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05(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왜 우리는 가나안 땅에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야 하는가?(출23:20~3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EHri8KlS41E [또는 https://tv.naver.com/v/34139479]

 

1. 들어가며

  성경은 놀라운 책이다. 곧 성경은 영서 곧 영적인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약성경 중 가장 먼저 쓰였다는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맨 처음 하신 일이 나온다. 그것은 회당으로 가시어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었다(막1:23~26). 어쩌면 예수께서는 공생의 2/3를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직접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3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눅13:32). 그런데 공생애 2년을 마쳐 갈 무렵 예수께서는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가신다. 그리고 거기서 어떤 가나안 여인을 만나셨고 그 여인의 딸로부터 귀신을 쫓아주신다(마15:21~22). 이 사건을 좀 넓게 보면, 예수께서 가나안 땅에 오시어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심으로 그녀로 하여금 천국의 실제를 계속 누리도록 행하신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은 가나안 일곱 족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에게 전적으로 알려 주는 귀한 단서가 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과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영원히 거주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땅에 살고 있던 가나안 일곱 족속은 대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더러 그 땅에 있는 일곱 족속을 남김없이 다 쫓아내라고 명령하셨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가나안 땅'이란 어떤 땅인가?

  '가나안 땅'이란 어떤 땅을 가리키는가? 가나안 땅은 다른 여느 땅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틴 지방에 있는 그저 평범한 땅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나안 땅은 다르다. 그냥 땅이 아니다. 그 땅은 아브라함 때부터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특별한 땅이기 때문이다(창17:8, 레20:24). 하지만 아브라함은 평생 그 땅을 소유하지 못했다. 단지 그 땅에 대한 약속만을 자신의 아들에게 유언으로 남길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도 그리고 그의 손자 야곱에게도 그 땅을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창26:2~3, 28:13). 그러나 아들과 손자 역시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죽었다. 손자 때에는 그 땅을 떠나 애굽으로 떠나갔고 거기에서 대 민족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늘어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모세더러 그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갈 것을 명령하신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땅을 이제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출3:6~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처음으로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땅인지를 말씀해 주셨는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신다(출3:8)

  결국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었기에 아주 특별한 땅이었고, 또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었던 것이다. 실제로도 그 땅은 매우 아름다운 땅이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물이 풍부하여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있었으며, 밀과 보리 같은 곡식이 풍성했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 같은 과일이 자라고 있었으며, 기름과 꿀 역시 풍성했기 때문이다(신8:7~10). 한 마디로 먹을 것에 젖과 꿀이 흐르는 부족함이 없는 복된 땅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나안 땅을 '천국'의 모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3. B.C.1406년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가나안 땅 안에는 누가 살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모세더러 그 땅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 땅에는 누가 살고 있었는가? 아무도 살지 않는 비어 있는 땅이었는가? 아니었다. 그 땅에는 이미 그곳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을 가리켜 우리는 '가나안 일곱 족속'이라고 부른다(신7:2, 수3:10). 그 일곱 족속이란 '헷 족속, 기르가스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보다 숫자도 훨씬 많았으며, 기골이 장대한 민족들이었다. 그래서 힘도 엄청나게 셌다(신7:1,17). 이들이 바로 그곳 원주민으로서 그 땅의 주인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의 원주민인 가나안 일곱 족속을 그 땅에서 몰아내시고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4. 왜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시려고 결정하신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이미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은 가나안 일곱 족속이 더 이상 그 땅에서 계속 거주할 자격을 상실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땅도 그들을 토해낼 때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럼 그 땅은 언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그들이 약속의 땅이요 축복의 땅이자 아름다운 땅에서 계속 거주할 자격을 상실했던 바로 그 때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여 그 땅을 정복할 때였다. 그리고 그때는 그 사람들의 죄악이 가득 찬 상태로 있을 때였다. 

  한편 우리는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줄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 땅에 죄악이 아직 관영하지(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창15: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무리 그 땅을 기업으로 주고 싶어도 그들의 죄가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에 그 땅에서 그들을 쫓아낼 수가 없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때가 차기까지 아브라함도 하나님도 기다려야 했다. 그 때는 아브라함으로부터 430년이 지난 때였다. 그때 가나안 일곱 족속의 죄악이 가득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죄가 가득 찰 때 하나님께서 축복의 땅에서 그들을 쫓아버리게 되는가? 그것은 오직 유일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길 때다. 그리하여 사람들 모두가 다 포악하고 악을 행할 때다. 다시 말해 십계명을 어길 때에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땅에서 쫓아버리시는 것이다. 그 때가 바로 그때였다. 

 

5. 영적으로 볼 때 가나안 땅과 가나안 일곱 족속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사실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신약의 성도들의 신앙 여정과 똑같다. 그리고 이는 성막의 단계와도 똑같다. 다음의 도표를 보라. 

출애굽여정 성막의 단계 성도여정
출애굽 번제단 믿음
홍해도하 물두멍 세례
광야40년
(구름기둥불기둥,생수,만나)
성소
(금촛대,향단,떡상)
교회생활
(성령인도,기도,말씀)
요단강 둘째휘장 죽음
가나안땅 지성소 천국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영적으로 볼 때 성도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은 곧 성도들이 영원히 거할 거주지인 '천국'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래 그땅에 살고 있었던 '가나안 일곱 족속'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은 천국에 원래부터 거주하고 있던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런데 하늘의 천사들 중의 일부가 축복의 땅 즉 천국에 있을 때, 하나님을 버리고 루시퍼(사탄, 마귀)를 자기들의 신으로 섬기려고 시도하였다(계12:9). 루시퍼가 하나님의 보좌 위에 자신의 보좌를 만들고 거기에 좌정한 채 하나님 노릇을 하려고 했을 때, 천사들의 일부가 자기들도 하나님께 종으로 살지 않고 왕으로 살고 싶어서 루시퍼의 반역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처음부터 죄가 가득 찬 상태로 출발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죄가 가득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미가엘 천사장을 시켜 하늘에서 루시퍼와 그를 따르는 천사들을 축복의 땅 천국으로부터 내쫓아버리셨다(계12:9). 그래서 그들이 이 세상에 내려와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인간을 미혹하여 죄를 짓게 만들고, 죄지은 자들 속에 들어가서 가난과 질병과 저주를 주고 있고, 결국에는 약속의 땅인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가로막은 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이다. 고로, 영적으로 볼 때 가나안 일곱 족속은 타락한 천사들인 귀신들을 상징한다고 정의할 수 있다.

