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하강해(11) 다윗의 감사기도를 통해 배울 수 있는 3가지 특징(삼하7:18~29)_2022-01-17(월)

https://youtu.be/IsMdZRtmWJo [혹은 https://tv.naver.com/v/24992136 ]

 

1. B.C.995년경 45세가 되었던 다윗은 어떻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게 되었는가?

   다윗은 30세에 유다 왕이 되었으며, 37세에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7년 6개월이 흘러 그의 나이 45세가 되었을 때에 주변의 모든 원수들을 정복하게 된다. 그러자 자신도 편안하게 왕궁에 거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에는 이미 5년 전에 법궤를 자신의 성에 모셔다 놓았지만 그는 늘 법궤를 펄럭이는 휘장 가운데 두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왜냐하면 자신이 여부스인들의 산성을 정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두로 왕 히람이 사람들을 보내어 자신을 위한 백향목 궁궐을 지어 주어서 거기에 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어느 날 나단 선지자를 불러 자신의 마음에 있던 말을 전한다. 하나님을 위해 자신이 성전을 지어 드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말리시면서, 자신이 집이 필요했다면 진즉 다른 사람들을 시켜서 자신의 집을 지어 달라고 했을텐데 당신은 어디에나 계시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다윗은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언젠가는 누군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만은 받으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오히려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지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집(왕조)을 지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자 다윗은 감사한 마음으로 그 휘장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이다. 

 

2. 다윗의 감사 기도의 내용은 무엇인가?

  다윗의 감사 기도(삼하7:18~29)는 총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는 현재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로운 언약에 대한 감사가 나온다(18~22절). 그리고 두 번째는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기적적인 은혜에 대한 감사가 나온다(23~24절). 그리고 세 번째는 앞으로 미래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에 대해 감사한 것이다(25~29절). 이처럼 다윗은 현재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했고, 또한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했으며, 앞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의 후손에게 베풀어 주실 미래의 은혜에 감사했던 것이다. 

 

3. 다윗의 감사 기도에서 배울 수 있는 3가지 교훈은 무엇인가?

  다윗의 감사 기도를 하나하나씩 살펴보면 다윗의 감사 기도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3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는 감사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원을 거절한 것에 대해 그 어떠한 불평이나 원망을 늘어놓지 않았으며, 그때까지 자신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으며, 앞으로 자기와 자기 후손에게 있게 될 미래의 일까지 알려 주신 것에 감사했다. 그러므로 다윗의 감사 기도에는 반항이나 거부 같은 것이 전혀 없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라고 믿었기에 다윗은 그분의 말씀에 다만 순종하는 자세만을 보인 것이다. 둘째, 그는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겸손의 감사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는 먼저 자신을 철저히 낮췄다. 자기와 자기의 집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집안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양떼를 치는 데서 데려다가 왕을 삼아 주신 것에 대해 매우 매우 감사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기도에서 무려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주(당신)의 종"이라는 표현을 무려 9번이나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주 여호와"라는 호칭을 무려 6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주인이며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언급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다윗은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또한 그분이 행하신 일과 앞으로 행하실 일을 찬양하였다. 즉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이 위대하시며,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된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으며, 그분의 말씀만이 진리라는 사실을 고백했다(22, 28절). 그리고 그분이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셨던 위대한 일을 찬양했다(23~24절). 셋째, 그는 자신의 분수를 아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정해 주신 분량을 겸손히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 이상을 구하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해 주시겠다고 하는 그 언약이 꼭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욕심이 지나쳐 분수 이상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4. 하나님과의 친밀도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가 하는 것은 무엇으로 가늠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일반적으로 얼마나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하나님께 얼마나 빨리 상달되고 응답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명확한 것은 하나님과 친밀할수록 하나님과의 통로가 잘 열려 있다는 것이며, 그 사람 자신의 영이 하나님의 보좌까지 직접 나아가는데 아주 시간이 짧게 걸린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자신의 영이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가는데 가장 빠른 사람은 약 2~3초 걸린다고 말한다. 직접 자신의 영이 하나님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시간이 그렇게 짧은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도들은 자신의 영안이 열리지 않아서 하나님의 보좌를 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께 보내는데 그 시간이 적어도 4~5분 이상 걸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시간이 아주 짧게 걸리는 분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올리는 감사의 분량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친밀할수록 감사를 아주 많이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윗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고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는 온통 감사의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겸손했을 뿐만 아니라 감사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도가 대단히 높은 사람으로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5. 신약시대의 인물들 중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많이 한 사람은 누구인가?

