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왕이 죽었지만 다윗에게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계속 남아 있었다. 그것은 후사울왕국이었던 이스보셋 왕국과 어떻게 남유다 왕국이 하나가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인위적으로 상대방을 제거하는 방법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방의 왕과 군대장관이 제거되었다. 그러자 사람드른 다윗을 의심하게 된다. 다윗이 시켜서 정적들을 제거하지 않았느냐는 의심 말이다. 그때 다윗이 사람들의 이러한 의심을 타개하지 위해 사용했던 방법이 있었다. 이것은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 중의 소양이 되었다.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2022-01-07(금) 금요기도회

제목: 사무엘하강해(04) 의심받던 다윗이 선택한 두 가지 타개(打開)방법은 무엇인가?(삼하3:28~4:1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DBsETUSr3yI [혹은 https://tv.naver.com/v/24771101 ]

 

1. 들어가며

  다윗의 정치 여정은 사실 멀고도 험난했다. 어찌 되었든 선왕 사울에 비해 그는 단번에 이스라엘의 왕위에 등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다윗은 비로소 왕으로서의 기품과 지도력도 갖추게 된다. 그가 진정 왕위에 오른 시기는 그의 나이 37세 정도에 온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장로들이 그에게 기름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때였다. 그러므로 그가 15세에 기름부음을 받아 왕의 후보에 올랐지만 그는 15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유다 지파의 왕이 될 수 있었고, 다시 7년 6개월이 지나서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이다. 이 시간 중에서 사울왕에게 쫓겨다니던 시기가 약 10년 정도(20세~30세)였으며, 사울왕이 길보아 산에서 죽고 난 뒤 사울의 집안과 갈등하면서 7년 6개월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이제 그 마지막 시기인 7년 6개월의 끄트머리 정도에서 일어난 2가지 중대한 사건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것은 후사울 왕국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의 죽음과 후사울 왕국의 지도자(왕)였던 이스보셋의 죽음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일종의 암살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아브넬과 이스보셋은 암살을 당해야 했는가? 그리고 이 와중에 다윗을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을 과연 다윗은 어떻게 극복할 수가 있었는가?

 

2. 왜 요압은 아브넬을 죽였던 것일까?

  후사울 왕국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이 다윗의 군대 장관 요압에 의해 죽임당하자, 사람들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윗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다윗이 아브넬을 죽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왕의 군대 장관이었다가 이제는 이스보셋의 군대 장관인 아브넬은 아무래도 다윗에게는 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다윗이 요압 장군을 보내서 아브넬을 제거하게 하였고 그리하여 북이스라엘의 통일을 꾀하려고 시도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요압은 아브넬을 왕의 허락도 없이 살해해야 했을까? 겉으로 볼 때에는 그것은 아브넬이 자기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것에 대해 복수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삼하3:27, 30).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다른 의도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요압의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사실 아브넬은 북쪽 이스라엘 지역에 위치한 11개 지파의 군대 장관이었다. 그런데 그가 다윗을 찾아와 북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넘기겠다고 협상을 하고 갔으니, 만약 두 왕국이 합쳐진다면 군대 장관의 자리는 아브넬에게 넘어갈 공산이 컸다. 그러므로 그것을 우려한 요압이 숙적 아브넬을 미리 제거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후에 있었던 일을 통해서도 요압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있으니, 그것은 압살롬의 반역 때였다. 이때 압살롬 정부의 군대 장관으로 일하다가 다윗을 찾아와 항복 의사를 밝힌 아마사마저 요압 장군이 제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요압은 야심이 컸던 인물이요, 약간의 시기 질투심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동생의 복수를 빌미로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한 것이다. 

 

3. 아브넬을 다윗이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다윗은 어떻게 알게 하였는가?

