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는 9장을 기점으로 큰 분수령을 가진다. 우선 1장부터 8장까지는 인간구원의 필요성과 그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이 부분은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과 칭의와 성화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9장부터는 양상이 좀 달라진다. 9장부터 11장까지는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부분에서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문제를 집중해서 조명하고 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며 이신칭의를 통해 칭의인이 되고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원칙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적용되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그동안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아왔던 유대인들이 그만 메시야를 배척하고 말았는데 그들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말한다. 다시 말해 우선적으로 유대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를 스스로 배척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죽이는데 앞장선 유대인들은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다룬 것이다. 과연 예수님을 배척해버린 유대인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우선,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의 구원에 관해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고통이 자기에게 있음을 간절히 토로한다(롬9:1~2).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은 선택받은 민족이기는 하지만 실제 구원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유대인의 특권과 아울러 그들의 장래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무려 3장을 걸쳐 다루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선민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특권 8가지를 언급한다(롬9:4~5). 그것은 그들에게는 먼저 하나님의 양자가 될 수 있는 자격과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신 영광과 족장들로부터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언약들과 율법을 수여받은 것과 성막과 성전에서 직접 하나님께 예배함과 메시야에 관한 약속들을 가지고 있었고,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자신의 조상들이었으며, 결국에는 메시야가 자기들의 혈통을 통해 오셨음을 증언한다. 하지만 정작 구원은 유대인들에게서 사라지고 있었고 이방인들에게 그 촛대가 옮겨지고 있었다. 왜 특별한 은총을 받았던 유대인들이 정작 구원으로부터는 멀어져가야만 했던 것일까?

  바울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하지만 그는 항상 자기 동족에게 관심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파했다. 하지만 복음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복음을 대적하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전파에 앞장선 바울을 죽이려고 시도했다. 이 일을 어찌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9장을 통해 유대인들의 구원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언급한다. 하나는 비록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 혈통적인 특권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약속을 믿는 자만이 구원받았음을 지적한다(롬9:6~13). 그리고 또 하나는 결국에 유대인들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다고 하더라도 장차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를 붙든 자들 곧 그 약속을 붙잡고 끝까지 살아남은 자들, 즉 남은 자만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롬9:27). 그렇다. 비록 유대인들이 혈통적인 특권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그들도 회개하고 메시야에 대한 신앙고백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한편, 오늘 본문말씀은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그 뜻이 상당히 왜곡되어 전달되고 있는 본문들 중의 하나다. 그들은 놀랍게도 이 말씀을 너무나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하고 있다. 왜냐하면 칼빈주의자들은 롬9장 10~13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오직 하나님에게 구원의 주권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왈가부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에 대한 구원을 예정해놓고 있으며, 또한 어떤 개인에 대한 유기를 예정해놓은 것에 대한 확실한 성경본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어떤 개인에 대한 구원을 예정해놓으셨고, 또 어떤 이는 그와는 반대로 유기하기로 예정해놓으셨다는 이중예정론의 근거로서 이 본문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이 본문은 그러한 근거가 되며 그러한 뜻의 본문일까?

