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열심히 읽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성경을 다 깨닫는 것이 아니다. 풀리지 않는 난제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어떤 인생의 문제는 아무리 고민하고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것도 예수님이 가르쳐준 방법에 따라 보게 되면 거의 가 풀리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르쳐준 방법은 무엇인가?


1. 들어가며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잘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보자. 왜 욥은 고난을 받았는가? 욥이 죄를 지어서였는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해주셨기 때문이다(욥42:7). 그러므로 오늘날도 교회에서는, 이유없이 찾아오는 고난이라면 욥처럼 인내라고 권면한다. 그러면 복을 두 배로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욥기의 고난은 '인내'라는 주제로 풀 수 있을까? 성경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이 문제를 풀 수 있다. 또한 성경의 난제처럼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결도 이와 비슷하다. 인생의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할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문제에 대한 응급처방으로 끝나버릴 뿐 저주와 가난과 질병에서 완전히 해방받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는 성경을 보는 눈과 인생을 보는 눈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성경과 인생의 난제들을 풀 수 있는 키를 쥐게 되기를 바란다.


2. 성경의 난제들을 풀려면 어떻게 성경을 보아야 할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읽으면 성경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진짜 진리를 깨달을 수는 있는 것인가? 안 읽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성경을 보는 정확한 앵글을 맞추지 못하면 성경이 말해주고자 하는 의도와 뜻을 발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을 손으로 필사까지 한다. 성경을 자신이 직접 기록해본다는 것은 한 번 도전해볼 만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채 성경을 한 번 필사해 보았다는 것이 그로 하여금 성경을 깨닫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상태에서, 성경을 읽고 성경을 필사한다면 얼마나 금상첨화이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성경을 보아야 성경이 열리게 되며, 인생의 문제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게 될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경을 보는 눈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만약 성경을 빨간 안경을 쓰고 보았다고 치자. 그러면 성경은 빨갛게 보일 것이다. 성경을 파란 안경을 쓰고 본다면, 성경은 파랗게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는 눈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안경을 쓰고서 성경을 본다. 또한 어떤 이는 도수가 맞지 않은 안경을 쓰고 보니, 성경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안경을 쓰고 성경을 보아야 성경을 제대로 보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보던 관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이러한 관점을 다른 사도들도 이어받았고, 예수님의 부활승천후에는 사도바울도 그렇게 이어받았다는 사실이다.


3. 성경은 보는 눈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성경과 인생을 어떤 관점에서 보았던 것일까? 요한복음 5장 39절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성경을 볼 때, 그것이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성경은 곧 예수님에 관하여 쓴 책이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 본문은 예수께서 거기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과연 인생의 모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공관복음서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2가지 관점에서 거의 다 해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인생의 문제들을 예수께서 보셨던 2가지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4. 인생의 문제들을 푸는 2가지 열쇠

  그렇다면, 예수께서 인생의 문제들을 푸는 관점으로 사용하셨던 2가지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회개와 믿음이라는 주제다(마4:17,요8:31~32). 그것은 예수님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선구자 세례요한도 그렇게 말했다(마3:2,요1:33~34). 그리고 예수님의 12제자들도 그렇게 말했으며(마10:7~8,막6:12~13), 사도바울도 그렇게 말했다(행20:20~21). 그렇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죄를 회개함으로 해결할 수 있으며,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믿음으로 해결할 수 있다. '회개'가 인생 문제의 소극적인 해결책이라면, '믿음'은 인생문제의 적극적인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욥기서의 예

