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5(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도행전강해(106)[최종회] 사도행전의 기록은 왜 미완성으로 끝맺고 있는가?(행28:30~3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oU9n_guvGYU [또는 https://tv.naver.com/v/32964369]

 

1. 들어가며

  오늘은 사도행전 강해 마지막 시간이다. 사도행전은 총 2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도행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어떻게 땅끝까지 확장되어 갔는지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들의 역사서다. 특히 사도들의 복음 전파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책 제목도 역시 '사도행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을 때에는 사도들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의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하여 파송한 사람들로서 이들을 '사도(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은 어떤 사도를 중심으로 복음이 증거되었는가? 그리고 과연 사도행전은 어떻게 마무리되고 있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행전은 바울에 의해 로마에서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미완성이자 현재 진행형으로 끝마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도행전의 저자는 미완성으로 사도행전의 기록을 마치고 있는가? 오늘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시간이니만큼 사도행전의 전체 이야기를 조망해 보고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복음 전파의 사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사도행전은 대체 어떤 기록인가?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서다. 그중에서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왜 사도들이 많은데, 사도행전은 굳이 베드로와 바울 사도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되고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시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쓰시는 전도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사명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모든 복음 전파는 믿는 이들을 통해서 증거되는 것이지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보낸 자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복음 전파를 위해 구별된 두 사람 곧 두 사도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베드로의 복음 전파 사역이 사도행전의 전반부(1~12장)를 이루고 있고, 바울의 복음 전파사역이 사도행전의 후반부(13~28장)를 이루고 있다.

 

3. 복음 전파의 두 기둥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왜 우리 주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바울을 복음 전파의 기수로 사용하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작정하심에 의해서 결정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이라고 하겠다. 그렇지만 두 사도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복음전파의 두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우리 주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베드로를 비롯한 12사도들을 선택하신 일부터 정리해 보자. 주님께서 이들을 사도로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이들을 통해 천국복음을 전파하게 함이었다. 그런데 이때 천국복음의 핵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 예수께서 대체 누구시며 이 땅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증언하는 것이 복음 전파의 핵심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믿고 회개하는 자가 결국 천국에 들어가게 되며 또한 천국에서 놀라운 지위와 신분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공생애를 사실 때에 12사도를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중에 대표자로서 베드로를 선택하셔서 그를 할례자들의 사도로 삼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어떻게 사용하시려고 선택하신 것인가?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했을 때에 주님께서 예언적으로 그에게 알려 주셨다. 그것은 바로 천국 열쇠들을 사용하여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다(마16:18~19).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 땅에 최초의 교회를 세우게 된다. 그 교회가 바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교회로서 유대인들로만 구성된 '예루살렘교회'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한 개의 천국 열쇠만을 주신 것이 아니다. 복수로 주셨다. 이는 그가 유대인으로 구성된 교회를 세울 뿐만 아니라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도 세워야 할 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는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의 집에 가서도 복음을 전파하여 성령세례를 받게 한다. 그리하여 최초의 이방인 신자가 생긴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한다. 그러자 이어서 등장하는 사도가 바로 바울이다.

  그럼 왜 주님께서는 베드로 외에 바울을 선택하셔서 사도로 임명하신 것인가? 그것은 베드로를 통해서는 복음 전파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는 온 정성을 다 했지만 할례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는 그리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에게는 유대인들에 대한 선민사상이 강하게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바울은 베드로와는 달랐다. 그는 이방 지역인 길리기아의 다소 성에서 헬라파 유대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 어디를 가든지 여행하는 데에 매우 자유로웠으며 또한 어디서든지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 시민으로서 엄청난 권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헬라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쓸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방인들의 복음 전파를 위해서 매우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헬라어를 잘 사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나중에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꼭 마가 요한을 데리고 다녔다. 그가 헬라어로 통역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가 요한은 베드로를 통역하다가 자신이 들은 것을 가지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복음서가 바로 마가복음이라는 것이다. 사실 베드로는 헬라어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그가 남긴 베드로전서나 베드로후서 역시 남이 대필해 준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어려서부터 예루살렘에 유학 와서 정식으로 랍비 교육을 받은 자였기에, 율법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 공부를 많이 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도 매우 유리했다. 그러므로 그는 이방인들과 왕들 그리고 좀 더 많이 배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데에 힘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 모든 것은 역시 우리 주님께서 이방인의 복음 전파의 기수로서 바울을 쓰시기 위해 예비한 작정이었고, 바울에게 그러한 사명을 주었기 때문에 그도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복음서가 예수님의 복음 전파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이듯, 사도행전은 사도인 베드로와 바울의 복음 전파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복음 전파는 사도행전 1:8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대로 성취된다. 그래서 먼저는 예루살렘에 가장 먼저 복음이 전파되었고, 이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증거되었다. 그런데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는의 복음전파는 사도 베드로에 의해서 성취된다. 그랬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가장 먼저 오순절 성령강림 때문에 몰려온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최초의 예루살렘교회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사도행전 2장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때 세워진 예루살렘교회는 이방인들은 한 사람도 없었고 오직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로만 구성되었다. 하지만 구제 문제 때문에 다툼이 일어났을 때에, 사도들은 집사를 세워 이 문제를 해결하였는데, 자신들이 모두가 히브리파 유대인이었던 것만큼 새로 임직하는 안수집사들은 전부 다 헬라파 유대인 중에서 선출하게 된다. 그중에서 대표자는 바로 스데반과 빌립이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파하다가 그만 유대교를 철저히 신봉하던 사울(나중에 바울이 됨)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고, 예루살렘교회는 흩어지게 된다. 그러자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여 사마리아교회를 세우게 된다. 그리고 흩어진 성도들이 온 유대에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 그중에 어떤 이들은 수리아의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를 세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이방인 교회인 수리아 안디옥교회라는 교회다.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바로 사도행전 1장에서 12장까지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어지는 13장부터 28장까지의 이야기는 수리아 안디옥교회에 동역자로 초청 받아 온 바울에 의한 복음 전파의 기록이다. 예루살렘교회는 안디옥에서도 성도들이 모이고 있다는 말을 듣고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바나바를 파송하여 그곳에 교회를 세운다. 이것이 바로 안디옥교회이며,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의 담임 목회자가 된다. 이때 바나바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었다가 자기 고향에 머물러 있는 바울을 데리고 와서 함께 목회를 한다. 그때 성령께서 두 사람을 따로 세워 복음을 전파하게 함으로 바나바와 바울은 안수를 받고 구브로를 거쳐 밤빌리아와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 이것을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이라고 부른다. 이어서 바울은 2차와 3차 전도여행을 행하여, 이방인 지역들에 여러 교회들을 세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예루살렘으로 복귀하는데, 그때 성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마침 천부장이 이것을 지켜보다가 개입하여 바울을 보호하게 되는데, 그때 바울은 유대인들과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게 된다. 그리고 소요 사태에 따른 유대인들의 고소로 인하여 로마 총독이었던 벨릭스와 베스도 앞에서 그리고 아그립바2세 왕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는데, 이때도 역시 바울은 그 상황을 복음전파의 기회로 삼고 그들에게도 역시 복음을 전파한다. 그리고 로마 황제에게 자신의 재판을 의뢰함으로 바울은 지중해를 건너 로마로 건너가게 된다.   

