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에게 칭의를 어떻게 받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믿음"으로 얻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칭의관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우리는 성경읕 볼 때 한쪽 면만을 보아서는 아니 된다. 통전적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칭의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 맞지만 과연 믿음으로만 받는 것인가? 여기, 진정 성경적인 답변이 있다. 온전한 칭의, 바로 그것은 무엇인가?

2020-07-26(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05)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받는가?(눅18:9~14)
https://youtu.be/rTJLMimO5MA [혹은 https://tv.naver.com/v/14980142 ]

 

1. 들어가며

  칭의란 무엇인가? 칭의란 보편적으로 우리 인간은 의롭지 아니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주심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칭의는 과연 언제 얻게 되는가? 또한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요소가 더 있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칭의는 언제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상태가 되는가? 그리고 내가 칭의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그래서 오늘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을 찾아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과연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인가?

 

2. 바울의 칭의관은 어떤 것인가?

  바울은 그의 서신인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의 의롭게되는 것(칭의)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롬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 말씀만을 들었던 사람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줄로 믿어버린다. 특히 갈2:16에서는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으므로,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로 알 것이다. 그러나 갈2:16를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오직"이라는 단어가 실은 없다. 그렇지만 한글성경만을 본 사람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 안다. 

  그렇다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어떻게 함으로 의롭게 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데에는 그리스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직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인하여 죄있는 우리가 죄없다고 칭함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는 없다(롬3:20). 그렇다면 단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는 다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더 이상 다른 그 어떤 요소도 필요없는가?

 

3. 예수님의 칭의관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바울의 칭의관을 살펴볼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데에 예수께서는 어떠한 말씀을 하셨는가? 그것은 놀랍게도 믿음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요소 한 가지를 더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대부분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간과하고 있을 것이다. 칭의는 믿음으로써 얻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서는 온전하다고 할 수 없음을 예수께서 가르쳐준 칭의관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사람이 어떻게 칭의(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가운데 나온다(눅18:9~14).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있고 다른 사람은 멸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들으라고 예수께서 한 비유를 들으셨다. 그것은 두 사람의 기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따로 서서 거만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이여, 나를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이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 실로 이 사람의 행위는 틀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율법에 하지 말라고 하는 규정을 너무나 잘 준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금식과 십일조도 잘 드리고 있었다. 아니 율법의 규정들보다 더 많은 것을 행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금식하라는 규정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에는 다만 7월 10일 속죄일에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말씀만 나와 있다(레23:27).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금식하라는 말로 해석하여 지금도 실천한다. 그런데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그것 말고도 이레(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소득의 십일조도 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율법규정에 의하면, 곡식과 과실의 십일조와 우양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규정은 있어도, 소득의 십일조까지 전부 다 드리라는 규정은 없다(레27:30~33).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들은 회향와 박하와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마23:23). 그러니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이상의 행위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로 거만하게 행동했다. 으시댔다. 그리고 그것을 하지 못하는 자들을 멸시했다. 자기는 매우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기도하고 있는 내용을 들어보면, 그는 자기를 자랑하려고 기도하러왔는지, 하나님께 기도하러 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세리는 어떠했는가?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통회하는 심정으로 기도하고 있었고,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죄인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속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그의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것은 2가지였다. 첫째는 "오직 하나님만 내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곧 내게 속죄를 베풀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오직 주님 뿐이십니다."라고 믿었던 것이다. 둘째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렇다. 그는 속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죄를 겸손히 고백하는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평가는 어떠했는가?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사람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입은 채로 그의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셨다(눅18:14). 그렇다. 자신을 의롭다하고 믿고 있는 바리새인이 의롭다 함을 입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죄인이라는 것을 겸손히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던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우리는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칭의가 믿음만으로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도 예수께서 직접 들려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예수께서는 회개없는 칭의는 온전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칭의에는 반드시 진실한 회개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칭의관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죄를 용서해줄 수 있다는 믿음과 겸손히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회개가 있어여 한다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4. 바울의 칭의관은 예수님의 칭의관과 다른 것인가?

  그렇다면, 바울의 칭의관과 예수님의 칭의관은 다른 것인가? 얼핏 보기에는 바울이 실수한 것 같이 보인다. 사실 어떤 누구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능가할 자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사도바울도 로마서 4장에서, 회개가 동반될 때에 칭의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칭의가 된다는 것을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그 말씀은 로마서 4:11에 나온다. 

