하나님을 믿는 조상들을 가진 사람들은 참 복이 많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은사를 가진 채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이 죄짓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죄를 짓게되면, 자신의 죄로 인하여 악한 영들을 자기 몸 안에 불러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경우는 이스라엘과는 정반대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의 경우는 거의 다 믿지 않는 불신자일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에 찌들어 있는 조상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경우 이스라엘과 비교해 보았을 때에, 상대적으로 악한 영들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아니, 태어날 때부터 우상숭배에 관련된 영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인 것이다. 고로 우리 나라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난과 질병과 패망의 영들을 몸 속에 지니고 태어난 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세대에 자신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정말 힘겨운 영적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치 않게 되는 것은 지금의 시대야말로 마지막 시대이니만큼 하나님께서 더 많은 은혜와 은사를 주신다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 만 더 회개하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풍성한 은사를 내려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힘들더라도 조금만 더 회개에 힘을 기울여보자. 그리고 주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조금 더 가져보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어느때보다도 더 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회개함으로 내 속에 있는 악한 영들을 내보내고, 또한 하나님께 간구하여 성령의 은사들을 많이 받아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2022년 11월 13일(주일)

정병진목사

 

 

2022-11-06(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함(행위)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요일3:13~18)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BdMJGOwpVoY  [혹은 https://tv.naver.com/v/30583858 ]

 

1. 들어가며

  그리스도인들에게 행위 곧 행함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행함이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받아들인다. 아마도 그것은 종교개혁의 전통에 서 있는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 행함을 우리는 결코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울 수는 없다. 그러나 행함 자체를 터부시하는 것도 옳지 않다. 왜냐하면 행함은 믿음의 행위로서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이 바르고 참된 믿음인지를 알려주는 시금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함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조금 깊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먼저는 율법의 행위와 믿음의 행위를 비교해 볼 것이며,  믿음의 행위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믿음의 행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율법의 행위'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리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은 아예 필요가 없는 것일까? 아니다. 율법은 2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 하나의 기능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먼저 율법의 첫번째 기능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한다.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율법 안에는 그리스도의 모형과 그림들이 가득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능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앞의 것은 율법의 의식법들이 담당하는 기능이요, 뒤의 것은 율법의 도덕법(십계명)이 담당하는 기능이다. 율법 중에 의식법이란 밖으로 표현되어지는 의식적인 법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것에는 할례법, 안식일법, 절기법, 정결법, 음식법, 제사법 등이 있다. 사실 할례부터 제사의 모든 의식법들은 다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려주는 모형론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것을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성령강림 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율법의 의식법들을 지키지 않아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은 정죄하는 기능은 여전히 살아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도들은 율법의 도덕법인 십계명을 통하여 자신이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회개함으로 죄사함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전부가 다 율법의 의식법들을 지키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고, 예수님을 믿는 것에다가 율법의 의식법들을 준수해야 의롭게 된다고 믿는 것이 유대 율법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A.D.49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해서 그것이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이 결의된 바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가 필요없다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이상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아니 된다. 율법에서 도덕법은 여전히 살아있어서 이것을 통해 자신이 죄인인 것을 발견하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율법의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죄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는 마지막 심판에서 죄인으로 드러나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계21:8).

 

3. 율법의 행위와 믿음의 행위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율법의 행위와 믿음의 행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위에서 살펴보았지만 '율법의 행위'는 의롭다함을 얻기 위하여 율법의 의식법들을 준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믿음의 행위'이란 이미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얻은 자가 자신의 믿음이 식어지지 않기 위하여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전파하기 위해 살아가면서 나타난 결과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믿음의 행위'는 그것을 구원얻기 위한 수단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구원얻은 자가 믿음을 따라서 살면서 나타나는 결과물들이기 때문이다. 한편 천주교에서도 일종의 행위를 강조하는데 그것은 구원얻기 위한 공로를 강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안 되며 자신이 이 세상에서 지은 죄값을 처리하여, 그 죄값보다 선행과 공로가 더 많아야 연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죄보다 더 의로운 삶을 더 많이 산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자신의 공로가 부족하여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연옥이라는 일종의 형벌과 연단의 장소에 떨어져서 죄값을 치른 후에 천국에 들어간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중세시대에 이런 자들이 곧바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면죄부를 판매했을 때에 그 면죄부를 사서 자신의 부모를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려보내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미 죽은 자의 운명은 절대 바꿀 수 없는데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천주교의 구원은 믿음만으로는 안 되고 죄보다 공로가 더 많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주교에서는 선행과 구제, 금식과 기도, 고행 등을 천국가는 방법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행위구원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4. 믿음의 행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구원얻기 위해 수단이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서 응당 나타나는 열매로서 믿음의 행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것은 보통 다음과 같은 4가지 것들이 있다.