  그런데 관심의 촛점은 다윗에게로 향했다. 과연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것이 정당한 일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삼하3:37). 그러므로 다윗은 우선 그 일이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백성들로 하여금 알게 해야 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아브넬의 죽음을 진실로 애도하는 것이었다. 이때 다윗은 3가지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첫째는 아브넬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국장으로 치러준 것이다(삼하3:31~32). 아브넬을 죽인 일은 요압의 개인적인 욕심이 들어간 것이고 그것은 다윗과 다윗의 왕국과는 상관이 없는 것임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상여를 따라가며 슬퍼하였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조가도 지었다(삼하3:33~34). 다윗에게는 정말 좋은 군장 하나를 잃게 된 것이요, 피흘림 없이 남북이 하나 될 수 있는 길을 상실한 것에 대한 슬픔이었던 것이다. 둘째는 해가 넘어가도록 금식을 풀지 않은 것이다(삼하3:35). 모든 백성들이 나아와 이제 장례가 끝났으니 음식을 드시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만일 내가 해가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모든 음식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라고 말이다(삼하3:35). 셋째는 자신은 아직 왕국을 온전히 통치하기에는 약한 존재이며, 요압이 그 일을 했으니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그에게 물으실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삼하3:39). 그러자 모든 백성들은 다윗왕을 기뻐하면서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시켜서 행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가 행하는 무엇이든지 기뻐하게 되었다. 

 

4. 곧이어 일어난 이스보셋의 암살 사건을 다윗은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는가?

  그런데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아브넬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이스보셋의 반응과 그의 죽음이었다. 이스보셋은 자신의 군장 아브넬이 허무하게 죽은 것을 알고는 손에 맥이 플렸고 온 이스라엘도 함께 놀랐다. 이러다가는 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감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공포심을 조장하여 후사울 왕국과 통일을 이루고 싶어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리대로 되는 것을 원하였다. 하지만 일은 복잡하게 꼬였다. 그것은 이스보셋의 군대 지휘관이었던(아마도 이스라엘 군대의 군량미를 담당하던 군대 지휘관이었던 것 같다) 브에롯 사람 림몬의 두 아들인 바아나와 레갑이 그만 이스보셋을 암살해 버린 것이다. 그들은 후사울 왕국이 스러져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보셋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다윗으로부터 칭찬과 보상을 기대하고 그러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났으면 될 일이었다. 그들은 공명심에 대한 욕심은 놀라웠다. 낮잠을 자고 있는 침실에 들어가 이스보셋의 머리를 베어 그 머리를 들고서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까지 달려간 것이다. 그들은 마하나임에서 헤브론까지 약 95km나 되는 거리를 쉬지 않고 밤을 새워 이동하여 그 다음 날 점심 때쯤에 헤브론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윗의 생명을 해하려던 원수의 목을 베어 왔다고 보고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다윗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그것은 다윗이 요압을 시켜 아브넬을 제거한 다음, 사람을 매수하여 이스보셋을 죽게 했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다윗이 대처한 것은 모든 일을 일관성 있게 처리하는 것이었다. 예전에 사울왕을 죽였다고 자처한 아말렉 청년을 다윗은 어떻게 했는가? 그때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함부로 죽인 죄를 그에게 물어 그를 죽였던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이스보셋을 죽인 그들에 대한 죄를 물어야 했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생각하면 다윗이 시켜서 한 일도 아니고, 내분이 일어나 스스로 자기들의 왕을 제거한 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면 되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의인을 침상 위에서 죽인 일을 어찌 선하다고 하겠느냐? 나는 너희들이 피흘린 죄를 보고서 어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삼하4:11)라고 하면서 자기의 사람들에게 명하여 그를 죽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손과 발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달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스보셋의 머리는 아브넬의 무덤 옆에 매장해 주었다. 

 

5. 사울을 죽인 아말렉 청년과 바아나와 레갑에 대한 다윗의 응징은 후세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가?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었지만 다윗이 왕이 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아마도 사울왕과 사울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이스보셋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윗은 두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슬퍼하였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정적이었던 두 사람이 제거되었을 때에 기뻐했어야 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먼저 사울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운 종이라고 판단했기에 자신이 그를 제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멸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보셋을 자신이 제거하는 것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것은 행여나 북이스라엘의 12지파가 하나의 통일 국가를 세우는데 걸림돌이 되어서는 아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모든 일이 순리대로 순조롭게 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사람을 제거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후의 세대가 그것을 어떻게 보았느냐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다윗은 항상 권위에 대해서 존중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누가 왕을 세웠든 권위자에 대해서 존중하는 마음을 항상 갖고 있었다. 이러한 마음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다윗의 태도는 고스란히 자신의 부하들에게 전달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하들이나 부하들 치고 다윗이 살아 있을 때에 다윗을 배반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윗의 권위에 대한 존중이 고스란히 그의 왕국의 신하들과 부하들에게 심어졌기 때문이다. 