 

5. 바울은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 선택받아 사도로 파송받은 바울은 대체 어떤 인물이었는가? 우리는 보통 '사도'를 나눌 때에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육신을 입고 계신 예수님에 의해 선택된 사도들이 있는데, 이들은 베드로를 위시한 12사도들로서, 이들을 가리켜 보통 '어린양의 사도'라고 부른다. 그리고 또 하나는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도 있었으니 그들의 대표가 바로 사도 바울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대체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는 아마도 추정컨대, 예수님보다는 약 10년 뒤에 출생한 사람 같아보인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헬라파 유대인이었다(행22:3). 그러나 그는 어려서 예루살렘에 유학와서, 가말리엘이라는 당시 유명한 석학에게 바리새인으로서의 율법 공부를 한다. 그의 욕심은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는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숙원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종 나사렛파 사람들을 없애는 일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일에 앞장서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잡아 감옥에 쳐 넣고, 주님을 부인하게 만들며 고통을 준다. 그때 바울에게 붙잡힌 샘플이 바로 스데반 집사였고, 스데반은 바울의 책임하에 돌에 맞아 죽게 된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바울을 찾아오셨다. 왜냐하면 그를 이 땅에 보내실 때에 이방인의 복음 전파 기수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가 되자 주님께서 직접 그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를 만나신 후에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다(갈2:7~8).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의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 그리고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마치게 되고, 이어서 자신의 재판 때문에 로마에까지 가게 된다. 그리고 로마에서 미결수의 신분으로 있으면서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 

 

6. 바울은 로마에 도착한 이후 어떻게 행했는가?

  사도행전의 마지막 기록은 바울이 로마에서 2년 동안 가택 연금 상태에서 있었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힘있게 전파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행28:30~31). 그렇다면 바울은 이 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 바울은 로마에만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이후로도 열정적인 복음 전파를 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학자마다 약간의 견해차이는 있다). 

  바울은 A.D.61~63년의 약 2년 동안 로마에 있는 어떤 셋집에 머물면서 가택 연금 상태에서 복음을 증거한다. 그리고 시간이 나는 대로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그 편지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옥중서신이라고 불리는 서신서들로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가 바로 그러한 책들이다. 그리고 A.D.63년 바울은 일시적으로 풀려난다. 그러자 바울은 자신의 아들과 같은 동역자 디모데를 에베소에 목회자로 파송한다. 그리고 또한 디도도 목회자로 파송한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편지를 써 보냈으니 그것이 바로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다. 이어 바울은 A.D.63~67년까지 약 5년간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하게 되는데, 그때 바울은 에게 해를 중심으로 하여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을 돌아보게 되며, 그때 마침내 자신의 소원이었던 서바나(스페인)전도를 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A.D.67년경 재차 투옥되어 있다가, 거기서 마지막으로 디모데후서를 기록하고, A.D.68년경 로마의 네로 황제의 명령에 따라 장렬하게 목이 잘려 순교한다. 

 

7. 왜 사도행전은 미완성으로 끝마쳐지고 있는가?