  한 번 예를 들어보자. 욥기서를 다시 보자. 욥기는 알 수 없는 고난을 만날 때에는 인내하면 복을 받게 된다는 주제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내용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다. 왜냐하면 욥의 고난은 알 수 없는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탄을 꼬드겨서 시험하도록 하여 허락하신 고난이었기 때문이다(욥1:6~12). 만약 욥에게 그러한 고난이 없었다면 죽어서 지옥 떨어질 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것이다. 욥은 사실 율법적으로 흠없이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때는 아직 율법이 성문화되기 전이므로 정확히 말하면 그는 원시 율법에 따라 도덕법을 지키고 살고 있었고 범죄했을 때에는 제사법을 통해 용서받았다. 하지만 그러한 일을 지속하다 보니, 욥도 나중에는 자기가 복을 받고 사는 것은 자신이 율법적으로 의로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실상은 무엇이었는가?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산업과 자녀를 늘 울타리고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욥1:10). 또한 자기자신의 내면에도 죄된 본성이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환경을 좋게 해주어서 그것이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은 것일 뿐 자신에게도 심각한 죄성이 있다는 것을 그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놔두어서는 그는 끝내 죄성을 시인하지 않을 뿐더러 자신을 의인이라고 착각하다가 지옥에 떨어질 위험성이 매우 커보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성을 들추어 내어 그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게 하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사탄으로 하여금 시험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의로운 삶을 산다해도 하나님처럼 의로울 수는 없다는 것을 그는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재산과 자녀를 잃어버리는 시련을 허락하셨다. 하지만 욥은 용케도 1차시험을 이겨내었다. 하지만 2차시험에서 그는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 시험은 그의 건강마저 잃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란 말인가? 2차시험을 통해 질병이 중하고 오래 지속되자, 욥은 감추어둔 자신의 죄성을 드러내기 시작하게 된다. 하나님께 자신의 환경을 두고 원망불평을 시작한 것이다(욥3:1,7:11,10:1). 그리고 하나님보다 자신이 의로운데 왜 하나님은 자신에게는 이렇게 가혹한 처우를 하는 것이냐면서 하나님께 대들고 만다(욥43:9~11). 속에 감추어져 있던 죄된 본성이 올라온 것이다. 결국 끝까지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한 욥이었지만,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자 금새 그는 두 손을 번쩍 들고 만다. 자신이 지식이 얼마나 얕은 것이며, 천박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2차시험에서 죄된 본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만 죄인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는 입을 가리우고 티끌과 재를 뒤집어쓴 채 회개하기에 이르게 된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욥기서를 제대로 보려면, 회개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욥의 고난의 원인이 풀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기서를 통해서, 죄성이 드러나지 않아 남들보다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가 있는 것이다.


6. 나라의 가뭄의 원인과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

  어디 그뿐이겠는가? 다른 예를 보자. 다윗의 시대에 연이서 3년간 가뭄이 들었다. 왜 가뭄이 들었을까? 다윗은 생각하고 생각했지만,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구약시대에 가뭄이나 전염병이나 전쟁의 대부분은 다 우상숭배의 죄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렇지만 다윗에게는 그러한 행동도 없었다. 그런데도 기근은 계속해서 나라를 휩쓸었다. 그러자 다윗이 하나님께 부르짖게 된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부왕 사울왕 때에 있었던 여부스족속의 원한 맺힌 절규를 가르쳐주신다. 그러므로 다윗이 회개차원에서 행동을 개시하자, 금새 기근이 멈추어 버리게 된다. 회개가 기근을 푸는 열쇠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아합왕 때에도 3년기근이 있었다. 왜 북이스라엘에 기근이 연이어 계속 나타나게 되었을까? 그것도 마찬가지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에는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엘리야를 통해 바알숭배자들을 처단하게 하신다. 그러자 하늘이 문을 열고 비를 주었던 것이다. 이것도 회개의 관점에서 국가의 재난의 문제를 푼 예에 해당된다.


7. 회개와 믿음의 중요성

  그렇다. 다른 예를 보자. 왜 똑같이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은 버림을 받고 말고 다윗은 버림받지 아니하고 자신의 왕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죄를 짓고도 사울은 회개하지 않았지만, 다윗은 즉시 회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회개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고, 성경의 풀리지 않는 난제를 해결하는 열쇠였던 것이다.