  신약시대의 인물들 중에서 성경 기록으로 볼 때에 가장 많이 감사를 했던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이다. 그는 죄인의 괴수였고(딤전1:15),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이는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즉 그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것이다(딤전1:13). 이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받기에는 전혀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대한 사도로 들어서 사용하셨다. 그러자 그는 자신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편지들 곳곳마다 그는 얼마나 감사했으며 또한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감사할 것을 명하였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추측컨대 그는 아마도 영성에 있어서 상당히 깊은 경지에 들어갔던 인물같아 보인다. 그중에서도 그는 데살로니가전서 5:16~18에서 구원받은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소개해 주는데 그것은 '기쁨'과 '기도'와 '감사'라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가 하는 것은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분량이 얼마나 되는가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감사를 잊어버렸는가? 지금부터라도 감사의 조건을 찾아서 감사하기를 바란다. 다윗은 정말 감사를 많이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2022년 01월 17일(월)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하강해(29) 다윗 시대에도 정말 거인족이 실재했을까?(삼하21:15~22)_2022-02-07(월)

https://youtu.be/4VMYjPAVKMQ  [ 혹은 https://tv.naver.com/v/24991921 ]

 

1. 다윗 시대에도 거인족이 있었을까?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거인족은 창세기 6장에 처음으로 나온다. 노아의 홍수 때에 당시에 거인족이 살고 있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세 시대와 여호수아 시대에도 거인들이 요단강 동편과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다윗 시대에는 블레셋 땅에 거인들이 살았다고 오늘 본문에도 나온다. 그렇다. 다윗 시대까지만 해도 거인들은 사람들 주변에 그렇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인 기록들을 보면,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에도 이미 그곳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거인족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자료들이 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다윗과 그의 부하 장수들이 거인족 4명을 물리쳤다고 말씀하고 있으니, 거인족은 최소한 다윗 시대 때까지는 계속해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 노아 홍수 때에 살았던 '네피림'은 과연 천사와 인간의 결합체였는가?

  성경은 다윗 시대에 다윗과 그의 부하 장수들이 블레셋 땅의 가드 지방에 살고 있는 거인들 4명 물리쳤다는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 거인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윗 시대 이전에도 역시 지구 곳곳에는 많은 거인족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거인족에 대한 처음의 기록은 창세기 6장에 나오는데, 그들은 '네피림(Nephilim)'이라 불렸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창6:4)". 그렇다. 그런데 '네피림'이 진짜 거인인지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에는 타락한 천사들이 내려와서 사람들과 결혼하여 태어난 자식들이라는 주장도 들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천사는 시집가고 장가갈 수 있는 바, 우리 인간과 똑같은 육체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그러한 일은 노아홍수 이전에 있었던 아주 특별한 일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도 역시 옳지 않다. 왜냐하면 민13:33에 보면, 여호수아 시대에도 네피림의 후손 곧 아낙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호수아 시대에도 역시 타락한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인간과 결합했다는 것을 뜻하는가?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노아홍수 이전에 지구상에 폭력을 행사하고 살았던 이들로서 네피림 곧 거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는 2가지 증거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민13:32~33의 기록이다. 여기에 따르면, '네피림'이라는 용어가 아낙 자손들과 같이 키가 크고 싸움을 아주 잘하는 거인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창세기 6:4에 나오는 바, '네피림'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네피림'이라는 용어를 7ㅣ인역에서는 '기간테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거인들(giants)'이라는 뜻이다. 

