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21(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3) 주께서 들려주신 거듭남과 영생의 비밀(요3:1~2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18KQFLbh96U  [혹은 https://tv.naver.com/v/29458957 ]

 

1. 들어가며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과연 자기가 거듭난 사람이 되었으며 영생을 소유했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는 했는데 그가 아직 거듭나지도 않은 사람이거나 영생을 소유해지 못했다면 얼마나 허탈하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이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그리고 영생을 소유했는지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고 그가 영생을 소유했는지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만약 그가 거듭나지도 않았고 영생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거듭남이나 영생을 얻는 것이 과연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서도 가능한가? 오늘은 신앙의 근본적인 질문과 더불어 그 해답을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얻고자 한다. 

 

2. 니고데모는 누구며 왜 밤중에 주님을 찾아왔는가?

  니고데모는 그의 이름이 '니케(우세함,승리함)'와 '데모스(백성)'가 합쳐진 말로서, '백성 위에 우세함'이라는 뜻을 지녔다. 그리고 그는 종교적으로 볼 때 유대교 중에서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었다. 이는 율법을 매우 중요시하는 유대 종교 분파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의 지도자(통치자)였다. 그는 유대의 최고 중앙의결기구이자 최고재판소인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었다. 그는 한 마디로 율법에 있어서 최고 교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밤중에 주님을 찾아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영적 갈증이 대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당시에 유대종교지도자들이 경계하고 있는 예수님을 밤중에 몰래 찾아올 리가 없다. 또한 그는 굳이 다른 유대종교지도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시간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것 같다. 그런데 그는 먼저 예수님을 높이는 말부터 시작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온 채 있으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절대 행할 수 없는 표적들을 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그는 '랍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는 예수님을 율법의 정규과정을 다 밟은 자로 인정한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그의 생각에는 예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보다도 더 뛰어난 분이요 율법에 대해서 뭔가를 더 알고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율법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물어보려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그가 가진 유대교의 율법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거듭태어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거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문제는 율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오직 물과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3. 거듭남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수께서는 율법 안에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온 니고데모에게 한 가지의 대답을 통해 그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그것은 '거듭남'에 대한 대답이었다. 왜냐하면 이때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율법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사람이 거듭나고 또한 영생을 얻는 방법은 율법 안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것은 물과 성령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요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대답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거듭 태어난다'고 하신 말씀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헬라어로 '아노덴'으로서 태어나는 것을 가리키는데, '아노덴'이라는 말은 '다시, 새롭게, 위로부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모태에 들어가서 태어나겠느냐면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육체로부터 태어난 채 있는 것은 육체가 되는 것이요, 성령으로부터 태어나게 되어야 영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요3:6). 그런데 여기에 보니, 거듭남의 과정에는 필수적으로 '물'도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물'은 무엇을 의미하며, '성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물'에 대해서는 베드로 사도와 바울 사도가 잘 이야기해 주고 있으니, 그것은 '물'은 정화의 수단으로서, '세례'로 예표되는 것인데 그것은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회개'라는 방법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행2:38, 딛3:5). 이에 대해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 그렇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거듭남)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듭 태어나려면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며, 성령이 그 사람 속에 생명을 가지고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훗날 자신이 죽고 부활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라고 하셨다. 또한 사도 바울은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께서 생명주는 영으로 오셨다고 말했다(고전15:45). 고로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그 사람 속에 성령이 들어오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사람이 거듭 태어나려면 먼저는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처럼 사람은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하는 것이다. 참고로 이렇게 사람이 거듭 태어나게 되면 그 순간에 무슨 변화가 생긴다. 그것은 그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되며, 그를 돕기 위해 그 사람만의 수호천사가 파송이 된다. 

 

4. 사람은 어떻게 거듭 태어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거듭 태어날 수 있는가? 그것은 자신의 먼저는 회개해야 하며 또한 믿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먼저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그것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뉘우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난 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이 자신의 죄를 없애는 것이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 속에 영접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자신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신다. 이 때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신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는 방법은 '회개'와 '믿음'이라는 수단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사람은 결코 율법을 지켜서 거듭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람의 거듭남은 오직 예수께서 행하신 구속사역을 믿고 믿는 자들에게 보내주시는 성령을 영접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이 믿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을 니고데모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 구약성경에 나오는 한 편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것은 곧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놋뱀 사건이다(요3:14).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있었을 때였다. 그들이 홍해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그들의 마음이 많이 상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하였다. 모세더러 자기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인도해 냈느냐면서,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곳에 왜 데려왔느냐고 하면서 불평했다. 그리고 하찮은 만나같은 음식은 더이상 자기들에게 싫증난다고 외쳤다. 그러자 화가난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그들을 물어 죽게 하셨다. 이에 독이 퍼져 고통받고 있을 때에 그들은 모세를 찾아가 말했다. "우리가 여호와와 모세에게 원망하여 범죄를 했으니, 이 뱀들을 떠나가게 해 달라"고 청원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한 가지 방법을 지시하셨다. 그것은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혹 뱀에 물린 자가 있으면 그것을 쳐다 보라고 하셨다. 그러면 살게 된다고 하셨다. 그러자 모세가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아두었다. 그러자 백성 중에 뱀에 물린 자들 중에는 놋뱀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뱀을 쳐다본 자는 모두가 살아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 독뱀에 물렸으면 빨리 독있는 피를 흘려버고 해독제를 먹어야 살아날 것인데, 놋뱀을 쳐다보았는데 그만 살아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거듭남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신 예수께서 놋뱀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곧 믿음인 것이다. 

 

5. 거듭남에 있어서 율법은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가?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때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왕국은 오직 율법을 지킴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율법 안에서 의롭다하심을 얻고 또한 구원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율법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정확히 가르쳐주셨다. 그것은 오직 '회개'와 '믿음'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율법으로는 사람이 중생할 수 없는가? 그것은 사람이 모든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법을 다 지켜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이것이 율법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온갖 말씀을 준행하지 않는자는 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했기 때문이다(신27:26). 사실 이러한 율법과 거듭남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문제는 니고데모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훗날 사도 바울도 이 문제에 부딪혀서 약 3년 동안 아라비아 광야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당시 바울도 분명히 예루살렘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현장을 목도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그때 바울은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21:23에 말씀에 따르면, 누구든지 나무에 달려 죽는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께서는 분명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저주받아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기고 정결법이나 음식법을 어기고 성전을 모독하는 말을 하여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죽고 없어진 그분이 어느날 생시에 그것도 대낮에 자기의 눈앞에 나타나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분이 살아서 말씀을 하셨다. 그러자 바울은 깜짝 놀랐다. 죽은 자는 절대 다시 살아서 이 땅에 돌아올 수 없는데 그분이 자기의 눈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저주받아 죽은 예수님과 그때 자기 눈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관계를 어떻게든 정리해야 했다. 결국 그가 깨달은 것은 율법은 의롭고 거룩한 것이지기는 하지만,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죽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 조항을 다 지키며 살아갈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임을  깨닫게 된다. 율법의 온갖 저주를 그분이 대신 담당하시려고 속죄양이자 아사셀양이 되신 것이다. 그리하여 율법의 저주 아래 갇혀있는 모든 자로 하여금 더이상 저주를 받지 않아도 되는 길을 새롭게 그분이 여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예수께서 대신 받으신 저주를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이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예수님의 피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유일한 아들이셨지만, 그분이 죽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이 생명을 받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 율법으로서는 도무지 사람이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받지 못하고 오로지 저주를 받는 것이지만,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모든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어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의 법칙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자. 

 

6. 영생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얻는가?