  결론적으로 말하겠다. 롬9:10~13의 말씀은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그러한 근거의 본문이 아니다. 왜 그런지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자, 먼저 본문을 좀 보자.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1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2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9:10-13)" 칼빈주의자들은 이 본문을 가지고 이렇게 주장한다. "보아라, 하나님께서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두 국민에 대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예정하지 않았느냐?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느냐? 개인의 구원과 유기에 관한 하나님의 예정은 사람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이렇듯 이미 작정된 것이며,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되어진 것이니 그것에 대해 우리는 왈가불가할 수 없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본문을 잘못 해석했다. 첫째로, 이 본문은 야곱과 에서의 개인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두 사람의 쓰임새(사역)에 관한 예언적인 말씀인데, 칼빈주의자들은 이것을 두 사람의 구원의 문제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이 본문은 두 사람 곧 야곱과 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야곱과 에서로 말미암아 탄생할 두 민족에 관한 사역적 예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장차 두 민족이 어떻게 쓰임받을 것인지를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예지적으로 말씀하신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장차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과거부터 미래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예지적 능력으로서 앞으로 그렇게 될 것임을 아시고 리브가에게 그렇게 들려준 것 뿐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누구는 구원하기로 예정하고 누구는 버리기로 예정하셨다는 개인구원에 관한 예정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는 파멸토록 내버리시겠다고 예정하셨고, 야곱은 구원하시겠다고 예정했다는 말씀이 전혀 아닌 것이다. 이 본문은 장차 두 민족이 어떻게 쓰임받을 것인지에 대한 사역적 예정에 관한 말씀으로서, 결코 개인구원예정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그리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표현도, 사실 누가 큰 자이며 누가 작은 자인지도 정의하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자들은 두 사람의 후손에 대한 민족적인 예정을 개인구원예정의 예로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이 본문을 쓰고 있는 바울의 논지를 알아야 한다. 비록 에서가 이삭의 장자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러한 혈통적인 특권이 그를 자동적으로 구원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즉 에서가 비록 혈통적으로 이삭의 장자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자기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총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장자로서 받을 수 있는 혜택과 거기에 따르는 구원의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은 야곱을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를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해놓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말씀하셨을까?(말1:2~3). 그것은 만세전에 그렇게 예정하셨다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 사건이 있은 후부터 약 1,5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주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살았기에 결론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어떻게 했던가? 그들은 자기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를 배척했고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선민으로서 수많은 특권이 주어지긴 했지만 정작 유대인들이 그것을 사용하여 구원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거부함으로 스스로 구원에서 떨어나가버린 것이다. 이 점을 사도바울은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선민으로서 무려 8가지 특권이나 소유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지도 못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도 않아 몇몇 소수만 구원을 받게 되기에 이른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이제 호세아선지자와 이사샤선지자를 통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대한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언급한다. 그것은 주님의 백성이 아니며 주님으로부터 사랑받지 않던 이방인들이 오히려 나중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며, 참된 이스라엘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롬9:25~29). 즉 선민으로서 특권을 지닌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지 못한 유대인들은  구원에서 탈락되고 그들 중 끝까지 살아 남은 자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선민으로서 주어진 특권은 그것을 사용하여 자신이 먼저 구원으로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배려요,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도 구원받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믿는 이방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비록 자신이 목회자의 자녀로 태어나서 자라고 있고, 3대째 예수믿는 가정이라 할지라도 정작 자신이 회개하는 삶을 살지 않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붙잡지 아니한다면 그가 가진 특권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날마다 회개하고, 날마다 우리 주님만을 붙잡고 살기를 바란다. 오직 예수님이 아니면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분을 붙잡지 아니한다면 나의 모든 특별한 은총도 다 소용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에 그분만을 붙잡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다고 핍박받고 죽는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분의 말씀만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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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이중예정교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한국교회의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자신은 이미 구원받은 줄로 알고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아주 많아졌다. 하지만 이 사회의 부정부패와 도적적인 해이는 왜 이리 깊어지고 많아지고 있는가?
  결국 이 사회의 타락의 배후에는 깊숙히 칼빈교회가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은 이미 구원받을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큰 걱정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 문제가 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회개기도를 시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를 지어도 그들은 태평하다. 죄를 짓고도 아파하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는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기는커녕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으려니 한다. 요즘 간증자들을 보라. 여러 기독교TV에 출연함으로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고있지만 그들의 간증에는 거짓이 들어있고 침소봉대된 사실도 너무나 많다.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것은 생각지 않고 어찌하면 사람들을 감동시킬 것인가에 초첨을 맞추고 있는 듯 하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칼빈의 교리가 얼마나 잘못된 것이며, 이 교리가 사람들을 지옥보내는 교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은 그 4번째 시간으로써 칼빈의 이중예정교리와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병폐와 오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칼빈의 이중예정론과 무조건적인 선택교리에 대해 알아보자.