8.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한편, 우리가 이제는 적극적으로 복을 누리고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자. 우리가 오늘날에 와서도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는 적극적인 요소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놀랍게도 거기에는 항상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에게 복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모압여인 룻이 무엇 때문에 복을 받았는지 아는가?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이방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윗의 증조모가 될 수 있었고,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메시야의 족보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여인이 된다. 무엇 때문에 그녀는 이방여인이었음에도 메시야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가? 그것을 푸는 열쇠는 역시 '믿음'이다. 그녀는 자기 땅에 살러온 시어머니 나오미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녀가 이전까지 섬기던 신은 여호와에 비하니 가짜였다. 나오미를 통해서 들었던 여호와 하나님은 그모스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동족의 신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시어머니를 붙어 따라간다. 그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길인가를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시어머니의 손을 놓지 않고 유대땅 베들레헴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도 감복하여 그녀에게 보아스라는 유력한 총각을 만나게 해주신다. 결국 그녀는 과부임에 불구하도 총각 보아스를 만나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훗날 다윗의 증조모가 되며, 자신의 후손으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보게 된다. 그렇다. 그녀가 복을 받게 된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했던 그녀의 믿음 때문이었다.

  신약에 들어와서 다른 예를 살펴보자. 막 10장에 보면 두 소경이 나온다. 두 소경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 기적적으로 눈을 치유받아 뜨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되어서 눈을 뜨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었다(막10:52). 한편, 요5장에 나오는 38년된 중풍병자를 보자. 그는 왜 중풍에 시달리게 되었을까? 하지만 그도 믿음을 통해 기적적으로 병을 치유받게 된다. 하지만 나중에 예수께서 그를 성전에서 만나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보라 네게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5:14)." 그렇다. 비록 그는 믿음을 사용해 우선적으로 질병에서 나았지만 죄의 문제가 그의 질병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앞으로 회개의 삶을 사는 것이 매우 중요했던 것이었다. 그가 새롭게 받은 건강을 유지해가기 위해서는 회개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


9. 나오며

  그렇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믿음과 회개를 통해 풀어갈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이 제대로 열리지 않는 것은 성경을 푸는 열쇠로서 믿음과 회개를 사용해보라. 그러면 대부분의 성경이 다 열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모든 문제가 거의가 다 풀리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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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씀은 처음부터 기록된 성경말씀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 루터에 의해 칭의는 다시 발견되어졌고 그것은 중세로마카톨릭으로부터 성도들을 바른 진리로 회복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오늘에 와서 칭의는 마치 그것이 구원으로 확대되어 해석되고 있다. 한 번 칭의가 영원한 칭의가 아닌데도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라. 칭의가 주어지는 통로는 무엇인가? 곧 그것은 믿음이라는 통로다. 하지만 사람치고 한 번 가진 믿음이 끝까지 흔들리지 않은 채 유지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브라함은 흔히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정말 처음부터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을까?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죽은 자도 얼마든지 살릴 수 있는 분으로 그리고 없는 것이라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으로 믿었던 것일까? 아니다. 그도 처음에는 지금의 우리들처럼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칭의를 받은 후에도 그가 하나님만을 신뢰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다루심을 받으며 회개와 순종을 통해 훗날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사실 그의 인생을 되돌아 보면 그에게는 믿음에 있어서 세 번의 큰 분수령이 있었다. 칭의를 받던  때(85세), 더 이상 자식을 기대할 수 없었던 때(99세)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 제단에 바칠 때(125세 내지는 137세)가 그것이다. 그는 85세 때 칭의를 받았지만 이내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99세 때에 할례를 통해서 다시 믿음이 회복될 수 있었고, 그의 나이 125~137세 때에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믿음은 3단계로 발전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85세 때에 가서야 비로서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는 믿음"을 가지고 되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 99세 때에는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 125세  내지는 137세 때에는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신의 믿음은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믿음 좋은 아브라함이 불리우는 사람이었지만 사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견고한 믿음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나이 75세 때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래서 갈대우르를 떠나 나왔다. 하지만 그 때만해도 그의 믿음이 적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그는 본토(땅)만 떠나왔을 뿐 그의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행7:1~3, 창12:1~5). 그가 갈대아우르를 떠날 때에 그는 아버지와 함께 나왔으며, 자신의 조차 롯을 데리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맨 처음에 정착한 곳은 갈대아우르부터 약 970km 떨어진 곳이었던 하란이었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자신이 의지하고 있던 아버지를 먼저 보내드려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의 친척을 떠나보내야 했다. 그는 바로 그의 조카 롯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의지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둘씩 정리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복을 받는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셨다.