  이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던 사도 요한은 이제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지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그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3:16~21까지의 말씀이다. 이 부분을 어떤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들려주신 말씀이라고 분류하기도 하지만, 본문을 찬찬히 살펴보면, 예수께서 자신을 가키려 "나를 믿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고 "그를 믿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믿음과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이 부분은 아무래도 사도 요한이 영생을 얻는 방법에 관하여 해설을 붙여놓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영생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내주셨는데 이는 그를 믿고 있는 모든 자가 다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여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요3:16).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 안으로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오히려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그분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영생을 얻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려고 하는 영생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참고로 이것을 안다는 것을 요한복음의 저술목적을 아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요20:31). 다시 말해, 사도 요한이 앞의 3개의 공관복음서 외에 요한복음을 또 기록했던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하려 함이며, 그의 이름 안에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영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버지만 가지고 있는 생명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먼저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주셨다(요5:26).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계실 때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 안에만 있었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생명'은 어느 시기에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내세'다. '다음 시대'인 것이다. 사람이 죽고 나서 자신의 영이 가서 사는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생명을 이 땅에서 얻지 못한 채 죽는다면 그는 사망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가 멸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 땅에 살아있을 때에 이 생명을 얻지 못한 채 죽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사망'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있고 또 나를 보내셨던 분을 믿고 있는 자는 영생을 가진다. 그리고 심판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사망에서부터 생명 안으로 옮겨진 채 있는 것이다(요5:24)" 그렇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는 자는 다음 시대에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생명을 얻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가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컴컴한 곳으로 가서 살아야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다음 시대에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한 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이 인류를 대신하여 죄값으로 십자가에 달려죽은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영생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고로 영생이란 단지 영원히 사는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만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으로서, 이 생명을 가진 자는 죽은 후에 다음 시기에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으로 가서 거기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7. 사람은 왜 영생을 얻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왜 사람 중에는 영생을 얻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빛으로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함으로 인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요3:19). 그래서 악을 행하고 있는 자는 모두 다 빛을 미워하게 되는데, 이런 자는 빛을 향하여 나아오지도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더럽고 추한 자신의 죄된 행위들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요3:20). 그렇지만 오직 진리만을 따르는 자는 빛으로 나아온다. 그들은 자신에게 죄가 있으면 자기의 죄를 예수님께 고백함으로 용서를 구한다. 또한 이런 자들은 빛되신 예수님 안에서 행한 행동을 통해서 자신이 빛된 자녀라는 것을 드러내며 산다(요3:21). 그렇다. 사람이 영생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빛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며, 그분이 우리의 죄를 없이하기 위해 행하신 일을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자기자신이 심판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대로 그분을 믿고 있는 자는 자신이 죽을 때에 심판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요3:17~18).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그래서 이 복음을 나만 알고 있지 말로 전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8. 나오며

  사람은 어떻게 거듭나며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그리고 '거듭남'이란 대체 무엇이며 '영생'이란 또 무엇인가? 우리는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거듭남과 영생에 대해 살펴보았?다. 사람의 거듭남은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을 때 일어난다. 그리고 그 방법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으로서 이는 '회개'와 '믿음'의 방법으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이유에서다. 그것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다음 시대에 가져야할 생명으로서, 아버지의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킨다. 그리고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사람이 죽은 후에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을 얻은 자가 다음 시대에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망'이란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생명을 얻지 못한 자가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어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오직 믿음이라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 곧 율법의 의식법들을 지켜서 거듭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서 사람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어렵다. 또한 율법은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도 없다. 율법을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지하고 사려깊은 니고데모라 할지라도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렇다. 율법보다 430년전에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법칙이 지금도 율법보다 선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의 법은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으니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 거듭 태어나기도 하고 영생을 얻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알고 보면 이처럼 쉽고도 간단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영생의 법을 모르고 있거나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있는 자들을 위해, 먼저 믿어 거듭난 우리가 그들의 구원을 위해 중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의 도리인 것이다. 

 

 

2022년 09월 21일(수)

정병진목사

 

2022-09-04(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2) 헐면 사흘 만에 일으시키겠다던 성전, 대체 무엇을 가리킴인가(요2:13~2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VmXmYzIyJrw  [혹은 https://tv.naver.com/v/29089470 ]

 

1. 들어가며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그분이 맨 처음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는 언제였을까? 그때는 절기상으로 유월절이었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야 했는가? 그리고 그때에 성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그분이 그때 행하신 일은 성전을 청소하는 일을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이 일에 화가난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묻는다. 대체 무슨 권위로 이러한 일을 행하는 것이며 그럴 자격이 있다면 어떤 표적이라도 보여보라고 말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들이 이 성전을 허물라. 그리하면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이것이 바로 '표적'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표적'이란 대체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던 '표적'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었을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께서 행하신 성전 청결기사를 통하여 왜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또한 성전 청결을 하셔야 했는지 그리고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던 유대인들에게 왜 예수께서는 자신과 죽음을 부활이 표적이라고 예언적으로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래서 '표적'의 진정한 의미와 그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2. 왜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으며 그때 성전을 청결케 하셨는가?

  왜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가? 예수께서도 이스라엘의 20세 이상의 모든 성인 남자들이 절기가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절기를 지켜야 한다는 율법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인가?(출23:17)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일은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때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어떤 일을 수행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전을 깨끗히 청소하는 일을 하신 것이다(14~16절). 그 일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신 다음,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소들과 양들을 전부 쫓아내시고, 돈바꾸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셨으며,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져가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계속]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16절). 이는 장차 유월절 양으로 죽으실 예수께서 아버지의 집을 깨끗히 청소하기 위한 것임을 뜻한다. 왜냐하면 성전은 아버지의 집인데, 아버지의 집이 더럽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상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집안에 있는 누룩을 다 제거해야 했다. 그리고 유월절 양을 준비하되 그 양이 흠이 있는지 없는지 4일동안 점검해야 했다(출12:3~6,19절). 그런데 유월절 양을 잡는 성전이 그만 돈벌이로 인하여 매우 더럽혀져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매우 분노하셨다. 그 분노는 시편69:9의 말씀처럼, 주의 전의 열심이 예수님을 삼켜버릴 정도였다. 그렇지만 교권을 가진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행위를 제지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성전을 이용하여 장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둘기와 양과 소들을 비싼 값으로 팔아 이윤을 남기고 있었으며, 환전상들은 무려 12,5%라는 환전수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모든 성인 남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것을 제사장들이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즉 해마다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 성인 남자들은 성전에 와서 2가지 일을 해야 했다. 하나는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 했고, 또 하나는 희생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런데 머나먼 이방지역에서 살던 이들이 성전세를 내려 할 때에는 자기들의 사용하던 돈으로 성전세를 낼 수가 없었다. 성전세는 오직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성전세겔(은화)로 바꾸어 성전세를 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권한은 당시 제사장들이 쥐고 있었다. 그리고 제물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멀리 살던 백성들이 가지고 온 제물들은 어찌하든지 꼬투리를 잡아 제물로 드릴 수 없게 했고, 오직 성전에서 파는 희생제물만은 아무런 하자없이 통과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비둘기는 무려 12배를 남겨먹었다고 한다. 그렇다. 종교지도자들이 타락하면 이렇게 추하게 되는 것이다. 돈에 눈이 멀면 하나님까지도 떠나버리게 되는 것이다. 

 

3. 무슨 권위로 그러한 일을 행하는지 물으면서 표적을 보여달라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대답을 해주셨는가?