  첫째, 믿음이 식어지지 않기 위해서 행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한 것에는 말씀읽기, 말씀묵상하기, 기도하기, 그리고 예배하는 것 등이 있다.

  둘째,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서 행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한 것에는 고난과 핍박이라도 달게 받는 것, 고난을 견뎌내는 것, 순교하는 것 등이 있다.

  셋째, 믿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한 것에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먹는 것과 입는 것과 자는 것을 포기하는 것,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평안한 삶을 내려놓는 것, 그리고 누리는 살을 잠시 내려놓는 것, 복음전파를 위해 청빈한 삶을 사는 것도 기뻐하는 것 등이 있다. 믿음이 식어지지 않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나 그것을 지켜내기 위한 것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하는 소극적인 행동이라면 믿음을 전파하기 위해 행하는 것은 보다 적극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믿는 자 답게 살아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들로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사회봉사를 실천하며, 형제를 돌아보며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형제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것 등이 있다. 

 

5.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행위'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행위'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행위'는 자신의 의롭다함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며, 또한 구원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이것은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켜내기 위해 그리고 믿음을 전파하고 자신이 믿는 자 답게 살려고 할 때에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자연발로적인 행동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믿음의 행위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판단할 수 있다. 

  첫째, 내가 과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온 자인지를 확인시켜 주는 도구가 된다. 즉 그것은 자신이 진정 구원받은 자인지를 알려주는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온 자가 아니라면 그에게서 믿음의 행위들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러한 것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이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은 자가 아닌데, 어떤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믿어지지 않는 부분을 보충하려는 한다면, 그는 믿음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 내지는 공로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내가 지금 구원의 노정 가운데 올바르게 구원의 최종지점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된다. 구원받은 자는 구원받은 자 답게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구원받은 자답게 살지 않고 있는데도 자신을 믿음이 있으니 구원받은 자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구원받은 자는 당연히 그가 구원받은 것에 합당한 열매들이 맺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믿음의 행위들이 있다는 것은 그가 구원을 향해 바르게 가고 있다는 표시가 된다. 

  셋째, 만약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된다면 그의 믿음의 행위들은 결국 천국에서 상급이 된다. 믿음의 행위들은 하나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천국에 올아가 천국에서 살 내 집을 마련해주고, 어떤 것은 내가 받을 면류관의 기준이 되어줄 것이다. 결국 믿음의 행위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에게는 영광스러운 상이 되는 것이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참고하라.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빌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딤후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6. 나오며

  중세 로마카톨릭이 잘못된 행위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다보니 오늘날의 개신교회에서는 '행위'라고 말하면 이내 손을 절래절래 흔들어버린다. 왜나하면 사람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음에도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서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면 그 누구든지 자신의 행함으로 구원얻으려고 시도하는 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힘쓰는 자들이 아니다. 이미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그리고 믿는 자 답게 살아가기 위하여 믿음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행하는 믿음의 행동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면 아니 된다.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우리 모두는 자신이 행한 대로 보상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행위는 정말로 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았는지 알려주는 표지가 되어줄 뿐만 아니라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는 우리가 받아 누리게 될 귀한 상급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주안에서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구원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믿음의 행동은 구원의 표지와 천국에서의 상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22년 11월 06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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