 

3. 여호수아 시대에도 이 세상에 거인들이 살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노아홍수 이후에도 거인들이 살고 있었단느 말인가? 그렇다. B.C.1446년 애굽에서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에서 지냈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땅으로 들어갈 무렵, 모세는 먼저 요단강 동편을 정복하도록 여호수아를 보낸다. 이때 여호수아는 요단강 동편에 위치한 족속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복해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여호수아가 가서 정복한 족속 중에는 거인족들도 들어 있었다. 이때 사람들은 그들을 '르바임'이라 불리는 족속이었다. 모세는 그들에 대해 이들은 "아낙 족속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컸다(신2:10)"라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 거인 족속을 모압 사람들은 '에밈 족속'이라고 불렀고(신2:11), 암몬 사람들은 말한 바 '삼숨밈'이라고 부루기도 하였다(신2:20). 그런데 여호수아와 정복했던 바산왕 옥이 바로 르바임 족속이었다는 사실을 아는가?(신3:11). 그렇다. 당시 바산왕  옥도 역시 거인으로서 철 침상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크기가 무려 길이가 아홉 규빗(4.05m)이나 되었고 너비도 네 규빗(1.8m) 정도 되어야 물렀났다는 기록들이 있다.

  그런데 거인족은 요단강 동편 땅에만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요단강 서편에도 역시 거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그 장소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않았는데, 그곳은 바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 온 산지'라고 되어 있다(수11:21). 그런데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그곳 거민들을 다 죽였지만 남은 것은 블레셋의 땅에 해당하는 가드와 가사와 아스돗에만 조금 남아 있었다고 하였다(수11:22). 이들 가나안 땅 중에서도 헤브론에는 아직까지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었다. 이 아낙의 아들들인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가 살고 있었는데, 갈렙이 그들을 정복하여 그 땅에 거주하게 된다(삿1:20, 수15:14). 여호수아서의 기록을 보면, 헤브론은 원래 '기럇 아르바'라고 불렸다. '기럇'은 성읍이라는 뜻이니까, '기럇 아르바'는 '아르바의 성읍'이었다. 그런데 아르바가 낳은 아들은 '아낙'이었고(수21:11), 아낙은 또 다시 아들 셋을 낳았으니, 그들이 바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였던 것이다. 갈렙은 바로 이 세 명의 거인들을 물리친 다음, 이제 가나안 온 땅으로 들어온 주인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나 갈렙이 물리친 사람들 중에는 거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사무엘하 기자는 왜 다윗과 다윗의 부하들이 블레셋의 거인족을 쳐서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사무엘하 20장부터 23장까지의 기록은 일종의 '에필로그(후기)'에 해당한다. 그동안 기록하지 못해 빠뜨린 것이나 꼭 알려야 할 것을 모아서 기록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연대기순으로 기록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삼하20:1~14에 나오는 3년 기근 사건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은 다윗의 말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사울의 뒤를 이은 다윗이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본문에 이어지고 있는 블레셋 거인들의 이야기도 역시 연대기순으로 기록된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세웠던 근본적인 목적 곧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함이라는 목적이 비로소 다윗의 시대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이 블레셋을 정복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거인 골리앗을 죽인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블레셋 지방에 여전히 남아있는 나머지의 거인족을 이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다 물리쳤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5.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죽인 거인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렇다면 다윗이 자기 시대에 죽인 거인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그들은 거인 네 사람이었다. 첫 번째 사람은 '이스비브놉'이라는 거인이었다(삼하21:16). 그는 거인족의 아들로서 무게가 300세겔(3.4kg)이나 나가는 놋 창과 새 무기를 차고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때 다윗은 블레셋과 싸우다가 지친 상태였기에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군장 아비새가 달려들어 그 거인을 쳐죽임으로 위험한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다윗의 추종자들은 다윗으로 하여금 전장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후사 사람 '십브개'가 블레셋의 거인족의 아들 '삽'을 쳐죽였으며,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쳐 죽이게 된다. 그리고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도 육손과 육발을 가진 거인족의 큰 자로서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한 거인을 죽인다. 그리하여 당시에 블레셋의 가드 지방에만 남아있던 거인족이 죽임을 당하고 블레셋 나라는 망하여 없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다윗의 시대에 드디어 하나님이 주신 평화가 이스라엘에게 찾아오게 된다. 우리는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있어서 필연적인 싸움은 인간보다 더 힘있는 귀신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것들이 다 우리 성도들에 의해서 제거됨을 받아야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를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영적인 전사들이 되어어서 싸워야 할 것이다. 