 

6. 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일곱 족속을 가나안 땅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쫓아내라고 하셨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 그 땅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남김없이 다 쫓아내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그들이 그곳에 있으면 다음과 같은 3가지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첫째, 만약 가나안 땅에 가나안 일곱 족속을 그대로 놔두게 되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마저 미혹하여 결국 자기들처럼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24절, 신7:1~4). 그러면 가나안 원주민들처럼 죄악이 가득 찰 때에 그 땅에서 쫓겨난 것처럼 그 땅에 들어가서 거주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그 땅에서 쫓겨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미 예수님을 믿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이 땅에서 살 때 죄짓고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죄짓다가 죽을 때에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진 채, 새 예루살렘 성밖이나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기의 몸안에 있는 악한 영들을 모조리 쫓아내야 한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그 분량은 가나안 일곱 족속과 전쟁하여 그들을 몰아낸 땅만큼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31절, 수13:6). 가나안 땅은 결코 그냥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통해 빼앗은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영들과 영적 전쟁을 하지도 않은 자가 천국에서 하늘의 기업을 차지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장차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서 얻을 기업의 분량은 이 땅에서 과연 얼마나 가나안 일곱 족속으로 비유되고 있는 악한 영들을 쫓아내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다 지파의 갈렙은 자기가 정복할 땅에 기골이 장대한 아낙 자손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정복하러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아르바의 후손들인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어 그 땅을 차지하게 된다(수15:13~14). 그렇다. 천국에서 우리가 차지할 기업의 분량은 영적 전쟁을 통하여 우리가 마음과 육체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악한 영들을 얼마나 쫓아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셋째, 만약 가나안 일곱 족속을 몰아내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거주한다면, 그 족속들이 평생동안 삶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올무와 덫이 되어서 죄를 짓게 만들고 그래서 그들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고 눈에 가시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33절, 수23:13).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들과 언약을 맺지도 말고,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그것이 죄로 연결될 것이고 그러면 귀신들이 사람의 몸속에 치고 들어와 때마다 일마다 사건 사고를 일으켜, 가난하게 만들고 병들게 만들며, 자녀들의 형통을 방해하고, 사람을 일찍 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25~26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한꺼번에 쫓아내게 하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1년 안에 그들을 다 쫓아내 버리면 그 땅이 황폐하여지고 들짐승이 번성할 수 있기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그들을 쫓아내게 하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7. 가나안 땅은 영적으로 볼 때 어떤 또 다른 의미가 있는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가나안 땅은 성도들이 궁극적으로 들어가서 거주할 '천국'을 상징한다. 하지만 천국은 하늘에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성취된다. 왜냐하면 하늘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왕으로 통치하는 공간이라면 그곳도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마6:9~20). 그리고 만약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마12:28). 그렇다. 귀신들이 쫓겨나가면 그곳이 또한 천국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하나님을 모시는 장소라는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고전3:16), 동시에 귀신들이 들어와서 거주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귀신들은 우리의 몸을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마12:43~45). 그러므로 '가나안 땅'은 궁극적으로는 저 하늘에 있는 천국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에는 우리의 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몸을 갖기 전에 이미 귀신들은 우리 부모와 조상들의 몸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가 자기 모친의 자궁에서 만들어질 때부터 그들은 이미 우리 몸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이미 그들의 처소였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드디어 우리 몸안에 성령을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몸에는 여전히 귀신들이 가득 들어 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평생 동안 하늘의 기업을 얻을 때까지, 이것들을 하나하나씩 쫓아내는 일을 해야 한다. 만약 이것들을 쫓아내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게 만들고, 다른 신과 우상을 섬기게 함으로 결국 천국에서 우리를 쫓겨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갔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받을 기업이 없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는 우리 몸에 들어와서 온갖 종류의 저주를 퍼붓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역시 가난하게 살 수 있고 병들게 되며, 자녀들의 앞길도 역시 방해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일찍 죽는 자도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일생 동안 자신의 몸속에 있는 악한 영들을 제거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8. 일생 동안 악한 영들을 내보낸 성도들이 받을 축복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일생 동안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악한 귀신들을 떠나보낸 성도들이 받게 될 축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3가지다.

  첫째, 저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쫓겨나는 성도들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악한 영들이 우리 몸속에 없으니 죄의 유혹을 덜 받을 것이고, 그러면 죄도 덜 짓게 될 것이며, 아무리 환란 풍파가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하늘에 준비된 영원한 기업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살 때 귀신들을 쫓아낸 분량만큼 하늘에 있는 기업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이 땅에서 살 때, 저주에서 벗어나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가나안 일곱 족속을 쫓아내고 하나님만 섬기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첫째로,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물질에 풍성한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병을 제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다셋째로,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자손 번성의 축복이 보장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날 수를 채워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일찍 죽는 자가 없다는 뜻이다. 단명하는 자가 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수를 누리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다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우리 성도들이 악한 영들을 떠나보내는 일을 하게 된다면 우리 성도들은 죽어서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하늘에서 엄청난 기업을 받게 될 것이며, 이 땅에서도 내 육체가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9. 나오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축복의 땅이자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려하실 때에 그 땅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 곧 가나안 일곱 족속을 다 쫓아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출23:31). 영적인 것을 잘 몰랐을 때에는 우리 몸속에 무슨 귀신이 들어 있느냐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우길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비록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지 않아도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천국에서 기업을 유업으로 물려받을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출애굽기 23장의 말씀을 종합해 보니, 그렇지 않다. 예수믿고 거듭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성도라도 자신의 몸속에 남아 있는 가나안 일곱 족속을 다 내보내야 한다. 이것들을 쫓아내는 것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우리 성도의 생활에서도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영들은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강제로 나갔다고 할지라도 다시 들어온다. 그러므로 회개가 관건이다. 얼마만큼 회개했느냐에 따라 떠나가는 귀신의 숫자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하루아침에 다 떠나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께서 허락한 분량만큼 나가는 것이다(출23:29~30).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회개에 힘써야 한다. 내가 지은 죄로 불러들인 악한 영들과 우리 조상들이 우상숭배하여 내가 내려받은 악한 영들을 하나씩 하나씩 다 내보내야 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천국에서 쫓겨나지 않을 것이며, 천국에서 기업을 풍성하게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땅에서도 저주받은 삶이 아니라 축복받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2023년 03월 05일(주일)

정병진목사

2023-02-26(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예레미야강해(17) 우리에게 잘못 알려져 있는 토기장이 비유의 오해와 진실(렘18:1~1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vSh4coE1tDs [또는 https://tv.naver.com/v/33751082]

 