  그렇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이후에도 바울은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특히 A.D.63~67년까지 5년간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마지막 선교의 열정을 불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2년 동안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전파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을 마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로서 우선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도행전은 결코 바울의 전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에 의한 끊임없는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기록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복음 전파가 로마에서 끝나서는 안 되고 더 나아가서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 곧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에, 바울에 의해 로마까지는 복음이 전파되었으나, 그 뒤를 이어 누군가가 복음을 다른 지역까지 전파해야 함을 웅변적으로 말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복음 전파의 최종 목적지는 로마가 아니라 땅끝이라고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행1:8). 그렇다면 '땅끝'은 대체 어디인가? 그곳은 당시에는 아마 서바나(스페인)이었을 것이다. 서쪽 땅끝이 스페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은 대서양 바다를 건너 미국과 캐나다로 건너갔고, 다시 미국과 캐나다에서 우리나라까지 건너왔다. 그때가 바로 1,885년경의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라에도 복음이 전파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복음이 증거되기 시작한 예루살렘으로까지 되돌려주어야 복음 전파가 끝마쳐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미 우리나라의 선교사가 예루살렘에까지 가 있는 것을 보면, 이제는 그 시기가 다 된 것이 아닌가 싶다. 

 

8. 나오며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증언되어야 할 복음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마24:14의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그렇다. 이 마지막 시기에 전파되어야 할 복음은 바로 '천국복음'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회개를 통해서 완성되는 복음이다(마4:17).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는 천국복음과 함께 꼭 회개를 전해야 한다. 그래서 장소적인 천국으로서 하나님이 계신 저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게 도와주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회개와 천국복음'을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리들과 같이 부족한 사람들을 부르시어 이땅에서 일하게 하고 계신다. 이 땅과 전 세계에는 여러 많은 종류의 믿는 이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천국에 실제적으로 어떻게 들어가는지를 모르는 자들이 부지기수다. 한 번 받은 구원이 영원한 구원인 줄 안다. 그러다 보니 죽을 때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면서 구원이 취소되는 자가 부지기수로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며, 성밖으로 내던져지기도 하고, 심지어 불못에 던져지는 이들도 있다. 그러므로 지금 전해 주어야 할 마지막 복음은 회개와 천국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회개와 천국복음은 결국 회개만이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는 마지막 관문임을 증거한다. 그리고 그 책임이 우리 시대에 주어져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그 책임을 감당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장차 천국에서 큰 상을 내리실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 가운데 행하실 가장 위대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제 우리도 이 시대에 천국복음을 이 땅에 전하는 주님의 귀한 마중물이 되어 야 한다. 

 

 

2023년 02월 05일(주일)

정병진목사

2023-01-29(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노아가 받은 은사는 대체 무엇이었는가?(창6:5~2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7g8nTvj4sn4 [또는 https://tv.naver.com/v/32764038]

 

1. 들어가며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다. 다시 말해 흠이 없는 자였다. 그때 노아의 나이는 500세 정도였다. 그러니까 노아는 무려 500년간을 하나님과 함께 걸어갔으며, 의롭게 살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흠이 없이 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노아는 어떻게 되어서 흠없는 완전한 자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인가? 그가 받게 되었던 놀라운 은사들은 무엇이었으며, 그가 받아들인 악한 영에는 어떤 것이 있었는가? 우리는 노아의 삶과 은사 그리고 악한 영의 역사를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으며, 나도 어떤 은사를 사모해야 하는지, 어떤 악한 영들에 주의해야 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 노아는 어떻게 되어서 흠없는 완전한 자로 살 수 있었는가?

  노아는 자기의 조상 3대가 아주 경건한 믿음의 선배들이었다. 아버지는 '라멕'이었고 그리고 할아버지는 '므두셀라' 그리고 증조할아버지는 '에녹'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전부다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는데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계시를 받는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다. 그 이름의 뜻은 '그가 죽을 때에 그것을 보낼 것이다'라는 것으로 심판을 예고하는 계시가 들어 있는 이름이었다. 비록 에녹이 일찍 승천하는 바람에 노아는 에녹과 함께 살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할아버지 므두셀라로부터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아는 자신의 아버지 '라멕'으로부터도 역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들었다. 그것은 자신의 이름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은 자신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은 이유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안위,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어떤 일을 이루실 것임을 암시받은 것이다. 그러자 노아는 자신의 조상들로부터 이러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는 인생을 허투루 살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는 500세까지 기도에 집중하는 삶을 살 수가 있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그를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칭하신 것이다. 

 

3. 노아가 받은 은사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노아가 받은 은사는 무엇인가? 감사하게도 노아는 믿음의 조상들 때문에 많은 영적인 은사를 물려받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시대 당시에 다른 모든 사람들이 걸어가는 넓은 길로 가지 않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대체 그는 어떤 은사를 받았던 것인가? 그가 받은 은사를 정리하면 적어도 9가지 은사를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첫째, 그의 가장 탁월한 은사는 말씀에 대한 분별력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이다(창5:21~29). 그래서 그는 일종의 선지자처럼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그는 조상들로부터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들으면 그것이 어떤 종류의 말씀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 은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500세 된 이후에 방주만 만든 것이 아니라 방주를 만들기 위해 고용한 사람들과 구경꾼들에게도 늘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그는 기도하고 간구하는 은사를 받았다(창6:9~10). 그는 참 많이 기도한 사람이었다. 무려 500년을 자식도 낳지 않고 기도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선악과의 비밀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악한 영들(뱀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이기지 못하는 자는 가인처럼 혈기와 분노, 시기와 질투심을 통해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자기가 자식을 낳는다고 해도 과연 그 자식을 끝까지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퍽 많은 시간을 기도에 힘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하나님 사이에는 영적인 통로가 열려 있었다. 그 공간 사이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그는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은사를 받았다(벧후2:5). 그래서 그는 어떤 길이 바른 길이요 어떤 길이 파멸의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의 자식들을 바른 길로 인도했으며,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도 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었다. 