 

2022년 02월 07일(월)

정병진목사

 

조상들의 지은 죄값을 과연 후손들이 받게 된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왜 한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의 범죄는 위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께는 왜 기브온 거민들의 학살에 대한 속죄를 사람이 갚도록 허락하셨는가? 다윗이 당한 3년기근과 그의 속죄를 통하여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날에도 조상들이 지은 죄값을 후손들이 받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에 그 해답들이 있다.

 

2022-02-06(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사무엘하강해(28) 사울왕이 지은 죄값을 왜 다윗시대에 받아야 했는가?(삼하21:1~1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_G6n8_BklRs [혹은 https://tv.naver.com/v/24990954 ]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는 왜 선왕이었던 사울왕 때에 저지른 죄의 댓가를 다윗왕에게 물으신 것일까? 다윗은 처음에는 왜 자기 시대에 3년동안이나 연거푸 기근이 발생하는지를 잘 몰랐다. 그래서 3년차 되던 해에는 하나님께서 물었다. 왜 기근이 해년마다 찾아오는지를 말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그의 집안이 기브온 거민에게 행한 일을 알려주셨다. 그것은 기브온 거민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게 기도를 하게 했고 하나님께 그들의 억울함의 보셨으나 끝내 사울왕이 그 억울함을 풀지 못한 채 죽자, 다윗왕 시대에 기근을 내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다윗이 말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단지 배치를 뒤에 했을 뿐이다. 이 사건은 다윗왕의 초기에 일어난 사건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울은 기브온 거민들을 살해한 것인가? 그리고 이 사건은 어떻게 해서 해결이 되어 기근이 사라지고 그 땅에도 비가 내리게 되었는가? 어떤 이야기는 원인만을 이야기할 뿐 그 해법과 과정이 생략되기도 하지만 이 사건은 에필로그로 기록된 사건으로서 그 모든 전 과정을 소개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사건을 통하여 조상들이 지은 죄값을 후손이 진짜 받는 것인지 그리고 한 민족의 지도자의 범죄가 자기 민족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 그리고 조상들이 지은 죄는 어떻게 풀 수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 사울의 시대를 이은 다윗의 통치 초기에 왜 기근이 연거푸 이스라엘 땅에 찾아온 것인가?

  다윗의 통치 초기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다윗이 범죄하지도 않았는데, 이스라엘 땅에 연거푸 3년 동안이나 기근이 찾아온 것이다. 1년 정도야 그럴 수 있다고 하겠지만 연거푸 지속되는 가뭄소식에 다윗은 하나님께 그 이유를 묻기로 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를 그것은 다윗이 지은 죄가 아니라 선왕이었던 사울왕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사울왕이 자기의 왕권강화를 위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기브온 땅을 차지하려고 그랬는지 기브온 거민을 칼로 죽인 일이 있었던 것이다(삼하21:1). 그런데 사실 기브온 거민은 하나님께서 멸하라고 했던 가나안 일곱족속 중의 하나였다. 히위족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이 민족만큼은 죽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민족이 이스라엘을 찾아와 화친을 청하였는데, 그 전후 속사정을 모른채 그들과 화친하는 바람에 그들을 죽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들과 화친한 상태에서 그들이 가나안 일곱 족속 중 하나라는 것을 3일 후에 알게 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죽지 않기 위해 이스라엘과 화친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는 대신에 나무패며 물긷는 자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민족을 사울왕 시대에 와서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살해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는 이미 기브온 거민도 이스라엘 사람이었기에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으시고 그 땅에 비가 내리지 못하게 막아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연거푸 3년동안이 하늘이 막혀 비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3. 한 나라에 기근이 연거푸 발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나라에 집중적으로 기근이 임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민족이 범죄하여 그 민족을 치실 때에 칼(전쟁)과 기근(가뭄)과 전염병으로 치신다고 율법으로 아예 선포하셨기 때문이다(레26:23~26).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공동체를 민족적으로 치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때에는 꼭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을 사용하셨다(겔6:4~8, 5:11~12).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 시대이지만 기근이 3년동안 지속된 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민족적으로 치시는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울과 그의 집안이 지은 죄를 민족적으로 치신 것인가? 그것은 죄는 사울과 그의 집안이 지은 것이지만 실은 한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그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죄를 민족의 죄로 보시는 것이다. 이처럼 한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가 짓는 죄는 그만큼 큰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값을 물으실 때에는 민족적으로 죄값을 물으신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들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도자의 잘못과 실수가 한 나라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잘 알고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가 범죄하거나 실수하지 않도록 기도를 해야 함을 명실할 필요가 있다. 