1. 들어가며

   예레미야서에는 이사야서와 더불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씀하는 '토기장이의 비유'가 나오는 몇 안 되는 책이다(렘18:1~10). 여기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인류 역사에 관하여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신의 선한 뜻을 행하실 수 있는 절대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특히 장로교에서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매우 강조한다. 사람이 구원받고 멸망받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주장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보통 한국의 장로교회에서 따르고 있는 이러한 구원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오는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구원론에 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교리는 과연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은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해 알려져 있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교리가 얼마나 오해되어져 왔는지룰 한 번 살펴보고 그 참된 진실은 무엇인지를 새롭게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토기장이의 비유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성경에서 토기장이의 비유는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애가서를 포함한 예레미야서 그리고 로마서에만 나온다.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토기장이의 비유는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비유가 그 내용이 길고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전체적인 내용을 다 포함하고 있는 말씀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토기장이의 비유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관한 완전한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려주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남유다의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을 앞두고서 예레미야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보내신다. 그리고 토기장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보게 하신다. 그것은 토기장이가 녹로(물레)를 이용하여 토기를 빚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때 토기장이는 어떤 토기가 자신이 원하는 그릇으로 빚어지지 않자 그 진흙을 이겨서 다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로 이 토기장이처럼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절대 주권을 갖고 있다고 말씀하셨다(렘18:3~6). 이것이 토기장이의 비유의 핵심이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여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어떤 나라를 하나님께서 새롭게 시작하실 때에, 그 나라가 하나님 보시기에 계속해서 악한 것을 행하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다고 하신 것이었다.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남유다의 멸망에 대해서 미리 들려주신 말씀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반대로 어떤 민족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기에 그 민족을 제거해 버리고자 하시는데, 그 민족이 자신의 악에서 돌이켜 떠나게 되면, 그 민족에게 내리리라고 생각했던 재앙에 대해서 뜻을 돌이키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이방 민족들이 하나님을 알고 회개하고 돌이키게 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3. 오늘날 장로교와 같은 개혁교회에서는 토기장이의 비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한 민족과 국가, 더 나아가서는 개인에 대한 앉고 일어섬의 주권을 주님께서 갖고 있다는 말씀을 장로교와 같은 개혁 교회에서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개혁 교회에서는 이러한 토기장이의 비유를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에 관한 교리를 성경근거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자로 예정하고, 어떤 사람은 멸망받을 자로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한 번 구원하기로 예정했던 사람은 어찌하든지 구원받은 상태로 남아 있게 하시기 때문에, 그 사람은 영원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한 번 선택받은 사람은 전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개인의 구원에 관한 절대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토기장이가 마치 그릇을 만들 때에 하나는 귀히 쓸 그릇으로,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롬9:20). 그래서 지음받은 물건이 어떻게 지은 이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반박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멸망의 그릇으로 만드셨든지 아니면 구원의 그릇으로 만드셨든지 아무런 말대꾸를 하지 말고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사29:16).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교리는 올바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4. 우리가 교리를 따르려고 할 때에는 무엇에 주의해야 하는가?

  구원론에 관한 교리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다. 오늘날에 두 교리는 각기 다른 교단에서 채택하고 있다. 그중에서 칼빈주의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매우 강조하는 교리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칼빈주의 교리는 한 마디로 이중예정론을 지지하고 있다고 정의내릴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를 미리 정해 두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은 불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몇 가지의 성경 구절을 이 교리의 근거로 제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떤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성경 구절이 과연 그 교리를 정확히 지지해 주는 말씀인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에 관한 교리를 잘못 알고 있다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는 심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을 가지고 결정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주권은 개인 구원의 영역이 아니라 어떤 민족의 흥망성쇠에 관한 것이며, 또한 개인에 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도 역시 개인의 쓰임(사역)에 관한 예정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인 구원에 관한 예정은 성경에 나오지 않고, 사역에 관한 예정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경 구절은 대체 무엇일까? 여러 구절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요10:28~29의 말씀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이 그러한 교리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아니다.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무조건 영생을 주실 자를 정해 놓았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생도 일종의 조건절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말씀은 번역에 오류를 가지고 있는 본문이다. 왜냐하면 이 본문 말씀은 보다 더 원본에 가까운 대문자 사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후대에 나온 사본으로서 약간의 변형된 본문을 대본으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헬라어 원문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먼저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한글 개역개정 성경부터 살펴보자. 

요10:28~29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사실 이 말씀만을 딱 떼어놓고 읽는다면, 한 번 받은 영생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을 가진 자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그 영생을 예수님과 아버지께서 지켜 주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본문의 '그들'이 대체 누구인가? 과연 누구에게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이 본문을 헬라어 원문인 대문자 사본으로 읽게 되면, 앞의 것과는 전혀 다른 뜻이 나온다. 그럼, 대문자 헬라어 사본으로 이 본문을 살펴보자. 

요10:27~29[직역] 나에게 속한 양들은 내 음성을 [계속] 듣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나도 그것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것들은 나를 [계속] 따르고 있는 중이다. 28 내가 그것들에게 '시대의 생명(영생)'을 준다. 그러면 그것들은 '그 시대까지(영원히)' 스스로 결코 멸망당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들을 내 손으로부터 장차 낚아채 가지 못할 것이다. 나의 아버지께서 [이미] 나에게 주신 채 있는 그것은 모든 것들(만물)보다 더 크다. 그러므로 아무도 내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낚아채는 것을 할 수 없다. 