 

6. 나오며

  그렇다.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 인위적으로 자기 동족을 해하는 일을 자행하지 않았다. 다윗은 그것을 옳은 일이라고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운 종이나 왕적 권위를 가진 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사실 사울왕이나 이스보셋은 다윗이 왕이 되는데 걸림돌이 되는 자들이었지만 인위적으로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을 제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왕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는 역시 다윗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왕은 윗사람에 대해 태도도 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랫사람에 대해 배려도 너무나 자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시글락에서 헤브론에 올라오자 남쪽 유다 지파의 장로들이 스스로 찾아와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어 세웠으며, 북쪽 이스라엘의 장수였던 아브넬도 자기 스스로 다윗을 찾아와 한 나라를 만들기를 요청하였고, 북쪽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도 스스로 다윗왕을 찾아와서 자기들의 나라를 다스려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삼하5:1~3). 그때는 그가 37세 되던 해로서, 그가 유다 왕국의 왕이 된 지 7년 반이 흐른 시점이었다. 그리하여 명실공히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튼튼하고 안정되고 잘 사는 나라가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2022년 01월 07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하강해(03) 아브넬의 죽음 및 요압과 그의 후손이 받을 저주(삼하3:12~30)_2022-01-07(금)

https://youtu.be/VzJy2yrqrR0 [또는 https://tv.naver.com/v/24770905 ]

 

1. 헤브론에서 왕위에 오른 다윗이 점차 안정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나타났는가?

  다윗이 처음에 유다의 남부 변방에 위치한 '시글락'이라는 작은 마을을 다스렸지만 사울왕이 죽게 되자 유다 땅 헤브론으로 올라가 거기에서 유다 사람들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때 비로소 정식으로 왕이 된 것이다.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그리고 다윗은 거기에서 약 7년 반을 다스리게 되는데, 이때 다윗은 6명의 아내를 통하여 6명의 아들을 얻게 된다(삼하3:2~5). 그만큼 다윗 왕국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많이 두게 된 다윗은 훗날 왕자들의 난을 겪게 된다. 그래서 셋째 아들(압살롬)이 첫째 아들(암논)을 살해하게 되고 둘째 아들(길르압=다니엘)은 일찍 죽게 됨으로, 실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순번을 넷째 아들(아도니야)이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비로소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이 된 후, 밧세바를 통하여 얻은 넷째 아들인 솔로몬에게 왕위를 넘긴다. 그리하여 아도니야도 죽임당하게 된다. 결국 자식을 많이 얻었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일부일처제를 버리고 여러 명의 부인을 취한 다윗은 그의 후손에게 고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2. 사울 집안이 점차 약해지자 후사울 왕국의 군장이었던 아브넬이 선택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죽고 그의 넷째 아들 이스보셋이 배턴을 이어받았지만 실제 권세는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다 이스보셋의 군장이 된 '아브넬'이었다(삼하3:6). 그러던 어느 날 이스보셋과 아브넬이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것은 아브넬이 사울의 후처였던 리스바를 통간했다는 소식이었다. 이것은 실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렇게 소문을 냄으로 아브넬이 이스보셋과 같이 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빌미를 통하여 이제 북쪽 나라를 남유다 왕국에 넘기고 자신이 그 왕국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리스바는 사울왕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 곧 알모니와 므비보셋(삼하21:8)을 두었기 때문이다. 자식이 없는 사울의 첩이 아니라 이미 자식을 둘이나 둔 왕의 첩을 자신의 첩으로 맞이할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왕의 첩을 취함으로 이제 실권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과시함으로 이스보셋과 충돌을 야기함으로 자연스럽게 나라를 다윗에게 넘기고 싶은 욕심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3. 아브넬이 다윗과 협상을 벌인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어 아브넬이 사신들을 보내 다윗과 언약을 체결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자 다윗은 한 가지 요구를 시행하면 그것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그것은 전에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을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사실 미갈은 원래 다윗을 좋아했고 다윗도 좋아해서 결혼한 사이였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왕의 정적이 되고 도망자가 되었을 때에 사울은 미갈을 다른 사람(발디엘)에게 시집을 보내 버린다. 그렇지만 다윗은 미갈을 마음속에서 정리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다윗에게는 미갈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첫째로 자신과 사울 집안은 원래 원수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줄 만한 뭔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다윗은 사울왕의 사위이므로 이스라엘의 왕을 이어받을 만한 정통성을 지녔다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윗은 이스보셋에게도 미갈을 보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이스보셋은 발디엘에게서 미갈을 빼앗아 다윗에게 보낸다. 그러자 아브넬도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나아가 그들이 여러 번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를 요구하였으니 지금이 그때라고 설득하고는 다윗이 있는 헤브론으로 향한다. 그리고 협상이 잘 진행되어 잔치에 참석한 아브넬은 기쁜 마음으로 돌아간다. 