 

4. 다윗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취한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다윗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취하였는가? 그것은 기브온 거민을 불러다가 드르에게 어떠헥 속죄해야 그들이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축복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삼하21:3). 그런데 그들에게서 나온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들은 이 죄는 속죄의 예물을 바치는 것 정도로 끝낼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오히려 자기의 민족을 이스라엘 땅에서 살지 못하도록 학살을 자행하였고 멸하였던 사울의 자손 일곱 사람을 달라고 하였다. 그들을 나무에 매달라 그들 조상들이 억울하게 죽었던 죄값을 받게 하겠다고 하였다. 그것도 사울의 고향이자 왕도였던 기브아에서 말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다윗은 그것을 승낙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딱 잘라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지은 죄값을 사람으로 담당하게 하겠느냐고 묻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다윗도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맹세한 것이 있어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살리고, 사울의 첩 리스바가 난 두 아들들인 알모니와 므비보셋(동명이인)과 사울의 딸 메랍이 시집가서 낳은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그들에게 내주었다. 그러자 그들이 일곱 명을 붙잡아 기브아 산 위에서 그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이게 된다. 죄를 지은 자는 사울이었데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 7명이 대신 죽임을 당한 것이다. 

 

5. 조상들이 지은 죄값을 후손들이 담당하게 된다는 데 과연 그게 사실인가?

  우리는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조상들이 지은 죄값을 그의 후손들이 담당한다는 것을 여실이 알 수 있다. 사울이 기브온 거민을 억울하게 죽인 일은 아무도 그 죄값을 담당하는 사람이 없자, 한 나라의 지도자가 죄를 지은 것이었기에 이스라엘 전역에 기근이 찾아오게 하였다. 그렇더라도 그 죄값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율법말씀으로, 억울하게 다른 사람을 고의로 죽인 죄에 대해서는 샘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그를 죽여 히흘린 죄값을 그 사람에게 담당시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민35:30~34). 이것이 율법규정이다. 그러므로 사울왕이 억울하게 기브온 거민을 학살한 죄값은 사울왕이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러나 사울왕이 그 죄값을 받지 못한채 다른 죄값으로 전쟁으로 죽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기근을 통해 사울의 죄를 찾아내게 하셨고, 이제는 그의 후손들이 그 죄값을 치르게 하심으로 기브온 거민의 억울한 마음을 사라지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죄값을 7배로 물으신 것이다.

  그렇다. 자기 조상들이 죄은 죄값을 후손들이 받게 되는 경우가 성경에도 여러번 나온다. 대표적인 예로서,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자기의 나물밭을 삼기 위해 이세벨을 통하여 나봇을 죽인 일이 있었다. 그때 이세벨은 나봇이 왕과 하나님을 저주하였다고 하는 거짓말로 뒤집어씌어 그를 억울하게 죽게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나봇의 포도원에 흘린 피값을 고스란히 아합왕에게서 찾았으니, 아합의 첫째 아들 아하시아와 둘째 아들 여호람이 질병으로 죽어나갔고, 둘째 아들의 42명의 손자들과 아합의 자손 70명이 하루 아침에 죽어나갔다. 그리고 이세벨은 신하들이 밑으로 떨어뜨려 해골이 깨지고 사지가 터져 죽어 개들이 그의 시체를 핥게 되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렇다. 남을 억울하게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그 후손이 그 댓가를 치르게 되기 때문이다. 