  그렇다. 요10:28에 나오는 '그들'은 바로 주님께 속한 양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과연 누구에게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음성을 계속해서 듣고 있는 양들로서 또한 주님을 계속해서 따르고 있는 양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만세 전 개인 구원 예정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만세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고 있는 것은 양떼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오는 양들을 끝까지 잘 인도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바로 어떤 것이었다. 그것에는 권세와 능력, 지혜와 총명 등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주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끝까지 따라가는 자가 결국 구원을 얻게 될 것이며, 그러한 자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과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그들을 빼앗아 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음성을 계속해서 듣지 않고 있고,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라가지 않는 자는 결국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멸망받을 수 밖에 없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5. 예레미야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토기장이의 비유는 대체 어떠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토기장이의 비유는 어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씀하고 있는가? 그것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것들에 대해 절대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는가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과연 만세 전에 이미 멸망받을 자를 정해 놓으셨는가 하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 여부를 어떻게 결정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것들에게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는가를 보자(렘18:4,6,7~8,9~10). 그것은 사람의 개인 구원에 관한 절대 주권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이나 민족의 사역에 관한 절대 주권을 주께서 갖고 계신다고 말씀이다. 즉 어떤 개인이나 민족을 과연 어떤 그릇으로 사용하실 것인가에 대한 절대 주권 곧 개인과 민족의 쓰임(용도)에 관한 절대 주권을 주께서 갖고 있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과연 만세 전에 이미 멸망받을 자를 예정해 놓으셨는가를 보자(렘18:4). 만세 전 예정 구원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로 예정해 놓으셨고 그 뜻을 그대로 성취해 가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신다. 또한 성경 어디에서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부분이 없다. 예레미야서에서는 토기장이가 어떤 용도로 쓸 그릇을 만들고 있다가, 그것이 뜻대로 빚어지지 아니하니까, 그 진흙을 다시 이겨 자신의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으로 만들더라고 나온다. 그렇다. 어떤 토기장이라도 어떤 그릇을 만들 때에 그것을 깨뜨려 버릴 목적으로 만들지는 아니한다. 다들 자신이 만들고 싶어하는 어떤 용도에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세 전부터 멸망하기로 예정하고 창조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과연 인간의 구원 여부를 어떻게 결정하시는가를 보자(렘18:7~8,9~10). 사실 하나님께서는 개인과 민족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실 것인가 하는 것(용도)을 미리 정해 놓고 그릇을 빚으신다. 그렇지만 그것은 용도에 관한 것이다. 사실 구원의 문제는 이미 만세 전에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실 뿐이다. 특히 멸망받을 자는 만세 전에 정해 놓으셨다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에 따라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를 이 땅에 내려 보내시는데, 이 땅에 보내어진 자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용도로 쓰시기 위해 내려 보내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그를 선한 용도로 사용하시려는 배경하에 태어나기도 한다. 그런데 반대도 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 보니 자기 조상 대대로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저질러 온 민족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선민의 자녀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을 행하고 주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다면, 그에게 주리라고 약속한 복을 철회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렘18:9~10). 이것이 바로 남유다 제17대 왕이었던 여호야김 시대의 남유다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태어나 보니 자기가 이방신을 믿고 있고 악을 행하는 민족과 집안에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를 통해 혹은 오늘날에는 선교사나 전도자나 먼저 믿는 자들을 통해, 자기가 믿고 있는 신은 신이 아니라 우상이요 귀신이었고, 자신이 저지른 악행은 반드시 심판받아 마땅할 악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리리라고 생각했던 재앙에서 그를 건져내신다(렘18:7~8). 그 예가 바로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던 니느웨 백성의 경우다. 우리가 요나서를 읽어 보면, 니느웨 백성은 악한 용도로 쓰임받고 있는 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북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회초리의 목적으로 그들을 이용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스스로 멸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요나라는 선지자를 파송하신다. 그러자 그들은 왕으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님을 믿으며,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금식하며 회개하기를 시작했다. 그것도 짐승까지 40일을 금식하면서 말이다. 그때 그들은 그 기간 동안 울며 통곡하면서 자신의 죄를 자복하였고 행하던 악한 일을 그쳤다. 그러자 그들이 악한 길에서 떠난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시어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신다(욘3:10). 그렇다. 하나님은 이처럼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다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죄를 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개인이나 민족은 결국 멸망을 받게 되는 것이다. 고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만세 전부터 멸하기로 작정된 자를 이 땅에 보내시어 그를 마침내 멸망으로 이끌어 가시는 그러한 폭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누구든지 회개하기만 하면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6. 하나님의 만민 처우 원칙은 무엇인가?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를 미리 정해 놓고 그렇게 이끌어 가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만민 처우 원칙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멸망의 자식으로 예정하여 지옥 보내려고 만들어 이 땅에 내려보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토기장이가 처음부터 깨뜨려 버릴 목적으로 그릇을 빚지는 아니하시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죄많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셔서 이 땅에 사명자로 내려보내는 이들이 있다. 

  둘째, 어떤 사람이라도 다 어떤 쓰임과 용도에 합당하도록 안배하신다는 것이다. 그중에 복을 주실 대상은 하나님께서 아예 처음부터 그러한 목적으로 빚으시고 그렇게 해서 창조된 사람을 이 땅에 내려 보내신다. 하지만 악한 용도는 처음부터 악한 용도로 사용하시려고 창조해서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이 태어나서 악한 영들의 영향을 받아 그리고 조상들의 지은 죄를 따라 살다 보니, 하나님의 백성을 징계하기 위한 악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셋째, 비록 죄를 많이 짓고 악한 영에 속하여 자신이 악한 종으로 쓰임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한다면 그런 자라도 얼마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다. 비록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룰 도구로서 빚어져서 이 땅에 보내졌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를 짓게 된다면 그 사람이나 민족은 예정된 복을 받지 못한 채 멸망을 받게 될 것이다. 

 

7. 나오며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구원과 멸망을 만세 전에 미리 정해 놓으시고 그것을 강요하시거나 그렇게 강제로 끌고 가시는 분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천사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어 하나님처럼 선택의 자유의지를 주시고 따라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그 결과를 멸망으로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구원 여부의 문제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또한 회개함으로 비로소 이뤄져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고 하셨다(빌2:12).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행하셨다. 심지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속죄제물로 내주시기 위해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일하셨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구원받기를 바라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 이후 인간은 사탄의 꾀임을 받아 저주의 길로 계속 걸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지금도 사명자를 이 땅에 내려보내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시고자 어떤 사람을 당신의 종으로 선택하여 이 땅에 내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왜 나를 그러한 종으로 만드시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땅에 노아와 같은 자, 예레미야와 같은 자, 세례 요한과 같은 자가 태어나고 있으며, 또한 사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러한 선지자들의 외침을 듣고 자신의 죄를 뉘우쳐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고 계신다. 그래서 5천 년 동안 우상과 귀신을 숭배하던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도 역시 선교사들의 복음을 듣고 구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바로 역사의 한복판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회개와 천국복음을 깨닫는 자는 이 시대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해 나가야 한다. 다른 이들도 이러한 회개와 천국복음을 듣게 하여 그들도 구원받게 하는 만민의 제사장적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저 하늘에서 영원히 빛날 영예과 신분을 얻게 하실 것이다. 

 

  

2023년 02월 26일(주일)

정병진목사

 

 

<명령과선포>

1)감사와 회개

주여, 토기장이의 비유가 어떤 비유인지를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토기장이의 비유는 사람이나 민족이 어떤 용도로 쓰임받는 것인가에 관한 비유라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사람은 선한 용도나 악한 용도로 쓰임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아무리 선한 용도로 쓰임받도록 처음부터 예정되었다고 할지라도 본인이 스스로 하나님을 버린 채 죄를 짓게 되면 그에게 약속된 복이 철회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이 세상에서 악한 용도로 쓰임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그에게 내리기로 되어진 재앙 역시 철회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그동안 토기장이의 비유를 구원에 관한 절대주권 교리로 오해했나이다. 용서해 주소서.