롬4: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다. 사도바울도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할례를 받은 것은 그가 85세 때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하였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고 75세 때에 갈대아우르를 떠나 왔지만, 그의 나이 85세 때에 비로서 그의 믿음을 의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창세기 15장에 나오는데, 그는 그때 자손과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는 받았지만 1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게 되자, 자신의 종 다메섹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시도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창15:4)"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리고는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가 하늘의 별을 보게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의로 여기셨다(창15:6). 그리하여 비로소 아브라함의 의롭다하고 칭함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이상은 기다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첩 하갈을 들여 자식을 낳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무려 13년동안이나 떠나셨다. 그리고 13년이 지난 후에(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2가지를 주문하셨다. 첫째는 그의 이름을 바꾸라고 하셨다(창17:5). 그리고 둘째는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다(창17:10~11).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 낳았던 이스마엘과 자기의 종들을 다 데려다가 함께 할례를 행했다. 다시는 육체를 따라 가지 아니할 것이며, 그후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100% 순종하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할례를 받은 것은 회개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나중에 할례가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세례라고 해석하였다골2:11~12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렇다. 세례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상징하는 것이다(막1:4). 고로 육을 따라 살던 삶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겠다는 결단의 표로서 아브라함이 행했던 할례는 곧 그의 회개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믿음으로 얻은 의를 그때 비로소 인칠 수 있었다. 고로 우리는 칭의가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하여 인쳐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로 우리는 예수님의 칭의관과 바울의 칭의관이 서로 일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또한 확인할 수 있다. 


5. 아브라함의 칭의는 어떻게 성장하고 완성되었는가?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언급하시고 바울이 다시 확증했던 칭의에 관해,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을 통해서 다시 정리해보기를 원한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85세 때에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의를 얻게 되었다(창15:6). 하지만 그때 그의 의는 불안전한 것이었다. 금새 그는 자신의 아내 사래의 말을 듣고 몸종 하갈을 통하여 아들을 낳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가 잘못되었음을 13년간 교제를 끊으심으로 뉘우치게 하셨다. 그리고 99세에 나타나서는 아브라함더러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다(창17:10~11). 그것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을 살라는 것이었다. 일종의 회개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함으로 할례를 행했다. 그는 그때 비로소 회개를 통해서 자신이 받은 의를 인칠 수가 있었다. 

  그러자 이제 그의 칭의는 더욱 견고해졌다. 그러므로 그후에 더이상 흔들림은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따라가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마지막으로 시험해보고자, 그의 나이 125세(유대고대사 요세푸스의 증언) 혹은 137세(미드라쉬와 야살의 책) 때에 자신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전혀 주저하지 않고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3일 길을 걸어갔고 이윽고 칼을 들었다.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의 칼이 이삭의 심장을 찔렀을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천사를 통해 말씀하셨다. 

창22:15-18 여호와의 사자(천사)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것을 두고 신약시대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침으로서 비로소 그의 칭의가 온전케 되고 완성되었다고 말했다(약2:21~24). 

약2:21-24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행위들)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행위들)과 함께 일하고 행함(행위들)으로[부터]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완성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채워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행위들)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고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85세 때에 믿음으로 시작된 칭의가, 99세 때에 회개함으로 인침을 받았고, 125세(혹은 137세) 때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 칭의는 어느 한 순간에 다 완성되는 것이 아닌 것이었다. 칭의도 발전하고 성장하고 온전케 되는 성질을 가진 것이다. 믿음만을 가지고 있을 때 받았던 칭의는 하나님께 인정되는 칭의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를 통해 인정받은 칭의는 행동을 통하여 그것이 증명되기 시작한다. 고로 예수께서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을 "믿음"과 "회개"라고 말씀하셨는데, 바울도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야고보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행동을 통해서 칭의가 완성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6. 나오며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나 칭의를 얻는 여정은 다 처음에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서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칭의를 얻은 성도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출애굽세대들에게 있어서는 광야생활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죄를 씻어내는 기간을 가리킨다. 고로, 이미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자는 회개함으로 칭의가 더 견고해져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믿음이 인침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그는 순종의 삶을 통하여 칭의를 받은 자로서 그가 합당한 자 인지가 증명이 되고 확인이 되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칭의의 어떤 단계로 도달해 있는가? 시작으로서의 칭의단계인가 아니면 인침으로서 칭의단계에 와 있는가? 아니면 행동으로 통해 칭의가 완성되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완성의 칭의를 통해 구원얻어 천국에도 들어가고 그것에도 상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0년 07월 26일(주일)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회개와 천국복음(01)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마3:1~12)_2020-07-23(목)

https://youtu.be/WvEn_GDP1l8  [혹은 https://tv.naver.com/v/14920448  ]

 

 

1. "오직 믿음"이라는 말씀이 성경에 나오는가요?

