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앙인들이 일평생 추구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일평생 추구했던 것은 아마도 인생을 성공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요 그것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자기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주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요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상얻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상얻는 자가 되는 것일까? 천국에서 상얻는 자가 되기 위해서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2. 지금까지 천국 백성 가운데서 가장 복된 자로 살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성경에 등장하는 약1,000여 명의 중요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복된 자, 가장 축복받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아브라함인가 모세인가? 다윗인가 이사야인가? 사도 베드로인가 사도 요한인가? 그런데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그는 가장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 집을 짓고 살고 있기 때문이요, 가장 영광스러운 지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되어서 천국에서 이러한 집과 이러한 지위를 갖게 된 것일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을 끝까지 성실하게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며 영혼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상얻는 자가 되게 하는 일이다. 그 일에 그는 일평생을 헌신했던 것이다(딤후4:7~8). 그러므로 우리도 만약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상얻는 자가 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의 삶을 돌아보고 그가 걸어갔던 발자취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3. 사도 바울이 일평생 추구했던 부름의 상이란 대체 어떤 것이었는가?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부터 쉼없이 일평생을 달려갔다. 그리고 끝까지 신실함을 지켰다. 그렇다면 그가 일평생 소망했고 가장 추구했던 일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위에서 그에게 주시려고 했던 부름의 상이었다(빌3:12~14).
빌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럼, 그가 일평생을 추구했던 부름의 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열심히 일을 할 경우 그에게 주어지는 보상, 임금이었을까? 아니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경기장에서 승리하는 자가 얻게 되는 바로 그 상을 얻기 위해 열심히 달려간 것이다. 그러므로 상에도 2가지 종류의 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수고한 만큼 주어지는 보상으로서의 상이 있다. 이것을 헬라어로는 '미스도스'라고 말한다. 그것은 계22:12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자신이 일한 만큼 보상을 받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수고한 것에 대한 댓가를 받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국에 들어갔을 때 살 집 곧 천국집이 잘 준비가 된다. 그러므로 주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면, 천국집이 커지거나 혹은 인테리어 장식이 보석으로 더 아름답게 장식되거나, 혹은 집 정원에 있는 분수대와 꽃 그리고 새들이 더 많이 채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진정 추구했던 것은 천국집이 아니었다. 그가 진정 추구했던 것은 천국에서 그가 받을 진정한 상으로서, 경기자가 경주에서 이겼을 때에 받게 되는 그러한 상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것을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는 그러한 종류의 상인 것이다. 이는 최종적으로 이기는 최고의 선수가 받는 상으로서 헬라어에서는 '브라베이온'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직 한 가지 즉 하늘에서 주실 부름의 브라베이온을 위하여 끝까지 달려갔던 것이다.
4. 천국에서 브라베이온의 상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천국에서 성도가 받게 될 브라베이온의 상은 천국에 입성하는 모든 성도들이 다 받는 상이 아니다. 몇몇의 소수만 받는 상이다. 그래서 이러한 종류의 상은 한 마디로 면류관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면류관은 주님 나라를 위해서 죽도록 충성한 사람들이 받게 되는 최고의 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면류관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다. 선수들 중에서 경기를 통해서 최고의 경주자가 된 사람이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브라베이온의 상을 얻기 위해서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을 사도 바울은 빌3:12~14의 말씀과 고전9:25~28의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절제를 해야 한다고 했다(고전9:25). 경기장에서 육상 경기를 할 때 최고의 우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절제를 해야 한다. 먹을 것 다 먹고 즐길 것 다 즐기면서 우승하는 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시 고린도 도시에서 2년마다 개최되었던 이스트미안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약 열 달간 철저하게 자기 통제를 했다고 한다. 첫째로는 술을 통제했다. 술을 먹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먹는 것을 통제했다. 그리고 이어서 식이요법에 따라 먹어야 할 음식만을 먹고 지냈다. 그리고 셋째는 성적인 유희도 절제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경기장에서 결코 금메달을 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그것을 잠시 내려놓는 것이다. 그것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만을 얻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다. 이것이 절제라는 의미다.