 

2)장자권 누림의 결단

주여, 이제는 주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자가 되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주님께서 우주와 인류에 관하여 절대주권을 갖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주여, 이제는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어떤 용도로 쓰실 것인지에 관하여 절대주권을 갖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주여, 이제는 아무리 잘못 했어도 회개하면 주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이제는 비록 나 자신이 선한 도구로 선택받았다고 할지라도 죄를 계속 지으면 예비된 복이라도 상실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3)장자권의 누림, 명령과 선포

이제까지 나로 하여금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믿게 하여 나태한 신앙생활을 하게 만드는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이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과도하게 해석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해 주신다고 믿게 만드는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믿고 순종하며, 회개할지어다.

 

4)오늘의 말씀의 핵심

1. 교리를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위험할 수 있구나.

2.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는 많이 왜곡된 교리였구나.

3. 토기장이의 비유는 인간의 창조로부터 그리고 선택과 쓰임에 관하여 하나님께 절대주권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구나.

4. 토기장이의 비유는 만세 전에 한 인간과 민족의 구원과 멸망을 미리 다 정해 놓으셨다는 비유는 아니었구나.

5. 선한 용도로 지음을 받았더라도 주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화를 면키 어려운 것이로구나.

6. 악한 용도로 쓰임을 받았어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가 있구나.

2023-02-19(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예레미야강해(11) 하나님(예수님)과 맺은 새 언약을 파기하면 어떻게 되는가?(렘11:1~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BkNMNK7Tdhg [또는 https://tv.naver.com/v/33750720]

 

1. 들어가며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선지자의 외침이 왜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구약성경의 말씀은 일종의 모형이자 예언의 기록이고, 신약성경의 말씀은 실체이자 성취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우리 모두에게 본보기가 되며,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했다(고전10:11). 그렇다. 우리는 구약의 말씀을 통해서 지금의 우리 시대를 가늠해 볼 수 있으며, 또한 미래도 함께 준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외침은 대체 어떠했는가? 우리는 예레미야의 외침을 통해 하나님께서 언약을 배반한 자가 받을 심판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새 언약을 맺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언약을 배반했을 때 어떤 결과가 주어질 것인지도 알려 준다. 그렇다면 '새 언약'이란 대체 무엇이며, 누가 언제 어디서 맺은 것일까? 그리고 그 언약을 배반할 경우에 언약 대상자는 과연 어떤 결과에 직면하게 되는 것일까?

 

2.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옛 언약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인류와 맺은 언약은 딱 2번 있었다. 한 번은 B.C.1446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것이었다(출19~24장). 이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들을 쇠풀무인 애굽 땅에서 구출해 낸 여호와임을 밝히신 후에, 당신이 그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3가지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렘11:4~5). 그것은 첫째,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을 것이고 당신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렘11:4). 그리고 둘째, 그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하셨다(출19:5~6).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그들을 반드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하셨다(렘11:5).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기쁨으로 환영하면서 그 말씀을 순종하겠다고 했다(출19:8). 그러자 이때 중재자로 나섰던 모세가 양푼에 소의 피를 담아가지고서 제단에 뿌린 뒤에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뿌리면서 "이것이 언약의 피다"라고 말했다(출24:5~8). 다시 말해 이 언약을 지키지 않는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내용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아예 돌비에 새겨서 주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한 언약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우상을 만들어 그것에게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는 말씀을 위주로 한 십계명의 말씀이었다(출20:1~17). 그런데 만약 그들이 십계명의 말씀을 지킨다면 위와 같은 3가지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시내산 언약은 곧 결혼 서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 안에 들어 있는 백성만을 자기의 보배로 삼으시고 그들로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실 것이며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고 서약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역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자신의 신으로 섬기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다. 

 

3.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굳게 맺은 언약을 어떻게 했는가?

  시내산 광야에서 언약을 맺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최종적인 축복으로서 가나안 땅에 입성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12지파들이 기업으로 분배를 받게 된다. 그런데 가나안 땅의 풍성함에 취해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차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섬긴 신은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다. 이처럼 그들은 이방신들을 숭배하면서 음란과 쾌락을 즐겼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로 하여금 이방신들을 버리고 주께 돌아오도록 여러 선지자들을 보냈다(렘7:25~26).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푸른 나무 아래에서 여러 우상들을 세워 놓고 거기에 절하고 향을 피우고 술을 부어 드렸으며 과자를 만들어서 바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죄는 북이스라엘 10개 지파만 그렇게 지은 것이 아니라 남유다의 2개 지파도 마찬가지였다(렘3:6,8). 그러자 결혼 서약과 같은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북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약속의 땅에서 뽑혀 앗수르로 끌려갔으며, 남유다 역시 B.C.586년에 약속의 땅에서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4. '새 언약'이란 무엇이며 언제 어디서 누가 세우게 되었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회복도 말씀해 주셨다. 남유다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뽑혀 포로로 잡혀가더라도, 그곳에서 죄를 달게 받으면 그 남은 백성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불러들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렘12:15). 그리고 때가 되면,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더불어 새 언약을 체결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렘31:31~33). 그리고 그때에는 그 내용을 돌비에 써 주지 아니하고 성령을 통해 사람 마음속에 새겨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그들은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이러한 새 언약은 과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체결된 것일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곧바로 남유다의 백성들과 체결하지는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약 600년을 기다리셨다. 그리고 드디어 '새 언약'을 체결하신다. 그것은 A.D.30년경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유월절 하루 전날 밤 마가다락방에서 당신의 12제자들과 세우신 것이었다(눅22:14~20). 그렇지만 주님께서 그때 제자들과 세우신 새 언약은 단지 12제자들과만 세우신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될 모든 사람들과 세우신 것이기 때문이다(요17:20).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고 언약 안에 들어오게 되면, 누구든지 '영적인 새 이스라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갈6:15~16). 그런데 새 언약은 동물의 피가 맹세로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예수님의 피였다. 그날 주님께서는 포도주 잔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하셨다(고전11:25). 그렇다. 이번에는 동물의 피로 맹세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로 맹세를 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고 말한 것이다(행20:28). 그러니 새 언약은 옛 언약보다도 더 엄중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5. 신약의 성도들이 예수님과 맺은 새 언약을 파기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오늘날 신약의 성도들이 예수님과 맺은 새 언약을 파기한다면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가? 그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옛 언약을 파기했을 때에 받게 된 형벌이 그 예표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어떠했는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림으로 인하여 그들은 3가지 축복을 동시에 상실하고 말았다. 첫째, 그들은 저주와 재앙을 받았기 때문이다(렘11:3,11) 그래서 그들의 젊은이들은 전쟁으로 인하여 죽었고, 나머지는 굶주림으로 죽어야 했다(렘11:22~23). 둘째, 그들에게 약속하신 특권이 해제되었기 때문이다(출19:5~6).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보배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는 축복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그 축복을 영적인 새 이스라엘인 교회가 받아서 현재 누리고 있다. 셋째, 그들이 살고 있던 약속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뽑혀 나가서 그 땅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렘1:10). 