 

6. 기근의 문제는 결국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다윗시대에 임한 3년간의 기근은 사울의 아들들과 손자들 7명이 죽었다고 곧바로 해결되지 아니했다. 그것으로 곧장 기브온 거민들의 억울함이 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속죄사건은 이 일이 있은 후 약 6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비가 내림으로 막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개월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는가? 그것은 그들이 6개월 동안 나무에 매달려 살이 썩어 내려 뼈만 앙상하게 남을 때까지 지속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사울의 첩 리스바가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자기의 아들들과 조카들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동안 바위 위에 굵은 베옷을 펴놓고 애곡을 하였다. 그리고 그 시체에 낮에는 공주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게 못하게 지켜내었다. 그 시작은 보리를 베기 시작할 때부터였는데, 그녀의 애곡은 그 땅에 비가 내릴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4월에 시작된 애곡이 10월에 가서야 비로소 끝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때 비로소 그 땅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것을 지켜본 다윗은 그녀의 깊은 슬픔을 위로해주고 싶어했다. 그전에 죽었던 사울왕의 뼈와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의 거민에게 받아서 이번에 죽은 사울왕의 아들 둘과 외손자 5명과 함께 가족묘지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리하여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모두가 합장된 것이다. 사울이 지은 죄로 인하여 자기 아들 요나단과 알모니와 므비보셋이 함께 묻혔고, 자기의 외손자 다섯명도 함께 그 묘에 묻힌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죽인 죄는 그 죄값을 크게 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7. 사울의 범죄에 대한 속죄는 왜 동물의 희생제물로서는 아니 되고 꼭 사람이 죽었어야 했는가?

  이것은 조금 전에도 살펴보았듯이 사울이 기브온 거민을 죽인 죄는 우연히 죽인 죄가 아니라 고의로 살해한 죄이기 때문에 그 피값을 사람이 치러야 한다는 율법규정에 따라 시행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이러한 속죄 행위가 장차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사건으로, 흠없는 속죄양이 아니라 직접 사람 제물로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예시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실 때에 동물의 희생제물이 아니라 인간제물로서 주님이 직접 죽으실 것을 미리 짐작케 하는 사건을 미리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해 장차 그리스도가 직접 속죄제물로 죽으실 것을 예상하였을 것이다. 

 

8. 나오며

  왜 사울왕이 범죄했던 것을 다윗 시대에 온 백성이 받게 되었는가? 그것은 사울왕의 범죄행위는 단지 개인적인 일탈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범죄행위는 국가적인 죄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한 나라의 지도자가 저지르는 범죄행위를 너무 쉽게 보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국가적인 재앙을 초래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윗은 지기 시대에 임한 기근재앙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였고, 그것은 사울왕이 고의로 사람을 살해한 죄에서 비롯된 것을 깨닫고 그것에 대한 속죄를 행함으로 결국 그 땅에 기근의 재앙이 사라지게 할 수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은 조상들이 지은 죄값을 후손들이 톡톡히 치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후손들이 그 죄값을 받게 될 때에는 7배로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고의로 범한 죄는 동물의 희생제물이 사용되는 속죄제사로는 절대 아니 되며 직접 사람이 죽임당하여 그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 인류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기 위해 직접 사람으로서 성육신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지은 죄는 동물이 대신 죽어서는 아니될 만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죽임당하셨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에 들어와서 조상들이 지은 죄값을 후손들이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조상들이 지은 죄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이제는 그의 후손들이 회개함으로 없앨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죄들이 예수께서 인류의 죄값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의 상황이라면 우리 모두는 엄청난 재앙에 직면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이미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지은 죄들을 우리가 회개하는 것만으로 제거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도 이와같은 사실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성도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조상들이 지은 살인죄라도 이제 그의 후손들이 얼마든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음에 감사하면서 속히 낱낱이 그러한 죄들을 회개하여 저주로부터 온전히 해방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022년 02월 06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하강해(27) 압살롬에 이은 세바의 반란과 그 진압이 보여주는 교훈(삼하19:40~20:26)_2022-02-04(금)

https://youtu.be/lbdho4wx7ZA  [혹은 https://tv.naver.com/v/24942452 ]

 