둘째,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고전9:26. 빌3:12~14). 달리기 선수는 골인점을 목표 지점으로 설정하고 달려간다. 그리고 권투 선수는 상대방의 얼굴이나 약한 부위에 초점을 맞추어 가격을 한다. 그래야 끝까지 달릴 수 있으며, 잘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야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걸어갈 때에 절대 방향없이 걸어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두 손을 뻗치되 허공에 치는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고 말한다. 뚜렷한 목표와 방향을 설정한 다음 그 길을 줄곧 걸어갔기 때문이다.
셋째, 자기 육신의 몸을 철저하게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고 했다(고전9:27). 왜냐하면 사람의 몸은 귀신들의 많은 영향을 받아서 그냥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고 움직이지 않으려 하고 놀고 먹기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기장에 나가 경주에서 이기기를 경쟁하는 자는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철저하게 통제해야 한다. 먼저는 쳐야 한다. 멍이 들도록 자신의 몸을 거칠게 다뤄야 하는 것이다. 혹독하게 다루는 것이다. 그리고 복종시켜야 한다. 몸을 영혼의 노예인 것처럼 생각하고 몸을 하나님의 뜻에 예속시키는 것이다. 더이상 반항하지 않도록 철저히 복종하는 것이다. 그래야 결국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5. 성도들이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고로 성도들이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하늘에서 주님이 주시려고 준비해 둔 부름의 상이다. 하늘에서 우리를 이 땅에 내려보내실 때에 주신 사명을 끝까지 성실하게 완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날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나태해지고, 안주하려고 하고 더욱이 잘못되면 퇴보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이룬 것에 대해서 감사는 하되 그것을 자랑거리로 여기면서 그냥 거기에 안주하면 아니 된다. 부르심의 상을 얻는 그날까지, 다시 말해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에게 부름의 브라베이온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는 자에만 주는 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곧 '면류관'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면류관은 천국에 들어온 성도들 중에서 주님 앞에 충성했던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몇 안 되는 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서 불러내실 때에 우리에게 주려고 작정하신 채 있는, 부름의 상을 열심히 추구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에는 달란트도 있고 은사도 있다. 둘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달란트가 능력을 강조하는 쪽이라면, 은사는 선물을 강조하는 쪽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들에게 달란트를 주시는가?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합당한 조건을 따라 주시는 것인가? 그것은 오늘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달란트와 은사를 주시고 있는데, 과연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달란트의 분량은 어떻게 정해지는 것인가? 이것은 사실 나 자신이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잣대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 달란트는 매우 중요한 이슈가 아닐 수 없다.
2. 하나님께서 쓰시는 종들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들은 어떤 종들로 나뉘어지는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쓰시는 종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종들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있다(마25:21,23). 즉 이들은 선하고 신실한 종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있다(마25:26). 그런데 이러한 종을 가리켜 주님께서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씀하셨다(마25:30). 이는 쓸모없는 종이요, 필요없는 종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다 같은 하나님의 종이라 할지라도 어떤 종은 주님이 쓰시기에 꼭 필요한 종이 있는가 하면 어떤 종은 주님이 보시기에 쓸모없는 종도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쓰임받을 때에 착하고 신실한 종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3. 하나님께서 종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그리고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의 행위를 통해서다. 그들이 주인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했느냐를 통해서 그들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기도 하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넘겨받았던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따라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주인을 전혀 이롭게 하지 않았던 자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었고, 주인을 이롭게 한 자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이들은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청기기라는 말은 주인에게는 종이지만 종들에게는 그 종들을 부리는 종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청기지 종이란 신분으로는 비록 종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아들처럼 자유롭게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종이 바로 청지기 종인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주인이 자기 자신의 종들을 불러 놓고 자기의 재산들을 그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넘겨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때 맡긴 달란트가 각각 다르다. 하나는 다섯 달란트였고 또 하나는 두 달란트였으며, 또 하나는 한 달란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주인은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되 차별하는 것처럼 각기 다르게 맡긴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가진 능력에 따라서 맡긴 것이다. 주인이 보기에 기분이 좋으니 더 많은 것을 맡겨 주고 기분이 나쁘니 더 악한 것을 맡겨 준 것이 아니라 각기 자신이 가진 능력의 분량에 따라 맡겨 주셨다는 뜻이다.