  "오직 믿음"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한글성경에서 그렇게 번역하고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을 뿐입니다(롬1:17,3:27). 헬라어원문에 보면, "그런데 복음(롬1:17)"이거나 "그러나 복음(롬3:27)"이며, "오직(only) 믿음"이라는 문구는 성경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이 문구는 종교개혁자인 루터가 말함으로 인하여 생겨난 신조어입니다. 

 

2.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나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정의하는 것은 옳다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인 회개하고 믿어서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마4:17,행2:38,20:21). 예수께서도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칭찬받았던 2개교회(서머나교회, 빌라델비아교회)를 제외하고는 다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않으면 이기는 자가 될 수 없고 그러면 천국백성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3.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인가요?

  어떤 분들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 보겠지만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잘못된 정의입니다. 왜냐하면 얼마큼 행동해야 구원받게 되는지, 그 행함의 기준을 정하기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생활을 해야 구원받는다고 칩시다. 어느 정도 해야 할까요? 새벽기도 정도는 해야 할까요? 새벽기도를 한다면 얼마나 해야 할까요? 1시간을 기도해야 할까요 아니면 30분만 해도 되는 것인가요? 구제를 한다고 칩시다. 매달마다 구제해야 하나요? 한 번에 10만원짜리를 해야 하나요? 어느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행함을 통해서 성도는 자신이 정말 구원을 향하여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진짜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갔다고 칩시다. 그러면 천국에 들어가서는 자기가 주와 복음을 위해 수고한 행위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에게 고스란히 상으로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4. 믿음은 하나님은 주시는 것인가요?

  어떤 사람은 믿음도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정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믿음을 가지도록 인도해주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우리 대신 믿어주어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얻기를 바라시며(딤전2:4), 아무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시기를 원하십니다(벧후3:9). 또한 그렇게 되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고 계십니다. 사실 "믿음"이라는 용어는 우리 인간편에서 해야 할 책임을 가리키는 표현인 것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구원을 받고자, 우리가 해야 할 행위는 사실상 없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구원에 이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율법의] 행위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그것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확인해주는 도구로서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깨닫게 해주는 잣대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다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나의 행위가 들어가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우리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게 살다보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통하여 구원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5. 칭의(의롭다함)가 곧 구원인가요?

  칭의가 구원이라기보다 칭의가 구원을 위한 첫 출발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칭의는 우리는 불의하고 부정하지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피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인하여 우리가 의롭다라고 칭함받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속은 여전히 더럽지만 예수께서 흰 옷을 입혀주셔서 깨끗하게 보여지는 것이 칭의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구원의 여정을 위한 첫 출발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 중에는 자기가 믿음을 보임으로 칭의를 얻은 것을 가지고, 이미 자신은 구원을 다 받은 줄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칭의는 구원을 위하여 자기가 첫걸음을 뗀 것이지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완성은 우리가 죽을 때에 비로소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는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고로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야 비로소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그렇게 많이 "이신칭의"에 관하여 말을 했지만 그가 죽기 일보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주께서 모든 악한 일에서 [나를]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딤후4:18)"이라고 말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야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종말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실 때에도 "그러나 끝까지 견다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인류가 들어야 할 복음이며 또한 전파해야 할 복음은 "천국복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정의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믿음으로 칭의를 얻어 구원의 노정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끗히 씻어내다가, 죽을 때에 가서 다시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2020년 07월 23일(목)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구원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행5:1~11)_2020-04-08(수)

https://youtu.be/X59YdFzGNeE [혹은 https://tv.naver.com/v/13258235 ]

 

1.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나가요 은혜와 믿음으로 주어지나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해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받은 상태로 있으니)"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구원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 우리가 믿음으로 반능할 때에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의야말로 성경 전체가 말씀하고 있는 올바른 구원론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은혜로"만 얻을 수 있는 구원도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구원도 없습니다.

 

2. 구원은 믿을 때에 이미 받은 것이지만 죽을 때에 가서야 완성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구원은 믿을 때에(정확히는 믿고 회개함으로 회심할 때에) 받게 됩니다. 그때에는 성령께서 아버지의 생명을 가지고 믿는 성도들 속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그때 회개를 통하여 예수님의 피로 지은 지난날의 모든 죄들이 씻겨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을 때 그 사람은 과거의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생명이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게 됨으로 그가 거듭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때에 구원을 이미 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구원을 받은 자라도 자신이 죽는 날에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10:26에 따르면, 성도가 되었어도 고의로 죄를 범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죄는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들을 가리킵니다(히10:29). 그러므로 믿는 성도는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속죄를 결코 부정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리고 내주하시어, 우리에게 죄를 책망하시고,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하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우리가 거역하거나 모욕해서는 절대 아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그가 죽는 날 그 사람을 떠나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살전5:19, 마28:20, 요14:16). 왜냐하면 믿는 자들 속에 들어오시는 성령께서는 "에이스 톤 아오나(그 시대까지, 그 세대동안)" 함께 하실 것이라고 헬라어원문에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요14:16).