 

4. 요압 장군이 아브넬에게 저지른 만행은 무엇이었는가?

  요압은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장본인이 아브넬이었기에, 언젠가는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다윗이 그 장수를 자기 편에 끌어들이려 하는 것을 보고는 딴 마음을 품게 된다. 즉 그를 죽여 없애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급히 사람을 보내 아브넬을 다시 헤브론으로 오게 하였고 은밀하게 말하게 하는 척하면서 그의 배를 찔러 죽이게 된다(삼하3:27). 그것도 도피성의 마을인 헤브론에서 말이다(수21:13). 훗날 다윗은 자신의 왕위를 솔로몬에게 물려주면서 요압이 자신보다 의롭고 선한 아브넬을 죽인 죄를 반드시 갚아 주어야 한다고 유언하고 죽게 된다(왕상2:31~32). 결국 다윗이 죽은 뒤 요압이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하자, 솔로몬은 브나야를 시켜 요압을 죽인다. 그렇다면 요압은 왜 아브넬을 죽이려고 했던 것인가?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죄에 대한 앙갚음을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삼하3:27,30), 좀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의 과도한 권력욕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후사울 왕국은 11개지파의 왕국이고 다윗 왕국은 한 개의 지파의 왕국이므로, 두 왕국이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면 요압의 자리가 약간 위태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압은 아예 처음부터 싹을 잘라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왕에게는 아브넬이 그때 유다 왕국을 염탐하려고 온 것이라고 둘러씌워서 그를 제거한 것이다. 그렇다면 요압의 죄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원수를 갚지 말라(자신의 동족에게 보복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라(자신의 백성의 자녀에게 앙심을 품지 말라)는 말씀을 어긴 죄라고 할 수 있다(레19:18). 그는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한 것이며, 이웃에게 피를 흘려 악을 도모했다고 할 수 있다(레19:16~17). 그러므로 요압이 저지른 행위를 두고서 그에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5. 원한을 사는 살인죄를 범한 요압과 그의 후손이 받게 될 저주(형벌)는 무엇인가?

  그러자 다윗은 자신이 아브넬을 죽인 것이 아니었기에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고로 다윗은 이내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한다. "나와 내 왕국은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깨끗하니), 요압이 지은 죄는 요압의 머리와 그의 가문의 온 집안 위에 돌아갈지어다. 또 앞으로 요압의 집에서 백탁 병자(유출병 환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맞아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고 선언했던 것이다(삼하3:29). 그렇다. 죄없는 사람들을 죽여 원한을 낳는 살인을 하는 자는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자손이 다음과 같은 3가지 저주를 받는 것이다(삼하3:29). 첫째는 불치병과 중한 병과 장애인(신체 부자유자)이 나올 것이다. 둘째는, 칼에 살해 당하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셋째,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해질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오늘날 우리 세대가 겪고 있는 아픔들 중에는 원한 관계로 인한 살인죄를 저지른 조상들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오늘도 회개 기도문을 가지고 회개하고 있다. 하지만 조상들이 지었던 원한을 낳는 살인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와 우리의 후손 중에는 앞에서 다윗이 언급한 저주들이 계속될 수도 있다. 혹시라도 나와 내 후손에게 나타나고 있는 증상이 아무리 기도해도 개선되지 않을 때에는 이러한 원한을 살 수 있는 죄 부분을 간과하지 말고 회개에 집중해 보시기를 권면드린다. 그러면 놀라운 기적도 우리에게서 나타날 수도 있다. 