  "성부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어떤 이들은 구원받도록(천국에 들어가도록) 예정하셨고, 어떤 이들은 버리기로(지옥에 떨어지도록) 예정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러한 예정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며 무조건적이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은 사람의 행위를 보신 후에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만세전에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결정하신 것이다"
  이러한 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때에는 이것처럼 은혜되는 것이 없었다. 나같은 사람까지도 만세전에 예정해놓으셨다는 것에 필이 꽂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중예정교리와 무조건적인 선택교리는 아무 무서운 것이다. 이것만 믿고 넋놓고 있다가는 지옥 떨어지기가 쉽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예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는 구원하기로 예정하고 누구를 지옥에 보내기로 예정하신 적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모든 길을 예비하신 후에 누구든지 그 구원 안으로 들어오시를 바라신다.

  다음으로, 칼빈의 이중예정교리와 선택교리의 병폐에 대해 알아보자. 만약 칼빈의 이중예정교리와 선택교리가 맞는 것이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해 대답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하기로 그리고 누구는 멸망시키기로 예정하셨다면, 하나님은 폭군임에 틀림없다. 자기 마음대로 해놓고 그것은 내가 잘 결정한 것이니 무조건 따르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데, 누구는 구원하기로 하고 누구는 버리기로 결정하셨다면 하나님은 대단히 편파적인 분이며 편애하시는 분이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공의롭다는 말은 수정되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예정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이라면 아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누구든지 내게로 와서 구원을 받으라"고 초청하신 것은 큰 잘못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예정하지 않은 사람이 혹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받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버지의 뜻을 어긴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넷째, 하나님의 예정으로 모든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면, 우리가 굳이 나가서 전도할 필요가 없게 된다. 작정된 대로 믿거나 작정된 대로 믿지 않을 거니까. 하지만 예수의 유언이 무엇인가? 가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 하지 않으셨던가!
  다섯째, 하나님의 이중예정이 고정된 상태라면, 우리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주님 앞에 나가려 하는 시도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손놓고 기다리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나를 꼭 믿게 할 테니까. 그리고 회개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 다 회개시키실 테니까. 더욱이 굳이 믿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알아서 우리를 믿게금 하실 테니까.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즉 회개할 기회도 놓쳐버리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다가 지옥떨어지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칼빈교리는 모든 사람을 숙명론에 빠지게 만들어 버린다.
  여섯째, 하나님의 이중예정이 절대적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을 아시고 예정하신 것이 되어버림으로 악의 조성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설령 악한 일을 했다 치더라도 그분이 하는 모든 것은 선한 것이라 믿으라고 강요한다. 즉 "인간이 범죄한 것도 하나님의 예정과 뜻대로 되어진 일이며, 누구가 버림받은 것도 그분의 기쁘신 뜻댈 된 것이니 다 잘 된 것이다." 누군가가 지금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받아야 하는데 그 일도 하나님이 하셨으니 잘 된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
  일곱째, 사람의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대로만 되어진다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인간을 심판대에 불러내어 재판하실 수가 있을까? 구원받을 기회도 주지 않고 구원받지 못했다고 그를 심판할 것인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의해서 이미 구원이 결정되어버리고 말았는데, 어찌 인간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말인가? 세상 말로 짜고 치고 고스톱치는 것으로 밖에 들리지 않게 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이 아시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다. 자신의 기분따라 마음대로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얻기를 바라신다. 이를 위해 창조주하나님의 자리까지 버리셨다. 우리대신 죽음까지도 감당하셨다. 그분이 우리 인간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지옥가는 것을 잘 결정한 것이라 생각하실 분이 아님을 알라. 그분은 오늘도 한 명의 영혼이라도 구원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바라고 계신다. 하나님을 나쁜 하나님으로 폭군하나님으로 만들지 말라.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려고 오늘도 우리더러 나가서 전도하라고 그렇게 명하시고 있지 않은가! 나가서 사랑의 하나님을 전하자. 그게 우리의 할 일이지 결코 칼빈주의에 빠져서 넋놓고 있어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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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목회자의 탈선과 성도들의 타락의 원인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기독교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다. 분명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찾아낸 결론은 그것이 잘못된 구원론에부터 기인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한국 개신교회 중에서 장로교파는 대부분 칼빈의 교리를 지지하거나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칼빈의 구원론 교리가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는 자는 많지 않다. 칼빈의 구원론 때문에 결국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회개도 하지 않고 있고, 그러다가 죽을 때 멸망으로 떨어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그 칼빈의 구원론의 교리의 중심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아는가? 그것은 예정론이다. 이제 이 시간부터 우리는 칼빈의 예정론을 심층 분석해 볼 것이다. 학자와 같게 할 수는 없겠지만 목회적 관점에서 그의 예정론교리를 들여다 보고자 한다.