4.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달란트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주인이 종들에게 전적으로 위임했던 달란트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것은 첫째로 그것이 능력이자 재능이라는 것이다. 이는 각기 잘 감당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을 가리킨다. 둘째로, 아무리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는 것이지 종들에게는 있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로, 주인이 달란트를 맡겨 주실 때에는 각 사람의 분량만큼 맡겨 주신다는 것이다. 넷째로, 그것의 소유권이 주님에게 있기 때문에 결산을 할 때에는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할 것을 왜 다섯 달란트 받은 자나 두 달란트 받은 자는 그것을 가지고 더 남기기 위해서 왜 그렇게 열심히 수고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이 다음에 또 시작할 때에 나 자신의 기본적인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사람에게 달란트를 맡기실 때에 얼마만큼 맡길 것인지에 대하여 우리의 수고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5.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달란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시는 달란트는 어떻게 해서 나의 것으로 정해지는가? 그것은 3가지 기준이 있다. 이 기준에 따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달란트를 분배해 주시는 것이다.
첫째, 조상들이 얼마나 심었는가에 따라서 내 달란트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받은 달란트에는 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상들이 많이 심었다면 그의 후손은 태어나면서부터 복을 받고 태어나는 것이다. 즉 조상들이 늘 베풀고 살았던 자는 후손이 물질에 있어서 복을 누리며 살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아버지나 조상들이 영성가이고 영적 사역자였다면 그의 후손이나 자녀들 역시 아버지보다 더 높은 영성가가 될 수 있고, 더 높은 영적 사역자도 될 수 있다. 그러면 이런 불만을 가진 자가 나올 수 있다. "누구는 조상을 잘 만나서 복을 누리고 사는데, 왜 나는 조상을 잘못 만나서 이런 고생만 하고 사느냐? 참 세상 공평하지 않구나"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그것은 첫째로 조상이 물려준 것이 꼭 나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도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지금 복을 누리고 살고 있는 자는 다 조상들의 덕택이라 말한다고 할지라도 정작 본인이 베풀고 살지 않으면 후손들 중에 복받을 자가 결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실 때 달란트의 분량을 이미 정해서 보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기 때문에 우리가 왈가불가할 일은 결코 아니다. 이는 마치 토기장이가 토기를 어떤 그릇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은 토기장이의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어떤 그릇으로 나를 만들 것인지에 대해서 주인은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참견도 할 수 없다. 아버지의 고유권한이기 때문이다.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달란트를 얼마만큼 받았는지에 상관없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어떤 결과를 남기려 하는 것은 자신의 고유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일에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에 그에게 달란트를 맡기실 때에 더 많은 것으로 맡겨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주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6. 내가 앞으로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러므로 내가 앞으로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인지는 사실상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어떤 것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을 십분 활용하여 어떤 결과를 남기게 된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근거로 다시 시작하게 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누구든지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있어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면, 그는 그것이 다음번 달란트 분배에 있어서 기본 자산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앞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인지는 지금 내가 얼마나 남겼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다. 지금 내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면 내가 하는 일에 있어서 그것을 더 잘 감당하고 더 많이 감당할 자산이 사실상 내게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결국 내가 이미 가진 것으로 열심히 일하여 얼마를 남겼는가 하는 것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신의 달란트의 분량이 더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이라도 맡겨 주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충성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는 전무후무한 일이 자기에게도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자들이 결국 나중에는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듯이 천국에도 들어가고 천국 잔치에도 참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시작부터 엄청나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시간이 생기기 전으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말씀으로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으며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요1:1~3).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어 그분이 바로 나타난 하나님 곧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1:14,18). 요한복음은 바로 그 예수가 누구신지를 7가지 표적과 7가지 자기선언을 통해 표현해 주고 있으며, 그것은 한 마디로 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물론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을 공관복음서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고 증언한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그것을 초월한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바로 그 주님 곧 한 분이신 하나님 자신인 것을 증거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40번의 시간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공부해 왔다. 그리고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히 주려함이었다(요10:10). 그분은 만세 전에 말씀으로 존재하셨다가 성육신을 입으신 후에 죽고 부활하시어 다시 하나님의 상태로 돌아가셨다. 그것을 증언하기 위해 요한복음은 기록되어졌다(요20:31). 그런데 요한복음은 20장에서 한 장을 더 할애하여 마무리를 하고 있다. 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20장으로 끝내지 않고 21장으로 한 장 더 추가하여 끝내려 한 것인가?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의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여 주는 교훈은 대체 무엇인가?