  넷째, 그는 순종하는 은사를 받았다(창6:22, 7:5). 그가 500살까지는 기도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방주를 만들고 그 안에 살아 숨쉬고 있는 동물을 들여 넣고 그들이 먹을 양식을 준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그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말씀을 들어도 순종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그는 건축하는 은사도 받았다(창6:14~16,21~22). 그가 언제 하나님으로부터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방주 건조 명령을 받았을 때에 그는 적어도 520세는 더 되었을 것이다. 야살의 책에 의하면, 그는 595세에 방주 건조 명령을 받았으며, 5년간 방주를 지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실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방주만 지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서 임시로 살게 될 모든 동물들의 식량까지 준비한 것을 보면, 너무 오랜 세월 동안 방주를 지은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지은 방주는 당시에는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크기였다. 300규빗 50규빗 30규빗의 방주는 오늘날 축구장 크기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배 하나 건조하는 것도 어려운데, 노아가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큰 방주를 지었다는 것은 그에게 건축의 은사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여섯째, 그는 열심히 일하는 은사를 받았다(창6:22). 그는 나이를 먹었지만 지칠 줄 모르고 일할 수 있는 체력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쉬지 않고 방주를 지어 하나님께서 그에게 환상으로 보여 준 바 바로 그 방주를 그대로 지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일곱째, 그는 유혹을 뿌리치는 은사를 받았다(창6:1~3,5~6). 그는 세상 사람들이 편한 길로 넓은 길로 가고 있었을 때 그 길로 가지 않았다. 믿음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 길은 비록 좁은 길이었지만 그 길이 생명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덟째, 그는 승리의 은사를 받았다(창6:9).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 곧 방주를 짓고 동물들을 들여보내 그들을 보전하라는 말씀을 그대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던 인물이었다. 그것은 힘든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세 아들들과 자부들 그리고 고용한 일꾼들과 함께 끝까지 방주를 지어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홉째, 그는 비밀을 아는 은사를 받았다. 그는 장차 되어질 일을 알았다. 장차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류와 지구를 심판하실 것인지를 알고 그것에 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식 만큼은 멸망의 길이 아니라 생명길로 인도할 수 있었다. 

 

4. 노아가 불러들인 악한 영은 무엇이었는가?

  사실 노아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준비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께 쓰임받기 전까지 적어도 500년 이상을 기도로 준비해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의 시조 아담(1대)과 7대 조상 에녹(7대)과는 함께 살지 못했지만, 다른 모든 믿음의 조상들 곧 셋(2대), 에노스(3대), 게난(4대), 마할랄렐(5대), 야렛(6대), 므두셀라(8대), 라멕(9대)과 교제함으로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방주 건조 명령을 받을 때에는 흠없는 자가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회개하여 자신의 몸으로부터 악한 영들을 내보내었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방주 지을 동안에 발생했다. 왜냐하면 그때 노아에게 거절의 영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방주 공사를 돕기 위해 고용한 사람들과 구경꾼들에게 회개할 것을 전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때 노아에게 들어온 거절의 영은 결국 홍수 이후에 혈기와 분노의 영과 함께 자신의 손자 가나안을 저주하는 일로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사람들로부터 거절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홍수 이후에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자신이 포도농사를 지은 후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만 술 취한 나머지 옷을 입지 않은 채 누워 있는 것을 아마도 그의 손자 가나안이 본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사건 이후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가나안이 먼저 보았을 것이고 그것을 자신의 아버지 함에게 전한 것 같다. 그러자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지 않고 형제들에게 그것을 누설하고 말았다. 그때 만약 함이 자신이 본 사실을 덮어버렸다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했다. 그것을 누설함으로 자신은 그러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자신을 미화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그러자 화가 난 노아는 가나안을 저주했다. 그가 그의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될 것이라고 말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함의 자손들은 여전히 셈과 야벳의 후손들에게 처절히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거절의 영이 내 몸안에 있으면 여러 다른 영들과 결합하여 매우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노아는 500년 이상을 회개하고 기도했기에 다른 24장로들에게는 발견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람이 될 수 있었으니, 그것은 노아 안에서 교만의 영과 음란의 영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 치고 교만과 음란의 영은 조금씩이나마 있는데 노아에게는 이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5. 노아가 받은 은사의 특징은 무엇인가?