  아브라함은 그후 몇 년이 지나서야 그의 본토(땅)와 친척(롯)과 아비(데라)집을 온전히 떠날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자기집에서 태어나서 자란 대메섹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엘리에셀)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나올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고 하셨다. 그때 하나님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반짝이는 별을 보여주며 앞으로 그의 후손들이 그와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다고 칭해주셨다(창15:6). 이것이 바로 칭의의 시작이다. 그는 85세 때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그는 넘어지고 말았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아내의 말을 들어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가 첩을 통해서라도 자식을 낳자고 제안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전혀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그를 만나주지 아니하셨다(롬4:19). 그때가 바로 아브라함이 나이 99세 때였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면서, 그의 이름을 바꾸어주셨다(창17:5). 그리고 그에게 다시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도록 자신의 육체에 할례를 행하도록 지시하셨다(창17:10~11). 그는 그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할례는 옛사람을 장사지내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구약의 할례는 곧 신약의 세례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곧 육적인 몸을 벗는 것이요 자신의 옛사람을 죽음에 넘기우는 것이라고 하였다(골3:11~12). 즉 아브라함은 그때부터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그의 아내의 태가 이내 열렸고 아들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태어난 자식이 바로 '이삭'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할례는 오늘날 영적으로 회개와 같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행하면서 다시는 자신의 육체를 의지하지 않기로 결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로 결단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인생에 있어서 믿음의 세번째 분수령에 해당하는 시험을 잘 통과할 수 있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다 자란 청년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그의 아들을 모리아산 제단에 드린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자로 인정받게 된다.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떤 사람도 온전한 사람이 없다. 그리고 처음부터 견고한 믿음을 가진 자도 없으며,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초지일관 같은 믿음을 가진 자도 없다. 다들 아브라함처럼 작은 믿음에서 출발하여 실수를 통해서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칭의의 과정 중간에 할례 곧 회개가 들어있으며, 결국에는 순종으로 칭의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받는 과정을 요약해 본다면, 사람은 칭의에서 시작하여 회개와 순종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구원의 문을 여시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바로 전능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뭔가를 잘 해서 칭의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이라고 고백한 것이 칭의의 시작이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에게 거저 칭의의 은혜를 주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칭의를 주시기 위해 자신이 대신 피를 흘리셔야 했다. 우리는 오직 메시야의 피로 말미암아 칭의를 받고 구속을 얻고 구원을 얻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칭의를 선물로 주시기 위해 하신 일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인간의 죄값은 하나님의 목숨값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칭의를 선물하시기 위해 엄청난 희생의 댓가를 지불하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칭의를 너무나 쉽게 생각한다. 그리고 함부로 죄를 짓는다. 그러지 말라. 칭의는 분명 하나님의 선물이 맞다. 죄된 본성을 가진 인간치고 칭의를 스스로 얻어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일은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결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칭의는 하나님이 행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주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와 '믿음'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우리 인간은 회개와 믿음으로 칭의를 얻고 결국에 가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다만 그 뒤 우리는 순종을 통해서 내 자신이 구원을 향해 바로 나가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믿음과 행위를 통해 얻게 된다고 말하지 말라. 행위를 구원에 집어넣는 순간 그때부터 우리에게 공로가 끼어들어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에 베푸신 구원에 대한 응답일 뿐 그것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아브라함의 믿음도 처음부터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넘어지면서 다시 할례를 통해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었다. 그리고 결국에 순종을 통해 그의 믿음이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은 비단 아브라함의 경우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리에게도 해당된다. 우리도 처음부터 온전하고 견고한 믿음을 소유하하지는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칭의를 선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인 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직접 엄청난 희생의 댓가를 지불해서라도 우리에게 칭의를 주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나깨나 오직 예수님, 오직 하나님만을 붙들어야 한다. 그분의 희생을 찬양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를 노래해야 한다. 그것이 칭의를 선물로 받아누리게 될 우리의 반응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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