  그런데 신약의 히브리서의 기자는 유일하게 예레미야를 통해서 약속한 새 언약에 대해 두 번씩이나 언급했던 유일한 성경 기자로서(히8:813, 10:16~18), 그는 새 언약을 어긴 성도들이 받게 될 엄중한 형벌에 대해서 소상하게 일러주었다(히10:26~29). 그것은 첫째로, 주님을 배반한 것에 대해서 더 이상 속죄하는 제사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둘째, 두려움 가운데 심판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또한 셋째,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것은 옛 언약을 어긴 자들이 받은 형벌보다 더 무거운 형벌이 될 것이라고 했다. 

 

6. 무엇이 과연 '새 언약'을 깨뜨리는 일이며, 그 최종적인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과 새 언약을 체결한 신약의 성도들 그래서 예수님과 결혼 서약을 한 성도들은 과연 어떤 것을 행했을 때에 새 언약을 깨뜨리는 것이 되는가? 그것은 크게 2가지로 볼 수 있다.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히10:28~29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것을 요약한다면 첫째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과 그분이 나를 죄로부터 구원할 유일한 구원자가 되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아들이 되시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셔야 했는지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분만이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이시며, 그분만이 인류의 구원자가 되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곧 십계명의 1~2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어느 날이 되면, 그러한 시험의 날이 아마 도래할 것이다. 그때에는 우리 예수믿는 자들에게 어떤 불이익이 주어지게 되고, 어떤 고난이 주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어떠한 죽음의 위협이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 우리도 죽는 날이 올 것인데 그 죽음의 날이 좀 더 빨리 온 것 뿐이다. 고로 우리는 죽음을 당당하게 맞이해야 한다. 죽어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과 그분만이 인류의 구원자이셨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을 무효화시키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죄를 깨닫게 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자백하여 죄용서를 받으라고 하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예수께서 왜 피 흘려 죽으셨는가? 그것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속죄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런데 그 속죄제사가 우리에게 효력이 나타나게 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해야 한다(요일1:9). 그래야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악한 영들로부터 우리가 깨끗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대속죄일 제사를 믿는 것만으로 자신이 지은 죄들이 다 용서된 줄 안다. 아니다. 대속죄일 제사는 평소 때 속죄제사를 통해 자신의 죄를 계속해서 용서받은 자들이 그동안 자신이 드렸던 모든 속죄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을 인치는 제사에 속한다. 그리고 혹시 개인 속죄제사 때 미처 속죄하지 못했던 나머지의 죄들을 용서받기 위한 제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대제사장이 되어 골고다 언덕에서 대속죄일 제사를 드린 것을 믿는 것만으로 우리의 죄가 다 용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함으로 회개해야 한다. 그래서 대속죄일 제사 때 흘려진 예수의 피로 인하여 우리가 지은 죄를 속량받아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우리가 혹시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으며 또한 만세 전에 우리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으니, 나의 구원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단지 나에게 회초리(징계)만 대실 뿐 나에게 진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주장이다. 새 언약을 두 번씩이나 언급한 히브리서 기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가 구원에서 탈락하여 맹렬한 불 가운데 던져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두려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더 심할 경우에는 회개가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경고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신 성령께서 계속해서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깨닫게 하시지만 그것을 애써서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목회자의 잘못된 가르침 곧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하는 잘못된 교리를 하나님의 실제 말씀보다 더 신봉한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죽어보면 금방 안다. 

 

7. 만약 우리가 새 언약을 깨뜨리는 일을 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만약 새 언약을 깨뜨리는 일을 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2가지 방면을 처리해야 한다. 

  첫째, 예수님만이 하나님이시며 그분만이 구원자되심을 부인하는 말을 했을 경우, 보다 더 철저하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면서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눈물과 금식으로 일평생을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 심하게 주님을 부인하는 죄는 대속죄일 제사가 효력이 없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예수님의 피의 효능을 인정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던 것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지만, 예수님의 피의 효능이 내게 미치도록 하는 진정한 회개 곧 자백하는 회개를 하지 못했음을 시인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과거에 지었던 죄들을 철저히 자백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죄를 짓게 되면, 그 즉시 자백하여 그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 그래서 자기의 더럽혀진 두루마기를 깨끗하게 빨아야 한다(계22:14).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역시 구약시대의 사람들처럼 십계명을 어긴 죄로 인하여, 불못에 떨어지거나(계21:8), 혹은 새 예루살렘 성밖으로 내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계22:15). 그렇다. 과거 옛 언약을 어겼던 이스라엘 민족이 천국을 상징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뿌리뽑혀 던져진 것처럼, 오늘날 새 언약을 어긴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미 천국 백성이 되어 천국에 집이 지어져 있고 생명책에 이미 이름이 기록된 채 있는 성도라 할지라도 주님을 부인하는 죄와 십계명을 어긴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도 역시 천국에서 뽑혀 성밖이나 불못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다. 

 

8. 나오며

  지금의 시대는 한 마디로 말세지말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순교자의 숫자가 거의 다 찬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곧 있으면 무저갱에 갇혀 있는 바 사탄 마귀가 풀려나서 지상으로 올라올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을 핍박하며 죽일 것이다. 그래서 조금 남아 있는 순교자의 숫자가 채워지면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환난의 때를 준비할 바로 그때다. 주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단단히 가져야 한다. 우리 주님에 대한 신앙을 돈독히 키워 나가야 한다. 그리고 더욱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를 배워야 하며, 성령의 은사를 받아 악한 영들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지은 죄와 내 부모가 십계명을 어겨 지은 죄로 인하여 우리 몸속에 들어와 있는 악한 영들을 회개함으로서 몰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 속아 또 죄를 지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거룩함이 없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했다(히12:14). 그런데 자신의 두루마기를 빨지도 않으면서 자기는 깨끗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아니다. 우리가 한 번 회개한 것으로 악한 영들이 한꺼번에 다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은 죄의 숫자만큼 악한 영들이 우리 속에 들어왔으니 지은 죄의 숫자만큼 우리도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십계명을 어긴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것이 언약의 내용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을 부인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신앙의 지조를 지켜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회개하여 자신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어야 한다. 