  노아는 사실 믿음이 좋은 조상들을 두었다. 그리고 본인도 500년 이상을 기도하면서 회개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정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창세기 기자는 그를 의로운 사람이자 그 시대에 흠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창6:9). 그러나 방주를 지으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를 전파할 때에 수많은 거절을 받음으로 인하여 거절의 영이 자신의 몸에 들어왔다. 그리하여 그렇게 해서 받은 상처들은 결국 자신의 흠을 들추어내고 누설하는 함과 가나안에게 저주하는 일을 낳고 말았다. 이것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노아가 정말 훌륭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일생에 받았던 은사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가 받은 은사는 일종의 분별력의 은사로서 무엇이 바른 길이요 무엇이 멸망의 길인지를 알고 전해 줄 수 있는 자로서, 선지자의 은사를 받았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아마도 신약으로 치자면 세례 요한과 같은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는 믿음의 조상들이 들려준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새겨들음으로서 때를 분별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그가 비록 능력을 행하고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해 줄 줄 아는 지도자의 은사를 받았다는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외치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가지고 끝까지 회개를 외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셋째, 그는 자신의 내면을 깨끗이 하는 은사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500년 이상을 기도하였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깨끗한 그릇이 되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불러 쓰시는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기도의 은사를 통해서 순종과 충성의 은사로 겸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6. 나오며

  노아는 사실 엄청난 영성가다. 그것도 기도로 다져진 영성가다. 노아는 무려 500년 동안이나 경건생활에 힘써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식도 낳지 않으면서 경건생활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 그러니 방주를 만들기 전까지 노아는 사실 에녹보다 더 훌륭한 영성가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거절의 영 때문에 그는 조금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500년 동안 쌓아왔던 기도와 또한 주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그를 하늘에서 보좌 자리 1번을 차지하게 하였고, 24장로의 반열에 들게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경건생활과 회개생활을 하고 있을까? 50년은 아니더라도 다만 5년 동안만이라도 회개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과연 아무런 불평없이 회개할 수 있을까? 노아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노아를 통해 기도와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것 없이는 깨끗한 그릇으로 쓰임받을 수 없기 때문이요, 천국에서도 주님의 보좌에 더 가까이 가지 못하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회개하자. 그래서 깨끗한 그릇으로 자신을 준비하자. 

 

 

2023년 01월 29일(주일)

정병진목사

2023-01-08(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도 바울도 회개했을까?(행22:1~2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Su691s-kig4  [혹은 https://tv.naver.com/v/32238772]

1. 들어가며

  바울도 과연 회개했을까? 우리는 성경에 바울에 관한 기록들을 갖고 있다. 그의 행적은 사도행전(9~28장)과 13권(로마서~빌레몬서)의 그의 서신서들에 들어 있다. 그런데 성경기록만을 보면 과연 사도 바울이 회개했는지 직접적으로 살펴보기는 어렵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윗왕은 살인교사죄와 간음죄 이후에 과연 죄를 회개했을까? 회개했다. 그가 회개한 사실은 시편 51편과 32편과 6편에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회개를 안 한 것인가? 회개를 했는데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인가? 우리는 회개에 관한 정의를 다시 더듬어보면서 과연 바울이 회개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도 과연 회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사도 바울이 회개했는지의 여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람이 진정 회개를 했는지 안 했는지의 여부를 과연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입술로 고백한 것만을 가지고 회개를 했다고 판정하기는 사실 어렵다. 왜냐하면 진정한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마3:8). 세례 요한은 회개를 외쳤던 선지자들 중의 최고의 선지자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자기에게 세례받기 위해 나아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어떻게 책망했는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7~9)." 그렇다. 그는 자신에게 와서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회개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회개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회개했는지 안 했는지에 관하여는 과연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그에게서 나타났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3. 회개를 실제로 나누면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회개는 보통 회심으로서의 회개와 자백으로서의 회개로 나뉜다. 회심으로서의 회개란 처음 믿을 때에 행하는 회개를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이 아닌 우상들을 하나님으로 믿고 섬긴 죄를 회개하고, 또한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데 이를 거부하거나 모른 채 살아온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이때 사람은 과거에 지은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해 탕감을 받는다(임시적인 용서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사람은 그때 이후로 지은 죄들에 대해서는 자백함을 통해 자신의 죄들을 용서 받아야 한다(요일1:9).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도 과연 회개했는지 안 했는지는 이 두 방면에서 체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가 회개했다는 기록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으니 그가 맺은 회개의 열매를 통해서 확인해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먼저 첫째로, 그는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했던 것인가? 물론 했다. 그 증거가 있는가? 있다. 그것은 사도행전 9장에 나온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다메섹을 향해 가고 있을 때에 주님이 직접 그를 만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 그리고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러고는 다메섹의 아나니아로부터 자신에 대한 주님의 소명을 들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다. 이때 그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때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러자 그때부터 며칠 지난 후 그는 곧바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증거하기 시작한다(행9:20,22). 이는 그가 확실히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했다는 것을 증언해 준다. 

  둘째로, 그는 자백함의 회개를 했는가? 그렇다. 이것도 역시 그가 지은 죄들에 대해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봄으로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4. 바울은 어떤 죄를 지었는가?