요한복음이 어떤 책인지를 알려 주는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는 역시 요한복음이 기록하고 있는 7가지의 표적들과 7가지의 자기선언에 들어 있다. 어떤 학자는 요한복음을 '표적의 책'이자(1~12장) '영광의 책'(13~21장)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요한복음에서도 '표적'이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일으키신 표적들은 7가지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요21:25). 하지만 그것들 가운데 사도 요한은 딱 7가지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을 보면 첫째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요2:1~11), 왕의 신하의 중풍병을 고쳐 준 사건(요4:46~54), 38년 된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워 준 사건(요5:2~9),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요6:1~15), 바다를 걸어오신 사건(요6:16~21), 날 때부터 못 보는 자의 눈을 열어 주신 사건(요9:1~8).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신 사건(요11:17~44)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일으키셨던 7가지 표적들은 결국 예수께서 하나님이시자 왕이시며, 창조주이자 생명주는 분이라는 것을 증언해 준다.
한편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스스로 당신 자신이 누군지를 소개하는 말씀이 나오는 아주 특별한 복음서다. 이것을 가리켜 예수님의 '자기선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선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8:12)", "나는 양의 문이다(요10:7,9)",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요15:1)" 이 7가지 자기선언을 보면, 예수께서 생명이요 빛이요 문이요 목자요 부활이며 길이요 진리와 포도나무인 것을 소개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이러한 7가지 자기선언은 그분이 하나님으로서 이 땅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주제는 예수께서 목자로서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려고 오신 것임을 알 수 있다(요10:10).
3. 부활 후 예수님에 대한 칭호는 대체 어떻게 바뀌었는가?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도마로부터 주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요20:28).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러한 사실 말고도 예수께서 주님이라는 사실에 대해 보다 더 구체적이고도 놀라운 사실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신앙하지 않았던 그 누구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기 전에는 예수님에 대한 칭호의 대부분이 랍비나 선생님이라는 칭호였다. 심지어 제자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주님이라고 하는 칭호를 붙이게 된 것은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의 기적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을 이제 예수께서 부활하시자 '그 주님(호 퀴리오스=the Lord)'이라고 칭한다. 헬라어로 '퀴리오스'라는 칭호에 정관사 '호'를 붙여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전에는 한 번도 주님이라는 칭호 앞에 정관사 '호'를 붙인 경우가 없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의도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호'라는 정관사를 붙여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이것은 예수께서 이제 한 분 하나님 그 자신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사실 '퀴리오스'라는 단어가 보통 일반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종이 주인을 칭할 때(요15:15)나 상대방을 높여서 부르려고 할 때 그렇게 사용했었다(요20:15). 그런데 이러한 칭호가 종교적으로 쓰일 때에는 2가지로 귀결된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칭호였고 또 하나는 예수님에 대한 칭호였다. 그런데 부활 후에는 예수님에 대한 칭호가 '호 퀴리오스'가 된다. 이는 '퀴리오스'라는 칭호가 종교적인 칭호에서 기독론적인 칭호로 고착화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다. '호 퀴리오스'라고 말하면 이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용어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칭호였던 '주(아도나이,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아버지'라는 칭호로 바뀐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문구가 지속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4. 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 한 장을 더 할애하여 21장을 기록하여야 했는가?
요한복음은 사실 20장으로 끝이 난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0장 마지막 절에서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요20:31). 그런데 요한복음은 20장으로 끝나지 않고 21장으로 끝난다. 왜 그랬을까? 아니, 왜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것은 요한복음 21장에 기록된 기사를 통해서 살펴보면 적어도 핵심적인 이유는 3가지였다.