  그러자 유대인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과 환전상의 일을 하는 사람들과 매우 연관이 있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흥분하여 예수께 말했다. "당신이 이런 일들을 행하는 것으로 인하여, 당신은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겠소?"(2:18). 이는 예수께서 대체 무슨 권세로 제사장들이 하는 일들을 방해하며, 그럴만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 표적을 통해서 증명해 보이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답변하셨다. "당신들이 이 성소를 [단번에] 허물어뜨리시오. 그러면 내가 세 날들 동안에 그것을 [장차] 일으켜 세우겠소"(2:19). 그러자 그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 성소는 무려 46년동안 건축된 것이오. 그런데 당신이 세 날들 안에 그것을 장차 일으키겠단 말이오?"(1:20). 그랬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으로 말씀하신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제자들마저도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22절).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에야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성소'라는 것을 당시 건물인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인 성소를 의미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4. 성소를 헐고 다시 일으키시겠다는 말이 왜 표적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표적'과 유대인들이 요구하던 '표적'의 개념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기적으로서의 표적을 요구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행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인정하겠다는 것은 당시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는 일을 행하시자 그들은 그분에게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생각하는 표적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표적'이란 그것을 통해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알게 해주는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들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으로는 총 7가지다. 하지만 실제 예수께서는 7가지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20:30).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사람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증명해줄 수 있는 기적들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그러한 표적은 그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눅11:29). 다만 그분이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하셨다. 그것이 바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성전을 헐라'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은 '죽은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정확히 요나가 말했던 바로 그 표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때 누가복음의 저자는 요나의 표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눅11:29-30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그렇다. 요나 시대에는 요나 자신이 표적이었다. 요나의 기적이 표적이 아니라 요나 자신이 표적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서 니느웨 성에 가서 외치기를, 회개하지 않으면 앞으로 40일 후에 멸망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니느웨성 사람들은 회개를 하여 40일 후에 멸망을 당하지 아니했다. 하지만, 요나 대신 와서 표적 자체가 되신 예수님의 시대에는 달랐다. 그분이 오셔서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회개할 것을 외치셨지만, 그때에는 아무도 그분의 소리를 경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40년만에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을 당해 지구상에서 나라가 사라진다. 그렇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표적'이란 어떤 기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 자신과 그분의 삶이 곧 표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께서 사내아이로 탄생한 것 자체부터가 '표적'이라고 했다(눅2:10~12). 왜냐하면 아기이자 아들로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라는 이사야 9:6의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성취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눅2:10-12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5.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의 본 뜻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왜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이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던 것일까? 그것은 당시 물질적인 성전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멀리 외국에 사는 이들은 절기가 되면 하나님의 집을 찾아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물질적인 성전이 더럽혀 있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으셨다. 하나님과 성전을 그만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이들을 그냥 놔두고 볼 수만은 없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신 후에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특히 남유다의 므낫세 왕 즈음으로 추정되는 어느 시기에, 지성소의 법궤 가 이미 다른 장소로 이동되었기에, 솔로몬의 성전 안에는 그 뒤로 법궤가 없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 후에 돌아와서 지었던 스룹바벨 성전 안에도 역시 법궤는 없었다. 당연이 예수님 시대에 헤롯 성전 안에도 법궤는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하게 법궤의 속죄소의 두 그룹 사이에 계시겠고 거기에서 사람을 만나고 말씀하시겠다고 하셨다(출25:22). 그러므로 사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당시 성전과 함께 일하는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는 거기가 아니라 딴 곳에 있었다. 그곳은 바로 '예수님의 몸'이었다(21절).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 땅에 들어오실 때에 혼자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오셨기 때문이다(요8:29). 그러므로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몸이 바로 진정한 성전이었던 것이다. 예수님 안에 아버지께서 계셨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성전을 방문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성전이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이요,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더럽혀진 물질적인 성전 안에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 아니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요14: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진짜 어디에 아버지가 계시는지를 그들로 하여금 알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19절). 왜냐하면 예수 안에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중에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는 빌립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14:9-10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랬다. 예수님 당시에 아버지께서는 물질적인 성전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 안에 계셨기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를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려는 진정한 '표적'이었다. 그리고 그 '표적'은 예수님 자신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3년 뒤 자신을 산 제물로 그들에게 내어주셨다. 그리고 죽은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죽었다가 스스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에게는 정작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40일 뒤에 승천하셨다. 그리고 하늘로 가셔서 약속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 속에 성령이 들어오시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제 성령의 전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의 몸은 하나님의 집(성전)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이들 속에 성령으로 아버지께서 들어오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전3:16~17)

고전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이제는 예수믿는 자들 곧 교회가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성전(성소)이라는 것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영이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전을 함부로 더럽혀서는 아니 될 것이다. 만약 그래도 자신의 성전을 더럽힌다면 예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신후에 그들을 쳐 내버려 불못에 던져버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6. 예수께서 사람을 신뢰하여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께서는 유월절과 무교절 기간에 예루살렘에 계셨다(23절). 그리고 거기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에 있던 자들에게는 표적으로 보였겠지만 예수님 자신이 누군지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진정한 표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던 자들이 온전한 신앙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표적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게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유월절과 무교절 기간에 행하셨던 것들은 그러한 표적들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만을 보고 믿었던 자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다(24절).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지, 표적을 통해 예수님이 누군지를 진정으로 알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나중에 배우겠지만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도 일종의 기적이면서 동시에 표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하늘 아버지의 생명을 주려 오셨던 분으로 믿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떡을 먹고 배부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다. 그랬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그러므로 사람의 모든 속을 다 헤아리고 계셨던 예수께서는 당신자신을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디. 또한 그들의 증언을 기다리지도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목적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따랐을 뿐 예수님이 진정 누군지를 믿으려고 따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23~26절).

 

7. 나오며

  오늘 우리는 성전청결사건을 보고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들었다. 그런데 이 말씀이야말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표적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 중에 '표적'이라는 낱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은 기적 가운데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 줌으로 인하여, 그것을 믿는 자들이 영생을 받는 것이라야 한다(요12:37).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참으로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고 또한 기사(기적들)도 행하셨다고 증언한다(요12:37,20:30). 그런데 예수께서 행하셨던 표적들은 그리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주어 그분을 구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하고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단지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어떤 신비한 기적 같은 일을 '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예수께 줄기차게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을 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이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일으켜 세을 것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삶이 곧 표적이며, 그 표적의 핵심은 '요나의 표적'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요나 당시에 요나 자신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된 것처럼,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께서 그들에게 표적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예수께서 누군지를 알려주는 표적 중의 표적이며, 그것을 믿는 자들은 곧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를 만들었을 때에 제자들이 그분을 믿었다고 하는데(2:11),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주로 믿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사건의 핵심은 바로 그분의 죽음에 있다. 곧 예수께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겠다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겉으로 표출된 것이 당시 '포도주'였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지금 무엇을 믿고 따라가고 있는가? 그분이 날마다 우리에게 기적을 일으켜 주시어, 우리의 삶이 윤택하게 되는 것 때문에 그분을 믿고 따라가야 하는가? 아니다. 그래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따라가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주이자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 일이 우리를 죄로부터 용서받게 해 주며 그것만이 우리를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게 해주며, 우리를 저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2022년 09월 07일(수)

정병진목사

 

2022-08-10(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10) 예수님의 12가지 신앙고백에 대한 영적인 의미(03)(요1:35~5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hNIUSyIdnaM  [혹은 https://tv.naver.com/v/28492123 ]

 

1. 들어가며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주제는 성경에서도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또한 우리들이 가진 신앙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주제다. 예수님이 누군지를 아는 일은 곧 우리의 영생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기도하실 때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구약시대에도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이라고 촉구했는데,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장가들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호2:19~20).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분량만큼 우리의 영생의 분량도 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두 시간을 통하여, 요한복음 1장에 있는 세례 요한의 신앙고백에 나타나있는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오늘은 다섯 명의 첫 제자들에 의한 예수님의 신앙고백을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는 일곱 가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공부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분량을 한층 더 깊어지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 요한복음 1장에 있는 세례 요한과 첫 제자 5명이 고백했던 신앙고백 12가지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지난 두 시간을 통해,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신앙을 고백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총 5가지였다. 세례 요한은 첫째로,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했다(요1:29). 그리고 둘째로, 그는 그분을 '먼저 계신 이'이라고 했다(요1:30,15). 셋째와 넷째로 그분을 '성령이 머물러 계신 이(요1:33a)'이자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요1:33b)'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다섯째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요1:34)'이라고 했다. 그렇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신앙고백을 분석해 보면 먼저 예수님의 본질적 특성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그분이 '먼저 계신 이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이어서는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적 특성으로서 그분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으며, '성령이 머물러 계신 이'이자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첫 다섯 명의 제자들의 고백을 통해 일곱 가지 신앙고백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그분이 '랍비'이자(요1:38,49), '메시야(그리스도)이며'(요1:40),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이'이자(요1:45a),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이'이며(요1:45b),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이자'(요1:45c), '이스라엘의 왕'이며(요1:49), 그리고 제자들이 고백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예수님께서 자기자신이 누구라고 언급했던 명칭으로서 '인자'(요1:51)가 있다. 