 

 

2023년 02월 19일(주일)

정병진목사

2023-02-12(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예레미야강해(05) 하나님은 왜 예레미야에게 2가지 환상을 보여주셨는가?(렘1:11~1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ZK8ijFC0zEQ [또는 https://tv.naver.com/v/33097032]

 

1. 들어가며

  예레미야는 대선지자다. 그는 이사야와 에스겔 그리고 다니엘과 더불어 대선지자로 분류된다. 아마도 그가 쓴 책의 분량이 52장으로 많아서였거나 아니면 그가 예언했던 기간이 40년으로 많아서 그렇게 분류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우리는 그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메시야의 예표로 분류되었던 세 사람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마16:13~14). 그가 예수님 당시 메시야의 예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가 예루살렘 성의 파괴를 앞두고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날카로운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세상의 대제국인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이 장차 종말에 있을 영적 바벨론인 마귀에게 의해 영적으로 타락한 예루살렘인 교회가 멸망당하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려 할 때에 예레미야서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 교회는 선지자적인 부르심이 있는 교회다. 회개와 천국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자적인 사명을 감당할 교회로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이 시대에 회개와 천국복음을 외쳐야 할 것인지에 관하여 많은 힘이 되는 말씀이 바로 오늘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역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는 2가지 환상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사역 초기에 보여 주신 2가지 환상의 의미를 파악해 보고 종말을 향하여 회개를 외쳐야 하는 선지자적인 교회의 자세와 각오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2. 예레미야, 그는 어떤 선지자이며, 하나님은 왜 그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는가?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 아나돗 출신의 제사장의 아들이었다. 그가 경건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이는 그가 성경 기록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의 나이 약 20세 정도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지자로 불러내신다(렘1:5~11). 그때는 남유다 제16대 요시야왕 13년이 되던 해였다(B.C.627년). 그리고 그의 사역은 남유다 20대 시드기야왕 11년(B.C.586년)에 비로소 끝났으니 약 40년간 선지자로 활동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내실 때에 그는 작은 사역자가 아니라 크게 쓰실 사역자로 불러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남왕국 유다의 5명의 왕들을 향하여 예언할 뿐만 아니라 열방의 멸망과 파괴까지도 선언해야 했기 때문이다(렘1:5). 그래서 그는 당시 대제국이었던 앗수르와 애굽 그리고 바벨론의 흥망성쇠까지 예언하였으며, 남유다의 5명의 왕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선포할 내용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여러 이방 민족들과 여러 남왕국 왕들을 향하여 그들을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그리고 그것을 건설하고 심는 일에 대하여 선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0세 남짓의 예레미야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좋은 일을 선포하는 예언이 아니라, 멸망을 주로 선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격려하고 그의 사명에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곧바로 2가지 환상을 그에게 보여 주신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었던 '살구나무 가지' 환상이며, '끓는 가마' 환상이다(렘1:11~15). 

 

3. '살구나무 가지' 환상은 대체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의 소명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하고 그가 해야 할 사역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 2가지 환상을 보여 주셨다. 그중에 첫 번째 환상은 바로 '살구나무 가지' 환상이었다(렘1:11~12). 여기서 '살구나무'는 히브리어로 보면 '샤케드'라는 나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샤케드'를 '살구나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이스라엘 나라에서 '샤케드'는 아몬드나무를 지칭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샤케드'를 살구나무라고 번역한 것일까? 그것은 두 나무의 꽃 모양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똑같이 꽃잎이 5개로 같고, 꽃잎 색깔도 흰색과 분홍색이라는 것도 같으며, 또한 봄이 되면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로서, 잎사귀를 내기 전에 꽃부터 먼저 피운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 나라에는 살구나무가 서식하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는 아몬드나무가 서식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아몬드나무와 비슷한 살구나무라고 번역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왜 먼저 살구나무 가지를 보여 주셨는지를 설명해 주셨다. 그 말씀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번역하면 이렇다. "왜냐하면 내 말이 이루어지기를 내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렘1:12). 여기서 '지켜본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샤카드'라는 동사다. 이 동사는 뜻이 '경계하다, 파수하다, 유심히 지켜보다, 감시하다, 깨어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어 유희(사케드, 사카드)를 사용하여 예레미야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과연 어떤 나뭇가지를 보았길래, 그 나무를 아몬드나무라고 판단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 나뭇가지에 피어 있는 꽃을 보았거나 그 열매를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환상에 있어서 이제 갓 초보자였던 예레미야는 그냥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살구나무가 대체 무슨 의미를 갖고 있길래, 하나님께서는 꽃이 피어 있는 살구나무 가지를 그에게 보여 주신 것일까? 대체 이 나무가 어떤 의미를 지녔길래, 예레미야의 소명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 이 환상을 보여 주신 것일까?