첫째, 그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먼저 갈릴리에 가실 것이라고 예수님 자신도 미리 말씀해 주셨으며(마26:32), 또한 천사도 그렇게 일러 주었는데(마28:7,10), 그것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잘 모르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 사건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려 주기 위함이다(요21:1~14).
둘째, 그것은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베드로가 그만 3번씩이나 강력하게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는데, 주님께서도 이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의 사도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기 위함이다(요21:15~17). 그래야만 이제 성령강림 후에 복음 전파의 대표주자로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그것은 주님께서 사도 요한을 주님이 올 때까지 머물게 하실 것이라는 말이 와전되어 주님의 재림시까지 사도 요한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 하는 오해를 불식시켜 주기 위함이다(요21:18~23). 왜냐하면 그 말의 뜻은 주님께서 그를 주님 재림 때까지 살려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베드로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즉 누구든지 사명을 받은 자는 자신의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마지막이 어떻게 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5. 갈릴리 출신의 7명의 제자들은 왜 예루살렘에서 다시 갈릴리 바다로 떠나갔는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함께 있을 때에 주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진짜 부활했다는 것을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통해 보여 주셨다. 물론 예수께서는 개인적으로도 사람을 만나 당신이 부활했다는 것을 알려 주셨다. 하지만 그것은 줄곧 예루살렘에서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도 당신이 부활했다는 것을 알려 주실 필요가 있으셨다. 왜냐하면 베드로를 다시 사도로서 그 지위를 회복시켜 주고 복음 전파의 기수로 쓰실 이유가 있는데, 예수께서 베드로를 만나 그를 처음에 사도로 부르신 것이 갈릴리 바다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고난받기 전에도 갈릴리에서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를 비롯한 갈릴리 출신의 7명의 제자들이 갈릴리로 간 것은 이제 예수께서 돌아가셨으니 고향으로 가서 옛날 생활로 다시 돌아가고자 함이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거기서 만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사도들을 처음 부름의 자리로 불러서 그들을 다시 사도로 세워 주시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6. 베드로를 다시 사도의 대표자로 세우기 위해서 주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주님께서 베드로를 다시 사도의 대표자로 세우기 위해서 하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추되었던 그의 권위를 다시 세워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주님을 모른다고 3번씩이나 강력하게 부인했던 죄책감으로부터 그를 놓아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시 시작하자면서 옛날 그를 처음에 불렀을 때의 자리와 그가 주님을 부인했던 자리를 한 곳에 셋팅을 하신 채 기다리셨다. 먼저, 베드로를 처음 불렀을 때로 돌아가게 했다. 그것은 7명의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게 유도하신 다음,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게 하여 고기를 심히 많이 잡히게 한 것이다(요21:3~6). 그러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를 사도 요한이 금방 알아보고,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신 분을 '그 주님'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베드로는 큰 배에서 내려 약 90m나 되는 거리를 헤엄쳐 육지에 있는 주님께로 나아간다. 둘째,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자리로 돌아가게 했다. 그것은 육지에 숯불을 피워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요21:9). 이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당시 대제사장의 집에 있을 때에도 숯불이 피워져 있었기 때문이다(요18:18).
그리고 주님은 숯불에 물고기를 굽고 계셨고 떡을 굽고 계셨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그들이 잡아온 생선을 구워서 아침 식사를 하게 하셨다. 그렇다면 이미 숯불에 굽고 있었던 물고기와 떡은 누가 준비하신 것인가? 그것은 주님이시다. 주님께서 이미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하셨고 그것으로 식사거리를 더 풍성하게 만드셨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주님께서 시작하는 것이니, 주님의 시작을 믿고 따라오면 우리의 것을 통해서 더 풍성히 해 주신다는 약속과도 같은 것이다.
7. 베드로에게 던진 3가지 질문은 무엇이며, 이것은 오늘날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윽고 아침 식사가 끝날 무렵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따로 불러내셨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것은 거의 동일한 질문이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때 베드로의 대답도 같았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이미 아시고 있다고 대답한 것이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첫째, 이때 예수께서 3번씩이나 사랑하느냐고 질문을 던진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가지고 있었던 마음의 상처를 씻어 주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과거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버린채 딛고 일어설 수가 있었다.