 

3. 예수께서는 어떻게 '랍비'라 칭함을 받았을까?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의해 다섯 가지로 증언된 바 있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 의해 소개를 받은 자로서, 예수님을 따라갔던 세례 요한의 두 명의 제자도 예수님을 증언했다. 이때 그들 중의 한 사람은 '안드레'였고 또 한 사람은 사도 '요한'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갔을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찾는지를 물어보셨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랍비여'라고 칭한다(요1:38).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어서 처음 만난 예수님을 향하여 '랍비'라고 칭했던 것일까? 이러한 칭호는 요한복음에서 8차례나 등장하고 있는데, 첫번째는 안드레와 요한이 그리고 두번째는 나다나엘이 그렇게 칭한 것이고(요1:49), 이어서 산헤드린 공회원인 니고데모가 그렇게 칭했다(요3:2). 그리고 나머지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칭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 혹은 "다윗의 자손"이나 "만물의 주재"라고 호칭하지 않고 '랍비'라고 칭했던 것일까? 먼저 그 뜻부터 알아보면, '랍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의 선생님(스승,교사)'이라는 뜻이다. 이는 그분을 존경한다는 의미이자 존중한다는 의미로 부르는 칭호다. 그러다가 '랍비'라는 용어는 율법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굳어져갔다. 왜냐하면 이러한 칭호는 적어도 율법 말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랍비'라는 용어는 정식으로 율법교육을 받은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이 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당시 안드레나 요한 그리고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향하여 '랍비'라고 칭했다는 것은 이들 자신들도 율법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았음을 알려주며, 그들이 예수님을 적어도 율법말씀을 증언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율법교사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백성들로부터 이러한 칭호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에게는 서로에게 랍비라고 칭함을 받지 말 것을 권하셨다(마23:8). 왜냐하면 제자들은 다같은 형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읔 13장에 보면, 예수께서 '주'와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가리켜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고 말씀하셨다(요13:13). 그분은 '주님'이자 '선생님'으로서 그들에게 섬김의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에게 참된 영적인 스승은 예수님이시요, 또한 예수께서 보내신 보혜사 성령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예수님에 대한 일곱 번째 신앙고백으로서 '메시야' 혹은 '그리스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의 첫 제자들에 의해 고백되어진 메시야 혹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은 어떤 고백을 가리키는가? 이것은 안드레가 고백한 용어이다(요1:41).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께서 계신 곳을 찾아가 그분을 만나 본 후 안드레는 자기의 형인 베드로를 찾아가서 말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말이다. 이때 '메시야'라는 용어는 히브리어로 '마쉬아흐'에 대한 한글음차로서,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메시야'라는 말은 '그리스도'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용어는 예수님에 대한 어떤 신앙고백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구원자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용어는 처음에는 왕으로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는 이에게 붙여진 용어로 쓰였기에, 예수님이야말로 이 땅에 이스라엘의 왕이자 유대인의 왕이며 더 나아가서는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로서 공적사역을 수행하신 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마쉬아흐'라는 용어는 대체 누가 제일 처음 사용했던 것일까? 그것은 구약시대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제2대 왕이었던 다윗이 자신의 선왕이었던 사울에 대해 사용했던 단어였다(삼상24:6).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마쉬아흐)'를 죽일 수 없다고 자기의 사람들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서 사울을 지정하여 그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삼상9:16).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았다. 그후로 이스라엘에게서 왕이 될 자들은 늘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었다. 다윗도 그랬고 솔로몬도 그랬다. 다윗은 어렸을 때(약 15세쯤)에 베들레헴에서 사무엘선지자로부터 1차로 기름부음을 받았고(삼상16:13), 2차로는 헤브론에서 유다 사람들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아서 유다지파의 왕이 되었다(삼하2:3~4). 그리고 또다시 헤브론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로부터 세번째로 기름부음을 받고 그는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두번째 왕으로 등극한다(삼하5:3). 한편 시편 기자도 역시 다윗을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기록하였다(시2:2). 이것은 다윗이 장차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왕으로 사역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 땅에 유대인의 왕이자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으며, 훗날에는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로서 철장권세를 가지고 재림하실 분이기 때문이다(시2:9, 계2:27, 19:15~16). 고로 처음에는 감람유로 왕들이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이것은 예표이자 모형이고, 실제로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야 그가 메시야가 될 수 있는 것이다(사61:1,슥4:1~6). 사실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셨지만, 그분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셨다(마3:16).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훗날 예수님의 사역을 가리켜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에게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그의 공적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다. 곧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받으실 때에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내려오신 성령을 받아서 기름부음을 받고 그의 공적 생애를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메시야'라는 칭호가 붙여지게 된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리스도'라는 말은 오직 예수님을 지칭하는 공적인 칭호가 된 것이다. 

  그러나 기름부음을 받아 공적으로 사역하였던 구약의 직분은 왕이라는 직책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제사장인 아론도 기름부음을 받아 대제사장으로서 사역을 시작하였고(출29:7), 한 번의 예만 나오는 것이지만, 엘리사도 선지자 엘리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선지자로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왕상19:16). 고로 오늘날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라는 말이 통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그분은 역시 왕이자 선지자요 제사장으로 사역하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첫째로, 그분은 왕으로 칭함을 받았으니, 나다나엘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칭해졌고(요1:49),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하던 날에는 군중들로부터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 왕이시여(요12:13)'이라고 칭함을 받았다. 그리고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영적 세계의] 왕인 것을 말씀하셨으며(요18:37), 그분의 죄패에도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붙여졌다(요19:19). 또한 둘째로, 예수님은 선지자로도 칭함을 받았으니, 요한복음 4장에 가면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했으며(요4:19), 누가복음 24장에 가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역시 예수님을 가리켜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였다고 고백하였다(눅24:19). 그리고 셋째로,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도 사역하셨으니, 그분은 영원히 살아서 역사하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 오셨으며(시110:4, 히5:5~16), 마지막 만찬 후 예수께서는 다락방에서 대제상적인 기도를 드리셨다(요17장).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드리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골고다 언덕에서 대속죄일 제사를 드리시고 기도의 분향단에 향을 사르는 일을 하셨기 때문이다. 

 

5. 예수님에 대한 여덟번째 신앙고백으로 '율법에 기록된 이'란 어떤 뜻인가?

  안드레와 베드로의 한 동네 사람이었던 빌립이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었을 때 그는 자기의 친구였던 갈릴리 가나사람 나다나엘(바돌로매)를 찾아가 그에게 예수님을 소개해주었다. 그때 그가 나다나엘에게 알려준 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했던 그이'로서 그분을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하였다. 이것이 그의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그만큼 나다나엘이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씀에 심취해 있었으니, 그렇게 소개하면 그가 금방 알아들을  것 것 같아서 그렇게 소개한 것이다. 또한 그가 나다나엘을 찾아갔을 때에도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율법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그분을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한다. 그러자 나다다엘은 빌립이 제대로 자기에게 이야기해준 것인가 하고 의구심을 갖는다. 왜냐하면 메시야는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하는데 그분을 나사렛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나다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요1:46). 그러나 실은 율법을 제대로 공부를 못해서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이지, 율법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익라면 그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신앙고백이 아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율법에 기록된 이'라는 신앙고백의 의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예수님은 그냥 메시야가 되신 것이 아니다. 자신이 그렇다고 선언하여서 그렇게 되신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를 그대로 이루셔셔 그렇게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메시야는 이미 구약성경의 율법에 예표로서 등장하고 기록되어 있으며,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는 자라야 메시야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어떻게 율법에서 증언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율법'이라 함은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모세가 쓴 모세 오경의 책들에 나오는 메시야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창세기와 출애굽기, 레위기와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에서 메시야는 어떤 예표로 그려져 있을까? 그것은 적어도 10가지 이상 된다. 첫째로, 메시야는 '여자의 씨'로 오셔야 한다고 했다(창3:15). 여자의 씨가 뱀의 씨를의 머리를 박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태를 빌려 오신 것이다. 둘째로, 메시야는 '아브라함의 씨'로 와서, 대적의 성문들을 차지하고 천하만민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창22:17~18).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셔서 원수의 성물들을 차지하고 천하만민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고 있다. 셋째로, 메시야는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신다고 했다(창18:10,14). 요한복음 8:24,28,53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던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넷째로, 그분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다고 했다(출12:5~6). 그래서 그분은 죄없는 곧 흠없는 유월절양이 되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모든 사망권세를 이기게 하셨다(고전5:7). 다섯째로, 그분은 광야의 만나로 오신다고 했다(출16:13~13,31).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무리들에게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6:48~50). 여섯째로, 그분은 성막의 대제사장으로 오신다고 했다(출애굽기). 그리하여 예수께서 직접 이 땅에 당신의 육신으로 성막을 치시고 우리 안에 거주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셨던 것이다. 일곱째로, 그분은 인류의 구속을 위한 속죄제물로 오실 것이라고 했다(레위기). 그래서 그분은 대속제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여덟째로 그분은 대속죄일제사의 아사셀 양으로 오신다고 했다(레16장).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안수받아 십자가를 지고 성문밖인 골고다 언덕으로 가셔서 버림을 받으신다. 아홉째로, 예수님은 민수기의 21장에 나오는 놋뱀이 되시어 그를 쳐다본즉 살게 하시신다(민21:9, 요3:14~15). 이는 그분을 놋뱀 곧 인류의 죄를 전가받아 죄있는 육신의 모양만 갖추었을 뿐 그분 자체는 독이 없는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돌아가신다. 마지막 열째로, 그분은 신명기에서 모세가 약속한 바 대로 '나와 같은 선지자'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인류에게 전달하시고, 회개를 외치셨으며, 종말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 