  그것은 첫째, 이 나무가 바로 '깨어 있음, 지킴, 파수함'이라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나무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될 때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 나라 사람들은 이 나무를 보고서, 겨울철에도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다가 봄이 오자마자 꽃을 피운다는 생각 가운데 '깨어 있음, 파수함, 지켜 봄, 잠자지 않음'이라는 뜻으로 그 나무의 이름을 '샤케드'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이것을 증명해 주는 일이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성막의 금등대를 살구(아몬드)꽃 모양으로 만들라고 하셨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출25:32~33). 이는 금등대가 캄캄한 밤에도 꺼지지 않고 항상 불을 밝히면서 성막을 지키고 경계하는 역할을 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로 이러한 사실은 대체 무엇을 말해 주는가? 그것은 "비록 네가 어려운 심판 예언을 쏟아내야 하겠지만, 나는 반드시 네게 일러준 말이 그대로 실현되는지를 잠도 안 자고 깨어서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너는 내 말만 전하면 된다. 그 다음은 내가 지켜보면서 반드시 그것을 이루게 하겠다"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들었던 예레미야는 많은 힘을 얻고 용기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말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그 말을 이루실 것이니, 그 정도면 나도 할 수 있어"라는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둘째, 이 나무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때 예레미야가 살구나무만을 본 것이 아니라 살구나무 가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가지'는 '지팡이, 막대기'라는 뜻으로도 쓰이는데, 그것은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통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히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어느 날 레위 자손들이 모세와 아론을 대항하여 제사장직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레위 자손들에게 향로들을 준비하게 하셨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고라 일당을 심판하시면서 향로를 들고 있던 250명의 레위인들까지 다 불살라 죽여 버리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왜 아론을 들어쓰시는지를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12지파의 족장들에게 각각 자기의 지팡이 하나씩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성막 증거궤 앞에 두라고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의 지팡이에만 싹이 날 것이라고 하셨다(민17:4~5). 그때 레위 지파에게는 아론의 지팡이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 다음 날이었다. 오직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움이 돋고 싹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아몬드) 열매가 맺혀 있는 것이 아닌가!(민17:8). 고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 가지를 보여 주신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대제사장 아론처럼 귀히 쓰시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예레미야는 자신에 대한 부르심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끓는 가마' 환상은 대체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두 번째 환상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무엇을 보는지를 물으셨다. 그러자 예레미야는 "제가 끓는 가마(솥)를 보나이다. 그 윗면(얼굴)이 북쪽에서부터 기울어져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렘1:13). 이전에는 단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라고 답변한 것에 비하면 많이 발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은 다 의미가 있는 것들인데 지난번 살구나무 가지 환상에서는 그가 일부를 생략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좀더 소상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벌써 많이 배운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끓는 내용물은 북쪽에서부터 들이닥칠 재앙이라고 하시면서 그것은 북방 왕국들이 모든 족속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쳐들어와서 파괴시킬 것을 뜻한다고 하셨다. 실제로 그러한 일은 그때로부터 약 20년 뒤부터 성취되기 시작하여 40년에 마쳐지게 된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4차 침공 끝에 예루살렘이 패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당시 예레미야가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는 요시야왕 통치 13년으로서, 북방의 앗수르 제국이 쇠퇴하고 있는 시기로서, 남유다가 오랜만에 태평세대를 누리고 있는 시기였고 또한 신앙적인 부흥도 앞두고 있는 시기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벨론은 이제 자그마한 나라를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환상은 먼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미리 내다보는 전능자이실 뿐만 아니라 세계 대제국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자 예레미야도 역시 이것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게 되었으며, 또한 자신이 외치고 선포할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깊이 각인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5.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부름받은 선지자의 각오와 자세를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때였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과 사명을 부여받은 선지자의 각오와 자세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3가지였다(렘1:17).

  첫째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서라"고 하셨다. 이는 '너도 이제 자신에 대한 소명과 사명을 알게 되었으니 일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언제든지 명령만 떨어지면 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내가 명령한 바를 다 말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을 다 그들의 귀에 들려주라는 것이며,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전하라는 것이다. 혹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 된다고 할지라도 꼭 그것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려고 할 때, 이것을 전하면 백성들이 싫어할 것 같고, 저것을 전하면 왕들이 싫어할 것 같으며, 또한 저것을 전하면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싫어할 것 같으니, 골라서 전하려는 마음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디를 보내든지 가야 하며, 누구에게 전하라고 하든지 가감없이 전하라고 하신 것이다. 셋째는 "결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실 예레미야가 가서 전해야 할 대상은 왕들이며 또한 종교지도자들인 선지자와 제사장들이었다. 그리고 그 땅의 지주들과 같은 지도자들이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이들도 예레미야를 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견고한 성읍과 쇠기둥 그리고 놋성벽이 되게 하셔서 결코 예레미야를 이기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자는 그 누구도 맞설 수 없으며, 그를 해칠 수 없고 죽일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보호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손으로 붙들어 주시는 자다. 그래서 목숨까지도 책임져 주시는 것이다. 나중에 우리가 예레미야서를 읽어 보면 알겠지만, 자신의 고향 사람들도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였고, 여호야김왕도 예레미야를 없애려고 하였으며, 선지자들과 제사장들도 그를 치고 그를 괴롭혔고, 시드기야왕은 그를 웅덩이에 처넣어 죽이려고 시도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에게 맞선 자들은 다 죽임을 당하였거나 가족까지 포로로 잡혀갔으며, 시드기야왕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자기 자식들이 죽임당하는 것을 보아야 했으며 자신의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는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특별한 은혜와 보호하심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를 대적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가만 놔두지 않는 것이다. 

 

6.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한 예레미야는 어떻게 되었는가?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명령했던 바대로 되었다. 왕들도 백성들도, 선지자들과 제사장들도 그리고 여러 이방 제국들도 예레미야가 선포한 말씀대로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일에 사명을 완수하게 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사명을 마친 예레미야는 천국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은 천국에서 144,000석의 보좌자리 가운데 2번 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런데 실로 그 자리는 어마어마한 자리다. 수억 명의 구원받은 이들 가운데 겨우 몇백 명밖에 되지 않은 숫자에 예레미야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수천 평이 넘는 대저택 같은 곳에서, 생명수가 철철 넘치는 곳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는 충성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등 무수한 면류관이 씌여져 있다. 그렇다. 자신의 부르심을 따라 목숨걸고 사명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보상해 주는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도 부러움을 살 만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7. 나오며

  오늘의 시대에 교회는 사실상 두 종류의 교회로 분류가 된다. 하나는 제사장적인 일을 수행하는 교회이고, 또 하나는 선지자적인 일을 수행하는 교회다. 제사장적인 일을 수행하는 교회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복을 받으라는 사역을 주로 하지만, 선지자적인 일을 수행하는 교회는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시켜 주는 일을 주로 한다. 신앙생활하기는 제사장적인 일을 수행하는 교회가 좀더 편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말세에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베드로에 의하면, 말세에는 꿈을 꾸고 환상을 보며 예언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했다(행2:17~18). 그리고 사도 요한은 말세에는 두 증인과 같은, 강력한 불의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사역할 것이라고 했다(계11:3~10). 그리고 예수께서도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그리스도들이 일어나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할 것이라고 하셨다(마24:24). 이는 말세가 되면 선지자가 출현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말세가 될수록 참된 선지자를 찾아보기가 어렵겠지만, 그래도 그러한 선지자적 기능을 수행하는 주의 종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주님이 오시기 직전에는 선지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교회와 주의 종이 활동하는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때 참 선지자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과 보호를 받고 천국에 입성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평소 때에 환란과 시련을 이겨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예레미야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에 그를 도와주었던 구스인 에벳멜렉이나(렘38:12~13), 예레미야가 불러 준 말씀을 기록하여 낭독한 서기관 바룩도(렘36:4), 하나님의 은총으로 환난 중에 보호하심을 받았다. 그렇다. 오늘날에는 회개와 천국복음을 외쳐 참된 생명의 길을 제시하는 교회를 주님이 찾고 있다. 그리고 그런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의 때에도 특별한 은총과 보호로 함께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서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도록 하자. 

 

 

2023년 02월 12일(주일)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