 

2022년 01월 07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하강해(02) 두 왕국의 충돌, 진정 무엇 때문이었는가?(삼하2:1~17)_2022-01-06(목)

https://youtu.be/5zhs5b1d4Pg  [혹은 https://tv.naver.com/v/24489062 ]

 

1. 사울왕이 죽은 이후 유다 왕국은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사울왕이 죽자 다윗은 하나님께 묻는다. 유다의 한 성읍으로 올라갈 것인지를 물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림과 둠밈으로 대답하셨다. 그리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자기의 두 아내와 그리고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그들의 가족을 데리고 시글락에서 헤브론으로 올라와 거기에 거주하였다. 헤브론은 제사장들이 거주하는 성읍이었으며, 해발 900미터 정도되는 산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훗날 헤브론에 거주하였던 사가랴와 엘리샤벳이 그곳에서 세례자 요한을 낳는다(눅1:39). 다윗은 제사장들과 함께 그곳에서 새로운 유다 왕국을 시작한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와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2. 여러 차례의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왜 처음에는 유다 왕국의 왕으로 등극했지만 훗날에 갔을 때 비로소 전 이스라엘의 왕국의 왕이 될 수 있었는가?

  다윗은 세 차례에 걸쳐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는다. 첫 번째는 다윗이 약 15세 되던 해에 베들레헴의 자기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다(삼상16:13). 그리고 두 번째는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유다의 사람들에 의해서 그의 나이 30세 때에 헤브론에서 기름부음을 받는다. 그리하여 유다 왕국의 왕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그의 나이 37세 때에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에 의해 헤브론에서 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는다(삼하5:3~4). 이때 다윗은 유다 지파의 왕으로서 헤브론 땅에서 7년 6개월을 다스렸으며, 예루살렘으로 이동한 후에는 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거기서 다시 33년 반 동안 이스라엘과 온 유다를 다스린다. 그렇다면 왜 다윗은 처음부터 전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지 않았던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사울왕 때문인 것 같다. 사울왕은 단번에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되기 전이나 직후까지는 부모를 공경했고, 아랫사람의 말도 들을 줄 알았으며,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한 마디로 그는 겸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는 시기 질투심과 혈기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고, 죄를 짓었으나 그것을 시인하거나 인정하는데 인색했으며, 끝내 회개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무례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좀 쉬엄쉬엄 왕이 되도록 인도하신 것 같다. 차근차근 왕으로서의 인품과 지도력을 갖추어 온전한 왕이 되도록 인도하신 것이다. 그때가 바로 다윗의 나이 37세였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을 쓰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서 자신이 사명자일수록 새겨 보아야 할 대목이라고 하겠다. 

 

3. 유다 왕국의 왕이 된 다윗이 등극 후 맨 처음에 한 일은 무엇인가?

  다윗이 유다 지파 사람들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된 후 그가 맨 처음에 한 것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사신들을 보내 두려워하는 그들을 축복하고 평강을 기원하는 일을 행한 것이다. 그럼 왜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다윗의 정적이었던 사울왕과 그의 아들들의 장례를 치러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40년 전에 사울이 왕으로 옹립될 즈음에 사울왕으로부터 커다란 은혜를 입게 된다. 그러자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을 시체를 가져다가 장례를 치러 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다윗이 왕이 되어 전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불어닥칠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다윗의 세심한 관심과 돌봄으로 인하여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점차 열렬한 다윗의 지지자로 바뀌게 된다. 그렇다. 큰 지도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작은 일에 관심을 기울이며 고통과 불편을 해소해 줄 때 사람들은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다. 

 

4. 사울 왕국과 다윗 왕국은 어떻게 충돌했는가?

  사울이 죽자 살아남은 군대 장관 아브넬(사울왕의 사촌으로서, 그의 숙부 넬의 아들이었다)은 살아남은 사울왕의 넷째 아들인 이스보셋을 데리고 요단강 건너편 얍복강가에 위치한 마하나임에서 왕으로 삼는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로 치면 백제가 망한 후 후백제가 잠깐 생겼다가 사라진 것과 비슷하다. 그리하여 후 사울 왕국이 세워졌으니 그것이 바로 이스보셋 왕국인 것이다. 이스보셋은 40세에 왕으로 등극하여 2년을 통치하였지만, 얼마 안있어 두 군지휘관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그렇지만 이스보셋이 죽기 전까지는 북이스라엘의 11개 지파는 후 사울 왕국에 속해 있었다. 이스보셋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쪽에서부터 올라오고 있는 다윗의 왕국과 북쪽에서부터 남하하고 있는 사울 왕국과는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두 세력은 기브온 물 웅덩이 앞에서 대치하게 된다. 아브넬은 사울 왕국의 대표 주자로, 요압은 다윗 왕국의 대표 주자가 되어 서로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싸움에 차도가 없자 서로는 12명씩 백병전을 통해 승자가 전쟁에 이기는 것으로 결정한다. 그런데 결과는 아브넬의 패배였다. 그러자 아브넬은 왕이 있는 마하나임으로 도망을 친다. 그때였다. 요압의 동생이었던 아사헬이 아브넬을 뒤쫓아간 것이다. 그러자 아브넬은 그가 전쟁의 전리품을 진정 원한다면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보라고 권면한다. 하지만 그의 말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넬을 따라잡았지만 그는 아브넬이 뒤로 툭 내어민 창에 찔려 그만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전쟁은 휴전에 들어간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 두 왕국의 전쟁 용사들이 죽은 숫자만큼, 다윗 왕국은 점차적으로 커지고 있었지만, 후 사울 왕국은 점점 쇠약해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요압편에서는 20명이 죽었는데, 아브넬편에서는 무려 360명이 죽었기 때문이다(숫자적으로 보면 18배 차이가 난다).