 

6. 예수님은 어떻게 '선지자들이 기록된 그이'이신가?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율법에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이'라고 소개했다.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했던 그분은 대체 누구신가? 구약시대 중에서 사무엘(B.C.1102~1018)으로부터 시작된 선지자의 활동은 말라기 선지자(B.C.516년경 활동)를 끝으로 구약시대를 마감한다. 이때는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만 무려 16명인데, 그중에 메시야에 관하여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하였다. 그것을 종합해보면 크게는 그분의 본질적인 부분과 그분의 사역으로 구분해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 그분의 사역은 또 다시 예수님의 잉태와 출생, 공생애 그리고 그분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까지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그분의 본질(신격)에 관하여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으니, 그것은 한 분이신 하나님이 "처음이요 마지막'이며(사41:4,44:8,48:12),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사9:6, 계1:8).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하나님 보좌에 앉아계신 예수께서 당신자신을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소개함으로써(계1:17,22:13), 구약의 여호와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셨다는 것을 확인해 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분의 사역에 관하여 낱낱이 살펴볼 수 있는데, 먼저 그분의 잉태와 출생부터 살펴보자.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께서 처녀에게서 잉태되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임을 예언하였다(사7:14). 그리고 이사야는 장차 태어날 메시야는 한 아기이자 아들로서 태어나실 것이지만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자 기묘자인 모사(보혜사)라고 예언하였다(사9:6). 그리고 미가 선지자는 예수께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미5:2).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사실 것이 예언하였으며(사11:1), 그분의 공생애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사40:3~5, 눅3:4~6))인 선구자부터 천거를 받게 될 것이고, 선구자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와서(말4:5~6,눅1:17) 그분을 주님의 사자(말3:1)로서 소개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분은 하늘로부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실 것이라고 했다(사61:1~3, 눅4:18~19). 그리고 그분은 긍휼이 많으셔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했다(사32:3, 마12:20). 그리고 그분은 공적 사역을 주로 갈릴리에서 진행하실 것이며(사9:1~2, 마4:14~16),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고,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갇힌 자에게는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 곧 희년의 자유의 해방을 선포하실 것이라고 했는데 그대로 되었다(사61:1~3).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는 그분은 지상에서 인자라고 불릴 것이며, 선한 목자로서 일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겔34:15). 또한 그분은 인류를 대신하여 고난받으실 것도 예언되어 있었다. 곧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며,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가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53:5, 벧전2:24). 그리고 그분이 죽고 무덤에 묻히실 때에는 부자의 묘실에 묻힐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는데(사53:9), 진짜로 그분은 부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이 준비해둔 부자의 묘실에 묻히게 된다(요19:38~42). 그리고 요나 선지자는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무덤 속에 삼일삼야를 있다가 부활할 것이라고 했는데(욘1:17, 마12:40), 예수께서는 죽은지 3일 만에 부활하신다. 그리고 요나의 표적처럼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다가 승천하신다(욘3:4). 그리고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처럼 그가 승천하셨던 장소인 감람산으로 다시 오시게 될 것이다(슥14:4~5). 정말 놀랍지 아니한가?

 

7. 예수님은 어떻게 되어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셨는가?

  한편 우라는 예수님의 혈통에 대하여 그리고 그분이 사셨던 곳에 대하여 빌립으로부터 좋은 소식을 듣게 된다. 그것은 그의 친구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나다나엘로 하여금 과연 예수님이 메시이신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왜냐하면 나다나엘이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갈릴리 나사렛에서는 무슨 좋은 일이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요1:46). 하지만 그것은 그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사심으로 인하여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자가 말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마2:23). 먼저, 그분의 혈통과 관련하여 그분은 '요셉의 아들'이라고 불리셨다. 누가복음의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눅3:23). 그랬다. 누가는 정확히 기록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아는 바에 의하면 요셉의 아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분에게 족보상의 부친은 요셉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요셉은 그의 아내 마리아의 아버지 헬리가 두 딸들(마리라와 살로메)만 두었기 때문에 같은 유다지파사람으로서 두 집안을 하나로 이어받은 자였다. 요셉은 마리아의 아버지(헬리)의 조상을 이어받았고, 자기 친가의 조상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마리아와 결혼했다. 그런데 마리아는 다윗의 아들 나단으로부터 갈라져내려온 다윗의 후손이었고(눅3:23~31), 요셉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부터 갈려져 내려온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에(마1:1~16),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에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지만, 족보상으로는 솔로몬의 대를 잇는 왕의 후손이자, 나단의 대를 잇는 선지자의 후손이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이었다. 이는 사실 그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대단히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나사렛 사람이라고 하는 어떤 예언자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마2:23). 그럼, 예수님은 구약시대의 어떤 예언을 따라 나사렛 사람이라고 칭하게 되셨을까? 우선 구약성경에서 2가지 예언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그것은 첫째, 그분이 나실인으로 구별되어 바쳐진 자라는 뜻일 수 있다(삿13:5).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나실인처럼 구별되어 바쳐진 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둘째, 이것은 더욱 더 개연성이 있는 주장인데, 그것은 그분이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룬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이사야 11:1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히브리어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가지가 나오고 그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다. 그런데 이새의 줄기에서 한 가지가 나올 것인데 그분이 예수님이고, 그리고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와 열매를 맺게 될 것인데 그분도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새의 자손이자 이새의 뿌리가 되신다. 이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요 다윗의 뿌리가 된다는 요한계시록의 예언과도 일치한다(계22:16). 그런데 히브리어가 알려주는 귀중한 정보가 있다. 그것은 줄기에서 나오는 가지를 '호테르'라고 부르고, 뿌리에서 올라오는 싹을 '네째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호테르'와 '네째르'는 목자가 가지고 있는 '막대기'와 '지팡이'를 가리키는 것인데, 막대기는 양을 헤치려는 동물들을 후려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며, 지팡이는 양떼를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로 인도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둘 다로 예언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뿌리에서 올라오는 '싹'은 히브리어로 '네째르'라고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정보인데, 왜냐하면 여기에서 '나사렛'이라는 용어가 나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인류를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할 선한 목자로서 예수님이 네째르라고 불리는 동네에서 나올 것이 예언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네째르는 뿌리에서 올라오는 싹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새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지만, 실제 그분은 이새와 다윗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은 인류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지만 동시에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8.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빌립의 소개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나다나엘은 빌립의 강권적인 인도로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신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의 속에 간사(간계,교활함)이 없도다(요1:47)" 그러자 깜짝 놀란 나다나엘이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를 향하여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노라(요1:48)"고 대답하신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를 "랍비여(율법 선생님이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왕)이로소이다(요1:49)"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다나엘은 단지 자신의 과거를 맞추었다고 예수님을 과대포장하여 언급한 것인가? 아닌 것이다. 그는 즉각적으로 그분을 알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 땅에 오기 전에 그의 영이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비밀스럽고 영적인 것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나다나엘이 헬라어로 '오이다(직감으로 알다)'를 한 것이다. 그냥 알아지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배워서 그리고 경험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영의 감각으로 그냥 알아버렸던 것이다. 성숙한 인간의 영이 자신을 창조하고 보내신 분을 몰라보겠는가? 그러자 곧 나다나엘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신 분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분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특히그가 언급한 '이스라엘 왕'이라는 말은 구약시대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로서 다윗과 같은 왕과 같은 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에수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으며, 나사렛에서 자라나신 분으로 다윗와 같은 왕적 능력을 소유한 메시야이셨던 것이다. 