둘째, 첫 번째의 질문에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거기에 있는 다른 여섯 명의 제자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는 요구였던 것일까? 그런데 당시 상황을 살펴보고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라는 단어가 '투톤'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남성복수만 되는 것이 아니라 중성복수도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 단어가 남성복수 지시대명사였다면 '이 사람들보다'라고 번역해야 하겠지만, 중성복수 지시대명사로 쓰였다면 이 단어는 '이것들보다'라고 번역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사실상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냐?"가 더 옳은 번역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번역한다면, 그때 주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그때 이것들 곧 베드로의 주변에 있는 것들은 배들이나 물고기들이나 바다나 주변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제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명령을 따라, 고기를 잡는 어부로서의 일보다 사람의 영혼을 낚는 어부로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는 베드로가 앞으로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주님께서 약간의 뉘앙스가 다른 질문을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는 세 번의 질문 가운데 두 번은 네가 나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아가파오)고 질문하셨었다. 그러므로 처음 두 번의 질문은 베드로에게 부담되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사랑으로서, 조건없는 사랑이자 희생적인 사랑이요 끝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베드로는 두 번씩이나 자신은 아가페의 사랑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필로스'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필레오)고 대답한 것이다. 여기서 '필로스'의 사랑'이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으로서 친구가 친구를 위해 사랑하는 사랑으로서 의리를 지키는 사랑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그때 베드로는 두 번씩이나 아가페의 사랑으로는 사랑할 수 없어도 이제는 적어도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세 번째 질문을 던질 때에는 그러면 네가 나를 '필로스'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게 또 무슨 질문일까를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이 근심이 된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께서는 내가 적어도 필로스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자신의 대답을 통해서 파악하신 것이 아니냐고 대답한다.
셋째, 주님이 아신다는 동사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 두 번의 주님이 아신다는 대답에 사용된 단어는 '오이다'였으나, 마지막에 가서 베드로가 사용했던 주님이 아신다는 단어는 다른 단어이기 때문이다. 앞의 단어는 '오이다'였지만 뒤의 단어는 '기노스코'였기 때문이다. 그럼 맨 나중에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하였는가? 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신 채 있습니다(오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필레오)는 것을 당신이 아십니다(기노스코)." 그렇다. 여기서 주님이 항상 아시고 있었던 것은 '오이다'의 앎이다. 이러한 앎은 직관적인 앎이다. 무엇인가를 듣고 묻고 배우거나 경험해서 아는 앎이 아니다. 그냥 아는 신적인 앎인 것이다. 그러나 '기노스코'의 앎이란 누군가에게서 듣고 배워서 경험적으로 아는 앎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때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자신의 대답을 듣기 전에 주님은 이미 원래부터도 잘 알고 계셨겠지만 이제는 자신의 대답을 통해서도 얼마나 자신이 주님을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들어서 아실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다섯째, 베드로의 대답에 대한 주님의 명령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주님은 세 번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후에 세 번 다 다르게 베드로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그가 장차 사도로서 해야 할 사명에 관한 것들이었다. 첫 번째는 '내 작은 양들을 먹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양'이라는 단어는 아주 어린 양을 지칭하는 '아르니온'을 가리키며, '먹이라'는 말은 '보스코'라는 단어로서 '먹이를 주다, 양떼를 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두 번째는 '내 [다 자란] 양들을 목양하라'고 하셨다. 여기에 나오는 양은 다 자란 '프로바톤'을 가리키며, '목양하라'는 말은 '포이마이노'라는 단어로서, '양을 돌보다, 양을 지키다, 목자가 되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내 [다 자란] 양들을 먹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양은 다 자란 양은 '프로바톤'을 가리키며, '먹이다'는 단어는 '보스코'라는 단어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베드로는 이제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을 예수믿게 하는 일 곧 '아르니온'을 만들어서 치는 일도 해야 하며, 동시에 이미 복음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목자로서 그들을 하나하나씩 치고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주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사역자들은 이제 성도들을 주님의 양떼로 생각하여 그 양떼를 조심스럽게 그리고 온전하게 자라도록 목양해야 하는 것이다.