 

3. 성도들이 믿음과 회개로 얻은 구원은 대체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인가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과 회개로 얻은 구원은 사실 완전한 구원입니다. 그래도 받은 구원을 잘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을 경우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자기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잘 간직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믿음을 끝까지 잘 지켜야 하고, 둘째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믿었던 자라도 그가 믿음을 포기한다든지, 아니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고 있으면 그는 결국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가 죽는 날 그를 떠나가실 것이기 때문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구원의 상태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지만 아직은 아닌 것입니다.

 

4. 성경에 나오는 예화로 성도들이 구원관을 설명해본다면 어떻게 설명이 가능한가요?

  성도들이 받는 구원의 성격을 한 번 성경에 등장하는 예화로 한 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삼상16장과 열왕기상 2장에 등장하는 저주하는 "시므이"의 의 모습입니다. 그는 사울왕의 신하로서, 사울왕이 속해있던 베냐민지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이 죽고 유다지파의 사람 다윗이 왕위를 이어받자, 항상 그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다윗의 셋째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다윗왕이 도망친다는 것을 듣고는 기드론시내에 나와서 도망가는 다윗을 향하여 험한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지켜보던 다윗의 장수 아비새가 "죽은 개 같은 자가 왕을 저주하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명령만 내리시면 당장 가서 그 놈의 목을 쳐버리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기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도 자기를 헤하려 하는데 하물며 베냐민 사람이겠느냐고 하면서, 자신이 저주받는 것은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일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 전세는 역전되고 말았고 압살롬의 구테타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 같자, 시므이가 베냐민사람 1,000명을 데리고 나가 다윗을 마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 죄를 내게 돌리지 마옵소서. 과거의 죄를 기억하지 마시옵소서"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윗도 그를 용서주었습니다. 그러나 평생 가슴이 멍이 든 사건을 다윗이 어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죽음을 앞둔 다윗은 자신의 후계자인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왕상2:9)" 결국 왕위를 이어받은 후 솔로몬은 시므이를 불러다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왕상2:36~37). 그런데 어느날 이 말에 유념하지 않던 시므이가 자신의 두 종이 가드왕 아기스에게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가서 두 녀석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솔로몬의 귀에 들어갔을 때에 솔로몬은 군대장관 브나야를 시켜 그의 목을 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범죄에 인해 진즉 죽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 죄를 간과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시므이에게 자신이 용서받고 살고 있는지를 잊지 않으려면 지켜야 할 것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왕 다윗과 솔로몬왕이 시므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용서를 잊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시므이는 그 말을 소홀히 여겼고 결국 기드론시내를 건넘으로 인하여 죽임당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죄를 용서받은 상태에 있었으나, 그 뒤에 이 땅에 예수님을 대신하여 보내주신 성령님을 거역하고 모욕할 경우 그 사람은 결코 죄용서를 받지 못한 채, 불못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죄인이기는 하지만, 죄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닌 칭의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집행유예 상태에 놓여있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까요.

 

5. 예수님을 대신하여 진리의 영으로 오신 성령님을 속이고 우롱할 경우는 어떻게 되나요?

  성령님은 승천하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영이자 예수님의 눈입니다(계4:5,5:6). 그러므로 오순절 마가다락방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예수님의 또다른 자기자신에 해당합니다(요14:18~19).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대신하여 보내어진 성령님을 누가 속인다거나 우롱할 경우에는 용서가 없습니다(마12:31~32).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셨을 경우 예수님을 거절하거나 모욕한 죄는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님을 거역하고 속이고 모욕하는 사람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죄는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의 속죄를 부정하고,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을 거역하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으로 오신 성령님을 모시고 있었지만, 짓말을 했던 아나비아와 삽비라 부부는 성령을 속인 죄로 결국 죽게 됩니다. 재산을 처분한 후에 그것을 하나님께 다 드리지는 못해도야 "다 드리지는 못하고 조금이나마 드립니다"고 했으면 그들 부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다 바치는 것처럼 하나님을 속였기 때문에, 자기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속이려고 시도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들 부부는 그날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오순절에 성령받아 거듭난 성도였지만 죽을 때에 그만 구원에서 탈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을 존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아도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에게 죄를 책망하고,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게 하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하고, 진리만을 증언하도록 돕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지만 성령님은 믿는 성도를 돕기 위해 오셨는데, 그분을 속이거나 우롱하면 용서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020년 04월 08일(수)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예수를 믿어도 천국에 못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이며 예수믿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계22:14~15)_2019-11-28(목)

https://youtu.be/tGufKbaB0ic

 

1. 예수께서는 계22:13~15에서 자신을 누구로 소개하고 있으며,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예수께서는 계22:13~15에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계22:15에 나오는 "성밖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요?