 

9.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뜻인가?

  마지막으로 이것은 제자들의 고백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관하여 꼭 알아야 할 사항이므로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나'라고 칭하는 호칭 대신에 가장 잘 사용하는 호칭으로서, '인자'라는 칭호에 대해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무화과 마누 아래에서 보았다고 말했던 것 때문에 네가 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이스라엘의 왕'으로 믿느냐? 이것들보다 더 큰 일들을 네가 장차 보게 될 것이다(요1:50)"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항하여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하늘이 열려진 채 있는 것과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올라가고 있는 것과 내려오고 있는 것을 장차 볼 것이다(요1:51)" 그렇다. 나다나엘이나 과거의 야곱처럼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들은 영적인 실체를 진짜로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늘과 땅 사이의 중보자라는 것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칭했다. 왜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나'라고 말씀하지 않고, 굳이 '인자'라고 표현한 것일까? 그것은 그분이 원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지만 그분이 이 땅에 왜 육신을 입고 왔는지 곧 왜 사람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싶으셔서 하신 칭호인 것 같다. 그것은 예수님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진 자  곧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자로 오셨음을 잊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수행하시고자 하는 뜻에서 그렇게 표현하신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표현하신 것을 통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그분은 '인자'라는 표현을 통하여 그분이 사람이기에 핍박받고 고난받고(마17:12) 죽으실 것(마12:40)을 은연 중에 드러내셨다 라는 점이다. 그것이 그분이 사람이 되신 본래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렇듯 예수께서 인자가 되셔서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심으로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지극히 높은 이름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부활할 것이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이며, 능력으로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실 것을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어떤 혜택을 받게 될 것인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그렇게 하심으로 최소한 3가지 권세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첫째는 그분은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이다(마9:6). 그리고 둘째는 그분이 사람이 되심으로 인하여 그분이 장차심판하는 권세를 받으셨기 때문이다(요5:27). 그리고 셋째는 그분이 사람되심으로 순종하여서 왕위에 오르시는 권세를 취득하셨기 때문이다(마19:28). 그러므로 우리들도 자신을 낮추어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10. 나오며

  오늘은 조금 많은 분량을 다루었다. 그래서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다시 보고 또 보는 방법이 아주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은 우리가 얻는 영생의 분량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분량만큼 저 천국에서도 영생의 분량을 더 많이 그리고 크게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되 힘써 예수님을 알기를 사모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을 믿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견고히 가지며, 그분의 발자취를 우리도 따라가야 할 것이다. 그분이 가신 길이 우리들이 걸어가야 할 완전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율법교사로서 랍비이셨다. 그리고 온 인류를 구원할 자로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로서, 왕과 같은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율법에서는 예표로 기록되어 있었으며 그리고 선지자들의 책에서는 장차 오실 분으로 예언되어 있으셨다. 그리고 그것을 고스란히 그대로 성취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나사렛 사람으로 사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이셨다. 그리고 그분은 스스로를 낮추시어 사람이 되신 분으로서 겸손과 순종으로 인하여 그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갖게 되셨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우리도 과연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시금석일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완전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찬양드리며, 우리를 위해 기꺼이 사람되신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린다. 

 

2022년 08월 10일(수)

정병진목사

 

2022-07-27(수) 수요기도회 

제목: 요한복음강해(08) 예수님의 12가지 신앙고백에 대한 영적인 의미(01)(요1:19~51)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SZ158Ara-Qg  [혹은 https://tv.naver.com/v/28241589 ]

 

예수께서는 과연 어떻게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그의 부모의 이름과 그의 이름과 그의 미래와 과거를 말씀하실 수 있었는가?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점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부르심에 대한 하늘의 비밀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늘의 부르심에 관한 영적인 비밀을 나눌 것이다. 그리고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섯 명의 첫 제자들에 의해 고백되어진 12가지 신앙고백 가운데, 세례 요한이 말했던 첫 번째 신앙고백 곧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고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만 알아도 속죄제의 비밀이 풀린다. 

 

1. 들어가며

  예수께서 누군지를 아는 것은 요한복음을 이해하는데 매우 필수적인 작업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 예수께서 누군지를 알게 하기 위함이요 그것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요20:31, 17:3). 그렇다면 요한복음 1장에서는 과연 예수님을 누구라고 소개하고 있을까?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일곱 번의 요한복음 강해를 통하여, 요한복음의 서론을 살펴보았고(6번에 걸쳐), 이어서 요한복음 1:19~51절에 나오는 부분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요한복음의 서론을 통하여는 예수께서 '말씀'(로고스)이자 '하나님'이시며, '독생자'이자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나타난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웠다(요1:1,14,18).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세례 요한의 정체성과 사명에 관하여 들었고(요1:19~34), 이어서 예수께서 부르신 갈릴리의 첫 5명의 제자에 대해서도 들었다(요1:35~51).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덜 다뤘던 제자들의 부르심에 관한 부분과 아울러 예수님의 12가지 신앙고백 중에서 첫 번째 신앙고백인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며, 부르심은 어떻게 정해지며 본인은 어떻게 그것을 알게 되며, 하나님이 보내는 속사람(영)의 나이와 더불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시키는 방법에 대해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12가지 신앙고백 중에서 첫 번째 신앙고백으로서, 예수께서는 어떻게 되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2.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과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을 때마다 항상 복음서의 기록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잘못하면 엇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았듯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이름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20:31).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철저하게 이러한 관점으로 서로 배치되어 있다. 사실 이것은 요한복음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크게 서론(1:1~18)과 본론(2:1~20장)과 결론(21장)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요한복음의 본론부는 또다시 전반부(요2:1~12:50)과 후반부(요13:1~20:31)로 나뉘게 되는데, 전반부에는 유대 안에서의 3년 반 동안의 예수님의 공생애를 다룬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총7가지의 표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본론의 전반부는 첫 번째 표적으로서 가나 혼인 잔치의 표적이 시작되는데, 마지막 표적으로서 나사로의 부활 사건으로 7가지 표적이 끝난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는 예수님의 고난을 의미하는 가나의 포도주로 시작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나사로의 부활로 끝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7가지 표적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배우게 될 것이고 그분을 믿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본론의 후반부도 역시 마찬가지다. 마가 다락방의 강화에서 시작하여 예수께서 붙잡힘을 받으시고 고난받고 그리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또한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쓰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요한복음 1장의 19~51절에서도 여전히 이것은 반복되고 있다. 요한복음 1:19~51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1:19~34)는 세례 요한의 정체성과 사역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나오는데, 그것은 세례 요한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면서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1장의 35~51절의 말씀은 예수께서 다섯 명의 첫 갈릴리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 더불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안드레와 나다나엘을 통하여 고백되어지고 있다(요1:41,49).

 

3. 예수님의 첫 다섯 명의 제자들에 대해 주님은 어떻게 그들의 이름과 부모 그리고 그들의 미래와 과거에 대해 알 수 있었을까?