1. 다윗이 환궁할 때에 마중 나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다윗이 환궁할 때에 요단강 건너편까지 마중 나온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네 사람들이었다. 먼저는 시므이와 시바가 마중 나왔다. 시므이는 유다 사람들과 베냐민 사람 1,000명을 이끌고 마중나왔다. 그런데 그는 어떤 자였는가? 다윗이 도피하고 있을 때에 나와서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며 저주하던 자였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자, 빨리 눈치를 채고 온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의 패역한 일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그래서 요셉의 족속 중에서 제일 먼저 왕을 영접하러 왔다고 하였다. 그러자 왕도 그의 죄를 일단 용서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다윗의 아들이었던 솔로몬왕 때에 또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래서 죽임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누구든지 회개의 모양만 갖춘다고 할지라도 긍휼을 받을 수 있지만 지속적인 참된 회개를 하지 못할 경우에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벌을 받는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므비보셋이 마중나왔다. 그는 자신의 종 시바에게 속아서 다윗이 도피할 때에 함께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의 억울함이 잠시나마 풀어질 수 있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억울한 일도 풀어지게 만드시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80세 고령의 바르실래도 마중나왔다. 그는 다윗이 마하나임에 피신해 있을 때 식량을 가지고 와서 도운 사람이었다. 그러자 다윗도 그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가서 공궤하고자 했다. 하지만 바르실래는 극구 사양하였다. 자신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 선과 악 그리고 음식의 맛을 분간하지 못하고, 노래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하고서는 사양하였다. 왕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자 왕이 독려하자 그는 자신의 아들로 추정되는 김함을 추천하였다. 그러자 왕은 김함을 데리고 갔고 왕이 죽을 때에는 솔로몬에게 그를 특별히 대우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상받을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벌을 줄 자에는 벌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여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내신다. 

 

2. 다윗은 왜 압살롬의 반역과 세바의 반역의 고난을 겪어야 했는가?

  다윗은 일평생 그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는 왜 이러한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야 했는가? 그것은 철저히 그의 범죄 때문이었다. 그가 남의 아내를 빼앗은 것과 죄없는 그녀의 남편을 죽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하여 다윗은 자기 대에서만 재앙을 겪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아들 대에서도 그리고 그 아들 대에서도 계속해서 칼이 그 집을 떠나지 않았다. 왜 그랬는가? 첫째, 그것은 그가 한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로서 권력을 남용하여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런 죄가 훨씬 더 크다. 이것은 개인의 죄가 되지 아니하고 국가와 민족이 지은 죄와 동일하게 취급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왕이 아닌 상태에서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다면 그는 이토록 엄중한 형벌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였다. 그러므로 그 죄를 엄중히 물으신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가 범죄했을 때 그의 죄값을 그렇게 묻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즉 다윗이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의 남편을 죽였으니 그와 그의 집에서 칼이 영원히 떠나지 아니할 것이며, 그와 그의 집에 재앙을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삼하12:10~11).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말씀을 지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일평생 동안 죄값을 물어야 했으니 당대에 그는 압살롬의 살인과 압살롬의 반역 사건을 경험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후손도 역시 그 죄값을 피해갈 수는 없었으니 그의 후손들도 내내 전쟁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의 집이 평안할 날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다윗은 당대에서도 예루살렘으로 환궁하면서도 또 한 번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으니 그것은 바로 세바의 반란이었다. 

 

3. 세바는 누구이며, 세바의 반란은 어떻게 진압되었는가? 