8. 베드로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주님의 예언은 어떤 것이었는가?
베드로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신 예수께서는 이어서 베드로가 그가 젊어서는 자기의 원대로 살았다면 늙어서는 남이 바라는 것을 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다(요21:18). 이는 그가 장차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인지를 알려 주는 예언과도 같은 말씀이었다. 그러자 베드로는 사도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주님께 묻는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만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머물기를 내가 원한다고 할지라도 너를 향하여는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느냐?"라고 대답하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 말은 와전되었고, 나중에는 사도 요한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말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그 말은 그러한 뜻이 아니라, 만일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그를 이 땅에 머물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베드로에게는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하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밝히 교정해 주기 위해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굳이 덧붙여 요한복음 21장에 기록해 둔 것이다. 그렇다. 남이야 어떤 길을 걸어가든 모든 사역자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9. 요한복음은 누가 썼는가?
우리는 요한복음을 사도 요한이 썼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내증이 그렇게 우리에게 알려 준다. 하지만 요한복음 21:24의 말씀을 요한복음 중에는 사도 요한이 쓴 것이 아닌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러한 본문이 오직 요21:24의 한 구절인지 더 많은 구절이 들어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한 구절이 있을 수 있음을 요21:24의 구절은 암시해 주고 있다. 이 구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자.
요21:24 이이는 이것들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는 제자이며 그리고 이 일들을 기록했던 제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아온 채 있다.
그렇다.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1인칭 복수 '우리'는 적어도 사도 요한은 아니다. 누군가가 제 삼 자의 입장에서 사도 요한의 저작이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라는 존재는 사도 요한을 직접 보았거나 그의 증언을 직접 들었던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은 간다. 그렇지만 그가 누구였는지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그들을 가리켜 '요한 공동체'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더불어 '우리'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사도 요한이 최초로 기록했던 말씀에 더 말씀을 추가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마지막 부분에 왔을 때에, 요한복음 21:24에 한 구절을 더 추가했을 것으로만 추정이 된다. 왜냐하면 이전까지의 기술이 사도 요한이기 때문에 이 기술이 사실이라는 것을 자기들이 보증한다는 의미로 이 구절을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0. 요한복음이 못다 한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요한복음이 못다 한 이야기는 또 무엇이 있을까? 여기에다가 다 기록하지 못한 것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것은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고 요한복음의 저자는 말한다(요21:25). 왜냐하면 예수께서 행하셨던 바 다른 것들도 많이 있다고 증언하고 있기 대문이다. 심지어 그것을 다 기록한다면 세상이라도 책들로 기록되고 있는 것들을 수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시면서 주 하나님이라는 것과 그분을 믿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만을 간추려서 여기에 기록했다는 것을 우리는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믿고 그분을 힘입어 영생을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11. 나오며
요한복음은 생명의 책이다.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려 주는 고(高)기독론의 책이다. 이는 이 책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을 믿어야만 누구든지 아버지의 생명이요, 썩지 않을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이며 또한 부활생명인 예수님이 갖고 있는 생명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우리가 죽은 다음에는 생명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고 듣고 공부할 때에 반드시 생명을 발견해야 한다. 만약 요한복음을 접해 보았는데도, 예수께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그분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채 지나간다면, 그는 요한복음을 잘못 본 것이요 잘못 공부한 것이다. 그렇다. 요한복음은 생명의 책인 것이다. 이는 그분이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며, 생명의 물이요, 생명의 떡이자, 생명의 빛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명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만 주셨던 생명이었다(요5:26). 그리고 하늘나라 곧 아버지의 집은 거듭 태어남으로 아버지의 생명을 가진 자만 들어가는 장소다. 이것을 가르쳐 주는 본문이 바로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이다. 그렇다면 예수 안에 있는 이러한 생명은 과연 어떻게 우리가 취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누구든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그분을 생명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분을 자기의 마음 속에 생명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도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그 생명을 죽는 날까지 부인하지 말고 꼭 간직하고 지켜낼 때에 우리는 영생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