  요한복음 1:19~51의 후반부(1:35~51)는 예수께서 부르신 첫 갈릴리 다섯 명의 제자들의 이름과 그들을 불러내신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예지적인 감각이다. 즉 예수께서 어떻게 베드로를 처음 보면서도 그에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는지와 또한 나다나엘을 처음 보면서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의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고 말씀하시고 또한 그후에 예수님이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는지를 물었을 때에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안드레의 형 베드로를 깜짝 놀라게 했으며, 빌립의 친구 나다나엘을 깜짝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선견지명이 있으니까, 베드로의 가족과 이름을 다 알고 있었으며, 장차 베드로가 음부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반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나다나엘의 경우도 예수께서 그를 만나기 전에 그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보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셨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말씀이신 하나님이자, 나타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12사도들을 어떻게 사도로 삼게 되셨는지를 하늘의 광경에서부터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누가 12사도들이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주님 오실 때가 다 된 것이다. 그러니 영성이 있는 자는 하늘에서 어떤 일이 있어서 안드레와 요한 그리고 베드로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이 주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러한 광경이라도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환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영성이 그만큼 받쳐 주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하늘에서부터 시작된 개인의 삶을 누군가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통하여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가 있다. 그것을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4. 이 땅에 태어나는 사명자들은 어떻게 정해지고 어떻게 부르시는가?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어떤 하늘의 비밀들이 숨겨져 있는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된 것은 본인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서 그를 이 땅에 보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통하여,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을 택하여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요15:16). 즉 자기가 원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고 사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때가 되자 미리 정하신 대로 그들을 불러내어 제자들과 사도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 이 땅에 태어난 사명자들은 어떻게 정해지고 어떻게 부르시는가? 그것을 정리하면 이렇다. 참고로 이러한 과정은 대부분 알 수 없는 영적 세계의 비밀이지만 영적으로 깊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들은 볼 수 있는 영역이다. 곧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 후에 결혼하고 부부 생활을 하다 보면 보통 아이를 갖게 되는데, 이때 잉태된 아기가 약 2~3개월 정도 자랐을 때 이 아기의 육체가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면,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의 육체 속에 하늘에 있는 영혼을 집어넣어 준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가 태어날 나라와 가정 그리고 성별과 직책 사명까지 정해서 내려보내시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되도록이면 당신의 사명을 주어서 보내는 아이를 축복받은 나라와 가정에 보내신다. 과거 같으면 미국이나 호주, 캐나다에 보내셨다. 그리고 기왕이면 몇 대째 믿고 있는 가정에 보내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영혼을 보내실 때에, 북한에 보내시겠는가 아니면 남한에 보내시겠는가? 북한에도 보내실 수 있겠지만 대부분 남한에 보내실 것이다. 왜냐하면 남한은 자유롭게 믿을 수 있고, 몇 대째 예수믿는 가정들이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는 나라와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 중에는 세 종류가 있다. 먼저는 24장로들이 있고, 이어 144,000명의 성도들이 있다. 그리고 그밖에 무수히 많은 허다한 성도들이 있다. 이중에서도 24장로나 144,000명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 천국의 보좌 자리가 정해진 채 이 땅에 영혼이 보내지는 것이다. 특히 천국에서 144,000명은 70줄의 좌석에 앉게 되는데, 그중에서 첫째 줄에서 셋째 줄까지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앉을 자는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때 이러한 보좌 자리에 앉을 자가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을 때에는 보통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불러서 사용하신다. 구약의 성도들 중에는 모세와 사무엘 그리고 예레미야와 같은 경우는 성부 하나님이 직접 불러서 쓰셨던 경우이고, 신약의 12사도들은 예수께서 직접 부르신 것이고,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불러내신 경우에 해당된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역시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목회자로 쓰실 자는 처음부터 목회자로서 하늘에서 보내신다. 그리고 평신도로 쓰실 자는 평신도로 보내신다. 심지어 어느 가정에서, 남여로 태어나게 될 것인지, 그리고 나중에 어떻게 쓰임받을 것인지를 주님이 배려하여 이 땅에 내려보내시기 때문에, 그 아이가 자라는 환경까지도 다 안배해서 보내시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때 만난 베드로의 아버지를 모르시겠으며, 베드로의 장래를 모르시겠는가? 그리고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그분이 정말 모르시겠는가?

 

5. 사람은 얼마 정도의 속사람(영혼)의 나이로 보내어지며 얼마만큼 성장해 가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속사람(영혼)을 어떤 육체 속에 보내시는가? 그런데 이때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속사람의 나이는 다 똑같지 않다. 최소 천국의 나이로 볼 때, 3살에서 최대 15~16살까지의 영혼을 이 땅에 보내신다. 어떤 아이는 갓 태어난 아기의 나이에서부터 3~4살 정도의 나이로 보내어지는 아이도 있다. 그런데 평신도의 경우 3~4살 이하의 아이는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거의 없이 보내어진다. 그리고 보통은 5~6살의 나이로 이 땅에 보내어진다. 이때부터는 예수께서 천국의 낙원에서 그 아이를 만나 물어보고 답을 받고 보내는 나이가 이때부터다. 그러므로 그 아이는 자신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들어온다. 그런 자들은 대부분 한 가정을 전도하기 위하여 그리고 한 가문을 기독교 가정으로 만들기 위하여, 또 어떤 이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자로 보내거나, 기도하는 자로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평신도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주의 종들과 같은 사명자들에게 해당되는데, 이때는 7~9살 정도의 나이에 보내어진다. 그리고 속사람의 나이로 7~9살 정도의 나이를 태어난 자는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면류관을 얻는 성도가 될 수가 있다. 사역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평신도든 주의 종이든 상관이 없이 면류관을 얻게 된다. 그리고 10~16세까지는 대부분 주의 종들로서, 이 나이에 이 땅에 보내어진다. 그런데 이런 나이에 보내어지는 사람은 많이 있지 않다. 특히 15~16세의 나이로 보내어진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이 세상에 보내어지는 나이의 최고령은 16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살아갈 때에 자기의 속사람의 나이를 얼마나 성장시킬 수 있을까? 보통은 10년에 1살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10년의 기간이라도 빨리 자라는 사람은 2~3살 정도까지도 성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은 지 20년이 되었을 때 영의 나이가 무려 6살이나 먹는 사람은 드물게 하나씩 있다. 그런데 50년을 신앙생활 했어도 영의 나이가 1살도 못 먹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그럼, 무엇에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것은 영의 양식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요, 그의 영혼이 다져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속사람(영혼)이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2가지만 잘 지키면 된다. 첫째, 영혼의 양식은 성경 말씀을 잘 먹는 것이다.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고 성경 말씀을 보고 성경을 공부할 때에 영혼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사모하지 않는 자는 절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둘째, 고난과 역경을 참고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의 영혼의 그릇의 두께가 두꺼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귀한 그릇으로 쓰임받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에서 자꾸 원망하고 불평하고 짜증내는 자는 주님께 귀하게 쓰임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그릇이 작아 보여도 금그릇이나 은그릇으로 쓰임받기도 한다. 그렇다고 영혼의 나이가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의 나이가 25세가 되었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성장할 수 있는 최대의 나이 곧 장성한 분량에 도달한 것이다. 그때까지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참고로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그 영혼(속사람)은 그때 천국에 들어간 나이로 영원히 천국에서 산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죽인다거나 자살하면 절대 아니 되는 것이다. 영혼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기 때문이다. 

 

6. 내가 이 땅에 보내어진 사명자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렇다면, 자신이 사명자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그럴수록 처음부터 좀 다른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구별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장차 하나님의 큰 사명을 담당할 자가 어릴 적부터 막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믿지 않는 집안에 태어난 자라도 크게 쓰임받을 자는 막 살지 않는다. 정직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며, 효도하고 살며, 징징거리지 않고 대견스럽게 살아간다. 어릴 적부터 친구들과 노는 것이 다르며, 하는 짓이 대범스럽고 구별된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면 일찌기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 결정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나는 절대 술과 담배를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혼전 순결을 지킬 것이다", "나는 절대 주일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의 말씀에는 반드시 순종할 것이다" 등을 스스로 정하고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천국의 144,000석의 보좌 앞쪽에 있는 자는 주님이 직접 부르시지만, 대부분은 성령을 통하여 부르신다. 그때에는 성령의 은사자를 통하여 그리고 꿈과 환상을 통하여 알게 된다. 그러면 자신을 구별하면서 살아간다. 사무엘의 경우를 보라. 잉태되기 전부터 그의 엄마 한나가 잉태될 아기를 위해 얼마나 기도에 힘썼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도 복된 영혼을 그녀의 자궁 속에 보낸 것이다. 그러니 사무엘은 어릴 적부터 나실인으로서 주님께 드려진다. 그리고 대제사장이었던 엘리 제사장의 각별한 개인 지도를 받는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영광을 받고 자라났던 것이다. 그래서 청소년기를 지나 성년이 되면, 그 아이는 이제 자신이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사명을 깨달은 자는 다음과 같은 3~4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첫째, 사명자는 더이상 세상의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천국을 사모하며 교회를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꿈이 되는 것이다. 둘째, 영적인 세계를 알고자 매우 갈망한다. 영적인 세계를 알고자 하고, 영적인 일에 자신이 더 크게 쓰임받기를 사모하고, 영적인 은사를 갈망하는 것이다. 셋째, 어떤 고난과 역경이 찾아와도 자신의 길에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환난 풍파가 찾아와도 항상 이것도 지나가리라 생각한다.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으며, 절망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명에 목숨을 바쳐 끝까지 충성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누가 하라고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것을 하지 말라고 막을 수도 없다. 그것은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이 바로 어린양의 12사도들의 삶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의 사도였던 사도 바울의 삶 역시 그랬었다.