  바울이 구체적으로 어떤 죄들을 지었는지는 우리가 다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십계명을 어긴 것만이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레마(말씀)을 거부하한 것도 역시 죄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동으로만 짓는 것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과 입술로 짓는 것도 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떤 죄를 지었는가? 우리는 사도행전으 기록과 그가 남긴 서신서들을 중심으로 그가 최소한 3가지의 죄는 지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살인과 폭력의 죄를 지었다(행22:4, 19~20, 26:10~11).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믿기 직전에 지은 죄였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깨닫지 못해 지은 죄였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을 몰랐기에 지은 죄였다. 그 죄는 바로 주님의 충성스러운 평신도였던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서 죽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스데반을 죽이는데 직접 참여는 하지 않고, 다만 증인들의 겉옷을 맡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이 스데반 집사를 죽였다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내가 이 도를 박해아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행22:4)" 그랬다. 그는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때렸으며(행22:19), 감옥에 가두었으며, 회당에서 처벌하기도 하였고, 강제로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기도 하였다(행26:10~11). 그리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찬성투표를 하였으며, 그를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키기도 했다. 그리고 직접 가담했다(행22:20). 

  둘째, 그는 혈기 분노의 죄를 지었다(행15:39). 그가 혈기 분노의 죄를 지은 것은 그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에서 복귀했다가 다시 2차 전도여행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2차 전도여행을 떠나는데 수행자로서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를 놓고 동역자인 바나바와 피차 다투었던 것이다. 그리고 둘은 갈라섰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울에게는 혈기 분노의 영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가 다메섹의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을 때에는 살인과 폭력의 영이 떠나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때 사울의 눈에서 어떤 뱀 비늘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에게는 여전히 혈기와 분노로 인해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싸웠다. 그러므로 그때 그는 혈기 분노의 영을 더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셋째, 그는 교만의 죄를 지었다. 그는 교만했는지를 그의 속에 들어가보지 못해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고린도후서의 편지에서 교만의 문제를 언급했다. 그 상황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후12:7~9). 

고후12:7~9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랬다. 그는 다른 사도들과는 좀 달랐다. 비록 육체로 계셨던 주님의 사도는 아니었더라도,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에 대한 거의 모든 계시를 다 받은 자였다(갈1:11~12). 그러므로 그에게는 교만한 마음도 역시 마음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자신의 몸 속에 있는 사탄의 천사 곧 귀신을 제거해달라고 세 번 기도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귀신을 자신의 교만함에 대한 표출의 잣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교만했었을 것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베드로를 책망하고 바나바를 책망하면서 더 교만한 마음을 가졌을른지도 모른다(갈2:11~16). 
 

5. 바울은 회개했는가?

  바울이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했는지는 명시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는가를 통해 그가 회개했는지를 역추적할 수는 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는 회개해서 완전히 죄용서를 받은 것도 있었지만 회개하는 과정에 있는 죄도 있었다는 것이다. 

  먼저 첫째로, 살인 폭력의 죄는 확실히 회개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살인 폭력에 가담한 것이 분명한데, 그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자신이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았으면 받았지 남을 핍박하고 고난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인은 복음 전하다가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예수믿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을 채찍질하고 감옥에 가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을 전하다가 죽음에까지 이르렀지만 그는 다른 사람을 죽게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회개의 열매를 통해서 그가 살인 폭력의 죄에 대해 회개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둘째로, 혈기 분노의 죄도 회개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2차 전도여행 이후를 보면 그가 혈기 분노를 낼 수 있는 형편에 처하는 상황 가운데서도 한 번도 혈기 분노를 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 본문처럼 그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갔는데, 거기어 자신을 모함하는 자들에 의해 억울하게 죄인으로 붙들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를 고소한 죄목에는 성전을 더렵혔다는 것이 들어 있었다. 그가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고 고소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일에 자신이 죄인 취급 받게 되었을 때에 그들을 향해 혈기 분노를 쏟아낼 수 있었다. 왜 거짓으로 나를 모함하고 고소하느냐고 오히려 역정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이 손으로 때리고 옷을 잡아당기는 일을 했지만 한 번도 반항하거나 그들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이는 그가 혈기 분노의 죄를 회개하여, 혈기 분노의 영을 내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교만의 죄는 그가 회개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교만해서 자기 안에 들어온 사탄의 천사들 곧 악한 영을 내보내 달라고 주님께 간구했지만 주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에게 작더라도 교만함의 영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실 그는 자신의 사도권 방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가? 그것은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에 적나라하게 나온다. 그는 자신이 사도인 것을 알 수 있도록 얼마나 그 사실을 편지에 써서 말했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은 이런 자인데 왜 너희들은 그것을 몰라보느냐?"는 그의 교만함의 표출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그는 점차로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만 자랑한다. 그리고 자신의 학식보다는 예수님을 더 드러낸다. 이는 그가 계속해서 교만한 죄를 회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교만의 죄와 음란의 죄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줄어들고 약해질 뿐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교만의 죄에 부분에 대해서는 일평생 회개를 통해서 자복하고 눈물 흘리며 회개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천국에서 24장로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지위를 가진 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6. 나오며

  회개하라고 하니 어떤 사람은 회개기도문을 수백 번 읽은 것을 가지고 자신은 회개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바울이 비록 말로 자백함으로 회개했다는 대목이 성경에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그가 회개하는 자였고 또한 회개를 하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가 지금 천국에서 갖고 있는 지위를 통해서도 그는 회개한 자였음을 살펴볼 수가 있다. 그렇다. 그는 회개하는 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이제 회개할 때에는 자신의 회개한 죄목에서 자신이 진정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열매와 결과가 나타나고 있을 때에 진정한 회개에 들어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일평생에 죄를 안 짓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회개를 통해 과거에 지은 죄를 씻어내야 한다. 그리고 범죄의 숫자를 줄여 나가야 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죄를 안 짓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선한 일에 부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도 언젠가는 깨끗한 그릇으로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그날을 위해 오늘도 회개에 집중하고 열매맺는 회개를 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023년 01월 08일(주일)