  세바는 에브라임 산지에 거주하고 있던 베냐민 사람으로서 비그리의 아들이었다(삼하20:1, 21). 그런데 그는 북쪽 10개 지파가 다윗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그는 즉시 다윗에게 반기를 들고 등장하였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즉 그는 북쪽 10개의 지파가 굳이 유다 지파의 이새의 아들에게 굴복할 필요가 없다고 선동한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지방색을 이용한 편가르기와 갈라치기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가장 빨리 자기 편을 만드는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북쪽 10개 지파가 곧장 세바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들도 역시 다윗에게 서운한 감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10개 지파인 자신들이 먼저 다윗의 환궁을 의논했지만, 실제는 유다 지파가 그 자리를 빼앗아 가자 유다 지파와 갈등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윗은 새로 임명한 군대 장관인 아마사를 통하여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다. 하지만 세바의 능력은 역부족이었다. 삼일의 기회를 받았으나 군대를 모집하는 일이 지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윗은 요압도 견제하고자 그의 동생 아비새로 하여금 세바를 추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추격하던 도중에 그들에게 아마사가 도착하게 된다. 그때 요압은 한때 적의 장수였던 그를 가만 놔둘 리가 없다. 곧장 다가가서 인사하는 척하다가 칼로 그를 살해하고 만다. 그랬다. 요압은 전에 사울의 군장이었다가 후 사울왕국의 군장이 된 아브넬을 죽인 일이 있고, 압살롬도 죽였으며, 이제는 아마사도 죽인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 세 사람들을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명을 거역하여 자기 위에 남이 군림하는 꼴을 보지 못했다. 결국 살인의 영이 가득했던 압살롬은 자신도 끝내는 반역에 가담하여 솔로몬이 보낸 브나야장군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그런데 요압의 역량만큼은 알아줄 만 하다. 그는 다윗이 왕이 되게 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특히 세바의 반란에서도 다윗이 그의 지위를 높여주지 않았지만 세바의 반역의 공은 그에게 있었다. 그가 세바를 끝까지 뒤쫓아 이스라엘의 북방의 변방까지 나아갔으며, 나중에는 벧마아가 아벨의 성에 잠입해 있던 그를 없애는 것까지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최고 군사령관의 지위로 복직하게 된다(삼하20:23). 우리는 여기서 아마사와 요압의 일 처리 과정 속에서 사람에게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분량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큰 것을 맡겨 주어도 그릇이 작으면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고, 작은 것을 맡겨 주어도 큰 일을 해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무슨 일이든지 자신의 분수에 맞게 일을 감당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4. 반란자 세바를 제거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이 땅의 어딘가에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어떤 상황이 주어져서 그들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그들은 그 기회에 충분히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불필요한 소모를 미리 사전에 예방해 주기도 하고, 최대한 인명을 구출해 낼 수 있는 시간도 벌 수가 있는 것이다. 심지어 한 성읍(도시)도 멸망의 위기에서 건져낼 수 있는 것이 지혜인 것이다. 그런데 요압이 세바를 진압할 때에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 세바가 숨어 들어간 '벧마아가 아벨'이라는 성에도 어떤 무명의 지혜로운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성읍을 파쇄하기 위해 토성을 쌓고 있는 요압을 보고는 그와 담판을 벌인다. 그가 무슨 이유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요압장군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리고는 속담에 무엇을 물어볼 것이 있다면 아벨에 가서 물으라고 했던 것처럼, 자신의 성에도 그러한 사람이 왜 없겠느냐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요압이 여호와의 기업의 하나인 자신의 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며, 이스라엘 가운데 어머니와 같은 성을 훼파하는 일은 더욱 부당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다윗왕을 대적했던 세바의 머리를 베어서 요압에게 던져 준다. 그러자 요압도 나팔을 불어 전쟁의 종료를 모든 사람에게 알린다. 그녀 때문에 요압도 반란군을 손쉽게 진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 때문에 아벨의 성읍도 안전하게 보존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구 어딘가에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숨겨 놓은 지혜로운 자들이 있는 것이다. 

 

5. 세바의 반란과 그에 대한 진압이 보여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렇다. 우리는 이처럼 세바의 반란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반드시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다윗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러서 그 죄악들을 심었을 때에 결국 다윗도 압살롬과 세바에 의해 자신의 첩들이 유린 당하고 살인이 저질러지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도자의 죄일수록 하나님은 그 죄값을 엄하게 물리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보다 더 넓은 시각으로 이 사건을 볼 수도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지만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할 일로 수용하는 다윗의 모습도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를 싫어하시는가를 뼈저리게 경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지도자가 죄를 범하지 않도록 그를 위해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지도자는 비록 한 사람일지라도 지도자가 범한 죄는 한 국가와 민족의 죄와 똑같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2022년 02월 04일(금)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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