 

 

7. 세례 요한이 말했던 예수님에 대한 첫 번째 신앙고백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요1:19~51절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한 12가지 신앙고백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어떤 신앙고백을 한 것일까? 세례 요한이 요1:19~34에 말했던 것을 요약하면 총 5가지다. 그리고 나머지 7가지는 예수님의 첫 제자들의 고백이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말했던 다섯 가지 신앙고백은 무엇일까? 그것은 첫째로,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다는 것이다(29절). 둘째는 '먼저 계신 이'라고 했다(30절). 셋째, 예수님을 '성령이 머물러 계시는 이'라고 했으며(33절), 넷째,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라고 했다(33절).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로,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34절). 이중에서 오늘은 그의 첫 번째 고백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는 여기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세 부분으로 나눠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는 예수님은 "어린양"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는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그럼, '어린양'이란 뜻은 무엇인가? 여기서 '어린 양'이란 헬라어로 '암노스'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몇 번 안 나오는 단어다. 요한복음에서 2번, 나머지 2번 나올 뿐이다. 요한복음에서는 1장 29절과 이 고백을 반복해서 짧게 말하는 36절에 한 번 더 나온다. 그리고는 스데반이 언급했던 바, 사도행전의 설교 가운데 나오는데, 그때에 스데반은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에 관한 예언의 말씀 중에서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이라는 인용문에서 세 번째로 언급한다(행8:32).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사도 베드로가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우리 믿는 이들이 구속받는 것이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고 했다(벧전1:19). 그리고는 더이상 '암노스' 어린양이란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혹시 어떤 이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고 있는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요한계시록에 30회나 등장하는 '어린양'은 모두가 다 '아르니온'이라는 '어린양'을 말하는 것이지, '암노스'라고 하는 '어린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아르니온')은 모두가 다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을 지칭하는 표현들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의 진노'(계6:16), '어린양의 혼인 잔치'(계17:7,9), '어린양의 아내'(계21:9), '어린양의 생명책'(계21:27), '어린양의 보좌'(계22:1,3) 등의 용어가 나온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은 예수께서 제2위의 하나님으로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분으로서,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이시며(계17:14), '목자'와 같은 분으로 나온다(계14:4~5). 그러니까 풀이나 뜯어 먹고 목자의 인도를 따라가는 어린양을 가리키는 표현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암노스'로서의 어린양은 다르다. '암노스'는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이자 재림주로서의 어린양('아르니온')이 아니라, 희생 제물로서 바쳐지는 어린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어린양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다(요1:29). 이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시는 어린양이자, 하나님의 일을 위해 특별히 구별된 어린양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어린양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여기에서 '지고 간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이로'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의 뜻은 '들어올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뜻은 '들어올린다'의 뜻에서 더 나아가서 죄를 '없이 한다. 제거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번역은 '세상 죄를 없이 하는(제거하는) 어린양'으로 번역해도 괜찮다고 할 수 있다. 

 

8. 예수께서는 어떻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셨는가?

  그럼, 어떻게 되어서 예수께서는 하루아침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신 것일까? 사실 요한복음 1:29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튿날". 그렇다. 그것은 그 전날에 무슨 일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앞 구절(요1:25~28)을 보니,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던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그러므로 '이튿날'이란 표현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그 다음 날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 다음 날에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를 향하여 오고 있는 것을 응시하여 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없이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그렇다면 그와 예수님에게 전날 무슨 일이 있었길래, 지금은 그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다고 선언한 것일까? 그것은 세례 요한이 주었던 세례의 비밀에 숨겨져 있다. 그것은 마태복음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그 전날이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요단강으로 오셔서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으려고 하셨다. 그러자 세례 요한이 말리면서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3:14).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했다. "이제 허락하라. 왜냐하면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성취하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다(마3:15 직역)" 그러자 세례 요한이 그분에게 안수하면서 침례를 준다. 그의 머리에 안수하여 예수님의 몸을 물속에 풍덩 넣었다가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인데 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야 했는가? 여기에는 이러저러한 해석들이 있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야만이 "의를 성취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3:14). 여기서 '의'라는 말은 예수께서는 죄가 없는 분이시지만 인류의 죄를 그에게서 전가받아서 당신이 대신 죄인이 되고 그 죄를 해결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죄를 전가받은 상태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자신은 민21장의 놋뱀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실 것이라고 하셨다(요3:14). 이는 그분이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서 그분을 믿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다 죄없는 사람이라 칭함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럼, 인류의 모든 죄는 어떻게 예수님에게 넘어가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안수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안수할 때에 어떻게 세상 모든 사람의 죄가 그에게 넘어가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속죄일 제사법에 그 과정이 들어 있다. 레위기 16장은 모든 백성이 지은 죄를 한꺼번에 용서하기 위한 속죄일 제사법을 기록하고 있다. 이 때에는 두 마리의 속죄제 염소가 사용된다(참고로 염소나 양은 제물에서는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로 드리고, 또 한 마리는 광야에 있는 아사셀(광야의 마귀?)을 위한 속죄제로 사용된다. 이때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는 그냥 잡아서 그 피를 성소와 회막와 분향단에 뿌리거나 발라서 속죄하면 된다. 그리고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는 과정이 좀 있다. 먼저 대제사장이 자기의 두 손으로 안수하여서 살아 있는 속죄제 염소에게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넘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둔 후에 미리 정한 사람을 통해 광야로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염소가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불의를 짊어지고 불모지의 땅에 이르렀을 때에 정한 사람은 그 염소를 광야에 놓고 돌아온다. 그러면 목이 말라서 아사셀 염소가 죽게 된다(레16:20~22). 

  그러므로 예수께서 온 백성의 속죄제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은 세례 요한의 안수가 대제사장 아론의 안수와 같은 것이 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들이다. 우선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을 구약의 마지막 주자라고 언급하셨다. 율법과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11:13). 그리고 세례 요한은 둘째, 선지자들 중의 선지자 곧 선지자들 중에 가장 뛰어난 자라고 하셨다(마11:9). 왜 그런가? 그가 죄를 없이 하기 위해 수고하는 선지자의 마지막 주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그는 오리라 한 엘리야라고 했다(마11:14). 이는 그가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서 오실 메시야를 소개할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는 오실 메시야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소개하기 위해 존재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넷째, 실제로 세례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로서 제사장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의 24반차 가운데 8번째 아비야 반차의 제사장이었던 사가랴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눅1:5~7,24). 그리고 그 시기에 사가랴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일을 감당하고 있었다(눅1:9).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째 그는 여자가 낳은 자들 중에 제일 큰 자라고 했다(마11:11). 예수님 당시에 여자로서 세례 요한만큼 더 큰 자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류의 죄를 예수님에게 전가할 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춘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날 인류의 죄를 예수님에게 넘기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 다음 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는 "보라!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고 있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9. 나오며

  우리는 오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대체 어떤 자들이며, 이들은 어떻게 부르심을 받고 또한 쓰임받게 되는지를 살펴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쓰실 수 있지만 아무나 쓰시지 않는다. 대부분은 이미 하늘에서 정해서 내려보내는 자를 쓰신다. 그래도 가룟 유다처럼 결국 천국의 보좌 자리에서 탈락하는 이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함부로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하신 자로 하여금 주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보다 더 성숙한 자를 내려보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이 땅에는 하나님께서 불러서 사용하시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의 것들을 결코 즐거워하지 않으며, 영적인 세계를 깊이 알고 있고, 또한 환난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끝까지 목숨을 다해 자신의 사명을 완수해 나간다. 이런 자들이 있어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고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는 예수께서 누군지에 관하여 세례 요한의  다섯 가지 신앙고백 중에서 첫 번째의 것을 살펴보았다. 그는 예수님 더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다. 그가 하루 전날에 인류의 죄를 그에게 전가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3년 반 동안 세상 죄를 짊어지신 후에 때가 되자 영문 밖에 있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인류의 모든 죄와 저주를 뒤집어 쓰신 채 죽으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속량하실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없으셨으나 죄가 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죄가 없는 분이셨으나 스스로 놋뱀이 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 오직 예수님께 영광과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린다. 

 

2022년 07월 26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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