  계22:15에 나오는 말씀은 6가지 종류의 죄를 지은 사람들의 운명에 관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운명이 "성밖에 있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을 보면, "밖에"라는 부사어만 있을 뿐 "성"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우선 헬라어원문으로 계22:15을 직역해보겠습니다. "[그런데] 개들과 점술가들(술객들)과 음행인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을 좋아하고 있으며 만들고(지어내고) 있는 자는 밖에(외부에)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6가지의 죄를 짓고 있는 자는 다 외부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계22:15에 나오는 "바깥(외부)"는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것인가요?  어떤 이는 "바깥"을 예루살렘 성(도시) 바깥부분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6가지 죄를 저지른 자는 예루살렘 성 안으로는 못 들어가지만, 천국에는 들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믿는 자가 설령 위와 같은 6가지를 죄를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를 지옥에 떨어뜨릴 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기존에 들어왔던 말이나 잣대로서 성경을 해석하면 안 됩니다. 우선은 헬라어나 히브리어 원문으로 성경을 보아야 하며, 문자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그리고 문맥이나 평행구를 살펴보아야 하며, 그래도 해석이 안 될 때에는 상징적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3. 계22:15에 나오는 "바깥"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이 말씀에 나오는 "바깥"은 예루살렘 성바깥쪽을 의미할 수도 있고, 다른 장소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선 잘못된 부분부터 바로 잡겠습니다. 첫째로 "성 바깥"이라는 말씀은 원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헬라어원문에는 "성(도시)"라는 단어는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6가지 죄를 저지른 자는 "바깥"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어딘지는 정확하지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깥'이 어딘지를 알려주는 본문이 가까이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8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말씀인데, 계21:8에 보면, 8가지 죄목을 가진 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본문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비겁한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그렇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비겁한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다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계22:15의 말씀과 비교해보면,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이랴는 말 대신에 "개들"이라는 말로 바뀌어 있을 뿐 동일한 자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로 계22:15에 나오는 "바깥"은 천국에서 예루살렘 성전 바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으로부터의 바깥인 "불못"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고로, 누구든지(그가 예수님을 믿는지 믿지 아니하든지) 죄를 짓는 자(특히 십계명을 어기는 죄목들임)는 다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예수님을 믿었으니 자신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은 낭만적인 생각입니다.

 

4. 예수님을 믿어도 천국에 못 들어가는 사람이 있나요?

  그럴 수 있습니다(그렇게 되지는 말아야 하겠지만).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간음하는 자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며, 예수믿는 자라도 우상숭배하는 자라면 그도 역시 천국에 못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계21:8). 이는 천국에 들어가려면 2가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해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은 죄들을 자백하여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지은 죄들을 용서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므로,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직접적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용서받게 됩니다(요일1:9).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중간에 한 마디를 빠뜨린 잘못된 정의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며, 동시에 그때부터 죄를 회개하면 죄용서를 받고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5. 어떻게 해야 천국의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나아가며 그리고 생명나무를 누릴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지는 건가요?

  그것은 "자기의 두루마기(겉옷)를 [지금도] 빨고 있는 자들"이어야 합니다(계22:14). 알파와 오메가이시요, 처음과 마지막이시며, 시작과 마침이신 예수(계22:13)께서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기의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는 어린양이신 예수의 피로서 그 죄를 씻어내는 것을 가리킵니다(계7:14). 그것은 오직 자백함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요일1:9). 그러면,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해 줌으로 더럽혀진 겉옷을 희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요일1:7). 그러므로 예수믿는 자라도 자신이 지은 자범죄들을 회개하여 예수의 피로 씻어내지 못하는 자는 결국 자신이 지은 자범죄 때문에 불못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계21:27에도 죄를 짓는 자는 그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로, 우리 예수믿는 자들은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구원은 걱정없어"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내가 예수 믿고 있어도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불못이야"라고 생각하면서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은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2019년 11월 28일(목)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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