 

5.  두 왕국의 충돌이 발생하게 된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왜 두 왕국 간은 이렇게 충돌을 해야만 했는가? 사실 이스라엘이 블레셋 나라에 패했다면, 이제는 두 왕국이 힘을 합쳐서 블레셋을 무찔러야 마땅한데도 말이다. 그것은 순전히 사울왕의 책임 미수 때문이다. 사울왕은 살아 생전에 적어도 2번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왕국은 이제 끝난 것이고 ㅇ파으로 새로운 왕에 의한 새로운 왕국이 조성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분명 '다윗'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권력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다. 사울은 이제 자신의 죽을 운명이 다가왔음을 깨닫고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사명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으니, 블레셋을 무찔러서 나라를 안정적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권을 차기 왕으로 내정된 다윗에게 돌려야 했다. 하지만 사울은 권력 욕심에 그 왕권을 다윗에게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죽고 말았으니, 아브넬은 응당 사울왕의 살아 있는 아들을 통해 나라가 회복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만약 다윗 가문과 자기 가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을 때에 사울이 그것에 순종만 했어도 자기 자신은 그러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버리는 것도 중요하다. 권력을 가진 자는 누구든지 자신을 내려놓기가 더 쉽지 않은 모양이다. 결국 유언 없이 죽은 사울 왕 때문에 아브넬과 요압 사이에 둘 중의 하나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동족상잔의 비극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2022년 01월 06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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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무엘하강해(01) 아프고 시린 마음 활의 노래에 실어보내다(삼하1:1~27)_2022-01-05(수)

https://youtu.be/GO1523QJ8pY [혹은 https://tv.naver.com/v/24488381 ]

 

1. 다윗은 사울왕의 죽음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다윗이 아말렉으로 가서 시글락의 자기 주민들을 구해온 뒤 삼일째 되는 날, 한 사람을 접하게 된다(삼하1:1~3). 그는 사울의 진영에서 나온 청년이었는데(패잔병으로서 아마도 고용된 용병이었던 것 같다), 사울왕의 소식을 가지고 일부러 다윗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가 전해 준 소식은 슬픈 소식이었다. 이스라엘의 군대가 패배하여 흩어졌으며 자기도 그들 중에 한 명이었는데,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그만 죽임을 당했다고 보고한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물로서 사울왕의 왕관과 사울왕의 팔찌를 가져왔다고 했다(삼하1:10). 

 

2. 아말렉 청년의 보고는 진짜인가 거짓말인가?