먼저, 성경에 '예정'이라는 말이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성경에는 예정이라는 말씀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 예정에 대해, 칼빈주의자들이 잘못 해석하는 바람에 그만 그 예정이 개인구원 예정으로 촛점이 가버렸다. 그리하여 예정하면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정하였다는 것으로 교리화되어 버렸다.
하지만 개인예정은 사실상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개인구원에 관한 예정이 성경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혹 개인예정같은 구석이 있는듯 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면 그것은 전부 개인에 대한 사역적 예정, 사명적 예정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천사와 인간에 대한 예정과, 이스라엘과 이방인(교회)에 관한 예정이 있을 뿐이다. 한 마디로 개인예정은 없고 다만 공동체 예정만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한 창조주이신데 어찌 예정이 없으시겠는가? 그분의 미리 작정하심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예정에 관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서 예정에 관한 말씀을 살펴본다면, "우리" 혹은 "그들"에 관하여 예정하셨다는 단어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은 예정하시되, 천사와 인간에 관한 예정을 먼저 하셨다. 이것은 아마도 천사와 인간이 창조되기도 전에 예정하신 듯 싶다.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천사는 만세 전에 종으로 예정하였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상속자로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예정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인들에 관한 예정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들(마21:33-43, 22:1-14, 눅14:15-24)과 로마서 9-11장과 엡1-3장에 잘 나온다. 특히 엡1-3장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확실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천사가 아닌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의 상속자로 세우시기로 예정하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엡1장과 3장에서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바로 하나님의 예정이다. 하나님은 만세전에 바로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여 하늘의 상속자로 세우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타락한 천사들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여 상속자로 예정하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에 관한 예정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어떤 개인을 예정하였다고 말하지 않고 전부 다 "우리를" 혹은 "그들을" 하나님을 상속자로 예정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에베소서에 말하는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은 천사들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들이자 상속자로서 예정하신 것이다. 엡3:6을 살펴보라.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한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그렇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유대인들만 구원하여 하나님의 상속자로 삼을 것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이방인들도 구원하여 상속자가 되게 하실 것을 예정하신 것이다. 상상해 보라. 우리 안에 있는 유대인들과 우리 밖에 있는 이방인들이 한 목자에게 붙어 있어 한 울타리의 보호를 받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는 구원하기로 예정하고, 누구는 유기하기로 예정하신 적이 없으셨다.하나님은 이러한 잔인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사람의 무리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하나의 구원받는 인간공동체를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중 예정이란 성경에 결코 없다. 칼빈주의자들이 과대 확장 잘못 해석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얻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딤전2:4). 이 일을 위해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헤 피흘려 속죄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결코 구원받을 자만을 위해 죽으신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는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고, 누구는 만세전에 지옥보내기로 예정하셨다는 칼빈의 이중예정론은 틀렸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초청하시지만 다만 인간들이 그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기 때문에 구원과 유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책임을 우리 인간들에게 물으실 수 있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어떤 사람은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지옥보내기로 예정하셨다고 한다면, 어찌 마지막날에 우리 인간을 심판하실 수 있을까? 그러면 심판이 필요 없다. 아니 심판하실 수가 없다. 예정대로 그냥 집행하시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에게 분명 책임이 주어졌는데, 우리 각자가 그것을 거부했느냐 순종했느냐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거부한 것 때문에 거기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인 것이다.
이제 예정론의 허구에 대해서 말씀을 시작해본다. 이것이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는 모르겠지만 이 부분에 대해 계속해서 집중해서 살펴볼 것이다.
다음 이 시간에는 야곱과 에서야말로 개인예정과 이중예정의 대표적인 경우가 아닌가 의심하는 자들을 위해 그것이 어떻게 와전되었고 잘못 해석되었으며 얼마나 비성경적인 것으로 치닫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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