정병진목사

2023-01-01(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탕감해주셨다는 말씀의 의미는?(마18:21~3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TYUOawRAayM  [혹은 https://tv.naver.com/v/32116415 ]

 

1. 들어가며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전에 지었던 모든 죄는 싹 다 없어지는가? 아니면 없는 것처럼 여겨주시는 것인가? 어떤 분은 예수님을 믿으면 과거에 지었던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현재 짓고 있는 죄와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를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과거의 죄야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분의 피로 용서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현재 짓고 있는 죄를 용서받았다거나 혹은 미래에 지을 죄도 용서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도한 주장이 아닌가 싶다. 아직 짓지도 아니한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은 실체가 없는데도 실체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하늘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며, 동시에 이 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런데 우리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과 동시에 죄를 탕감받았다는 말도 종종 쓰게 된다. 그렇다면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과 탕감받았다는 말은 과연 같은 말인가 아니면 다른 말인가?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과거의 죄는 과연 어떻게 처리되며, 또한 현재 짓고 있는 자범죄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까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한다. 

 

2.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게 될 때에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육안으로 볼 때에는 아무런 변화를 찾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영의 세계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이 있고,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도 역시 있다.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부터 살펴보자.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게 될 때에 하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2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는 우리가 지었던 과거의 죄들이 예수님의 피로 덮여진다는 것이다. 이때 과거에 내가 지었던 죄들은 다 행위책에 이미 기록된 채 있는데, 그 행위책에 기록된 채 있는 나의 죄들을 예수님의 피가 그대로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 죄를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죄인은 죄는 있으나 죄가 없는 것처럼 되어버린다. 둘째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이다. 누가 구원을 받은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의 가장 확실한 잣대는 무엇일까? 그것은 과연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느냐이다. 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는 자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계21:27). 그런데 진정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그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이 된다. 

  둘째,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이 땅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게 되면 이 땅에서도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성령께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다. 이때 성령은 우리의 존재 중에 영 가운데로 들어오신다. 이때 우리는 우리가 가진 타고난 생명에다가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 '거듭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거듭났다는 말은 하나님의 생명이 나에게 덧대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하늘의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채 있는 사람이며, 이 땅에서는 자기 안에 성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3. 회개에는 어떤 종류의 회개가 있는가?

  우리는 보통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회개를 한다. 그런데 회개의 종류에도 시간적으로 볼 때에 2가지 종류의 회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처음에 한 번 하는 회개로서, 단회적으로 회개하는 회개 곧 '회심으로서의 회개'가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이 날마다 짓는 죄를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반복적인 회개'가 있다. 그럼 이 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첫째, '회심으로서의 회개'는 일생에 한 번 하는 회개로서, 자신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을 때 행하는 회개가 바로 이 회개다. 이전에 하나님이 계신지도 모르고 살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살았던 것을 회개하는 회개가 바로 '회심으로서의 회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회개는 일평생에 한 번 하는 회개다. 우리는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통해 거듭나게 되고 하늘의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게 된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성령을 받아 그분와 함께 살게 된다. 

  둘째, 그런데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자백하는 회개'가 있다. 이것은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한 사람이 다시 죄를 짓게 될 때, 자신이 지은 죄들을 용서받기 위해 행하는 회개로서, 죽는 날까지 행하는 회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예수님 이외에 죄짓지 않고 살아갈 완전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고로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이라도 믿고 난 후에 지은 죄들을 그냥 놔두어서는 아니된다. 반드시 자백하는 회개를 통하여 그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래서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회개치 않은 죄 때문에, 죽을 때에 성령이 떠나가면서 행위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 그리고 성밖으로 쫓겨나거나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죽는 그날까지 회개를 해야 한다. 

 

4. 예수님을 믿을 때에 과거에 지었던 죄들은 어떻게 처리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을 때에 과거에 지었던 죄들은 어떻게 처리되는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탕감받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마18:27,32). 그렇다면, '탕감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탕감(蕩減)'이라는 단어는 한자어로서, 흔들 '탕' 자에, 덜 '감' 자다. 이는 빚이나 요금, 세금 따위의 물어야 할 것을 흔들어서 덜어준다는 뜻이다. 이것을 우리말로는 '삭쳐준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얼핏 보기에는 빚을 덜어준다는 의미로 풀이되는 단어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탕감한다'는 단어는 그러한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으로 '탕감하다'는 단어는 '아피에미'라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럼, '아피에미'라는 단어는 대체 어떤 뜻인가?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는 '내버려두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버리다'(고전7:11,12,13), '떠나다'(요4:3, 16:28), '내버려두다'(요14:18), '허락하다'(마3:15), '용서하다(사하다)'(마6:14~15, 약5:15, 롬4:7, 행8:12) 등으로 쓰인다. 그런데 빚이나 죄에 대해서 쓰일 때에는 이 단어의 뜻이 대부분 '사하다', '용서하다'의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탕감받는다'는 말은 '죄를 용서받는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용서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18:21~35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도 이 단어는 두 번은 '용서하다'는 뜻으로 번역되었고(마18:21, 35), 두 번은 '탕감하다'는 뜻으로 번역되고 있다(마18:27,32).