  그런데 아말렉 청년의 보고는 모두 것이 다 진실은 아니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자기가 직접 다윗의 대적자인 사울왕을 죽였다고 보고함으로써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서 거짓말을 지어서 말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다윗으로부터 칭찬을 받거나 아니면 어떤 특별한 혜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다윗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자기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갔는데, 사울왕이 자기의 창에 의지하고 있었고 전차와 기병이 그를 바짝 뒤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사울왕은 중한 부상을 입었기에 자기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뒤따르는 자기에게 죽여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가 어차피 죽을 것을 알아차린 아말렉 청년이 그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머리 위에 있는 왕관과 팔찌를 벗겨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거짓말은 금방 파악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길보아산은 험악해서 전차가 지나갈만한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울왕 곁에 부하들이나 병기든 자가 있었다고 한다면, 사울이 굳이 아말렉 용병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할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사울왕을 죽인 장본인이라고 자랑하기 위해 거짓말을 보태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루어 보건데, 그가 길보아 산에 갔을 때에는 사울은 이미 죽어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는 사울의 머리 위에 있는 왕관과 그의 갑옷을 보았고, 그것을 벗겨내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의 보고는 사무엘상 31장의 기록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31장에 의하면, 사울은 적군이 쏜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게 되었으며, 병기든 자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했으나 자신을 죽이지 아니하므로 스스로 자기의 칼에 넘어짐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3. 아말렉 청년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하고 사울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다윗은 비통한 마음을 금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날, 그는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슬퍼하며 울며 금식을 하였다. 그러자 부하들도 같이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다윗은 그 소식을 전한 청년을 부른다. 그리고 그가 아말렉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부하를 시켜 그를 죽이도록 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불사르고 자기의 가족들을 붙잡아갔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감히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죽였다고 스스로 말했기 때문이다. 사실 다윗에게도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씩이나 있었다. 한 번은 엔게디의 동굴 속에서 있었고 그리고 또 한 번은 하길라 산에서 있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죽이는 것은 죄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운 종을 함부로 해치는 것은 그 종을 세운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만약 사울이 죽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치심으로 죽게 될 것이고(병으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아니면 전장에서 죽게 되든지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삼상26:9~11). 그런데 적군도 아니라 아군으로 고용된 청년이 사울을 죽였다고 했으니, 이는 그가 저질러서는 안 될 일임에 분명했다. 그러므로 그는 결국 죽임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의 거짓말이 자기자신의 죽음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4. 사울왕과 요나단의 죽음의 소식을 접한 다윗이 그때 지어불렀던 애가(조가)는 무엇이었는가?

  사울왕과 요나단이 한 날 한 시에 같은 장소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가슴 깊이 슬퍼한다. 이때 다윗은 사울왕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조가(슬픈 노래)를 지어 부른다. 일명 '활의 노래'라고 한다(삼하1:17~18). 그렇다면 왜 다윗은 그 노래를 '활의 노래'라고 칭했던 것일까? 이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어왔다. 첫째는 사울이 그만 마지막에 가서 적의 궁수들이 쏜 화살에 맞아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기에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삼상31:3). 둘째는 요나단의 활이 다윗을 구해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삼상20:17~42). 셋째는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원래부터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이었는데, 베냐민 지파의 왕과 왕자가 죽었기 때문에 그렇게 칭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대상8:40). 어떤 주장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활의 노래(삼하1:19~27)의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것은 두 용사의 죽음을 두고 견고한 화살이 꺾여진 것에 비유(대유법)함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요나단이나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후손으로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두 장수(사울과 요나단)가 하루 아침에 비참하게 죽게 된 것을 두고  두 개의 건장한 활이 꺾여진 것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5. 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 슬픈 것인가?

  사실 그날 길보아 산에서 요나단이 죽은 것은 실은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울은 회개하고 죽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요나단을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을 행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먼저 요나단의 경우를 보자. 그는 비록 아버지와 의견 충돌을 갖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는 아버지를 존중하고 아꼈기 때문에 끝까지 아버지의 곁을 지키려고 하다가 죽은 것이다. 아버지를 피신시키고 적들을 막아내다가 그만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므로 슬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에게 요나단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다윗보다 나이가 약 20살 정도 많은(아마도 당시 50세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이때 사울 왕은 80세였다) 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의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그래서 차기 왕권은 요나단에게 넘어올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도 넘어갈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기꺼이 다윗으로 하여금 왕이 되는데에 도움을 주기 시작한다. 이처럼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과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었던 멋진 왕자였던 것이다. 그랬던 요나단이 자기의 아버지의 신변을 지키다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다윗은 슬픔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슬픔이 다윗에게 강물처럼 밀려왔을 것이다. 그러자 쓰라리고 아픈 마음을 다윗은 활의 노래로 만들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부르게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다윗에게 있어서 사울의 죽음도 역시 그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죽음이었기 때문에 슬퍼한 것이다. 다윗의 슬픔에는 그가 죽기 전에 회개하고 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깊이 서려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다윗의 충정심은 고스란히 그의 부하들에게 전해질 수 있었으며, 그이 부하들도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종의 잘못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잘 보고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2022년 01월 05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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