 

5. '탕감받는다' 혹은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죄를 '탕감받는다' 혹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의 죄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그 죄를 일시적이지만 없는 것으로 여겨준다는 말인가? 우리는 '아피에미'라는 이 단어를 예수님께서 어떤 의미로 사용하셨는지를 알 수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 그 의미를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돈을 갚아야 할 날짜가 되었을 때에 주인이 그를 불러내었다. 그런데도 그 종은 갚을 것이 없었다. 그러자 주인이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을 종으로 팔아서 그리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것을 갚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애원하면서 말했다. "주인이여, 내게 오래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장차 갚을 것입니다."(마18:26). 그러자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풀어) 보내면서 그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의 아주 작은 빚을 진 자신의 동료 종을 만났다. 그리고는 그의 목을 조르면서 그 빚을 갚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동료 종이 엎드린 채 말했다. "나에게 오래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장차 갚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가 빚을 갚도록 그를 옥에 가둬버렸다. 그러자 그의 동료 종들이 그것을 보면서 매우 마음 아파하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을 소상하게 주인에게 알렸다. 그러자 주인이 노하였다. 주인은 일만 달란트 빚졌던 종을 다시 불러오게 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악한 종이여, 네가 간청하니 내가 네게 모든 빚을 탕감하여 주었는데, 너는 왜 네게 빚진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하면서, 그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그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옥졸들에게 넘겨주라고 하였다. 여기서 '옥졸들'이란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고문을 주는 사람, 형벌을 주는 사람'이란 뜻을 가졌다. 그렇다. 만약 그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 주었더라면 그도 역시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채 계속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행하지 아니함으로 그는 오히려 형벌주는 자에게 끌려가서 형벌까지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탕감받는다'는 뜻이 어떤 의미인지를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지은 죄들을 아주 없애버린다는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빚문서를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을 죄에 적용하면, 우리가 과거에 지었던 죄들을 기록된 행위책에서 찢어서 없애버린다는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빚갚는 것을 일시적으로 유예해 준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빚문서를 없애버릴지에 대해서는 빚을 탕감받은 후에 그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처리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용서를 받은 것은 일시적인 용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서 과거에 지은 죄를 모조리 다 용서받기는 했어도, 우리가 그 뒤에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다시 그 죄를 소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탕감받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6. 탕감받은 죄가 완전히 없어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날 우리가 지은 죄들을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탕감받은 것'이다. 용서를 받기는 받았지만 일시적으로 유예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죄 용서받은 자답게 살지 않고, 죄 용서를 받은 은혜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다면 우리가 용서받았던 과거의 죄는 일시에 다시 부활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자신에게 아주 작은 양의 빚을 진 자를 불쌍히 여겼더라면, 그는 계속해서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상태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는 날에는 그 빚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주인이 자신을 불쌍히 여김같이 자신도 자신에게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겼어야 했는데, 그는 그렇게 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는 우리가 지었던 과거의 죄가 탕감받은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고로 천국에 있는 행위책에서 내가 지은 죄의 목록들이 완전히 찢겨져 없어진 것이 아니다.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피에 덮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탕감받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사라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용서받은 자처럼 남들의 죄들도 용서해 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용서받은 자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은혜받은 자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 날, 우리의 죄를 덮고 있는 예수님의 피가 걷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죄사함도 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께서도 우리 속에서부터 떠나가고 말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고 말 것이다. 

 

7. 나오며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탕감받는 것'이다. 죄가 있지만 없는 것처럼 여겨준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하나 모든 죄를 다 고백해야만이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신이 지은 죄들이 얼마나 많으며, 또한 생각나지도 않은 죄들도 많이 있을텐데, 그 죄를 어찌다 하나도 빠짐없이 회개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신의 낱낱의 죄를 다 회개해야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최초로 행하는 회개 곧 회심으로서의 회개를 할 때, 그가 지었던 과거의 모든 죄를 한꺼번에 다 예수님의 피로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죄들을 다 용서받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구원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사함을 받은 이후에 방종을 하여 "나는 이미 죄사함을 받았으니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어"라고 하면서 죄짓고 살아간다면 그는 틀림없이 구원에서 탈락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 때에 예수님의 피를 그 행위책으로부터 거둬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되셔서 피흘려 죽으셔야 했는가? 그것은 우리 죄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또 다시 죄를 밥먹듯이 짓고, 죄를 지어 놓고도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실 죄사함을 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결국에 구원이 취소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과거의 죄를 용서받은 것은 일시적인 조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죄들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죄를 다시 소환하지 않도록 이후에 죄를 용서받은 자답게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난 후의 삶을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된다. 내게서 과연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나타나고 있는지를 늘 살펴보아야 한다. 내게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거나, 열매가 없는데도 자신이 받은 죄사함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이후의 삶이 우리의 영원한 용서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하는 것이다. 그래도 실수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 죄를 회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최종 관문은 '회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믿고 회개하자. 그리고 순종하고 충성하자. 그러한 자들만이 일시적으로 받은 용서가 영원한 용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23년 01월 01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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